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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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강 전투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국 전쟁 초기, 서울 함락 이후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벌어진 전투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혼성 부대를 편성하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교량 파괴와 열악한 장비, 지휘 체계 혼란 속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한강 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의 저항과 미군의 공군 지원으로 인해 진격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7월 4일 수원 함락으로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는 미군 참전 시간을 확보하고 한국군 재편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한국군의 투혼을 보여준 전투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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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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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전투 이름 | 한강 전투 |
관련 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6월 28일 - 7월 3일 |
장소 | 조선반도 서울특별시, 시흥군, 노량진, 영등포 등 한강 부근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김홍일 이종찬 |
지휘관 2 | 김웅 (조선인민군 제1군단장 중장) 리영호 |
병력 규모 | |
병력 1 |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
병력 2 | 제1군단 |
손실 규모 | |
손실 1 | 알 수 없음 |
손실 2 | 알 수 없음 |
관련 전투 | |
전역 상자 | 제1차 서울 전투 |
세부 전투 | 국경 전투 제1차 서울 전투 개성-문산 고랑포 봉일천 김포반도 오류동 의정부 동두천 포천 춘천-홍천 강릉 내촌-태릉 창동 미아리 한강 인도교 폭파 서울 점령 인민군의 한강 도하 |
2. 전투 전 상황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개전 사흘 만인 6월 28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강의 주요 다리들이 급하게 폭파되면서, 한강 이북에 있던 대한민국 국군 주력 부대 상당수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서울 방어 실패 시의 철수 계획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서울 함락과 한강 다리 폭파는 큰 혼란을 야기했다. 제대로 된 지휘체계 없이 부대들은 무질서하게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중장비, 보급품을 한강 북쪽에 남겨두는 손실을 입었다.
한편,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하여 항전을 계속하고 유엔 해공군의 개입이라는 예상 밖의 상황에 직면하자, 유엔군 지상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한다는 목표 아래 한강 도하를 서둘렀다. 6월 30일, 인민군은 "미 육군 증원 전 한강 도하 및 방어선 격멸"을 목표로 2차 작전을 개시했으며, 제4사단과 제3사단 등이 각각 영등포와 말죽거리 방면으로 도하 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한강 다리 폭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일부 철교는 전차 도하 자재가 부족했던 인민군에게 이용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였다.
2. 1. 6월 25일 ~ 26일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날 1사단 12연대 2대대 병력의 일부가 김포반도 동북단으로 철수하자, 육군 본부는 기갑연대 1개 소대를 김포반도의 한강 도하 지점으로 급파했다.다음 날인 6월 26일, 육군 본부는 남산 정보학교장 계인주 대령을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 부교장 최복수 중령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여 김포 반도 전투를 지휘하도록 했다. 또한 밀양에서 공비 토벌 및 선무 작전을 수행하다 영등포로 복귀한 방원철 소령이 이끄는 보국대대와,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교육받던 후보생들로 편성된 대대를 김포에 투입했다.
2. 2. 6월 27일 ~ 28일
6월 27일부터 조선인민군 제6사단 병력이 도하를 시작하여 진격하자 대한민국 국군은 반격작전을 펼쳤으나, 6월 28일에는 김포읍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이 실종되었는데, 이는 후에 전지 이탈로 드러났다.같은 날 새벽 2시에는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이 폭파로 인도교와 경인선 하행 철교, 광진교는 모두 끊어졌지만, 경인선 상행 철교와 경부선 철교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아 전차 도하 자재가 부족했던 인민군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폭파와 서울 함락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군 주력 부대는 한강 북쪽에 고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사전에 서울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고 철수 계획도 세우지 않아 서울 철수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서울-수원 간 국도 역시 군과 경찰이 피난민 이동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모든 도로 수송이 방해를 받았다.
6월 28일 아침, 대한민국 국군은 한강을 건너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다리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야포, 차량, 박격포 등 중장비를 넘길 수 없었다. 철수하는 부대는 소총만 가지고 뗏목이나 나룻배를 이용하여 소규모 부대나 개인 단위로 강을 건넜다. 병사들은 잦은 전투와 철수로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고, 병력도 1개 연대가 대대 규모 정도로 줄어들었다.
군수 면에서도 한강 다리 폭파로 인해 사단에 지급된 보급품과 차량 1,318대가 모두 한강 북쪽에 남아 인민군에게 넘어갔다. 한강 남쪽에서는 교통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후방 지원도 어려웠다. 통신 두절로 상하급 부대는 물론 인접 부대와의 연락도 혼란스러워 지휘 및 협력 체계가 원활하지 못했다.
3. 전투 과정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국군은 서울을 내주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했다. 6월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는 혼란 속에서, 국군은 수원의 육군 본부 지시에 따라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중심으로 급히 방어선을 구축했다.
시흥에서 후퇴한 병력을 모아 편성된 혼성 부대들은 노량진에서 영등포, 말죽거리(현 강남구)에 이르는 한강 남안에 배치되었으나, 병력과 장비 부족, 지휘 체계 혼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일부 파괴되지 않은 한강철교는 인민군의 도하를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심각한 위협 요소였다.
6월 28일 오후부터 인민군은 한강 북안에서 포격을 개시하며 도하 준비에 나섰고, 이후 여의도, 흑석동 등 여러 지점에서 도하를 시도했다. 국군은 미 공군의 제한적인 지원 하에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으나, 인민군은 야간과 미파괴 철교를 이용해 병력과 장비를 지속적으로 투입했다. 7월 1일부터 인민군의 본격적인 대규모 도하 공격이 시작되었고, 7월 3일에는 경부선 철교를 통해 전차까지 도하에 성공하면서 국군 방어선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국군은 안양 방면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6일간의 치열했던 한강 방어선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 전투는 유엔군 지상군이 참전할 시간을 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3. 1. 6월 28일, 한강 인도교 폭파 이후
6월 28일 새벽 2시,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초기 전투의 충격 속에서 대한민국 국군은 급히 '혼성' 부대를 편성하여 한강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병력은 정규 사단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한강을 사수하려는 의지만은 높았다.수원의 육군 본부에서는 채병덕 참모총장, 김홍일 소장, 이응준 소장이 모여 상황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그 결과 김홍일 소장이 시흥에서 후퇴하는 부대를 수습하여 한강 방어를 총괄 지휘하는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김홍일 소장은 즉시 시흥의 보병학교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장교들을 모아 지휘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전 육군 참모학교 고문이었던 헤이즐릿 중령 등 미군 고문관 5~6명이 합류하여, 일본에서 급파된 미 극동군 전진 지휘소 단장 존 처치 준장과의 연락을 담당했다. 헤이즐릿 중령은 미 육군 지상군 본대가 도착하기까지 최소 3일이 걸릴 것이며, 만약 그 전에 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추격해 온다면 미군은 일본으로 철수할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미 육군의 투입이 결정된 것은 6월 30일이므로 헤이즐릿 중령이 어떤 근거로 3일이라는 시간을 언급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이 이야기는 퍼져나가 "한강을 3일간 사수하라"는 절박한 구호가 되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안양 부근에 낙오자 수용선을 설치하고 남하하는 장병들을 모았다. 약 500명의 병력이 모일 때마다 수원에서 공수한 장비를 지급하여 1개 대대를 편성하고, '혼성 제O대대'로 명명하여 즉시 한강 방어선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이렇게 급조된 혼성 부대는 원래 소속 부대를 알면 즉시 복귀하는 경우가 많아 지휘관이 부대원의 신상이나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질서 있고 조직적인 작전 수행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서 한강 방어전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김홍일 소장은 다음과 같이 혼성 부대 지휘관을 임명하고 방어 구역을 할당했다.
- 혼성 제7사단: 사단장 유재흥 준장. 노량진에서 동작동까지의 방어를 담당하며, 인민군 전차와 주력 부대의 남진 저지를 목표로 했다. 사단 지휘소는 대방동의 국군수도병원(현 공군회관 자리)에, 병력 수용소는 성남중학교에 설치했다.
- 1연대와 공병 혼성대대는 노량진 ~ 영등포 도로 강변에 배치되어 경부 가도와 철로 방어 및 한강 도하 저지를 맡았다.
- 9연대와 혼성 대대는 동작동 ~ 흑석동 능선에, 20연대와 혼성 대대는 흑석동과 본동 사이 능선에 배치되었다.
- 15연대 1대대, 25연대 2대대, 15연대 3대대는 수도고지 서북쪽에 배치되어 노량진 ~ 영등포 도로와 철도를 감제하도록 했다.
- 혼성 수도사단: 사단장 이종찬 대령. 영등포 지역 방어를 담당하며, 마포 및 서강 지역에서 남하하는 인민군 제4사단과 대치했다. 사단 지휘소는 우신초등학교에 설치했다. 비교적 건제가 유지된 박태운 소령의 8연대 3대대를 중심으로, 의정부 전투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18연대의 1개 대대와 57mm 대전차포 소대가 합류했으나, 전체 전력은 1개 연대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 혼성 제2사단: 사단장 임선하 대령. 사평리 정면 방어를 담당했다.
국군은 28일 아침부터 한강을 건너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교량이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야포, 차량, 박격포 등 중장비 대부분을 한강 북쪽에 버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소총만 휴대한 채 뗏목이나 나룻배를 이용하여 소부대 혹은 개인 단위로 강을 건넜으며, 연이은 전투와 철수로 극도로 지쳐 있었다. 한강 북쪽에 남겨진 1,318량의 차량과 사단 보급품은 고스란히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또한, 제대로 된 교통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후방 지원 체계도 마비되었으며, 통신마저 두절되어 상하급 부대는 물론 인접 부대 간의 연락조차 어려워 지휘 및 협조 체계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한강 철교들이었다. 한강 인도교와 경인선 하행 철교, 광진교는 폭파되었지만, 경인선 상행 철교는 침목 일부만 손상되었고 경부선 복선 철교는 거의 파괴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여러 개의 다리가 인접해 있어 먼저 터진 폭약의 폭풍과 진동으로 나머지 폭파 장치가 손상되거나 불발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미파괴 철교는 일부 국군 병력의 도하 통로가 되기도 했지만, 전차 등 중장비를 건널 수 있는 도하 장비가 부족했던 인민군이 이 철교를 이용해 쉽게 한강을 건널 것이 분명했다. 노량진 지역 방어를 맡은 유재흥 7사단장은 이 점을 매우 우려하여 공병대에 철교 추가 폭파를 지시했다. 공병대가 폭파를 시도했지만, 폭약 부족과 인민군의 방해 등으로 철교 남단의 교대 연결 부분만 약간 이탈시키는 데 그쳤다. 6월 29일에는 미군 B-26 폭격기가 폭격을 가했지만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불안 요소는 그대로 남았다.
한편,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하여 항전을 계속하고, 예상치 못했던 유엔 해공군이 개입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미 지상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6월 30일까지 한강을 도하하여 국군 방어 부대를 격멸하고 평택, 안성, 충주, 제천, 영월 등 주요 지역을 점령한다는 2차 작전 계획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인민군 제4사단은 신촌 일대에서 영등포 방면으로, 제3사단은 용산-한남동 일대에서 말죽거리(현 강남구) 방면으로 도하 준비를 서둘렀다.
28일 오후, 한강 북안의 인민군은 산발적인 포격을 시작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도하를 서두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김포비행장 방면에서는 김포지구 경비대가 공항 확보를 위해 분전하고 있었으나, 인민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리고 있었다.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방어선을 구축하며 다가올 인민군의 대규모 도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3. 2. 6월 29일 ~ 30일
6월 29일, 서울 점령 하루 뒤, 한강을 사이에 둔 노량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북한군은 이날 동작동과 흑석동 사이 남쪽 한강변과 도당재 지역에 소규모 병력을 도하시켜 진지를 구축하려 시도했다. 이에 국군 9연대와 20연대가 반격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소련제 맥심(Maxim) 기관총과 체코슬로바키아제 소총 등을 노획하기도 했으나, 일부 지역에는 북한군 도하 병력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같은 날 오전 8시경,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이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방문했다. 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백 대령에게 김포 방면 방어를 요청했으나, 백 대령은 사단 병력이 분산되어 재편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후 백 대령은 제1사단 재편성에 착수했다.
오전 10시경에는 맥아더 원수가 수원 비행장에 도착하여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다. 그는 영등포 지역에서 미 군사고문단장 라이트 대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변으로 나아가 불타는 서울을 바라보며 참호 속 국군 병사에게 "지원군을 보내 줄 테니 안심하고 싸우라"고 격려했다. 이날 북한군은 본격적인 포격을 시작하고 전선 전반에 걸쳐 위력 정찰을 실시했다.
오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혼성 사단들의 진지 배치를 완료했다. 혼성 제7사단은 7개 대대로 노량진-영등포 강안과 동작동-노량진 고지대 방어를, 혼성 수도사단은 3개 대대와 기갑대대 등으로 영등포 방면을, 혼성 제2사단은 신사리-말죽거리 일대 방어를 맡았다. 혼성 제3사단과 제5사단은 수원에서 낙오병을 수습 중이었다. 그러나 이들 혼성 사단은 이름뿐, 실제 병력은 1개 연대 수준에 불과했고 중화기도 부족했다. 통신망 미비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통합 지휘는 어려웠고, 혼성 제2사단은 관악산에 가로막혀 육군 본부의 직접 통제를 받았으며, 김포지구 전투사령부는 거의 독립적으로 작전하고 있어 지휘 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상태였다.
정오가 지나자 여의도 북단에서 북한군의 산발적인 도하가 시작되었다. 국군은 보유한 81mm 박격포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사거리가 짧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포 4문을 끌고 여의도 서북쪽 구릉지대까지 진출해 강북을 향해 포격했으나, 북한군의 집중 포화에 포반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밤 사이 북한군은 도하 거점을 확보하고 김포가도로 공격해왔고, 국군은 제방에 의지해 필사적으로 방어전을 펼쳤다.
밤이 되자 북한군 제3, 제4사단은 전차포와 야포의 지원 아래 여의도, 흑석동, 신사리 일대에 정찰대를 보내 도하 지점을 탐색했다. 혼성 수도사단은 57mm 대전차포 1개 소대를 여의도로 보내 기습을 시도했으나, 북한군의 집중 포격에 소대원 전원이 전사했다. 북한군은 여의도 북쪽의 밤섬과 흑석동에 중대 규모 병력을 도하시켜 교두보를 확보했다.
한편, 김포에서는 최영희 대령이 이끄는 제15연대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지휘 하에 들어가 김포 비행장 탈환 작전에 나섰다. 제13연대 3대대, 제18연대 2대대도 합류했다. 오전 8시경 미군 B-29 3기가 비행장을 폭격한 틈을 타 탈환을 시도했으나 북한군에 격퇴되었다. 김포지구 사령관 우병옥 중령은 역습 실패에 비관하여 권총으로 자결했고, 후임으로 임충식 중령이 임명되었다.
한강 철교 문제도 심각했다. 한강 인도교와 경인선 하행선 철교는 폭파되었으나, 인접한 경부 상행선 철교는 일부 손상만 입었고 서쪽의 경부 복선 철교는 거의 폭파되지 않았다. 이는 동시 점화 실패로 먼저 터진 폭약의 충격이 다른 폭파 장치를 무력화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미폭파 철교는 국군의 철수 통로가 되기도 했지만, 방어 책임자인 혼성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에게는 큰 불안 요소였다. 유 준장은 공병대에 절단을 명령했고, 6월 29일에는 존 처치 준장의 요청으로 미군 B-26 폭격기가 폭격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공병대가 다시 폭파를 시도했으나 폭약 부족과 북한군 방해로 남단 교대 연결부만 약간 이탈시키는 데 그쳐 완전 절단에 실패했다.
6월 30일 아침, 여의도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서종철 중령이 이끄는 8연대가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동안, 북한군은 비행장만 장악하고 있었다. 연대장은 북한군 진지가 공고해지기 전에 격퇴하기 위해 김광해 대위의 3대대 11중대를 투입했다. 11중대는 격전 끝에 비행장을 탈환하고 경계 진지를 구축했으나, 마포와 신촌에 포진한 북한군의 맹렬한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중대장이 전사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병력은 비행장 격납고로 대피했으나 포격으로 격납고에 불이 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여의도는 주인을 잃은 채 포화만 오갔고, 혼성 수도사단 지휘소는 동양 맥주공장으로 이전해야 할 정도로 포격이 심했지만, 북한군의 대규모 도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량진 지역에서도 6월 30일부터 북한군의 본격적인 도하 시도가 시작되었다. 북한군 제3사단은 전날 확보한 동작동-흑석동 사이 한강변 교두보를 발판 삼아 동작동 뒷산 능선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에 국군은 미군 제19폭격전대 소속 B-29 15대의 폭격 지원을 받아 노량진 북쪽 한강변을 폭격하여 북한군의 증원을 차단했다. 동시에 이미 도하한 북한군을 공격하여 원래 위치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한강 인도교 남단을 감제하는 도당재 지역에서는 국군 15연대와 25연대가 도하 거점을 확보하려던 북한군을 공격하여 격퇴하고 소총 100정, 기관총 4~5정, 권총 20정, 수류탄 300발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국군도 30명의 손실을 입었지만, 이 전투는 국군에게 전차 없는 북한군과는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3. 3. 7월 1일 ~ 2일
7월 1일 오전 4시경, 북한군 제4사단 병력이 마포와 하중리 나루터에서 뗏목과 나룻배를 이용해 영등포 지역으로 본격적인 도하 공격을 시작했다. 이들은 여의도 옆 밤섬에 전진 거점을 확보하고 김포가도 제방으로 공격해왔다. 그러나 제방을 지키던 국군 제8연대는 전차 없이 개활지를 가로질러 오는 북한군의 약점과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첫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날 국군은 북한군이 제방 위에 한 명도 오르지 못하게 막아냈다.같은 날, 노량진 지역에서도 국군은 방어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동작동 뒤쪽 고지를 점령한 제9연대(연대장 윤춘근 중령)는 날이 밝자 한강 남안의 북한군 도하 거점을 제거하려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수도고지의 제25연대는 고지에 숨어든 북한군을 몰아냈으나, 이 과정에서 제2대대장 배운용 소령이 전사하는 등 손실을 입었다. 노량진역 부근의 공병대대 역시 대대장 엄재완 소령이 중상을 입고 안양으로 후송되었으며, 사육신 묘 근처의 제20연대 제1대대도 북한군 포격으로 정보 및 작전 장교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새벽에는 서빙고 부근에서 도하한 북한군 약 1개 대대가 흑석동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제9연대 일부를 격퇴한 뒤 수도고지를 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9연대는 필사적인 방어 사격과 미 공군 제19폭격전대의 지원으로 북한군 제3사단의 추가 도하를 계속 저지했다.
북한군은 폭파되지 않은 경인선 단선철교로 전차를 도하시키려 했으나 미 공군의 폭격으로 실패하자, 남쪽 연결부가 파괴된 경부선 복선 철교에 새 교판을 깔아 복구하려 시도했다. 이를 위해 서울 시민인 철도 선로반원을 강제 동원하여 야간 작업을 진행했으며, 동시에 국군 진지에 맹렬한 포격과 공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국군수도병원(현 공군회관 위치)에 있던 혼성 제7사단 지휘소는 남쪽으로 600m 떨어진 서울공업고등학교로 이전해야만 했다. 오전 8시경에는 남산에 포진한 북한군 포병이 한강 건너편 혼성 제2사단 제16연대 진지에 포격을 시작했고, 오후에는 신사리 일대에서 국군 제2기병대대가 돌파당해 지원하던 제3연대까지 위험에 처했다. 이에 국군은 방어가 용이한 말죽거리 일대로 물러나 제5, 제16연대를 95고지 일대에 배치하고 제3연대를 예비로 돌려 남태령-우면산-95고지 방어선을 구축했다.
7월 2일, 북한군은 전날 김포비행장을 점령한 병력까지 동원하여 제8연대 진지에 대한 돌파를 집요하게 시도했다. 이에 제8연대는 제1대대(대대장 이철원 소령) 제1중대(김인걸 대위 지휘)를 투입해 비행장 탈환을 위한 반격을 감행했다. 종일 이어진 혈전 끝에 국군은 북한군을 밤섬 쪽으로 격퇴했으나, 이 과정에서 이철원 소령과 중대장, 박격포 사격을 지휘하던 제10중대장 나병서 대위가 북한군 포격으로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혼성 수도사단 정면의 여의도에서는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제8연대는 여의도 비행장에 침입한 북한군을 격퇴하고 진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4사단 일부가 난지도를 거쳐 증산 부근으로 도하하여 수도사단의 좌측 배후를 위협했고, 김포비행장 부근의 북한군은 오류동이나 소사 방면으로 남하했다. 이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혼성 수도사단의 좌익을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혼성 대대를 증파했으며, 김포지구 경비대를 소사 방면 방어에 투입했다.
제8연대 좌측의 제18연대 제1대대 역시 난지도에서 양화진으로 도하하려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당시 제4중대장 대리였던 최규현 중위는 "이날 종일 앉아서 북한군의 포탄을 맞았다. 어떤 병사는 호 속에 포탄이 떨어져서 형체도 없어지고 말았다.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한 가지, 적의 포탄에 맞지 않게 해줍시사 하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이날 …… 등 병사 10명이 전사하고 중대 선임하사 ……가 실종되었으며, ……의 두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모두가 적의 포탄에 의한 것이다……."라고 기록하며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전했다. 이처럼 여의도 일대의 국군은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노량진 지역에서는 7월 2일에도 전날과 같은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국군은 방어선을 유지했다. 제20연대와 제1연대의 혼성대대가 노량진역 부근 강변 진지를 지켰고, 흑석동 뒷산 본동과 수도고지를 잇는 방어선에서는 제9연대와 제25연대가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병력 손실로 인해 대대가 중대로 재편성되는 상황에서도 국군은 고지를 지키려 분투했다. 동작동의 한 고지를 점령한 소대장은 점령 직후 50발의 북한군 포탄 세례를 받아 순식간에 2개 분대를 잃고 남은 1개 분대(12명)만으로 고지를 지켜야 했다. 각자 실탄 50여 발뿐인 상황에서 해질녘 1개 소대 규모의 북한군이 공격해오자, 소대장은 병사들에게 수류탄 2발씩을 주고 자신의 신호에 맞춰 일제히 투척하게 했다. 이 공격으로 북한군이 잠시 물러나자, 소대장은 마치 중대 병력을 지휘하는 것처럼 "제1소대 우로! 제2소대 좌로! 적을 포위하라!"고 외쳐 북한군을 기만했다. 이 위장 공세 덕분인지 그날 밤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국군 부대들은 동작동 고지에서 수도고지에 이르는 방어선을 지켜냈다.
한편, 김포 방면에서는 오류동 북쪽 고지를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장춘권 소령이 이끄는 부대는 방어보다 공격을 우선하며 반격을 반복했다.
3. 4. 7월 3일
조선인민군 제4사단은 오전 4시에 경부선 철교를 통해 전차 4대를 도하시키는 데 성공했고, 후속 부대를 영등포 방면으로 우회시켰다. 또한 열차를 이용해 전차 13대와 병력을 한강 남쪽 연안으로 진출시켜 여의도와 노량진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같은 시각, 조선인민군 제4사단 제5연대는 여의도로 도하하여 국군 제8연대 및 제18연대 제1대대와 교전을 벌였다. 이종찬 대령은 남아있던 장갑차 몇 대를 파견하여 대응했다. 인민군은 국군 제8연대 진지 가까이 접근했지만, 8연대 장병들이 지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소화기와 수류탄으로 집중 공격하여 돌파를 막아냈다. 이 전투 과정에서 인민군 제105전차여단 기계화연대는 병력의 약 35%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말죽거리 일대에 배치된 혼성 제2사단은 인민군 일부가 제5연대와 제16연대 사이의 방어선 빈틈을 통해 후방인 판교 방면으로 침투한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인민군 주력 부대의 지속적인 공격이 예상되었기에, 사단 주력은 95고지와 남태령 일대 진지를 지키면서 제25연대를 투입해 침투한 인민군을 격퇴하고자 했다.
혼성 제7사단 정면에서는 제9연대가 반격을 시도했으나, 보슬비가 내리는 악천후로 인해 가덕도의 공군 기지가 폭우 피해를 입어 공중 지원을 받지 못했다. 또한 인민군 포병의 집중 포격으로 수도고지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제9연대는 공격을 포기하고 원래의 진지로 돌아왔다. 한강의 단선 철교와 인도교에 대한 국군의 화력 제압이 약해지자, 인민군은 교두보를 더욱 넓히며 서남쪽으로 진격하여 제7사단 사령부가 있던 서울공업고등학교 근처까지 다가왔다. 국군 제25연대 등 일부 부대가 반격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밤이 되자 제7사단 사령부는 안양으로 후퇴했다. 인민군은 파괴된 교량 복구 작업을 시작하려 했지만, 남아있던 국군 제9연대와 제20연대가 박격포와 중기관총으로 사격하여 이를 저지했다.
새로 육군참모총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취임한 정일권 소장은 한강 방어선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한 뒤, 인민군의 주력 공격을 막고 있는 혼성 수도사단과 혼성 제7사단의 후퇴 경로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말죽거리-수원 방어선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보고, 혼성 제3사단 소속 제22연대를 판교 남쪽의 금곡리 일대에 배치하여 제2 저지선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4. 한강 방어선 전투의 실패: 7월 4일
7월 4일에 수원마저 포기하게 되면서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고, 결국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목표로 후퇴하게 되었다.
여의도 방면에서는 인민군 제4사단이 비행장을 점령하고 국군 혼성 수도사단 제8연대의 진지를 돌파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이후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노량진 맞은편의 인민군 제3사단은 교두보를 확보할 병력이 부족하여 과감한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말죽거리 일대에서는 인민군 제3사단 제8연대가 신사리에서 한강을 건너 판교에 침투한 부대에 이어 국군 제5연대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95고지까지 진출하는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미 공군의 폭격으로 인민군의 더 이상의 진출은 저지되었고, 이 틈을 타 국군 제5연대는 부대를 정비할 수 있었다.
시흥리 부근에서는 예비대였던 국군 보병학교 연대가 판교 방향으로 진출하던 인민군 보급차량 30여 대를 발견하고 기습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판교를 점령한 인민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남진 속도를 늦추는 데 기여했다.
한편, 이날 아침 한강 단선철교에 대한 화력 제어를 맡았던 국군 제9연대가 관악산 방면으로 후퇴하자, 인민군은 철교 보수 작업을 재개했다.
5. 결과 및 영향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면서 대한민국 국군 주력 부대는 한강 북쪽에 고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사전에 서울 철수를 예상하지 못해 계획이 없었고, 이로 인해 철수 과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서울-수원 간 국도 역시 피난민 이동 통제 실패로 군의 이동에 차질이 생겼다.
6월 28일 아침부터 국군은 한강을 건너 철수를 시작했으나, 다리가 파괴되어 야포, 차량, 박격포 등 중장비 대부분을 한강 북쪽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철수하는 병력은 소총만 가진 채 뗏목이나 나룻배를 이용해 소규모 혹은 개인 단위로 강을 건넜다. 잦은 전투와 철수로 극도로 피로해진 상태였고, 부대 규모는 1개 연대가 대대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군수 면에서도 큰 손실이 발생하여, 사단에 지급된 보급품과 차량 1,318대가 한강 북쪽에 남아 인민군에게 넘어갔다. 한강 남쪽에서는 교통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후방 지원도 어려웠으며, 통신 두절로 상하급 부대 및 인접 부대 간 연락이 끊겨 지휘와 협조가 원활하지 못했다.
인도교, 경인선 하행 철교, 광진교는 파괴되었지만, 경인선 상행 철교와 경부선 철교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전차 도하 장비가 부족했던 인민군은 이 남은 다리들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서울 점령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하고 국군의 저항이 계속되며 유엔 해공군까지 개입하자,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유엔군 지상군 참전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6월 30일 2차 작전을 개시했다. 목표는 한강을 도하하여 국군 방어선을 격파하고 평택, 안성, 충주, 제천, 영월 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인민군 제4사단은 신촌 일대에서 영등포 방면으로, 제3사단은 용산-한남동 일대에서 말죽거리 방면으로 도하 준비를 서둘렀다.
인민군 제4사단은 새벽 4시에 경부선 철교를 통해 전차 4대를 먼저 건너보내는 데 성공했고, 후속 부대를 영등포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또한 열차를 이용해 전차 13대와 병력을 추가로 남쪽으로 보내 여의도와 노량진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노량진으로 도하한 인민군 제3사단 일부는 영등포 배후를 위협했고, 제6사단 일부도 오류동을 돌파해 전차 2대의 엄호 아래 영등포로 진입했다. 여의도 정면의 인민군도 혼성수도사단 제8연대의 방어선이 무너진 틈을 타 한강을 건너 영등포로 진격했다.
한강 남안의 교통 요충지인 영등포에서 혼성수도사단 장병들은 포위된 상황에서도 건물 등을 이용해 시가전을 벌이며 저항했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국군 주력을 보존하기 위해 후퇴 명령을 내렸다. 결국 7월 4일 수원마저 포기하게 되면서 한강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국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6. 평가
시흥 전투 사령부는 혼성 부대를 이끌고 약 1주일간 한강 방어선을 지켜내며 인민군의 남진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켰다. 이는 미 지상군이 전선에 투입될 시간을 확보하고,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 전선을 구축하며 지연 작전을 펼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 전투는 인민군의 초기 전략에 큰 차질을 안겨주었으며, 한국군에게는 전략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시흥 전투 사령부는 이후 제1군단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한국군 포병의 효과적인 지원 사격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소련 군사 고문단의 보고서에도 한국군 포병의 사격 통제 능력과 정확성이 높았으며, 특히 서울 점령 이전과 한강 도하 시 영등포, 수원 방면 등에서 대대 단위의 집중 화력 운용이 효과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미국 공군의 신속한 개입과 폭격은 7월 3일까지 한국군이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한국군의 사기와 전투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반면,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도 즉시 한강 도하 작전을 개시하지 않고 중앙 기관 점령 등 부차적인 목표에 집중하면서 시간을 지체했다. 이로 인해 한강 교량 확보는 물론 북안의 선박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만약 인민군이 신속하게 도하하여 한국군을 추격했다면, 유엔군의 참전 자체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인민군은 여러 지점에서 교두보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도하 장비 부족, 정찰 능력의 취약성, 부대 간 정보 공유 미흡, 포병과의 비효율적인 협동 작전 등으로 인해 이를 효과적으로 확장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한강 인도교의 성급한 폭파는 전략적으로 큰 실책으로 지적된다. 이 폭파로 인해 국군 주력 부대가 한강 이북에 고립되었고, 야포, 차량 등 중장비와 보급품 대부분을 강북에 남겨둔 채 소총만 휴대하고 소규모로 도하해야 했다. 이는 병력 손실뿐만 아니라 군수 지원 체계의 붕괴를 가져왔고, 통신 두절로 인한 지휘 체계의 혼란을 야기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와 군 수뇌부가 서울 철수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하고 사전 계획을 수립하지 않아 피난민 통제에 실패하고 극심한 혼란을 초래한 점은 당시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책임 회피를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는다.
7. 참여 부대
6.25 전쟁 초기, 서울 함락 직후 한강 방어선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는 대한민국 육군과 조선인민군의 여러 부대가 참여하였다.
한국군은 한강 남안에 급히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 아래 여러 혼성사단이 재편성되어 투입되었고, 김포 반도 방면에서는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되어 방어를 담당했다. 또한 개전 초 서부전선에서 후퇴한 제1보병사단도 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여하였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남하를 계속하기 위해 한강 도하를 시도하였다. 주력 부대는 김웅 중장이 지휘하는 제1군단으로, 예하의 제1사단, 제3사단, 제4사단, 제6사단 등 보병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이 투입되었다.
7. 1. 한국군
6월 25일 1사단 12연대 2대대 병력 일부가 김포반도 동북단으로 철수하자, 육군 본부는 기갑연대의 1개 소대를 김포반도의 한강 도하지점으로 급파했다. 6월 26일에는 남산 정보학교장 계인주 대령을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부교장 최복수 중령을 참모장으로 임명해 김포 반도 전투를 지휘하도록 했다. 또한 밀양에서 작전 중이던 방원철 소령이 이끄는 보국대대와 시흥 보병학교의 후보생으로 편성된 대대도 김포에 투입되었다.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여한 주요 한국군 부대 및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
구분 | 직책 | 이름 | 비고 |
---|---|---|---|
사령부 | 사령관 | 김홍일 소장 | |
참모장 | 김종갑 대령 | ||
혼성 수도사단 | 사단장 | 이종찬 대령 | |
제8연대 | 연대장 | 서종철 중령 | |
제1대대장 | 이철원 소령 | 7월 2일 전사 | |
제2대대장 | 고백규 소령 | ||
제3대대장 | 박태운 소령 | ||
제18연대 | 제1대대장 | 박철용 소령 | |
기갑연대 | 제1장갑대대장 | 박무열 소령 | |
혼성 제7사단 | 사단장 | 유재흥 준장 | |
제1연대 | 연대장 | 이희권 중령 | |
혼성대대장 | 강완채 대위 | ||
제9연대 | 연대장 | 윤춘근 중령 | |
혼성대대장 | 유환박 소령 | ||
제20연대 | 연대장 | 박기병 대령 | |
혼성대대장 | 김한주 소령 | ||
제25연대 | 혼성 제2대대장 | 양운룡 소령 | |
제15연대 | 제1대대장 | 이존일 소령 | |
제3대대장 | 최병순 소령 | ||
혼성 제2사단 | 사단장 | 임선하 대령 | |
이한림 대령 | 7월 1일부터 | ||
제3연대 | 연대장 | 최수창 중령 | 7월 4일 전사 |
제1대대장 | 임백진 소령 | ||
제3대대장 | 김봉상 소령 | ||
제5연대 | 연대장 | 최창언 대령 | 7월 2일 부상 |
연대장 | 박기성 중령 | 7월 3일부터 | |
제1대대장 | 이경도 소령 | ||
제2대대장 | 차갑준 소령 | ||
제16연대 | 연대장 | 문용채 대령 | |
제1대대장 | 유의준 중령 | ||
제3대대장 | 윤태호 소령 | ||
보병학교 혼성연대 | 연대장 | 유해준 중령 | |
혼성대대장 | 하갑청 중령 | ||
기갑연대 | 제2기병대대장 | 장철부 소령 | |
혼성 제3사단 | 사단장 | 이준식 준장 | |
제22연대 | 연대장 | 강태민 중령 | |
제1대대장 | 황명 소령 | ||
제2대대장 | 김재규 소령 | ||
제3대대장 | 손영을 소령 | ||
제25연대 | 연대장 | 김병휘 중령 | |
제2대대장 | 나희필 대위 | ||
제3대대장 | 고동석 소령 | ||
사관학교 | 학생대대장 | 손관도 소령 |
'''김포지구전투사령부'''
구분 | 직책 | 이름 | 비고 |
---|---|---|---|
사령부 | 사령관 | 계인주 대령 | |
사령관 | 우병옥 중령 | 6월 28일부터 | |
사령관 | 임충식 중령 | 7월 29일부터 | |
사령관 | 최영희 대령 | 7월 30일부터 | |
기갑연대 | 제1장갑수색대대장 | 박무열 소령 | |
제3도보수색대대장 | 강문헌 대위 | ||
제8연대 | 제3대대장 | 박태운 소령 | |
제12연대 | 제2대대장 | 한순화 소령 | |
제15연대 | 제1대대장 | 이존일 소령 | |
제2대대장 | 안광영 소령 | ||
제18연대 | 제2대대장 | 장춘권 소령 | |
제3대대장 | 안민일 소령 | ||
제22연대 | 제3대대장 | 손영을 소령 | |
육군 보국대대 | 대대장 | 방원철 소령 | |
육군 보병학교 후보생대대 | 대대장 | 장영문 소령 | |
대대장 | 김광순 소령 | 6월 28일부터 | |
육군 남산학교 | 교장 | 최복수 중령 | |
교장 | 계인주 대령 | 6월 26일부터 | |
육군 공병학교 | 학생 일부 |
'''제1사단'''
7. 2. 북한군
6월 27일부터 북한군 제6사단 병력이 도하를 시작하여 진격하자 국군은 반격작전을 펼쳤으나, 6월 28일에는 김포읍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당시 국군 사령관이 실종(후에 전지 이탈로 밝혀짐)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다른 전선에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한강 전투에 투입된 북한군 주력 부대인 제1군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구분 | 지휘관 | 예하 부대 |
---|---|---|
제1군단 | 김웅 중장 | 제1사단, 제3사단, 제4사단, 제6사단, 제105전차여단 |
제1사단 | 최광 소장 | 제2연대, 제3연대, 제14연대, 포병연대 |
제3사단 | 리영호 소장 | 제7연대 (연대장: 김창봉 대좌), 제8연대 (연대장: 김병종 중좌), 제9연대 (연대장: 김만익 대좌), 포병연대 (연대장: 안백성 대좌) |
제4사단 | 이권무 소장 | 제5연대, 제16연대, 제18연대, 포병연대 |
제6사단 | 방호산 소장 | 제1연대, 제13연대, 제15연대, 포병연대 |
제105전차여단 | 유경수 소장 | 제107전차연대, 제109전차연대, 제203전차연대, 제206기계화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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