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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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흥우는 1883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한성부에서 성장한 인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개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독립운동과 사회 활동을 펼치며 신간회, YMCA 등에서 활동했으나, 일제강점기 중일전쟁 이후 친일 행위로 변절하여 비판을 받았다. 광복 후에는 우익 진영에서 활동하며 대한체육회 회장, 주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공사 등을 역임했으나,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다. 이후 반이승만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1959년 사망했으며,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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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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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신흥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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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신흥우 |
출생일 | 1883년 3월 26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북도 청원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
사망일 | 1959년 3월 15일 |
사망 원인 | 병사 |
국적 |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
별명 | 호는 금하(錦霞), 일본식 이름: 그레이 고우(高霊興雨) |
학력 |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
직업 | 종교인, 사회운동가, 계몽운동가, 정치인 |
종교 | 감리교 |
배우자 | 이재규(李梓奎) |
부모 | 신면휴 (아버지), 김씨 부인 (어머니) |
친척 | 형 신긍우, 신홍우 |
소속 | 협성회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계몽운동 |
2. 생애
신흥우는 1883년 3월 26일(음력 2월 18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나 한성부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신면휴에게 한학을 배우다 개화사상에 눈을 떠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익히며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 1896년 개신교에 입문, 협성회,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등에서 활동했다. 어린 시절 형 신긍우를 통해 이승만을 알게 되었으나, 해방 이후 이승만의 협력자에서 정적으로 변모한다. 윤치호와도 감리교계 패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1]
1901년 관립한성덕어학교 재학 중 학생 토론회에서 과격한 정치개혁을 주장하다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190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유학,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의학, 정치학, 경제학, 법률학 등을 공부했다. 1912년 귀국 후 윤치호의 권유로 망명을 포기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 이사, 배재학당 교장을 지냈다. 1914년부터 1919년까지 잡지사 공도사 사장으로 인쇄업에 종사했다.[1]
1919년 3·1 운동 당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2] 이후 조선체육회 창립에 참여, 제7대 회장을 역임하고, 1924년 농촌계몽사업, 1925년 기독교 시민윤리 강연, 1927년 신간회 활동, 1930년 브나로드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2]
1930년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을 조직했으나, 감리교 등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다. 1932년 범태평양조선협회를 결성, 《기독신보(基督申報)》 발간을 주도했다.[2] 1933년 윤치호의 일기에는 안창호, 여운형, 신흥우 등이 지역감정을 조장했다는 내용이 있으나, 안창호는 당시 수감 중이었으므로 사실과 다르다.[2]
중일전쟁 이후 수양동우회 사건과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 행위를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학도병 지원 독려 강연, 친일 논설 기고, 전쟁 협력 단체 참여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3]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4] 창씨개명했다.
광복 후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 제4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50년 주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제3대 공사를 지냈다.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는 경찰의 방해로 후보 등록을 하지 못했다.[1] 1957년 민주당 상임고문에 추대되어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1959년 3월 15일 사망했다.[1]
2. 1. 생애 초기
신흥우는 1883년 3월 26일(음력 2월 18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나 한성부에서 자랐다. 아버지 신면휴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개화사상에 눈뜨고 상경, 12세 때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 사상과 기독교,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1896년 개신교에 입문하고,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 청년부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또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소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소년기에 그의 형 신긍우를 통해 이승만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해방 직후 이승만의 협조자였으나 그 후 정적으로 돌변한다. 윤치호 역시 1910년대까지는 그의 충실한 동지였으나 감리교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다가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이후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등과 함께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 운동을 전개해나갔으나,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1901년 관립한성덕어학교 재학 시절 학생 토론회를 개최, 독일어학과 학생회 대표로 과격한 정치개혁을 주장하여 황제에 불충한 정치범으로 몰려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이승만과 함께 감옥 안에서 다른 죄수들을 상대로 교육 계몽 운동을 펼치고 영어 공부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1]
영어 실력이 출중했던 신흥우는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유학,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의대와 문리과대에 적을 두고 의학·정치학·경제학·법률학을 두루 전공하였다. 1912년 귀국 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하려 하였으나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 이사,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하였다.[1]
1914년 10월부터 1919년 3월까지 잡지사인 공도사(公道社) 사장으로 인쇄업에 종사하였다.[1]
-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학사 졸업[1]
- 1930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법학박사[1]
2. 1. 1. 출생과 초기 활동
1883년 3월 26일(음력 2월 18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나 한성부에서 자랐다. 관리인 아버지 신면휴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개화사상에 눈뜨고 상경, 12세 때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 사상과 기독교,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1896년 개신교에 입문하고,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 청년부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또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소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소년기에 그의 형 신긍우를 통해 이승만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해방 직후 이승만의 협조자였으나 그 후 정적으로 돌변한다. 윤치호 역시 1910년대까지는 그의 충실한 동지였으나 감리교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다가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이후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등과 함께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 운동을 전개해나갔으나,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2. 1. 2. 수학과 계몽운동
1901년 관립한성덕어학교 재학 시절 학생 토론회를 개최, 독일어학과 학생회 대표로 과격한 정치개혁을 주장하여 황제에 불충한 정치범으로 몰려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이승만과 함께 감옥 안에서 다른 죄수들을 상대로 교육 계몽 운동을 펼치고 영어 공부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1]영어 실력이 출중했던 신흥우는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유학,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의대와 문리과대에 적을 두고 의학·정치학·경제학·법률학을 두루 전공하였다. 1912년 귀국 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하려 하였으나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 이사,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하였다.[1]
1914년 10월부터 1919년 3월까지 잡지사인 공도사(公道社) 사장으로 인쇄업에 종사하였다.[1]
-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학사 졸업[1]
- 1930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법학박사[1]
2. 2. 일제 강점기 활동
신흥우는 1920년대까지 흥업구락부, 신간회,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YMCA) 등에서 활동하며 이상재와 비슷한 노선의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양에서 신병 치료를 이유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구설수에 올랐고, 이로 인해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2]이후에도 신흥우는 해외에서 3·1 운동을 알리고 이승만의 외교 중심 항일 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 창립에 참여하여 제7대 회장을 역임했고, 1924년부터 농촌계몽사업, 1925년 기독교 시민윤리 강연, 1927년 신간회 활동, 1930년 브나로드 운동 참여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2]
1930년 전필순, 함태영 등과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을 조직했으나, 감리교 등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다. 1932년 범태평양조선협회를 결성하고 《기독신보(基督申報)》 발간을 주도했으며, 조선총독부의 선교사 축출 의도에 맞서 교회 협력을 강조했다.[2]
1933년 윤치호의 일기에는 안창호, 여운형, 신흥우 등이 지역감정을 조장했다는 내용이 있으나, 안창호는 당시 수감 중이었으므로 사실과 다르다.[2]
중일전쟁 이후 신흥우는 수양동우회 사건과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학도병 지원 독려 강연, 친일 논설 기고, 전쟁 협력 단체 참여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3]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4] 태평양 전쟁 이후 창씨개명했다.
2. 2. 1. 독립운동과 사회 활동
귀국 후 1920년대까지 흥업구락부, 신간회,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YMCA) 등을 중심으로 이상재와 유사한 노선의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그러나 이 기간 중 1919년 거국적인 3·1 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계가 적극 참여했을 때 평양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가담하지 않은 일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감리교인들과 조선기독교청년회,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 등 그의 주변 세력이 대거 이 운동에 참가하는 와중에도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신흥우는 이때의 미심쩍은 행동으로 이듬해 배재고보 교사와 학생들에게 불신임을 받고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친일파로의 변신은 예고되지 않았다. 신흥우는 여전히 해외에서 열리는 행사에 대표로 참여하여 3·1 운동에 대해 알리고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이승만의 외교 중심 항일 운동을 뒷받침했다. 1920년 함태영, 여운형, 송진우 등과 함께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제7대 조선체육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4년부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농촌계몽사업 선도에 나서서 농촌의 빈궁 추방에 주력하였고, 1925년에는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에 저항하여 기독교 시민윤리를 홍보, 순회 강연을 하였다. 1927년 이상재, 이승훈, 허헌, 김병로, 조병옥, 오화영, 허정숙, 이갑성 등과 함께 민족좌우연합전선인 신간회에 참여, 신간회의 기독교계 대표 발기인으로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1930년부터는 브나로드 운동에도 가담하여 농촌 계몽, 문맹 퇴치 사업에도 동참했다.
2. 2. 2. 적극신앙단 조직
1930년 신흥우는 전필순, 함태영 등과 함께 기독교 내 단체인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을 조직했다.[2] 이는 이승만의 측면 지원 단체이자 정치적 후원 단체인 흥업구락부에 비기독교인이 많다는 점과, 정치와 거리를 둔 순수 기독교인만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신흥우의 기독교계 장악을 우려한 감리교를 비롯한 각 기독교 지도자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1932년 범태평양조선협회를 결성하였다. 전필순, 박인덕 등과 적극신앙단을 지도하면서 《기독신보(基督申報)》 발간을 주도하여 교회 여론 주도 역할을 했으며, 조선총독부가 서양인 선교사들을 잠재적 스파이로 몰아 축출하려는 의도를 파악하고 기독교 교회들의 협력을 다짐하기도 했다.
한편, 윤치호 일기 1933년 10월 4일자에는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말했다.[2]"라는 내용이 있다. 여운형, 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했다고 한다.[2]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안창호와 신흥우, 여운형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2] 그러나 안창호는 1932년 5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기 때문에, 안창호나 여운형, 신흥우 등이 윤치호에게 찾아가 그러한 제안을 했다는 것은 앞뒤 정황이 맞지 않는다. 윤치호가 이전에 안창호가 했던 말을 인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2. 2. 3. 변절과 부일 협력 문제
중일전쟁 이후 수양동우회 사건과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변절하여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였다.[3]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서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는 강연을 하고 친일 논설을 기고하였다. 황인종의 설움을 딛기 위해 신동아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는 등의 강연 내용이 남아 있다.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언론보국회 등 전쟁 협력 단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개최된 이화여자전문학교 후원회 창립총회에서 유억겸, 송진우 등과 함께 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4]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 권유에 따라 성명을 변경하였다.
2. 3. 생애 후반
광복 후 신흥우는 우익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남북협상론과 단정수립론이 대두되자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같은 해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7월 영어로 된 기독교 성향의 주간지 《유니언 데모크랫》(The Union Democrat)을 발간하였다.1949년 제4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50년 1월 주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제3대 공사에 임명되었으나, 5월 총선 출마를 위해 사직하고 귀국했다. 같은 해 5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한 뒤,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고문, 총무 등을 역임하며 반이승만 진영에서 활동했다.[1]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려 했으나 경찰의 조직적인 방해로 후보 등록을 하지 못했다.[1] 1957년 민주당 상임고문에 추대되어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1] 저서로는 《한국의 신생 (The Rebirth of Korea)》 등이 있으며, 1959년 3월 15일 병으로 급서하였다.[1]
2. 3. 1. 광복 이후
광복 직후 우익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남북협상론과 단정수립론이 나오자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그해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7월 영어로 된 기독교 성향의 주간지 《유니언 데모크랫》(The Union Democrat)을 발간하였다.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1949년 제4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50년 1월 주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제3대 공사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5월 총선 출마를 위해 사직하고 귀국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 3. 2. 최후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고문, 총무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반이승만 진영에서 활동했다.[1]1956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려 했으나 경찰의 조직적인 방해로 후보등록을 하지 못했다.[1] 1957년 민주당 상임고문에 추대되어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1] 저서로는 《한국의 신생 (The Rebirth of Korea)》 등이 있다.[1] 1959년 3월 15일 병으로 급서하였다.[1]
3. 사후
신흥우는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는 선정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 중 평신도 3인 중 한 명으로 신흥우를 포함시켰다.[5]
4. 저서
- 《한국의 신생 The Rebirth of Korea》
5. 논란과 의혹
신흥우는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12명을 선정했는데, 신흥우는 평신도 3인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5]
5. 1. 적극적 친일 논란
중일전쟁 이후 수양동우회 사건과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변절하여 적극적인 부일 활동을 시작했다.태평양 전쟁 중에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서 학도병 지원을 부추기는 강연과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황인종의 설움을 딛기 위해 신동아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는 등의 강연 내용이 남아 있다.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언론보국회 등 전쟁협력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3]
1939년 12월 18일 정동 이화여전 강당에서 열린 이화전문학교후원회 창립총회에서 25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4]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을 권유받자 성명을 변경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 중에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서 학도병 지원을 장려하고 적극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강연과 친일 논설을 발표했다. 그 중에는 황인종의 설움을 딛기 위해 신동아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는 등의 강연 내용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친일 행위를 한 것인지,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감리교 교단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6. 학력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학사 졸업
1930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법학 박사[1]
7.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신면휴 |
형 | 신긍우 |
형 | 신홍우 |
참조
[1]
서적
해방전후사의 인식 (1)
한길사
2004-05-20
[2]
문서
윤치호 일기
1933-10-04
[3]
서적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4]
서적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5]
뉴스
감리회, 교단 내 친일인사와 독립운동가 명단 발표 - 광복 60주년 기념 예배자료집 발간…친일인사 선정 근거 없고, 교단 차원 친일은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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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200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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