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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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응노는 대한민국의 서예가이자 수묵화가로,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전통 동양화 기법을 바탕으로, 콜라주, 추상 서예 회화, 군상(群像) 등 다양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프랑스 미술계에 동양화 기법을 알렸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고 국제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보여주며 한국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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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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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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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李應魯 |
아호 | 고암(顧庵, 顧菴)·죽사(竹士, 竹史) |
직업 | 화가, 대학 교수 |
분야 | 동양화가, 한국화, 서양화, 판화 |
국적 | 대한민국 → 프랑스 |
출생일 | 1904년 1월 12일 |
출생지 | 대한제국 충청남도 홍주군 홍천면 중리 386번지 |
사망일 | 1989년 1월 10일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경력 | |
경력 | 前 조선미술가협회 상임위원 |
가족 | |
부모 | 이근상(부), 김해 김씨 부인(모) |
형제 | 이흥노(아우) |
배우자 | 박인경(재혼, 1958년 ~ 1989년), 박귀희(이혼, 1936년 ~ 1958년) |
2. 생애
이응노는 1904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나 예산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홍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중퇴했다.[4] 정규 교육 대신 집에서 농사일을 도왔고, 용봉산, 덕숭산, 수덕사의 풍경을 그리면서 그림을 공부했다. 1920년부터 문인화가 송태회에게서 수묵화를 배웠다.[5][6]
1922년 서울로 이주하여 1923년부터 서화가이자 사진가인 해강 김규진에게서 사사하였다.[7]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 부문에서 입선하였으나, 이후 몇 년 동안은 수상하지 못하고 상점 간판 및 서예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다시 입선하였다.[9][10]
서예 및 사군자 부문이 폐지된 후에도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부문에서 연이어 입선하였고, 일제강점기 동안 계속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을 이어갔다.[11] 1930년대 초, 김규진의 전통적인 사군자 화풍을 넘어, 새로운 현대 동양화풍과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수묵화 풍경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13]
1935년 활동 범위를 일본으로 확장하여 일본미술협회전에서 수상했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수상하며 그의 수묵화에는 서양 풍경화의 영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14][15] 서양화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 일본으로 거처를 옮겨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사사하고, 본고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의 기초를 배우고 가와바타화학교에도 입학했다.[16][17][18] 1930년대 후반, 일본과 중국 심천의 여러 미술 전람회에서 작품이 채택되었고, 1939년에는 서울 화신백화점 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19]
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 도쿄의 신문 가게를 정리하고 1945년 3월 서울로 돌아왔다가 징집을 피해 예산으로 거처를 옮겼다.[20] 해방 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조선미술건설본부와 조선미술가협회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21] 또한, 동료 한국 예술가들과 단구미술원을 조직했다.[22]
1948년부터 1950년까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서울, 전주, 대전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꾸준히 전시회를 열었다.[23][24] 이 무렵 이응노는 추상 미술로 점차 전환해 갔다.[25] 1949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던 박인경을 만났다.[26]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박인경과 예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여러 전시회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1953년 7월 정전 이후 서울로 돌아와 개인전을 열고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 농경지, 시장, 가축 등 농촌 생활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을 선보였다.[27][28] 1957년 그의 작품은 록펠러 재단에 판매되어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고, 월드 하우스 갤러리와 5년 계약을 체결했다.[29] 프랑스 미술평론가 자크 라사뉴로부터 프랑스 이주 초청을 받았다.[30]
1958년 한국을 떠나기 전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박인경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31]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작별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전시는 한국 동양화의 미래를 제시했다고 여겨지며, 전통적인 수묵화의 해체와 이응노의 독특한 추상적인 필선 형성이 성공적으로 논의된 획기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34][35]
프랑스로 건너간 이응노는 1년간 독일에서 머물며 프랑크푸르트의 프레스텔 화랑과 쾰른의 보이세레 화랑에서 첫 유럽 개인전을 열었고, 본 미술관에서 박인경과의 합동전을 개최했다.[36][37] 프랑스에서 앵포르멜과 유럽의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적인 동양 재료를 사용한 독특한 현대 회화 기법으로 인정받았다.[38][39] 특히 구겨지고 잘리고 붙여진 화선지를 이용한 새로운 콜라주 기법을 개발하여 유럽과 한국 모두에서 찬사를 받았다.[40][41] 1962년 파리의 파케티 화랑과 계약을 맺고 콜라주 작품으로 파리에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열었다.[42] 콜라주 연작 외에도 서예적 형태와 한자를 실험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추상적 서예 회화로 발전하게 된다.[43][44]
이응노의 작품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 성공적인 개인전과 단체전을 개최했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에서 예술가로서 더욱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48] 1964년 세르뉘시 박물관에 파리 동양 회화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동양화를 가르치는 학생들을 모집하고 교육했다.[49]
1970년대 한국에서 출감 후 프랑스로 돌아온 이응노는 추상적 서예 회화에 더욱 집중했다.[50]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주로 수묵화 기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렸다.
이응노는 친자는 없었지만 첫 번째 결혼 생활 중에는 형의 둘째 아들을, 두 번째 결혼 생활 중에는 아들을 입양하였다.[53] 한국 전쟁 당시 이응노의 양아들은 북한으로 징집되어 교사로 일하며 생을 마쳤다.[54] 이응노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으로 여행을 갔는데, 이는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이어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 당국을 위해 동베를린에서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한국 국적의 예술가, 교수, 의사 등 약 190명을 기소했다.[55][56]
이응노는 유죄 판결을 받고 대전교도소에 2년 반 동안 수감되었고, 1969년 프랑스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57] 수감 중에도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사용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58][59]
1977년 이응노의 아내 박인경은 남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를 자그레브에서 북한으로 납치하려 한 사건의 공범으로 의심받았다. 이 사건으로 이응노는 한국 미술계와 완전히 단절되었고, 이응노와 박인경은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60]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이응노는 북한으로 가서 아들을 만났고, 1987년에는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61]
1989년 민주화 물결 이후 호암갤러리 주최, 중앙일보사 주관, KBS와 가나아트센터 후원으로 대규모 "고암 이응노전"이 열렸다. 이는 이응노와 그의 조국과의 관계 회복을 알리는 오랜 기다림의 결과였다.[62] 안타깝게도 그는 전시회 개막 하루 전인 1989년 1월 10일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성장 (1904년 ~ 1935년)
이응노는 1904년 충청남도 홍주군 홍천면 중리(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서 아버지 이근상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87] 어릴 적에는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와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를 거쳐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에서 성장하였다.[87]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홍성보통학교(현 홍성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퇴하였다.[4] 이후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용봉산, 덕숭산, 수덕사의 풍경을 그리면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5][6]1920년부터 문인화가 염재 송태회(1872–1942)에게서 수묵화를 배웠다.[5][6] 1922년에는 화가가 되기 위해 서울로 이주, 1923년부터 유명 서화가이자 사진가인 해강 김규진(1868–1933)에게서 사사하였다.[7] 김규진에게서는 '해강체'로 사군자를 그리는 것을 배웠고, 죽사라는 호를 받았다.[87]
1924년, 그의 수묵화 작품 '묵죽'(墨竹)이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 부문에서 입선하였다.[8] 그러나 이후 몇 년 동안은 수상하지 못했고, 그동안 상점 간판 및 서예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9][10] 1928년에는 공주, 대전 등지에서 활동하다 전주 중앙동에 정착하여 '개척사'라는 간판가게를 운영하였다.[87]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靑竹)과 '풍죽'(風竹)으로 입선하였다.[9][10] 1933년에는 규영 정병조에게서 고암이라는 호를 받았다.[87]
서예 및 사군자 부문이 폐지된 후에도, 이응노는 제11회, 제12회,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부문에서 연이어 입선하며 일제강점기 동안 계속 작품을 출품하고 수상하였다.[11] 1930년대 초, 김규진의 전통적인 사군자 화풍을 넘어, 새로운 현대 동양화풍과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수묵화 풍경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13]
2. 2. 일본 유학 및 활동 (1935년 ~ 1945년)
1935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신문배급소를 운영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동경 본향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했으며,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의 덴코화숙에서도 공부했다. 이들 학교는 정규 미술학교가 아닌 본과 입학을 위한 예비학교 같은 곳이었는데, 그는 서양미술의 소묘와 유화 기법을 연수했다.[88] 마쓰바야시 게이게쓰는 이응노에게 직접 대나무 숲에 가서 면밀히 그 생태를 관조할 것을 교시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필법이 너무나 제멋대로였으며 준거로서의 규범을 무시했거나 등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규 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받지 못했을 뿐 게으르거나 소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88]1935년 제95회 일본미술협회전에 풍죽으로 입선하였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 화원전에서 입선과 특선 또는 무감사로 계속 출품했다. 1939년에는 서울 화신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는데, 작품은 남화 신작들이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사군자에서 벗어나 대상을 사실주의적으로 탐구한 현실 풍경화가 주를 이뤘다.
1930년대 초 한국에서 전문 화가로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후, 이응노는 활동 범위를 일본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1935년 제95회 일본미술협회전(日本美術協会展, Nihon Bijutsu Kyokai Ten)에서 수상했고, 제27회와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수상하며 그의 수묵화에는 서양 풍경화의 영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14][15]
이응노는 서양화와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 일본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일본의 저명한 화가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 Matsubayashi Keigetsu, 1876~1963)에게 사사했으며, 본고회화연구소(本鄕繪畫硏究所, Hongo Kaiga Kenkyusho)에서 서양화의 기초를 배우고 도쿄의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畫學校, Kawabata School of Painting)에도 입학했다.[16][17][18] 1930년대 후반, 그는 일본과 중국 심천의 여러 미술 전람회에서 계속 작품이 채택되었고, 1939년에는 서울 화신백화점 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19]
2. 3. 귀국 및 한국 활동 (1945년 ~ 1958년)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 이응노는 충남 예산의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동생에게 경영을 맡기고 서울에 '고암화숙'을 개설하였다. 김영기, 배렴, 이유태, 장우성과 함께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으며, 조선미술가협회의 상임위원이 되었다.[21][22]1948년 홍익대학교에 부임하여 1950년 6월까지 재직하였다.[23] 1948년에서 1954년까지 대전, 광주, 홍성, 수원, 예산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54년에는 경주 서라벌예술대학의 동양화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1956년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을 출판하였다.
1954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폐단을 지적하고 국전 추천작가로 초대받는 것을 거절하였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기증되었고,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 자크 라사뉴로부터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하라는 초청을 받았다.[29][30]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 초대전에 동양화가로는 유일하게 초대받았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피난을 가기도 하였지만, 정전 이후 서울로 돌아와 피난민, 농경지, 시장, 가축 등 농촌 생활을 묘사한 작품들을 선보였다.[27][28]
1958년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박인경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기 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작별 전시회를 열었다.[31][32][33] 이 전시는 전통적인 수묵화의 해체와 이응노의 독특한 추상적인 필선 형성을 보여주며 한국 동양화의 미래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34][35]
2. 4. 프랑스 활동 및 국제적 명성 (1958년 ~ 1967년)
1958년 12월, 이응노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출국 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도불 기념 개인전을 열었는데,[32][33] 이 전시는 한국 동양화의 미래를 제시한 획기적인 전시로 평가받으며, 전통 수묵화의 해체와 이응노 특유의 자유롭고 리듬감 있는 추상적 필선이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았다.[34][35]1959년, 서독대사 리차드 허츠 박사의 주선으로 독일을 방문하여 쾰른, 본, 프랑크푸르트에서 1년간 체류했다. 이 기간 동안 본 시립미술관에서 이응노-박인경 부부전을 개최하고, 프랑크푸르트와 쾰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36][37] 1960년 1월 파리에 정착한 후에는 재불한국작가전에 출품하고, 미국 워싱턴 국제현대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파리 폴 파케티 갤러리의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파리에서의 초기, 이응노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버려진 컬러 잡지를 물감 대신 캔버스에 붙이는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붓글씨의 '획'과 같은 힘과 절도가 부여된 독창적인 콜라주 작품이 탄생했다.[40][41] 1961년, 그의 콜라주 작품 60호는 카네기 국제미술전에 출품되었다. 1962년에는 파리 폴 파케티 갤러리에서 '이응노, 콜라주' 초대전이 열렸고, 폴 파케티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고, 프랑스 파리 살롱 콩파레종에 참가했다. 또한, J. Lassaigne, M. Ragon, P. Schneider 3인의 평론가 추천으로 파리 막스 카가노비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독일 뮌헨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64년, 회갑을 맞은 이응노는 프랑스 화단의 예술가와 각계 인사의 후원으로 파리 세르뉘시 박물관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했다.[49] 같은 해 미국 피츠버그 카네기 국제미술제에 초대 작품을 출품하고, 스위스 오베르니에 누마가 갤러리와 파리 막스 카가노비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5년에는 브라질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48] 이후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과 스위스 누마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2. 5. 동백림 사건과 옥고 (1967년 ~ 1969년)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조작되었고, 이응노는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의 동베를린에 갔다가 납치되어 수감되었다.[89]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을 위해 동베를린에서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한국 국적의 예술가, 교수, 의사 등 약 190명을 기소했다.[55][56]신영복은 자신의 재판이 빨리 끝나 대전교도소에 수용되면 이응노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이응노가 프랑스 정부의 탄원으로 빨리 출소하여 만나지 못했다. 이응노는 유죄 판결을 받고 대전교도소에 2년 반 동안 수감되었고, 1969년 프랑스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57] 수감 중에도 이응노는 간장, 나무 도시락, 화장지, 볼펜, 쌀 등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사용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58][59]
2. 6. 석방 후 프랑스 활동과 타계 (1969년 ~ 1989년)
1983년 이응노는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였다.[60] 1985년 일본 도쿄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1977년 이응노의 아내 박인경은 남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를 자그레브에서 북한으로 납치하려 한 사건의 공범으로 의심받았다. 이 사건으로 이응노는 한국 미술계와 완전히 단절되었다.[60]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이응노는 북한으로 가서 아들을 만났고, 1987년에는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61]
1989년 한국의 민주화 물결 이후 호암갤러리 주최, 중앙일보사 주관, KBS와 가나아트센터 후원으로 대규모 "고암 이응노전"이 열렸다. 이는 이응노와 그의 조국과의 관계 회복을 알리는 오랜 기다림의 결과였다.[62] 안타깝게도 그는 전시회 개막 하루 전인 1989년 1월 10일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작품 세계
이응노는 화가로서 경력을 쌓고 예술적 추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1922년 서울로 이주하여 1923년부터 김규진에게서 사사하였다.[7] 1920년대에는 주로 '해강체'로 사군자를 그리는 것을 배웠다. 1924년 <묵죽>(墨竹)이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 부문에서 입선하였으나,[8] 이후 몇 년 동안은 수상하지 못하고 상점 간판 및 서예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靑竹)과 <풍죽>(風竹)으로 입선하였다.[9][10]
서예 및 사군자 부문 폐지 후, 이응노는 제11회, 제12회,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부문에서 연이어 입선하였고,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을 계속하였다.[11] 그러나 이응노는 동양화가들은 사군자를 기본기로 삼아 발전시켜 현대화해야 한다고 믿었다.[12] 1930년대 초, 김규진의 전통적인 사군자 화풍을 넘어, 새로운 현대 동양화풍과 서양화의 사실적인 묘사의 영향을 받은 수묵화 풍경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13]
1930년대 초 한국에서 전문 화가로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후, 활동 범위를 일본으로 확장했다. 1935년 제95회 일본미술협회전(日本美術協会展)에서 수상했고, 제27회와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수상하며 그의 수묵화에는 서양 풍경화의 영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14][15]
이응노는 서양화와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 일본으로 거처를 옮겨 마츠바야시 케이게쓰에게 사사했으며, 본고회화연구소(本鄕繪畫硏究所)에서 서양화 기초를 배우고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畫學校)에도 입학했다.[16][17][18]
1930년대 후반, 일본과 중국 심천의 여러 미술 전람회에서 계속 작품이 채택되었고, 1939년에는 서울 화신백화점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19]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응노는 1년간 독일에서 머물며 프랑크푸르트와 쾰른에서 첫 유럽 개인전을 열었고, 본 미술관(Kunstmuseum Bonn)에서 박인경과의 합동전을 개최했다.[36][37]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경력 전반에 걸쳐 성공적인 개인전과 단체전을 여러 차례 개최했다. 1963년 파리 맥스 카가노비치 화랑(Galerie Max Kaganovitch)의 3인전에 참여했고, 라쇼드퐁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La Chaux-de-Fonds), 누마가 화랑(Galerie Numaga), 덴마크 국립박물관(National museet Kobenhavn), 뮌헨 프리드리히 & 달렘(Friedrich & Dahlem) 등 유럽 각지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45][46][47]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São Paulo Art Biennial)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프랑스에서 예술가로서 더욱 큰 명성을 얻었다.[48] 1964년 세르뉘시 박물관(Musée Cernuschi)에 파리 동양 회화 아카데미(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를 설립하여 동양화를 가르쳤다.[49]
1970년대 한국에서 출감 후 프랑스로 돌아온 이응노는 추상적 서예 회화에 더욱 집중했다.[50] 서예가이자 수묵화가로서의 경력과 한자를 "자연으로부터 의미와 형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 배경을 끊임없이 활용했다.[51][52]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주로 수묵화 기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렸다.
이응노는 1976년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여섯 단계로 나누었다고 밝혔다. 20대에는 전통 한국 서예와 수묵화 기법을 연마, 30대에는 사실적인 묘사 탐구, 40대에는 준추상 표현 실험, 50대에는 유럽에서 자신만의 추상화 발전, 60대에는 사의적(寫意的) 추상, 70대에는 서예적(書藝的) 추상에 매달렸다.[63][64] 그의 추상화는 시각적 성취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창작 과정, 전통 동양의 재료, 사상, 기법과 서양 및 현대 예술적 실천의 성공적인 결합의 사례로서도 주목받고 있다.[81][82]
3. 1. 콜라주와 문자 추상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응노는 앵포르멜과 유럽의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현대 회화 기법으로 인정받았다.[38][39] 특히 구겨지고 잘리고 붙여진 화선지(畵宣紙, 얇은 서예용 종이)를 이용한 새로운 콜라주 기법을 개발하여 유럽과 한국 모두에서 찬사를 받았다.[40][41] 1962년 파리의 파케티 화랑(Galerie Facchetti)과 계약을 맺고 잉크와 다양한 형태의 화선지, 낡은 신문, 잡지 등을 활용한 콜라주 작품으로 파리에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열었다.[42] 콜라주 연작 외에도 서예적 형태와 한자를 실험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추상적 서예 회화로 발전하게 된다.[43][44]프랑스 체류 기간 동안 이응노는 독창적인 콜라주 기법과 "아라샤주(arrachage)"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은 다양한 종류의 종이를 구기고 찢고 배열하고 겹쳐 놓은 후, 대부분 자연 색조의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여 다층적이고 자유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65]
이응노의 "서예 형태의 해체"는 앙포르멜 운동과 일맥상통하지만, "형태 실험을 넘어 종이와 한자를 사용한 작품을 창조"하여 해체된 형태의 재구성과 종이 콜라주로 만들어낸 독특한 질감과 마티에르(matière)를 동시에 강조했다.[66] 이응노는 "한국적 추상화"를 개발하는 데 전념했으며, 동양화와 한자, 한글의 선의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공간 구성과 조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켰다고 밝혔다.[67]
그의 추상 문자 시리즈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초기 실험에서 캔버스의 부조 표면을 단순화하고 고르게 하며 색상, 구조 및 부피의 리듬감 있는 형태를 체계화하는 실험을 했다.[68] 이응노는 한자가 자연에서 발견되는 의미와 형태의 표현이기 때문에 추상 그 자체라고 믿었다.[69] 1970년대 내내 한자와 고대 한국의 암각화에서 영감을 얻은 서예적 추상을 발전시켰으며, 초기 콜라주 기법을 추상 문자 작품에 적용하여 "암호와 기호의 우연적인 출현"을 강조했다.[70][71]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의 추상 문자 작품 후반부에는 기하학적 문자를 강조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한국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그의 작품의 '유머러스한' 분위기에서 간결하고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를 포함하는 '검소한' 또는 '차가운' 이미지로의 짧은 변화를 알렸다.[72] 그는 또한 한자보다 시각적으로 훨씬 기하학적인 성격을 지닌 한글 자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74]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이르러 이응노의 작품에는 더욱 정교하게 계획된 배경과 엄격하게 구성된 형태와 같은 새로운 요소들이 도입되었고, 그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더욱 정교한 그림을 만들어냈다.[75]
3. 2. 군상 연작
'군상(群像)' 연작은 이응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의 후기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1970년대 후반부터 그는 '군상'을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초기 '군상' 작품에서는 문자추상에서 보이던 장식적인 양식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났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이미지가 작고 단순해지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보인다. 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은 이를 "화면에서의 표현을 절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90]고암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좀더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는 2백 호의 화면에 수천 명의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넣었으며, 한국 사람들은 이를 보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서울의 학생 시위를 연상했고,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다고 한다.[91]
고암의 군상 시리즈와 유사한 형식의 작품은 1960년대 전반에 이미 시도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문자화와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작된 인간 시리즈는 초기에는 2인이나 5인 등 적은 수의 인물로 시작했지만, 1985년경부터는 대량의 군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92] 동양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응노가 수많은 집단의 인간상, 즉 '군상'을 그린 것은 그의 예술 세계가 관념의 세계를 넘어 "생동하는 인간, 움직이는 인간, 역사 속의 인간"에게로 향했음을 보여준다.[93]
그의 조카 이강세는 이응노가 '우리 조국은 꼭 통일을 해야 합니다. 이 그림처럼 조국통일이 되는 날이 오면 우리 민족의 동포들이 기쁜 마음으로 춤을 추게 될 것이며, 나는 이러한 작업을 할 때 의무와 기쁨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하며, 인간 혹은 군중 시리즈를 '통일무'라고 칭했다.[94]
1982년부터 이응노는 문자 형태와 결합하여 사람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한 군상 그림을 주로 제작했다.[77] 이 그림들 중 상당수는 군중 인물과 배경 모두에서 색상을 생략하거나 매우 최소한의 색상 변형만을 사용했다. 어떤 그림은 서너 명의 인물을 두꺼운 검은색 윤곽선으로 묶었고, 다른 그림은 전통적인 중국 서예를 닮은 반복적인 붓놀림으로 군중 속 인물들의 움직임과 감정을 표현했다.[78][79]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응노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가 완전한 추상보다는 형태적 요소를 선택하게 만들었다.[80]
4. 이응노와 한국
이응노는 1922년 서울로 이주하여 1923년부터 서화가이자 사진가인 김규진에게서 사군자를 배웠다.[7]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였으나,[8] 이후 몇 년간은 수상하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간판 및 서예 작업을 병행했고, 1931년 다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였다.[9][10]
이응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지속적으로 작품을 출품하며, 전통적인 화풍을 넘어선 새로운 시도를 했다.[11] 1930년대 초, 김규진의 화풍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수묵화 풍경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13]
1945년 광복 후, 이응노는 조선미술건설본부와 조선미술가협회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한국 미술계 재건에 힘썼다.[21] 또한,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식민 통치의 잔재를 극복하고 한국 예술의 발전을 도모했다.[22] 1948년부터 1950년까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서 강의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23][24] 이 시기 추상 미술로 점차 전환해 갔다.[25]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이응노는 피난민들의 모습, 농촌 풍경 등을 화폭에 담았다.[27][28] 1953년 정전 이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고, 195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 밖에서 작품을 선보이려고 했다.[29] 1957년 그의 작품은 록펠러 재단에 판매되어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다.[29]
1958년 이응노는 프랑스로 이주하기 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작별 전시회를 열었다.[32][33] 이 전시는 한국 동양화의 미래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통적인 수묵화의 해체와 이응노 특유의 추상적인 필선 형성을 보여주었다.[34][35]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이응노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군상' 연작을 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응노와 민주화 운동' 참고)
2007년 대전광역시 둔산대공원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응노미술관' 참고)
4. 1. 이응노와 민주화 운동
이응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군상(群像)' 시리즈는 그의 후기 작품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군상' 연작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이지호 대전 이응노미술관장은 "초기 '군상' 작품에서는 후기 문자추상에서 보이던 장식적인 양식들이 사람 모습으로 변형되어 표현되었는데, 화면 전체에 인간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유기체적인 도형들이 고르게 퍼져 있으며, 그 형태는 디자인적이고 장식적이다. 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고암의 '군상'은 이미지가 작고 단순해지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화면에서의 표현을 절제한다고 할 수 있다. 점차 사람 형상들이 화면 전체를 뒤덮기 시작하고, 화폭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마치 거대한 축제 한바탕에 나온 듯 춤을 추고 흥겨운 모습처럼 보인다"라고 분석했다.[90]고암은 '나의 그림은 추상적인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에 광주혁명이 있고 나서부터 좀 더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 호의 화면에 수천 명의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이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 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 준 것이다'라고 말했다.[91]
고암의 군상 시리즈와 유사한 형식의 작품은 1960년대 전반에 시도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문자화와 결합되어 인간 군상이 일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작된 인간 시리즈는 초기에는 2인이나 5인 정도로 등장인물이 많지 않았다. 많아야 20명 정도였다. 1985년경부터 대량의 군중이 출현하기 시작했다.[92] 동양적 사상 배경을 가진 이응노가 작품의 주된 소재로 인간, 그것도 한두 사람의 인간 실상을 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집단의 인간상, 인간군을 그렸다는 것은 이응노 화력의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의 관심은 단순한 관념의 세계, 관조의 자연, 유미주의적 적막과 고립에 머무르지 않고, 생동하는 인간, 움직이는 인간, 역사 속의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이었다.[93]
그의 조카 이강세는 이응노가 '우리 조국은 꼭 통일을 해야 합니다. 이 그림처럼 조국통일이 되는 날이 오면 우리 민족의 동포들이 기쁜 마음으로 춤을 추게 될 것이며, 나는 이러한 작업을 할 때 의무와 기쁨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하며, 인간 혹은 군중 시리즈를 '통일무'라고 칭했다.[94]
4. 2. 이응노미술관
2000년 서울특별시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하였으나, 2005년 폐관하였다.[96] 이후 대전광역시가 소장품을 인계받아 2007년 서구 만년동 둔산대공원에 이응노미술관을 개관하였다.[96] 대전 이응노미술관은 프랑스 건축가 로랑 보두엥이 설계하였으며, 파리의 고암 아카데미와 연계하여 다양한 연구와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96]5. 가족 관계
이응노는 슬하에 친자는 없었으나, 두 번의 결혼 생활 동안 아들 둘을 입양하였다.[53] 첫 번째 부인 박귀희(朴貴嬉, 1909년 ~ 2001년)와의 사이에서는 형의 둘째 아들인 이문세(李文世, 1923년 ~ 1996년)를 입양하였다.[53] 이문세는 한국 전쟁 당시 북한으로 징집되어 교사로 일하다 생을 마쳤다.[54] 두 번째 부인 박인경과의 사이에서는 이융세(李融世, 1956년 ~ 현재)를 입양하였다.[53]
6. 저서 및 관련 자료
이응노는 동양화, 서예, 추상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 활동을 했다. 1956년 서울의 문화교육출판사에서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을 출판했고, 1973년 스위스 뉴샤텔의 이데 에 칼렌데에서 피에르 자퀼라르와 함께 「서예, 중국화와 추상미술」(Calligraphie, Peinture Chinoise et Art Abstrait)을 출판했다. 1978년 프랑스 파리에서 「묵화의 예술」(L'art de peindre à l'encre de Chine)을, 1985년 일본 도쿄에서 박인경, 도미야마 다이코와 함께 「서울·파리·도쿄」(Seoul•Paris•Tokyo)를 출판했다. 1988년에는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묵화의 예술」을 다시 출판했다.
6. 1. 저서
출판 연도 | 제목 | 출판사 | 출판 위치 |
---|---|---|---|
1956 |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 | 문화교육출판사 | 서울 |
1973 | 서(書) | 이데 에 칼렌데 | 스위스 뉴샤텔 |
1978 | 수묵법채화법(水墨法 采畵法) | 고려화랑 | 프랑스 파리 |
1985 | 서울 · 파리 · 동경 | 기록사 | 일본 도쿄 |
1988 | 묵기(墨技) | 아틀리에 드 라 본느 아방튀르 | 프랑스 베르사유 |
6. 2. 영화
이응노 화백과 관련된 영화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제목 | 제작 |
---|---|---|
1972 | "이응노"(Lee Ungno) | 클로드 장마르 인터뷰, 툴루즈 아카데미 지역 교육 문서 센터(프랑스 툴루즈) |
1976 | "이응노"(Lee ungno) | 아틀리에 아니크 르 모앙(프랑스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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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서적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얼과알 출판사
[92]
서적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얼과알 출판사
[93]
서적
분단 이데올로기로 상처 입은 예술혼
가나아트
[94]
서적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얼과알
[95]
서적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얼과알
[96]
웹인용
이응노미술관 홈페이지내 연보
https://web.archive.[...]
2013-10-29
[97]
뉴스
예산 수덕사·추사고택
http://news20.busan.[...]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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