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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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헌창은 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 시대의 인물이다. 807년 시중을 지냈으며, 821년 웅천주 도독이 되었다. 822년,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국을 세우고 경운을 연호로 사용했으나, 헌덕왕에 의해 진압되어 자결했다. 그의 아들 김범문 역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 왕권 약화와 골품제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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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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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김헌창은 무열왕의 후손으로, 807년 이찬 벼슬로 시중에 임명되었다.[1] 헌덕왕 때 무진주, 청주의 도독을 역임했으며, 821년 웅천주 도독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김주원은 785년 왕위 계승에서 원성왕에게 패하여 명주에 은거해야 했다.
822년 웅진(공주)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장안국"을 세우고, "경운"을 연호로 사용했으나, 국군에게 공격받아 자결했다.[1] 그의 아들 김범문도 825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붙잡혀 죽었다. 이는 무열왕의 혈통 부활을 목표로 한 3대에 걸친 투쟁이었다.
2. 1. 관직 생활
807년 정월(애장왕 8년, 이하 모두 음력) 이찬 김헌창은 시중에 임명되었으나,[1] 810년(헌덕왕 2년) 이전에 물러났다. 813년 정월 무진주 도독에 임명되었고, 814년 8월 중앙으로 들어와 다시 시중에 올랐다가 816년 정월에 청주(菁州) 도독으로 물러났다. 821년 4월에는 웅천주 도독으로 전임되었다.2. 2. 웅천주에서의 반란 (822년)
822년 3월, 김주원이 원성왕에게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아들 김헌창이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했다.[1]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의 4주와 국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3소경 등 여러 군현을 복속시켰다.[1] 청주도독 향영(向榮)은 추화군으로 도망갔고, 한산주, 우두주, 삽량주, 패강진, 북원경 등은 김헌창에게 가담하지 않고 성을 지켰다.[1]3월 18일,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수도 금성에 반란을 보고하자, 헌덕왕은 이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장웅(張雄)을 선발대로, 위공(衛恭)·제릉(悌凌)은 그 뒤를 잇게 하고, 김균정·김웅원(金雄元)·김우징 등이 삼군을 통솔하게 하였다.[1] 김충공과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1]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종군을 청하여, 명기는 낭도들과 황산(黃山)으로,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가게 했다.[1] 이에 김헌창은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군대를 배치하고 관군을 기다렸다.[1]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한 후 삼년산성과 속리산에서, 김균정은 성산(星山)에서 김헌창의 군대를 격파한 뒤 모두 웅진성으로 진격하였다.[1] 포위 공격 열흘 만에 김헌창은 자결하고, 부하들이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1] 성이 함락되자 김헌창의 시체는 다시 베어졌고, 일가와 수뇌급 239명은 처형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석방되었다.[1]
2. 3. 반란 진압 이후
김헌창은 자살하고 부하들이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 성이 함락되어 김헌창의 시체는 또 베어지고, 일가와 수뇌급 239명은 주륙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녹진에게 대아찬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에 속한 굴자군은 지리적으로 장안국과 가까웠으나 가담하지 않아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2. 4. 김범문의 난 (825년)
822년 김주원이 원성왕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아버지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825년 정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북한산주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1] 김범문은 고달산(高達山)을 근거지로 한 산적 등과 함께 반란을 도모했으나, 북한산주 도독에게 진압되어 죽었다.[1] 이로써 무열왕의 혈통 부활을 목표로 한 3대에 걸친 투쟁은 막을 내렸다.[1]3. 가계
4. 평가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 왕권 약화와 지방 호족 세력 성장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무열왕계 왕위 계승의 좌절과 관련된 사건으로 신라 골품제의 모순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1]
김헌창은 무열왕의 후손으로, 헌덕왕 때 웅천주 도독을 역임했다. 그의 아버지 김주원은 785년 왕위 계승에서 원성왕에게 패해 명주에 은거해야 했다.[1]
822년, 김헌창은 웅진(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국"을 세우고, "경운"을 연호로 사용했으나, 진압되어 자결했다. 그의 아들 김범문도 82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이는 무열왕의 혈통 부활을 위한 3대에 걸친 투쟁이었다.[1]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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