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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17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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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종수(1728년 ~ 1799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이자 정조 즉위 후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노론 청명당에 속했으며, 정조에게 군주가 스승의 역할도 해야 한다는 '군사부일체'를 강조하며 왕도정치를 설파했다. 정조의 신임을 받아 홍국영을 실각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사도세자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과 탕평책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말년에 유배되었다. 사후에는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정조 사후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고종 때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몽오집》, 《경연고사비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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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172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종수
원어명金鍾秀
진솔 김종수의 영정
출생일1728년 2월 8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서부 미장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지조선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별장 혹은 포천군 군내면 구 포천관아에서 노환으로 병사
사망일1799년 1월 7일 (71세)
임기1789년 2월 1일 ~ 1796년 5월 31일
정당노론(노론 내 청명당)
본관청풍
군주조선 정조 이산
국적조선
별명자는 정부, 호는 진솔, 솔옹, 몽오, 시호는 문충
학력1783년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 급제
직책조선국 기로소 봉조하
(朝鮮國 耆老所 奉朝賀)
종교유교(성리학)
배우자해평 윤씨 부인
자녀김약연(아들)
부모김치만(부), 풍산 홍씨 부인(모)
형제김종우(형)
친인척김치인(종숙)
김재로(종조부)
김상로(재종조부)
김동선(양손자)
홍상한(외삼촌)
홍낙성(외사촌형)
혜경궁 홍씨(외 6촌 여동생)

2. 생애

175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 음서로 출사하여 세손이던 정조를 보필하였다. 1768년 과거에 급제하여 의정부우의정좌의정을 지냈으며, 1795년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의 친척은 노론 벽파에 속했지만, 그는 노론 벽파에 가담하지 않고 청명당 또는 청류파라고 부르는 노론 내 계파에 가담했다.

세손 시절 정조의 스승으로, 세손 제거 당론에 반대하여 세손을 옹호하였으나, 노론시파에는 가담하지 않고 청명당파(청류파)에 속했다. 정조 즉위 후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조에게 도의정치를 역설하며 임금이면서 아버지이자 스승이 될 것을 건의하였다.

당색은 노론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강경파였던 선조들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당숙 김치인과 함께 노론 청명당파에 가담하였다. 그는 노론 벽파, 시파와 동조하지 않고 세손 정조를 정통으로 규정했다. 대의명분에 입각한 군사부일체론을 주창하였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한성부 출신으로, 김구의 증손이며 김치만의 아들이다. 김재로의 종손이자 김치인의 5촌 조카이며 김종후의 동생이다. 재종조부 김상로김약로는 사도세자의 정적이었다. 175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 음서로 출사하여 세손이던 정조를 보필하였다.

김종수는 1728년(영조 5년) 2월 8일 한성부 서부 미장동(美牆洞,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지로1가, 남대문로1가, 소공동, 태평로2가, 명동 일대)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이고, 아버지는 진위장군(振威將軍) 행세자익위사시직(侍稷)을 지낸 김치만(金致萬)이다. 어머니는 풍산 홍씨로 홍석보(洪錫輔)의 딸이고, 부인은 홍문관교리를 지낸 윤득경(尹得敬)의 딸이다.

어머니 풍산 홍씨는 홍현보의 조카딸이자, 홍봉한, 홍인한 형제의 사촌 누이였다. 따라서 혜경궁 홍씨와는 내외종 6촌간이 된다. 외삼촌 홍상한(洪象漢)의 장모 함종어씨는 어유봉의 딸이며, 경종비 선의왕후의 사촌 자매간이다. 홍낙성은 그의 외사촌형이었다.

그는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형 김종후는 당대의 대학자였다. 그의 가계는 노론 벽파였고 재종조부 김상로는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으나, 종조부 김재로, 당숙 김치인과 그는 노론 청명당으로 전향하여 정조 즉위 후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외가쪽으로는 홍봉한홍인한이 외당숙뻘이었고, 홍국영은 12촌 외가 친척이었다.

어려서 정래교(鄭來僑)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래교는 풍산 홍씨 가문과 청풍 김씨 가문에서 독선생으로 초빙한 인물로, 아버지 김치만은 그의 명성을 듣고 특별 초빙하여 김종수와 형 김종후를 가르치게 했다. 아버지 김치만은 영조가 자신의 조카 낙천군 이온(洛天君 李縕)과 그의 누이를 결혼시키려 하자, 왕명인데도 이를 반대하다 파면, 투옥당했으나, 형과 그는 연좌되지 않았다.

2. 2. 세손의 스승, 그리고 정치적 시련

1766년(영조 42) 11월 27일 영조가 친히 낸 과차에 수석하여 전시직부(殿試直赴)의 명을 받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그해 세손궁에 보직되어 세손궁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1] 서인 노론 출신이었지만, 성리학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176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보직되었고, 이때 세손사부가 되어 세손이었던 정조를 가르쳤다.[1] 지조가 있고 풍속을 지켰다는 이유로 영조의 특명으로 을과(乙科) 합격자 예우를 받았다.[1] 그해 5월 부수찬이 되었으며, 계속 세손사부를 겸직하여 정조를 보도하였다. 1768년 6월 8일에는 세자시강원 필선, 6월 12일에는 겸사서에 임명되었다.

김종수는 정조가 왕세손일 때부터 정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1]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다.[1] 군주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며 군주 스스로 학문과 군사 다방면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1] 또한 세손에게 만인을 포용하는 어버이가 되어야 하며, 항상 높고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것을 이룩하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1] 허목윤휴, 윤선도를 비난하면서도, 원시유학의 가치를 설명하였다.[1]

예조정랑,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세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다시 세손을 성실히 보좌하였다.[2] 이때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았다.[2]

그는 노론 당원임에도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하는 것에 반대했다. 세손은 국왕의 정통 후계자이며 근본을 바꾸려 하는 것은 역심이며 욕심이라 했다. 노론내 벽파, 외척, 탕평파는 그를 껄끄럽게 여겼다.

1771년에는 세손에게 사소한 것에 집착하다가 큰 일을 그르칠 수 있다며 조언하기도 했다.

2. 3. 정조 시대의 활동

김종수는 노론 온건파였던 김재로나, 노론벽파였던 김상로 등 친척들과는 당론을 달리했다. 그의 종조부 김재로는 노론 온건파로서 영조 초반에 탕평당의 기둥으로 활약했고,[3] 종조부인 김약로, 김상로는 왕실 외척이 주도하는 탕평당의 맹장으로 활약했다.[3] 특히 종조부 김상로는 노론 홍계희, 소론 정우량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역적으로 단죄되었다.[4] 정조는 김약로, 김상로와 가까운 김양로를 미워하여 화성 능행과 삼참 행차를 할 때 그의 묘소를 비껴갈 정도였다. 그러나 김종수는 왕가 외척의 정치 관여는 가깝고 먼 인연, 베겟머리 송사 때문에 부패와 비리를 낳을 뿐이라며 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반면 김종수의 종백부이자 김재로의 아들 김치인은 조카 김종수와 마찬가지로 탕평당 소속 부친의 정치 노선에서 벗어났다. 즉 외척이 주도하는 탕평당에 대항한 청명당의 지도자로 변신한 것이었다.[4]

정조를 공격한 김귀주,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과 모두 친밀했으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하는 공격을 주도하기도 했다.[4] 오로지 군주의 안위를 생각하여, 친지라 해도 문제가 있는 자는 고변하여 제거하겠다는 김석주를 본받겠다고 공언한 바도 있다.[4] 이러한 그의 평소 소신은 같은 노론 당내에서도 엄청난 적과 비난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노론 내 벽파, 시파, 탕평파를 모두 상대해야 했다. 임오화변을 계기로 노론은 사도세자의 후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당론을 세웠지만, 김종수는 이를 거부하고 세손은 영조의 적손이니 정통 후계자라는 견해를 고수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모함당해 죽었다는 유언호 등 노론 시파의 의견에도 억지, 궤변이라며 동조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노론 벽파나 외척당, 시파와는 별개의 정파인 노론 청명파에 가담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소론, 남인, 북인을 역적이라 보는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1772년 청명(淸名, 청렴함과 명예)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 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노론 내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그 지도자인 조정(趙晸), 김치인(金致仁), 정존겸(鄭存謙), 이명식(李命植) 등을 유배보냈고, 이때 김종수 역시 청명류의 지도자로 지목되어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그는 영조에 의해 청명당이라는 새로운 파벌을 조장했고, 숙부 김치인을 움직였다는 혐의와, 대사성 후보자의 1등으로 자신의 이름이 낙점되도록 뒤에서 유도했다는 의심을 받고 처벌, 유배되었다.

그는 홍국영과 가깝게 지냈고, 혜경궁 홍씨와도 인척이었음에도, 혜경궁은 그가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데 가담한 인물 정도로 취급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도 그가 홍국영과 어울려서 뒤에서 음모를 꾸민다고 묘사했다.

영조는 그가 숙부 김치인을 꾀어내어 당파를 만들었다며, 유배형에 천극형을 더하여 서민으로 삼고 그의 가족들에게 금고형을 내렸다. 1774년 세손이 대리청정의 명을 받은 뒤, 1776년(영조 52년) 1월 특별히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노모를 봉양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세손은 받아들이지 않고 끄트머리에 추천되어 낙점(落點)한 것은 특은(特恩)에서 나온 것이니,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

1776년, 유배된 지 4년 만에 영조의 죽음으로 행장 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정조가 그를 특별히 요직에 발탁하였다. 조정에 돌아온 그는 세손의 즉위를 반대한 홍인한, 음모를 꾸민 정후겸, 김귀주 등을 복주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노론 벽파 인사들을 왕의 자리를 택군하려 한 대역죄인들이라 성토하고 이들을 처치할 것을 상주했다. 김종수는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홍인한, 정후겸, 문성국과 한패라며 법으로 처단할 것을 건의했다. 한편 홍인한의 사주를 받고 세손 대리청정을 반대한 심상운이 복주될 때, 그의 무리로 언급되었지만 정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김종수는 왕세손의 학문을 담당한 시강원에 근무하면서 정조의 스승이라는 각별한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 정조가 김종수를 크게 신임한 이유가 이런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종수가 정조에게 설파한 군주론이 정조의 생각과 정확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5] 일찍이 세손 시절 김종수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면서 아버지가 되라(군사부)는 것을 여러 번 정조에게 반복했는데 이는 세손 정조의 생각, 세손 정조가 이상적인 군주로 생각하는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그가 꾀를 내어 홍국영과 함께 자신의 친정을 공격하고 원수가 됐다고 했다. 혜경궁 홍씨는 김종수의 형 김종후가 1767년 세손궁 자의에 임명되자, 친정아버지 홍봉한이 이를 반대, 상중이라 직접 반대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김종후의 세손궁 임명을 반대한 일로 원한을 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기용되어 승지에서부터 1년 사이에 우참찬(右參贊), 병조판서로 승진되었다. 노론 벽파의 강경파였던 선조들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당숙 김치인과 함께 노론 온건파에 가담하여 숙청을 면하고 정조에 의해 등용되었던 것이다.[6] 사도세자와 그 후손은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노론의 당론을 어기고, 일부 인사와 함께 세손은 영조의 적법한 계승자라 주장하였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따돌림을 받게 되었고, 이후 정조 즉위 후 개혁 작업을 하면서도 같은 노론 인사들의 처벌을 묵인, 동의하게 된다.

그는 화완옹주에 대해서도 계속 공격, 처벌을 요청했으며 정후겸을 처형했지만 정조는 화완옹주는 살려주었다. 화완옹주는 작위를 박탈당하고 정처(정씨의 처), 정치달의 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화완옹주사형시킬 것을 상소했다. 1795년 3월까지 그는 계속 화완옹주의 처단을 상소했다.

1778년 4월 의정부 좌참찬성균관 사업이 되어 4월 20일 경연고사비례(經筵故事比例)를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그러나 홍국영의 권력이 강해지고,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후계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며 비판했다. 이후 김종수는 홍국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재야의 산림 유생들을 배후에서 홍국영 탄핵 상소를 올리도록 부추겼다. 정조는 김종수를 이용하여 홍국영을 실각시켰다.[7] 정조의 뜻을 알게 된 김종수는 홍국영 탄핵에 앞장섰다. 비록 임금의 지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어제의 동지인 홍국영을 물어뜯는 김종수의 태도를 두고 혜경궁 홍씨가 정조에게 "어쩜 저럴 수 있느냐?"고 말하자, 정조는 "지도 살아야 하니 어쩌겠습니까?"라고 대답하기도 했다.[7] 그는 홍국영이 원빈의 양자를 물색하는 것 역시 다른 마음을 품은 것으로 지적했다.

그는 친한 인물이라고 해도 정치적, 인격적,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은 칼같이 잘라야 된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홍봉한, 홍인한의 상사 때나 홍국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찾아가서 조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사면 복권에는 반대했다. 사적인 애통은 애통이고 공적으로는 잘못을 했으니 어찌할 수 없다고 반대했던 것이다. 동시에 사도세자에 대한 복권, 추숭을 염원하는 정조에게도 사적인 슬픔과 공적인 입장을 구별할 것을 촉구했다.

김종수가 표방한 핵심 정치 원칙은 외척과 궁중 세력을 멀리하여 그들의 정치 간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1] 따라서 영조 말기에 소론과 손잡고 세손의 정통성을 인정하려는 홍인한, 홍봉한 계열을 공격하여 몰락시켰다. 그 뒤 정조 즉위 초에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김귀주, 김관주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킨다. 그밖에 정조 암살을 시도한 홍계능 일파를 맹렬하게 성토하여 몰락시켰다.

그 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고,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2] 이어 규장각의 각신인 박지원홍대용, 박제가, 서이수 등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성리학이나 주자의 주해보다는 공자, 맹자의 원시 유학과 순자의 성악설 등을 가르쳤다. 한편 규장각을 중심으로 노론 서얼과 노론 북학파를 중용하자 노론 일각에서는 정조가 당을 분열시키려 책동한다며 반대하였으나, 김종수는 이를 강하게 반박하며 규장각 각신들을 보호하였다.

김종수는 정조가 즉위하기 전부터 노론 청명파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였다. 특히 정조 즉위년은 노론당의 정치 원칙이 승리했음을 의미하는 병신처분이 내려진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시기적 특성을 이용하여, 김종수는 정조가 신임하는 홍국영과 손을 잡고 노론의 정치 원칙을 다시 떨치는 작업을 적극 추진해 소론남인계 정파의 입지를 대폭 좁히려 하였다.[8] 그럼에도 동시에 노론벽파와 외척당, 탕평당을 반역자로 규정했다.

그래서 노론 붕당의 초대 당수 송시열의 위패를 효종의 위패 옆에 추가로 모신 반면, 영조가 되돌려준 소론 붕당의 영수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 부자의 관작은 다시 박탈했다.[8]

그리고 노론계 산림 송덕상, 송환억, 김종후를 불러 올려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는 한편, 영조가 혁파한 이조전랑의 권한을 다시 회복시켰다.[1] 이 때문에 그의 형 김종후는, 아우의 정치적 입지와 반대파의 몰락이 너무 확연하니, 부디 근신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8] 그러나 그는 노론의 돌격장 역할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정조가 적극 수용했던 것은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면 육친, 친구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그의 평소 발언과, 사도세자와 세손을 배격한다는 당론을 거부하고 세손을 옹호한 일, 홍국영과 손잡고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던 같은 당의 홍봉한, 홍인한 일파, 김귀주, 김관주, 정후겸 일파를 제거한 점, 그리고 홍국영의 권력 남용이 심각해지자 홍국영을 탄핵해서 제거한 일 등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의 조치들은 후일 정조소론 서명선남인 채제공을 정승으로 등용하면서 단계적으로 취소되었다.[8]

2. 4. 영남만인소와 금등 사건

1792년 경상도 남인 선비 1만 5천 명의 연명 상소인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라와 사도세자를 위한 복수, 토역(討逆)을 주장하자, 김종수는 예전에 정조와 대담했던 내용인 “(舜)임금·주공(周公)과 같은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서 부모를 섬김이 효도”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 논의를 가라앉혔다.[2]

1793년(정조 16년) 경상도 유생 1만 5천 명이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실이 없음을 상소한 것이었으나, 사도세자의 억울함과 신원을 상언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 상소를 읽은 정조는 목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김종수는 정조에게 개인적인 슬픔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남기고 국정에는 반영하지 말 것을 상주했다. 당시 소론과 남인은 물론 왕실 외척과 정조의 측근 신하들도 이른바 임오의리에 적극 동조했다.[8] 영남만인소 이후, 사도세자에게 씌워진 모함 때문에 잘못 내려진 영조의 처분을 뒤집어야 한다는 임오의리 문제가 정국의 현안으로 떠올랐다.[8]

이때 김종수는 노론 강경파를 대동하고 임오의리 천양 분위기에 대항했다.[9] 그는 정조에게 "인륜이 무너지는 정도의 변고를 당하고도 올바름을 잃지 않아야, 순(舜) 임금이나 주공(周公)과 같은 옛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개인적인 효도는 효도로서 하고 정치원칙(의리)는 정치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처리 방식을 제기했다.[9] 그는 연산군이 사사로운 원한을 갚으려고 하다가 폐비 윤씨의 명예 회복은커녕 다시 몰락하게 했던 것을 예로 들었다.

이는 사도세자의 문제를 개인 문제인 애통으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임오의리란 결국 특정 당의 당론이고 일부 정파가 이를 이용,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려고 내세운 표방일 뿐이라고 비판한 것이다.[9] 그는 사도세자를 비판하는 노론 벽파 역시 정조를 끌어내리려는 역적으로 규정했고, 시파, 남인, 소론 역시 사도세자 복권을 핑계 삼아 왕의 마음을 흔들려는 무리들로 규정, 비판했다.

1793년(정조 17) 5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얼마 뒤, 이때 함께 영의정에 임명된 채제공(蔡濟恭)이 올린 금등(金縢) 사건과 관련된 상소를 대중에 공개하라고 청하고 사직서를 올렸다.

당시 정조는 영조가 남긴 친필 문서 '금등(金騰)'을 공개했다.[9] 일설에는 그가 금등을 공개하도록 유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금등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이다.[9] 사도세자가 군주인 영조를 위해서 스스로 죄를 입었다는 내용의 문서였으므로 영조의 금등이란 칭호를 얻은 것이다.[9] 이때 함께 입궐, 이로써 정조는 사도세자의 신원을 청하던 영남만인소와 채제공의 견해를 일단 수용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슬픔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마무리 지을 것이며 영조의 원칙을 뒤집지는 않겠다고 선언한다. 노론 벽파에서는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김종수는 이를 수용하였다.

금등이 공개되면서 그는 정조가 마음이 흔들릴 것을 염려, 감정에 휘둘리지 말 것과, 영조의 처분을 뒤집지 말 것을 여러 번 간곡하게 부탁했다.

정조는 금등 문서를 신하들에게 공개했지만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을 뒤집지는 않았다. 김종수가 제기한 개인적 애통과, 정치원칙(의리)을 구분하겠다는 방식을 수용한 것이다. 이는 강경파를 함께 써서 조화시키겠다는 정조의 탕평정치 방식에서 나온 결정이었다.[9] 동시에 이 금등을 직접 본 김종수는 자신의 정치 원칙이 지나치게 집요했음을 정조 앞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9] 한편 정조는 사도세자 복권 여론, 사도세자 추존 여론을 청하는 상소에 대해 읽어보고 비통해하면서도, 그들을 법으로 처벌하여 영조의 유지를 지켰다.

2. 5. 은퇴와 죽음

1794년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을 다시 주장한 남인 재상 채제공(蔡濟恭)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의리를 굽히지 않아, 정조의 두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었다. 그해 2월 삼사의 합계로 탄핵을 받았고,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이 상소를 올려 삭탈관작(削奪官爵)되고, 방귀전리(放歸田里)의 처분을 받았다. 곧 경상북도 평해군에 유배되고 위리안치형에 처해졌다. 그해 3월 경상남도 남해현(南海縣)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이때 그와 채제공의 대립을 미리 알리거나, 탄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간원사헌부의 관원들도 대대적으로 파면되었다. 유배소에서 그는 명성을 듣고 찾아온 선비들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해 6월 석방 명령을 받았고, 12월 판중추부사로 서용되었다. 곧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그 뒤 경상남도 남해로 이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각별히 아꼈고, 1795년 광주군 서부면 정림(靜林)으로 되돌아왔으며, 상경하여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797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99년 1월 7일 경기도 포천군 주내면(후일의 포천시 포천동) 별장에서 사망하였다. 혹은 포천군 군내면 구 포천군청 근처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생전에 스스로 자신의 묘비문을 지었고, 비문 앞면은 한석봉의 글씨체로, 비문 뒷면은 당나라 유공권의 글씨체로 새기게 했다. 뒤에 정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은 그의 재종고손이었다.

3. 사상과 평가

김종수는 노론 당원이었지만, 당론에 따라 세손을 제거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세손은 국왕의 정통 후계자이며, 근본을 바꾸려는 것은 역심이자 욕심이라고 주장했다.[1] 그는 노론서인의 중진 집안 후손이었고, 가깝고 먼 친척들이 노론 벽파에 속해 있었다. 이 때문에 노론 내 벽파, 외척, 탕평파는 그를 껄끄럽게 여겼다.

그는 세손 시절의 정조의 사부로써 대의명분에 입각한 군사부일체론을 주창하였다. 뒤에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임정의 부주석인 김규식의 종고조부이기도 하다.

정조 즉위 후 관직은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조에게 도의정치를 역설하며 임금이면서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될 것을 건의하였다.

당색은 노론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강경파였던 선조들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당숙 김치인과 함께 노론 청명당파에 가담하였다. 그는 노론 벽파, 시파와 동조하지 않고 세손 정조를 정통으로 규정했다.

1793년(정조 16년) 경상도의 유생 1만 5천명이 영남만인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억울함과 신원을 상언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 상소를 읽은 정조는 목을 매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정조에게 개인적인 슬픔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남기고 국정에는 반영하지 말 것을 상주했다. 당시 소론과 남인은 물론 왕실외척과 정조의 측근 신하들도 이른바 임오의리에 적극 동조했다.[8]

이때 김종수는 노론 강경파를 대동하고 임오의리 천양 분위기에 대항했다.[9] 그는 정조에게 "인륜이 무너지는 정도의 변고를 당하고도 올바름을 잃지 않아야, 순(舜) 임금이나 주공(周公)과 같은 옛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개인적인 효도는 효도로서 하고 정치원칙(의리)는 정치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처리방식을 제기했다.[9] 그는 연산군이 사사로운 원한을 갚으려고 하다가 폐비 윤씨의 명예 회복은커녕 다시 몰락하게 했던 것을 예로 들었다.

이는 사도세자의 문제를 개인 문제인 애통으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임오의리란 결국 특정 당의 당론이고 일부 정파가 이를 이용,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려고 내세운 표방일 뿐이라고 비판한 것이다.[9] 그는 사도세자를 비판하는 노론 벽파 역시 정조를 끌어내리려는 역적으로 규정했고, 시파, 남인, 소론 역시 사도세자 복권을 핑계삼아 왕의 마음을 흔들려는 무리들로 규정, 비판했다.

1793년(정조 17) 5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얼마 뒤, 이때 함께 영의정에 임명된 채제공(蔡濟恭)이 올린 금등(金縢) 사건과 관련된 상소를 대중에 공개하라고 청하고 사직서를 올렸다.

당시 정조는 영조가 남긴 친필문서 '금등(金騰)'을 공개했다.[9] 일설에는 그가 금등을 공개하도록 유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금등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이다.[9] 사도세자가 군주인 영조를 위해서 스스로 죄를 입었다는 내용의 문서였으므로 영조의 금등이란 칭호를 얻은 것이다.[9] 이로써 정조는 사도세자의 신원을 청하던 영남만인소와 채제공의 견해를 일단 수용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슬픔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마무리지을 것이며 영조의 원칙을 뒤집지는 않겠다고 선언한다. 노론 벽파에서는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김종수는 이를 수용하였다.

금등이 공개되면서 그는 정조가 마음이 흔들릴 것을 염려, 감정에 휘둘리지 말 것과, 영조의 처분을 뒤집지 말 것을 여러 번 간곡하게 부탁했다.

정조는 금등 문서를 신하들에게 공개했지만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을 뒤집지는 않았다. 김종수가 제기한 개인적 애통과, 정치원칙(의리)을 구분하겠다는 방식을 수용한 것이다. 이는 강경파를 함께 써서 조화시키겠다는 정조의 탕평정치 방식에서 나온 결정이었다.[9] 동시에 이 금등을 직접 본 김종수는 자신의 정치원칙이 지나치게 집요했음을 정조 앞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9]

그는 끝까지 세손이 영조의 자손이니 정당한 계승자라며 노론 벽파와 외척당, 탕평파를 논박했지만, 정조의 사도세자 복권 시도에 대해서는 도의에 어긋난다며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이상적인 지도자를 설명한 그의 지론에 감화된 정조는 눈물을 머금고 그의 이론에 수긍했다. 홍국영도 권력을 농단한다며 비난했지만 그는 청렴했으므로 비난할 구실이 없었고, 그는 노론 당내에서도 미움을 받았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노론계 인사로 벽파, 외척세력을 멀리하였다. 또한 정조에게 통치자이자 아버지이자 스승(君師父)이 되기를 제안하였다 한다. 처음에는 노론 시파소론, 남인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나 정조의 설득으로 온건론으로 선회, 돌아서기도 했다. 그러나 1806년 시파가 집권하면서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노론 벽파의 영수로 몰려 단죄되었다.

정조실록을 보면 정조의 지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고집한 심환지와는 달리, 김종수는 말년에 정조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다고 한다.[4] 그는 남인 채제공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비판했으면서도, 나라를 위해서는 채재공의 의견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한편 소론 시파의 당론서 '대천록 (待闡錄)'을 보면 그는 정조가 신임한 채제공을 역적이라고 공격하기는 했지만, 채제공의 정치원칙도 국익을 위해서는 국가에 필요하다고 인정했다.[4]

그는 군자와 소인배를 철저하게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그러나 군자가 모든 것을 맡을 수는 없다고 보았다. 군자이지만 결점, 병이 있는 사람도 많고, 소인배이지만 재주가 있는 사람도 많지만, 결점 때문에 군자를 버린다든지, 재주 때문에 소인을 쓰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고 했다.[3] 이에 따라 남인 채제공 등을 역적이라고 성토하면서도, 그의 의견도 나라를 위해서는 필요한 의견이라 하였다. 소인배들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3] 재주가 있다면 재주 대로 채용은 하되, 고위직이나 중요한 자리, 인사와 병권을 담당하는 부서로는 절대 보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소인배들은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쓰는 말단직에 두면 족하다고 보았다.

1799년(정조 23)에 사망하였으며, 정조 사후 종묘의 정조대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1800년 사간원 사간 박서원의 상소로 종묘의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806년 노론 벽파 내부에서 나온 죄인의 아들은 왕위를 이을 수 없다는 대화가 시중에 공개되면서 김관주, 심환지, 김달순은 정조에 불충한 역적으로 규정되어 지탄받았다. 그러나 그는 노론 벽파와도 대립하고 노론 시파와도 대립했던 노론 청명당의 지도자였으나, 노론 시파에 의해 벽파로 몰렸다.

1807년(순조 7) 7월 홍문관예문관에서 그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는 탄핵이 올라간 이후, 사헌부, 사간원으로부터 계속 출향 상소가 이어졌다. 8월 8일 거듭된 상소 끝에 정조 묘정에서 출향되었다. 그는 사후 권모술수에 능한 음침하고 음흉한 인물로 매도되었지만, 생전에는 꾸밈없고 거짓이 없었으며, 사람을 진심으로 솔직히 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864년(고종 1년) 7월 복권 상소가 올려져 관작이 회복되었고, 1866년 1월 다시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일각에서는 성균관 문묘에도 배향해야 된다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복권과 문묘배향을 놓고 이견이 분분하였다. 흥선대원군남인, 북인을 등용하자 그에 대한 비난은 더 심해졌다.

3. 1. 군사부일체론과 왕도 정치

김종수는 정조가 왕세손일 때부터 정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 그는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다.[1] 김종수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어 요순시대의 이상을 실현한 것처럼, 군주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며 군주 스스로 학문과 군사 다방면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세손에게 만인을 포용하는 어버이가 되어야 하며, 항상 높고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것을 이룩하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종수는 세손에게 임금이면서 스승이면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견해는 잘못이고, 학자의 해석에 따라 뜻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허목윤휴, 윤선도를 비난하면서도, 원시유학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그에게서 수업한 정조 역시 공자, 맹자의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을 동시에 바른 학문인 정학으로 받아들였다.

김종수는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스승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가르쳤다.[5] 이는 군주나 스승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그 둘을 겸함으로써 이른바 군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종수는 통치자가 바른 학문을 안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진정으로 학문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가능하다고 교육했다.[1] 그는 지도자가 지도자이면서 아버지이자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즉 이상적 시대인 , , 삼대 시절에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었고, 그 이후 시기부터는 신하들이 학문을 이끌었지만, 탕평이 표방된 지금의 시대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개혁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삼대 시절처럼 다시금 군주가 학문 정치를 이끌 수 있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1] 곧,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것이다.[1] 그는 군사부(君師父)라 하여 통치자는 통치자이면서 스승의 역할도 겸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어린 세손에게 만개의 하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처럼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임무를 스스로 맡아서 실천에 옮길 때, 임금은 임금으로서, 개인으로서도 큰 뜻을 달성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1] 또한 그는 군주는 만인을 감싸안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1] 사도세자의 죽음을 본 정조는 분노했다. 그러나 그의 이 건의는 후일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정조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결국 후일 모든 신하들이 정조야말로 군주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한 위대한 성인이라고 추모할 정도로 효과가 나타났다.[1] 정조는 후일 스스로 만천일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했다.

그는 대의명분을 중시하였다. 생전에는 솔직하였다 한다. 그는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간주하고, 왕도정치를 재건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임금은 통치자이자 아버지이며 동시에 스승이어야 한다(군사부일체)는 이론을 주창했다. 동시에 그는 율곡 이이의 경장기에 대한 것을 설파하기도 했다.

임금은 통치자이자 아버지이며 동시에 스승이어야 한다(군사부일체)는 이론에 대해 남인소론에서도 그를 공격하면서도 그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다만 심환지 등은 현대의 지도자가 반드시 요순일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3. 2. 세손 정통론과 탕평책 비판

김종수는 노론의 당원이었지만, 당론에 따라 세손을 제거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세손은 국왕의 정통 후계자이며, 근본을 바꾸려는 것은 역심이자 욕심이라고 주장했다.[1] 그는 노론서인의 중진 집안 후손이었고, 가깝고 먼 친척들이 노론 벽파에 속해 있었다. 이 때문에 노론 내 벽파, 외척, 탕평파는 그를 껄끄럽게 여겼다.

그는 세손의 꼼꼼한 성격과 홍국영이 세손의 신변을 보호하며 뒤처리를 하는 것을 ಗಮನ했다. 1771년에는 세손에게 사소한 것에 집착하다 큰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김종수는 노론 온건파였던 김재로노론벽파였던 김상로 등 친척들과는 당론을 달리했다. 종조부 김재로는 노론 온건파로서 영조 초반 탕평당의 기둥으로 활약했고,[3] 또 다른 종조부 김약로, 김상로는 왕실 외척이 주도하는 탕평당의 맹장으로 활약했다.[3] 특히 종조부 김상로는 노론 홍계희, 소론 정우량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역적으로 단죄되었다.[4] 정조는 김약로, 김상로와 가까운 김양로를 미워하여 화성 능행과 삼참 행차 때 그의 묘소를 비껴갈 정도였다. 그러나 김종수는 왕가 외척의 정치 관여는 가깝고 먼 인연, 베갯머리 송사 때문에 부패와 비리를 낳을 뿐이라며 부정적으로 보았다.

반면 김종수의 종백부이자 김재로의 아들 김치인은 조카 김종수와 마찬가지로 탕평당 소속 부친의 정치 노선에서 벗어나 외척이 주도하는 탕평당에 대항한 청명당의 지도자로 변신했다.[4]

정조를 공격한 김귀주,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과 모두 친밀했으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하는 공격을 주도하기도 했다.[4] 그는 오로지 군주의 안위를 생각하여 친지라도 문제가 있는 자는 고변하여 제거하겠다는 김석주를 본받겠다고 공언했다.[4] 이러한 그의 소신은 같은 노론 당내에서도 엄청난 적과 비난을 만들었다.

그는 노론 내 벽파, 시파, 탕평파를 모두 상대해야 했다. 김종수는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스승의 역할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5] 이는 군주나 스승 중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둘을 겸하는 군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통치자가 바른 학문을 안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진정으로 학문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가능하다고 교육했다.[1] 그는 지도자가 지도자이자 아버지이자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즉, 이상적인 , , 삼대 시절에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었고, 그 이후 시기부터는 신하들이 학문을 이끌었지만, 탕평이 표방된 지금 시대는 새로운 사회로의 개혁을 표방하므로 삼대 시절처럼 다시금 군주가 학문 정치를 이끌 수 있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1] 그는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고 강조하며,[1] 군사부(君師父)라 하여 통치자는 통치자이자 스승의 역할도 겸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어린 세손에게 만개의 하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처럼 될 것을 강조했다.

이 임무를 스스로 맡아 실천에 옮길 때, 임금은 임금으로서, 개인으로서도 큰 뜻을 달성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1] 또한 그는 군주는 만인을 감싸 안아야 한다고 역설했다.[1] 사도세자의 죽음을 본 정조는 분노했지만, 이 건의는 훗날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정조는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훗날 모든 신하들이 정조를 군주이자 스승인 위대한 성인이라고 추모할 정도로 효과가 나타났다.[1] 정조는 훗날 스스로 만천일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했다. 김종수의 존재는 사후 정조의 치적을 방해한 역적이라는 평가와 노론 당내에서도 당론을 어기고 튀는 행동을 한 인물로 몰려, 조선 멸망 때까지 부정적인 시각과 비판을 받았지만, 정조에 대한 그의 구상과 이미지메이킹은 사후에도 성공적으로 확립, 정착되었다.

그는 노론 벽파 외에도 노론 시파들조차 불경한 뜻을 품은 자들이라며 공박했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는 영남 남인들과 소론 시파에 대해서도 역적이라며 줄기차게 공격했다. 그는 지도자는 지도자이자 아버지이자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비가 정치를 주도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림의 전통을 유지한 노론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그가 죽은 뒤 노론 당내에서 그를 역적으로 추죄할 것을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정조가 즉위하기 전, 노론에서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할 때 소수의 노론 인사들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했으며, 이천보, 유척기 등 소수 인사들과 소론 등과도 손을 잡고 세손을 지지했다. 그의 진정성은 세손을 감화시켰다.

임오화변을 계기로 노론은 사도세자의 후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당론을 세웠지만, 김종수는 이를 거부하고 세손은 영조의 적손이니 정통 후계자라는 견해를 고수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모함당해 죽었다는 유언호 등 노론 시파의 의견에도 억지, 궤변이라며 동조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노론 벽파나 외척당, 시파와는 별개 정파인 노론 청명파에 가담했다. 그럼에도 그는 소론, 남인, 북인을 역적으로 보는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1772년 청명(淸名, 청렴함과 명예)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 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노론 내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그 지도자인 조정(趙晸), 김치인(金致仁), 정존겸(鄭存謙), 이명식(李命植) 등을 유배보냈고, 이때 김종수 역시 청명류의 지도자로 지목되어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3. 3. 인재 등용론

김종수는 군자와 소인배를 철저하게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그러나 군자가 모든 것을 맡을 수는 없다고 보았다. 군자이지만 결점, 병이 있는 사람도 많고, 소인배이지만 재주가 있는 사람도 많지만, 결점 때문에 군자를 버린다든지, 재주 때문에 소인을 쓰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고 했다.[3] 이에 따라 남인 채제공 등을 역적이라고 성토하면서도, 그의 의견도 나라를 위해서는 필요한 의견이라 하였다.

김종수는 소인배들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3] 재주가 있다면 재주 대로 채용은 하되, 고위직이나 중요한 자리, 인사와 병권을 담당하는 부서로는 절대 보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소인배들은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쓰는 말단직에 두면 족하다고 보았다. 즉, 소인들은 조정이나 조화와 같은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만 등용하면 된다는 견해다.[3] 그는 소인배도 그릇, 자격에 따라 맞는 자리에 임명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소인배라 하여 그 재주까지 무조건 내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계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남인, 소론은 물론이고, 노론계 일각에서도 트집을 잡아 그를 비난하는 소재가 되었다.

후대의 사학자 박광용은 이를 두고 '김종수의 이 견해는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군자당 대 소인당론'으로 볼 수는 없지만 결국 노론 일당전제론의 입장이다[3]'라고 평가했다. 정조소론남인 강경파의 힘을 결집, 강화시키는 인물들을 등용하여 노론 강경파와 조화시키는 탕평책을 추진했으므로, 김종수의 견해는 수용하지 않았다.[3]

3. 4. 후대의 평가

김종수는 노론 온건파였던 김재로나, 노론벽파였던 김상로 등 친척들과는 당론을 달리했다.[3] 종조부 김재로는 노론 온건파로서 영조 초반에 탕평당의 기둥으로 활약했고, 종조부 김약로, 김상로는 왕실 외척이 주도하는 탕평당의 맹장으로 활약했다.[3] 그러나 김종수는 왕가 외척의 정치 관여는 가깝고 먼 인연, 베갯머리 송사 때문에 부패와 비리를 낳을 뿐이라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정조를 공격한 김귀주,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과 모두 친밀했으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하는 공격을 주도하기도 했다.[4] 그는 노론 내 벽파, 시파, 탕평파를 모두 상대해야 했다.

1799년(정조 23)에 사망하였으며, 정조 사후 종묘의 정조대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1800년 사간원 사간 박서원의 상소로 종묘의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806년 노론 벽파 내부에서 나온 죄인의 아들은 왕위를 이을 수 없다는 대화가 시중에 공개되면서 김관주, 심환지, 김달순은 정조에 불충한 역적으로 규정되어 지탄받았다. 그러나 그는 노론 벽파와도 대립하고 노론 시파와도 대립했던 노론 청명당의 지도자였으나, 노론 시파에 의해 벽파로 몰렸다.

1807년(순조 7) 7월 홍문관예문관에서 그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는 탄핵이 올라간 이후, 사헌부, 사간원으로부터 계속 출향 상소가 이어졌다. 8월 8일 거듭된 상소 끝에 정조 묘정에서 출향되었다. 그는 사후 권모술수에 능한 음침하고 음흉한 인물로 매도되었지만, 생전에는 꾸밈없고 거짓이 없었으며, 사람을 진심으로 솔직히 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864년(고종 1년) 7월 복권 상소가 올려져 관작이 회복되었고, 1866년 1월 다시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일각에서는 성균관 문묘에도 배향해야 된다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복권과 문묘배향을 놓고 이견이 분분하였다. 흥선대원군남인, 북인을 등용하자 그에 대한 비난은 더 심해졌다.

그의 저서는 일제시대에 와서야 간행되었다.[10] 저서는 한동안 금서가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일족인 청풍김씨 중 일부 뜻있는 이들이 문집을 재간행했고, 먼 방계 후손 운양 김윤식이 발문을 지었으며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 활자로 간행되어 시중에 유통되었다.

4. 저서


  • 《蒙梧集중국어
  • 《文臣節制綱目중국어》 (공저)
  • 《經筵故事比例중국어
  • 《華城城役儀軌중국어》 (1796)
  • 《淵庵遺迹중국어
  • 《淸風世稿중국어》 (공저)
  • 《忠憲公遺稿중국어》 (공저)
  • 《海東邑誌중국어》 (전국의 향토지를 모은 것)


1779년(정조 3년) 형 김종후와 함께 5대조 김극형의 시문집인 《청풍세고》를 간행하였고, 그해 할아버지 김구의 시문집인 《충헌공유고》를 영인하였다.

1777년(정조 1년) 아들 김약연과 며느리 홍씨를 추모한 《淵庵遺迹중국어》을 편찬했다. 《淵庵遺迹중국어》의 전반부는 아들 김약연의 시문집 모음이고, 후반부는 며느리 홍씨가 친정부모에게 올린 편지로, 부모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용서하고 마음 아파하지 말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홍씨는 시부모에게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아서 모시려고 하였으나, 슬픔을 도저히 풀 길이 없어 죽는다고 하며, 자신을 용서하여주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는 며느리 홍씨의 행장을 직접 썼다. 행장에는 홍씨가 남편을 잃고 오히려 시부모를 위로하던 모습들이 애절하게 그려져 있다. 《淵庵遺迹중국어》을 편찬할 무렵 그는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정조 제거에 혈안이 된 벽파 세력 공격에 전념하였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김구의정부우의정 역임
할아버지김희로(金希魯)참판 역임
아버지김치만(金致萬)진사, 세자익위사시직 역임
어머니풍산 홍씨홍석보(洪錫輔)의 딸
김종후(金鍾厚)
부인해평 윤씨(1730년 7월 13일 - 1792년 9월 22일)윤득경(尹得敬)의 딸
장남김약연(金躍淵)요절
양손자김동선(金東善)
장녀청풍 김씨
사위서유수(徐裕壽)
측실이름 미상
외할아버지홍석보이조참판 역임
외종조부홍현보 (홍봉한, 홍인한의 아버지)혜경궁 홍씨의 할아버지
장인윤득경홍문관 교리 역임
재종조부김상로사도세자의 정적
재종조부김약로우의정 역임
종조부김재로좌의정, 우의정 역임
5촌 당숙김치인
4대손김규식임정 부주석


6. 관련 작품

참조

[1] 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2] 웹사이트 김종수 http://koreandb.nate[...]
[3] 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4] 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5] 뉴스 선택! 역사를 갈랐다 (18)조선 정조의 두 재상 김종수·채제공 ‘살벌한 대립’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12-07-02
[6] 문서 정조 관련 내용
[7] 뉴스 정조는 '수도를 화성으로 옮긴다'고 안 했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0-10-27
[8] 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9] 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0] 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1] 문서 정조 관련 내용
[12] 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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