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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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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메소포타미아와 인접하여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여겨지며, 슐라베리-쇼무 문화와 같은 초기 문명의 흔적이 나타난다. 우라르투 왕국은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585년까지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번성했으며, 이후 오론티드 왕조, 아르탁시아스 왕조가 차례로 아르메니아를 통치했다.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 사이에서 분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301년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여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비잔틴 제국과 사산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아랍 칼리프의 지배와 바그라투니 왕조의 부흥을 거쳤다.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건국, 몽골 제국, 흑양 왕조와 백양 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멸망했다.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분할 통치를 받았으며,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면서 동아르메니아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났다. 1918년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터키와의 전쟁과 소련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1920년에는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아르메니아는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과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현재 아르메니아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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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의 역사
지도
기본 정보
이름하이크 (Հայք)
하야스탄 (Հայաստան)
언어아르메니아어
선사 시대
문화슈라베리-쇼무 문화
쿠라-아락스 문화
트리아레티-바나조르 문화
르차셴-메차모르 문화
고대
국가하이아사
슈프리아
나이리
우라르투
아르메니아 사트라피
소아르메니아
대아르메니아 왕국
소페네 왕국
콤마게네 왕국
동로마령 아르메니아
사산조 아르메니아
무슬림의 아르메니아 정복
왕조오론테스家
아르사케스朝
종교아르메니아의 기독교화
인물티리다테스 3세
중세
국가아르미니야
하맘셴 후국
바그라투니 아르메니아
바스푸라칸 왕국
로리 왕국
슈니크 왕국
아르차흐 왕국
자카리 아르메니아
카첸 후국
몽골령 아르메니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근세 초기
국가이란령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멜리크국
오스만령 아르메니아
러시아령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州
사건아르메니아 문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서아르메니아 점령
운동아르메니아 민족운동
현대
국가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아르메니아 SSR
산악 아르메니아 공화국
현대 아르메니아
아르차흐 공화국

2. 선사 시대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의 발원지 근처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고원은 메소포타미아의 일부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발상지 중 하나로 여겨진다.[163] 이 지역에서는 구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거주해 온 오랜 역사의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아레니-1 동굴 단지 등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초기 인류 문명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17][18][19] 또한 기원전 7천 년기부터 흑요석 등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교역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66]

아르메니아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아르메니아인이 프리기아에서 이주해왔다고 기록했으나, 현대의 언어학 및 고고학 연구는 이 가설을 거의 지지하지 않는다.[168] 한편, 고대 히타이트의 기록에 등장하는 동쪽의 Хайаса|하이아사ru라는 나라가 아르메니아인의 자칭인 '하이(Hay)'의 나라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으며[169], 이는 많은 인도유럽어학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170] 또한, 아시리아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무슈키(Mushki)'라는 집단을 아르메니아인과 연관 짓는 견해도 존재한다.[171]

2. 1.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아레니-1 동굴에서 발견된 5500년 된 가죽 신발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발이다. 아레니-1 신발 참조.


아르메니아에서는 32만 5천 년 전의 석기 도구가 발견되어, 이 시기 초기 인류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16] 아라가츠 산에서는 전기 구석기 시대의 아브빌기 석기가 출토되었으며[164], 알틴 산에서는 중석기 시대의 유구가 발견되었다.[164] 1960년대 예레반 인근 동굴에서는 4만 8천 년 전의 화덕 유적과 함께 비슷한 시기의 인간 두개골 조각과 치아가 발견되어 고대 인류의 거주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고원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정착 흔적이 나타난다. 현재의 아르메니아 각지에서는 칼과 도자기 등 다양한 신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165] 또한, 기원전 7천 년기부터는 다양한 용도로 가공된 흑요석 제품이 토로스 산맥을 넘어 메소포타미아 평원으로 수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부터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을 이용한 하천 무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66]

2010년과 2011년의 고고학 조사를 통해 아레니-1 동굴 단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기원전 3,500년경의 가죽 신발(아레니-1 신발)[17], 기원전 3,900년경의 짚으로 만든 치마[18], 그리고 기원전 4,000년경의 포도주 제조 시설[19] 등이 포함된다.

자캅카스 중앙 지역의 슐라베리-쇼무 문화는 이 지역에서 알려진 가장 초기의 선사 시대 문화 중 하나로,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대략 기원전 6000년에서 40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2. 2. 청동기 시대

기원전 2천 년기의 유적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장식품들이 발견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청동기 위에 보석을 박아 장식하는 상감 기술도 발달했다.[167]

3. 고대

아르메니아의 고대 역사는 기원전 9세기경 우라르투 왕국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우라르투는 아라라트 평야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나, 기원전 6세기 메디아와 스키타이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우라르투 멸망 이후에는 오론티드 왕조가 들어서 아케메네스 제국사트라프로서 통치를 시작했으며,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을 거치며 독립 왕국으로 발전하고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190년경에는 아르탁시아스 왕조가 세워져 역사상 최초로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독립 국가인 "아르메니아 왕국"을 이루었다. 특히 티그라네스 2세 치세에는 카스피해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로마 공화정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확장된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후의 사산 왕조)라는 두 강대국 사이의 경쟁 속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르사케스 왕조 시기인 4세기 초에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였고, 5세기 초 메스로프 마슈토츠에 의해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문자가 창제되어 민족 문화 발전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간섭은 끊이지 않아 387년 로마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영토가 분할되었고, 428년에는 페르시아 측의 아르사케스 왕조마저 완전히 멸망하였다. 사산 왕조의 지배 아래 조로아스터교로의 강제 개종 시도에 맞서 아바라일 전투(451년)와 같은 민족적, 종교적 저항이 격렬하게 일어났으며, 결국 누바르사크 조약(484년)을 통해 종교의 자유와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결정을 거부하면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는 독자적인 신학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처럼 아르메니아 고대사는 외세의 끊임없는 침입과 간섭 속에서도 독자적인 왕조와 문화를 형성하고 민족 정체성을 지켜나간 과정이었다.

3. 1. 철기 시대: 우라르투 왕국

우라르투의 에레부니 요새(복원)


기원전 9세기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아라라트 산의 이름 유래가 된 우라르투 왕국이 세워졌다.[172] 우라르투의 시조로 여겨지는 아라마는 아르메니아 신화 속 초대 국왕 아름다운 왕 아라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다만, 우라르투인의 민족 계통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173], 그들이 사용한 언어 역시 아르메니아어가 속한 인도유럽어족과는 다르다.[172]

우라르투는 아라라트 평야의 비옥한 토지와 소(小) 코카서스 산맥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기원전 8세기 초 아라라트 평야를 정복했다.[174] 아라스 강 유역에는 국왕 아르기쉬티 1세에 의해 기원전 782년 예레반의 전신인 에레부니 요새가 세워졌고,[175] 기원전 776년에는 아르기쉬티히니리 요새가 건설되었다.[175] 우라르투는 정복 과정에서 원주민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삼기도 했지만, 도시 건설, 관개 시설 확충, 경작지 개발 등을 통해 아르기쉬티히니리를 남(南) 코카서스 지역 최대의 행정 중심지로 발전시켰다.[176]

다음 왕인 사르두리 2세 시대에 우라르투는 "왕 중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해져 북부 시리아에서 아시리아를 격파하고 서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177] 그러나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반격으로 기원전 743년 북부 시리아를 빼앗겼고, 8년 뒤에는 아시리아에 수도 투슈파까지 침입을 허용했다.[178] 사르두리 2세는 수도를 지켜냈지만 우라르투의 위세는 크게 약화되었다.[178] 그의 뒤를 이은 루사 1세는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게 패배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두 세대 뒤인 루사 2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178] 기원전 7세기 우라르투는 스키타이나 킴메르인과 같은 유목 민족과 단기적인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에 맞서기도 했다.[179]

하지만 기원전 6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라르투는 더욱 쇠퇴했고, 기원전 590년경 메디아인의 공격으로 수도 투슈파가 함락되었다.[180] 얼마 지나지 않아 티셰바이니 등 남은 도시들도 스키타이에 의해 파괴되면서 우라르투는 완전히 멸망했다.[179]

현대 아르메니아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사람들이 남(南) 코카서스 지역으로 이주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사이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과정은 아직 불분명하다.[181] 그러나 우라르투 멸망 시기에 침입했던 스키타이, 메디아인과 아르메니아인 사이에 언어학적 연관성이 지적되고 있다.[182] 우라르투 멸망 과정에서 토착 세력과 외부에서 유입된 인도유럽어족 사람들이 섞이면서 훗날 아르메니아 민족 국가 형성의 기반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183]

3. 2. 오론티드 왕조

기원전 585년경 우라르투가 멸망한 후, 아르메니아 지역에는 오론티드 왕조가 들어서 기원전 190년까지 통치했다. 초기에 오론티드 왕조는 아케메네스 제국사트라프(속주)로서 통치를 시작했다.[184] 이 시기 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계 오론테스 가문이 사트라프(총독) 직위를 세습하며 다스렸고[185], 조로아스터교를 받아들이는 등 Culture of Iran|페르시아 문화eng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41][184]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는 반농노제적 성격을 띠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은 소아시아와 지중해를 잇는 교역을 담당하며 번영을 누렸다.[184] 주민 대부분은 축산업과 포도 재배에 종사하며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유지했다.[185] 아케메네스 제국 후기에는 중앙 정부의 간섭이 줄어들면서 사트라프 자체가 점차 독립적인 왕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185]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세폴리스 궁전 부조에 묘사된 조공하는 아르메니아인(기원전 6세기경)


그러나 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침공하면서 아르메니아의 평온은 깨졌다.[185] 아르메니아는 가우가멜라 전투에 4만 명의 보병과 7,000명의 기병을 보냈으나, 아케메네스 제국은 대패했고 당시 사트라프였던 Orontès II|오론테스 2세fra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185]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후(기원전 330년), 오론테스 2세의 아들이자 마케도니아 측으로 전향한 미트라네스를 아르메니아의 통치자로 임명했다.[185]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오론티드 왕조는 독립 왕국이 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에는 Culture of Greece|그리스 문화eng(헬레니즘)가 유입되면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금융 및 재판 제도가 도입되어 상인과 장인의 영향력이 커지는 반면 전통적인 가부장제는 약화되었다.[185] 기원전 3세기경부터 아르메니아 사회는 전제군주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186]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이 분열되면서 아르메니아는 셀레우코스가 세운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186] 오론티드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에 명목상으로는 종속되었으나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했다.[187] 이 시기 오론티드 왕조의 지배력은 북서쪽으로 세반 호수, 남쪽으로는 Musasir|무사시르pol, 서쪽으로는 Sophène|소페네fra 지역까지 미쳤다. 수도는 기존의 Արմավիր (մայրաքաղաք)|아르마비르hye에서 Ервандашат|예르반다샤트rus로 옮겨졌다.[188]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공용어가 아람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뀌고 그리스 건축 양식의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토착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남아 있었다.[189]

오론티드 왕조 시기 아르메니아 지도 (기원전 4-2세기)


시간이 흐르면서 서쪽에서는 갈라티아인들이, 동쪽에서는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를 침입해오면서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오론티드 왕조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186] 결국 기원전 190년경, 아르타셰스 1세가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아르탁시아스 왕조를 세우면서 오론티드 왕조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191]

3. 3. 아르탁시아스 왕조

오론테스 왕조 말기, 서쪽에서는 갈라티아, 동쪽에서는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 일대를 침입하면서 왕조는 헬레니즘의 쇠퇴와 함께 약화되었다.[186] 기원전 200년경, 왕가의 일족이자 슈니크의 호족이었던 자리아드리스와 그의 아들 아르타셰스 1세는[187]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 결과 자리아드리스는 소페네 지역을, 아르타셰스는 아르메니아 고원의 왕권을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인정받았다.[190] 이후 기원전 190년, 셀레우코스 왕조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 공화정에 패배하자, 2년 뒤 아파메이아 조약을 통해 아르타셰스는 공식적으로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받으며 독립했다.[191]

아르메니아 왕국의 최대 판도(기원전 80년경)


이렇게 건국된 아르타셰스 왕조는 역사상 최초로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독립 국가인 "아르메니아 왕국"이 되었다.[192] 아르타셰스 1세는 즉위 후 영토 확장에 힘써 동쪽으로는 미디아, 북쪽으로는 세반 호 서북쪽 지역, 서쪽으로는 에르주룸까지 세력을 넓혔다.[192] 이 지역들에서는 아르메니아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공식적인 문어로는 페르시아어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192] 아락스강 좌안에는 헬레니즘 양식의 새로운 수도 아르타샤트가 건설되었는데, 그 규모와 방비가 뛰어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건설을 도왔다는 전설까지 생겨났다.[193] 이후 파르티아가 성장하면서 아르타샤트는 중요한 교역 도시로 발전했고, 아르메니아는 다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194]

아르메니아 왕국은 아르타셰스 1세의 손자인 "대제" 티그라네스 2세의 치세에 그 절정기를 맞이한다.[192] 기원전 95년에 즉위한 티그라네스 2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부의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소페네 왕국을 병합하여 동서 아르메니아의 통합을 달성했다.[191] 이어서 기원전 88년에는 파르티아에 침입하여 아트로파테네, 오스로에네 등 북 메소포타미아를[191], 기원전 83년까지 이베리아, 알바니아캅카스 제 지역을 복속시켰다.[195] 같은 해에는 북 팔레스타인에도 출병하여 최종적으로 카스피해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에 두었다.[191] 그리고 티그라네스는 파르티아로부터 "왕의 왕",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신성왕"의 칭호까지 받았다.[196]

그러나 아르메니아 왕국의 붕괴를 초래한 것도 같은 티그라네스의 치세였다.[191] 티그라네스는 폰토스의 공주 클레오파트라를 왕비로 맞아 동맹 관계가 된 폰토스에 원대한 서부 국경의 안전을 맡기려 했다.[197] 그러나 그 폰토스가 로마를 상대로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도 대 로마 개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197] 게다가 판단력이 저하된 만년의 티그라네스는 측근의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198] 또한 급격한 영토 확장에도 아르메니아 군의 숙련도는 따라가지 못했다.[198] 기원전 69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아르메니아 군은 로마군에 대패했고, 3년 후 아르메니아는 로마에 항복했다.[198] 그 후, 대가로 아르메니아는 확장 영토의 전부를 잃었다.[197]

3. 4. 로마와 파르티아의 각축

로마 제국사산 왕조(파르티아의 후계 왕조) 사이의 경쟁 구도 속에서 아르메니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363년,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가 감행한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아르메니아는 사산 왕조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210]

387년,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는 아키리세네 조약을 체결하여 아르메니아 영토를 분할하였다.[210] 국토의 동부 대부분은 사산 왕조의 영역이 되어 마르즈반(지방 태수)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210] 서부의 일부 지역만이 로마의 관리하에 남게 되었다.[210] 이 분할로 인해 양측에 존재하던 아르메니아 왕위는 사실상 명목상의 존재로 전락하였다.[210] 로마 측의 아르메니아 왕위는 아르사케스 3세를 마지막으로 389년에 소멸하였고,[208] 페르시아 측 아르메니아 제후들 또한 사산 왕조에 왕위 폐지를 요청함에 따라 428년에는 페르시아 측의 아르사케스 왕조도 막을 내렸다.[211] 이로써 아르메니아의 통치권은 사산 왕조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211]

그러나 사산 왕조의 지배는 순탄치 않았다. 특히 조로아스터교로의 강제 개종 정책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르메니아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211] 이러한 민족적, 종교적 저항 의식은 451년 마미코니안 가문이 주도한 대규모 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바르단 마미코니안은 6만 6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62] 20만 명이 넘는 페르시아 대군[63][210]과 아바라일 전투에서 맞서 싸웠다. 아르메니아군은 수적 열세 속에서 분전했으나 결국 패배하였고, 바르단 마미코니안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전사하였다.[210]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아바라일 전투 이후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결국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강압 정책을 완화할 수밖에 없었다. 484년 체결된 누바르사크 조약은 아르메니아가 사산 왕조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자치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12][64] 이는 외세의 압력 속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을 지켜낸 중요한 결과였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 속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213] 404년 혹은 406년 경, 성직자 메스로프 마슈토츠는 아르메니아 민족의 통일과 기독교 전파를 위해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제하였다.[214] 이는 아르메니아어 표기를 가능하게 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214] 또한 451년, 아바라일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에 소아시아에서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 아르메니아 대표단은 참석하지 못했다.[210] 이 공의회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이었던 합성론이 이단으로 규정되자, 아르메니아 교회는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210]

3. 5. 아르사케스 왕조와 기독교화

페르시아 아르메니아의 범위


아르사케스 왕조 말기인 387년, 아르메니아는 비잔틴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서쪽 지역은 비잔틴 아르메니아로서 비잔틴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동쪽의 더 넓은 지역은 사산 왕조의 속국이 되었다.[65]

결국 428년, 아르메니아의 아르사크 왕조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완전히 폐지되었고, 아르메니아 동부 지역은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로 알려진 페르시아 제국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었다.[65] 이후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는 이슬람 세력이 사산 왕조를 정복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66]

4. 중세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본문 생략)

4. 1.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

아크다마르 교회의 가기크 1세 아르주니 부조 (915–921)


591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승리하여 아르메니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제국으로 편입했다.[67] 이후 629년에는 아르메니아 혈통이었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아르메니아 지역에 대한 비잔틴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정복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68][69][70]

그러나 645년, 칼리프가 이끄는 이슬람 아랍 군대가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여 정복했다. 이로써 과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번갈아 받던 아르메니아는 칼리프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아랍인들은 이 지역에 아르미니야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했다.

서기 1000년경 바그라투니 아르메니아 왕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영토의 일부와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여전히 비잔틴 제국 내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제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황제 헤라클리우스 (610–641)와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 (711–713)는 아르메니아 혈통이었다. 특히 867년에 비잔틴 제위에 오른 황제 바실 1세는 마케도니아 왕조를 열었는데, 이 왕조는 그 기원 때문에 '아르메니아 왕조'라고도 불리며 당시 아르메니아인이 비잔틴 제국 내에서 가졌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준다.[71]

9세기에 들어서 아르메니아는 바그라투니 왕조의 지도 아래 봉건 왕국으로 발전하며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짧은 부흥기를 맞이했다. 바그라투니 아르메니아는 점차 세력을 키워 885년에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조로부터, 886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주권 국가로 인정받았다. 964년에는 왕국의 새로운 수도인 아니가 건설되어 번영의 중심지가 되었다.[72]

4. 2. 아랍 칼리프의 지배와 바그라투니 왕조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이슬람교를 창시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633년 아랍 군대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침공하여 결국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정복을 완수했다.[221] 640년에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페르시아와 달리 아르메니아 정복은 우마이야 왕조 시대까지 반세기가 더 소요되었다.[217] 아랍 세력은 아르메니아를 통치하기 위해 아르미니야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했다.

652년 아르메니아 공작 테오도르 르슈투니는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와 화약을 맺었고,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축소로 387년 이후 지속된 아르메니아의 동서 분할 상태가 해소되었다.[222] 아르메니아는 광범위한 자치권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농업과 교역이 크게 발전했다.[223] 지즈야(인두세)와 하라즈(토지세)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아랍인들은 비무슬림에게 비교적 관대했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은 이슬람 세계 내에서 상인으로 활동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224] 당시 아르메니아의 통치자들은 아랍 또는 비잔티움 제국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아르메니아는 사실상 두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인 양속 상태였다.[225] 아랍-비잔티움 전쟁 중인 693년 우마이야 왕조의 아르메니아 지배가 확립되었으나, 비잔티움 제국 역시 오랫동안 아르메니아에 영향력을 유지했다.[225]

750년 아바스 혁명으로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아바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슬람 제국의 이념에 따라 무슬림이라면 비아랍인에게도 동등한 대우가 보장되었다.[226] 그러나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 세금 부담은 우마이야 시대보다 늘어났다. 이에 친비잔티움 성향의 마미코니안 가문과 친우마이야 성향의 아르츠루니 가문은 774년 반란을 일으켰다.[227] 이듬해 반란군은 대패했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바그라투니 왕조가 아바스 왕조의 신임을 얻어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했다.[227] 806년 아바스 왕조는 바그라투니 가문의 아쇼트 4세(아쇼트 므사케르)를 아르메니아 공작으로 임명했다.[226]

지방 군주로 시작한 바그라투니 가문은 점차 아바스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228] 852년부터 3년간 아바스 왕조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228], 마침내 아쇼트 4세의 손자인 아쇼트 1세는 885년 아르메니아 왕으로 즉위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아바스 왕조 양측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229]

그러나 바그라투니 왕조의 권위는 아르메니아 전역에 확고하게 미치지 못했다. 아르츠루니 가문의 바스푸라칸 왕국, 왕족 무셰그의 카르스 왕국, 슈니크 가문의 슈니크 왕국 등 여러 제후들이 자칭 왕국을 세우며 난립하는 상황이었다.[229] 또한 드빈이나 나히체반 같은 주요 거점은 여전히 아랍 수장들이 지배하고 있었다.[230] 이러한 분권 상태는 아쇼트 1세 사후 왕조의 분열을 심화시켰다.[231] 그의 아들 슴바트 1세는 909년 동쪽에서 침입한 튀르크 계열의 사지 왕조 및 이들과 연합한 아르츠루니 가문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처형당했다.[232] 10세기 후반에는 이란[73][74] 살라르 왕조가 동부 아르메니아 일부를 정복하기도 했다.[75]

슴바트 1세의 비극적인 죽음은 오히려 사지 왕조와 아르츠루니 가문에 대한 반감을 키우고, 그의 아들 아쇼트 2세를 중심으로 아르메니아 제후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232] 아쇼트 2세는 915년 비잔티움 군대의 도움을 받아 사지 왕조를 격퇴했지만, 이후에도 동생인 아바스 1세와 함께 복속을 요구하는 비잔티움 제국, 침입하는 아랍 세력, 쿠르드 계열의 라와디드 왕조 등 외세에 맞서 싸워야 했다.[232]

바그라투니 왕조가 군사력 강화에 힘쓰는 동안, 아르메니아의 정치적, 경제적 부흥을 이끈 인물은 바스푸라칸 왕국의 가기크 1세였다.[232] 그의 활약에 힘입어 아르메니아는 10세기에 걸쳐 번영과 예술의 황금기를 맞이했다.[229] 광물 자원 개발로 산업이 발전했으며, 생산된 도자기, 직물, 보석 등은 아시아 각지로 수출되었다.[233] 아바스 왕조는 원칙적으로 이교도의 교회 신축을 금지했지만, 이 시기 많은 아르메니아 교회들이 세워졌다.[229] 아바스 1세의 아들인 아쇼트 3세 시대에는 수도를 아니로 옮겼으며, 이후 카톨리코스(아르메니아 교회의 최고 지도자)의 주교좌도 이곳으로 이전되면서 아니는 중요한 종교 도시로 성장했다.[229] 왕조 말기에는 상업 활동이 절정에 달하여, 카르스나 에르지쉬 같은 도시들은 소아시아, 지중해, 인도, 그리스 등지에서 온 교역품으로 넘쳐났다고 전해진다.[229]

세바나반크의 성 사도 수도원(왼쪽)과 성모 수도원(오른쪽)


바그라투니 왕조 시대는 아르메니아 역사상 교회 건축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현재 남아있는 많은 유적들이 이 시기에 지어졌다.[234]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카르스 대성당, 아니 대성당, 아흐타마르 성십자 대성당 등이 있으며, 마르마셴 수도원, 흐츠콩크 수도원, 타테브 수도원, 사나힌, 하그파트, 게가르드, 세바나반크, 마카라반크 등 수많은 수도원들이 건립되었다.[234]

그러나 아쇼트 3세의 아들이자 바그라투니 왕조의 가기크 1세가 1020년 사망하자 왕가는 다시 분열되었다.[235] 바실리우스 2세 치하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비잔티움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내분을 이용하여 가기크 2세를 퇴위시키고, 1045년 바그라투니 아르메니아 왕국을 멸망시켰다.[235] 1064년에는 카르스 왕국도 비잔티움 제국에 병합되었으나, 슈니크 왕국, 타시르-조라게트 왕국, 하첸 공국 등 일부 지역은 이후에도 자치 상태를 유지했다.[235]

4. 3.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1200년대)


바그라투니 왕조는 초기에 유리한 상황에서 건국되었으나, 봉건제는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을 약화시켜 국력을 점차 약화시켰다. 내부적으로 쇠약해진 아르메니아는 1045년 비잔틴 제국에게 수도 아니를 점령당하며 쉽게 함락되었다. 이후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왕조1064년 아니를 점령했다.[77]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비잔틴 군대가 패배하면서, 투르크족은 대아르메니아의 나머지 지역과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78]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 세력의 통치는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다만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부활한 조지아 왕국의 도움으로 북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이 해방되기도 했다. 이 지역들은 조지아 왕국의 권위 아래 아르메니아-조지아계 귀족 가문인 자카리드-므카르그르젤리가 통치했다. 셀주크의 침공 과정에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고향을 떠나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다.[237]

셀주크의 침입을 피해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은 키프로스 맞은편의 킬리키아 지역으로 이주했다. 킬리키아는 산맥으로 둘러싸인 육지와 바다의 요충지로, 이전부터 동로마 제국과 아랍 세력 간의 쟁탈 대상이었다.[244] 965년 동로마 제국이 킬리키아를 점령한 후,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지방 관리를 맡겼었다.[244] 이 아르메니아 관리들은 점차 세력을 키워갔고, 아르메니아 본국이 투르크의 침공을 받자 킬리키아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주요 피난처가 되었다.[245] 이때 망명한 아르메니아인 중 바그라투니 가문의 루벤 1세는 1080년 킬리키아에서 새로운 루벤 왕조를 창시했다.[245][246]

제1차 십자군 당시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십자군에게 물자를 지원했다.[247] 이후 루벤 왕조는 로마 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제3차 십자군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247] 이러한 공헌을 인정받아 1198년 레본 1세는 교황과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아르메니아 왕위를 수여받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세웠다.[248]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무역 국가로 발전했다.[249]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육상 및 해상 교역로가 정비되었고,[250]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사 공화국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통상 협정을 맺었다. 타르수스, 아다나, Μοψουεστία|몹수에스티아el(마미스트라) 같은 도시는 이탈리아 상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제 도시로 성장했다.[251] 특히 향신료 무역으로 항구 도시들이 번성했으며,[250] 유물탈크는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갈 정도로 번영했다고 전해진다.[249]

카라코룸에서 몽골인의 환영을 받는 헤툼 1세 (오른쪽 끝)


왕국의 수도는 시스로 옮겨졌고, 아르메니아 교회의 중심인 카톨리코스좌도 이곳으로 이전되었다.[249] 십자군과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프랑스식 행정 및 사법 시스템이 도입되었고,[250] 아르메니아 고유의 토지 귀족제 대신 기사 계급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식 봉건제가 채택되었다.[252] 궁정에서는 프랑스어라틴어가 사용되었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가톨릭이나 정교회로 개종하는 경우도 흔했다.[252] 그러나 이러한 서구화 경향은 귀족층에 한정되었고, 상인 계층에서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중심으로 반서구적인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252]

레본 1세에게 아들이 없어 1226년 왕위는 그의 딸 자벨 여왕과 결혼한 헤툼 1세에게 넘어가 헤툼 왕조가 시작되었다.[249] 헤툼 왕조 시대에는 셀주크, 몽골, 맘루크 왕조의 위협이 커졌다.[250] 이에 헤툼 1세는 직접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을 방문하여 1253년 귀위크 카안과 동맹을 맺었다.[253] 주변의 프랑크인 왕조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몽골 용병을 군대에 편입시키기도 했으나,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거센 공격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254] 1266년 맘루크 군대는 킬리키아를 침공하여 수도 시스를 불태우고 파괴했다.[254]

킬리키아는 가혹한 조세 부담을 조건으로 맘루크 왕조와 강화를 맺었지만, 이후 왕가는 후계자 문제로 분열되었다.[254] 아르메니아 왕위는 인근 키프로스 왕국의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선출되는 방식으로 이어졌고,[255] 서구화 지지파와 민족주의파 간의 대립, 그리고 흑사병의 유행으로 사회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254] 결국 1375년, 킬리키아는 다시 맘루크 왕조의 침공을 받아 점령당하면서 아르메니아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다.[255]

5. 근세

아르메니아의 근세 역사는 외세에 의한 분할 통치와 민족적 수난으로 점철된 시기이다. 16세기 초부터 역사적인 아르메니아 영토는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동쪽의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이후 카자르 왕조)에 의해 양분되었다. 서아르메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고, 동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캅카스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 러시아 제국은 두 차례의 러시아-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카자르 왕조로부터 동아르메니아 지역을 빼앗아 러시아령 아르메니아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동아르메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치하의 서아르메니아인들은 밀레트 제도 하에서 일정 부분 종교적 자치를 누리기도 했으나, 점차 차별과 박해가 심화되었다. 특히 19세기 말 압둘 하미드 2세 치하에서 하미디안 학살이 발생했으며, 20세기청년 튀르크당 정권 하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거나 고향을 떠나 흩어지게 되었다.

5. 1.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분할 통치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요청하신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분할 통치'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본 소스는 주로 11세기 말부터 14세기 말까지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과 십자군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5. 2. 러시아 제국의 동아르메니아 지배

페르시아 제국 지도상의 동아르메니아. 존 핑커톤, 1818년.


18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이웃한 카자르 왕조 치하의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804년, 러시아의 파벨 치치아노프 장군은 페르시아의 도시 간자를 침공하여 많은 주민을 학살했고, 이는 페르시아 영토에 대한 침공으로 간주되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사건은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1804-1813)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진 전쟁 기간 동안 캅카스 지역의 페르시아 도시와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은 1813년 러시아가 란카란을 점령하면서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같은 해 체결된 굴리스탄 조약으로 카자르 왕조는 오늘날의 다게스탄, 조지아, 그리고 현재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는 광대한 캅카스 영토를 러시아에 영구히 할양해야 했다.[89][90] 카라바흐 칸국 역시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에 넘어갔다.[90]

페르시아는 굴리스탄 조약으로 많은 영토를 상실한 것에 크게 불만을 품었고, 이는 결국 또 다른 전쟁인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1826-1828)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 역시 페르시아에게는 더욱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군은 페르시아의 타브리즈까지 점령했으며, 1828년 체결된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따라 카자르 왕조는 현대 아르메니아 공화국, 나흐츠반 자치 공화국, 이그디르 주를 포함하는 캅카스의 마지막 남은 영토마저 러시아에 영구적으로 할양하게 되었다.[91]

이로써 수 세기 동안 동아르메니아 지역을 지배해 온 페르시아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1828년부터 동아르메니아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는 카자르 왕조로부터 캅카스 영토를 획득한 후,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새로 편입된 러시아 영토로 이주하여 정착하도록 장려했다.[92]

5. 3. 오스만 제국의 서아르메니아 지배와 아르메니아인 학살

18세기 전반의 서부 아르메니아 – 헤르만 몰의 지도, 1736


오스만 제국 지도에 나타난 서부 아르메니아 – 존 핑커턴, 1818


서부 아르메니아의 6개 아르메니아 지방 – 패튼, 윌리엄과 J.E. 호마스, 아시아의 터키(서부 아르메니아의 6개 아르메니아 지방 포함), 1903


총대주교 하르티운 1세 콘스탄티노플


16세기 초, 동아르메니아가 사파비 왕조의 영토가 된 반면, 아나톨리아 측의 아르메니아인 지역, 즉 서아르메니아는 1514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275] 1453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수도로 삼은 메흐메트 2세는 피지배 민족의 종교 시스템을 통제 수단으로 활용하여, 아르메니아 대주교를 초청해 콘스탄티노플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청을 설립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법에 따라 통치했으며, 밀레트 제도를 채택하여 아르메니아인을 포함한 경전의 백성(기독교인과 유대교인)에게 짐미로서의 지위를 부여했다. 이들은 추가 세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상당한 종교적 자율성을 보장받았다.[276] 콘스탄티노플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청은 정치적, 종교적 특권을 누리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과 함께 오스만 기독교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277] 이스탄불이나 이즈미르 같은 서부 도시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술탄의 지원 아래 번영하는 공동체를 이루었고, 재계와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두지안 가문은 제국 조폐국 책임자를 맡았고, 다디안 가문은 화약, 제철, 제사 업을 맡았으며, 발리안 가문은 궁정 건축가로 명성을 떨쳤고, 귈류 아고프는 오스만 연극계의 창시자가 되었다.[279] 1853년 시작된 크림 전쟁에서는 오스만 군에 자원하여 러시아군에 소속된 동포들과 캅카스 전선에서 싸운 아르메니아인들도 있었다.[278]

그러나 아르메니아 고원 등 동아나톨리아에 거주하는 대다수 아르메니아 농민들의 상황은 달랐다.[280] 이들은 오스만 사회의 비무슬림으로서 통상적인 사법 체계에서 배제되었고 무장할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다.[276] 이동의 제한, 쿠르드족에 대한 원조 의무, 지방 관리들의 자의적인 징세, 개종을 목적으로 한 아동 유괴 등이 빈번하게 발생했다.[276] 또한, 현지 쿠르드 추장과 봉건 영주들의 학대에 시달렸으며, 유목 쿠르드 부족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93] 시행 중인 데브시르메 정책으로 인해 건강한 남성 자녀를 술탄의 정부에 넘겨야 했고, 이 소년들은 강제로 이슬람교로 개종되어 군인이나 관료로 키워졌다. 이러한 압정 속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1860년대부터 반, 제이툰, 무슈 등지에서 산발적인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281]

다시나크당의 창립자들 (왼쪽부터 스테판 조리안, 크리스토포르 미카엘리안, 시몬 자바리안)


19세기 서구에서 발생한 1848년 혁명과 발칸 민족의 해방 운동, 유럽 열강의 동방 문제 개입 등은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에게도 민족 해방 운동의 열망을 불러일으켰다.[94][282] 러시아에서 교육받은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사상은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에게도 전파되었다.[282] 또한 1820년대부터 파견된 미국 선교단 역시 서구식 민족 해방 사상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283] 이에 따라 1885년 반에서 아르메나칸당이, 1887년 제네바에서 사회민주 훈차키안당이, 1890년 티플리스에서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다시나크당)이 결성되었다.[284] 특히 다시나크당은 오스만 아르메니아인의 해방을 위해 무력 투쟁도 불사하는 강경 노선을 내세우며 최대 세력으로 성장했다.[285] 반면, 서구 교육을 받은 부유층 아르메니아인들은 신오스만인 운동에 공감하며 제국 내에서의 권리 확대를 추구하는 온건파가 주류였다.[282]

1839년 압둘메지드 1세가 귈하네 칙령을 통해 탄지마트 개혁을 시작하면서 비무슬림에게도 무슬림과 동등한 시민적 권리가 보장되는 등 아르메니아인의 상황이 다소 개선되는 듯했다.[286] 러시아와의 전쟁 이후에는 산 스테파노 조약과 베를린 수정 조약에서 아르메니아인의 처우 개선과 안전 보장이 명시되기도 했다.[287]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보수 무슬림과 급진 기독교도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고,[288]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빌미로 미드하트 헌법을 정지시키고 전제 정치로 회귀했다.[289] 유럽 열강은 상호 견제로 인해 압둘 하미드 2세의 전제 강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287]

에르주룸 학살의 희생자들(1895년)


1896년 오스만 제국 동부의 아르메니아인 분포(가장 파란 부분은 인구의 50% 이상)


무슬림과 기독교도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중, 1894년 여름 사순에서 징세 문제로 아르메니아인의 무장 봉기가 발생했다.[290] 오스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290] 정부는 이 사건을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 간의 사소한 충돌"로 축소하려 했으나, 아르메니아 측은 이를 조직적인 학살로 규정하고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291] 이듬해인 1895년 10월, 트라브존에서 발생한 관료 피습 사건을 빌미로 군대가 아르메니아인 지역에 진입하면서 충돌이 발생했고, 이는 다시 아르메니아인 학살로 이어졌다.[292] 학살은 디야르바키르 학살 등 동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어 1896년까지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을 하미디안 학살이라고 부른다.[95][292]

서구 열강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다시나크당 일부는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오스만 은행 점거 사건(1896)이나 일디즈 암살 미수 사건(1905)과 같은 테러리즘에 의존하기도 했다.[293] 아르메니아인의 강경화는 터키인의 반발을 더욱 키웠고, 이는 또 다른 학살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293]

1908년 7월, 테살로니키 주둔군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청년 튀르크 혁명으로 압둘 하미드 2세의 전제 정치가 막을 내렸다.[294] 혁명을 이끈 통일과 진보 위원회는 미드하트 헌법 부활과 의회 개설을 이끌어냈고, 압둘 하미드 2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 메흐메트 5세를 즉위시켜 제2차 입헌정 시대를 열었다.[294] 초기에는 제국 내 모든 민족과 종교 집단이 전제 정치의 종식을 환영하며 관계가 개선되는 듯했다.[295] 다시나크당 역시 새로운 입헌 체제 하에서의 민주화에 기대를 걸고 활동 노선을 제국 내 자치 획득으로 온건화하며 통일과 진보 위원회와 협력했다.[296] 그러나 구체제 지지 세력이 많았던 킬리키아 지역에서는 1909년 4월 아다나 학살이 발생하여 2만에서 3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되는 비극이 있었지만,[297] 이 사건의 재판에서 무슬림 측에 더 무거운 처벌이 내려지는 등, 이 시점까지는 정권과 아르메니아인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나지는 않았다.[296]

1915년부터의 아르메니아인 추방에서의 이송과 습격 상황


초기에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통일과 진보 위원회는 점차 범튀르크주의범투란주의로 기울었다.[298] 연이은 발칸 전쟁을 겪으며 국내 기독교도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고(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들은 실제로 적국 그리스 왕국을 지원했다), 1913년 1월에는 대재상부 습격 사건을 통해 통일과 진보 위원회가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296]

이러한 상황에서 아르메니아 자치권 확대를 위해 열강의 외압을 요청하는 움직임(아르메니아 자선 총연맹), 러시아에서 유입되어 동부에서 무슬림과 충돌을 일으키는 아르메니아 무장 집단, 독자적인 군사력 강화를 꾀하는 다시나크당 등은 오스만 정부에게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다.[299] 결정적으로 1914년 10월, 오스만 제국이 중앙 동맹국의 일원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적국인 러시아군에는 18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정규병 외에도 오스만 제국 출신 아르메니아인들을 포함한 8,000명의 지원병으로 구성된 아르메니아인 의용 부대가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300]

전쟁 발발 직후인 1915년 2월부터 아르메니아인 관료 해고, 병사들의 노동 대대 전환, 농민 대상 무기 헌납 요구 등이 시작되었다.[301] 그리고 같은 해 4월, 반에서 발생한 아르메니아인의 봉기를 빌미로 오스만 정부는 아르메니아인 추방 작전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겼다.[302] 1915년 4월 24일(후에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추모의 날로 지정됨), 오스만 정부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아르메니아인 정치인, 지식인, 지도층 인사 약 600명을 체포하여 대부분 살해했다(붉은 일요일).[302] 이후 1917년 2월까지 1년 넘게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이라크의 사막 지대로 강제 이주시키는 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302]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하거나 죽음의 행진 도중 기아, 질병, 폭력 등으로 희생되었으며, 그 수는 적게는 6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302]

아르메니아 측은 이 사건을 오스만 정부에 의한 의도적인 민족 말살 행위, 즉 아르메니아인 학살로 규정한다.[303] 반면,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인 터키는 강제 이주가 전시 상황에서 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대규모 사망은 가혹한 환경과 전염병, 일부 과격파와의 전투 등으로 인한 비극적인 결과일 뿐, 조직적인 학살 의도는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30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 하의 이스탄불에서 열린 군사 재판에서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주요 혐의로 다루어져 탈라트 파샤, 엔베르 파샤, 제말 파샤 등 소위 세 파샤를 비롯한 통일과 진보 위원회 지도부 다수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305]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해외로 도피하여 판결이 집행되지 않았고,[305] 이에 불만을 품은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다시나크당)은 해외로 도피한 책임자들을 암살하는 네메시스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306]

6. 근대

쇠퇴하던 동로마 제국셀주크 왕조의 부상에 맞서지 못했고, 아르메니아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229]1048년부터 셀주크 투르크 군대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기 시작했으며[236], 1064년에는 수도였던 아니를 점령했다[237]1071년 말라즈기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왕조가 승리하면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졌고, 이 과정에서 다시 한번 아르메니아인들의 대규모 디아스포라가 발생했다[237]。하지만 술탄 말리크 샤 1세는 상업과 예술을 장려하고 인프라를 건설하며 외국 문화를 보호하는 정책을 펼쳐,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활동은 오히려 활발해지기도 했다[238]

셀주크 왕조가 1194년 멸망한 후, 아르메니아는 잠시 호라즘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몽골 제국의 일부인 일 칸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239]。이 시기 북쪽의 조지아 왕국 보호 아래 있던 일부 지역도 안정을 잃었다[237]。아르메니아는 몽골 황제 몽케 칸에게 복종하여 일 칸국과 간접적인 우호 관계를 맺었으나[239], 일 칸국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237]14세기 티무르의 서아시아 원정 때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시바스에서 산 채로 매장당하고 유아들이 말발굽에 짓밟혀 죽는 등 끔찍한 학살을 겪었다[240]。이후 아르메니아는 약 1세기 동안 흑양 왕조백양 왕조 간의 분쟁 무대가 되어 고난의 시대를 이어갔다[241]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아르메니아의 모든 정치 조직이 파괴되었지만, 교역로는 유지되어 상인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노라반크, Khorakert|호라케르트 수도원프랑스어, Areni-Kirche|아레니 교회de, Yeghvard Church|예그바르드 교회영어와 같은 교회 건축 활동은 계속되었다[242]。잦은 침략의 결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여러 언어를 습득하게 되었고, 교역 현장이나 궁정에서 통역사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243]

한편, 아르메니아 본토가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동안, 키프로스 맞은편의 킬리키아 지역에서는 새로운 아르메니아 왕국이 세워졌다. 킬리키아는 산맥으로 둘러싸인 육지와 바다의 요충지로, 예로부터 동로마 제국과 아랍 세력 간의 쟁탈 대상이었다.[244] 965년 동로마 제국이 킬리키아를 점령한 후,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지방 관리를 맡겼다.[244] 이 아르메니아 관리들은 점차 지위를 세습하며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고, 황제에 대한 충성도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244] 아르메니아 본토가 투르크의 침공을 받자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킬리키아로 피난했으며[245], 이때 망명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중심 인물이었던 바그라투니 가문의 루벤 1세가 1080년 킬리키아에서 Рубениды|루벤 왕조ru를 창시했다.[245][246]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십자군에게 물자를 지원했다.[247]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은 킬리키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12세기 말까지 동로마 제국과 싸웠다.[248] 루벤 왕조는 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제3차 십자군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247]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198년 레본 1세는 교황과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아르메니아 왕위를 인정받았다.[248]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무역 국가로 발전했다.[249]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육상 및 해상 교역로가 정비되었고,[250]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사 공화국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통상 협정을 맺으면서 타르수스, 아다나, 마미스트라(Μοψουεστία|몹수에스티아el) 같은 도시는 이탈리아 상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국제 도시가 되었다.[251] 많은 항구 도시들이 특히 향신료 무역으로 번성했으며,[250] 라자조(유무르탈르크) 등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렸다고 전해진다.[249]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중심지인 카톨리코스좌도 수도 시스로 옮겨졌다.[249] 십자군과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킬리키아에는 프랑스식 행정 및 사법 제도가 도입되었고,[250] 아르메니아 고유의 토지 귀족제 대신 기사 계급을 포함한 서유럽식 봉건제가 채택되었다.[252] 궁정에서는 프랑스어라틴어가 사용되었으며, 귀족들 사이에서는 가톨릭이나 정교회로 개종하는 일도 흔했다.[252] 그러나 이러한 서구화 경향은 귀족층에 한정되었고, 상인 계층에서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중심으로 반(反)서구적인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252]

레본 1세에게는 아들이 없어 1226년 아르메니아 왕위는 자벨 여왕과 결혼한 섭정 가문의 헤툼 1세에게 넘어갔다.[249] 그리고 이 Хетумиды|헤툼 왕조ru 시대부터 킬리키아는 셀주크 왕조, 몽골, 맘루크 왕조의 손길이 뻗치게 되었다.[250] 그래서 헤툼 1세는 직접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까지 가서 1253년 구유크 카안과 동맹을 맺었다.[253] 주변의 프랑크인 왕조와도 혼인 관계를 맺고, 몽골로부터의 용병도 대열에 더한 킬리키아였지만, 쇄도하는 이집트 군 앞에서는 이러한 동맹도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254] 1266년 맘루크 왕조의 군세가 킬리키아를 습격하여 시스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254]

킬리키아는 가혹한 조세 조건 하에 맘루크 왕조와 강화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왕가는 후계자 다툼으로 분열되었다.[254] 아르메니아 왕은 인근의 키프로스 왕국 왕족이나 호선된 귀족이 맡게 되었고,[255] 게다가 서구화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대립과 흑사병의 유행은 사회 혼란에 박차를 가했다.[254] 그리고 1375년 다시 킬리키아는 맘루크 왕조의 점령을 받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멸망했다.[255]

6. 1.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이 붕괴하면서, 역사적인 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은 독립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108][109]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카프카스 지역은 러시아로부터 분리되어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을 결성했다. 그러나 각 민족의 이해관계 충돌과 터키와의 전쟁으로 인해 이 연방은 1918년 4월, 결성된 지 6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스테판 샤우미안이 러시아령 아르메니아 지역을 관리하게 되었다. 1917년 9월 트빌리시에서는 트빌리시 아르메니아 국민 의회가 선출되었는데,[110] 이는 1375년 소 아르메니아 멸망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의 첫 주권적 정치 기구였다. 한편,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볼셰비키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고, 이는 아르메니아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918년 1월 1일 오스만-러시아 우호 조약 체결 이후, 오스만 군대는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군은 에르진잔에르주룸에서 후퇴해야 했고, 반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도 터키군에 밀려 페르시아로 철수했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 편에 가담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19년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결국 조지아 민주 공화국(1918년 5월 26일)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년 5월 27일)이 연방에서 탈퇴하여 독립을 선언하자,[314] 고립된 아르메니아인들은 1918년 5월 28일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110][315] 이는 수백 년 만의 독립이었지만, 매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이었다.[315]

독립 직후 아르메니아는 1918년 6월 4일 오스만 제국과 바투미 조약을 맺고 영토가 크게 축소되었다.[316] 좁은 영토에는 학살을 피해 온 수십만 명의 난민이 몰려들었고, 수도 예레반은 거대한 난민촌과 같았다. 티푸스, 콜레라와 굶주림이 만연하여 초기 6개월 동안 18만 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316] 국가 운영 경험이 부족했던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다쉬나크당) 정권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웠다.[317]

설상가상으로 주변 신생 독립국들과의 영토 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북쪽으로는 조지아 민주 공화국과 로리, 자바헤티 지역을 두고 조지아-아르메니아 전쟁이 벌어졌고,[111][112][321] 동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과 나히체반, 카라바흐, 쉬니크(장게주르) 등을 둘러싸고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했다.[113][114][321] 특히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이어서, 바쿠에서는 3월 사건과 9월 사건 같은 민족 간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318]

1920년 세브르 조약에 따른 오스만 제국의 분할 계획


세브르 조약에 의해 창설된 아르메니아 국가의 제안


1918년 10월 무드로스 휴전 협정으로 오스만 군대가 철수하면서 아르메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영토 일부를 회복했다.[319]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아르메니아 대표단은 과거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영토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요구했지만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국가 승인이나 영토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321]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아르메니아의 동부 아나톨리아 영유를 지지하는 '윌슨의 아르메니아' 구상을 제시하기도 했다.[320]

1920년에 들어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서방 열강은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완충 지대로서 아르메니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 런던 회의에서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승인했다.[322] 같은 해 8월 10일,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공식 인정하고, 오스만 제국 동부의 상당 부분(에르주룸, 트라브존, 반, 비틀리스 4개 주 일부)을 아르메니아에 할양하며 흑해 접근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았다.[116][323] 그러나 이 조약은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6세가 서명하지 않았고,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끄는 터키 국민 운동 세력은 조약의 승인을 거부하며 터키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326] 당시 아르메니아는 극심한 인플레이션(반년 만에 2,800% 상승)으로 재정 파탄 상태였고,[324] 열강들도 아르메니아를 위임 통치할 여력이 없었으며, 미국의 지원 약속도 미국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25]

터키군에 점령된 후 카르스에서 도망치는 아르메니아 민간인들


1920년 9월 20일,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끄는 터키 민족주의 군대가 사리카미쉬 지역을 침공하면서 터키-아르메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117][325] 터키군은 소련으로부터 금과 무기를 지원받으며[118] 아르메니아군을 올투, 사리카미쉬, 카르스, 알렉산드로폴(귬리) 등에서 격파하고 수도 예레반 근처까지 진격했다.[327] 결국 아르메니아는 11월 18일 휴전을 맺고, 12월 3일 굴욕적인 알렉산드로폴 조약에 서명하여 세브르 조약을 포기하고 터키군의 자유 통행을 허용하는 등 사실상 터키의 속국 상태가 될 위기에 처했다.[119][328]

예레반의 아보뱐 대로를 행진하는 소련 제11 적군의 일원들, 이는 사실상 아르메니아의 자치를 종식시켰다.


한편, 터키와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볼셰비키 세력도 아르메니아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의 지휘 아래 소련 제11 적군은 1920년 11월 29일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아르메니아 동부 국경을 넘어 침공을 시작했다.[120][328] 터키군과 볼셰비키 양쪽의 압박을 받게 된 아르메니아 지도부는 소련 측 보리스 레그란이 제시한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12월 2일 정권을 이양했다.[120][328] 소련은 터키로부터 아르메니아를 보호하고 군대 재건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비공산주의자들을 박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다쉬나크당은 추방되었다.[121] 12월 5일, 아제르바이잔 출신 아르메니아인들로 구성된 아르메니아 혁명 위원회(''레브콤'')가 예레반에 입성했고,[122] 다음 날인 12월 6일에는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비밀경찰 체카가 도착하면서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121]

볼셰비키는 터키군을 아르메니아에서 몰아냈지만, 터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1921년 카르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아자리야를 얻는 대신, 아르메니아의 역사적 영토인 카르스, 이으드르, 아르다한 지역(고대 도시 아니와 아라라트 산 포함)을 터키에 넘겨주었다. 1922년, 알렉산드르 먀스니키안의 지도 아래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자캅카스 SFSR의 일부로서 소련에 편입되었다.[120]

6. 2.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1920년 터키의 아르메니아 침공으로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위기에 처했다. 11월 터키 혁명군이 알렉산드로폴을 점령하고 수도 예레반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자, 아르메니아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118][119]

볼셰비키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가 이끄는 소련 제11 적군은 1920년 11월 29일 이제반을 통해 아르메니아로 진격을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지도부는 소련 전권대사 보리스 레그란이 제시한 최후통첩을 수락하여 12월 2일 예레반에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했다.[120]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기로 결정했고, 소련은 터키로부터 남은 영토를 보호하고 군대 재건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비공산주의자를 박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다쉬나크당은 결국 나라에서 쫓겨났다.[121] 12월 5일에는 아제르바이잔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구성된 아르메니아 혁명 위원회(레브콤)가 예레반에 들어왔고,[122] 다음 날인 12월 6일에는 펠릭스 제르진스키체카(비밀경찰)가 도착하여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체카는 즉시 구 군 장교 등 수백 명을 체포하여 처형했다.[329]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영역


소련은 터키와 평화를 모색하여 1921년 카르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인 영토였던 카르스, 이으드르, 아르다한 지역(고대 도시 아니와 아라라트 산 포함)을 터키에 할양해야 했다.[331] 대신 소련은 아자리야를 얻었다. 또한,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간의 분쟁 지역이었던 나히체반은 아제르바이잔의 월경지가 되었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역시 아제르바이잔에 귀속되는 것으로 결정되어 훗날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331] 그럼에도 아라라트 산은 이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국장 도안으로 계속 사용되었다.[331]

중앙에 아라라트 산을 묘사한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문장


1922년, 알렉산드르 먀스니키안의 지도 아래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르메니아 SSR)이 선포되었고,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SSR과 함께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자캅카스 SFSR)을 구성하여 소련에 가입했다.[120][333] 자캅카스 SFSR은 1936년 스탈린 헌법 제정에 따라 해체되었고, 아르메니아 SSR은 소련의 정식 구성 공화국이 되었다.[123][333]

소비에트 시대 초기, 신경제 정책(NEP)과 코레니자치야(민족 문화 진흥 정책) 아래 아르메니아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아르메니아어가 학술 용어로 부활하고 대학, 음악원, 극장 등이 건설되어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민족 문화가 부흥했다.[334]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도 변화가 생겼다.[334] 1920년대에는 그리스, 터키,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약 2만 명의 디아스포라가 귀환했지만,[335] 소수 민족의 유출로 사회는 점차 단일 민족화되었다.[334]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신경제 정책은 5개년 계획에 따른 강제적인 집단 농장화로 대체되었고, 코레니자치야는 민족주의 비판과 러시아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336] 당국의 감시는 심해졌고 언론의 자유는 크게 위축되었다.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거나 작품에 보수적 요소를 담았다는 혐의만으로도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반역자로 몰려 시베리아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에서 살아남아 프랑스에서 귀국했던 작가 자벨 예사얀도 시베리아로 추방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대숙청 기간(1936년~1939년) 동안 아르메니아에서만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337]

아르메니아 출신 소련 원수들 (왼쪽부터 이반 바그라미안, 이반 이사코프, 아마자스프 바바자냔, 세르게이 후자코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르메니아 SSR은 30만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했으며, 그중 약 17만 5천 명이 전사했다.[338][339] 전쟁 중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군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다.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은 1945년 터키와의 우호 조약을 파기했다.[340] 아르메니아 내에서는 터키에 대한 민족 감정이 다시 고조되었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수장인 카톨리코스 게보르크 6세는 카르스 주와 아르다한 주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340]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포츠담 회담에서 터키에 이 지역들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영국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40]

전후에는 디아스포라의 귀환 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주로 그리스중동 지역에서 10만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주해왔다.[341]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당국으로부터 의심을 받아 스파이로 몰려 시베리아로 유배되기도 했다.[341] 한편, 집단 학살 생존자들의 후손들이 유입되면서 아르메니아 사회 내에서 학살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점차 금기시되지 않게 되었다.[342]

소련 체제 하에서 아르메니아는 경제 발전을 이루기도 했다. 지방 마을들이 도시로 성장하고, 공업 생산이 증가했다.[345]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는 일시적이나마 평화가 유지되었고, 예레반에는 상당수의 아제르바이잔인이, 반대로 바쿠 등 아제르바이잔 도시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했다.

1965년 4월 24일, 예레반에서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50주년을 추모하며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는 소련 내에서 국가적 이슈를 내건 최초의 대규모 공개 시위 중 하나였다.[343] 이 시위의 영향으로 이듬해 예레반 근교 언덕에 집단 학살 추모비인 치체르나카베르트가 건립되었다.[344]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아르메니아어와 문화는 다시 장려되었고, 1970년대에는 아르메니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 비율이 99%를 넘어서 소련 내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345] 관광업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며 해외 디아스포라를 초청해 사회주의의 성과를 선전하기도 했다.[345] 그러나 메차모르 원자력 발전소 건설 등 공업화 과정에서 환경 오염과 파괴가 심각해졌고, 사회 전반에 부패가 만연했다.[345]

예레반에서 열린 나고르노-카라바흐 통합 요구 시위 모습 (1988년 여름)


1970년대 후반부터는 반체제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화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작품 활동이나, 1977년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과격파에 의한 모스크바 지하철 폭탄 테러 등이 그 예이다.[346]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운동에 불을 지폈다. 처음에는 환경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시위로 시작했으나, 곧 나고르노-카라바흐 귀속 문제로 번졌다.[347]

1988년 2월 20일, 아제르바이잔 내 자치주였던 나고르노-카라바흐 의회가 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결의하자,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간의 민족 분규가 격화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숨가이트에서는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숨가이트 학살)이 발생했고, 이는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이어졌다.[348] 소련 중앙 정부는 아르메니아의 요구를 거부하며 미온적으로 대처했다.[348]

같은 해 12월, 아르메니아 북부를 강타한 스피타크 대지진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레니나칸(귬리)과 스피타크 등 여러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전기와 수도 공급이 끊기는 등 열악한 상황과 소련 정부의 미흡한 대처는 많은 주민들이 북아메리카, 서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낳았다.[348]

이러한 사건들을 겪으며 소련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진 가운데, 1990년 5월 아르메니아 최고회의 선거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아르메니아 전국민 운동이 다수파를 차지했다.[349] 8월에는 전국민 운동 소속의 레본 테르페트로샨이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349] 마침내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보수파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인 9월 21일, 아르메니아는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찬성으로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350]

7. 현대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문 내용을 작성하지 않음)

7. 1. 아르메니아 공화국

주황색: 아르메니아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지역 (아르메니아 공화국: 98%;[124] 나고르노-카라바흐: 99%; 자바흐크: 95%)
노란색: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 지역이었으나 현재 아르메니아인이 없거나 미미하게 거주하는 지역 (서아르메니아 및 나히체반)||upright=1.3]]

아르메니아는 1990년 8월 23일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125] 독립은 1991년 9월 21일의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었으나,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게 된 것은 1991년 12월 25일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이후였다.

주권 국가로서의 첫 해에 아르메니아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전 세계의 여러 아르메니아 단체들이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나섰다. 캐나다에서는 CYMA - 캐나다 청소년 아르메니아 선교 소속 젊은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아라라트 지역에 도착하여 신생 공화국을 지원한 최초의 청소년 단체가 되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가 승리한 후, 아제르바이잔과 터키는 국경을 폐쇄하고 봉쇄를 가하여 신생 공화국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이 봉쇄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09년 10월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1991년 레본 테르-페트로시안 대통령 취임식


레본 테르-페트로시안은 1991년 10월 16일 새롭게 독립한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선출되었고, 1996년 9월 22일 재선에 성공했다.[126] 그러나 그의 재선은 야당과 많은 국제 참관인들이 제기한 선거 부정 의혹으로 얼룩졌다. 그의 인기는 아르메니아가 겪고 있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더욱 하락했다. 특히 외국에 기반을 둔 지도부를 가졌다는 이유로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 정당을 금지하고 관련자들을 투옥시켜 논란이 되었다. 이는 아르메니아 헌법에 위배되는 조치였다.

테르-페트로시안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에 대해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안보를 해친다고 여긴 타협적 해결 방안을 옹호한 후 1998년 2월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총리였던 로베르트 코차랸을 비롯한 핵심 각료들은 1997년 9월 국제 중재자들이 제시한 카라바흐 평화 계획을 거부했다. 테르-페트로시안과 아제르바이잔이 수락했던 이 계획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지위 문제를 뒤로 미루는 단계적 해결 방안을 담고 있었으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변 아르메니아 점령 아제르바이잔 영토 대부분의 반환과 아르메니아에 대한 아제르바이잔 및 터키의 봉쇄 해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1998년 1월, 테르-페트로시안의 각료들은 그에게 사임을 강요했다.[127]

로베르트 코차리안


레본 테르-페트로시안의 사임 이후, 로베르트 코차랸은 1998년 3월 30일에 치러진 조기 대통령 선거에서 주요 경쟁자 카렌 데미르치안을 꺾고 아르메니아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국제 선거 감시단이 지적했듯이 양측의 부정과 위법 행위로 얼룩졌다. 코차랸이 헌법에서 요구하는 10년 아르메니아 시민권 보유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128] 코차랸은 1997년 OSCE 민스크 그룹 평화 계획을 거부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협상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의 헤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과 비밀리에 협상했다. 1999년, 두 정상은 아제르바이잔 본토와 나흐치반을 잇는 영토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교환하는 안에 구두로 합의하고 민스크 그룹에 이를 문서화해달라고 요청했다.[127]

몇 주 후, 아르메니아 의회에서 여러 야당 지도자와 총리가 무장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1999년 아르메니아 의회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코차랸은 인질로 잡힌 의원들을 구하기 위해 테러리스트와 직접 협상했다. 이 사건의 범인이 전 다쉬나크당 당원이었고, 희생자 중에 코차랸의 경쟁자로 여겨지던 정치인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사건의 배후에 코차랸파의 음모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29][130][361] 이후 코차랸은 민스크 그룹에 더 이상 기존 평화 협정을 지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127]

2003년 아르메니아 대통령 선거는 2003년 2월 19일과 3월 5일에 치러졌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은 후보가 없어 현직 대통령 코차랸과 스테판 데미르치안이 2차 투표를 치렀고, 코차랸이 67% 이상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그러나 OSCE 선거 감시단은 두 차례 투표 모두에서 상당한 선거 부정 행위를 보고했으며, 특히 2차 투표 전에 데미르치안의 많은 지지자들이 체포되었다.[131] 데미르치안은 선거가 조작되었다며 지지자들에게 결과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 것을 촉구했다.[132] 선거 이후 며칠 동안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선거 결과에 반대하며 코차랸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131] 코차랸은 4월 초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고, 헌법 재판소는 선거 결과를 유지하면서도 1년 이내에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결과를 확인할 것을 권고했다.[13][14]

2016년 5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군사 상황


대통령으로서 코차랸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지위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위해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일함 알리예프와 협상을 계속했다. 2004년 9월 누르-술탄(카자흐스탄)에서 열린 CIS 정상 회담에서 만난 두 정상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변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의 아르메니아 군대 철수와 나고르노-카라바흐 및 아제르바이잔 본토에서의 주민 투표 실시 등을 논의했다. 2006년 2월 랑부예(프랑스)에서는 군대 철수, 국제 평화 유지군 창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위 등을 포함한 분쟁 해결의 기본 원칙에 대해 논의했지만,[133] 주요 쟁점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이후 워싱턴 D.C., 민스크, 모스크바 등에서 추가 회담이 열렸으나 진전은 없었다.[133][135]

세르지 사르키샨


당시 아르메니아 총리이자 코차랸 대통령의 지지를 받던 세르지 사르키샨은 2008년 2월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136][137] 한편, 초대 대통령 레본 테르-페트로시안은 2007년 10월 예레반 연설을 통해 10년 만에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는 코차랸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 대해 자신이 과거 제안했던 것과 유사한 해결책을 코차랸과 사르키샨이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아르메니아 인민당의 스테판 데미르치얀, 아르메니아 공화당의 아람 사르키샨,[138] 사회민주 훈차키안당, 자다크룸의 지라이르 세필리안, 뉴 타임스당, 헤리티지당의 라피 호반니시안을 포함한 여러 야당들이 그를 지지했다.[139]

3월 1일 대규모 시위


2008년 2월 19일에 치러진 선거 결과, 사르키샨이 약 53%의 득표율로 승리하고 테르-페트로샨이 21.5%로 2위를 차지한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다.[140] 테르-페트로샨과 그의 지지자들은 정부가 선거를 조작했다며 승리를 주장했고,[141] 2월 20일부터 예레반에서 수만 명이 참여하는 지속적인 시위를 벌였다.[142]

3월 1일 새벽, 당국은 시위대가 설치한 텐트에서 무기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텐트를 검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법 집행 요원들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해산시켰다. 테르-페트로샨은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당국은 이를 부인했다.[143] 몇 시간 후, 수만 명의 시위대가 미아스니키안 광장에 모여 정부의 조치에 항의했다. 경찰은 시위대의 규모에 압도되어 철수했고, 코차랸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군대를 수도로 투입했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과 충돌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을 포함해 10명이 사망했다.[144][145] 이후 대규모 체포와 야당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으며, 추가적인 반정부 시위는 사실상 금지되었다. 사르키샨은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인정받았다.[146][147]

2009년 10월 10일,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외교 관계 수립에 관한 의정서에 서명하며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사르키샨은 위원회를 통해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를 연구하자는 제안을 수락하고 현재의 국경을 인정했다. 그러나 2009-10년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군사력 증강과 전쟁 위협으로 남캅카스 지역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148]

2011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아르메니아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2008년 폭력 사태 조사, 정치범 석방, 사회 경제적 조건 개선, 민주 개혁 등을 요구했다. 아르메니아 국민회의와 헤리티지당이 시위를 주도했다.[149]

2016년 4월 1일부터 5일까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군대 간의 충돌이 재개되었다.

2018년 3월, 세르지 사르키샨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리로 선출되었다.[150] 이는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전환하는 헌법 개정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총리 선출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4월 23일 군대가 시위에 합류하자 사르키샨은 결국 사임했다.[151][152] 이 사건은 벨벳 혁명으로 불린다. 전 총리 카렌 카라페탼이 총리 대행을 맡았다.

니콜 파쉬냔


2018년 3월, 아르메니아 의회는 아르멘 사르키샨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총리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이 시행되었다.[153] 2018년 5월, 의회는 혁명을 주도한 야당 지도자 니콜 파쉬냔을 새로운 총리로 선출했다.[154]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2020) 지도


2020년 9월 27일, 해결되지 않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으로 인해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발발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측 모두 군인 및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155] 11월 10일,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변의 아르메니아 점령지 대부분을 아제르바이잔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아르메니아에서 발생하여 수백 명이 예레반의 국회 의사당을 습격하기도 했다. 11월 내내 파쉬냔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156]

2021년 2월 25일, 아르메니아 군부는 파쉬냔의 사임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파쉬냔은 이를 쿠데타 시도로 규정하고 군 참모총장 오니크 가스파랸을 해임하면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다.[157][158] 2021년 4월 25일, 파쉬냔은 6월 조기 총선을 치르기 위해 총리직에서 공식 사임한다고 발표했으나, 선거 전까지 임시 총리직을 유지했다.[159] 그의 정당은 2021년 선거에서 과반수를 득표하며 승리했고, 니콜 파쉬냔은 다시 총리로 임명되었다.[160]

2022년 1월 23일, 아르멘 사르키샨 대통령은 헌법상 대통령에게 충분한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임했다.[161] 2022년 3월 3일, 바하그 그하차투랸이 의회 투표를 통해 아르메니아의 다섯 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62]

2023년 9월,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하여 최소 200명이 사망하고 400명 이상이 부상했다. 9월 29일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계 주민의 80%에 달하는 약 9만 8천 명이 아르메니아로 피난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수장은 국가 기관 해체를 명령하며 사실상 오랜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365]

오늘날 예레반 시가지(2014년)


경제적으로 중요한 이웃 나라인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터키와의 관계, 그리고 국방에 중요한 러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아르메니아는 여전히 복잡한 외교적, 경제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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