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경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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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지(鄭地)는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공민왕 말년에 중랑장으로 시작하여 왜구 대책을 건의하여 안무사 겸 왜인추포만호로 임명되었으며, 우왕 시대에는 예의판서, 해도원수 등을 역임하며 관음포 해전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는 등 잦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이후 왕실 복위를 주장하다 유배되었고, 석방 후 판개성부사를 지내다 사망했다. 조선 개국 후 회군 공신으로 2등에 녹훈되었으며, 사후 경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업적을 기려 사당인 경렬사가 건립되었고,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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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경렬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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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정지 |
한글 | 정지 |
한자 | 鄭地 |
히라가나 | 데이 치 |
가타카나 | チョン ジ |
로마자 표기 | Jeong Ji |
군인 정보 | |
시대 | 고려 말기(14세기) |
생몰 | 충목왕 3년(1347년) ~ 공양왕 3년(1391년) 10월 15일(45세) |
초명 | 정준제(鄭准提) |
시호 | 경렬공(景烈公) |
묘소 |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176번지 |
관직 | 중랑장(中郞將) 시구르치(速古赤) 전라도안무사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 예의판서(禮儀判書) 순천도병마사(順天道兵馬使)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 밀직(密直) 해도원수(海道元帥) 해도부원수(海道副元帥)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양광 · 전라 · 경상 · 강릉도(江陵道)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 문하평리(門下評理) 해도원수 사도도지휘처치사(海道元帥 四道都指揮處置使) 안주도원수(安州都元帥) 양광 · 전라 · 경상도 도지휘사(都指揮使) 양광 · 전라 · 경상도의 절제체찰사(節制體察使) 겸 총초토영전선성사(總招討營田繕城事)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
주군 |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
가문 | 하동(河東) |
사당 | 경렬사(景烈祠) |
2. 생애
공민왕 말년, 정지는 중랑장으로서 1374년 정월 시구르치로 대궐에서 숙위하던 중 왜구 방어 대책을 건의하여 왕의 인정을 받았다. 검교중랑장 이희(李禧)가 수전 강화책을 제안하자, 왕은 정지가 준비해 온 왜구 대책 글을 보고 감탄하여 그와 이희를 각각 전라도와 양광도의 안무사 겸 왜인추포만호로 임명했다.[1]
우왕 3년(1377년) 6월, 정지는 예의판서 순천도병마사로서 왜구를 격퇴하여 18명의 목을 베고 3명을 사로잡았다. 그해 겨울에도 왜구를 쳐서 40여 명을 참수하고 2명을 생포하는 공을 세워, 우왕으로부터 안장 얹은 말과 나견을 하사받았다.[5] 4년(1378년)에는 영광, 광주, 동복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도순문사 지용기(池湧奇) 등과 함께 옥과현 미라사(彌羅寺)에서 몰살하고 말 1백 필을 획득, 은(銀) 50냥을 하사받았다. 이어 담양현의 왜구를 공격해 17명을 참수했다.[5] 그러나 5년(1379년) 2월, 순천, 조양, 진원 등지에 침입한 왜구와의 교전에서는 패배했다.
6년(1380년) 3월, 정지는 원수 최공철(崔公哲) 등과 함께 전라도 왜구 방어 임무를 맡았다. 최무선(崔茂宣) 등이 진포 해전에서 화포(火砲)로 왜구 선단 5백 척을 궤멸시키는 동안, 정지 등은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패전, 5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7년(1381년) 6월,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道元帥)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심덕부와 교체되었다. 이듬해(1382년) 다시 해도원수가 되어 진포에 들어온 왜구 선단 50척을 군산도까지 추격, 배 4척을 획득했다.[5]
1383년 5월, 해도부원수로서 전함 47척을 이끌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 중, 왜구 선단 120척의 경상도 연해 공격에 류만수의 구원 요청을 받고 출격, 섬진에서 합포 사졸을 징집, 남해 관음포 인근 박두양(朴頭洋)에서 왜구를 대파했다(관음포 전투).[5] 이후 병으로 사직했다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고, 11월에 전함 건조를 통한 왜적 대비를 건의했다. 12월, 다시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양광 · 전라 · 경상 · 강릉도(江陵道)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에 임명되었다.
10년(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임명되었으나, 우왕에게 왜적 소탕 부진을 질책받았다. 우왕 12년(1386년) 2월, 해도원수 사도도지휘처치사(海道元帥 四道都指揮處置使)가 되었다. 13년(1387년) 왜구 본거지 공격을 자청했다. 우왕 14년(1388년) 요동 정벌에 안주도원수(安州都元帥)로 출정했다가 이성계를 따라 회군, 윤소종(尹紹宗)을 통해 이성계에게 곽광전(霍光傳)을 바치게 하여 조인옥(趙仁沃)의 폐가입진(우왕 폐위) 논의를 유도했다.[1]
같은 해 8월, 양광 · 전라 · 경상도 도지휘사(都指揮使)로서 함양에서 운봉 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에 이른 왜적을 도순문사(都巡問使) 최운해(崔雲海) 등과 격파, 58명을 참수하고 말 60여 필을 획득했다. 군량 부족으로 추격하지 못했으나, 당시 "이번 전투가 아니었다면 3도 백성이 거의 다 죽었을 것"이라 평가받았다.[5]
공양왕 원년(1389년), 양광 · 전라 · 경상도 절제체찰사(節制體察使) 겸 총초토영전선성사(總招討營田繕城事)가 되었으나, 김저(金佇)의 우왕 복위 모의에 연루되어 유배, 공양왕 2년(1390년) 계림에서 횡천(橫川)으로 이배되었다.[5] 5월, 윤이-이초의 옥사에 연루, 이색(李穡) 등과 청주(淸州) 감옥에 투옥,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윤소종 소개 및 곽광전 진상이 윤이-이초와 무관함을 주장하며 "왕씨 복국에 죄 없이 죽는 것이 애통하다"라고 말했다. 곧 풀려나 외방 편의종사가 허락되었다.[5]
공양왕 3년(1391년), 김저, 변안열 연좌 무고 상소로 석방, 광주 별업에 은거 중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소환되었으나 임명되지 못하고 광주에서 45세로 사망했다.[5] 조선 개국 후, 1392년 8월 공신도감 설치, 9월 이성계 추대 신하 44인 공신 책록 때, 정지는 회군 공신 2등으로 녹권(錄券)과 토지 50결을 하사받았다. 아들 정경 (鄭耕)은 1420년 종2품 전주부윤까지 올랐다.[5]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1365년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관직에 올랐다.[1] 1374년, 왕에게 왜구 대책을 상서하여 공을 세웠으며, 수군 창설에도 크게 관여했다.[1]1377년 여름, 순천도병마사로서 순천·낙안 등[4]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여 18급을 참하고 3명을 포로로 잡았다. 같은 해 겨울, 다시 왜구를 토벌하여 40급을 참하고 2명을 포로로 잡았다.[5] 1378년 10월, 영광·광주·동복[6]에 왜구가 침입하자, 도순문사인 지용기, 조전원수 이린, 한방언 등과 함께 추격했다. 왜구가 미라사에 들어가자 포위하여 불을 지르고, 마음대로 화살을 쏘아 왜구는 거의 죽었다. 이 전투에서 정지 등은 100여 필의 말을 획득했다.[5] 같은 해 11월, 담양현[7]에 침입한 왜구를 지용기와 함께 토벌하여 17급을 참했다.[5]
1382년 10월, 왜선 50척이 진포에 침입하자, 해도원수로서 이를 격퇴하고, 군산도까지 추격하여 4척을 잡았다.[5]
1383년에도 침입한 왜구를 대파했다.[5] 같은 해, 대선 120척으로 이루어진 왜구의 군세가 침입해 왔다. 정지는 전함 47척을 이끌고 나주의 목포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합포 원수 유만수로부터 급보를 받고 밤낮없이 진군하여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경계에까지 도달, 여기서 병사를 징집했다. 이때 이미 왜구는 남해의 관음포에 도달해 있었다.[5] 정지는 신속하게 박두양에 이르러, 여기서 왜구와 싸워 화포를 사용하여 섬멸했다.[8][2][9] 1388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왜구가 양광, 전라, 경상의 삼도에 침입하자, 정지는 양광 - 전라 - 경기도 도지휘사로서 도순문사인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진원예, 양광도[10] 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여 58급을 참하고 말 60여 필을 획득했다.[5]
위화도 회군에 종군하여 "회군공신"이 되었으나,[5] 왕을 폐하고 신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이성계 파로부터 왕실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유배형에 처해졌다.[1]
2. 2. 왜구 격퇴 및 군사 활동
1374년 공민왕에게 왜구 방어 대책을 담은 글을 올려 왕의 인정을 받아 전라도와 양광도의 안무사 겸 왜인추포만호로 임명되었다.[1] 1377년 여름 6월, 예의판서 순천도병마사로서 순천과 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18명의 목을 베고 3명을 사로잡았다.[4][5] 그해 겨울 12월에도 왜구를 쳐서 40여 명의 목을 베고 두 명을 생포하는 공을 세웠다.[5]1378년에는 왜구가 영광, 광주, 동복 등지를 침략하자 도순문사 지용기, 조전원수 이림, 한방언 등과 함께 옥과현까지 추격하여 미라사(彌羅寺)에서 왜구를 몰살하고 말 1백 필을 획득하였다.[6][5] 이어 담양현을 침략한 왜구를 공격해 17명의 목을 베는 전공을 세웠다.[7][5] 그러나 1379년 2월 왜구가 순천, 조양, 진원 등지를 침입하였을 때에는 교전에서 패배하였다.
1380년 3월, 왜구가 광주 및 능성현, 화순현을 침략하자 원수 최공철, 김용휘 등과 함께 전라도에서 왜구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해 8월 최무선, 나세, 심덕부 등이 진포 해전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 선단 5백 척을 궤멸시키는 동안, 육지에서는 사근내역에서 왜구에게 패하여 5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1382년 해도원수가 되어 진포로 들어온 왜구 선단 50척을 공격하여 군산도까지 추격, 배 4척을 획득하였다.[5] 1383년 5월, 해도부원수로서 전함 47척을 이끌고 나주와 목포에 머무르던 중, 왜구 선단 120척이 경상도 연해를 공격하자 합포원수 류만수의 구원 요청을 받고 출격, 섬진에서 합포의 사졸들을 징집하고 남해의 관음포 인근 박두양(朴頭洋)에서 왜구 선단을 크게 격파하였다(관음포 전투).[5][8][2][9]
1388년 8월, 양광 · 전라 · 경상도 도지휘사로서 왜적이 함양에서 운봉의 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에 이르자 도순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등과 함께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획득하였다.[5]
정지는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회군 공신으로 인정받아 2등 공신에 책록되고 토지 50결을 하사받았다.[5] 그러나 이성계 파로부터 왕실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유배형에 처해졌고,[1] 이후 광주에 은거하여 45세에 병사했다.[1][5]
2. 3. 위화도 회군 이후
1388년 요동 정벌에 안주도원수로 출정했다가 이성계를 따라 회군에 가담했다.[1] 이때 윤소종이 정지를 통해 이성계에게 곽광전을 바치자, 이성계는 조인옥에게 그것을 읽게 했다. 조인옥은 이 자리에서 우왕을 폐하고 왕씨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1]그해 8월, 정지는 양광 · 전라 · 경상도 도지휘사로서 왜구 방어에 나섰다. 왜적이 함양에서 운봉의 팔라현을 넘어 남원에 이르자, 정지는 도순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 · 진원서, 전주목사 김용균, 양광도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 등을 이끌고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5] 이때 왜구는 밤을 틈타 달아났으나, 정지는 군사들의 양식이 없어 추격하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날의 전투를 두고 "이번 전투가 아니었다면 3도의 백성이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5]
1389년, 정지는 양광 · 전라 · 경상도의 절제체찰사 겸 총초토영전선성사가 되었다. 그러나 김저가 변안열 등과 함께 우왕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된 사건에서, 김저와 모의했다는 혐의로 유배되었다.[5] 1390년에는 계림에서 횡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5]
같은 해 5월, 윤이-이초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지는 이색 부자, 이숭인, 권근 등과 함께 청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윤소종을 소개하고 이성계에게 곽광전을 바치게 한 것은 윤이-이초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한번은 죽는 법이니 목숨을 어찌 아깝다고 하겠는가? 다만 왕씨가 나라를 회복했다면서 죄도 없이 죽는 것이 애통할 만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5] 얼마 뒤 풀려나 외방에서 편의종사하는 것이 허락되었다.[5]
1391년, 김저나 변안열과 연좌되어 죄를 받은 것은 무고였다는 상소로 석방되었다. 이후 광주의 별업으로 물러나 살다가, 9월에 판개성부사로 임명되어 소환되었으나 임명되지 못하고 광주에서 사망했다. 향년 45세였다.[5]
이후 조선이 개국하고 한 달 뒤인 1392년 8월,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9월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신하 중 44인을 공신으로 책록했다. 정지는 회군 공신으로 인정받아 2등 공신에 녹권과 토지 50결을 하사받았다.[5] 아들 정경은 1420년 종2품 전주부윤까지 올랐다.[5]
2. 4. 사후
위화도 회군에 종군하여 "회군공신"이 되었으나,[5] 왕을 폐하고 신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이성계 파로부터 왕실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유배형에 처해졌다.[1] 이후 광주에 은거하여 45세에 병사했다.[1][5]3. 인물 및 평가
《고려사》와 조선 초 전라도 지역 노인들의 증언,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그의 이름을 딴 잠수함이 명명된 것을 통해 정지에 대한 평가를 살펴볼 수 있다.
- 긍정적 평가
- 《고려사》 기록: 용모, 성품, 학식, 군사적 능력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1]
- 전라도 노인들의 증언: 왜구 격퇴와 백성들의 생업 회복에 기여한 공로를 칭송했다.[1]
- 현대의 평가: 214형 잠수함의 2번함 "정지"로 명명되어 그의 업적을 기린다.
- 사후 추모
- 경렬사 건립: 1644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명동에 경렬사가 건립되었다.[1] (이후 1871년 서원 훼철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81년 복원되었다)[1]
3. 1. 인물됨
《고려사》에서는 정지에 대해 "용모가 크고 훌륭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였다. 어려서 큰 뜻을 품어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대의(大義)에 통달하여 사람들에게 해설해 주면 막힘없이 확 뚫리는 것과 같았다"라고 평하고 있다.[1]또한 관음포 전투를 앞두고 역병이 돌아 수군 병사 가운데 사망자가 생기면 일일이 육지로 내려서 장례를 치러주어 장병들이 이에 감격하였다. 비가 내리자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에 사람을 보내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나이다. 바라건대 저를 도와주시고 신(神)의 수치가 될 일을 짓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였고, 이에 비가 그쳤다고 한다.[1]
3. 2. 평가
1394년 9월 17일 전라도도관찰사 조박(趙璞)은 도평의사사에 보고하기를, 전라도 경내의 노인들이 "죽은 판개성부사 정지가 처음으로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막아내었고, 장포(長浦)의 승리와 남원의 승첩에 공이 커 한때 유명하였으며, 그 덕택으로 지금 바닷가 백성들이 옛날처럼 생업을 회복하였다"고 칭송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정지의 집을 정표(旌表)하였다.[1]4. 가족 관계
5. 관련 시설
참조
[1]
웹사이트
景烈祠 - 歴史と文化空間 - 文化北区 - Good Culture-Bukgu(日本語版HP)
[2]
서적
村井
1993
[3]
웹사이트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하동정씨"
https://www.segye.co[...]
2013-01-15
[4]
문서
ともに[[全羅南道]][[順天市]]
[5]
서적
武田
2005
[6]
문서
みな全羅南道
[7]
문서
全羅南道 武田(2005)
2005
[8]
인용
[9]
서적
李
1989
[10]
인용
[11]
서적
『씨족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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