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서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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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서울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한국 전쟁 초기에 일어난 전투로,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서울 함락을 목표로 전격전을 펼쳤으며, 대한민국 국군은 병력과 장비 열세에도 불구하고 춘천-홍천 전투에서 저항했으나, 의정부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서울은 위협받았다. 6월 28일, 한국군은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고,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이 전투는 한국군의 초기 붕괴와 미국의 참전, 유엔의 지원 결정을 가져왔으며, 이후 한강 방어선 구축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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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서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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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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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제1차 서울 전투 |
시기 | 1950년 6월 25일 ~ 1950년 6월 28일 |
장소 | 서울 |
전쟁 | 한국 전쟁 |
결과 | 북한의 승리,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한민국 |
교전국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지휘관 | |
대한민국 지휘관 | 이승만 채병덕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 김일성 김책 |
병력 규모 | |
대한민국 병력 | 65,000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병력 | 107,000명 |
피해 규모 | |
대한민국 사상자 | 사망 또는 실종 44,000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상자 | 사망 1,112명 |
2. 배경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하면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은 폭풍 작전을 통해 서울을 빠르게 점령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12] 조선인민군은 1군단을 주공으로 서울을 공격하고, 2군단을 조공으로 하여 1군단의 공격을 엄호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조선인민군에 비해 병력, 장비,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특히, 효과적인 대전차 무기가 거의 없어 전차의 우세는 한국군에게 큰 위협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12] 육박 공격으로 인민군 전차를 파괴하기도 했다.[13] 또한, 전방 방어 부대 중 상당수는 하천과 같은 지형을 이용하여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하지만 의정부시 방면에서는 인민군 기갑 부대의 강력한 공격으로 인해 방어선이 위태로웠다.
2. 1. 조선인민군의 남침 준비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30분, 조선인민군은 T-34 전차를 앞세우고 곡사포로 엄호하는 전격전 방식으로 38선 전선을 넘어 남침했다. 조선인민군은 폭풍 작전 구상 단계에서 서울이 함락되면 전쟁의 승패가 사실상 결정될 것이라고 판단했다.[12] 이러한 판단에 따라 조선인민군은 부대를 2개 군단으로 나누어 1군단을 주공으로 서울을 공격하고, 2군단을 조공으로 1군단의 공격을 엄호하는 계획을 세웠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대규모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일부 부대만이 독자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은 거의 완벽한 기습 공격을 달성할 수 있었다.[13]대한민국 국군은 조선인민군에 비해 병력, 장비,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특히, 국군은 효과적인 대전차 무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차의 우세는 한국군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한국군은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12] 육박 공격으로 인민군 전차를 파괴하기도 했다.[13] 또한, 전방 방어 부대 중 상당수는 하천과 같은 지형을 이용하여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쳤기 때문에, 장애물이 없는 의정부시 방면을 제외하고는 한국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의정부 방면에서는 기갑 부대의 강력한 공격으로 인해 의정부시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2. 2. 대한민국 국군의 대비 태세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T-34 전차를 앞세우고 곡사포로 엄호하는 전격전 방식으로 남침을 개시했다. (한국 전쟁)[12] 대한민국 국군은 북한의 대규모 공세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하고, 일부 부대만이 독자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습을 당했다.[13]대한민국 국군은 조선인민군에 비해 병력, 장비,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특히, 효과적인 대전차 무기가 거의 없어 전차의 우세는 국군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12] 육박 공격으로 인민군 전차를 파괴하기도 했다.[13] 또한, 전방 방어 부대들은 하천 등의 지형을 이용해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그러나 의정부시 방면에서는 인민군 기갑부대의 공격으로 방어선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2. 3. 38선에서의 충돌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T-34 전차를 앞세우고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전격전 방식으로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은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서울을 점령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12] 대한민국 국군은 대규모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일부 부대만이 독자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은 거의 완벽한 기습 공격을 달성했다.[13]대한민국 국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조선인민군에 비해 열세였다. 특히, 국군은 효과적인 대전차 무기가 거의 없어 전차의 우세는 한국군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12] 그러나 한국군은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 육박 공격으로 인민군 전차를 파괴하기도 했다.[13] 또한, 전방 방어 부대 중 상당수는 하천과 같은 지형을 이용하여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쳤기 때문에, 의정부시 방면을 제외하고는 한국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정부 방면에서는 인민군 기갑 부대의 공격으로 의정부시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동해안 지역에서는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8사단은 최전방 방어 부대 중 유일하게 2개 연대 규모였으며, 38선에 제10연대를, 후방 삼척에 예비대로 제21연대를 배치했다. 조선인민군 제5사단은 게릴라 훈련을 받은 특공 부대(제766부대, 제549육전대)를 포함하여 제8사단을 공격했다.
조선인민군 제5사단은 25일 새벽 4시부터 공격 준비 사격을 시작하고, 주문진에 주공을 집중하는 동시에 특공 부대를 해상으로 침투시켰다.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은 후방에 적을 둔 채 각지에서 분산되어 열세에 놓였지만,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연곡천과 군선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26일 오전, 대한민국 육군 제21연대가 군선강에 배치되었고, 연곡천에는 제10연대와 공병대대, 대전차포 중대가 증원되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제8사단의 주 방어 지역은 연곡천~송림리 4km 정면과 남쪽 사천까지 3km 정도의 종심으로 구성되었다. 연곡천은 폭이 200~250m, 수심이 깊어 도하가 어려웠다. 제8사단은 7번 국도와 연곡천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나무 다리를 파괴하지 않고, 이 부근을 격파 지역으로 설정하여 조선인민군을 유인해 격멸할 계획이었다.
26일 새벽 4시, 조선인민군이 공병대대 정면에서 도하를 시도하면서 산발적인 교전이 발생했지만, 대규모 공격은 없었다. 대한민국 육군 제10연대는 이 틈을 타 제2대대로 천마령을 공격하여 탈취하고 주문진 공격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같은 날 밤, 제8사단은 주문진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조선인민군 역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3. 경과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북한군은 38선 전역에서 한국을 공격했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면 한국군이 무너져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5] 이러한 판단에 따라 북한군은 2개 군단으로 편성, 제1군단을 주공으로 서울을 공격하고 제2군단은 이를 지원하게 했다. 한국은 기습을 당했고, 일부 부대만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6]
북한군은 병력, 장비, 훈련 면에서 한국군보다 우세했다. 특히 한국군은 대전차 화기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 병사들은 강한 의지로 싸웠고[5], 육박 공격으로 전차를 파괴하기도 했다.[6] 대부분의 전방 부대는 하천이나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전을 펼쳤다. 의정부시 정면을 제외하고는 한국군의 방어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의정부 정면에서는 북한군 기갑 부대의 공격으로 방어가 위태로워졌다.
6월 27일 새벽, 북한군은 주문진 공격에 앞서 포격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천마령의 제10연대 제2대대는 분산 후퇴했다. 주 방어선 부대는 이를 오인하여 붕괴되었지만, 사천선에 투입된 제21연대 제3대대가 후퇴 부대를 수용하여 북한군을 저지했다. 제18야전포병대대는 각개 사격으로 북한군을 지연시키고, 사천선 저지 진지 편성에 기여했다. 북한군은 포병대대 진지에 돌입했지만, 백병전으로 격퇴되었다. 이후 제18야전포병대대는 제21연대 제3대대의 엄호 하에 후퇴하여 화력 지원을 계속했다.
당시 육군 제8사단 사령부는 육군본부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사단장은 대관령으로 후퇴하여 반격할 결심을 했다. 북한군은 연곡천 일대 주 방어선을 확보하고 재편성 중이었고, 군선강 방어선에서는 산발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한국군에게 격퇴되었다. 6월 27일 14시, 한국군은 대관령을 넘어 후퇴했고, 이날 밤 제8사단 사령부와 제10연대는 유천리에, 제21연대는 하진부리에 집결했다. 같은 날 21시 50분경, 북한군은 강릉에 진입했다.
3. 1. 조선인민군의 서울 침공 (1950년 6월 25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30분 조선인민군이 T-34 전차를 앞세우고 곡사포로 엄호하는 전격전 방식으로 38선을 넘어오면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인민군은 폭풍 작전 계획 단계에서 서울이 함락되면 전쟁의 승패가 사실상 결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12] 이러한 판단에 따라, 조선인민군은 부대를 2개 군단으로 나누어 1군단을 주공으로 서울 방향으로 집중시키고, 2군단은 1군단의 공격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겼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대규모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일부 부대만이 자체적인 판단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은 거의 완벽한 기습 공격을 달성할 수 있었다.[13]대한민국군은 조선인민군에 비해 병력, 장비, 훈련 등 모든 면에서 부족했다. 특히, 국군은 효과적인 대전차 무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차의 우세는 한국군에게 큰 공포감을 주었고, 결국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군은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12] 육박 공격으로 인민군 전차를 파괴하는 경우도 있었다.[13] 또한, 전방 방어 부대 중 상당수는 하천과 같은 지형을 이용하여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쳤기 때문에, 장애물이 없는 의정부시 방면을 제외하고는 한국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의정부 방면에서는 기갑 부대의 강력한 공격을 앞세운 인민군의 공세로 인해 의정부시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조선인민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T-34 전차를 활용한 전격전 방식의 공격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육군은 대전차 무기가 없고 전차도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아 전차의 맹렬한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3. 2. 문산-봉일천 방면 전투 (1950년 6월 26일 ~ 28일)
문산 부근을 지키던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은 개성-문산 전투에서 제12연대가 후퇴하면서 임진강 지역 철교를 잃었지만, 임진강 인근 진지는 지키고 있어 조선인민군은 임진강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14]25일 오후부터 증원 부대가 도착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보병학교 교도대는 제11연대에,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대는 제13연대에 배속되어 주저항선을 강화했고, 제15연대(연대 본부 및 제3대대)는 제20연대 제3대대를 배속받아 최종 저항선인 위전선(봉일천선)에 배치되었다. 백선엽 대령은 사단의 방어 중점을 1호선 접근로에 두면서, 주저항선이 돌파될 경우를 대비하여 위전선에서 주저항선 부대의 후퇴를 지원하고 역습의 발판을 확보하려 했다.
위전선에서는 제15연대(제20연대 제3대대 배속)가 1호선상의 위전리에, 제13연대가 307호선상의 도내리에, 제11연대는 예비로 최종 저항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또한, 국경 회전에서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제12연대는 금촌에서 재편성 중이었다.
27일 밤, 비를 틈탄 야간 공격으로 제1사단의 최종 저지선이 무너졌고, 제1사단은 봉일천에서 철수했다. 27일 저녁, 백선엽은 육군 본부에서 파견된 작전지도반의 김홍일 소장으로부터 미아리 방어선의 상황 악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 한강 도하 철수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명령은 변경되지 않았고, 제1사단은 현재 위치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3. 2. 1. 6월 26일
26일, 파평산 정면에 배치된 국군 제13연대 정면에 인민군 전차 부대가 출현하였다. 제13연대는 2.36인치 M9 바주카로 공격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묶은 급조폭약으로 공격하는 육박공격전을 펼쳤다. 육박공격에 전차부대가 후퇴하였으며 이어 내습한 인민군 보병부대도 근접전으로 격퇴되었다.한편, 국군 1사단 서쪽에서 공격하던 인민군 제6사단은 새벽 전차 5대를 선두로 임진강철교를 건너 공격하기 시작했다. 국군 제11연대는 저항하였으나 오전 9시 경 문산역 북쪽의 고지가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이 고지는 경의가도를 잇는 중요한 지역으로 국군 제11연대와 제13연대는 퇴로가 끊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을 점령한 인민군은 진격을 멈춘 채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백선엽 대령은 즉각 역습을 명령하여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는 오전 10시 경 고지대를 탈환하였다. 이때 확보한 인민군 포로의 정보를 통해 백선엽은 인민군이 반쯤 건넌 상태라고 판단, 13시 경부터 11연대 및 연대에 배속된 보병학교교도대 등 총 3개 대대를 동원하여 반격 작전을 시작하였다. 반격 작전은 순조롭게 이뤄져 제1사단은 주 방어선 탈환에 성공하였다.[15]
하지만 이 무렵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고, 의정부를 지키던 제7보병사단이 후퇴하면서 제1사단의 우익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인민군 제1사단은 가여울(연천군 백학면 노곡리)-적성 방면으로 진출해 전차를 앞세우고 국군 제13연대를 재차 공격하였다. 제13연대는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인민군 제1사단 주공이 제320호선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문산을 위협하였다. 또한 국군 제11연대 후방에도 인민군 전차부대가 나타나 정면에서 공격이 활발해졌다.[15] 결국 백선엽은 주 방어선 유지를 포기하고 19시 경 최종저항선인 위전 방어선(봉일천선)으로 후퇴를 명령했다. 위전리 인근에 배치된 제15연대의 엄호 하에 주 방어선의 부대는 성공적으로 후퇴하여 위전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3. 2. 2. 6월 27일
27일 10시경, 전차를 주력으로 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주력이 제1사단 제15연대 정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15연대는 57mm 무반동포와 2.36인치 바주카포로 대전차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이 무기들은 T-34 전차에 효과가 없었다. 이에 제15연대 제3대대장은 직접 특공대를 이끌고 육박 공격을 감행, 전차 6대를 파괴했다. 인민군은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했고, 국군 제15연대는 전차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다.[15]위전 방어선 전투 중, 제1사단 우익의 제13연대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19시경 인민군 제1사단의 보전협동공격으로 방어선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2.36인치 바주카포로 인민군 전차 2대를 격파하자 공격이 약화되었고, 연대는 방어선을 되찾았다.[15]
3. 2. 3. 6월 28일
28일 8시, 제1사단은 기존 명령에 따라 반격을 시작했다. 제11연대는 최후 방어선을 거의 탈환하였으나, 우익의 제13연대는 조선인민군의 공격과 맞부딪혀 진전이 없었다.[15] 백선엽 대령은 서울특별연대와 제20연대 제3대대를 투입해 방어선을 연결했다. 이날 조선인민군의 저항은 강하지 않았으며, 제1사단은 주 방어선 탈환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하지만 같은 날 1시 경, 이미 미아리 고개에 있던 국군의 최후 방어선이 조선인민군 전차에게 돌파당했다. 28일 오후, 제1사단은 후방이 차단되었고 육군본부와의 연락도 끊겼다. 탄약 잔량도 부족해 백선엽 대령은 더 이상 현 위치 고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후퇴를 결심하였다.[15]
3. 3. 의정부-미아리 방면 전투 (1950년 6월 26일 ~ 28일)
의정부시 방면을 수비하던 제7보병사단은 개전 당일인 6월 25일부터 크게 후퇴하여, 부대는 흩어진 채 의정부가 위협받고 있었다. 한국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의정부가 전차의 충격력이 그대로 발휘되는 회랑 지역인데다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 없어 방어부대가 압도적 열세에 놓였다고 판단했다.[16]6월 26일, 채병덕은 제2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투입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전력 부족과 지휘 혼란으로 실패했다. 제7보병사단은 동두천 탈환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인민군 제4사단의 우회 공격과 축석령 함락으로 결국 후퇴했다.[16][17]
6월 27일, 창동에서 일부 부대가 빠진 제25연대의 엄호 아래 의정부에서 후퇴하던 장병들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 회랑 지역은 기계화 부대가 기동하기 좋은 지형이라 한국군에게 불리했다. 결국 국군은 미아리와 태릉 지역으로 후퇴했다.
6월 27일 밤부터 28일 새벽까지 미아리-회기동 방어선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27일 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인민군이 공격해 왔으나, 105mm 곡사포 3문을 포함한 중화기 사격 집중으로 한 차례 격퇴했다.[24] 그러나 28일 오전 1시경 조선인민군 제105전차여단에서 나와 인민군 제4사단을 지원하던 전차 부대가 미아리를 넘어가면서 서울 최종 방어선이 무너졌다.
3. 3. 1. 6월 26일
축석령 전투와 의정부 함락은 한국 전쟁 초기 인민군의 남침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개전 초기, 채병덕 참모총장은 제2사단과 제7사단을 투입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이는 전력 부족과 지휘 혼란으로 실패했다.[16][17]
제7보병사단은 개전 당일부터 후퇴하였고, 의정부는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채병덕은 의정부 축선 방어에 어려움이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반격 작전을 강행했다.[18][19] 제2보병사단은 축석령(현 포천시 소흘읍)을 거점으로 포천을 공격하려 했으나, 지휘부 부재와 탄약 부족, 그리고 제3연대의 무단 철수로 인해 실패했다.[20] 축석령은 인민군 기갑부대에 의해 쉽게 돌파당했다.[21]
제7보병사단의 공격도 초기에는 동두천 탈환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인민군 제4사단의 우회 공격과 축석령 함락으로 인해 결국 후퇴했다. 특히, 제18연대는 인민군 기갑부대에 의해 쉽게 뚫리고, 이후 연락 두절 상태에서 후퇴했다.[22]
한편, 국군 자문회의에서는 김홍일 소장 등이 한강 이남 결전을 주장했으나,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채병덕은 서울 사수 방침을 고수하며 낙관론을 펼쳤다. 그러나 이날 낮, 인민군은 의정부를 향해 계속 남하했고, 결국 26일 13시경 의정부가 함락되었다.[21]
김풍익 중령 등이 분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이형근 제2사단장은 해임되고 유재흥 제7사단장이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창동으로 후퇴했다. 의정부 함락으로 한강다리 폭파 준비가 시작되었다.
3. 3. 2. 6월 27일
27일 오전 1시경, 중앙청에서 소집된 임시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이전이 결정되었다. 서울 시민에 대해서는 피난 계획이 없었으며, 임시국무회의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후 심야국회에서 "국회의원은 백만 서울시민과 함께 수도를 결사 사수한다"라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23] 오전 5시부터 소집된 국방정상회의에서 채병덕 참모총장은 "정부는 남쪽으로 내려가더라도 군은 서울을 고수하겠다"라는 결의를 밝혔으나, 회의 직후 전선으로부터 "오늘 밤을 버티기 어렵다"라는 비관적인 보고를 받았다.[23]새벽 3시경, 이승만 대통령은 주위의 설득으로 서울에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오전 6시 정부의 수원 천도 발표로 서울 시민들은 처음으로 수도의 위기를 인지했다. 한강인도교와 서울역에 대피하는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증원부대 차량은 계속해서 북상하면서 서울은 혼란에 빠졌다.
한편, 창동에서는 일부 부대가 빠진 제25연대의 엄호 아래 의정부에서 후퇴하던 장병들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제25연대는 인민군 전차 3대를 파괴하는 등 격렬히 저항하여 제7사단 제1, 제3, 제9연대, 제2사단 제5, 제16, 제25연대, 제3사단 제22연대 잔여부대가 총 6개 대대 규모로 재편성되었다. 그러나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 회랑 지역은 기계화 부대가 기동하기 좋은 지형으로 한국군에게 불리했다.
오전 10시경, 한국군 방어부대는 방어진지가 완성되지 않은 채 40여 대의 전차와 자주포로 증강된 인민군의 공격을 받았다. 방어군은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대의 105mm 곡사포 지원을 받으며 완강히 저항했으나 전차를 막지 못해 방어선이 뚫렸다. 제1연대장 함준호 대령도 인민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혼란이 발생하여 국군은 미아리와 태릉 지역으로 나뉘어 후퇴하였다.
국군의 서울 철수는 낮 12시 30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육군본부는 시흥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참전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군 참모총장은 결심을 바꿔 육군본부는 오후 6시경 용산으로 다시 이동하였다.
전쟁지도부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미아리-회기동 방어선에는 미아리지구 전투사령관을 겸임하게 된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이 산하 제15연대 제2대대, 제20연대 제1대대, 수도사단 제8연대 제2대대를 지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후퇴하는 부대를 수습하고 있었다. 미아리 방어선에는 제5사단이 3호선을 포함한 서쪽을, 제7사단이 동쪽을 맡아 방어하게 되었다. 창동을 점령한 인민군은 일시적으로 진군을 멈춰 미아리 방면 전선은 소강 상태가 되었으나, 태릉 방면에서는 일부 부대가 빠진 제9연대 및 학도병 대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7일 오후까지 미아리-회기동 방어선에는 2개 사단 3,000명 가량의 병력의 혼성부대가 있었으나, 미군의 참전 소식과 서울을 지키는 최종방어선으로 수도를 사수해야 한다는 의미에 부대의 사기는 높았다.[24] 방어선은 유일한 외곽도로가 있는 곳으로 방어에 유리하여 도로만 막으면 전차를 막을 수 있었으며, 공병대대 및 민간인의 노력으로 미아리 인근에는 여러 참호와 산병호, 도로를 막은 장애물 등 방어물이 갖춰져 있었다.
27일 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오후 7시경 기마정찰대와 전차 10대의 인민군이 먼저 공격하였다. 공병의 폭약 설치를 통한 저지 시도는 실패했으나, 105mm 곡사포 3문을 포함한 중화기 사격 집중으로 한 차례 공격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밤 12시경 보병의 지원을 받은 전차 수 대가 비를 틈타 급습하면서 전황이 바뀌었다. 시야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국군 방어부대는 흩어졌고, 이 와중 인민군 전차부대는 장애물을 뚫고 전진, 28일 오전 1시경 제105전차여단에서 나와 인민군 제4사단을 지원하던 전차 부대가 미아리를 넘어가면서 서울 최종방어선이 돌파되었다.
회기동에 있던 제8연대 제2대대는 탄약 부족으로 후퇴하였으며, 태릉의 부대는 28일 아침까지 인민군과 교전하다 순차적으로 퇴각을 시작하였다. 미아리 방어선의 부대는 인민군 전차가 시내에 진입한 사실을 모르고 방어선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른 새벽부터 인민군의 보병부대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3. 3. 3. 6월 28일
27일 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9시경 기마 정찰대와 전차 10대의 인민군이 먼저 공격하였다. 공병의 폭약 설치를 통한 저지 시도는 실패했으나 105mm 곡사포 3문을 포함한 중화기 사격 집중으로 한 차례 공격을 격퇴하였다.[24]같은 날 24시경, 보병의 지원을 받은 전차 수 대가 비를 틈타 급습하면서 전황이 바뀌었다. 시야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국군 방어 부대는 흩어졌고, 이 와중에 인민군 전차 부대는 장애물을 뚫고 전진했다. 28일 오전 1시경 조선인민군 제105전차여단에서 나와 인민군 제4사단을 지원하던 전차 부대가 미아리를 넘어가면서 서울 최종 방어선이 돌파되었다.
회기동에 있던 제8연대 제2대대는 탄약 부족으로 후퇴하였으며, 태릉의 부대는 28일 아침까지 인민군과 교전하다 순차적으로 퇴각을 시작하였다. 미아리 방어선의 부대는 인민군 전차가 시내에 진입한 사실을 모르고 방어선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른 새벽부터 인민군의 보병 부대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3. 4. 춘천-홍천 방면 전투 (1950년 6월 25일 ~ 29일)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은 춘천 정면에 제7연대를, 홍천 정면에 제2연대를 각각 배치하고, 제19연대를 원주에 예비대로 두었다. 조선인민군 제2사단은 주력인 제4연대와 제6연대를 춘천에 투입했으나, 한국군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방어에 성공했다.홍천에서는 조선인민군 독립전차연대의 지원을 받은 제12사단이 공격해왔다. 대한민국 육군 제2연대는 소양강을 이용해 방어전을 펼쳤다. 관대리 방어선은 뚫렸지만, 어론리에서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낸 제2연대는 다음 날 새벽 반격을 계획했다.
3. 4. 1. 6월 25일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은 제7연대를 서쪽의 춘천 정면에, 제2연대를 동쪽의 홍천 정면에 전방 배치하고, 제19연대를 원주에 예비로 두었다. 춘천 정면을 공격한 것은 조선인민군 제2사단 주력인 제4연대 및 제6연대였으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진지 방어를 펼치는 한국군을 공략하지 못했다.홍천 정면을 공격한 조선인민군 부대는 독립전차연대의 지원을 받은 제12사단이었다. 대한민국 육군 제2연대는 소양강의 하천 지형을 이용해 방어하며 저항했다. 관대리의 방어선은 돌파되었지만, 어론리에서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제2연대는 다음 날 새벽 반격을 계획했다.
3. 5. 동해안 방면 전투 (1950년 6월 25일 ~ 28일)
조선인민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동해안 축선을 담당하던 국군 제8보병사단은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북한군은 제5사단과 제766부대, 제549육전대 등 특공 부대를 동원하여 해상으로 침투, 국군 제8사단의 후방을 공격했다.이에 제8사단은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연곡천과 군선강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쳤다. 그러나 6월 27일 북한군의 공격이 계속되면서 전황은 점점 불리해졌다.
6월 28일 제8사단장은 강릉 탈환을 목표로 반격을 계획했다. 제21연대가 공격을 시작하고 제10연대 제1대대가 측면 엄호를 맡았으며, M3 105mm 곡사포 2문이 대관령 동쪽 보광리 입구까지 전진하여 화력 지원을 했다. 공격 부대가 강릉 교외까지 진출했지만, 육군 본부의 명령에 따라 공격을 중지하고 대관령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같은 날 저녁, 제8사단은 유천리와 하진부리에 집결했고, 6월 29일에는 원주를 향해 차량 행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횡성이 이미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8사단장은 북한군이 먼저 원주에 도착할 것을 우려하여 제천으로 목표를 변경했다.[6]
결과적으로 국군 제8사단은 3일간의 전투에서 731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화포와 장비를 거의 챙겨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제8사단의 분투는 이후 제6사단과 함께 용감한 사단으로 칭송받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해안 도로는 북한군에게 개방되었다.[6]
3. 5. 1. 6월 25일
6월 25일, 동해안 지역을 방어하던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은 38선에 제10연대를, 삼척에 예비대로 제21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제5사단과 특공 부대(제766부대, 제549육전대)로 공격을 개시했다.북한군 제5사단은 이날 새벽 4시부터 공격 준비 사격을 시작했고, 주공을 주문진에 집중시키는 동시에 특공 부대를 해상으로 이동시켜 후방에 침투시켰다. 이에 제8사단은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연곡천과 군선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6]
3. 5. 2. 6월 26일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6일 새벽 4시에 기습적으로 강습 도하를 시도했으나, 대대적인 공격은 없었다. 대한민국 육군 제10연대는 이 틈을 타 제2대대로 하여금 주 저항선 전방의 천마령을 공격, 탈취하여 주문진 공격의 발판으로 삼았다. 같은 날 밤, 제8사단은 주문진 공격 명령을 하달했지만, 이 시점에 조선인민군 역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3. 5. 3. 6월 27일
6월 27일 새벽 1시, 중앙청에서 소집된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이전이 결정되었다. 서울 시민에 대해서는 이동 계획이 없었고, 이 자리에서도 어떤 대책도 강구되지 않았다. 심야 국회에서는 "국회의원은 백만 서울 시민과 함께 수도를 사수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새벽 5시경 소집된 국방 수뇌 회의에서, 채병덕 참모총장은 "정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더라도, 군은 서울을 굳게 지킨다"는 결의를 표명했지만, 회의 직후 전선으로부터 "오늘 밤 버티는 것은 어렵다"는 비관적인 상황 보고를 받았다.[6]같은 날 새벽 3시경, 이승만 대통령은 주변의 설득에 넘어가 서울을 떠났다. 아침 6시, 정부가 수원으로 천도를 발표하면서, 그 때까지 낙관적인 보도만을 들어온 서울 시민들은 처음으로 수도의 위기를 알게 되었다. 피난길을 찾는 시민들이 한강 인도교 부근이나 서울역으로 쇄도하는 한편, 증원 부대의 차량은 북상을 계속하고 있어, 시내는 대혼란에 빠졌다.
창동에서는 제25연대(일부 부대 결손)의 엄호 하에, 후퇴해 오는 장병들을 규합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계속되었다. 제25연대는 전차 3대를 파괴하는 등 완강하게 저항했고, 그 사이에 제7사단의 제1, 제3, 제9연대, 제2사단의 제5, 제16, 제25연대, 제3사단의 제22연대의 잔여 부대가 총 6개 대대 규모로 재편성되었다. 그러나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의 회랑 지형은 기계화 부대의 기동에 적합했고, 따라서 한국군에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27일 10시경, 한국군 방어 부대는 방어 진지 미완성 상태에서 40대 이상의 전차·자주포로 증강된 북한군 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방어 부대는 육군 포병 학교 제2교도대대 M3 105mm 곡사포 6문의 지원을 받으면서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전차를 저지하지 못해 방어선은 돌파되었고, 제1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전사, 한국군 부대는 미아리, 태릉으로 분산 후퇴했다.
군부의 서울 철수는 12시 30분경부터 시작되었고, 육군 본부는 시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 때, 미국군의 참전이 예고되었고, 이를 받아들인 한국군 참모총장의 결심에 따라, 육군 본부는 18시경 다시 용산으로 복귀했다.
이처럼 전쟁 지휘가 혼란을 보이는 동안, 미아리~회기동 선에서는 미아리 지구 전투 사령관을 겸임하게 된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이 예하 제15연대 제2대대, 제20연대 제1대대, 수도사단의 제8연대 제2대대를 지휘하여 방어 진지를 편성하고, 후퇴해 오는 부대를 수용했다. 미아리 선에서는 제5사단장이 3호선을 포함한 서쪽을, 제7사단장이 동쪽을 지휘하게 되었다. 창동을 점령한 북한군은 전진을 일시 중지했기 때문에 미아리 선은 소강 상태에 있었지만, 태릉에서는 제9연대(일부 부대 결손)와 학생대대가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27일 오후까지, 미아리~회기동 선에는 양 사단장의 지휘 하에 3,0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한 혼성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미군 참전 소식을 듣고 사기는 높았고, 사실상의 서울 최종 방어선이라 수도 사수의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방어선의 지형은 횡주 지형으로 방어에 유리하며, 도로만 차단하면 전차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되었고, 공병 대대 및 민간인에 의해 미아리 일대에는 참호나 도로 장애물과 같은 방어 시설이 설치되었다.[6]
27일 밤, 호우 속에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9시, 먼저 기마 정찰대와 전차 10여 대에 의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공병의 설치 폭약에 의한 저지 시도는 실패했지만, M3 105mm 곡사포 3문을 포함한 중화기의 사격을 집중함으로써 한 번은 격퇴에 성공했다.
그러나 같은 날 24시경, 보병의 선도를 받은 전차 수 대가 호우를 틈타 기습 공격을 실시했고, 전황은 급변했다. 시계 불량 속에서 한국군 방어 부대는 분산되었고, 그 속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전진, 28일 1시, 제105전차여단에서 분견되어 북한군 제4사단을 지원하던 전차 부대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의 최종 방어선이 돌파되었다.[6]
3. 5. 4. 6월 28일
국군 제8사단장은 집결한 2개 연대의 전투력이 건재함을 확인하고 강릉 탈환을 목표로 반격을 결심했다. 6월 28일 아침, 제21연대가 공격을 시작했고, 제10연대 제1대대는 측면에서 엄호했다. 포병은 M3 105mm 곡사포 2문을 대관령 동쪽 보광리 입구까지 전진시켜 화력 지원을 했다.[6]
공격 부대가 강릉 교외까지 진출했을 때, 제6사단 사령부와 통화에 성공하여 "원주로 후퇴하라"는 육군 본부의 명령을 받고 공격을 중지, 대관령으로 후퇴했다.[6] 같은 날 28일 저녁, 제8사단은 유천리와 하진부리에 집결했고, 29일 원주로 차량 행군을 시작했다.[6] 횡성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을 확인한 사단장은, 북한군이 먼저 원주에 도달할 것으로 판단하여 목표를 제천으로 변경했다.[6]
3. 6. 김포 방면 전투 (1950년 6월 26일 ~ 28일)
서울 북쪽 방어선이 의정부와 봉일천 지역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한강 하구의 김포 지역에서도 북한군이 서울 측면을 위협하고 있었다. 김포반도 북쪽 한강 하구는 강폭이 넓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도하 작전이 어려워, 국군은 방어 준비를 소홀히 했다.북한군 제6사단은 개성 점령 후 남하하여 한강에 도착, 도하 작전을 개시했다. 6월 26일과 27일에 걸쳐 주력 부대를 도하시켜 교두보를 확장했다.[1] 육군본부는 계인주 대령을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여러 부대를 통합하여 북한군 도하를 저지하려 했다.
국군 방어부대는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분전했으나, 북한군은 강화도에 상륙하여 배후를 공격하고, 강 건너 지원 사격을 받으며 본격적인 도하를 시작했다. 국군은 방어선이 무너지자 병력을 증강하고 운유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6월 28일, 북한군은 양면 공격을 개시, 전차를 앞세워 국군 방어선을 돌파했고, 국군은 후퇴를 시작했다.
3. 6. 1. 6월 26일
개성시를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은 남하하여 한강에 도착, 도하 작전을 개시하여 이날 오전 6시 30분까지 2~3개 대대와 연대급 포병 2문을 도하시켜 3km 길이의 교두보를 확보했다.[1]육군본부는 계인주 대령을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하고, 도하 후 퇴각해 온 국군 제12연대 제2대대를 포함해 남산학교, 보병학교, 공병학교 학생들과 보국대대 등 각지의 부대, 또한 김포에 투입된 독립기갑연대 일부를 통합하여 북한군의 도하를 막으라 명령하였다.
16시경 한국군 방어부대가 진지 편성을 마칠 무렵 북한군의 도하 정찰이 시작되었고, 2시간 뒤에는 북한군 선박 수 척이 김포반도 북쪽 끝 강령포에 접근하였다.[2] 전선 정면의 제12연대 제2대대 제5중대는 하선을 시작한 북한군을 향해 사격하면서 북한군을 섬멸하였으며, 장갑차 1개 소대는 M8 그레이하운드에 달린 M3 37 mm 대전차포 사격으로 북한군 화물선을 격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날 밤 북한군은 소규모 부대를 강령포 일대 고지에 은밀하게 투입시키는 한편, 1개 중대 규모의 부대를 강화도로 상륙시켜 보국대대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3. 6. 2. 6월 27일
개성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은 남하하여 한강에 도착, 도하 작전을 개시하여 26일 오전 6시 30분까지 2~3개 대대와 연대급 포병 2문으로 3 km 길이의 교두보를 확보했다.[1] 27일에는 제13연대와 제15연대 주력 부대, 포병연대 2개 포대, 제17독립포병연대 2개 포대가 도하하여 교두보를 5~6 km 길이로 넓혔다.[1]북한군의 도하를 보고받은 육군본부는 계인주 대령을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하고 국군 제12연대 제2대대를 포함해 여러 부대를 통합, 북한군의 도하를 막으라 명령하였다.
26일 밤, 북한군은 소규모 부대를 강녕포 일대에 은밀하게 투입시키는 한편 1개 중대 규모의 부대를 강화도로 상륙시켜 보국대대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27일 새벽부터 북한군 제14연대는 강 건너에서 지원 사격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도하 작전을 시작하였다. 한국군 방어부대가 고전하고 보국대대 전선이 뚫리면서 퇴로가 차단되자 방어선이 무너졌다. 육군본부는 병력을 증강하였고, 김포지구 사령부는 후퇴해 온 부대를 수습하며 운유산 제73고지 방어선을 지정해 방어진지를 세웠다. 장림 일대(현 김포시 통진읍 장림)를 장악한 북한군 주력부대는 추격을 중단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3. 6. 3. 6월 28일
28일 새벽, 북한군은 양면에서 동시 공격을 시작했다. 도하 부대를 가득 실은 어선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대촌 북쪽에 상륙하는 한편, 전차 2대를 앞세운 주력 부대가 김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한국군 제22연대 제3대대 방어선을 공격했다. 한국군은 2.36인치 로켓포와 장갑차의 37mm 포 사격을 집중했지만, 북한군 전차를 막지 못했다. 방어선 한쪽이 뚫리자,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은 예비대였던 제12연대 제2대대(일부 부대 제외)를 투입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고전했다. 이미 김포 시내에도 북한군의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방어 부대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3. 7. 서울 시가전 및 한강 철수 (1950년 6월 28일)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 미아리에서 한국군의 최종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서울을 방어하는 마지막 보루가 사라졌다. 1시 45분경 북한군 전차가 돈암동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채병덕 참모총장은 즉시 한강 인도교 폭파 명령을 내리고 시흥군으로 이동했다.[25] 그러나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형근 제2사단장, 이응준 제5사단장, 유재흥 제7사단장은 부대들이 후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전투 중이므로, 부대 후퇴 후 폭파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김백일 행정참모부장도 동의하여 장창국 작전국장에게 폭파 중지를 명령했다. 장창국 작전국장은 급히 남한강파출소 폭파지휘소로 향했으나, 서울 시내, 특히 한강 북쪽은 피란민과 장병들로 대혼란에 빠져 도로 통행이 불가능했다.폭파지휘소에서는 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라 28일 2시 20분경 최창식 공병감이 폭파 명령을 내렸다. 이때 육군 헌병과 경찰이 무단 후퇴 차량을 저지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점화 신호와 함께 인도교와 3개 철교가 폭파되었다. 장창국 대령은 폭파지휘소 근처에서 폭음을 들었다.[26]
한강 인도교 폭파로 약 500-800명이 사망했다.[27] 북한강파출소 부근에서는 파편으로 4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한국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었고, 차량 1,318대와 장비, 보급품 등이 한강 북안에 방치되어 북한군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장약 불발로 경부선 복선철교와 경인선 단선철교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아, 이후 한강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의 한강 도하를 허용하여 작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들어온 것은 28일 오전 11시 30분경이었다.[13] 한국군은 조직적인 시가전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기에, 수도경비사령부 및 제1공병단 일부, 후퇴한 부대가 각자 전투를 벌였다. 삼각지와 마포에서 경계를 서던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18연대 제1대대는 북한군 전차에 대한 공격은 성과가 없었으나, 대공사격반이 북한군 전투기를 격추했다. 미아리 방어선에서 후퇴한 제5연대 제3대대 일부는 청량리에서 북한군 전차 12대와 보병 부대가 침입한 것을 확인하고 육박전을 펼쳤으나, 전차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고 10명의 특공대 중 3명만 귀환했다. 남산에서는 참모학교 이용문 대령 아래 모인 병력이 '백호부대'라는 명칭으로 최후까지 항전했고, 생존자들은 유격전을 펼쳤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는 경비소대가 최후까지 저항하다 전사했고, 100여 명의 입원 환자 중 80여 명도 병원 뒷산에서 저항하다 전사했으나, 이후 침입한 북한군이 입원환자들을 학살했다. 이들 부대의 저항은 조직적이지 않았지만 매우 완강했으며, 서울 외곽 방어선에서도 조직적인 저항이 계속되어 미아리 방어선 돌파에서 한강 방어선까지 진출하는 데 10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4. 결과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개전 사흘 만인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서울 함락은 한국 전쟁 초기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군의 주력 부대는 한강 이북에 고립되었고,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퇴로가 차단되면서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한강 인도교의 조기 폭파는 서울 외곽 방어선에서 전투 중이던 한국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여 조직적인 후퇴에 지장을 초래하고, 전투력을 현저하게 저하시켰다.
그러나 조선인민군 또한 서울 점령에 집중하면서 진격이 지체되었고, 이 틈을 타 한국군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6월 28일부터 미국 공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6월 29일에는 미국 해군 순양함의 지상 포격이 시작되는 등 미국의 참전이 본격화되었다.[13]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이 공산주의의 위협을 증가시킨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지시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84를 통해 북한군 및 동맹군에 대한 유엔 깃발 사용을 허가하고, 회원국들에게 한국 지원을 권고했다.[32]
결과적으로 서울의 조기 함락은 한국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미국의 참전과 유엔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4. 1. 서울 함락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 미아리에서 한국군의 방어선이 돌파되면서 서울의 최종 방어선이 무너졌다. 1시 45분경 북한군 전차가 당시 서울 시내였던 돈암동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한국군 채병덕 참모총장은 즉시 한강 인도교 폭파 명령을 내리고 한강을 건너 시흥군으로 향했다.[25]한편 참모총장이 떠난 직후 육군본부에 도착한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 제7사단장 유재흥 소장은 폭파 명령을 듣고, 아직 일선 부대가 후퇴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전투를 계속하고 있으니 부대를 후퇴시킨 뒤에 폭파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행정참모부장 김백일 대령도 이에 동의하여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교량 폭파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장창국 작전국장은 남한강파출소 폭파지휘소로 급히 향했지만, 서울 시내, 특히 한강 북쪽은 피란민과 장병들로 대혼란에 빠져 도로 통행이 어려웠다.
폭파지휘소에서는 참모총장의 폭파 명령을 받고 28일 2시 20분경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폭파 명령을 내렸다. 이때 교량에서 육군 헌병과 경찰이 명령 없이 후퇴하는 차량들을 저지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점화 신호와 함께 인도교와 3개 철교가 폭파되었다. 폭파 중지 명령을 내리기 위해 급하게 가고 있던 장창국 대령은 폭파지휘소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큰 폭음을 들었다.[26]

한강 인도교 폭파로 대략 500-8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하였다.[27] 또한 북한강파출소 부근에서는 파편으로 4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당했고, 국군을 지원하던 차량 1,318대와 장비, 보급품 등이 한강 북안에 방치되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하지만 장약 불발로 경부선 복선철교와 경인선 단선철교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으며, 이후 한강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의 한강 도하를 허락하여 작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돌입한 것은 28일 오전 11시 30분 경이었다.[13] 한국군은 조직적인 시가전을 치를 상황이 되지 않아, 시내에 있던 수도경비사령부 및 제1공병단 일부와 서울로 후퇴한 부대가 각 부대별로 전투를 펼쳤다. 삼각지와 마포 방면에서 경계를 서던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18연대 제1대대는 북한군 전차를 향한 57mm 대전차포 및 육박공격은 성과가 없었으나, 대공사격반이 북한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미아리 방어선에서 후퇴한 제5연대 제3대대 일부 부대는 청량리에서 북한군 전차 12대와 보병 부대가 시내로 침입한 것을 확인하고 육박전을 펼쳤으나 전차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10명의 특공대 중 3명만이 귀환하였다. 남산에서는 참모학교의 이용문 대령 아래 모인 중대 규모의 병력이 '백호부대'라는 명칭으로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며, 생존자들은 유격전으로 돌아섰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는 경비소대가 최후까지 저항하다 전부 전사하였고, 100여 명의 입원 환자 중 80여 명도 병원 뒷산에 올라가 저항하였으나 모두 전사하였으며, 이후 침입한 북한군이 입원환자들을 학살하는 일을 벌였다. 이들 부대의 저항은 조직적이진 않았으나 매우 완강하였으며, 서울 외곽의 방어선에서도 조직적으로 저항을 계속하여 미아리 방어선 돌파에서부터 다시 한강 방어선까지 진출하는 데 10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시점에서 한국군의 주력이었던 제2사단, 제3사단, 제5사단, 제7사단과 수도방위사령부 부대는 여전히 서울 외곽 방어선에서 교전 중이었으며, 제1사단은 파주 남쪽 방어선을 지키고 소규모 반격을 통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량이 폭파되고 북한군이 서울 시내로 진입했음을 인지한 각 부대는 급격하게 붕괴되며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상황에 대해 일본 육상자위대 간부학교(구 일본 육군대학교) 전사교관들의 육전사연구보급회에서는 "한국군 주력부대가 북한군의 공격은 물론이고 스스로 너무 이른 시기에 퇴로를 차단해 버린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붕괴되었다"라고 평가했다.[29]
문산 방면에서 방어 중이던 제1사단 및 증원부대는 봉일천리 서남쪽의 이산포 나루터와 김포공항 인근의 행주에서 분산 도하를 하였으나, 이산포에서는 상륙 지점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제1사단 및 배속 부대는 국경 전투에서 서울 전투에 이르기까지 전사자 및 실종자가 총 3,500명이나 나왔는데, 이 중 대부분이 도하 과정에서 발생하였다.[15] 도하 이후 제1사단은 병력이 5,000명 규모로 줄어들었으나, 병사들은 운반 가능한 장비를 최대한 들고 도하하였다.
미아리 방면에서 방어전을 펼치던 혼성부대는 마포, 하중리(현재의 서강동), 서빙고, 한남동, 뚝섬, 광나루 등 한강의 각 나루터에서 도하하였다. 국경 전투 초기부터 전투를 계속하던 제7사단은 한강을 건너면서 총 병력 1,200명으로 줄어들었고, 휴대한 중장비는 기관총 4정만 있었다. 광나루를 도하한 부대는 바로 수원으로 집결하였으며, 서빙고, 한남동, 뚝섬에서 도하한 부대는 수원과 시흥에, 행주, 하중리, 마포에서 도하한 부대는 대부분 시흥으로 집결하였다. 철수 부대는 28일 밤에서 29일 아침 사이에는 거의 집결을 완료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서울 시내에서는 탈출 기회를 놓친 한국군 장병들이 숨어있었고, 개인 단위로 원대 복귀를 시도하다 북한군에게 잡힌 병사들도 있었다. 7월 29일에는 서울을 탈출하지 못한 안병범 준장이 서울 시내의 인왕산에서 할복자살을 하기도 하였다.[30]
4. 2. 한강 방어선 형성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한국군의 주력 부대(제2, 3, 5, 7사단, 수도방위사령부)는 서울 외곽에서 전투 중이었고, 제1사단은 파주 남쪽에서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량 폭파와 인민군의 서울 진입 소식에 각 부대는 급격히 붕괴되어 후퇴했다. 일본 육상자위대 간부학교(구 일본 육군대학교) 전사교관들은 이를 두고 "한국군 주력부대가 너무 이른 시기에 퇴로를 차단해 붕괴되었다"라고 평가했다.[29]문산 방면의 제1사단 및 증원부대는 이산포 나루터와 김포공항 근처 행주에서 분산 도하를 시도했으나, 이산포에서는 인민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제1사단은 도하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병력이 5,000명 규모로 줄었지만, 최대한 장비를 가지고 후퇴했다.[15]
미아리 방면의 혼성부대는 마포, 하중리(서강동), 서빙고, 한남동, 뚝섬, 광나루 등에서 한강을 건넜다. 제7사단은 한강 도하 후 병력이 1,200명으로 줄었고, 중장비는 기관총 4정뿐이었다. 광나루 도하 부대는 수원으로, 서빙고, 한남동, 뚝섬 도하 부대는 수원과 시흥으로, 행주, 하중리, 마포 도하 부대는 시흥으로 집결했다. 철수 부대는 6월 28일 밤에서 29일 아침 사이에 대부분 집결을 완료했다. 그러나 서울에 남은 병사들도 있었고, 7월 29일에는 안병범 준장이 인왕산에서 자결하기도 했다.[30]
한편,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진격이 지체되었고,[15] 이 틈을 타 한국군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6월 27일, 미국은 한국에 대한 무력 지원을 시작했고, 28일부터 미국 공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했으며, 29일에는 미국 해군 순양함의 지상 포격도 시작되었다.[13]
6월 30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이 공산주의의 위협을 증가시켰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에 대한 공군 및 육군 지원을 명령했다. 또한 미 7함대에 대만 방어를, 필리핀 주둔 미군 강화를 지시했다.[31]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84를 통과시켜 북한군 및 동맹군에 대한 작전에서 유엔 깃발 사용을 허가하고, 회원국들에게 한국 지원을 권고했다.[32]
5. 평가
제1차 서울 전투는 여러 측면에서 평가가 엇갈린다. 대한민국 국군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부 부대가 선전하며 용감하게 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지휘부의 혼란과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는 국군의 붕괴를 초래하고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낸 과오로 지적된다.
조선인민군은 서울 점령에는 성공했지만, 초기 전략에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특히, 서울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평가하여 점령 이후 진격이 지체되었고, 이는 한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미군이 개입할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를 낳았다.[9] 조선인민군은 미국의 조기 개입을 예상하지 못해 전략 변경이 불가피했다.[6]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 제84호를 통과시켜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고 세계 평화와 안보를 회복하는 데 있어 한국을 지원하도록 권고했다.[32]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이 태평양 지역과 미국에 대한 공산주의의 위협을 증가시켰음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31]
5. 1. 대한민국 국군의 전투력 평가
대한민국 국군은 열악한 장비와 훈련 부족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서울 전투에서 용감하게 저항했다. 특히, 춘천-홍천 전투에서 국군 제6보병사단은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며 큰 활약을 했다.[6]개전 초기, 국군은 전반적으로 열세였으나, 일부 부대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 제1사단은 문산 방면에서 완강히 저항하며 인민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6]
- 제8사단은 해상으로 침투한 인민군 코만도 부대의 공격과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치고 부대 건제를 유지하며 후퇴했다.[6]
- 제6사단은 춘천 지역에서 험준한 지형을 활용, 인민군 2개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인민군 제2사단의 전투력을 상실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6]
하지만, 의정부 회랑에서는 인민군의 기갑 부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각개격파 당하며 서울 방어에 실패했다.[6] 또한, 한강 인도교의 조기 폭파는 피난민 희생과 더불어 국군 주력 부대의 퇴로를 차단, 붕괴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9]
일본 육상자위대 간부학교(구 일본 육군대학교) 전사교관들은 "한국군 주력부대가 인민군의 공격은 물론이고 스스로 너무 이른 시기에 퇴로를 차단해 버린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붕괴되었다"라고 평가했다.[29]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국군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재편성을 시도했으며,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시작되면서 전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13]
5. 2. 이승만 정부의 대응 비판
이승만 정부는 6.25 전쟁 발발 초기, 특히 제1차 서울 전투에서 심각한 무능과 혼란을 보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부의 성급한 한강 인도교 폭파 결정은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1]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당시, 대한민국 국군 주력 부대(제2, 3, 5, 7사단, 수도방위사령부)는 여전히 서울 외곽에서 교전 중이었고, 제1사단은 파주 남쪽에서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29] 그러나 한강 다리 폭파와 인민군의 서울 진입 소식에 각 부대는 급격히 붕괴되어 후퇴했다. 일본 육상자위대 간부학교 전사교관들은 "한국군 주력 부대가 스스로 너무 이른 시기에 퇴로를 차단해 버린 것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붕괴된 결정적 요인"이라고 평가했다.[29]
서울 북동쪽 의정부 회랑에서는 조선인민군이 기갑 부대의 강력한 공격을 펼쳤지만, 대한민국 국군은 효과적인 대전차 화력이 부족했고, 적절한 방어 지형도 갖추지 못해 저지에 실패했다. 대한민국 육군은 많은 증원 부대를 투입했지만, 제대로 연계되지 못하고 각개격파 당했다. 서울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철수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서울 전투 막바지에 대한민국 육군의 지휘는 혼란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한강 다리가 너무 일찍 폭파되어 많은 피난민이 희생되었고, 서울 외곽에서 전투 중이던 대한민국 육군의 퇴로가 차단되어 조직적인 후퇴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육군 주력 부대의 전투력은 일시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서울 방어에 실패하고 한강 이북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혼란과 피해는 이승만 정부의 무능하고 성급한 대응에 대한 비판의 주요 근거가 된다.
5. 3. 북한군의 전략 평가
북한군(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초기 전략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문산-봉일천 지역에서는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진격이 지연되었다.[6] 한강을 건너 영등포로 진출하려던 북한군 제6사단은 도하 장비 부족과 경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이미 한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한 뒤였다.[15]
동해안에서는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이 북한군 코만도 부대의 공격과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치고 후퇴에 성공했다.[6] 중부 전선에서는 춘천을 방어하던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북한군은 춘천 점령에 실패하면서 서울 남쪽을 차단하여 한국군 주력을 포위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6] 이로 인해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 중장이 해임되고 무정 중장이 후임으로 임명되는 등 지휘부에 큰 변화가 있었다.
반면, 의정부 회랑에서는 북한군이 기갑부대의 강력한 힘을 앞세워 공세를 펼쳤고, 대전차 화력이 부족했던 한국군은 이를 막지 못했다.[6] 한국군은 많은 증원 부대를 투입했지만, 제대로 연계하지 못해 각개격파 당했다.
서울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한국군은 철수 계획이 없어 혼란을 겪었다. 한강 다리가 너무 일찍 폭파되면서 많은 피난민이 희생되었고, 서울 외곽에서 싸우던 한국군의 퇴로가 막혀 조직적인 후퇴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북한군은 서울의 전략적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여 서울 점령 이후 진격이 둔화되었고,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졌다.[9] 이 틈을 타 한국군은 재편성을 통해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또한, 미국의 공군과 해군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6]
북한군은 미국의 빠른 개입을 예상하지 못했고, 미군이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전에 대한민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전략을 변경해야 했다. 북한군은 한국군 주력을 수원 이북 지역에서 포위하는 것을 목표로 한강 도하를 서두르게 되었다.[6]
6. 논란
조선인민군은 개전 초 3일 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지만, 작전 계획에는 여러 차질이 있었다.
문산-봉일천 지역에서는 한국군 제1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조선인민군 제1사단과 전차연대가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6] 김포-영등포로 진출할 예정이었던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도하 장비 부족과 경험 미숙으로 지연전을 펼쳐야 했다. 동해안 방면의 한국군 제8사단은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지연 전투 후 부대 건제를 유지하며 후퇴했다.[6]
중부 전선에서는 춘천을 방어하는 한국군 제6사단이 험준한 지형을 활용,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조선인민군은 춘천 공략 실패로 작전 계획을 수정해야 했고, 제2군단장 김광협 중장은 해임, 무정 중장이 취임했다.[6]
반면, 의정부 회랑에서는 조선인민군이 기갑 부대의 충격력을 활용하여 공세를 펼쳤고, 한국군은 효과적인 대전차 화력 부재와 부적절한 장애 지형으로 인해 저지에 실패했다.[6] 서울 철수 계획 부재와 한강 교량 조기 폭파는 한국군의 혼란을 야기했고, 주력 부대의 전투 가치를 일시적으로 저하시켰다.
조선인민군은 서울 점령 이후 진격이 일시적으로 침체되었고, 미국의 조기 개입을 예상하지 못해 전략 변경이 불가피해졌다.[9]
6. 1.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 논란
19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에서 한국군의 최종 방어선이 무너지자 채병덕 참모총장은 한강 인도교 폭파 명령을 내렸다.[25] 그러나 이형근 준장, 이응준 소장, 유재흥 소장 등은 부대 후퇴 후 폭파를 건의했고, 김백일 대령도 이에 동의하여 장창국 대령에게 폭파 중지를 명령했다. 하지만 교통 혼잡으로 장창국 대령은 폭파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최창식 대령은 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라 2시 20분경 폭파를 지시했고, 인도교와 3개 철교가 폭파되었다.[26] 이 폭파로 500~800명이 사망하고,[27] 한국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많은 장비와 보급품이 북한군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경부선 복선철교와 경인선 단선철교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아 한강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의 도하를 허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 논란이 일었다. 채병덕 소장은 "군사 상식이 있는 사람이 그런 명령을 내릴 리 없다"라고, 장경근 국방차관은 "나는 명령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여, 현장 책임자였던 최창식 대령이 책임을 지고 9월 21일 부산 교외에서 총살되었다.[26] 그러나 1962년 재심 결과 무죄가 선고되어 최창식 대령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미군 고문은 명령은 채병덕 참모총장으로부터 발해졌고, 최창식 대령은 그것을 충실히 실행했을 뿐이라고 믿고 있으며, 당시 작전국에 있던 익명의 고위 관계자나 김백일 대령은 장경근 차관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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