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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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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갑성은 1889년 대구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경신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후 신간회 활동, 상하이 임시정부 참여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다. 1962년 건국훈장을 받았으나, 상하이 망명 이후 일제 밀정 의혹과 친일 혐의가 제기되어 논란이 있었다. 1981년 사망했으며, 아들 이용희는 정치외교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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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갑성
이름이갑성
원어 이름李甲成
출생일'1889년 10월 23일'
출생지조선 대구도호부
사망일'1981년 3월 25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국적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본관알 수 없음
직업독립운동가
관련 활동독립운동
웹사이트이갑성 (독립유공자 공훈록)
훈장
상훈[[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2. 생애

이갑성은 1889년 10월 23일 대구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웠다. 11세 때 개신교 선교사 샤록스(A. M. Sharocks)를 만나 개종했고, 이 일로 집에서 쫓겨나 12세 때 상경하여 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갔다. 연동교회 전도실에서 숙식하면서 그리스도 신문을 배달하며 생활했다.

연동교회 부목사 밀의두(E.H.Miller) 선교사의 집으로 옮겨 집안일을 도우며 영어를 배웠고, 1906년 밀의두 목사의 배려로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했다. 이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약학을 전공, 1915년 졸업 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제약부 주임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하여 박희도개신교계 인사들과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20일 함태영, 현순, 안세환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2월 22일 학생들의 별도 독립선언 계획을 중지시키고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2월 27일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초안에 서명했다.

2월 28일 김창준에게 독립선언서 600매를 받아 인쇄하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설에게 5매를 주어 인쇄하게 했다. 3월 1일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인쇄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에게 400여 매를 주어 대구와 마산에 보내도록 했다. 김병수, 임영신, 강기덕 등에게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3월 1일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 이갑성은 시내에서 시위전단을 살포하고 학생들을 독려했다. 같은 날 오후 조선총독부민족대표 33인의 의견서를 제출하러 갔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1]

석방 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고, 1927년 신간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했다가, 1938년 귀국, 흥업구락부 활동 중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했다.

1945년 광복 후 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1946년 정당통일기성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지냈다. 1948년 5·10 총선거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5월 총선에서 낙선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6.25 전쟁 중 대전으로 피신하여 무임소 장관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했다.[1] 1951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국회 인준이 부결되었다.[6][7]

1952년 대한국민회 회장 겸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자유당에 입당, 1953년 자유당 최고위원 겸 정무부장이 되었다. 1956년1960년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0년 4월 이승만 하야 후 야인으로 물러났다가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지지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으로 참여하고,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광복회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들의 발굴과 복지 증진에 힘썼다.

1981년 3월 25일 사망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1]

2. 1. 생애 초반

연당 이갑성은 1889년 10월 23일 대구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웠다. 11세 때 샤록스(A. M. Sharocks) 개신교 선교사를 만나 개종하여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개신교로 개종한 일로 부모에게 집에서 쫓겨나 12세 때 돈 없이 걸어서 상경하여 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갔다. 경성부에 도착한 그는 연동교회 전도실에서 숙식하면서 그리스도 신문을 배달하였다.

연동교회 부목사격인 밀의두(E.H.Miller) 선교사와 가까워졌고, 얼마 뒤 그의 집으로 옮겨 집안일을 도우며 영어를 배웠다. 1906년 경신학교 제5대 교장이 된 밀의두 목사의 배려로 경신학교에 입학해 1910년 졸업했다. 1910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 약학을 전공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제약부 주임으로 선임되었다.

2. 1. 1. 출생과 유년기

1889년 10월 23일 대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11세 때 한문 서당을 수학하고 돌아오던 길에 샤록스(A. M. Sharocks) 개신교 선교사를 만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개신교로 개종한 일로 인해 부모에게 집에서 쫓겨나 12세 때 돈 없이 걸어서 상경하여 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갔다.

2. 1. 2. 수학 시절

경성부에 도착한 이갑성은 처음에는 연동교회 전도실에서 숙식하면서 그리스도 신문을 배달하였다.

연동교회 부목사격인 밀의두(E.H.Miller) 선교사의 집(연지동 136번지)으로 옮겨 집안일을 도우며 영어를 배웠다. 1906년 밀의두 목사의 배려로 경신학교에 입학해 1910년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경신학교 재학 중 기숙사 생활을 하며 주일이면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191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 약학을 전공했다.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제약부 주임으로 선임되었다. 남문밖교회(지금의 남대문교회)에 출석하며 집사 직분을 맡았고, 연동교회에서 남대문교회로 부임한 함태영 조사를 다시 만나 교류하였다.

2. 2. 독립운동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하여, 박희도개신교계 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학생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경성부의 학생들과 자주 만나 손병희 등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한다며 참여를 호소하였다. 고종이 갑자기 죽자 3·1 운동 거사 기일을 1919년 2월로 정했다.

2. 2. 1. 만세 운동 준비

1915년 세브란스의전 부속병원 사무원이 되고, 그 뒤 의전 부속병원 제약부 주임이 되었다. 1918년 말부터 박희도개신교계 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경성부 내 각 학교 학생들의 동정을 주시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날 때는 병원 제약부 담당으로 재직 중 민족대표 33인개신교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원로격인 33인과 학생들과의 매개 역할을 맡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함태영, 현순, 안세환, 오상근(吳尙根)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2월 22일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이를 중지하고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계획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2월 27일 박희도, 함태영, 김창준, 신석구, 오화영, 이인한(李寅煥), 최성모(崔聖模), 이필주,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 함태영최남선이 기초한 여러 가지 문서의 초안을 천도교계 인사 최린으로부터 받아와, 그 취지에 찬성하여 개신교측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한다.

2월 28일에는 목사 김창준에게 함태영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900매 중 약 600매를 받은 뒤 이를 다시 인쇄하고, 그날 5매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설(李容卨)에게 교부하여 인쇄하게 한 뒤 학생들에게 돌리게 하였다. 3월 1일 아침 일찍 이갑성은 독립선언서를 수천 장 인쇄하여 400여매를 병원 사무실에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에게 주어, 그중 200매는 대구의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보내고 나머지 200매를 마산의 독립운동 동조자 임학찬(任學瓚)에게 보내도록 한다. 또한 학생 김병수에게는 전라북도 옥구군에 있는 박연세(朴淵世) 등에게 보내기 위해 200매를 주었으며, 충청남도 천안에서 올라온 임영신에게도 일부 배포하고, 경성부 강기덕(姜基德)에게 1,500매를 주어 배포케 한다. 2월 28일경성부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 모인 손병희 등의 민족대표들은,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결정했던 파고다 공원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그 장소를 인사동태화관으로 정하였다.

2. 2. 2. 3.1 운동 직전

3·1 운동 당시 병원 제약부 담당으로 재직 중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3인과 학생들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맡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 5가의 함태영 집에 함태영, 현순, 안세환, 오상근(吳尙根) 등과 모여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1919년 2월 22일 학생들의 별도 독립선언 계획을 중지시키고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계획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였다. 2월 27일 박희도, 함태영, 김창준, 신석구, 오화영, 이인한(李寅煥), 최성모(崔聖模), 이필주,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초안에 서명 날인하였다.

2월 28일에는 김창준에게 함태영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900매 중 약 600매를 받아 다시 인쇄하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설에게 5매를 주어 인쇄하게 한 뒤 학생들에게 배포하게 하였다. 3월 1일 아침,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인쇄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에게 400여 매를 주어 대구의 이만집 목사와 마산의 임학찬(任學瓚)에게 각각 200매씩 보내도록 했다. 또한 김병수에게는 전라북도 옥구군의 박연세(朴淵世) 등에게 보내기 위해 200매를 주었고, 충청남도 천안에서 올라온 임영신에게도 일부를 배포했으며, 경성부 강기덕에게 1,500매를 주어 배포하게 했다. 2월 28일경성부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 장소를 파고다 공원에서 인사동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2. 2. 3. 3.1 운동과 체포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 5가의 함태영 집에서 함태영, 현순, 안세환, 오상근(吳尙根)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2월 22일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이를 중지하고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계획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2월 27일 박희도, 함태영,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오화영(吳華英), 이인한(李寅煥),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 함태영최남선이 기초한 여러 가지 문서의 초안을 천도교계 인사 최린으로부터 받아와, 그 취지에 찬성하여 개신교 측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월 28일에는 목사 김창준에게 함태영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900매 중 약 600매를 받은 뒤 이를 다시 인쇄하고, 그날 5매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설(李容卨)에게 교부하여 인쇄하게 한 뒤 학생들에게 돌리게 하였다. 3월 1일 아침 일찍 이갑성은 독립선언서를 수천 장 인쇄하여 400여 매를 병원 사무실에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에게 주어, 그중 200매는 대구의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보내고 나머지 200매를 마산의 독립운동 동조자 임학찬(任學瓚)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또한 학생 김병수에게는 전라북도 옥구군에 있는 박연세(朴淵世) 등에게 보내기 위해 200매를 주었으며, 충청남도 천안에서 올라온 임영신에게도 일부 배포하고, 경성부 강기덕(姜基德)에게 1,500매를 주어 배포케 하였다. 2월 28일경성부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 모인 손병희 등의 민족대표들은,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결정했던 파고다 공원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그 장소를 인사동태화관으로 정하였다.

3월 1일 경성부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때 그는 시위전단 살포와 학생들 독려를 위해 시내에서 활동하였다.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던 중, 같은 날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들은 태화관에 모였고, 이갑성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미리 의견서를 제출한 뒤 회합 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당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1일 오후 이갑성은 조선총독부민족대표 33인의 의견서를 제출하러 갔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2. 2. 4. 석방과 망명

석방 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재단 이사 및 세브란스의약(醫藥) 지배인이 되었다. 1925년 2월 이창제(李昶齊), 현신덕(玄信德), 조철호(趙喆鎬), 배집(裵執), 변성옥(邊成玉) 외 5인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의 반기독교 운동에 저항하기 위해 시사구락부(時事俱樂部)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주장에 저항하였다.[1]

1926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1년 주식회사 경성공업(京城工業)의 경성공장 지배인이 되었다.

1927년부터 허헌, 김병로, 이인, 허정숙, 조병옥 등과 함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체포령이 떨어지면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38년 귀국,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7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윤치호의 신원 보증으로 풀려났다.

2. 3. 광복 이후

1945년 10월, 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에 참여하여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0월 5일 정당통일기성회를 결성하였다. 12월 14일 권동진 등과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고 권동진을 당수로 추대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하였다. 4월 18일 한국독립당, 국민당(國民黨), 신한민족당의 3당 통합에 참여하였으나, 한국독립당에서 안재홍 등이 제명되자 탈당하였다. 1946년 정당통일기성회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갈등이 계속되어 1947년 해산되었다.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12월부터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다.

김규식(金奎植) 등의 좌우합작에 협력하던 중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5월 대한인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지도, 운영하였다.

이승만의 단정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50년 5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제2대 민의원(民議院) 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6.25 전쟁 직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당하자 자가용편으로 대전으로 피신, 무임소 장관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였다.[1]

1951년 5월 16일 이시영 부통령의 사퇴로, 부산 피난지에서 열린 제2대 국회에서 실시한 제2대 부통령선거에서 여당격인 대한국민당 소속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재적 국회의원 210명 중 재석의원 151명에 의해 선출된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 김성수와 경합했는데, 1차 투표와 2차 투표에서 당선표수 미달, 3차 투표에서 73표를 얻어 낙선, 78표를 얻은 김성수가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2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시내각(戰時內閣)의 국무총리에 임명되기도 했다.[6] 11월에는 정식 국무총리로 국회에 인준하였으나 부결되었다.[7]

1952년 대한국민회 회장 겸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자유당과 흡수, 합병 형식으로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범석의 족청계가 양우정 등을 통하여 국민회 계열 파괴공작을 시도하였을 때 이에 저항하여 자유당 내에서 족청계를 견제하였다. 족청계의 성장을 견제하던 이승만이 이를 높이 사서 그를 자유당 최고위원에 임명하여 이범석계열을 견제하게 한다.

1953년 집권당이던 자유당의 최고위원과 당 정무부장이 되었고,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다. 같은해 3.1 운동 관련 단체인 민족대표 33인유족회의 회장이 되고, 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족청계가 숙청된 뒤 이승만의 특별 부탁으로, 혼란에 휩싸인 자유당을 재건하기 위한 8인 재건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자유당 정무부장(政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기붕 계열과 주도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던 중 이기붕계열에 의해 숙청되어 당의 실세에서 밀려나게 된다.

1956년 정, 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기 위해 자유당을 일시 탈당하고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때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 하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도 부통령으로 입후보하였으나 군소부호로 낙선하였다.

1960년 4월 이승만이 하야하자 야인으로 물러났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하였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63년 1월 김종필, 윤일선, 정구영 등이 주도한 민주공화당 창당 작업에 발기위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1월 15일 한일회담 고문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같은 해 광복회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들의 발굴과 복지 증진에 힘썼다. 또한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 황신덕 등이 조직한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고문으로도 위촉되었다.

2. 3. 1. 광복 직후 정계 활동

1945년 10월, 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에 참여하여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10월 5일 정당통일기성회를 결성하였다. 12월 14일 권동진 등과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고 권동진을 당수로 추대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4월 18일 한국독립당, 국민당(國民黨), 신한민족당의 3당 통합에 참여하였으나, 한국독립당에서 안재홍 등이 제명되자 탈당하였다. 1946년 정당통일기성회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갈등이 계속되어 1947년 해산되었다.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다.

김규식(金奎植) 등의 좌우합작에 협력하던 중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5월 대한인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지도, 운영하였다.

2. 3. 2. 이승만 정부 시절

이승만의 단정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50년 5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제2대 민의원(民議院) 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6.25 전쟁 직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당하자 자가용편으로 대전으로 피신, 무임소 장관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였다.[1]

1951년 5월 16일 이시영 부통령의 사퇴로, 부산 피난지에서 열린 제2대 국회에서 실시한 제2대 부통령선거에서 여당격인 대한국민당 소속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재적 국회의원 210명 중 재석의원 151명에 의해 선출된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 김성수와 경합했는데, 1차 투표와 2차 투표에서 당선표수 미달, 3차 투표에서 73표를 얻어 낙선, 78표를 얻은 김성수가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2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시내각(戰時內閣)의 국무총리에 임명되기도 했다.[6] 11월에는 정식 국무총리로 국회에 인준하였으나 부결되었다.[7]

1952년 대한국민회 회장 겸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자유당과 흡수, 합병 형식으로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범석의 족청계가 양우정 등을 통하여 국민회 계열 파괴공작을 시도하였을 때 이에 저항하여 자유당 내에서 족청계를 견제하였다. 족청계의 성장을 견제하던 이승만이 이를 높이 사서 그를 자유당 최고위원에 임명하여 이범석계열을 견제하게 한다.

1953년 집권당이던 자유당의 최고위원과 당 정무부장이 되었고,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다. 1953년 3.1 운동 관련 단체인 민족대표 33인유족회의 회장이 되고, 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족청계가 숙청된 뒤 이승만의 특별 부탁으로, 혼란에 휩싸인 자유당을 재건하기 위한 8인 재건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자유당 정무부장(政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기붕 계열과 주도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던 중 이기붕계열에 의해 숙청되어 당의 실세에서 밀려나게 된다.

1956년 정, 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기 위해 자유당을 일시 탈당하고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때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 하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도 부통령으로 입후보하였으나 군소부호로 낙선하였다.

2. 3. 3. 제3공화국 시절

1960년 4월 이승만이 하야하자 야인으로 물러났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하였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63년 1월 김종필, 윤일선, 정구영 등이 주도한 민주공화당 창당 작업에 발기위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1월 15일 한일회담 고문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같은 해 광복회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들의 발굴과 복지 증진에 힘썼다. 또한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 황신덕 등이 조직한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고문으로도 위촉되었다.

2. 4. 최후

3·1 운동 당시 김창준, 박희도와 함께 30대 초반으로 가장 젊은 편이었으며, 93세까지 장수하여 33인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했다. 광복 이후 독립유공자 대표로 매년 3·1절 행사와 광복절 행사에 초청되었다.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정치외교학자 이용희가 이갑성의 아들이다.

1980년 다시 그의 밀정설이 제기되었다. 그 해 임정 국무위원 출신 조경한(曺擎韓)이 박창암을 불러 이갑성이 일제의 밀정이라 주장하며 '내가 이걸 밝혀야 되겠는데 자네 용기 있나'라고 했고, 박창암조경한의 부탁을 수락했다. 박창암조경한의 진술을 토대로 월간 <자유>에 발표했고, 이갑성은 병석에서 박창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 진행 중 소송 결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여 소송은 취소되었다. 뒤에 윤치영박창암을 찾아가 몇이 달라붙어도 해결 못 할 일을 해결했다며 치하하였다. 이갑성은 1981년 3월 25일에 사망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1]

3. 논란과 의혹

이갑성은 친일 의혹 등 여러 논란에 휩싸여 있다.[2]

3. 1. 친일 의혹과 반론

1933년 상하이 망명 이후 일제 밀정으로 일했다는 증언들이 다수 있다.[2] 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 정춘수와 함께 창씨개명을 한 세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 훈장 서훈자 중 친일 혐의가 있는 자의 명단을 발표할 때, 과거 독립유공자 심사위원까지 맡았던 이갑성의 이름이 포함되었다.[3] 하지만 밀정 혐의의 특성상 세월이 흐른 뒤 근거를 찾기 힘들었고 관련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가 되어 버린데다, 더 이상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의혹만 남았을 뿐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갑성의 논란은 민족문제연구소한겨레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 2005년 3.1절 특집 SBS 뉴스추적 "누가 변절자인가" 편에서는 이갑성의 친일 의혹을 면밀히 검증한 결과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시한 것들도 근거가 희박한 것들이 많고, 이갑성이 광복 이후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좌익 단체로부터 집단적인 음해를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5]

4. 상훈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공로훈장 복장(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5. 학력

1910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약학을 전공하였다.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사 (1915년)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1956년)

6. 기타

신앙 초기에 서울 연동교회를 다녔고, 이후 남대문교회(南大門敎會)에 출석하였다.[1] 3·1 운동 당시 석호필(스코필드)의 부탁을 받고 경성 시내에서 학생들의 만세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제공하였다.[1]

참조

[1] 서적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
[2] 뉴스 "'친일파 세상'이 싫어 고국을 떠났습니다" - [이메일 대담] 순국선열 왕산 허위선생 후손 재미동포 허도성씨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8-06
[3] 저널 김성수 훈장은 치탈될 것인가 http://h21.hani.co.k[...] 2005-06-22
[4] 뉴스 SBS '뉴스추적' 3.1절 특집 '누가 변절자인가'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3-03-25
[5] 뉴스 SBS '뉴스추적' 3.1절 특집 '누가 변절자인가' http://wizard2.sbs.c[...] sbs 2013-03-25
[6] 웹인용 ::: 독립기념관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 https://search.i815.[...] 2010-01-13
[7] 서적 한국정치 이대로는 안 된다 역사비평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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