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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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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배는 1932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나 영등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과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당선되어 6선을 지냈으며, 신한민주당 당기위원장 시절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며 '사무라이 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 선관위원장을 역임했으나, 노무현 후보 지지율 하락 이후 정몽준을 지지하기도 했다. 제16대 총선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사퇴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2013년 담도암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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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1932년)
기본 정보
이름김영배
한자金令培
출생일1932년 12월 23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논산군
사망일2013년 4월 27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학력영등포공업고등학교 졸업
종교천주교(세례명: 바오로)
군복무1955년 육군하사 전역
본관김해
가족
자녀1남 1녀
경력
의원 선수6선
의원 대수10·12·13·14·15·16
주요 경력6선(10·12·13·14·15·16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사무총장
평화민주당 사무총장
국회 초대 노동위원장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신민주연합당 원내총무
신민주연합당 훈련원장·당기위원장
제15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열린우리당 상임고문(2006년)
민주당 전임고문(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전임고문(2007년)
정당
정당무소속
지역구
지역구서울 강서구(10·12)
서울 양천구 을(13·14·15·16)
기타

2. 생애

1932년 12월 23일, 일본 제국 조선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남북한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후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영등포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육군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 1955년에는 육군 하사 예비편으로 복무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과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1]

1978년 12월 12일제10대 총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당선되어 이후 국회의원 6선을 지냈다. 외모와 강경한 성격으로 인해, 특히 1987년 신한민주당 당기위원장 시절 당 측이 주장한 직선제 개헌에 맞서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이철승이택희에 대한 제명 처분을 강행한 후 “사무라이 김(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2][3]

2002년 초,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 국민경선(전국 순회 경선) 선관위원장을 역임하며, 매주 주말 저녁에 노무현의 승리를 발표하여 주목받았다. 그러나 중간에 노무현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반노무현으로 돌아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 회장을 맡아 정몽준을 지지했다. 한때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 소속 의원들과 집단 탈당했지만,[4] 결국 노무현으로의 단일화 결정 이후 복당했다. 그러나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산악회를 조직하여 사전 선거운동을 한 것이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에 해당한다는 2003년 1월 법원의 판결을 받고,[5]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있던 같은 해 2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일석장학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2][3]

2013년 초, 3기 담도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계속했으나, 2013년 4월 27일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2]

저서로는 『오로지 한길만을(原文: 오로지 한길만을)』이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김영배는 1932년 12월 23일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1] 영등포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1]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육군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1955년 육군 하사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1] 이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정책과정과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1]

2. 2. 명예 박사 학위

한양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우석대학교에서 명예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정치 경력


  • 연합신문 기자와 대한체육회 강사를 거쳐 신민당에 참여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1]
  • 신민당 서울특별시 지부 부위원장, 정책연구실장, 원내부총무 등을 역임하였다.[1]
  •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1], 신한민주당 정무위원 및 당기위원장을 역임했다.[1][2][3]
  • 1978년 대한민국 제10대 총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고, 이후 6선을 지냈다.[2][3]
  • 신한민주당 당기위원장 시절, 당의 직선제 개헌 주장에 맞서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이철승, 이택희에 대한 제명 처분을 강행하여 "사무라이 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3]
  • 이후 신한민주당 훈련원장[1], 통일민주당 사무총장[1], 평화민주당 사무총장[1]을 역임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제13대 국회 전반기 노동위원회 위원장,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신민주연합당 원내총무를 지냈다.[1]
  •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새정치국민회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새정치국민회의 개혁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1]
  • 제15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부의장을 지냈고,[1]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을 역임했다.[1]
  • 2002년 대선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전국 순회 경선) 선관위원장을 역임하며, 매주 주말 저녁에 노무현의 승리를 발표하여 주목받았다.[4] 그러나 중간에 노무현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반노무현으로 돌아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 회장을 맡아 정몽준을 지지했다.[4]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 소속 의원들과 집단 탈당했지만, 노무현으로의 단일화 결정 이후 복당했다.[4]
  •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산악회를 조직하여 사전 선거운동을 한 것이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에 해당한다는 2003년 1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5]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있던 같은 해 2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했다.[2][3]

3. 1. 초기 정치 활동 (신민당)

김영배는 연합신문 기자와 대한체육회 강사를 거쳐 신민당에 참여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1] 신민당 서울특별시 지부 부위원장, 정책연구실장, 원내부총무 등을 역임하였다.[1] 1978년 대한민국 제10대 총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당선되어 국회의원 6선을 지냈다.[2][3]

3. 2. 민주화 운동 참여

김영배는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 신한민주당 정무위원 및 당기위원장을 역임했다. 특히 신한민주당 당기위원장 시절, 당의 직선제 개헌 주장에 맞서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이철승, 이택희에 대한 제명 처분을 강행하여 "사무라이 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신한민주당 훈련원장, 통일민주당 사무총장, 평화민주당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 3. 국회의원 활동 (13대 ~ 16대)

김영배는 신민당 원내부총무,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 신한민주당 정무위원 및 당기위원장, 신한민주당 훈련원장, 통일민주당 사무총장, 평화민주당 사무총장을 역임했다.[1] 제13대 국회 전반기 노동위원회 위원장,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신민주연합당 원내총무를 지냈다.[1]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새정치국민회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새정치국민회의 개혁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1] 제15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부의장을 지냈고,[1]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을 역임했다.[1]

1987년 신한민주당 당기위원장 시절, 당 측이 주장한 직선제 개헌에 맞서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이철승이택희에 대한 제명 처분을 강행하여 "사무라이 김"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2][3]

2002년 대선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전국 순회 경선) 선관위원장을 역임하며, 매주 주말 저녁에 노무현의 승리를 발표하여 주목받았다.[4] 그러나 중간에 노무현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반노무현으로 돌아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 회장을 맡아 정몽준을 지지했다.[4]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 소속 의원들과 집단 탈당했지만, 노무현으로의 단일화 결정 이후 복당했다.[4]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산악회를 조직하여 사전 선거운동을 한 것이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에 해당한다는 2003년 1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5]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있던 같은 해 2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했다.[2][3]

3. 4. 2002년 대선과 노무현 후보와의 관계

2002년 초, 김영배는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 국민경선(전국 순회 경선) 선거관리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과정에서 매주 주말 저녁 노무현의 승리를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노무현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 회장을 맡아 정몽준을 지지했다. 그는 한때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 소속 의원들과 집단 탈당했지만, 결국 노무현으로 단일화가 결정된 이후 복당했다.

3. 5. 정계 은퇴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산악회를 조직하여 사전 선거운동을 한 혐의( 선거법 위반)로 2003년 1월 법원에서 당선 무효에 해당하는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있던 2003년 2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일석장학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4. 정계 은퇴 이후

2003년 2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한 후 일석장학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2][3] 2013년 초, 3기 담도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계속했으나, 2013년 4월 27일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2] 저서로는 『오로지 한길만을』이 있다.

5. 저서

6. 역대 선거 결과

김영배는 1978년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 강서구에 출마하여 35,459표(22.49%)를 얻어 당선되었다. 1985년 대한민국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 166,973표(50.44%)를 득표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 양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34,866표(35.14%)를 얻어 3선 고지에 올랐다.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서 50,262표(43.37%)를 득표, 4선 의원이 되었다. 1996년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해 36,208표(38.60%)를 얻어 5선에 성공했고, 2000년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나서 39,446표(48.10%)를 획득, 6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3-12
[2] 웹사이트 ‘동교동계 원로’ 김영배 전 국회부의장 별세 https://www.hani.co.[...] 2013-04-28
[3] 웹사이트 [삶과 추억] '뚝심의 사무라이' 김영배 … DJ맨으로 6선 https://www.joongang[...] 2013-04-29
[4] 웹사이트 민주당 내 후단협 의원 11명 집단 탈당 https://news.kbs.co.[...] 2002-11-04
[5] 웹사이트 김영배 의원직 상실 위기,선거법위반 항소심서 벌금700만원 선고 https://www.seoul.co[...] 2003-01-15
[6] 뉴스 [부음] 김영배 전 국회 부의장 http://www.pbc.co.kr[...] 평화신문 201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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