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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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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에 가는 후지와라 씨의 후손으로, 12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일본의 섭정 및 관백을 배출한 명문 귀족 가문이다. 가문의 시조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아들인 고노에 모토자네이며, 교토의 고노에 오지에서 유래된 이름을 사용했다. 가마쿠라 시대에 5섭가 중 하나로 분할되었으며, 무로마치 시대에는 고세이가의 으뜸가는 지위에 올랐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화족 제도로 편입되어 공작위를 받았으며, 고노에 후미마로는 3차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당주는 고노에 타다테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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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가
가문 정보
성씨고노에(近衛)
로마자 표기Konoe
본관후지와라 씨 (藤原氏)
후지와라 북가 (藤原北家)
주요 봉록여러 직위
창시자고노에 모토자네
창립 연도12세기
해체현재 존속
분가다카쓰카사 가문 (鷹司家)
도키와이 가문
미야가와 가문
역사적 배경
출신지야마시로 국 (山城国) 헤이안쿄 (平安京)
근거지야마시로 국 헤이안쿄
도쿄 부 (東京府)
주요 인물
인물고노에 모토미치 (近衛基通)
고노에 히사미치 (近衛尚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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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오 씨 (多羅尾氏)
기타미즈타니가와 가문

2. 역사

고노에 이에자네 (1179–1242)의 후손을 자처하는 고노에 씨는[1] 가문의 이름은 이에자네의 할아버지 고노에 모토자네가 살던 교토의 "고노에 오지"(近衛大道)라는 길에서 유래했다.[3] 처음에는 후지와라 씨 족벌 중 으뜸이었지만, 가마쿠라 시대에 5섭가로 분할되었고,[4] 각 가문은 세쇼 및 간파쿠를 맡을 권리를 가졌다.[1]

남북조 시대에 쓰네타다와 그의 사촌 모토쓰구 사이에 고노에 씨의 계승 분쟁이 벌어졌다. 이들은 각각 남조북조의 경쟁 궁정에서 섬겼으며, 1392년 남조가 정치적 영향력을 잃으면서 쓰네타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다.[5]

2. 1. 봉건 시대

고노에 모토자네, 고노에 가문의 창시자


고노에 가문은 황후를 최소 5명 배출했으며,[6][7][8][9][10] 1586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입양된 고노에 사키코도 그 중 한 명이다.[8] 가장 최근의 황후는 近衛維子|고노에 고레코일본어 (1760–1783)로, 고모모조노 천황과 결혼하여 딸 요시코 공주를 낳았다.[10]

17세기 초, 고노에 노부타다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어 가문이 위기에 처했다. 노부타다는 조카이자 고요제이 천황의 넷째 아들인 고노에 노부히로 (1599–1649)를 양자로 들여 딸과 결혼시켰다.[11][12] 이후 고노에 가문은 혈통을 이어갔으나, 1956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장남[13] 후미타카가 소련에서 적자 없이 사망하면서 위기를 맞았다.[14] 후미타카의 아내는 조카 고노에 타다테루를 양자로 입양했다.[15] 타다테루는 호소카와 씨 출신으로 세이와 천황의 후손이며,[17] 그의 형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타다테루는 1966년 다이쇼 천황의 손녀 야스코와 결혼했다.[18]

센고쿠 시대에 고노에 가문은 고셋케의 으뜸가는 지위에 올랐으며, 히사미치 등 석학과 정치가, 서예가를 배출했다.

고노에 사키히사1575년 (덴쇼 3년)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여 사쓰마국으로 도망쳐 시마즈씨의 보호를 받았지만, 1578년 (덴쇼 6년) 형세가 좋아져 귀경했다. 그의 아들 노부타다1591년 (덴쇼 19년)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관백 취임에 반대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 좌대신을 사임했다.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시작하자 종군을 자원하여 고요제이 천황에게 허락을 구했으나, 천황은 친한을 히데요시에게 주어 노부타다를 만류하게 했고, 히데요시는 마에다 겐이에게 노부타다를 제지하도록 명했다. 이후 노부타다는 주변과의 조화를 깨뜨린다는 이유로 사쓰마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사면되어 귀경, 히데요시 사후 관백이 되었다.

2. 1. 1. 가문의 기원과 5섭가 분립

고노에 모토자네를 시조로 하는 고노에 가문은 고노에 이에자네 (1179–1242)의 후손을 자처한다.[1] 가문의 이름은 이에자네의 할아버지 고노에 모토자네가 살던 교토의 "고노에 오지"(近衛大道)라는 길에서 유래했다.[3] 고노에 가문은 처음에는 후지와라 씨 족벌 중 으뜸이었지만, 가마쿠라 시대에 5섭가로 분할되었고,[4] 이들 가문은 각각 세쇼 및 간파쿠를 맡을 권리를 가졌다.[1]

남북조 시대에는 쓰네타다와 그의 사촌 모토쓰구 사이에 고노에 씨의 계승 분쟁이 벌어졌다. 이들은 각각 남조북조의 경쟁 궁정에서 섬겼다. 남조가 1392년에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을 때, 쓰네타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다.[5]

본성후지와라씨이며,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넷째 아들(실질적인 장남)인 고노에 모토자네를 시조로 한다. 그 아들인 모토미치교토 고노에의 북쪽, 무로마치의 동쪽, 고노에 오지로에 면한 저택을 "고노에도노"라고 칭한 것이 가문의 유래이다. 섭관가에는 고노에류와 구조류가 있지만, 고노에류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넷째 아들, 구조류는 여섯째 아들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먼저 후지 씨 장자를 맡은 것은 고노에류이며, 적류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2대 모토미치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으로서 친막부파인 숙부 구조 가네자네(구조 가문의 시조)에 대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대 고노에 이에자네는 겐포조큐 연간에 모란 문양을 수레 문양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후 고노에 모란이 고노에 가문의 가문이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중기에 이에자네의 넷째 아들 카네히라에 의해 다카쓰카사 가문이 세워졌다. 남북조 시대의 한 시기에는 고노에 가문은 이에히라류와 쓰네히라류의 2류로 분열되어, 남조 측의 고노에 쓰네타다 (이에히라의 아들)와 북조 측의 고노에 모토쓰구 (쓰네히라의 아들)가 대립했다.

2. 1. 2. 남북조 시대의 분열과 무로마치 시대

남북조 시대 고노에 가문은 쓰네타다와 그의 사촌 모토쓰구 간의 계승 분쟁을 겪었다. 이들은 각각 남조북조의 경쟁 궁정에서 섬겼다.[5] 1392년 남조가 정치적 영향력을 잃으면서 쓰네타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다.[5]

무로마치 시대에 고노에 가문은 니조 가문, 이치조 가문과는 달리 관백이 되어도 1, 2년 정도밖에 재임하지 못했지만,[26] 오닌의 난 무렵부터 니조 가문이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데 반해 그 지위를 높였다.[27]

남북조 시대에 고노에 가문은 이에히라류와 쓰네히라류의 2개 파로 분열되어, 남조 측의 고노에 쓰네타다 (이에히라의 아들)와 북조 측의 고노에 모토쓰구 (쓰네히라의 아들)가 대립했다.

2. 1. 3. 에도 시대

노부타다는 후계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에도 시대 초기에 여동생 마에코고요제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얻은 제4황자 시노미야를 양자로 맞이하여 고노에 노부히로로 삼았다.[11][12] 이후 고노에 가문은 황별섭가로 불리게 된다. 에도 시대 후기 고노에 가문의 영지는 2862석이었다.

에도 시대의 가신으로는 쇼다이후에 사이토 가문, 사타케 가문, 나카가와 가문, 키타코지 가문, 이마코지 가문, 신도 가문, 코야마 가문, 나카하라 가문, 마쓰이 가문이 있었고, 사문으로는 요시무라 가문, 시미즈 가문, 아베지 가문, 타테노 가문, 쿠리츠 가문, 기무라 가문, 마쓰이 가문, 하야시 가문, 카지 가문, 이마코지 가문, 나카무라 가문 등이 있었다. 보제사는 교토의 다이토쿠지였다.

고세이가 중에서도 고노에 가문만이 7, 8세의 원복 때 천황의 친필로 이름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고노에 타다히로는 고카쿠 천황으로부터, 고노에 타다후사는 닌코 천황으로부터 이름을 받았다.

무가 시대에 조정은 철저하게 억압받아 고노에 가문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좀처럼 나오지 못했지만, 바쿠마쓰가 되자 조정의 동향이 갑자기 주목받게 되었다. 외교든 내정이든 모든 문제는 교토의 의향 없이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고노에 타다히로는 고노에 가문의 당주로서 오랜만에 큰 정치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부침이 심해 안세이 대옥으로 실각했고, 이이 나오스케가 살해되자 복권했지만 공무 합체에 분주했기 때문에, 막말 후기 무렵 막부 붕괴와 함께 다시 실각하였다. 곧 사면되었지만 이미 60세를 넘은 자신의 정치 생명이 끝났음을 자각하고 그대로 은거했다.

2. 2.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거처를 옮기면서 교토의 공가(公家)들도 도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다히로는 잠시 교토에 머물렀고, 그의 적자(嫡子)인 고노에 타다후사가 정부 요직에 취임하면서 도쿄로 먼저 이주했다.[28] 타다후사는 1873년(메이지 6년) 6월 12일에 아버지의 은거(隱居)로 가독(家督)을 상속받았지만,[28] 다음 달 병으로 사망했다. 타다후사의 적자인 고노에 아쓰마로가 가독을 상속받았다. 아쓰마로는 아버지가 도쿄로 이주한 후에도 교토에서 다다히로에게 양육되었으나, 원복(元服)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궁내성(宮內省)에서 시종직(侍從職)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도쿄로 이주했다. 이때 다다히로도 함께 도쿄로 이주했다.

1869년(메이지 2년) 6월 17일, 행정관(行政官)의 명령으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고노에 가문도 구(舊) 공가로서 화족에 속하게 되었다.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이 제정되면서 아쓰마로는 공작 작위를 받았다. 1890년(메이지 23년) 귀족원이 개설되자 아쓰마로는 공작으로서 무투표로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원내 회파를 결성하여 귀족원 의장 및 동아 동문회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그는 갓 태동한 의회 정치를 육성하는 데 헌신했다. 아쓰마로가 이끌던 동아 동문회에는 전국에서 아시아 문제에 관심 있는 식자(識者)들이 모여들어 일본의 대(對)아시아 정책의 거점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시종장(侍從長)을 통해 아쓰마로에게 의견이 있으면 언제든 직접 보고하도록 명했는데, 이는 황실과 고노에 가문의 특별한 관계, 그리고 아쓰마로의 뛰어난 식견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아쓰마로는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로 알려져 있으며, 러일 전쟁 직전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자 국내에서 가장 강경하게 러시아와의 개전을 주장했고, 대(對)러시아 융화파로서 개전을 회피하려던 이토 히로부미를 "공로병(恐露病)"이라고 비판하며 대립했다.

아쓰마로 사후, 1904년(메이지 37년) 1월 장남 고노에 후미마로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귀족원 의원이 되어 궁내성종척료 심의원, 귀족원 의장 및 동아 동문서원 원장 등을 거쳐 쇼와 시대 전기에 세 차례 내각총리대신(제34대, 제38대, 제39대)을 역임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성립시키고 9대 전력 회사를 조직했다. 그의 동생 히데마로는 지휘자로 저명하며 자작위를 받았다.

오섭가(五攝家)의 필두였던 고노에 가문은 화족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하는 특별한 존재였으며, 고노에 후미마로는 천황 앞에서 다리를 꼬고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쇼와 20년) 11월, 고노에 후미마로는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작위 사퇴를 신청했지만, GHQ에 의해 전범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다음 해 12월에 음독 자살했다.

후미마로의 장남 후미타카는 종전 당시 소련군에 투항했다. 소련 당국은 후미타카를 스파이로 만들 계획을 세웠지만, 후미타카가 이를 거부하여 시베리아 억류를 당했고, 1956년(쇼와 31년) 사망했다.

현재 당주인 타다히로는 일본 적십자사 사장(현 명예 사장), 국제 적십자 적신월사 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타다히로는 호소카와 후작 가 출신으로, 호소카와 모리사다 후작과 후미마로의 차녀 아츠코 사이의 차남이며, 후미타카 부인의 양자가 되어 고노에 가문을 이었다. 전 내각총리대신(제79대)이자 전 구마모토현 지사(제45·46대)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타다히로의 친형이다. 타다히로의 부인은 미카사노미야 타카히토 친왕의 첫째 공주인 야스코이다.

타다히로의 장남이자 차기 당주인 타다히로(1970년 (쇼와 45년) 7월 18일 출생)는 NHK 직원 등을 거쳐 현재 영상 작가 및 궁중 가회 시(歌會始) 강사 등을 맡고 있다.

2. 2. 1. 메이지 유신과 화족 제도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가자 교토의 공가들도 속속 도쿄로 이주했지만, 다다히로는 잠시 교토에 머물렀다. 대신 다다히로의 적자 고노에 타다후사가 정부 요직에 취임하여 도쿄로 이주했다.[28] 타다후사는 1873년(메이지 6년) 6월 12일에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받았지만, 다음 달에 병으로 사망했다.[28] 타다후사의 적자 고노에 아쓰마로가 가독을 상속했다. 아쓰마로는 아버지가 도쿄로 이주한 후에도 교토에 머물며 다다히에게 양육되었지만, 원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궁내성에서 시종직으로 근무하게 되어 도쿄로 이주했다. 이때 다다히도 도쿄로 이주했다.

1869년(메이지 2년) 6월 17일, 행정관령으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고노에 가문도 구 공가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 메이지 3년 12월 10일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 1469석 5두였다. 메이지 9년 8월 5일,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의거하여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된 금록 공채 액수는 5만 9912엔 70전 3리(화족 수급자 중 114위)였다. 당시 아쓰마로의 거처는 도쿄시고지마치구니반초였다.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 제정에 따라, 아쓰마로는 공작에 서임되었다. 1890년(메이지 23년) 귀족원이 개설된 후, 아쓰마로는 공작으로서 무투표로 귀족원 의원에 취임하여 원내 회파를 결성하고, 귀족원 의장 및 동아 동문회 회장으로 활발하게 정치 활동을 펼쳤다. 그는 갓 태어난 의회 정치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다. 아쓰마로가 지휘하는 동아 동문회에는 전국의 아시아 문제에 관심 있는 식자들이 모여들어 일본의 대아시아 정책 거점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내명으로 시종장을 통해 아쓰마로에게 의견이 있으면 무엇이든 수시로 주상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황실과 고노에 가문의 특별한 관계 및 아쓰마로의 탁월한 식견을 평가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쓰마로는 국수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러일 전쟁 전야에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자 국내에서 가장 강경하게 러시아와의 개전을 주장하고, 대러시아 융화파로 개전 회피에 나선 이토 히로부미를 "공로병"이라고 비판하며 대립했다.

정계 거두였던 아쓰마로에게 접근하여 지우를 얻고 혜택을 얻으려는 무리들이 많았고, 고노에 가문 앞에는 알현하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아들 고노에 후미마로는 아이즈나 센다이 등 도호쿠 지방을 여행했을 때, 어린 자신에게 조아리고 삼배구고하는 어른들을 보며 우스꽝스러움과 함께 아버지의 권력의 거대함을 실감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아무도 다가오지 않아 고노에 가문은 불이 꺼진 듯 쓸쓸해졌고, 이러한 체험은 그의 인간 혐오적 성격을 부추겼다고 한다.

아쓰마로 사후 메이지 37년 1월, 장남 후미마로가 공작위를 계승하고, 다이쇼 5년부터 공작 의원으로 귀족원 의원이 되어 화족과 유위자의 자격 심사를 하는 궁내성종척료 심의원을 맡았다. 이후 귀족원 의장 및 동아 동문서원 원장 등을 거쳐 쇼와 전기에 3차례 내각총리대신(제34대, 제38대, 제39대)을 역임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성립시키고, 이 법규에 따라 지방 민간 전력 회사를 인수하여 9대 전력 회사를 조직했다. 동생 히데마로는 지휘자로 저명하며, 분가 화족으로서 자작위를 받았다.

오섭가의 으뜸이었던 고노에 가문은 화족 중에서도 정점에 서는 별격의 존재였으며, 고노에 후미마로는 천황 앞에서 다리를 꼬고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존재였다고 한다.

2. 2. 2. 쇼와 시대와 제2차 세계 대전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가자 교토의 공가들도 속속 도쿄로 이주했지만, 다다히는 잠시 교토에 머물렀고, 대신 다다히의 적자 고노에 타다후사가 정부의 요직에 취임하여 도쿄로 이주했다.[28] 타다후사는 1873년 (메이지 6년) 6월 12일에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받았지만, 다음 달에 병을 얻어 사망했다. 타다후사의 적자 고노에 아쓰마로가 가독을 상속했다. 그는 아버지가 도쿄로 이주한 후에도 교토에 머물며 다다히에게 양육되었지만, 원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궁내성에서 시종직으로 근무하게 되어 도쿄로 이주했다. 이 때 다다히도 도쿄로 이주하게 되었다.

1884년 (메이지 17년) 화족령 제정에 따라, 아쓰마로는 공작에 서임되었다. 1890년 (메이지 23년) 귀족원이 개설된 후 아쓰마로는 공작으로서 무투표로 귀족원 의원에 취임하여 원내 회파를 결성하고, 귀족원 의장 및 동아 동문회 회장으로 활발하게 정치 활동을 펼쳤다. 갓 태어난 의회 정치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다. 또한 아쓰마로가 지휘하는 동아 동문회에는 전국의 아시아 문제에 관심 있는 식자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일본의 대아시아 정책의 거점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내명으로 시종장을 통해 아쓰마로에게 의견이 있으면 무엇이든 수시로 주상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황실과 고노에 가문의 특별한 관계 및 아쓰마로의 탁월한 식견을 평가한 것에 기인했다. 아쓰마로는 국수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러일 전쟁 전야 무렵,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국내에서 가장 강경하게 러시아와의 개전을 주장하고, 대러시아 융화파로 개전 회피에 나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공로병"이라고 비판하며 대립했다.

아쓰마로 사후 메이지 37년 1월에 장남 고노에 후미마로가 공작위를 계승하고, 다이쇼 5년 (1916년)부터 공작 의원으로 귀족원 의원이 되어, 화족과 유위자의 자격 심사를 하는 궁내성종척료의 심의원을 맡았으며, 그 후, 귀족원 의장 및 동아 동문서원 원장 등을 거쳐, 쇼와 전기에 3차례에 걸쳐 내각총리대신 (제34대, 제38대, 제39대)을 역임했다.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을 성립시키고, 동법규에 의해 지방의 민간 전력 회사를 인수하여 9대 전력 회사를 조직했다. 그의 동생 히데마로도 지휘자로서 저명하다. 히데마로는 분가의 화족으로서 자작위를 받았다.

오섭가의 으뜸이었던 고노에 가문은 화족 중에서도 정점에 서는 별격의 존재였으며, 고노에 후미마로는 천황 앞에서 다리를 꼬고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존재였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 (쇼와 20년) 11월에 고노에 후미마로는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 공작위 사퇴를 신청했지만, GHQ에 의해 전범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다음 해 12월에 복독 자살했다.

후미마로의 장남 후미타카는 종전 시 중포병 제3연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정전 명령에 따라 무장 해제하고 소련군에 투항했다. 후미타카가 후미마로의 장남임을 알게 된 소련 당국은 후미타카를 스파이로 만들어 일본 정계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지만, 후미타카가 거부했기 때문에 금고 25년의 판결을 받고 시베리아 억류를 받아, 쇼와 31년 (1956년) 10월 29일에 동토 속에서 고열을 내며 사망했다.

현 당주 타다히로는 일본 적십자사 사장 (현 명예 사장), 국제 적십자 적신월사 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타다히로는 호소카와 후작 가 출신으로 호소카와 모리사다 후작과 후미마로의 차녀·아츠코의 차남이며, 후미타카 부인 마사코의 양자가 되어 고노에 가문을 이었다. 또한, 전 내각총리대신 (제79대), 전 구마모토현 지사 (제45·46대)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타다히로의 친형에 해당한다. 타다히로의 부인은 미카사노미야 타카히토 친왕의 첫째 공주 야스코이다.

그의 장남이자 차기 당주인 타다히로 (쇼와 45년 7월 18일 출생)는 NHK 직원 등을 거쳐 현재는 영상 작가 및 궁중 가회 시에서 강사 등을 맡고 있다.

2. 2. 3. 전후의 고노에 가문

17세기 초 고노에 가문은 고노에 노부타다가 남자 후계자가 없어 위기를 맞았다. 그는 조카이자 고요제이 천황의 넷째 아들 고노에 노부히로를 입양했다.[11][12] 이후 고노에 가문의 혈통은 이어졌으나, 1956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장남[13] 후미타카가 소련에서 사망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14] 후미타카의 아내는 조카 고노에 타다테루를 양자로 들였다.[15] 타다테루는 호소카와 씨 혈통으로, 세이와 천황의 후손이다.[17] 그의 형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타다테루는 다이쇼 천황의 손녀 야스코와 결혼했다.[18]

도쿄시 요도바시구 시모오치아이의 고노에 공작 자택


같은 집의 한 방


도쿄시 고지마치구 나가타초에 있던 고노에 공작 별저


같은 집의 한 방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가자 교토의 공가들도 도쿄로 이주했다. 고노에 다다히로는 잠시 교토에 머물렀고, 그의 아들 고노에 타다후사가 정부 요직에 취임하여 도쿄로 이주했다. 타다후사는 1873년(메이지 6년)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받았지만[28], 곧 병으로 사망했다. 타다후사의 아들 고노에 아쓰마로가 가독을 상속받았다. 아쓰마로는 원복 후 궁내성에서 시종직으로 근무하게 되어 도쿄로 이주했고, 이때 다다히로도 도쿄로 이주했다.

1869년(메이지 2년)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생기면서 고노에 가문도 화족에 포함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12월 10일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 1469석 5두였다. 1876년(메이지 9년) 8월 5일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된 금록 공채 액수는 5만 9912엔 70전 3리였다(화족 수급자 중 114위). 당시 아쓰마로의 거처는 도쿄시고지마치구니반초였다.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 제정에 따라 아쓰마로는 공작에 서임되었다. 1890년(메이지 23년) 귀족원이 개설된 후 아쓰마로는 공작으로서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원내 회파를 결성하고, 귀족원 의장 및 동아 동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갓 태어난 의회 정치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다. 아쓰마로가 지휘하는 동아 동문회는 일본의 대아시아 정책의 거점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아쓰마로에게 의견이 있으면 수시로 주상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황실과 고노에 가문의 특별한 관계 및 아쓰마로의 탁월한 식견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아쓰마로는 국수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러일 전쟁 전야에 러시아와의 개전을 주장하며,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했다.

아쓰마로 사후, 1904년(메이지 37년) 1월 장남 후미마로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귀족원 의원이 되어, 궁내성종척료 심의원, 귀족원 의장 및 동아 동문서원 원장 등을 거쳐, 쇼와 전기에 3차례 내각총리대신(제34대, 제38대, 제39대)을 역임했다.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을 성립시키고, 9대 전력 회사를 조직했다. 그의 동생 히데마로는 지휘자로 저명하며, 자작위를 받았다.

고노에 가문은 화족 중에서도 정점에 서는 별격의 존재였으며, 고노에 후미마로는 천황 앞에서 다리를 꼬고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존재였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쇼와 20년) 11월, 고노에 후미마로는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 공작위 사퇴를 신청했지만, GHQ에 의해 전범으로 지정되어 다음 해 12월에 자살했다.

후미마로의 장남 후미타카는 종전 시 소련군에 투항했다. 소련 당국은 후미타카를 스파이로 만들 계획을 세웠지만, 후미타카가 거부하여 시베리아 억류를 받고, 1956년(쇼와 31년) 사망했다.

현 당주 타다히로는 일본 적십자사 사장(현 명예 사장), 국제 적십자 적신월사 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타다히로는 호소카와 후작 가 출신으로 호소카와 모리사다 후작과 후미마로의 차녀 아츠코의 차남이며, 후미타카 부인의 양자가 되어 고노에 가문을 이었다. 전 내각총리대신(제79대), 전 구마모토현 지사(제45·46대)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타다히로의 친형이다. 타다히로의 부인은 미카사노미야 타카히토 친왕의 첫째 공주 야스코이다.

그의 장남이자 차기 당주인 타다히로(1970년(쇼와 45년) 7월 18일 출생)는 NHK 직원 등을 거쳐 현재는 영상 작가 및 궁중 가회 시에서 강사 등을 맡고 있다.

3. 역대 당주

고노에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명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가문이다. 5섭가 중 하나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컸으며, 여러 명의 황후를 배출하기도 했다.

17세기 초 고노에 노부타다 대에 남자 후계자가 없어 위기를 맞았으나, 고요제이 천황의 아들 고노에 노부히로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이었다.

1956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장남 후미타카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으나, 조카 고노에 타다테루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이었다. 타다테루는 호소카와 씨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다이쇼 천황의 손녀 고노에 야스코와 결혼했다.

3. 1. 고노에 종가



고노에 씨는 고노에 이에자네(1179–1242)의 후손을 자처한다.[1] 가문의 이름은 이에자네의 할아버지 고노에 모토자네가 살던 곳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곳은 교토의 "고노에 오지"(近衛大道)라는 길에 있었다.[3] 고노에는 처음에는 후지와라 씨 가문 중 으뜸이었지만, 가마쿠라 시대에 5섭가로 분리되었고,[4] 5개의 가문 각각은 섭정(세쇼 및 간파쿠)의 지위를 맡을 권리를 가졌다.[1] 그 후 남북조 시대 동안 고노에 쓰네타다와 그의 사촌 고노에 모토쓰구 사이에 고노에 씨의 계승 분쟁이 벌어졌다. 그들은 각각 남조북조의 경쟁 조정에서 섬겼다. 남조가 1392년에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을 때, 쓰네타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분실되었다.[5]

고노에 가문 출신으로 최소 5명의 황후가 있었으며,[6][7][8][9][10] 1586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입양된 고노에 사키코가 그 중 한 명이다.[8] 고노에 가문 출신의 가장 최근 황후는 近衛維子|고노에 고레코일본어(1760–1783)로, 일본 제118대 천황인 고모모조노 천황과 결혼했고, 그들에게는 딸 요시코 공주가 있었다.[10]

17세기 초 고노에 가문은 고노에 노부타다가 그의 가문의 마지막이었고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에 위기에 처했다. 그는 그의 조카 중 한 명이자 고요제이 천황의 넷째 아들을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그 아이는 고노에 노부히로(1599–1649)로 개명되었고, 후에 노부타다의 딸과 결혼했다.[11][12] 그 이후로 고노에 가문의 혈통은 부활하여 1956년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장남[13] 후미타카가 적자 남성 후계자 없이 소련에서 사망했다.[14] 후미타카의 아내는 이후 후미타카의 누이동생의 둘째 아들인 조카 고노에 타다테루를 그들의 후계자로 입양했다.[15] 타다테루의 부계 혈통은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 호소카와 모리사다를 통해 호소카와 씨에서 이어지며, 세이와 겐지의 방계 가문이고 세이와 천황의 후손이다.[17] 그는 또한 형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있으며,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타다테루는 1966년 다이쇼 천황의 손녀인 고노에 야스코(전 미카사노미야 야스코)와 결혼했다.[18]

3. 2. 고노에 히데마로 가문

대수초상이름관계위계비고
1
고노에 히데마로고노에 아츠마로의 차남정사위[1]고요제이 천황 남계 12세
초대 자작
귀족원 의원
작곡가
지휘자
2--고노에 히데타케선대의 차남고요제이 천황 남계 13세
고노에 음악연구소 이사장
궁내청 식부직 악부 지휘자
3--고노에 하지메선대의 장남고요제이 천황 남계 14세
고노에 음악연구소 이사장


4. 가계도

대수이름출생-사망
1모토자네1143년 - 1166년
2모토미치1160년 - 1233년
3이에자네1179년 - 1243년
4카네츠네1210년 - 1259년
5모토히라1246년 - 1268년
6이에모토1261년 - 1296년
7이에히라1282년 - 1324년
8츠네타다1302년 - 1352년
9츠네히라1287년 - 1318년
10미치츠구1333년 - 1387년
11카네츠구1360년 - 1388년
12타다츠구1383년 - 1454년
13후사츠구1402년 - 1488년
14마사에1445년 - 1505년
15히사미치1472년 - 1544년
16타네이에1503년 - 1566년
17사키히사1536년 - 1612년
18노부타다1565년 - 1614년
19노부히로1599년 - 1649년
20히사츠구1622년 - 1653년
21모토히로1648년 - 1722년
22이에히로1667년 - 1736년
23이에히사1687년 - 1737년
24우치사키1728년 - 1785년
25츠네히로1761년 - 1799년
26모토사키1783년 - 1820년
27타다히로1808년 - 1898년
28타다후사1838년 - 1873년
29아츠마로1863년 - 1904년
30후미마로1891년 - 1945년
31후미타카1915년 - 1956년
32타다테루1939년 출생



고노에 가문은 고노에 이에자네(1179–1242)의 후손을 자처한다.[1] 가문의 이름은 이에자네의 할아버지 고노에 모토자네의 거주지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거주지는 교토의 "고노에 오지"(近衛大道)라는 길에 위치해 있었다.[3]

남북조 시대 동안 쓰네타다와 그의 사촌 모토쓰구 사이에 고노에 씨의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그들은 각각 남조북조의 경쟁 궁정에서 섬겼다. 남조가 1392년에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을 때, 쓰네타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다.[5]

17세기 초, 고노에 노부타다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에 고요제이 천황의 넷째 아들 고노에 노부히로(1599–1649)를 입양했다.[11][12]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장남[13] 후미타카가 1956년 소련에서 사망하면서,[14] 후미타카의 아내는 조카 고노에 타다테루를 후계자로 입양했다.[15] 타다테루는 세이와 천황의 후손이다.[17]

5. 고노에 저택 터

구(舊) 고노에가 저택(아이치현 니시오시)


에도 시대에 고노에가는 교토 교토고쇼 내, 가라스마 이마데가와에 위치해 있었다. 그 장소는 도지샤 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흙담이나 건물은 없지만, 큰 연못을 둘러싼 정원은 보존되어 있으며, 구조가 터의 구조 연못에 대응하여 고노에 연못이라고 불린다. 연못 주변에는 유명한 수양 벚꽃인 '고노에 벚꽃'이 있어, 벚꽃 구경 시즌에는 시민들로 붐빈다. 옆에는 가쓰라노미야 저택 터가 있으며, 이곳에는 흙담과 정문이 남아 있다.

나라현 사이다이지에는 신덴즈쿠리 양식의 고노에가의 만도코로 어전이 이전되어, 아이젠도(愛染堂)로 사용되고 있다. 아이치현 니시오성에는 고노에가의 다실(수키야) 건물과 다실 건물이 이전되어 있다.[33] 교토 도후쿠지 탑두(塔頭)・비샤몬도・쇼린지에는 대현관이 이전되어 현재에도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1940년 7월 19일 도쿄 스기나미구 오기쿠보의 고노에가 별저(別邸) 오키소에서 회담하는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 마쓰오카 요스케 외상, 요시다 젠고 해군상, 도조 히데키 육군상


고노에 후미마로가 거주하며, 전시(戰前)에 많은 밀담이 오갔던 도쿄 스기나미구 오기쿠보에 있던 고노에가의 별저 오키소는 현존하고 있으며, 오키소 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다.[34]

또한, 교토의 기타야마에는 고노에가의 교토 별저인 코잔소(虎山荘) 부지 내에 요메이분코가 있으며, 고노에가에 전래된 많은 국보를 포함한 귀중한 역사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6. 고노에 가문의 재산과 가정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 12월 10일에 고노에 가문의 가록은 현미로 1469석 5두로 정해졌다.[28] 1876년 (메이지 9년) 가록과 교환하여 발행된 금록공채 액수는 59912.703JPY로, 전체 화족 수급자 중 114위였다.[29] 이는 구 공가 화족 중에서는 산조가 (65000JPY), 이와쿠라가 (62298JPY), 구조가 (61071JPY}) 다음으로 4번째로 큰 금액이다.[30]

1889년 (메이지 22년) 메이지 천황은 구 오섭가( 고노에 공작가, 다카쓰카사 공작가, 구조 공작가, 니조 공작가, 이치조 공작가)에 총 100000JPY을 하사했다. 이는 황실과 특별한 관계에 있던 구 오섭가의 몰락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1894년 (메이지 27년)부터는 천황의 어수금으로 "구 당상 화족 혜휼 사금"이 창설되어 그 이자가 구 당상 화족에게 분배되었고, 고노에가는 구 당상가 공후작가로서 연 2회 900엔을 배당받았다.[31]

고노에가는 고노에 다다히로, 고노에 다다후사, 고노에 아쓰마로 3대에 걸친 활발한 정치 활동으로 빚이 늘었다. 1877년 (메이지 10년) 하반기에는 빚의 액수가 15000JPY에 달해 구 공가 화족 중 1위를 기록했다.[32] 고노에 후미마로는 "아버지(고노에 아쓰마로)의 정치 활동은 빚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고, 내가 14세에 아버지와 사별했을 무렵에는 우리 집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중략) 어떤 부자는 현금으로 갚지 못해 저당으로 족자 등을 내놓으면 무자비하게 두세 번씩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33]

고노에 공작 가문의 가직의 장은 가령이며, 그 아래에 가부 1명, 가종 3~4명, 현관지기, 마부, 가정, 심부름꾼 6~7명이 있었다. 여자 사용인은 노녀 4명, 약간기 2명, 노녀은거 2명, 중랑 5명, 오말 7명이었다.[1] 노녀나 중랑 등은 주인 부부와 그 아이들의 시중을 드는 것이 역할이며, 많은 경우 사족 출신 등 신분 있는 자들 중에서 뽑혔다. 주인의 의복은 세탁했지만, 자신들의 의복 세탁은 오말에게 시켰다. 노녀는 본명이 아닌, 시키시마, 이와세, 타마이, 치노 등 겐지나로 불렸다.[1]

6. 1. 봉건 시대 고노에 가문의 소령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넷째 아들(실질적인 장남)인 고노에 모토자네를 시조로 하는 후지와라씨헤이안 시대 말기에 섭관 가문의 영지 대부분을 총괄하였고, 이 영지는 장남인 모토자네에게 양도되었다. 모토자네 사후에는 고노에 모토미치가 이를 계승하여 고노에 가문의 영지가 성립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중기인 1253년 (겐초 5년) 10월에 작성된 『고노에 가문 소령 목록』에는 대번령·산소 등을 제외하고 153개 소령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종류개수설명
사적인 별상전지14개소
본소로서 일정한 득분을 징수하는 소령50개소
진지권을 보유하면서 연이 있는 사찰에 기진한 소령5개소
기본적인 연공 징수권을 사찰에 기진한 소령4개소
본소로서 장무를 진퇴하는 소령60개소
재지 영주를 청소로 하여 일정한 득분권을 가진 소령20개소



다만 사적인 별상전지 14개소 중 7개소는 타카쓰카사가가 고노에 가문에서 분가했을 때 타카쓰카사가의 영지가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는 고노에 가문도 분열되어, 고노에 이에히라 계열과 고노에 쓰네히라 계열의 2계열이 가문의 영지를 놓고 대립했지만, 주요 영지는 쓰네히라 계열의 고노에 모토쓰구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모토쓰구는 1336년 (엔겐 1년·겐무 3년) 11월에 북조로부터 셋쓰국 에나미노 장 이하 25개소의 소령을 안도받았지만, 이것이 당시 고노에 가문 영지의 전부는 아니었다.

센고쿠 시대 전기의 1478년 (분메이 10년)부터 1505년 (에이쇼 2년) 사이의 『고노에 가문 잡사 요록』에 따르면 장원 해체기의 이 시기에도 고노에 가문 영지는 40개소 전후의 당지행 소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란 속에서 쇠퇴는 피할 수 없었고, 1524년 (다이에이 4년)에는 불지행 소령이 당지행 소령을 수 배 상회하는 상태에 빠졌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하에 석고 지행제가 성립된 후에는 고노에 가문도 오다 씨와 도요토미 씨로부터 지행지를 받았다. 에도 시대에 들어선 후의 1601년 (게이초 6년)에는 도쿠가와 씨로부터 1795석 여의 지행을 받고, 그 후 2862석 여가 되었다.

6. 2. 메이지 이후의 재산 상황

유신 이후, 1870년 12월 10일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1469석 5두였다.[28]

1876년 (메이지 9년) 가록과 교환으로 발행된 금록공채 액수는 59912.703JPY였다. 이는 전체 화족 수급자 중 114위에 해당하며,[29] 구 공가 화족 중에서는 산조가 (65000JPY), 이와쿠라가 (62298JPY), 구조가 (61071JPY}) 다음으로 4번째로 큰 금액이다.[30]

1889년 (메이지 22년) 메이지 천황은 구 오섭가인 고노에 공작가, 다카쓰카사 공작가, 구조 공작가, 니조 공작가, 이치조 공작가에 총 100000JPY을 하사했다. 이는 황실과 특별한 관계에 있던 구 오섭가의 몰락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계기로 1894년 (메이지 27년)부터 천황의 어수금으로 "구 당상 화족 혜휼 사금"이 창설되어 그 이자가 구 당상 화족에게 분배되었고, 고노에가는 구 당상가 공후작가로서 연 2회 900엔을 배당받았다.[31]

고노에가는 고노에 다다히로, 고노에 다다후사, 고노에 아쓰마로 3대에 걸친 활발한 정치 활동으로 차입금이 늘어, 1877년 (메이지 10년) 하반기에는 차입금액이 15000JPY에 달해 구 공가 화족 중 1위를 기록했다.[32] 고노에 후미마로는 "아버지(고노에 아쓰마로)의 정치 활동은 차입금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고, 내가 14세에 아버지와 사별했을 무렵에는 우리 집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중략) 어떤 부자는 현금으로 갚지 못해 저당으로 족자 등을 내놓으면 무자비하게 두세 번씩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33]

6. 3. 고노에 공작 가문의 가정

고노에 공작 가문의 가직의 장은 가령이며, 그 아래에 가부 1명, 가종 3~4명, 현관지기, 마부, 가정, 그리고 심부름꾼 6~7명이 있었다. 여자 사용인은 노녀 4명, 약간기 2명, 노녀은거 2명, 중랑 5명, 오말 7명이었다[1]. 노녀나 중랑 등은 주인 부부와 그 아이들의 시중을 드는 것이 역할이며, 많은 경우 사족 출신 등 신분 있는 자들 중에서 뽑혔다. 주인의 의복을 세탁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의복 세탁은 오말에게 시켰다. 노녀는 본명이 아닌, 시키시마, 이와세, 타마이, 치노 등 겐지나로 불렸다[1].

7. 고노에 가문의 풍습

고노에 가문은 매우 검소한 식생활을 했다. 평소 식사는 한 술에 두 가지 반찬이었으며, 국은 거의 두부 맑은 장국이었고, 반찬은 삶거나 구운 생선과 향신료 뿐이었다. 게다가 국은 긴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 차가워지는 것이 흔했다고 한다. 재산에 비해 고용인이 많았기 때문에 생활을 절약해야 했던 것이 고노에 가문이 검소한 생활을 했던 이유였다. 옛 다이묘 화족 중에서도 부유하고 명성이 높았던 마에다 후작 가문에서 시집온 사다코 (고노에 후미마로의 계모)는 친가에 있을 때는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고노에 공작 가문의 검소한 식사에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1]

고노에 타다히로가 생존해 있던 시절, 고노에 가문에서는 3월의 딸의 명절에 히나단(雛壇)을 마련하지 않고, 홍모전을 다다미에 깔고 그 위에 히나 인형을 늘어놓았다. "내리비나는 일반적으로 천황 폐하를 본뜬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천황 폐하는 신이며, 그 모습을 베끼는 것은 불경하므로 천황 폐하일 리는 없다. 저 인형은 공가를 본뜬 것에 틀림없다. 공가의 수장인 고노에 가문의 인간이 공가의 인형을 단상에 장식하고 아래에서 우러러볼 이유는 없다."라고 했지만, 타다히로가 죽은 후에는 고노에 가문에서도 보통 히나단 위에 장식하게 되었다.[2]

메이지 시대 이후, 고노에 가문에서는 정월에 문송을 세우지 않고, 일장기를 세웠다.[3]

8. 시마즈 가문・쓰가루 가문과의 관계

사쓰마시마즈 가문과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주종 관계를 맺은 사이로, 무로마치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에도 교류는 계속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막부가 공가와 다이묘의 접촉에 주목했지만, 고노에 가문과 시마즈 가문의 관계를 막을 수는 없었다[1]。시마즈 가문 출신의 딸이 도쿠가와 쇼군 가문으로 시집갈 때 고노에 가문의 양녀가 된 후 시집을 갔는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어대소인 시게코나,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어대소인 케이코(덴쇼인)이 그 예이다.

히로사키 번주 쓰가루 가문과도 주종 관계를 맺었다. 1593년(분로쿠 2년)에 쓰가루 다메노부는 고노에 가문으로부터 가몬인 모란 문양과 족보를 하사받았다[2]。쓰가루 가문은 고노에 가문과의 교류를 통해 중앙의 정치 정세를 파악하여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고, 이는 여러 차례 성공으로 이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와라 정벌 때 가장 먼저 히데요시에게 신종했고,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고노에 가문과의 교류 덕분에 동군에 속했다. 보신 전쟁 때에는 오슈 20여 번이 정부에 반역을 시작한 것을 들은 고노에 타다히로가 사위인 쓰가루 번주 쓰가루 노부아키라가 이에 가담하는 것을 우려하여 편지를 보내 천하의 형세를 설명하며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그 결과 쓰가루 가문은 홀로 관군 편에 서서 관군인 아키타 번을 구원했다[3]。이 공적으로 쓰가루 노부아키라는 종1위훈1등에 서임되었다[4]。1878년에는 고노에 아쓰마로의 동생인 히데마로가 쓰가루 노부아키라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1916년에 노부아키라가 사망하자 백작위를 계승했다[5][6]

참조

[1]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1906
[2]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3] 서적 姓氏家系大辞典 第2巻 1934
[4] 서적 カラー版 イチから知りたい! 家紋と名字 SEITOSHA 2014-07-01
[5] 서적 闇の歴史、後南朝 後醍醐流の抵抗と終焉 角川学芸出版 2013-06-21
[6] 서적 Nipon o daï itsi ran https://archive.org/[...]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834
[7] 서적 史料綜覽: 鎌倉時代1–2 https://books.google[...] 東京大學出版會 1966
[8] 서적 Art and palace politics in early modern Japan, 1580s–1680s Brill 2011
[9] 서적 中近世の宗教と国家 岩田書院 1998
[10] 서적 歴代天皇列伝 日本人なら知っておきたい国家の歴史 PHP研究所 2008-05-24
[11] 서적 続々日本絵卷大成 中央公論社
[12] 서적 土佐光吉と近世やまと絵の系譜 至文堂 2011-07-12
[13]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14] 서적 Homecomings: The Belated Return of Japan's Lost Soldier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08-16
[15] 서적 細川護煕の決断―歴史を変える男 東経 1993-12-01
[16] 서적 系図研究の基礎知識―家系に見る日本の歴史 近藤出版社 1989
[17] 서적 寛政重脩諸家譜: 索引 https://books.google[...] 栄進舎出版部 1918
[18] 웹사이트 ご結婚により,皇族の身分を離れられた内親王及び女王 https://www.kunaicho[...] 2019-10-06
[19] 웹사이트 近衛(近衞)家(摂家) https://reichsarchiv[...] 2019-10-01
[20] 서적 Emperor and Aristocracy in Japan, 1467–168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2-07-31
[21] 웹사이트 常磐井家(真宗高田派専修寺) https://reichsarchiv[...] 2019-10-06
[22] 웹사이트 第31期会長・副会長・理事長・事務総長ご紹介 http://www.jbf.ne.jp[...] 2019-10-07
[23] 웹사이트 水谷川家 https://reichsarchiv[...] 2019-10-06
[24]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下巻 Kasumi Kaikan 1996
[25] 웹사이트 近衛秀健氏死去 宮内庁式部職楽部指揮者 https://www.47news.j[...] 2019-10-07
[26] 서적 摂関家の中世
[27] 서적 摂関家の中世
[28] 문서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上p605
[29] 문서 久我通言의 차남
[30] 문서 薩摩藩主島津重豪의 삼녀
[31] 문서 有栖川宮幟仁親王 양자의 후, 常磐井円禧의 양사자. 忠房의 자・尭猷을 양자로 한다.
[32] 문서 薩摩藩島津家一門島津忠剛의 장녀→薩摩藩主島津斉彬의 양녀→近衛忠煕의 양녀→徳川家定의 御台所
[33] 웹사이트 旧近衛邸 http://nishiokanko.c[...] 西尾市観光協会 2021-05-05
[34] 웹사이트 荻外荘の歴史 https://www.city.sug[...] 杉並区 202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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