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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프랑스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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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프랑스 관계는 15세기부터 시작되어 역사적으로 외교적, 군사적 갈등과 협력을 반복해 왔다. 18세기에는 표트르 1세의 프랑스 방문으로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으나, 나폴레옹 시대에는 갈등을 겪었다. 19세기에는 크림 전쟁에서 대립했고, 1890년대에는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통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20세기에는 소련 시대와 냉전을 거치며 대립했으나, 소련 해체 이후 관계를 재개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프랑스는 러시아에 제재를 가했고,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첩보 활동과 외교 공관 운영, 현대의 주요 이슈 등 다양한 측면에서 양국 관계가 전개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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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프랑스 관계
기본 정보
공식 명칭프랑스-러시아 관계
관계 유형양국 관계
외교 관계
프랑스 대사피에르 레비
러시아 대사알렉세이 메쉬코프
프랑스 대사관모스크바
러시아 대사관파리
역사적 맥락
관계 시작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왕국 시대부터
현대 관계
현재 상황복잡하고 다면적인 관계 (협력과 경쟁 공존)
주요 협력 분야
경제무역, 투자, 에너지 협력
문화문화 교류, 교육 프로그램
정치국제 문제에 대한 협의
주요 경쟁 분야
지정학적 이해관계동유럽, 시리아, 우크라이나
가치관민주주의, 인권에 대한 이견
최근 사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프랑스의 대러시아 제재 동참, 관계 악화
추가 정보
관련 문서프랑스의 대외 관계, 러시아의 대외 관계

2. 역사

18세기 러시아는 프랑스 지식인들을 받아들였으나, 이들은 종종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시대(1799–1815) 동안 양국은 중앙 및 동유럽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대규모 러시아 침공을 감행했으나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이는 나폴레옹의 몰락과 러시아의 동유럽 지배력 강화로 이어졌다. 이후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지만, 프랑스와 영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크림 전쟁(1854–1856)에서 러시아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

1890년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던 프랑스는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체결하여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 동맹은 영국과 함께 삼국 협상으로 발전하여,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함께 싸웠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러시아는 1918년 중앙 열강과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1930년대 프랑스는 부상하는 나치 독일에 맞서 소련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냉전(1947–1989) 시대가 도래했고, 양 진영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프랑스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 동맹의 일원으로서 미국을 지지했다.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양국 관계는 일정 수준을 유지했지만 우호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특히 돈바스 전쟁(이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어졌다)과 러시아의 서아프리카 지역 개입 증가 등 여러 문제로 인해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양국 국민들의 상호 인식에도 차이가 나타난다. 2017년 퓨 글로벌 태도 프로젝트 설문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 중 36%만이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보였고, 62%는 비우호적인 견해를 나타냈다.[1] 반면, 러시아 여론 조사 센터가 2018년에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는 러시아인의 81%가 프랑스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19%만이 비우호적인 견해를 보였다.[2]

2. 1. 18세기 이전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형성된 러시아의 중앙집권 국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지속적인 외교적, 군사적 대립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의 가톨릭 통치자들은 오랫동안 모스크바와의 직접적인 외교 관계 수립을 피했다. 프랑스에서 러시아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07년 위그노 출신 용병 자크 마르게렛이 저술한 "러시아 국가와 모스크바 대공국의 상태"가 출판된 이후였다. 이 정보는 저명한 역사가 자크 오귀스트 드 투(1553–1617)가 저술한 "그 시대의 역사"(1620)에 활용되었다.

1615년, 이반 콘디레프가 이끈 러시아 대사단이 루이 13세의 궁정을 방문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와 프랑스 간 외교 관계의 기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1668년 여름에는 표트르 포툠킨 재무관이 이끄는 러시아 대사관이 스페인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루이 14세 및 장-밥티스트 콜베르와 만나 양국 간 상호 이익이 되는 무역 관계 수립을 논의했다.

프랑스에 최초의 러시아 상주 외교 대표부가 설치된 것은 1702년 표트르 1세의 칙령에 의해서였다. 당시 표트르 1세는 잉글랜드 왕국스웨덴 제국의 접근에 대응하여 루이 14세와의 동맹 관계 구축에 관심을 보였다. 같은 해, 프랑스는 장 카지미르 발루즈를 대사로 임명하고, 차르는 표트르 포스트니코프를 파리에 파견하면서 양국 간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다.[3] 1717년 표트르 1세가 프랑스를 직접 방문한 것은 양국 간의 영구적인 외교 관계를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 관계는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가 1717년 젊은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를 방문하고 있다.


초기 양국 관계는 프랑스가 서유럽, 러시아가 동유럽의 지배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해관계 충돌은 적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했는데, 이는 암묵적으로 러시아를 견제하는 측면도 있었다.[3] 양국 사이에 직접적인 전쟁은 없었지만, 1733년~1738년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1740년~1748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서로 반대 진영에 서서 싸웠다. 반면, 1756년~1763년의 7년 전쟁에서는 프로이센에 맞서 동맹을 맺기도 했다.[4]

안나 이오아노브나 여제(재위 1730–1740) 시기, 러시아 궁정 내 독일인들의 영향력을 우려한 프랑스 외교는 1741년 궁정 쿠데타를 지원하여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즉위를 도왔다. 엘리자베타는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및 루이 15세 국왕에게 호의적이었고, 루이 15세와의 혼담이 오가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외교 사절로 파견된 자크-조아생 트로티, 라 세타르디 후작(1739-1744 복무)이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후 알렉세이 베스투제프-류민 재상의 노력으로 라 세타르디는 실각했고, 1748년경 러시아 내 친프랑스파의 영향력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경제적 교류는 미미했던 반면, 1717년 표트르 대제의 파리 방문을 기점으로 지적 및 문화적 교류는 활발해졌다. 엘리자베타와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지식인들을 러시아로 초청하여 교육과 학문 발전에 기여하도록 했다. 특히 1758년 이후 프랑스 예술가들은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8세기 중반 볼테르와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러시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표트르 대제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합리적이고 계몽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보았다. 그러나 드니 디드로를 비롯한 다른 영향력 있는 작가들은 러시아의 계몽주의 전통 부재, 중산층의 미성숙, 가혹한 독재 체제의 경향 등을 지적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5][6]

2. 2. 18세기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170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장 카지미르 발루즈를 러시아 대사로 임명했고, 러시아의 표트르 차르는 표트르 포스트니코프를 파리에 외교 사절로 파견했다. 당시 프랑스는 서유럽의 주도적인 국가였고, 러시아는 동유럽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양국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두 나라가 같은 전쟁에 참여하더라도 동맹군으로 함께 싸우거나, 적대국으로서 같은 전장에서 직접 맞붙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러시아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중해의 몰타에 관심을 보이면서 약간의 긴장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프랑스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3]

두 강대국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의 세력 균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했는데, 이는 암묵적으로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양국 사이에 직접적인 전쟁은 없었지만, 유럽 내 전쟁에서는 서로 다른 편에 서기도 했다. 예를 들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년~1738년)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년~1748년)에서는 서로 반대 진영에 속해 대립했다. 그러나 7년 전쟁(1756년~1763년)에서는 프로이센에 맞서기 위해 동맹을 맺기도 했다.[4]

경제적인 교류는 미미했지만, 지적인 교류는 표트르 대제가 1717년 파리를 방문한 이후 활발해졌다. 표트르 대제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타 여제와 예카테리나 여제 역시 프랑스 지식인들을 러시아로 초청하여 학문과 예술 발전에 기여하도록 지원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758년 이후 프랑스 예술가들은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존재했다. 볼테르는 러시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표트르 대제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계몽 사상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묘사했다. 반면, 드니 디드로와 같은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러시아의 계몽주의 전통 부재, 중산층 미성숙, 그리고 전제 정치의 경향을 지적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5][6]

2. 3. 프랑스 혁명 전쟁

1798년 1월부터 스웨덴의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중재 하에 프랑스 혁명 전쟁의 종결을 목표로 한 제2차 라슈타트 회의가 열렸으나, 이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책략으로 오스트리아는 회의를 이용하여 강화를 늦추고 대프랑스 동맹을 재건할 시간을 벌었다. 같은 해 이탈리아 원정을 마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영국인도의 연락을 끊기 위해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다.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육전에서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나일 해전에서 호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패배하여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부재한 틈을 타, 러시아영국,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1798년 12월 24일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1799년,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합세로 프랑스군은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 장 빅토르 마리 모로는 8월 제노바까지 후퇴했다. 라인 방면에서는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프랑스군이 3월 25일 스토케쉬 전투에서 패배하여 장바티스트 주르당은 해임되고 앙드레 마세나가 후임을 맡게 되었다. 스위스 방면에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 벌였지만, 마세나는 9월 25일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러시아는 이듬해 프랑스와 화평을 맺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영국프랑스1802년 3월 25일 프랑스 북부 아미앵에서 아미앵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종결되고 평화가 찾아왔으나, 이 평화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2. 4. 나폴레옹 전쟁

1798년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일 해전에서의 패배로 이집트에 발이 묶인 사이, 러시아영국,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제2차 대프랑스 동맹(1798년 12월 24일)을 결성하여 프랑스와 맞섰다. 1799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북부 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프랑스군을 압박했으나, 스위스 방면에서는 앙드레 마세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9월 25일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와 화평을 맺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은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803년 5월 16일,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었다. 1805년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 계획에 맞서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프랑스군은 울름 전투(10월 20일)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한 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알렉산드르 1세가 이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806년 러시아는 영국, 프로이센, 스웨덴 등과 함께 제4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했다.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은 1807년 2월 7일~8일 아일라우 전투에서 격돌했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을 격파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7월 7일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고,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참여하게 되었다. 1807년 10월 에르푸르트 회담에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을 대륙봉쇄령에 참여시키기 위해 러시아가 압력을 가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808년~1809년)으로 이어졌고, 패배한 스웨덴은 핀란드를 러시아에 할양하고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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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경제를 의존하던 러시아는 1810년 대륙봉쇄령을 어기기 시작했다.[8] 이는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는 러시아 원정의 빌미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러시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차르를 처벌하고 복종시키는 것이었다.[9] 러시아군은 퇴각하면서 초토화 작전을 펼쳐 프랑스군의 보급을 차단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고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 퇴각해야 했다. 철수하는 프랑스 대육군(La Grande Arméefra)은 러시아군의 추격과 추위, 굶주림으로 인해 궤멸적인 피해를 보았으며, 살아남은 병력은 10분의 1에 불과했다. 이 패배는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10]

장 샤를 랑글로아의 1839년작 ''스몰렌스크 전투''. 나폴레옹과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공이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 불타는 스몰렌스크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프랑스의 대패를 본 유럽 국가들은 1813년 2월, 프로이센과 러시아 주도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나폴레옹은 새로 징집한 군대로 초반에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 16~19일)에서 동맹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1814년 동맹군이 프랑스 본토로 진격하여 3월 31일 파리가 함락되자, 나폴레옹은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으로 퇴위하고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10]

나폴레옹 전쟁 이후 열린 빈 회의(1814–15)에서 러시아는 유럽의 보수적 질서를 재편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러시아는 신성 동맹을 제창하며 자유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반혁명 세력의 중심 국가로서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11] 이는 부르봉 왕정복고로 다시 프랑스를 통치하게 된 부르봉 왕가에게도 부합했다.

2. 5. 19세기: 갈등과 협력

빈 회의(1814–15)에서 러시아는 보수적이고 반혁명적인 세력의 지도자로서 주요 외교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부르봉 왕조가 왕정복고 이후 프랑스를 다시 통치하게 된 상황에 부합했다. 러시아는 혁명을 억누르려는 보수적인 유럽 협조 체제의 지도자였다.[11]

러시아와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그리스 반란(1821–1831)을 성공적으로 지원하는 등 협력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통치하의 소수 민족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정교회의 보호자를, 프랑스는 가톨릭교의 보호자를 자처했다.[12] 러시아는 시리아팔레스타인동방 정교회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고, 프랑스는 가톨릭 선교 사업을 지원했다. 다만 러시아의 영향력은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불신하는 그리스 주교들로 인해 제한적이었다.[13][14]

러시아는 동유럽 전역에서 1848년 혁명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보수주의 세력을 이끌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성공하여 자유주의적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았고, 그는 곧 스스로 제2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당시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는 러시아의 팽창주의, 군사력, 그리고 서유럽의 계몽주의와 대비되는 전근대적인 모습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크림 전쟁(1854–1856)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것에 대한 대중적 지지로 이어졌다.[15][16]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같은 다민족 국가 내 소수 민족의 독립을 지원하는 '민족주의 원칙'(principe des nationalités프랑스어)을 선호했는데, 이는 러시아 차르 정권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러시아의 영향력에 도전하며 영국과 함께 크림 반도를 침공했고,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를 패배시켰다.

크림 전쟁 중 말라코프 전투, 1855년


크림 전쟁 이후, 나폴레옹 3세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여 1859년 3월 비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일 경우, 러시아가 프랑스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7] 역사가 A. J. P. Taylor는 이 조약이 "나폴레옹의 승리였으며, 실제로 이탈리아 통일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한다.[18] 그러나 1863년 폴란드에서 1월 봉기가 발생하자, 프랑스는 러시아에 개혁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이는 1859년 조약의 파기로 이어졌다. 반면,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폴란드 문제 등에서 러시아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시 러시아가 중립을 지키는 배경이 되었다.[19]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외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공화정 프랑스에 적대적이었고 독일에 우호적인 경향을 보였다. 1870년대와 1880년대의 제1차 및 제2차 삼제 동맹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묶어 프랑스 제3공화국에 대항하여 유럽의 군주제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독자적으로 독일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른 강대국과의 동맹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역시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노력했다.[20]

1892년 크론슈타트에 있는 프랑스 함대


1901년 프랑스에 있는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니콜라이 2세


정치적으로 프랑스 내부는 군주주의와 공화주의로 양극화되어 있었다. 초기 공화주의자들은 러시아와의 동맹에 회의적이었는데, 이는 당시 국제 문제에 대한 양국의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또한, 드레퓌스 사건에서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을 때 러시아는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으로 인한 고립 상태에 점점 더 큰 좌절감을 느꼈다.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을 통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손을 잡았고, 프랑스의 독일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번번이 거절당했으며, 1900년대 들어서는 모로코 위기를 둘러싸고 독일과의 전쟁 위협까지 고조되었다. 영국은 여전히 '화려한 고립'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0년 독일의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1892년 러시아와의 재보험 조약을 갱신하지 않으면서 러시아 역시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러시아는 강력한 독일군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 동맹이 필요했고, 프랑스는 고립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로 러시아를 주목하게 되었다. 또한, 교황 레오 13세는 독일의 반가톨릭주의 정책에 반발하여 프랑스와 러시아의 화해를 외교적으로 지원했다. 경제적으로도 러시아는 철도와 항만 건설 자금이 절실했는데, 독일 은행들이 대출을 거부한 반면 프랑스 은행들은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대표적으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 지원이 있었다. 독일에게 거절당한 러시아는 1891년부터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조심스럽게 추진했고, 프랑스 역시 동맹 제안에 큰 관심을 보였다.[21]

1891년 8월, 프랑스와 러시아는 유럽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이 나타날 경우 상호 협의하기로 하는 '협의 조약'에 서명했다. 협상은 점차 진전되어 1894년 초, 양국은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공식 체결했다. 이 동맹은 독일이 두 나라 중 하나를 공격할 경우, 다른 한 나라가 자동으로 참전한다는 군사적 약속을 포함했다. 이는 독일에게 양면전선의 위협을 가함으로써 전쟁 도발을 억제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프랑스나 러시아 단독으로는 독일을 이기기 어려웠지만, 양국의 힘을 합치면 가능성이 있었다. 이로써 프랑스는 마침내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2][23] 동맹은 1897년까지 비밀로 유지되었으나, 프랑스 정부는 비밀 유지가 오히려 억제 효과를 약화시킨다고 판단하여 공개했다. 1898년 파쇼다 사건으로 영국에 외교적 굴욕을 겪은 후, 프랑스는 이 동맹이 반영국 동맹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2. 6. 20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1902년 영일 동맹이 체결되자,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병력 감축 합의를 파기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력했다. 같은 해 3월 16일, 양국은 상호 협정을 맺었다. 이후 발발한 러일 전쟁 (1904-1905) 동안 프랑스는 중립을 지켰다.

보스니아 위기 (1908-1909) 당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에 맞서는 러시아를 지원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는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니콜라이 2세는 동맹국의 지원 부족에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와의 동맹 파기까지 고려했으나, 다른 대안이 없어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깊어졌다. 러시아는 산업화를 추진했지만 자본이 부족했고, 프랑스는 러시아의 산업화를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금을 빌려주었다. 1913년까지 프랑스 투자자들은 러시아 자산에 120억 프랑을 투자하여, 프랑스는 러시아 제국의 최대 투자국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산업화는 이러한 프랑스 자본의 대규모 유입에 힘입은 바가 컸다.[25]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유럽의 군사 동맹 구도. 초록색은 삼국 협상, 황토색은 삼국 동맹을 나타낸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와 러시아는 영국과 함께 삼국 협상의 일원으로서 중앙 열강에 맞서 싸웠다. 1916년,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는 독일군이 베르됭 전투에 대한 공세를 멈추고 상당수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이동시키도록 만드는 성과를 거두었다.[26]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새로운 볼셰비키 정부는 1918년 중앙 열강과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로써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 관계는 사실상 파기되었다.

2. 7. 소련 시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국에서 탈퇴하고 중앙 열강과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프랑스는 1917년 12월, 볼셰비키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을 지원했다. 프랑스는 백군의 캅카스군 지도자이자 남러시아 정부의 군사 독재자였던 표트르 브란겔을 러시아의 합법적인 국가 원수로 인정하기도 했다.[27]

1930년대 나치 독일의 급격한 세력 확장은 프랑스와 소련 양국에게 군사 동맹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고, 1935년 5월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집단 안보를 중시했던 소련의 외무 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프랑스 및 영국과의 긴밀한 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했다.[28]

제2차 세계 대전독일이 1941년 소련을 침공하자, 샤를 드 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는 소련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1944년 12월, 드 골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양국 간 동맹 및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전후 냉전 구도가 형성되면서 1955년에 폐기되었다.[2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 시대에 프랑스는 공산주의 확장에 맞서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 동맹에 가담하여 소련과 대립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양국 관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1985년 10월 프랑스를 방문했다.

2. 8. 1991년 이후: 현대의 관계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오른쪽)와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2008년).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공산주의 몰락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30] 프랑스와 러시아는 새로운 양자 관계를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1992년 2월 7일, 프랑스는 러시아를 소련의 후계 국가로 공식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31] 당시 프랑스 정부는 양국 관계가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앞으로도 강력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설명했지만,[31] 실제 관계는 기대만큼 우호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30]

2008년 러시아-조지아 전쟁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는 조지아의 영토 보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가 사르코지가 중재한 철군 및 조지아 영토 내 정부 승인 관련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도 프랑스 측의 별다른 항의는 없었다.[32]

양국 관계에서 주요 사안 중 하나는 2010년 프랑스가 미스트랄급 강습 상륙함을 러시아에 판매하기로 한 계약이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방 세계와 러시아 간의 첫 대규모 무기 거래였다.[33] 그러나 이 계약은 폴란드, 발트 3국,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 주변국들의 안보 우려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직면했다.[32] 결국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분쟁이 발생하자, 프랑스는 2015년 계획된 판매를 중단했고,[34] 해당 함정들은 이집트에 판매되었다.[35]

블라디미르 푸틴에마뉘엘 마크롱이 러시아에서 열린 2018년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참석한 모습


한편, 프랑스와 러시아는 ISIS라는 공동의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다. 양국 모두 ISIS로부터 공격을 받자,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테러 조직에 맞서기 위해 양국 군대 간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국제 사회에 "테러리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모든 세력을 하나의 거대한 연합으로 모으자"고 촉구했다.[36] NATO 회원국인 프랑스가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협력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받았다.[37] 프랑스 언론들은 ISIS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양국의 첫 공동의 적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38] 러시아의 한 신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방과 소련이 이념적 차이를 극복했던 것처럼, ISIS가 새로운 공동의 적이 될 수 있을지 주목했다.[39]

그러나 양국 관계의 근본적인 신뢰는 깊지 않았다. 2015년 YouGov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격파하는 데 소련이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믿는 프랑스인은 15%에 불과했는데, 이는 전쟁 직후인 1945년 5월 조사 당시의 57%에서 크게 감소한 수치였다.[40] 또한 2020년 8월에는 프랑스군 고위 장교가 러시아 정보기관에 기밀 정보를 넘긴 혐의로 조사를 받는 사건이 발생하여 양국 간 불신을 보여주었다.[41]

2022년 2월 7일 크렘린에서 열린 대형 테이블에서 마크롱과 푸틴의 만남. 푸틴의 건강 염려증이 드러났다는 해석도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2022년 2월,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만나 우크라이나 동부에서의 휴전을 위한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합의를 시도했다.[42] 양국 외무장관 회담도 예정되었으나,[42] 결국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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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 이후 프랑스는 다른 EU 국가들과 함께 러시아에 강력한 제재를 부과했고,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를 포함한 모든 EU 회원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다.[43] 프랑스는 제재로 인한 러시아산 석유 수입 중단에 대비해 아랍에미리트와 대체 공급원 확보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45]

마크롱 대통령 집권 이후 러시아와의 관계는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전쟁이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하며 프랑스 국민들에게 에너지 절약을 촉구하는 등,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자국 내 대비책 마련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45] 2024년 1월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돕는 프랑스 용병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프랑스 대사를 초치하는 등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46]

양국 국민들의 상호 인식에도 차이가 나타난다. 2017년 퓨 리서치 센터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62%가 러시아에 비우호적인 견해를 보인 반면 (우호적 36%),[1] 2018년 러시아 내 여론 조사에서는 러시아인의 81%가 프랑스에 우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비우호적 19%).[2]

3. 첩보 활동

냉전 시대 동안, 소련의 KGB는 프랑스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적극적 조치를 활용했다. 당시 여론 조사에서 프랑스인들이 미국보다 소련에 더 많은 지지를 보였다는 결과는 이러한 공작이 어느 정도 성공했음을 시사한다.[49]

1980년, 프랑스 국내 정보국인 DST는 KGB 요원 블라디미르 베트로프를 이중 간첩으로 포섭했다.[47] 이후 DST는 미국 CIA, 캐나다 CSIS와 협력하여, KGB가 절도나 위장 회사를 통한 합법적 구매 방식으로 서방의 컴퓨터 기술을 확보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대응하여 이들 기관은 의도적으로 결함이 있는 컴퓨터 기술을 소련에 유입시키는 작전을 수행했다.[48]

프랑스 방첩 기관에 따르면, 2010년 프랑스에 대한 러시아의 첩보 활동은 1980년대 이후 최고 수준에 달했다.[50] 과거부터 현재까지 의심되거나 확인된 소련 및 러시아의 첩보 작전 사례는 다음과 같다.


  • 언론사 침투 및 선전 활동:
  • AFP: 미트로킨 문서에 따르면 6명의 요원과 2명의 기밀 연락책이 활동했다.[51]
  • ''르몽드'': KGB는 이 신문(암호명 VESTNIK)을 이용해 반미적이고 친소련적인 선전 내용을 프랑스 대중에게 퍼뜨렸다. 미트로킨 문서에는 두 명의 고위 ''르몽드'' 기자와 여러 기고자가 KGB 협력자로 기록되어 있다.[51] 자매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뮬러 수사에 대해 서방 언론 중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52][53]
  • La Tribune des Nations: 사실상 KGB가 직접 운영한 매체이다.[54]
  • 다양한 가짜 전기 출판 및 유포.[54]
  • 정치권 침투 및 공작:
  • 골주의 운동 침투: KGB는 다른 어떤 정치 운동보다 골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력 있는 요원을 침투시켰다.[55]
  • 샤를 드골 선거 운동 자금 지원: KGB가 고용한 사업가를 통해 드골의 선거 운동에 약 1,500만 프랑을 전달했다.[56]
  • 프랑수아 미테랑 측근 포섭: KGB는 미테랑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들을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57]
  •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 대상 허위 정보 공작: 퐁피두 대통령과 가까운 요원들은 그가 미국을 불신하도록 만들기 위해 조작된 정보를 유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58]
  • 장기 첩보 활동:
  • 피에르 샤를 파테: KGB 암호명 PECHERIN(후에 MASON)으로 활동하며 20년간 모스크바의 허위 정보 네트워크를 운영하다가 프랑스 방첩부에 의해 금융 거래 중 체포되었다.

4. 외교 공관



5. 현대의 주요 이슈

2017년 퓨 글로벌 태도 프로젝트 설문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 중 36%만이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62%는 비우호적인 견해를 보였다.[1] 반면, 러시아 여론 조사 센터가 2018년에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는 러시아인의 81%가 프랑스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19%만이 비우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나타났다.[2]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은 모두 ISIS로부터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이에 대응하여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ISIS에 대항하기 위해 양국 군대 간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국제 사회에 "이 테러 군대에 맞서 현실적으로 싸울 수 있는 모든 이들을 크고 단일한 연합으로 모으자"고 촉구했다.[36] NATO 회원국인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이러한 폭격 협력은 전례 없는 움직임으로 평가받았다.[37] 프랑스 언론은 ISIS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양국의 첫 공동의 적이라고 보도했으며,[38] 한 러시아 신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방과 소련이 이념적 차이를 극복했던 것처럼 ISIS가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을지 주목하기도 했다.[39]

그러나 양국 관계 인식에는 미묘한 차이도 존재한다. 2015년 YouGov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격파하는 데 소련이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믿는 프랑스인은 15%에 불과했는데, 이는 1945년 5월 같은 조사에서 57%였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감소한 수치이다.[40]

2020년 8월에는 프랑스 국방부 장관 플로랑스 파를리가 프랑스군 고위 장교 한 명이 러시아 정보기관에 기밀 정보를 유출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밝히는 사건도 발생했다. 해당 중령은 "심각한 보안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법적 절차를 밟게 되었다.[41]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긴장이 고조되던 2022년 2월 20일,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휴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42] 프랑스 대통령실인 엘리제궁은 양국 정상이 "현 위기에 대한 외교적 해결책을 선호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의 중요성"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또한 프랑스 외무장관 장이브 르 드리앙과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 간의 회담도 예정되었다.[42]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면서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프랑스는 다른 EU 국가들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고, 러시아는 이에 대응하여 모든 EU 회원국을 포함한 프랑스를 "비우호국 목록"에 포함시켰다.[43] 전쟁 발발 이후 에너지 문제가 부각되면서, 2022년 6월 프랑스 재무장관 브뤼노 르 메르는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대체하기 위해 아랍에미리트와 협상 중이라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 집권 이후 러시아-프랑스 관계는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프랑스 국민들에게 "우리 모두가 러시아 가스 없이 지내야 하는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마크롱 정부는 러시아 연방과의 관계 개선보다는 에너지 절약을 위한 "절약 계획"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45]

2024년 1월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프랑스 용병들이 우크라이나 측에서 싸우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프랑스 대사를 외무부로 초치하는 등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46] 또한 러시아의 서아프리카 지역 개입 증가 역시 양국 관계 악화의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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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RUSSIA AND FRANCE: THE PRESENT AND THE FUTURE https://wciom.com/in[...] Russian Public Opinion Research Center 201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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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The Grand Strategy of the Russian Empire, 1650–1831 2003
[5] 서적 Euro-orientalism: Liberal Ideology and the Image of Russia in France (c. 1740-1880) Peter Lang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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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Summits : six meetings that shaped the twentieth century https://www.worldcat[...] Basic Book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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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The struggle for mastery in Europe, 1848-191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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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France and the Great War, 1914-1918 2003
[22] 서적 France 1814-1919: The rise of a Liberal-Democratic Society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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