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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가와 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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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나가사키현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중국 주재 무관, 국제 연맹 일본 대표단, 베르사유 조약 일본 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황도파에 가담하여 군부 내 파벌 활동을 했으며, 육군 차관, 제1사단장, 대만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중일 전쟁 시 제10군 사령관으로 난징 전투에 참여했으나, 난징 대학살에 연루되었다. 이후 흥아원 초대 총무 장관, 사법 대신, 국무 대신을 지냈으며, 국가신토 옹호와 대정익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복합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난징 대학살에 대한 책임 논란이 있다. 1945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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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가와 헤이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야나가와 헤이스케 장군
본명야나가와 헤이스케 (柳川 平助)
출생일1879년 10월 2일
사망일1945년 1월 22일
출생지일본 나가사키현 니시소노기군 무라마쓰촌
사망지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
묘소다마 묘원
별명복면 장군
정치 경력
소속 정당대정익찬회
직책사법대신
내각제2차 고노에 내각
취임일1940년 12월 21일
퇴임일1941년 7월 18일
직책국무대신
내각제3차 고노에 내각
취임일1941년 7월 18일
퇴임일1941년 10월 18일
기타 직책흥아원 초대 총무장관
취임일1938년 12월 16일
퇴임일1940년 12월 21일
기타 직책대정익찬회 부총재
취임일1941년 3월 28일
퇴임일1941년 10월 22일
군사 경력
소속 군대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0년 - 1938년
최종 계급중장
소속 부대황도파
지휘제1사단
대만군 사령관
제10군 사령관
참전 전투러일 전쟁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수상욱일장
금치훈장
서보장
학력
출신 학교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기타 이력
관련 인물미나미 지로
역할육군차관

2. 초기 이력

나가사키현 출신으로, 사가현의 야나가와 가문에 입양되어 그곳에서 성장했다. 190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 전쟁에 참전하였다. 종전 이후 일본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였다. 이후 중국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고, 베이징 육군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협상인 베르사유 조약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고, 1920년-1923년에는 국제 연맹 일본 대표단으로 일했다.

이 무렵, 일본 육군 내부 정치에 관여하여 아라키 사다오, 마자키 진사부로, 오바타 히데요시가 이끄는 고도파에 합류했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기병 장교로 근무하며, 1923년 제20 기병 연대장, 1927년 제1 기병 여단장, 1929년 기병 학교장, 1930년 기병 감찰감을 역임하며 꾸준히 승진했다. 1931년 12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18년 주중 무관으로 베이징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부임했다. 1920년 8월 19일 참모 본부에서 영국, 프랑스베르사유 조약 협상 일본 대표단의 외교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3년간 국제 연맹 주재 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원수로부터 병법을 배웠다.[1] 원수와는 생일(10월 2일), 가톨릭 신자, 반독일 성향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기병대에서 훈련받았다. 프랑스에서는 트리아농 조약에서 헝가리 영토 할양 협상에 참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벤 왕국(후의 유고슬라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에 할양했다.

1922년 8월 15일 육군 대좌, 1923년 1월 1일 우가키 가즈시게에게 엽서를 보냈다. 같은 해 기병 제12연대 대대장을 거쳐 1925년 5월 1일 참모 본부 연병과장이 되었다. 1927년 4월 1일 육군 소장으로 진급, 기병 제1여단장이 되어 제1차 산둥 출병에 참여했다. 1929년 8월 1일 기병 학교장이 되었고, 1930년에는 기병 총감을 역임했다. 1931년 12월 12일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2. 1. 출생과 성장

1879년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서 진주 양식을 하던 쿠스노키(楠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사가현의 야나가와 가문에 입양되었다. 아버지는 쿠스노키 유타로였다. 친형 쿠스노키 시노부(1953년 사망)는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의 안과 의사이자 지역 의사 회장이었다.

정상 사이카이 초등학교, 구제·현립 나가사키 중학교(나가사키 영어 전습소)를 졸업하였다. 1895년 11월~1896년 2월에 히로시마의 대의원 핫타 킨지로와 코이즈미 겐에몬과 편지를 교환했다.

2. 2. 군 입문

나가사키현 출신이지만, 사가현의 야나가와 가문에 입양되어 그곳에서 자랐다. 190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뤼순 전투 등에 종군하였다.[1] 1912년 일본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군 기병 학교 및 육군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3. 군 경력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190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1912년 육군참모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기병 학교 교관을 거쳐 1918년 중국 주재 무관으로 임명되어 베이징 육군대학 교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 협상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했으며, 1920년부터 1923년까지 국제 연맹에 파견된 일본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이 무렵, 일본 육군 내부 정치에 관여하여 아라키 사다오, 마자키 진사부로, 오바타 히데요시가 이끄는 황도파에 합류했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기병 장교로 근무하며, 1923년 제20 기병 연대장, 1927년 제1 기병 여단장, 1929년 기병 학교장, 1930년 기병 감찰감으로 꾸준히 승진했다. 193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육군 차관으로 근무했고,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제1사단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5년부터 1936년까지 대만 주둔 일본군을 지휘했으며, 1936년 2.26 사건의 여파로 예편되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주둔 제10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제10군은 항저우에 상륙하여 상하이 전투에 참전했고, 이후 난징 전투를 펼쳤다. 그의 부대는 난징 대학살에 연루되었다.

3. 1. 해외 파견

1918년 주중 무관으로 베이징 육군대학교에 교관으로 부임했다.[1] 1920년 8월 19일 참모 본부에서 영국, 프랑스에서 베르사유 조약 협상 일본 대표단의 외교 무관으로 파견되었다.[1] 3년간 국제 연맹 주재 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원수로부터 병법을 배웠다.[1] 포슈 원수와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생일이 10월 2일로 같고, 가톨릭 신자이며, 반독일 성향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야나가와는 영국 기병대와 프랑스 기병대에서 배웠다.[1]

그 외에도 프랑스에서 트리아농 조약에서의 헝가리 영토 할양 협상에 참여했다. 이 조약으로 헝가리 영토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벤 왕국 (후의 유고슬라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에 할양되었다.[1]

3. 2. 황도파 가담

1920년대부터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일본 군내 파벌 중 하나인 황도파에 가담하였다.[1] 황도파는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수립하고 군사 국가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아라키 사다오, 마사키 진자부로, 오바타 히데요시 등 황도파의 핵심 인물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였다.

3. 3. 승진과 요직 역임

1931년 12월 12일에 육군 중장으로 승진하였다.[1] 1932년 8월 8일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의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신 아래에서 육군차관에 취임하여, 마사키 진자부로 등과 황도파의 중심 인물이었다.[1] 육군 차관으로서 국산 대중 자동차 공업의 확립에 관여하였다.

1933년 6월, 성부 회의 '만주 사변 후의 대륙 국방 방침 토의'를 개최하였다.[1] 아라키 육군 대신, 야나가와 차관, 야마오카 군무 국장, 야마시타 군사 과장, 마사키 참모 차장, 우메즈 총무 부장, 고쇼 제1부장, 나가타 제2부장, 오바타 제3부장, 스즈키 작전 과장이 참가하여,[1] 나가타 데쓰잔의 '북지 남진 일격 강화론'과 황도파의 '전선 불확대' 의견이 갈라졌다.[1] 이 무렵부터 통제파가 황도파 추방과 대영미 개전을 계획했다.[1]

같은 시기, 야나가와 등은 외무성 구미국 촉탁으로 영불 독에 유학한 반나치 쇼와 연구회의 사사 히로오로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참상을 듣고, 군사·경제 양면에서 패배 상태의 독일식 문제점을 위험시했다.[1] 프로이센 카를 마르크스의 마르크스 통제 경제적 MMT 통화 발행의 위험성을 알았으며,[1] 게이오 대학 원리 일본사의 미이 고노스케 등 반 마르크스 경제학자로부터 의견을 참고했다.[1]

같은 해, 사가현 출신의 RICOH 창시자 이치무라 기요시로부터 리켄 사임 후 판사나 변호사 전직 상담을 받고, 불교 석가를 예로 들며 종교조차 비즈니스성이 있다는 취지로 설파했다.[1]

육군 대신 아라키 사다오가 고문, 육군 차관 야나가와 헤이스케가 이사장이 되어 육해군 장교 등의 군도 정비 및 전통 기법 답습을 목적으로 '일본도 단련회'를 조직하고,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단련소를 개설했다.[1] 여기서 만들어진 칼은 '야스쿠니도', 종사한 도공은 '야스쿠니 도장'이라 불렸으며, 종전까지 10여 년간 약 8,100점이 제작되었다.[1] 이 단련소는 현재도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남아 내부가 개조되어 다실로 사용되고 있다.[1]

1934년 4월 29일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1] 8월 1일 제1사단장이 되었으며,[1] 아라키 사다오는 폐렴으로 육군 대신을 퇴임했다.[1]

1935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신의 육군 차관이 되었다.[1] 교육 총감 마사키 진자부로가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참모총장, 참의관 와타나베 죠타로 후원으로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신에게 파면되었다.[1] 같은 해 2월, 미·일 포드, 닛산의 제휴 협상 중단을 요코하마 시장에게 권고했다.[1] 12월 2일 대만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었고,[1] 1936년 8월 이란 공원 '충혼탑' 기념비가 조인되었다.[1]

3. 4. 2.26 사건과 예편

1936년 황도파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인 2.26 사건의 진압 여파로, 황도파였던 야나가와는 예편되었다.[6]

2.26 사건 이후 70년이 지난 2005년 2월,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에서 야나가와 헤이스케가 쓴 자필 서간집이 발견되었다. 1927년부터 1944년 사이에 안과의사이자 히가시소노기군 의사회 회장을 역임한 형인 구스노키 시노부(1953년 사망)에게 보낸 것이다. 이 서간집은 2.26 사건 이전, 정부나 군에 대해 품었던 불만과 불신이 담겨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5. 중일 전쟁과 복귀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현역으로 복귀하여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주둔 제10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제10군은 제18 사단, 제114 사단, 제6 사단, 제5 사단의 구니사키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1937년 11월 5일 항저우에 상륙했다.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상하이 지역에서 도주하는 중국군을 추격하는 부대를 이끌었으며, 난징 전투에서 일본군의 주요 부대 중 하나를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이후 난징 대학살에 연루되었지만,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그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

3. 6. 난징 대학살

중일 전쟁으로 현역에 복귀한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주둔 제10군 사령관을 맡았다. 제10군은 항저우에 상륙하여 상하이 전투에 참전했고, 이후 난징 전투에서 일본군의 주요 부대 중 하나를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난징 대학살에 연루되었다. 1985년, 당시 일본 제10군 참모 장교였던 요시나가 스나오는 인터뷰에서 야나가와가 난징 대학살에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1]

4. 정계 경력

1938년 군에서 예편한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정계에 진출하여 흥아원 초대 총장, 제2차 고노에 내각사법대신, 제3차 고노에 내각국무대신을 역임했다. 히라누마 기이치로자이바쓰의 지원을 받아 사법대신에 취임하여 경시청을 감독하였고, 고이소 구니아키와 함께 국가신토를 옹호하며 신토의 국교화를 추진하였다. 1941년 대정익찬회 초대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1945년 1월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4. 1. 흥아원 총장

1938년 야나가와는 군에서 예편하여 일본으로 돌아와 정계에 진출, 일본의 침략 정책을 관리하는 국가 기관인 흥아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6]

4. 2. 사법대신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히라누마 기이치로자이바쓰의 도움으로 사법대신에 취임하였다.[1] 사법대신으로서 경시청 (도쿄도 경찰청)을 감독하였다.[1]

4. 3. 국무대신

1941년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국무대신을 역임하였다.[1]

4. 4. 국가신토 옹호

고이소 구니아키, 히라누마 기이치로와 함께 신토 의례 연구 위원회를 창설하여 신토의 국교화를 추구하는 국가신토를 옹호하였다.[1]

4. 5. 대정익찬회

1941년 대정익찬회 초대 부총재를 역임하였다.[1]

5. 종전 모색과 사망

1937년 중일 전쟁 발발로 현역에 복귀한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제10군 사령관을 맡아 항저우에 상륙, 난징 전투에서 일본군의 주요 부대를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난징 대학살에 연루되었지만, 야나가와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938년 다시 현역에서 물러난 야나가와는 동아개발원 총무국장을 거쳐 히라누마 기이치로의 후원과 재벌 그룹의 지원으로 사법성을 인수하고 경시청을 이끌었다. 국가 신토를 지지한 그는 고이소 구니아키, 히라누마 기이치로와 함께 신토 의례 연구 위원회를 창설했으며, 대정익찬회 지도자이기도 했다.

1985년 일본 제10군 참모 장교였던 요시나가 스나오는 인터뷰에서 야나가와를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이자 "과묵하고 조용한 영웅"으로 묘사했다. 그는 야나가와가 중국을 사랑했으며, 난징으로 가는 길에 참모들에게 일본과 중국이 서로 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개인적으로 말했지만, 군인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회고했다.[1]

5. 1. 도조 내각 타도 운동

柳川 平助|야나가와 헤이스케일본어태평양 전쟁도조 히데키 내각 타도 운동에 참여하였다. 마사키 진자부로 등과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고, 다카마쓰노미야 등 황족 및 요시다 시게루 등과 협력하여 종전을 모색하였다.[6]

5. 2. 사망

柳川 平助|야나가와 헤이스케일본어는 1945년 1월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1]

6. 평가 및 논란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고도파에 가담하여 일본 육군 내 정치에 관여했다. 1931년 중장으로 진급 후,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의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신 아래에서 육군 차관을 역임하며 마사키 진자부로 등과 함께 황도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육군 차관 시절 국산 대중 자동차 공업 확립에 관여했다.

1933년 6월, '만주 사변 후의 대륙 국방 방침 토의'에서 나가타 데쓰잔의 '북지 남진 일격 강화론'과 황도파의 '전선 불확대' 의견이 대립했다. 이 무렵부터 통제파가 황도파 추방과 대영미 개전을 계획했다. 야나가와 등은 쇼와 연구회의 사사 히로오로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참상을 듣고, 군사·경제 양면에서 패배 상태의 독일식 문제점을 위험시하여, 카를 마르크스의 마르크스 통제 경제적인 MMT 통화 발행의 위험성을 인지했다. 게이오 대학 원리 일본사의 미이 고노스케 등 반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에게 의견을 참고했다. 같은 해, RICOH 창시자 이치무라 기요시로부터 상담을 받고, 석가를 예로 들며 종교조차 비즈니스성이 있다는 취지로 설득했다.

육군 대신 아라키 사다오가 고문, 육군 차관 야나가와 헤이스케가 이사장이 되어 육해군 장교 등의 군도 정비, 전통 기법 답습을 목적으로 '일본도 단련회'를 조직하고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단련소를 개설, '야스쿠니도'를 제작했다. 종사한 도공은 '야스쿠니 도장'이라고 불렸다.

1934년 제1사단장을 역임하고, 1935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신의 육군 차관을 맡았다.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참모총장, 참의관 와타나베 죠타로의 후원으로 교육 총감 마사키 진자부로가 파면되었다. 같은 해, 미·일 포드, 닛산의 제휴 협상 중단을 요코하마 시장에게 권고했다.

1936년 2·26 사건 이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나, 전시 소집 시 후대 약속을 받고 스스로 제출한 것이었다.[6]

6. 1. 복합적인 성향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우익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성향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중일 전쟁의 조기 종결과 대미 개전 회피를 모색하는 등 평화주의적인 면모도 있었다. 그의 출신지인 나가사키는 역사적으로 중국, 서구 열강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곳으로, 이러한 배경이 그의 복합적인 성향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1] 그는 가톨릭의 영향이 강했던 나가사키 출신으로,[1] 난징 대학살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6. 2. 난징 대학살 책임 논란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제10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10군은 상하이 지역에서 도주하는 중국군을 추격하여 난징 전투에서 일본군의 주요 부대 중 하나를 지휘했으며, 그의 부대는 이후 난징 대학살에 연루되었다.

야나가와 헤이스케는 난징 대학살 당시 제10군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학살에 대한 책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985년 제10군 참모 장교였던 요시나가 스나오는 인터뷰에서 야나가와를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이자 "과묵하고 조용한 영웅"으로 묘사했다. 또한, 야나가와가 중국을 사랑했으며, 난징으로 가는 길에 참모들에게 일본과 중국이 서로 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개인적으로 말했지만, 군인으로서 그는 여전히 싸우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꼈고 따라서 기꺼이 난징으로 진격했다고 말했다.[1]

6. 3. 야나가와 문서 발견

2005년에 야나가와 헤이스케가 1895년 11월부터 1896년 2월 사이에 히로시마의 대의원 핫타 킨지로와 코이즈미 겐에몬에게 보낸 자필 서간집이 발견되어, 그의 사상과 행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1]

참조

[1] 서적 The Nanjing Incident: Japanese Eyewitness Accounts - Testimony from 48 Japanese Who Were There
[2] 서적 官報 1940年12月21日 https://dl.ndl.go.jp[...] 大蔵省印刷局 1940-12-21
[3] 서적 官報 1941年07月21日 https://dl.ndl.go.jp[...] 大蔵省印刷局 1941-07-21
[4] 서적 官報 1941年10月18日 https://dl.ndl.go.jp[...] 大蔵省印刷局 1941-10-18
[5] 서적 官報 1938年12月26日 https://dl.ndl.go.jp[...] 大蔵省印刷局 1938-12-26
[6] 서적 帝国陸海軍 人事の闇 光人社NF文庫
[7] 간행물 『官報』第5484号「叙任及辞令」 1901-10-11
[8] 간행물 『官報』第8185号「叙任及辞令」 1910-10-01
[9] 간행물 『官報』第5407号「敍任及辞令」 1945-01-26
[10] 간행물 『官報』第4438号・付録「辞令二」 194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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