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보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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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사건의 경과
- 2.1.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 총격 사건 (1987년 1월 24일)
- 2.2.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 (1987년 5월 3일)
- 2.3. 아사히 신문 나고야 본사 사원 기숙사 습격 사건 (1987년 9월 24일)
- 2.4. 아사히 신문 시즈오카 지국 폭파 미수 사건 (1988년 3월 11일)
- 2.5. 나카소네 야스히로·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 협박 사건 (1988년 3월 11일)
- 2.6. 에조에 히로마사 리크루트 회장 자택 총격 사건 (1988년 8월 10일)
- 2.7. 아이치 한국인 회관 방화 사건 (1990년 5월 17일)
- 2.8. 공소 시효 만료
- 3. 범인 및 단서
- 4. 사건의 배경과 범인상
- 5. 수사
- 6. 사회의 반응
- 7. 사건의 영향 및 의의
- 8. 아사히 신문사의 대응
- 9. 추모 시설 및 관련 자료
- 10. 미디어에서의 재조명
- 참조
1. 개요
적보대 사건은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일련의 테러 사건을 말한다. '일본 민족 독립 의용군 별동 적보대'를 자칭하는 세력은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 총격 사건,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 아사히 신문 나고야 본사 사원 기숙사 습격 사건, 아사히 신문 시즈오카 지국 폭파 미수 사건, 전 리크루트 회장 자택 총격 사건, 아이치 한국인 회관 방화 사건 등을 일으켰다. 이 사건들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우적 사상을 배경으로 발생했으며, 특히 아사히 신문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수사 과정에서 다양한 증거와 목격 정보가 확보되었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로 미해결 상태로 남았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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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보대 사건 | |
---|---|
사건 개요 | |
명칭 | 적보대 사건 |
정식 명칭 | (정보 없음) |
발생 장소 |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일본, 효고 현 니시노미야 시 요고도 정) 외 |
좌표 | (좌표 정보 없음) |
발생 날짜 | 1987년 (쇼와 62년) 5월 3일 (국민의 축일: 헌법 기념일) |
발생 시간 | 오후 8시 15분 (일본 표준시) |
사건 종류 | 테러 사건 |
주요 사건 | 朝日新聞東京本社 총격 사건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 아사히 신문 나고야 본사 사원 기숙사 습격 사건 아사히 신문 시즈오카 시 지국 폭파 미수 사건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양 전 총리 협박 사건 에조에 히로마사 리크루트 홀딩스 회장 자택 총격 사건 아이치 현 한국인 회관 방화 사건 |
현상금 | (현상금 정보 없음) |
원인 | 야스쿠니 신사 문제, 교과서 문제, 국가 비밀법, 개헌과의 관련성이 지적됨. |
공격 주체 인원 | (정보 없음) |
흉기 | (정보 없음) |
무기 | (정보 없음) |
병기 | (정보 없음) |
사망자 | 1명 |
부상자 | 1명 |
실종자 | (정보 없음) |
피해자 | (정보 없음) |
손해 | (정보 없음) |
범인 | "적보대"를 자칭 |
혐의 | 살인죄 |
동기 | (정보 없음) |
관여 | (정보 없음) |
방어 | (정보 없음) |
대처 | 広域重要指定 116호 사건으로 지정 (공소 시효 성립) |
사과 | (정보 없음) |
보상 | (정보 없음) |
배상 | (정보 없음) |
형사 소송 | (정보 없음) |
소년 심판 | (정보 없음) |
해난 심판 | (정보 없음) |
민사 소송 | (정보 없음) |
영향 | (정보 없음) |
유족회 | (정보 없음) |
피해자 모임 | (정보 없음) |
관할 | (정보 없음)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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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의 경과
1987년 1월 24일(토) 오후 8시를 조금 넘은 시각,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이다.[6] 당초에는 사건 발생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보도되지 않았으나,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 이후 사건 발생이 확인되었다.
나중에 실시된 현장 검증(1987년 10월 1일 실시) 및 아사히 신문사 사원의 증언에 따르면, 1987년 1월 24일 오후 8시를 조금 넘은 시각에, 도쿄 본사 1층의 화단에서 건물 2층을 향해 산탄총 2발을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 화단 근처에서 미연소 화약이 발견되어, 총신을 짧게 자른 산탄총이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6]
사건 당시, 광고국에서 일하던 사원 몇 명이 창문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를 두 번 듣고, 창문 밖 테라스로 나가 잠시 외부 상황을 지켜봤지만, 특별한 이상이 없어 그대로 방으로 돌아갔다.[6]
한편, 범인은 "일본 민족 독립 의용군 별동 적보대 일동"을 자칭하며, 지지 통신사와 교도 통신사에 범행 성명을 보냈다.[6] 문면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되었다. 지지 통신사에 보내진 성명서는 1월 26일 오전 9시부터 10시경에 도착하여, 총무부원을 거쳐 사회부로 전달되었다. 사회부는 성명서 실물을 오토바이 편으로 경시청 클럽에 보내고, 동 클럽의 공안 담당 기자가 그 사본을 경시청에 제출했다. 범행 성명서가 들어 있던 봉투는 사회부 주변에서 버려져 남아있지 않다. 교도 통신사에 보내진 쪽은, 범행 성명이 들어 있던 봉투도 성명서도 버려져,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아,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6]
아사히 신문사는 범행 성명에 대해, 지지 통신사의 공안 담당을 통해 알게 되었다.[6] 1987년 1월 28일 오후에 도쿄 본사의 경비 센터에 문의하여 확인을 진행했지만, 그 당시에는 도쿄 본사뿐만 아니라, 오사카, 나고야, 서부(후쿠오카) 본사에서도 산탄총 발사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신문 보도를 하지 않았다.[6] 또한, 지지 통신사, 교도 통신사도 마찬가지로 보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한 범인은 자신들이 이러한 보도 기관에 무시당했다고 여기고, 그것이 다음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의 흉행으로 이어진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의 범행 성명서에 그 내용이 적혀 있다).
범행 성명에서, 범인은 자신들을 "일본 국내외에서 움직이는 반일 분자를 처형하기 위해 결성된 실행 부대"라고 칭하며, "반일 여론을 육성해 온 언론에는 엄벌을 가해야 한다", "1월 24일의 아사히 신문사에 대한 행동은 그 첫걸음이다", "특히 아사히는 악질적이다"라고 아사히 신문에 격렬한 적의와 원한을 나타내고, 언론을 표적으로 한 테러의 지속을 시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87년 5월 3일 밤,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에 괴한이 침입하여 총기를 난사, 고지리 도모히로 기자(당시 29세)가 사망하고, 이누카이 헤이베이 기자(당시 42세)가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8] 범인은 검은 복면과 검은색 옷을 입고 산탄총을 들고 편집실에 침입하여 기자들에게 발포했다. 고지리 도모히로 기자는 지근거리에서 발포된 산탄총에 맞아 위, 소장, 복강, 신장 등에서 총 191개의 산탄알이 적출되었고, 다음날 사망했다. 이누카이 헤이베이기자는 왼쪽 가슴에 총을 맞았으나 지갑과 볼펜 덕분에 치명상을 피했고,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약지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 있던 타카야마 켄지 기자(당시 25세)는 범인이 총구를 겨눴으나 발포하지 않아 무사했다.[8][9]
사건 발생 전, 한신 지국에는 밤마다 무언 전화가 걸려오는 일이 잦았다. 사건 당일, 편집실에서는 이누카이 헤이베이, 고지리 도모히로, 타카야마 켄지 3명의 기자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고, 오후 8시 15분경 범인이 침입하여 총을 난사했다. 범행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으며, 범인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범인의 연령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누카이 헤이베이 기자는 몸놀림으로 보아 꽤 젊은 편이라고 증언했고, 타카야마 켄지 기자는 체격과 동작으로 보아 20세에서 30세 정도일 것이라고 증언했다.[8]
5월 6일, 지지 통신사와 교도 통신사에 "적보대 일동" 명의의 범행 성명이 도착했다. 성명에는 "모든 아사히 사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반일 분자에게는 극형만이 있을 뿐이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87년 9월 24일 오후 6시 45분경, 나고야시 히가시구 신데키에 있는 아사히 신문 나고야 본사의 단신 기숙사가 총격을 받았다.[10] 무인 거실 겸 식당과 서쪽 옆의 맨션 외벽에 각각 1발씩 발포되었다. 그 후, "반일 아사히는 50년 전으로 돌아가라"며 전전 회귀, 전후 민주주의의 전면 부정, 전후의 아사히 신문에 대한 적의를 나타내는 범행 성명문이 보내졌다.
1988년 3월 11일, 시즈오카시(현: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오이테마치에 있는 아사히 신문 시즈오카 지국(현: 시즈오카 총국)의 주차장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시한 발화 장치가 달린 피스 캔 폭탄을 설치했다.[11][12] 다음 날, 종이 가방에 담긴 폭탄이 발견되어 이 사건은 미수로 끝났다. 범행 성명에서는 "일본을 사랑하는 동지들은 아사히, 마이니치, 도쿄 등 반일 언론을 가능한 방법으로 처벌해 나가자"라고 하여 아사히 신문사뿐만 아니라 마이니치 신문사와 주니치 신문 도쿄 본사 (도쿄 신문)도 표적으로 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이니치, 주니치 두 회사를 대상으로 한 사건은 없었다.
1988년 3월 11일, 시즈오카 시내에서 발송된 소인이 찍힌 협박장이 군마현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사무소와 시마네현의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의 자택으로 우송되었다.[13] 나카소네 전 총리에게는 "야스쿠니 참배와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일본 민족을 배신했다. 영령은 모두 당신을 저주하고 있다"며 "오늘 아사히를 처벌했다. 다음은 당신 차례다"라고 협박했다. 다케시타 총리에게는 "당신이 8월에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으면 우리 부대의 처형 목록에 이름을 올리겠다"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1988년 8월 10일 오후 7시 20분경, 리크루트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에조에 히로마사 리크루트 전 회장 자택을 향해 산탄총 1발이 발사되었다.[14] 범행 성명은 그 동기를 "붉은 아사히에 여러 번 광고를 내고 돈을 줬다"는 이유로 들었다. 또한 "반일 아사히와 마이니치에 광고를 내는 기업이 있다면 반일 기업으로 처벌하겠다"는 기업을 표적으로 삼은 내용도 범행 성명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리크루트사가 다른 신문에 비해 아사히에 광고를 많이 낸 것은 아니었다.
1990년 5월 17일 오후 7시 25분경, 나고야의 아이치 한국인회관(민단 계열)이 방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5] 범행 성명에서는 당시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을 "로타이구"라고 일본어로 읽은 다음, 그의 방일을 반대하며 "반일적인 재일 한국인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사건은 '적보대'가 일으킨 다른 사건들과 달리, 재일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2. 1.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 총격 사건 (1987년 1월 24일)
1987년 1월 24일(토) 오후 8시를 조금 넘은 시각,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이다. 당초에는 사건 발생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보도되지 않았으나,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 이후 사건 발생이 확인되었다.나중에 실시된 현장 검증(1987년 10월 1일 실시) 및 아사히 신문사 사원의 증언에 따르면, 1987년 1월 24일 오후 8시를 조금 넘은 시각에, 도쿄 본사 1층의 화단에서 건물 2층을 향해 산탄총 2발을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 화단 근처에서 미연소 화약이 발견되어, 총신을 짧게 자른 산탄총이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사건 당시, 광고국에서 일하던 사원 몇 명이 창문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를 두 번 듣고, 창문 밖 테라스로 나가 잠시 외부 상황을 지켜봤지만, 특별한 이상이 없어 그대로 방으로 돌아갔다.
한편, 범인은 "일본 민족 독립 의용군 별동 적보대 일동"을 자칭하며, 지지 통신사와 교도 통신사에 범행 성명을 보냈다. 문면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되었다. 지지 통신사에 보내진 성명서는 1월 26일 오전 9시부터 10시경에 도착하여, 총무부원을 거쳐 사회부로 전달되었다. 사회부는 성명서 실물을 오토바이 편으로 경시청 클럽에 보내고, 동 클럽의 공안 담당 기자가 그 사본을 경시청에 제출했다. 범행 성명서가 들어 있던 봉투는 사회부 주변에서 버려져 남아있지 않다. 교도 통신사에 보내진 쪽은, 범행 성명이 들어 있던 봉투도 성명서도 버려져,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아,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사히 신문사는 범행 성명에 대해, 지지 통신사의 공안 담당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87년 1월 28일 오후에 도쿄 본사의 경비 센터에 문의하여 확인을 진행했지만, 그 당시에는 도쿄 본사뿐만 아니라, 오사카, 나고야, 서부(후쿠오카) 본사에서도 산탄총 발사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신문 보도를 하지 않았다. 또한, 지지 통신사, 교도 통신사도 마찬가지로 보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한 범인은 자신들이 이러한 보도 기관에 무시당했다고 여기고, 그것이 다음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의 흉행으로 이어진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의 범행 성명서에 그 내용이 적혀 있다).
범행 성명에서, 범인은 자신들을 "일본 국내외에서 움직이는 반일 분자를 처형하기 위해 결성된 실행 부대"라고 칭하며, "반일 여론을 육성해 온 언론에는 엄벌을 가해야 한다", "1월 24일의 아사히 신문사에 대한 행동은 그 첫걸음이다", "특히 아사히는 악질적이다"라고 아사히 신문에 격렬한 적의와 원한을 나타내고, 언론을 표적으로 한 테러의 지속을 시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2. 2.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 (1987년 5월 3일)
1987년 5월 3일 밤,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에 괴한이 침입하여 총기를 난사, 고지리 도모히로 기자(당시 29세)가 사망하고, 이누카이 헤이베이 기자(당시 42세)가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8] 범인은 검은 복면과 검은색 옷을 입고 산탄총을 들고 편집실에 침입하여 기자들에게 발포했다.[8] 고지리 도모히로 기자는 지근거리에서 발포된 산탄총에 맞아 위, 소장, 복강, 신장 등에서 총 191개의 산탄알이 적출되었고, 다음날 사망했다.[8] 이누카이 헤이베이기자는 왼쪽 가슴에 총을 맞았으나 지갑과 볼펜 덕분에 치명상을 피했고,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약지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8] 현장에 있던 타카야마 켄지 기자(당시 25세)는 범인이 총구를 겨눴으나 발포하지 않아 무사했다.[8][9]사건 발생 전, 한신 지국에는 밤마다 무언 전화가 걸려오는 일이 잦았다.[8] 사건 당일, 편집실에서는 이누카이 헤이베이, 고지리 도모히로, 타카야마 켄지 3명의 기자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고, 오후 8시 15분경 범인이 침입하여 총을 난사했다. 범행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으며, 범인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범인의 연령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누카이 헤이베이 기자는 몸놀림으로 보아 꽤 젊은 편이라고 증언했고, 타카야마 켄지 기자는 체격과 동작으로 보아 20세에서 30세 정도일 것이라고 증언했다.[8]
5월 6일, 지지 통신사와 교도 통신사에 "적보대 일동" 명의의 범행 성명이 도착했다. 성명에는 "모든 아사히 사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반일 분자에게는 극형만이 있을 뿐이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2. 3. 아사히 신문 나고야 본사 사원 기숙사 습격 사건 (1987년 9월 24일)
1987년 9월 24일 오후 6시 45분경, 나고야시 히가시구 신데키에 있는 아사히 신문 나고야 본사의 단신 기숙사가 총격을 받았다.[10] 무인 거실 겸 식당과 서쪽 옆의 맨션 외벽에 각각 1발씩 발포되었다. 그 후, "반일 아사히는 50년 전으로 돌아가라"며 전전 회귀, 전후 민주주의의 전면 부정, 전후의 아사히 신문에 대한 적의를 나타내는 범행 성명문이 보내졌다.2. 4. 아사히 신문 시즈오카 지국 폭파 미수 사건 (1988년 3월 11일)
1988년 3월 11일, 시즈오카시(현: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오이테마치에 있는 아사히 신문 시즈오카 지국(현: 시즈오카 총국)의 주차장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시한 발화 장치가 달린 피스 캔 폭탄을 설치했다.[11][12] 다음 날, 종이 가방에 담긴 폭탄이 발견되어 이 사건은 미수로 끝났다. 범행 성명에서는 "일본을 사랑하는 동지들은 아사히, 마이니치, 도쿄 등 반일 언론을 가능한 방법으로 처벌해 나가자"라고 하여 아사히 신문사뿐만 아니라 마이니치 신문사와 주니치 신문 도쿄 본사 (도쿄 신문)도 표적으로 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이니치, 주니치 두 회사를 대상으로 한 사건은 없었다.2. 5. 나카소네 야스히로·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 협박 사건 (1988년 3월 11일)
1988년 3월 11일, 시즈오카 시내에서 발송된 소인이 찍힌 협박장이 군마현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사무소와 시마네현의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의 자택으로 우송되었다.[13] 나카소네 전 총리에게는 "야스쿠니 참배와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일본 민족을 배신했다. 영령은 모두 당신을 저주하고 있다"며 "오늘 아사히를 처벌했다. 다음은 당신 차례다"라고 협박했다. 다케시타 총리에게는 "당신이 8월에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으면 우리 부대의 처형 목록에 이름을 올리겠다"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2. 6. 에조에 히로마사 리크루트 회장 자택 총격 사건 (1988년 8월 10일)
1988년 8월 10일 오후 7시 20분경, 리크루트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에조에 히로마사 리크루트 전 회장 자택을 향해 산탄총 1발이 발사되었다.[14] 범행 성명은 그 동기를 "붉은 아사히에 여러 번 광고를 내고 돈을 줬다"는 이유로 들었다. 또한 "반일 아사히와 마이니치에 광고를 내는 기업이 있다면 반일 기업으로 처벌하겠다"는 기업을 표적으로 삼은 내용도 범행 성명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리크루트사가 다른 신문에 비해 아사히에 광고를 많이 낸 것은 아니었다.2. 7. 아이치 한국인 회관 방화 사건 (1990년 5월 17일)
1990년 5월 17일 오후 7시 25분경, 나고야의 아이치 한국인회관(민단 계열)이 방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행 성명에서는 당시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을 "로타이구"라고 일본어로 읽은 다음, 그의 방일을 반대하며 "반일적인 재일 한국인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사건은 '적보대'가 일으킨 다른 사건들과 달리, 재일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2. 8. 공소 시효 만료
경찰은 전국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2002년에 한신 지국 습격 사건, 2003년에는 시즈오카 지국 폭파 미수 사건이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발생한 살인을 동반한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완전범죄가 되어버려, 모든 사건이 미해결인 채로 남았다.효고현 경찰은 수사 1과, 니시노미야 경찰서에 연락 요원을 배치하여, 공소시효 만료 후에도 진상 규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16] 수사 자료는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 나타났을 때 대조용으로 보관되고 있다.
아사히 신문사는 공소시효를 넘어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라고 밝혔다.[17]
법제심의회에서는 적보대 사건에 대해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논의되었다.
당시 효고현 경찰 형사부장은 "시효로 인해 범인 처벌은 어려워졌지만, 진상 규명의 길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며, 앞으로도 모든 기회를 잡아 규명의 노력을 계속할 생각입니다"라고 표명했다.[18]
당시 효고현 니시노미야 경찰서장은 "언론에 대한 폭력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시효를 맞이했지만, 계속해서 정보 제공을 요청하고 싶습니다"라고 언급했다.[19]
고지리 기자의 유족은 "오랫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효는 없습니다", "살인죄에 시효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0], "몇 년이 지나도 같은 마음입니다. 범인을 더욱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에 시효는 관계없습니다. 빨리 해결해서 진상 규명을 해주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21]
3. 범인 및 단서
''후술하는 「#사건의 배경과 범인상」도 참조''
다음은 보도된 사실을 기록한다.
- 범행 성명, 협박장에 어떤 사건에서도 같은 워프로와 용지가 사용되었고, 용지 접는 방식도 같아서 동일 인물 또는 동일 그룹의 범행으로 추정된다.[30]
- 3~4m 거리에서 산탄총으로 한 명을 노리고 쏘았으며, 도주 시 위험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편집실 안쪽으로 더 들어가서 다른 한 명을 쏜 방식에서, 총기 취급에 능숙하고 대담하며 냉정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남자.[28]
- 범인은 "반일"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59]
- 야스쿠니 공식 참배 문제에 대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에 대한 강한 반발이 있다.
- 재일 한국인의 지문 날인 폐지에 대한 반발이 있다.[72]
- 전후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나카소네 총리도 미온적이고 우유부단하다며 짜증을 내는 광신적인 국수주의자.[17]
- NHK 뉴스 오하요 재팬(2017년 5월 2일 방송)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했다. 경찰은 아사히 신문의 보도로 대립 관계에 있던 신흥 종교 단체나 도쿄 재판, 야스쿠니 신사 참배 보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룹의 범행을 의심하여, 10명 정도의 용의자를 압축했다.
- 잇스이카이 전 최고 고문인 스즈키 구니오도 범인이 움직임을 멈춘 것은 '''헌법 개정을 쉽게 하기 위해 사상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범인상)「'''범인으로부터, 범인으로 보이는 사람과의 접촉'''」을 인정하고 있다 (NHK 스페셜 미해결 사건 File.06 「적보대 사건」 2018년 1월 28일).
- 정계에도 범인의 그림자가 있다 (아사히 신문 2001년 8월 3일자 조간).
- 범인의 사상(전후 체제 부정, 전전 회귀)은 아베 신조 총리가 주장하는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피"와 직결된다고 지적되고 있다.
- 범인에 대해, 다음 지적이 있다 (범인상 참조).
- 경찰은 범인의 근거지가 도카이 지방에 있다고 보고 있다.[73]
- 피의자는 사건 당시 20~40세 정도, 신장 160~170cm. 체형에 폭이 있어, 사건에 따라 실행범이 다르다는 시각이 있다.[30] 나고야 본사 사택 사건에서는 간사이 사투리를 쓰는 남자, 시즈오카 지국 사건에서는 60세 정도의 남자가 부상하고 있다 (목격 정보 참조).
- 한신 지국 사건이 일어난 1987년 5월 3일과 그 전날인 5월 2일, 지국 주변에서 수상한 토요타 마크 II, 냉장차가 목격되었다 (후절 참조). 토요타 마크 II, 1대는 82년형 흰색, 요코하마 또는 시즈오카 번호. 다른 1대는 76년 또는 73년형 와인 레드, 미에 번호. 냉장차에는 회사명이 적혀 있지 않고, 회색.
1987년 5월 7일, 니헤이 쿠니오 경찰청 형사국장은 "극히 반사회성이 강한 사건이므로, 지역 효고현 경찰뿐만 아니라 전국 경찰의 조직을 결집하여 범인을 검거하고, 동기 및 배후 관계를 해명한다"고 결의를 표명했다[22]。
경찰은 사건과의 관련성이 의심되는 한신 지국에서의 취재상의 트러블 유무 등[23], 관련성이 의심되는 다른 사건 (1988년 5월의 YP 체제 타도 동맹 협박장 사건, 1986년 - 1988년의 아시아 독립 의용군 간사이 부대 협박장 사건、1991년 12월 8일에 일어난 미군 요코스카 기지의 차량 방화 사건 등), 범인과의 관련성이 의심되는 조직·단체, 물증 등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또한, 수사 당국은 범행 성명의 분석을 언어학자 등 (복수)에게 의뢰했다. 그에 따르면, 범행 성명의 필자는 "어느 정도 지적인 30대 이상의 인물"이라는 분석 결과가 다수를 차지했다. "반일"이라는 말 ("반일 분자", "반일 언론", "반일 기업" 등 19곳)에도 주목하여 수사했다.[60]
사건으로 "적보대"를 칭하는 범인이 낸 8통의 범행 성명, 협박장은 1명의 동일 인물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NHK 스페셜 미해결 사건 File.06 "적보대 사건" 2018년 1월 28일).
일련의 사건에서는 여러 남자가 목격되었고, 효고, 아이치, 시즈오카현 경찰, 경시청은 몽타주나 복장 사진을 만들어 범인을 쫓았다。 연 50만 명이 수사 대상이 되었다[42]。
사건에서는 많은 증거물이 남겨졌다.
=== 범행 성명 및 협박장 ===
범행 성명에는 샤프제 WD-20(25) 워프로가 사용되었다. }} 사건 발생까지 4만 1311대가 판매되었고, 약 2만 4000명의 소유자가 파악되었다. 범행 성명이 들어 있던 봉투는 양식 3호 봉투였다. 나고야 시내의 제조사 제품으로, 소매용 대부분은 동 시내에서 판매되었다. 성명서는 정확하게 팔 접기로 되어 있었으며, 종이 접기 작업에 능숙한 동일 인물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 목격 정보 ===
한신 지국 사건[41], 나고야 본사 사택 사건[46][41], 시즈오카 지국 사건, 리크루트 전 회장 자택 사건[41] 등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한 목격 정보가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 '''한신 지국 사건''': 키 160-165cm, 보통 또는 약간 마른 체형, 20-40세, 검은색 복면, 검은테 안경, 검은색 계통의 스웨터, 바지 차림의 남자가 산탄총 발사 직후 짐을 든 듯한 모습으로 목격되었다.[46] 사건 40분 전에는 야쿠자나 우익 단체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의 짧은 펀치 파마, 험악한 눈매, 회색 점퍼, 흰색 바지 차림의 남자가 지국을 엿보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경찰은 검은테 안경의 남자가 실행범, 짧은 펀치 파마의 남자가 운전수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46]
- '''나고야 본사 사택 사건''': 키 약 170cm, 다부진 체격, 3, 40대, 검은색 복면, 7:3 가르마, 긴 소매 상의, 흰색 와이셔츠, 오른손에 흰색 손가방을 든 남자가 "무슨 소리가 났지?"라고 간사이 사투리로 말하며 옷을 갈아입고 도주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46][41]
- '''시즈오카 지국 사건''': 60세 정도, 부스스한 머리, 마쓰야 백화점 종이 가방을 든 남자가 범행 시간대에 지국 주차장과 지국 근처 백화점 앞에서 목격되었다.
- '''리크루트 전 회장 자택 사건''': 키 160cm, 마른 체형, 넓은 어깨, 20-25세, 남색 계열에 앞면이 붉은색인 야구 모자, 검은테 안경, 흰색 마스크, 남색 또는 녹색 우비, 왼쪽에 40-50cm의 가늘고 긴 가방을 든 남자가 목격되었다.[41]
사건 당일과 전날, 지국 주변에서 '''2대의 토요타 마크 II'''가 목격되어 수사 당국은 중요한 단서로 간주했다.[46]
- 1대는 82년형 흰색으로, '''요코하마''' 또는 '''시즈오카''' 번호판이었다.[46] 1987년 5월 2일 오전 6시부터 3일 오후 1시경 사이에 지국 남쪽 민간 주차장 등 현장 주변에서 목격되었고, 범행 직전인 5월 3일 오후 8시 12, 3분경 한신 지국 앞 시도를 2명의 남자가 타고 천천히 달리는 모습 등 총 7명의 목격자 증언이 있다.[47][46] 수사 당국은 약 2,600대를 조사했다.[46]
- 다른 1대는 76년 또는 73년형 와인 레드로, '''미에''' 번호판이었다.[46] 범행 직후로 보이는 시간에 지국 앞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하여 한신 전철 건널목을 감속하지 않고 건너는 모습이 목격되었으며, 수사 당국은 약 4,000대 중 1,500대의 소유자를 특정했다.[46]
마크 II 외에도, 1.5-2톤 적재에 회사명 등이 없는 회색 '''냉동차'''가 5월 3일 오후 8시 20분경 지국 남쪽 약 75미터 교차로 앞에 주차되어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는 사전 답사나 운반 역할로 추정된다.[48]
=== 물증 ===
사건 현장에서는 다양한 증거물이 발견되었다. 한신 지국에서 사용된 흉기는 총신을 30cm 정도로 짧게 개조한 산탄총으로 추정된다. 범인은 두 발을 발사했지만, 현장에 빈 탄피가 남아 있지 않아 2연발 산탄총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목격자는 총구가 하나였다고 증언하여 자동총일 가능성도 있다. 경찰은 총기 소지자와 탄약 구매자를 대규모로 수사했다.
사용된 탄환은 미국 레밍턴사제 7.5호 산탄으로, 1978년경 제조된 것이다. 도쿄 본사에서는 찌그러진 탄립 2개와 5~6개의 파편이 발견되었고, 한신 지국에서는 탄립 470개와 컵 웻지 2개가 발견되었다. 나고야 본사 기숙사에서도 탄립 322개와 컵 웻지 2개가 발견되었다.[42]
1988년 3월 15일자 아사히 신문은 시즈오카 지국 사건에 사용된 피스 캔 폭탄의 유류품에 대해 보도했다. 폭탄은 합판에 고정된 피스 캔(검은색 사냥용 화약, 못), 건전지, 스위치, 전선 등으로 구성되었고, 마쓰야 백화점 종이 봉투에 들어 있었다. 수사 당국은 아키하바라 전기 상가에서 부품을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 '''쇼핑백:''' 마쓰야 백화점 자동 판매기에서 판매된 것으로, 약 4만 장이 유통되었다.
- '''시계:''' 핫토리 세이코 KG533P형으로, 약 1만 개가 유통되었다.
- '''건전지:''' 마쓰시타 전지 공업 본사 공장에서 생산된 "내셔널 네오 하이탑"으로, 연간 800만 개가 생산되었다.
- '''피스 캔:''' 일본 담배 산업 간사이 공장 제품으로, 1987년 11월 30일에 생산된 5만 2680개 중 하나이다.
- '''화약:''' 검은색 사냥용 화약으로, 일본화약에서 연간 약 700kg 생산되었다.
- '''못:''' 의자 안감 천의 가고정 등에 사용되는 "오히라 못"이다.
- '''스위치:''' 메이코샤 제품 "MU3601"로, 100만 개 이상 생산되었다.
- '''판:''' 합판 1장.
- '''기타:''' 솜, 전선, 비닐 테이프, 볼트, 너트, 접착제, 점화원 등.
1987년 5월 6일 교도 통신사 앞으로 도착한 범행 성명서 봉투에는 레이온 섬유 조각 9개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워드프로세서 인쇄물을 봉투에 붙일 때 부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련의 사건에서 3개의 유류 지문과 10개의 장문(손바닥 흔적)이 채취되어 경찰청의 자동 식별 시스템으로 대조되었다.[45]
사건 당일과 전날 지국 주변에서 2대의 토요타 마크 II가 목격되었다.[46]
- '''흰색 82년형 마크 II:''' 요코하마 또는 시즈오카 번호판을 달고 있었으며, 총 7명의 목격자 증언이 있다.[46][47] 수사 당국은 약 2,600대를 조사했다.[46]
- '''와인 레드 76년 또는 73년형 마크 II:''' 미에 번호판을 달고 있었으며, 범행 직후 지국 앞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약 4,000대 중 1,500대의 소유자가 특정되었다.[46]
마크 II 외에도 회색 냉동차가 목격되었는데, 사전 답사나 운반 역할로 추정된다.[48]
나고야 본사 기숙사 사건 현장에서는 족적이 발견되어 신발 밑창이 특정되었다. 이 신발 밑창은 고베시내의 제조업체가 약 7만 4천 켤레를 제조했으며, 9곳의 신발 제조업체에서 캐주얼 신발로 완성되었다.[49]
범인이 착용했던 재킷은 카키색 미군 방한복인 M65 필드 재킷과 유사하며, 전국 10여 곳에서만 대량으로 취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49]
3. 1. 범행 성명 및 협박장
범행 성명에는 샤프제 WD-20(25) 워프로가 사용되었다. 사건 발생까지 4만 1311대가 판매되었고, 약 2만 4000명의 소유자가 파악되었다. 범행 성명이 들어 있던 봉투는 양식 3호 봉투였다. 나고야 시내의 제조사 제품으로, 소매용 대부분은 동 시내에서 판매되었다. 성명서는 정확하게 팔 접기로 되어 있었으며, 종이 접기 작업에 능숙한 동일 인물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3. 2. 목격 정보
한신 지국 사건[41], 나고야 본사 사택 사건[46][41], 시즈오카 지국 사건, 리크루트 전 회장 자택 사건[41] 등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한 목격 정보가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한신 지국 사건: 키 160-165cm, 보통 또는 약간 마른 체형, 20-40세, 검은색 복면, 검은테 안경, 검은색 계통의 스웨터, 바지 차림의 남자가 산탄총 발사 직후 짐을 든 듯한 모습으로 목격되었다.[46] 사건 40분 전에는 야쿠자나 우익 단체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의 짧은 펀치 파마, 험악한 눈매, 회색 점퍼, 흰색 바지 차림의 남자가 지국을 엿보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경찰은 검은테 안경의 남자가 실행범, 짧은 펀치 파마의 남자가 운전수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46]
- 나고야 본사 사택 사건: 키 약 170cm, 다부진 체격, 3, 40대, 검은색 복면, 7:3 가르마, 긴 소매 상의, 흰색 와이셔츠, 오른손에 흰색 손가방을 든 남자가 "무슨 소리가 났지?"라고 간사이 사투리로 말하며 옷을 갈아입고 도주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46][41]
- 시즈오카 지국 사건: 60세 정도, 부스스한 머리, 마츠야 백화점 종이 가방을 든 남자가 범행 시간대에 지국 주차장과 지국 근처 백화점 앞에서 목격되었다.
- 리크루트 전 회장 자택 사건: 키 160cm, 마른 체형, 넓은 어깨, 20-25세, 남색 계열에 앞면이 붉은색인 야구 모자, 검은테 안경, 흰색 마스크, 남색 또는 녹색 우비, 왼쪽에 40-50cm의 가늘고 긴 가방을 든 남자가 목격되었다.[41]
사건 당일과 전날, 지국 주변에서 '''2대의 토요타 마크 II'''가 목격되어 수사 당국은 중요한 단서로 간주했다.[46]
- 1대는 82년형 흰색으로, '''요코하마''' 또는 '''시즈오카''' 번호판이었다.[46] 1987년 5월 2일 오전 6시부터 3일 오후 1시경 사이에 지국 남쪽 민간 주차장 등 현장 주변에서 목격되었고, 범행 직전인 5월 3일 오후 8시 12, 3분경 한신 지국 앞 시도를 2명의 남자가 타고 천천히 달리는 모습 등 총 7명의 목격자 증언이 있다.[47][46] 수사 당국은 약 2,600대를 조사했다.[46]
- 다른 1대는 76년 또는 73년형 와인 레드로, '''미에''' 번호판이었다.[46] 범행 직후로 보이는 시간에 지국 앞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하여 한신 전철 건널목을 감속하지 않고 건너는 모습이 목격되었으며, 수사 당국은 약 4,000대 중 1,500대의 소유자를 특정했다.[46]
마크 II 외에도, 1.5-2톤 적재에 회사명 등이 없는 회색 '''냉동차'''가 5월 3일 오후 8시 20분경 지국 남쪽 약 75미터 교차로 앞에 주차되어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는 사전 답사나 운반 역할로 추정된다.[48]
3. 3. 물증
사건 현장에서는 다양한 증거물이 발견되었다. 한신 지국에서 사용된 흉기는 총신을 30cm 정도로 짧게 개조한 산탄총으로 추정된다. 범인은 두 발을 발사했지만, 현장에 빈 탄피가 남아 있지 않아 2연발 산탄총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목격자는 총구가 하나였다고 증언하여 자동총일 가능성도 있다. 경찰은 총기 소지자와 탄약 구매자를 대규모로 수사했다.사용된 탄환은 미국 레밍턴사제 7.5호 산탄으로, 1978년경 제조된 것이다. 도쿄 본사에서는 찌그러진 탄립 2개와 5~6개의 파편이 발견되었고, 한신 지국에서는 탄립 470개와 컵 웻지 2개가 발견되었다. 나고야 본사 기숙사에서도 탄립 322개와 컵 웻지 2개가 발견되었다.[42]
1988년 3월 15일자 아사히 신문은 시즈오카 지국 사건에 사용된 피스 캔 폭탄의 유류품에 대해 보도했다. 폭탄은 합판에 고정된 피스 캔(검은색 사냥용 화약, 못), 건전지, 스위치, 전선 등으로 구성되었고, 마쓰야 백화점 종이 봉투에 들어 있었다. 수사 당국은 아키하바라 전기 상가에서 부품을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 쇼핑백: 마쓰야 백화점 자동 판매기에서 판매된 것으로, 약 4만 장이 유통되었다.
- 시계: 핫토리 세이코 KG533P형으로, 약 1만 개가 유통되었다.
- 건전지: 마쓰시타 전지 공업 본사 공장에서 생산된 "내셔널 네오 하이탑"으로, 연간 800만 개가 생산되었다.
- 피스 캔: 일본 담배 산업 간사이 공장 제품으로, 1987년 11월 30일에 생산된 5만 2680개 중 하나이다.
- 화약: 검은색 사냥용 화약으로, 일본화약에서 연간 약 700kg 생산되었다.
- 못: 의자 안감 천의 가고정 등에 사용되는 "오히라 못"이다.
- 스위치: 메이코샤 제품 "MU3601"로, 100만 개 이상 생산되었다.
- 판: 합판 1장.
- 기타: 솜, 전선, 비닐 테이프, 볼트, 너트, 접착제, 점화원 등.
1987년 5월 6일 교도통신사 앞으로 도착한 범행 성명서 봉투에는 레이온 섬유 조각 9개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워드프로세서 인쇄물을 봉투에 붙일 때 부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련의 사건에서 3개의 유류 지문과 10개의 장문(손바닥 흔적)이 채취되어 경찰청의 자동 식별 시스템으로 대조되었다.[45]
사건 당일과 전날 지국 주변에서 2대의 토요타 마크 II가 목격되었다.[46]
- 흰색 82년형 마크 II: 요코하마 또는 시즈오카 번호판을 달고 있었으며, 총 7명의 목격자 증언이 있다.[46][47] 수사 당국은 약 2,600대를 조사했다.[46]
- 와인 레드 76년 또는 73년형 마크 II: 미에 번호판을 달고 있었으며, 범행 직후 지국 앞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약 4,000대 중 1,500대의 소유자가 특정되었다.[46]
마크 II 외에도 회색 냉동차가 목격되었는데, 사전 답사나 운반 역할로 추정된다.[48]
나고야 본사 기숙사 사건 현장에서는 족적이 발견되어 신발 밑창이 특정되었다. 이 신발 밑창은 고베 시내의 제조업체가 약 7만 4천 켤레를 제조했으며, 9곳의 신발 제조업체에서 캐주얼 신발로 완성되었다.[49]
범인이 착용했던 재킷은 카키색 미군 방한복인 M65 필드 재킷과 유사하며, 전국 10여 곳에서만 대량으로 취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49]
4. 사건의 배경과 범인상
수사 당국은 범인상에 대해 총기 취급에 능숙하고 "대담하고 냉정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남자"로 규정했다. "동일 인물 또는 동일 그룹에 의한 범행", 막부 말의 "적보대"를 흉내 낸 범행으로 보았다. 효고현 경찰은 사건에 근대사에 정통한 인물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53] 효고현 경찰 경비과 차석은 "범인은 우익이라고 생각한다. 범행 성명에 적혀 있던 '일본 민족 독립 의용군'이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명칭이다"라고 말했다. 게르하르트 힐셔, 호리 유키오 등도 범인을 우익으로 시사하고 있다.
수사 당국은 범인을 "우익의 내정에 정통한 인물"로 보고 있으며, 아사히 신문에 격렬한 적의, 원한을 가지고 "반일"이라는 단어를 다용한 점에 주목했다. 수사 당국은 범인이 도카이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적보대의 주장에 신우익과의 유사성이 인정되지만, 종래의 우익과는 세부적인 점에서 모순되는 점이 많다. 노무라 슈스케도 "적보대는 우익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수사 간부는 "'적보대'가 시즈오카 사건에서 3월 10일 구육군 기념일을 의식하고 행동한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구 일본군 관계자까지 수사 범위를 넓혔다"라고 말했다. 이노우에 히사시는 범인이 "대일본 제국 헌법의 신봉자"라고 보았다.[54] 기무라 마사토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당시)의 교과서 문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대응에 참을 수 없는 세력"의 테러로 보고 있다.[55]
스즈키 구니오는 적보대를 "절망적인 마음을 품고 있던 '잠재 우익'"이라고 추리했다. 전 수사 간부의 설로, 적보대는 경찰이 "잠재 우익"이라고 부르는, 미시마 사상을 계승하는 신우익 운동의 흐름 속에 있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2001년 11월 중순, 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 116호 사건 취재반에 "실행범은 우익 사상을 가진 전 자위관. 사건 당시 30세 정도. 그 후 간사이의 절 주지가 되었지만, 수년 전에 사망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 자위관 X는 자위대에서 레인저 훈련을 받은 후, 우익 단체에 들어가 "우익은 비공개 조직을 가지고 무기 취급에 정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에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경찰은 X의 죽음에 대해 자살·타살을 의심하고 있다.[37]
우익적 표현을 사용하고, 능숙한 문장으로 범행 성명을 작성하며, "도쿄도"를 생략하거나, "도내"로 발신지를 표기하고, "간사이", "주쿄 방면"으로 표현하고, 도쿄 신문을 표적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수사 당국은 "도쿄를 거점으로 전국 규모로 활동하는 중・장년 인텔리 계 우익"으로 범인의 모습을 그렸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두 전 총리에 대한 협박장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문제에 언급했다. 수사 간부는 범인에게 전후 체제에 대한 반감이 있다고 말했다. 아사히 신문은 사건을 정치적 테러로 보고, 전후 체제 부정, 전전 회귀 사상의 소유자로 보고 있다.
4. 1. 시대 상황
1980년대 일본은 나카소네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주의적 색채가 강화되었다.[50] 나카소네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했지만,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고, 중국에서는 전국적인 항의 시위가 발생했다.[50] 고토다 마사하루 관방장관 담화를 통해 공식 참배가 중단되자, 일본 유족 정치 연맹을 비롯한 우익 진영이 반발했다.[50] 후지오 마사유키 문부대신은 한일 병합에 대해 "한국 측에도 책임이 있다"는 발언으로 파면되기도 했다.[50]1986년에는 교과서 문제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50]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현 일본회의) 학자들이 편집한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 『신편 일본사』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비판하자, 나카소네 정권은 기술을 수정했다.[50] 아사히 신문은 이를 "복고풍" 교과서라고 비판했고, 우익 진영은 나카소네 총리를 강하게 비난했다.[50]
국가 기밀법 제정을 둘러싼 논쟁도 격화되었다.[51] 1985년 국가 기밀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언론, 변호사 단체, 일본 펜클럽 등이 비판했고, 일본 신문 협회와 일본 민간 방송 연맹은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51] 아사히 신문은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 폐안을 주장했고, 법안은 심의 미진으로 폐안되었다.[51] 그러나 나카소네 총리는 수정을 거쳐 재제출할 기회를 엿보았다.[51] 통일교의 관련 단체인 국제승공연합이 법 제정 운동을 주도했고,[51] 아사히 신문은 영감상법을 추궁하는 기사를 냈다.[52]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에는 혐오 전화가 쇄도했고, 가나가와 신문 등에도 협박 전화가 집중되었다.
당시 신문계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다.[50] 요미우리 신문은 아사히 신문을 공격하며 보수화, 우경화를 가속화했고, 개헌과 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산케이 신문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50] 요미우리의 나카소네 노선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자유주의, 시민 사회 노선이라는 사상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4. 2. 범인의 사상 및 동기
수사 당국은 아사히 신문의 언론, 보도가 노려졌다고 단정하고 있다. 아사히 신문은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복고조의 교과서 문제"를 "범행의 방아쇠가 된 것으로 보이는 단서"로 보고 있다.[58]하라 스미오는 사건에 대해 "아사히 신문을 노린 언론에 대한 테러, 사상적 공격"이라고 판단하고, 나카소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국가 비밀법 추진, "황국사관이나 국가주의에 근거한 역사 교과서"에 아사히 신문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카소네 비판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사건과의 관련성에서 중시한다"고 했다. 마키 타로도, 중국・한국의 비판에 의한 나카소네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중지, 교과서 수정이 적보대 협박의 원인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호리 유키오도 범인이 복고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차모토 시게마사는 아사히 신문이 국가 비밀법 반대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사건의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에 언급했다. 사건은 우경화하는 정치 동향과 밀접불가분하며, "전쟁과 침략 체제를 부정하는 일체의 언론과 사상"이 노려졌으며, 전쟁 체제 구축에 대한 저항을 붕괴시키려는 의도가 있으며, 권력의 방침을 보완하려는 정치적 역할이 있다고 여겨진다.
"적보대"를 자칭한 범인은 범행 성명과 협박장에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반일 아사히는 50년 전으로 돌아가라"고 전전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점령군정" 이후 "일본인이 일본의 문화 전통을 파괴한다는 좋지 않은 풍조"가 만연, "일본 민족 전체를 멸망"시키는 자를 "반일 분자"라고 칭하며, "일소하라"고 주장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에 대해 보낸 협박장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교과서 문제로 일본 민족을 배신했다", "만약 처형 리스트에서 제외되기를 원한다면, 다케시타 노보루(당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에게 압력을 가하라"고 적혀 있었고,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에 대해서는 "귀하가 8월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지 않으면 우리 대의 처형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겠다"고 적혀 있었다.[60] 또한,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도쿄 신문을 "반일 언론"이라고 칭하고, 아사히, 마이니치에 광고를 게재하는 기업을 "반일 기업"으로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수사 당국은 범인을 우익적 신념의 소유자로 보고 있다. 한편, 피해자인 아사히 신문은 미시마 유키오의 사상 영향을 지적한다. 수사 당국은 사건과 미시마와의 접점에 대해, 미시마 사건을 보도한 아사히 신문에서의 자살 직후의 시신 사진 게재에 대한 반감, 미시마의 장례식과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 습격 사건이 1월 24일로 같은 날이며, 범행 성명문이 미시마의 격문에 닮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두 전 총리에 대한 협박장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문제에 언급했다.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에 대한 협박장을 우익 사상의 소유자로 규정한다고 아사히 신문은 파악한다. 수사 간부는 범인에게 전후 체제에 대한 반감이 있다고 말했고, 아사히 신문은 사건을 정치적 테러로 보고, 전후 체제 부정, 전전 회귀 사상의 소유자로 보고 있다. 점령군이 민주화를 추진한 전후 사회에 대한 증오,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도쿄 신문 등에 대한 분노, 한국에 대한 반감이 있으며, 극우 사상의 국수주의로 추측된다.
사건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적보대"를 자칭한 범인은 범행 성명에서 "반일 아사히는 50년 전으로 돌아가라"고 적어,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사회를 타겟으로 전후를 전면 부정하고 전전으로 되돌리려는 공격을 가했다. 아사히 신문, 일본의 저널리즘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아사히처럼 된다"는 협박이다. 전쟁의 총괄이 불충분하여, 전후에도 우익의 지하 인맥이 남아 주장을 폭력으로 실현하는 토양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건으로 밝혀졌다. 시민에게 선을 넘는 발언에 대한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범인이 헌법 기념일에 습격한 것은 아사히 신문과 헌법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며, 헌법 이념을 구현하려는 아사히 신문을 국가주의자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토다 마사하루는 지금의 세태가 쇼와 시대 한 자릿수 후반(1930-35)과 비슷해지고 있음을 경고하며, 언론을 폭력으로 봉쇄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조심해야 할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일본 본래의 모습을 되돌아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국민도 그렇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이시하라 노부오는 "사건은 언론의 자유가 빼앗겼던 전전을 떠올리게 한다. 불관용한 분위기가 사회를 덮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전전의 국수주의로 연결되고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61]
4. 3. 범인상
야마시타 세이지 전 효고현 경찰 수사1과장은 수사 과정에서 "의혹의 중심지"로 지목된 인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24] 이 인물은 구 일본 육군 연대 기관지에 "나카소네 총리에게 고언한다"를 기고했는데, 내용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문제, 아사히 신문 비판으로, "적보대"의 범행 성명과 유사했다. 야마시타 전 수사1과장은 이 인물의 "경력과 사상, 아사히 신문에 대한 적개심"으로 보아, "가장 먼저 마크되는 것은 어떻게 봐도 자연스럽다"고 했다.[24]수사 당국은 범인상에 대해 총기 취급에 능숙하고 "대담하고 냉정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남자"로 규정했다. "동일 인물 또는 동일 그룹에 의한 범행", 막부 말의 "적보대"를 흉내 낸 범행으로 보았다. 효고현 경찰은 사건에 근대사에 정통한 인물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53] 효고현 경찰 경비과 차석은 "범인은 우익이라고 생각한다. 범행 성명에 적혀 있던 '일본 민족 독립 의용군'이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명칭이다"라고 말했다. 게르하르트 힐셔, 호리 유키오 등도 범인을 우익으로 시사하고 있다.
수사 당국은 범인을 "우익의 내정에 정통한 인물"로 보고 있으며, 아사히 신문에 격렬한 적의, 원한을 가지고 "반일"이라는 단어를 다용한 점에 주목했다. 수사 당국은 범인이 도카이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적보대의 주장에 신우익과의 유사성이 인정되지만, 종래의 우익과는 세부적인 점에서 모순되는 점이 많다. 노무라 슈스케도 "적보대는 우익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수사 간부는 "'적보대'가 시즈오카 사건에서 3월 10일 구육군 기념일을 의식하고 행동한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구 일본군 관계자까지 수사 범위를 넓혔다"라고 말했다. 이노우에 히사시는 범인이 "대일본 제국 헌법의 신봉자"라고 보았다.[54] 기무라 마사토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당시)의 교과서 문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대응에 참을 수 없는 세력"의 테러로 보고 있다.[55]
스즈키 구니오는 적보대를 "절망적인 마음을 품고 있던 '잠재 우익'"이라고 추리했다. 전 수사 간부의 설로, 적보대는 경찰이 "잠재 우익"이라고 부르는, 미시마 사상을 계승하는 신우익 운동의 흐름 속에 있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2001년 11월 중순, 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 116호 사건 취재반에 "실행범은 우익 사상을 가진 전 자위관. 사건 당시 30세 정도. 그 후 간사이의 절 주지가 되었지만, 수년 전에 사망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 자위관 X는 자위대에서 레인저 훈련을 받은 후, 우익 단체에 들어가 "우익은 비공개 조직을 가지고 무기 취급에 정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에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경찰은 X의 죽음에 대해 자살·타살을 의심하고 있다.[37]
우익적 표현을 사용하고, 능숙한 문장으로 범행 성명을 작성하며, "도쿄도"를 생략하거나, "도내"로 발신지를 표기하고, "간사이", "주쿄 방면"으로 표현하고, 도쿄 신문을 표적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수사 당국은 "도쿄를 거점으로 전국 규모로 활동하는 중・장년 인텔리 계 우익"으로 범인의 모습을 그렸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두 전 총리에 대한 협박장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문제에 언급했다. 수사 간부는 범인에게 전후 체제에 대한 반감이 있다고 말했다. 아사히 신문은 사건을 정치적 테러로 보고, 전후 체제 부정, 전전 회귀 사상의 소유자로 보고 있다.
4. 4. 관련 단체 및 인물
적보대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단체와 인물이 수사 선상에 올랐다.잇스이카이는 "반미 반공"을 주장하며 스즈키 쿠니오가 창설한 단체이다.[30] 스즈키 쿠니오는 자신의 저서에서 적보대와 만난 적이 있으며, 그들이 나카소네 전 총리를 "배신자"로 간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30] 잇스이카이는 1990년 5월 17일에 일어난 아이치현 한국인 회관 방화 사건에도 관여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을 기관지 "레콘키스타"에 게재했다.[30]
노무라 슈스케가 설립한 대비회의 후견인 모리타 마사토시는 노무라 슈스케가 적보대와 관련이 있으며, 116호 사건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30] 모리타는 사건 직후 노무라 슈스케로부터 3000만 엔의 현금을 가져오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돈을 30대 남자에게 건넸다고 증언하며, 그 남자가 한신 지국 사건의 실행범이거나 적보대 멤버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30] 노무라 슈스케는 "아사히 신문은 A급 전범이다"라고 말하며 아사히 신문을 강하게 비판했고, 1993년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에서 자결했다.[30] 경찰청 전 최고 간부는 노무라 슈스케 주변에 범인 그룹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으며,[30] 잇스이카이 대표 스즈키 쿠니오는 노무라의 자결이 적보대에 대한 메시지였다고 주장한다.[30]
일본민족독립의용군은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아사히 신문과 미소 영사관에 테러 공격을 가한 단체이다.[30] 이들의 범행 성명은 잇스이카이에 전달되었고, 경찰은 잇스이카이 주변을 철저히 수사했다.[30] 노무라 슈스케는 민독이 자신의 휘하에 있었다고 말했으며, 민독과 적보대가 동일 그룹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30] 스즈키 구니오는 민독과 적보대가 "같은 그룹"이라고 주장하며, 경찰청 전 최고 간부도 "민독에 적보대의 원점이 있다"고 말한다.[30]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는 영감상법 비판을 전개하던 아사히 신문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31][32] 사건 직후 "통일교의 나쁜 소리를 하는 놈은 몰살이다"라는 협박장이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에 도착했고, 탄피 2개가 동봉되어 있었다.[33] 이 탄피는 한신 지국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레밍턴사제였으나, 국산품이라는 차이가 있었다.[34] 경시청은 이 협박장을 악질적인 장난으로 단정했지만,[36] 아리타 요시후는 범인 혹은 범인 관계자가 투함했다고 주장한다.[31] 아리타 요시후는 통일교를 수사하려 하자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수사를 중단시켰다고 수사 간부의 말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31] 효고현 경찰의 전 수사관은 상사로부터 "위에서 중단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라는 말을 듣고 수사 중단을 명령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32]
수사 대상에는 우익 단체[28]와 신우익[29] 등이 포함되었다. 1998년 1월, 경찰청 합동 수사 회의에서 우익 관계자 10명의 리스트가 제시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사건과의 연루를 부인했다.[24]
5. 수사
1987년 5월 7일, 니헤이 쿠니오 경찰청 형사국장은 "극히 반사회성이 강한 사건이므로, 지역 효고현 경찰뿐만 아니라 전국 경찰의 조직을 결집하여 범인을 검거하고, 동기 및 배후 관계를 해명한다"고 결의를 표명했다[22]。 경찰은 사건과의 관련성이 의심되는 한신 지국에서의 취재상의 트러블 유무 등[23], 관련성이 의심되는 다른 사건 (1988년 5월의 YP 체제 타도 동맹 협박장 사건, 1986년 - 1988년의 아시아 독립 의용군 간사이 부대 협박장 사건, 1991년 12월 8일에 일어난 미군 요코스카 기지의 차량 방화 사건 등), 범인과의 관련성이 의심되는 조직·단체, 물증 등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수사 당국은 범행 성명의 분석을 언어학자 등 (복수)에게 의뢰했다. 그에 따르면, 범행 성명의 필자는 "어느 정도 지적인 30대 이상의 인물"이라는 분석 결과가 다수를 차지했다. "반일"이라는 말 ("반일 분자", "반일 언론", "반일 기업" 등 19곳)에도 주목하여 수사했다.
사건으로 "적보대"를 칭하는 범인이 낸 8통의 범행 성명, 협박장은 1명의 동일 인물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일련의 사건에서는 여러 남자가 목격되었고, 효고, 아이치, 시즈오카현 경찰, 경시청은 몽타주나 복장 사진을 만들어 범인을 쫓았다。 연 50만 명이 수사 대상이 되었다.
5. 1. 수사 진행 과정
1987년 5월 7일, 니헤이 쿠니오 경찰청 형사국장은 "극히 반사회성이 강한 사건이므로, 지역 효고현 경찰뿐만 아니라 전국 경찰의 조직을 결집하여 범인을 검거하고, 동기 및 배후 관계를 해명한다"고 결의를 표명했다[22]。 경찰은 사건과의 관련성이 의심되는 한신 지국에서의 취재상의 트러블 유무 등[23], 관련성이 의심되는 다른 사건 (1988년 5월의 YP 체제 타도 동맹 협박장 사건, 1986년 - 1988년의 아시아 독립 의용군 간사이 부대 협박장 사건, 1991년 12월 8일에 일어난 미군 요코스카 기지의 차량 방화 사건 등), 범인과의 관련성이 의심되는 조직·단체, 물증 등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수사 당국은 범행 성명의 분석을 언어학자 등 (복수)에게 의뢰했다. 그에 따르면, 범행 성명의 필자는 "어느 정도 지적인 30대 이상의 인물"이라는 분석 결과가 다수를 차지했다. "반일"이라는 말 ("반일 분자", "반일 언론", "반일 기업" 등 19곳)에도 주목하여 수사했다.
사건으로 "적보대"를 칭하는 범인이 낸 8통의 범행 성명, 협박장은 1명의 동일 인물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일련의 사건에서는 여러 남자가 목격되었고, 효고, 아이치, 시즈오카현 경찰, 경시청은 몽타주나 복장 사진을 만들어 범인을 쫓았다。 연 50만 명이 수사 대상이 되었다. 시즈오카 지국 폭파 미수 사건 현장 부근에서 채취된 지문이 간토 지방의 다른 사건에 관련된 50대 남성의 지문과 일치했다.[27]
5. 2. 수사의 문제점 및 한계
6. 사회의 반응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은 언론인 2명을 살상하여 언론 탄압 사건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신문·잡지 등에서는 당시 "표현의 자유"에 대한 테러리즘이라는 보도가 이루어졌다.[62][63][64]
아사히 신문은 "범인에게 어떤 변명이 있더라도, 이러한 폭력이 조금이라도 정당화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사설 1987년 5월 5일)라고 비판했다. 일본신문협회는 "언론·보도 기관에 대한 전례 없는 흉악한 범죄이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폭거이다. 기자를 살상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당시 총리는 "표현의 자유, 혹은 언론의 자유,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도전으로,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세상에도 헌법 옹호를 위해서도 엄중히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노우에는 기자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개인의 생명을 "최대한 존중을 필요로 한다"고 한 일본국 헌법 제13조에 어긋나며, "주권 재군주에서 주권 재민이라는 일본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범인이야말로 "반일 분자"라고 비판했다.
니시오 간지도 범인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두 총리에게 보낸 협박장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언급한 것에 대해 "야스쿠니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다" "민폐다" "우파도 좌파도 언론에 대한 폭력은 안 된다"고 비판했다. 오타니 아키히로도 "백 퍼센트 용서할 수 없다" "범인은 '기자를 쏜다'는 것으로 '언론을 쐈다'"고 말했다. 아리타 요시후도 "사상에 사는 자로서의 자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침묵은 단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사쿠라이 요시코도 "아사히가 말하기 전에, 언론에는 언론으로 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대전제"라고 말한 다음, 살해된 기자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언론 테러의 상징적인 희생자"라고 주장하고 있다.[65]
1997년 말, "어떤 조직의 사람"이라고 칭하며 아사히 신문 고베 지국에 살해된 기자의 유족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에서는 수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산탄총에 관해, SKB사 제품을 선택했다는 점 등 구체적인 내용이 언급되었다. 전화를 건 남성은 간사이 지방에 거주하는 50대 남성으로, 대학 시절 미시마 유키오를 연구하는 서클을 창립한 인물이었다. 그는 효고현 경찰의 임의 동행 조사에서 "미끼가 되어 수사의 시선을 끌려고 했다. 적보대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익 외에도 보수파 일부에서는 범인의 주장에 공감하는 자가 있었다. 나카무라 센은 산업경제신문사의 『정론』 2001년 5월호에서 아사히의 역사 교과서 문제 보도를 두고 "아직 뜸이 부족한 듯하다"라고 평가했다. 아사히의 항의에 편집부는 사죄문을 게재했지만, 나카무라는 "적보대가 뜸을 뜰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객관적으로 서술했을 뿐이다"라고 반론했다.
2012년에는 극우 단체 주최[66]로 적보대를 칭찬하는 '아사히 신문 습격 25주년 축하 국민 행진'이 개최되는[67] 등, 테러 행위에 찬동하는 인물이 일정 수 존재하고 있다.
한신 지국 습격 사건 20여 일 후, 사건을 긍정하는 기사를 쓴 인물이 있었다. 그는 좌파 학생들에게 습격당해 육상자위대에 입대했고, 미시마 사건 후 자위대를 그만두었다. 경단련 습격 사건에도 가담했다. 그는 우익 단체 기관지에 "반일 매국 아사히 신문은 왜 습격당하는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쓰고, "아사히 신문은 습격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적보대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미제 사건 (NHK 스페셜)에서는 "적보대 사건"을 "어떤 우익 단체의 대표가 중요한 수사 대상으로 떠올랐다"고 소개했다. 우익 단체의 대표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아사히 신문의 보도 오류를 지적하며, 한신 지국 사건만 이야기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주장했다. 히다 타케시 기자는 언론은 지면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1996년에는 "일본주의극단 명토의 비각" 등을 사칭한 협박장이 사회과 교과서 집필자나 출판사 등에 보내졌다. 협박장에는 "적보대 정신도 상기합시다" 등의 내용이 쓰여 있었다.
2009년에는 "적보대"라고 인쇄된 종이와 실탄이 NHK 등에 배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인은 나고야시 나카무라국[68]이다. 2010년에도 "적보대"를 칭하며 수상한 물건을 재일 공관 등에 보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1년에는 간 나오토 총리와 오자와 이치로 전 민주당 대표에게 "적보대"를 자칭하는 협박문이 보내졌다.
한신 지국과 나고야 본사 기숙사 습격 사건 이후 "폭탄을 설치했다", "기자가 또 살해당할 것이다"라는 협박 전화가 300건 걸려왔다. 아사히 신문 관련 시설에 대한 방화 및 파손 사건도 발생했다. 2010년에는 아사히 신문 미토 총국으로 "적보대의 산탄총 습격 사건을 잊었는가"라는 협박문이 팩시밀리로 보내졌다.
2012년에는 산탄총 실탄과 협박장이 "적보대"라고 적힌 봉투에 담겨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로 보내졌고,[73] 아사히 신문 마에바시 지국에는 적보대를 지지하는 전단이 투입되었다.[74] 아사히 신문을 비판하는 웹사이트와 2ch에는 "적보대는 잘했다", "모두 죽였어야 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6. 1. 언론의 반응
언론인 2명을 살상한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은 언론 탄압 사건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신문·잡지 등에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테러리즘이라는 보도가 이루어졌다.[62][63][64]아사히 신문은 "범인에게 어떤 변명이 있더라도, 이러한 폭력이 조금이라도 정당화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사설 1987년 5월 5일)라고 주장했다. 일본국 헌법 제13조는 개인의 생명을 "최대한 존중을 필요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노우에는 기자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주권 재군주에서 주권 재민이라는 일본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범인이야말로 "반일 분자"라고 비판했다.
일본신문협회는 "언론·보도 기관에 대한 전례 없는 흉악한 범죄이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폭거이다. 기자를 살상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당시 총리는 "표현의 자유, 혹은 언론의 자유,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도전으로,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세상에도 헌법 옹호를 위해서도 엄중히 저지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니시오 간지는 범인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두 총리에게 보낸 협박장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언급한 것에 대해 "야스쿠니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다" "민폐다" "우파도 좌파도 언론에 대한 폭력은 안 된다"고 비판했다. 오타니 아키히로는 "백 퍼센트 용서할 수 없다" "범인은 '기자를 쏜다'는 것으로 '언론을 쐈다'"고 말했다. 아리타 요시후는 "사상에 사는 자로서의 자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침묵은 단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사쿠라이 요시코는 "아사히가 말하기 전에, 언론에는 언론으로 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대전제"라고 말한 다음, 살해된 기자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언론 테러의 상징적인 희생자"라고 주장하고 있다.[65]
각 언론은 테러 등 언론의 자유 탄압에 대한 대응을 분명히 하고 있다.[82]
- 아사히 신문은 지면을 통해 여론에 호소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언론 탄압에도, 협박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과감하게 싸우는 데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 아사히 신문의 논조에는 반대하지만 폭력으로 압살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 볼테르 "나는 당신의 의견에는 반대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주장할 권리에는 찬성한다").
- 신문 윤리 강령의 이념에 따라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밝혔다.
- 목숨을 걸고 펜의 힘을 믿고 계속 써 내려간다고 밝혔다.
- 보도 압살 움직임에는 공공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 언론에는 언론으로 대처하며, 단호하게 싸우는 자세를 관철하고 싶다고 밝혔다.
- 경계해야 할 것은 테러와 같은 명확한 형태의 것만은 아니며, 끊임없는 자문자답과 노력도 계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 폭력으로 언론의 자유를 압살하려는 움직임에는 펜으로 단호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고 밝혔다.
- 보도의 자유를 뺏는 움직임은 스스로 밝히고, 독자들의 지지와 이해를 구한다고 밝혔다.
- 보도 기관은 단결하여 용서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며, 자신의 매체를 통해서도 시청자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 그러한 사실을 의연한 태도로 보도함과 동시에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고 밝혔다.
- 언론으로써만 맞설 수 있으며, 보도 활동을 강화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 보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보루이며,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의연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러 언론사들의 사설 또한 이 사건을 비판했다.
- 아사히 신문 (1989년 3월 1일, 1989년 3월 13일, 1989년 5월 13일, 1997년 4월 28일, 1999년 5월 3일, 2000년 5월 3일, 2002년 1월 8일, 2004년 5월 4일)
6. 2. 시민 사회의 반응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으로 언론인 2명이 살상되자, 언론은 이를 "표현의 자유"에 대한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고 강하게 비판했다.[62][63][64] 아사히 신문은 사설을 통해 폭력의 정당화 불가론을 주장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언론의 자유와 헌법적 권리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며 엄중 저지를 천명했다. 일본신문협회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폭거로 규정하고, 기자 살상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니시오 간지는 범인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언급한 것을 두고 "야스쿠니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다"며 우려를 표하고, "우파도 좌파도 언론에 대한 폭력은 안 된다"고 비판했다. 오타니 아키히로는 범행을 "백 퍼센트 용서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고, 아리타 요시후는 "사상에 사는 자로서의 자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침묵은 단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사쿠라이 요시코는 "언론에는 언론으로 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대전제"라며, 살해된 기자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언론 테러의 상징적인 희생자"라고 주장했다.[65]
이노우에는 기자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가 일본국 헌법 제13조에 어긋나며, "주권 재군주에서 주권 재민이라는 일본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범인이야말로 "반일 분자"라고 비판했다.
6. 3. 정치권의 반응
2023년 2월 2일, 일본 공산당의 미야모토 타케시 의원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타니 코이치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에게 효고현 경찰 수사1과가 작성한 자료를 제시하며 사건의 재수사를 요구했다. 타니 위원장은 "일련의 사건은 용서할 수 없는 폭거로,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공소시효 성립 후에는 수사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 "범인이 스스로 자수한 경우 등 '''특단의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경찰로서 사실 확인 등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재수사 가능성을 포함한 답변을 했다.[26]1979년 국제승공연합 등이 스파이 방지법 제정 촉진 국민회의를 발족시켰고,[59] 1984년 4월 자민당의 대부분의 국회의원, 민사당 일부 의원, 경제계, 법조계의 보수파와 보수적 문화인 등이 스파이 방지법 제정 촉진 의원·유식자 간담회를 시작했다.[59] 1985년 6월 자민당이 국가기밀법 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동 법안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최고형을 사형으로 하는 스파이 방지법에 대해 신문계에서는 반대 운동이 확산되어,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도쿄 신문, 가나가와 신문, 류큐 신보,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 홋카이도 신문, 교도 통신 등이 반대 캠페인을 벌였고, 아사히는 사설에서 폐안을 주장했다. 1986년 11월 25일 지면은 "국가기밀법 반대 의회 증가"라는 제목으로, 전국 조사 특집을 싣는 등 아사히 신문이 법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수사 당국은 이 일에 촉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7. 사건의 영향 및 의의
7. 1. 한국에 미친 영향
1990년 5월 17일 오후 7시 25분경, 나고야의 아이치 한국인회관(민단 계열)이 방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5] 범행 성명에서는 당시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반대하며 "반일적인 재일 한국인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7. 2.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
"적보대"를 자칭한 범인은 범행 성명에서 "반일 아사히는 50년 전으로 돌아가라"고 적어,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사회를 타겟으로 전후를 전면 부정하고 전전으로 되돌리려는 공격을 가했다. 아사히 신문, 일본의 저널리즘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아사히처럼 된다"는 협박이었다. 전쟁의 총괄이 불충분하여, 전후에도 우익의 지하 인맥이 남아 주장을 폭력으로 실현하는 토양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건으로 밝혀졌다. 시민에게 선을 넘는 발언에 대한 공포심을 안겨주었다.범인이 헌법 기념일에 습격한 것은 아사히 신문과 헌법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며, 헌법 이념을 구현하려는 아사히 신문을 국가주의자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토다 마사하루는 지금의 세태가 쇼와 시대 한 자릿수 후반(1930-35)과 비슷해지고 있음을 경고하며, 언론을 폭력으로 봉쇄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조심해야 할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일본 본래의 모습을 되돌아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국민도 그렇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시하라 노부오는 "사건은 언론의 자유가 빼앗겼던 전전을 떠올리게 한다. 불관용한 분위기가 사회를 덮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전전의 국수주의로 연결되고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61]
7. 3. 교훈 및 과제
"적보대"를 자칭한 범인은 범행 성명에서 "반일 아사히는 50년 전으로 돌아가라"고 적어,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사회를 타겟으로 전후를 전면 부정하고 전전으로 되돌리려는 공격을 가했다. 아사히 신문, 일본의 저널리즘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아사히처럼 된다"는 협박이었다. 전쟁의 총괄이 불충분하여, 전후에도 우익의 지하 인맥이 남아 주장을 폭력으로 실현하는 토양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건으로 밝혀졌다. 시민에게 선을 넘는 발언에 대한 공포심을 안겨주었다.범인이 헌법 기념일에 습격한 것은 아사히 신문과 헌법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며, 헌법 이념을 구현하려는 아사히 신문을 국가주의자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토다 마사하루는 지금의 세태가 쇼와 시대 한 자릿수 후반(1930-35)과 비슷해지고 있음을 경고하며, 언론을 폭력으로 봉쇄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조심해야 할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일본 본래의 모습을 되돌아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국민도 그렇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시하라 노부오는 "사건은 언론의 자유가 빼앗겼던 전전을 떠올리게 한다. 불관용한 분위기가 사회를 덮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전전의 국수주의로 연결되고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61]
8. 아사히 신문사의 대응
아사히 신문사 116호 사건 취재반 캡을 맡았던 히다 타케시는 저서 『기자 습격 적보대 사건 30년째의 진실』에서 "적보대"를 자칭한 범인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너희는 단순한 살인 집단인가. 아니면 사상범인가. 만약 사상범이라면 일련의 아사히 신문사 습격 사건을 일으킨 경위에 대해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가. 너희는 범행 성명서에서 "우리 대는 권력과의 싸움에서 옥쇄한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런 용감한 말과는 달리, 15년 전 공소시효가 성립될 때까지 도망쳤다. 지금, 너희가 사건의 진상을 말해도, 형사 책임을 물을 수는 더 이상 없다. 그러니, 만약 이 책을 읽었다면, 나타나서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 왜 한신 지국을 습격했는가. 왜 코지리 기자를 사살했는가. 왜 도중에 아사히 신문사 이외의 공격 대상으로 바꿨는가. 애초에, 무엇을 위해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는가. 나타날 곳은 아사히 신문사여도 좋고, 이 책의 출판을 맡아준 이와나미 서점이어도 상관없다. 너희가 원한다면, 나는 너희의 주장을 꼼꼼히 듣고 세상에 정확하게 전달할 것을 약속한다. 적보대여. 도망치고 숨지 마라。
8. 1. 아사히 신문 116호 사건 취재반
습격 사건 직후 아사히 신문사 내에 "특명 취재반"이 결성되었으며[75], 취재반 기자는 "무조건 범인을 쫓아라. 기사는 쓰지 마라.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신문 기자의 사명이다"라는 지시를 받았다[76]. 공소시효 만료 후에도 적보대의 정체를 쫓고 있다. 1989년, 취재반은 『습격 사건 취재 매뉴얼』(84페이지)을 작성하여 전국 지국에 배포했다. 서두에는 "적보대의 정체를 풀 실마리가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소한 정보도 놓치지 말고 취재반에 보고하라"고 적혀 있다. 2001년 5월부터 1년간 "15년째 보고"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매달 지면에 게재했다.8. 2. '보는·듣는·말하는'은 지금
아사히 신문사는 나고야 본사 사택 습격 사건 이후, 언론을 주제로 한 '''"보는·듣는·말하는"은 지금'''의 게재를 시작했다. 사회면에 매년 5월 3일의 헌법 기념일을 포함한 헌법 주간과 10월의 신문 주간 전후에 게재되고 있다(공소 시효 이후는 헌법 주간 전후). 10년 분의 연재가 『언론의 부자유』로 묶여 있다.8. 3. 언론의 자유를 생각하는 5·3 집회
1988년, 아사히 신문 노동조합은 한신 지국 습격 사건 추도 집회를 열었다. 이후 매년 5월 3일에 "언론의 자유를 생각하는 5·3 집회"가 개최되어 언론의 자유, 보도의 자유를 생각하고 평화, 민주주의, 헌법을 논하는 자리가 되고 있다.9. 추모 시설 및 관련 자료
9. 1. 아사히 신문 습격 사건 자료실
2006년 4월 13일,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의 신사옥 3층에 "아사히 신문 습격 사건 자료실"이 개설되었다. 이 자료실은 기자 2명이 살상된 한신 지국 사건을 중심으로 언론 기관을 노린 테러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시민에게 사건을 알리고, 언론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77]개관부터 2012년 3월 말까지 견학자는 사원을 포함하여 4,000명을 넘어섰다. 전시물은 이누카이 기자와 코지리 기자가 총격을 받은 편집실에서 채취한 산탄알, 피로 물든 원고지, 중상을 입은 이누카이 기자가 착용했던 산탄알 흔적이 남아 있는 볼펜과 지갑,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응접 세트, 경찰 감정을 위해 잘라낸 흔적이 남은 범행 성명문 4통, 범인이 성명문에 사용한 워드프로세서, 용지, 봉투의 동일 모델, 범인이 착용했던 복면, 신발, 의류 유사품, 유영, 사건 관련 사진·연표·서적 등 아사히 신문이 유족과 관계자로부터 제공받은 것들이다.[78]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지만, 핏자국이 묻은 점퍼와 산탄으로 몸이 벌집이 된 것을 알 수 있는 엑스레이 사진도 있다. 자료실 견학에는 예약이 필요하다.
9. 2. 고지리 기자 추도집
1993년 5월 3일, 순직한 고지리 도모히로 기자를 추모하는 『내일도 말하자 조기가 바람에 울리듯이』(편집·발행 고지리 기자 추도집 간행 위원회)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고지리 기자가 집필한 기사, 성장 과정, 생전 사진, 관련 연표(116호 사건의 경과와 사회), 유족과 아사히 신문사 동료 등 관계자, 116호 사건 수사 관계자, 고지리 기자가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의 생각 등이 소개되어 있다.제목은 116호 사건 취재반의 "맹세의 말"에서 따왔다. 추도집에는, 문답무용의 폭력은 비열하며, 폭력으로 펜의 힘은 약해지지 않는다, 사건을 잊지 않고 이야기하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으며, "사건이 해결되는 날까지 범인과 계속 싸우겠다는 맹세의 증표로 삼고 싶다"고 적혀있다.
10. 미디어에서의 재조명
NHK는 2017년 5월 2일 NHK 뉴스 오하요 일본에서 "언론에 대한 테러" 30년의 물음'이라는 제목으로 적보대 사건을 다루었고,[80] 2018년 1월 27일과 28일에는 NHK 스페셜미해결 사건 File.06 "적보대 사건"'을 통해 사건을 재조명했다.[80] 제1야에서는 쿠사나기 츠요시, 카미지 유스케 등이 출연한 실록 드라마를, 제2야에서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80]
요미우리 TV 방송은 2016년 1월 17일 거기까지 말하는 위원회NP에서 '미해결 사건 파일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을 방영했다. TV 아사히는 2002년 4월 28일 선데이 프로젝트에서 '아사히 신문 습격 사건 15년째의 진실'을, 2002년 5월 2일 뉴스 스테이션에서 '시효 임박 아사히 신문 습격 사건'을 통해 사건을 다루었다.
TBS은 2002년 4월 28일 JNN 보도특집 '아사히 신문 습격 사건 공소 시효 직전! 적보대의 어둠에 다가선다'를, 2002년 5월 3일 구시키 테츠야 NEWS23에서 '비열한 테러 드디어 공소 시효'를, 2017년 5월 20일 JNN 다큐멘터리 더 포커스에서 '특명 적보대를 쫓아라 ~아사히 신문 습격 사건 30년'을 방영하여 사건을 집중 조명했다.
문예춘추 (잡지)는 2023년 6월호에서 '아사히 습격 '적보대'의 정체'[81]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FACTA는 2023년 7월호에서 히다 타케시의 '문예춘추에 '나의 이론' 노무라 슈스케 씨는 흑막이었는가?'라는 기사를 통해 적보대 사건을 분석했다.
주간문춘은 1997년 5월 15일호에서 '두 명 살상,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으로부터 10년, 적보대와 통일교를 잇는 점과 선'을, 2003년 1월 2, 9일 신년 특대호에서 '경찰청 비밀 보고서 아사히 총격 '적보대 사건' 좁혀진 9명의 '용의자''를 게재했다.
선데이 매일은 1997년 5월 11, 18일 합병호에서 '아사히 신문 습격 사건 - 10년째의 경악, 이것이 116호 범인의 '얼굴'이다!'라는 기사를 통해 사건을 다루었다. 창 (잡지)는 1988년 6월호에서 ''적보대' 담당 기자가 말하는 '범인상''을, 세계 (잡지)는 2002년 5월호에서 '보이지 않는 '적보대'를 쫓아서 -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의 15년'을 게재했다. 군사연구 (잡지) 별책은 2008년 1월호에서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사건 침묵의 테러리스트 '적보대'의 수수께끼'를 다루었다.
토노오카 슌세이는 2006년 신문 기자는 왜 살해되었는가를 출판했으며, 모리 에이는 2018년 총감 특명 방황하는 경관 3을 통해 적보대 사건을 소설화했다. 시바타 테츠타카는 2024년 암살을 출판했고, 야마시타 세이지는 2022년 두 개의 가시 효고현 경찰 수사 비록을 통해 사건을 다루었다. 아리타 요시후는 2024년 아무도 쓰지 않았던 통일교를 출판했으며, 히토츠바시 후미야는 2002년 "적보대"의 정체를 출판했다. 오타니 아키히로는 1987년 신문 기자가 위험하다 - 안팎으로부터의 포화를 출판했다.
경찰청은 1988년 쇼와 63년 경찰 백서에서 적보대 사건을 언급했으며, 타와라 요시후미는 1997년 다큐멘트 "위안부" 문제와 교과서 공격을 통해 사건을 분석했다. 스즈키 쿠니오는 적보대의 비밀 - 아사히 신문 연속 습격 사건의 진상(1990), 테러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과 적보대(1988), 공안 경찰의 수법(2004) 등 여러 저서를 통해 적보대 사건을 다루었다.
SL 출판회는 1988년 모략으로서의 아사히 신문 습격 사건 적보대의 환상과 매스 미디어의 현재를 출판했다. 벳사츠 타카라지마 편집부는 미궁入り!―쇼와·헤이세이 미해결 사건의 금기(2001)와 만화와 중대 증언으로 완전 추리!쇼와·헤이세이 콜드 케이스(2008)를 통해 사건을 조명했다. 아리타 요시후는 1997년 주간문춘에 '두 명 살상,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 습격 10년, 적보대와 통일교를 잇는 점과 선'을 기고했다. 2015년 8월 Journalism에는 '자유로운 사회'를 향한 총탄 한신 지국 습격 사건을 쫓아 28년이 게재되었고, 2023년 6월 분게이슌주 (잡지)에는 아사히 습격 '적보대'의 정체가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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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言論はテロに屈しない 阪神支局襲撃20年
朝日新聞社설
2007-05-01
[59]
웹사이트
「スパイ防止法制定促進議員・有識者懇談会」役員名簿
http://chojin.com/pe[...]
[60]
뉴스
朝日新聞、2001年8月3日
[61]
방송
NHK未解決事件 File.6 赤報隊事件
[62]
뉴스
朝日新聞、1987年5月5日。
[63]
뉴스
毎日新聞、1987年5月5日。
[64]
뉴스
読売新聞、1987年5月7日。
[65]
간행물
週刊文春、2014年10月23日号
[66]
기타
主催/5・3国民行進実行委員会・協賛/[[排害社]]、防共新聞社、きなの会、日本侵略を許さない国民の会、[[国家社会主義日本労働者党]]、日の丸友の会、フジモンズなど
[67]
웹사이트
https://haigai.exblo[...]
[68]
뉴스
南日本新聞2009年10月22日
[69]
뉴스
[[東京新聞]]、2009年2月26日。
[70]
뉴스
朝日新聞2009年3月19日付け朝刊
[71]
뉴스
6月9日、毎日新聞6月11日
朝日新聞
null
[72]
뉴스
共同通信
2007-05-24
[73]
뉴스
朝日新聞
2012-05-16
[74]
뉴스
産経新聞
2012-05-18
[75]
뉴스
朝刊
朝日新聞
1997-04-28
[76]
기타
NHK未解決事件赤報隊事件 実録ドラマ
[77]
Youtube
兵庫「みる・きく・はなす」展
https://www.youtube.[...]
[78]
뉴스
記憶伝える資料室、生々しい傷痕 阪神支局襲撃30年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17-04-24
[79]
서적
明日も喋ろう 弔旗が風に鳴るように
小尻記者追悼集刊行委員会
[80]
웹사이트
NHKスペシャル 未解決事件
https://www.nhk.or.j[...]
2022-05-11
[81]
웹사이트
https://bunshun.jp/a[...]
[82]
뉴스
朝日新聞
2003-03-09
[83]
웹사이트
https://www.nhk.o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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