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독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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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독 관계는 1883년 조선과 독일 제국의 조약 체결로 시작되었으며, 2023년 수교 140주년을 맞이했다. 양국은 일제강점기 동안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으나, 1955년 외교 관계를 재개한 이후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독일은 한국 전쟁 당시 지원을 제공했으며, 한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22년 기준 양국 간 교역 규모는 336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한국은 독일의 주요 아시아 무역 파트너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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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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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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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한독 관계 |
독일어 명칭 | Deutsch-Südkorea Beziehungen |
로마자 표기 | Deutsch-Suedkorea Beziehungen |
한국어 명칭 | 한독관계 |
한자 표기 | 韓獨關係 |
로마자 표기 | Handok-gwangye |
외교 관계 | |
독일 대사관 | 주한 독일 대사관, 서울 |
대한민국 대사관 |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관, 베를린 |
독일 대사 | 게오르크 빌프리트 슈미트 |
대한민국 대사 | 임상범 |
참고 | |
관련 관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독일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통일 독일의 관계) |
2. 역사
조선은 1883년 독일 제국과 독일-조선 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 관계를 처음 맺었고, 이 조약은 1905년에도 유효했다.[1]
1866년 2월,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조선 충청남도 아산만 해미현 조금포(調琴浦)에서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는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으로 이어졌다.[1] 1870년 5월에는 도쿄 주재 독일 대리공사 폰 브란트(Von Brandt)가 부산왜관에서 통상 교섭을 시도했으나, 조선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인해 실패했다.[1]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성사되자 독일측은 청의 도움을 받아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수립코자 하였다. 주청공사로 전근된 폰 브란트와 주톈진 독일영사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주요코하마 독일총영사 에드워드 잡페(Edward Zappe)의 노력 속에 1883년 11월 26일 조독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1] 조선과 독일 제국이 외교관계를 처음 맺은것이 바로 이 조약에 의해서였다.[1] 1883년 11월 28일 독일 총영사관이 서울에 개설되고 젬부쉬(Zembsch)가 초대 주한독일총영사로 임명되었으며 미리 와있던 부들러 부영사와 청국 재상 이홍장에 의해 조선왕국 외무협판으로 임명된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등은 한반도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2023년 현재 이로부터 수교 140주년을 앞두고 있다.
1898년 7월 28일에는 독일 왕자 하인리히가 10일간의 일정으로 방한을 하였다. 이에 1901년 3월 민철훈 특명전권공사가 영국,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면서 방독을 겸하였다.[21] 한편, 1898년에는 독일인 프란츠 에카르트가 내한하여 최초로 양악을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의 교류는 경술국치(1910년)로 단절되고 말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된 후, 독일 제국과 조선 간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1]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나치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1955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와 서독 정부가 양국을 상호 승인함으로써 양국간 외교관계가 재개되었다.[24][25] 한국 전쟁 당시 서독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구호계획에 따라 47,619달러를 기부하고, 미국과 '한국에서의 독일 적십자병원에 의한 원조에 관한 협정(1954년 2월 12일)'을 체결하여 부산에 야전병원을 설립하였다.[22] 1954년 10월 1일 한국은 독일 레마겐에 이한호[23]를 파견해 주독 총영사관을 개설하고자 하였으나, 독일은 이를 거부하고 한국무역대표단(Koreanische Handelsvertretung)으로 승인했다(1955년 1월 22일).[22]
독일은 1956년 봄 영사 인가증(領事認可證)을 발급하고 6월 5일에 주한독일 총영사를 임명하였으며,[26] 그해 10월 한국 서울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28] 1957년 3월 5일, 양국은 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다.[30] 1957년 6월 5일, 주미 대사 양유찬은 친선사절로서 서독을 방문하여 콘라트 아데나워와 회담하고 조만간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29] 1958년 8월 1일, 공사관은 대사관으로 승격되었고,[30] 같은 날 주독일 대사관이 본에 개설되었다. 한국은 초대 주서독 대사에 군인 출신으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손원일을 임명하였다(1958년 8월 22일 부임).[31]
장면 내각은 미국일변도에서 벗어난 자유진영과의 결속을 약속하며 한독관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독일과는 우선적으로 우호통상항해조약 교섭을 추진하였다.[33] 1961년 1월 7일, 10만kw 화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서독 지멘스 맥사의 건설자금 차관제의를 수락하고[34] 1961년 2월 2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수상은 전규홍 서독 대사와의 회견을 통하여 "서독정부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와줄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35] 1961년 3월 18일 한독 기술원조협정(직업학교 설치에 관한 각서교환)이 체결되었다.[36]
5.16 군사정권은 1961년 12월 13일 한·독 차관협정(韓獨借款協定), 1962년 3월 15일 한·독 경제협력의정서, 1963년 2월 14일 한·독 경제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 등을 체결하여 경제협력 관계를 강화했다. 1963년 12월 22일, 123명의 한국 광부 제1진이 서독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하였다.[38]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 대통령의 초청으로 독일을 공식 방문하였는데, 이는 한국의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의 유럽 방문이었다.[39]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 중인 12월 7일에는 한·독 경제협력협정이 체결되어 1억 5,900만 마르크 규모의 차관을 공여(供與)받았다. 1965년에는 MRO차관 1,500만 마르크, 통신시설 확장을 위한 재정차관(財政借款) 1,900만 마르크를 제공받고, 한·독 실무자 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여 양국경제관계의 전반을 협의하였다. 1966년에는 효성물산 나일론사(絲) 공장차관 832만 마르크와 영남화력발전 차관 8,800만 마르크가 도입되었다.
1967년 3월 2일에는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訪韓)하여, 3월 6일 국토통일을 위한 긴밀한 협력, 한국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지원, 독일 기업의 대한투자(對韓投資) 장려, 제2 영남화력 발전소·낙농(酪農) 시범농장·부산 직업학교·괴테회관의 설립 등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7월 동백림 사건이 발생하여 주한 서독대사가 일시귀국하는 등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41] 1970년 2월 18일에는 한·독 광부협정, 5월 15일에는 한·독 문화협정이 체결되고, 다음날 부산 직업훈련소 설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42] 1980년에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광주광역시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취재, 보도하였으며, 이는 김영삼 정부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기록되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로 북한과의 외교관계가 끊겼으나, 통일 이후에도 양국 외교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43] 북한은 2001년 3월 1일에 동독과 다시 수교하였다.[43]
1996년 4월 북한이 비무장 지대 의무 포기를 선언하거나 침범했을 때 독일 정부는 우방 국가들 중 제일 먼저 대북한 경고성명을 발표하였고, 같은 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4자 회담' 제의에 대해서도 즉각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43] 1996년 10월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한 유엔 안보리 의장 및 유럽연합 의장국 성명 발표 시 적극 협력하였다.[43] 1999년 상반기 유럽연합 의장국 수임 시 1999년 3월의 북한 문제와 관련하여 유럽연합 의장국 성명을 채택하고 1999년 5월 동 성명의 유엔안보리 문서를 배포하였다.[43] 2000년 3월 10일 한·독 정상회담에서 독일은 한국의 대북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표명했다.[43] 2000년 4월 11일 독일 외무부는 '6.15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와 개최 환영 성명을 각각 발표하였다.[43]
2000년 9월 6일 유엔 새천년정상회의 시 남북정상회담 및 후속조치 환영 성명의 채택을 지지하였고,[43] 2001년, 2004년, 2008년에 독일 연방하원은 한반도 평화 관련 결의안을 채택하였다.[43] 2005년 2월 10일 독일 정부는 북한의 핵 보유 및 6자 회담 불참 선언과 관련해 북한 측에 유감을 표명하고 6자 회담에 복귀하라고 촉구하는 한편,[43] 2006년 10월 9일 북한 핵실험 후 즉각적 핵무기, 미사일 폐기 및 6자 회담 복귀 촉구 성명을 발표하였다.[43]
2010년 5월 20일 독일 외교부 장관은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비난 성명을 발표하였으며,[43] 2010년 11월 24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한국에 대한 북한의 공격을 강하게 비난하였다고 독일 정부 대변인이 발표하였다.[43]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의 대(對)독일 수출은 107억0218만USD, 독일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43억0489만USD에 달하며, 독일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8위의 수출국, 제6위의 수입국이다.[45]
2012년 12월 20일,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 임명을 축하하며, 공식적인 독일 방문을 요청했다.[4] 2016년 3월 7일, 대한민국 국방부와 독일 연방군은 양국 간의 군사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5]
2023년, 독일과 대한민국은 수교 140주년을 기념했다.[6] 2022년 기준으로 양국 간의 교역 규모는 약 336억 달러로, 2011년 대비 34% 증가했다.[6] 한국은 독일의 세 번째로 큰 아시아 무역 파트너이며, 2022년 양자 무역 규모는 역대 최고치인 337억 달러에 달했다.[6]
2. 1. 조선과 독일의 첫 만남 (1866년~1882년)
1866년 2월,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조선 충청남도 아산만 해미현 조금포(調琴浦)에서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는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으로 이어졌다.[1] 1870년 5월에는 도쿄 주재 독일 대리공사 폰 브란트(Von Brandt)가 부산왜관에서 통상 교섭을 시도했으나, 조선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인해 실패했다.[1]2. 2. 조독 수호 통상 조약 체결과 초기 교류 (1883년~1910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성사되자 독일측은 청의 도움을 받아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수립코자 하였다. 주청공사로 전근된 폰 브란트와 주톈진 독일영사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주요코하마 독일총영사 에드워드 잡페(Edward Zappe)의 노력 속에 1883년 11월 26일 조독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1] 조선과 독일 제국이 외교관계를 처음 맺은것이 바로 이 조약에 의해서였다.[1] 1883년 11월 28일 독일 총영사관이 서울에 개설되고 젬부쉬(Zembsch)가 초대 주한독일총영사로 임명되었으며 미리 와있던 부들러 부영사와 청국 재상 이홍장에 의해 조선왕국 외무협판으로 임명된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등은 한반도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2023년 현재 이로부터 수교 140주년을 앞두고 있다.1898년 7월 28일에는 독일 왕자 하인리히가 10일간의 일정으로 방한을 하였다. 이에 1901년 3월 민철훈 특명전권공사가 영국,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면서 방독을 겸하였다.[21] 한편, 1898년에는 독일인 프란츠 에카르트가 내한하여 최초로 양악을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의 교류는 경술국치(1910년)로 단절되고 말았다.
2. 3.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0년~1945년)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된 후, 독일 제국과 조선 간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1]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나치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2. 4. 해방 이후 대한민국과 서독의 관계 재개 (1945년~1990년)
1955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와 서독 정부가 양국을 상호 승인함으로써 양국간 외교관계가 재개되었다.[24][25] 한국 전쟁 당시 서독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구호계획에 따라 47,619달러를 기부하고, 미국과 '한국에서의 독일 적십자병원에 의한 원조에 관한 협정(1954년 2월 12일)'을 체결하여 부산에 야전병원을 설립하였다.[22] 1954년 10월 1일 한국은 독일 레마겐에 이한호[23]를 파견해 주독 총영사관을 개설하고자 하였으나, 독일은 이를 거부하고 한국무역대표단(Koreanische Handelsvertretung)으로 승인했다(1955년 1월 22일).[22]독일은 1956년 봄 영사 인가증(領事認可證)을 발급하고 6월 5일에 주한독일 총영사를 임명하였으며,[26] 그해 10월 한국 서울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28] 1957년 3월 5일, 양국은 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다.[30] 1957년 6월 5일, 주미 대사 양유찬은 친선사절로서 서독을 방문하여 콘라트 아데나워와 회담하고 조만간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29] 1958년 8월 1일, 공사관은 대사관으로 승격되었고,[30] 같은 날 주독일 대사관이 본에 개설되었다. 한국은 초대 주서독 대사에 군인 출신으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손원일을 임명하였다(1958년 8월 22일 부임).[31]
장면 내각은 미국일변도에서 벗어난 자유진영과의 결속을 약속하며 한독관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독일과는 우선적으로 우호통상항해조약 교섭을 추진하였다.[33] 1961년 1월 7일, 10만kw 화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서독 지멘스 맥사의 건설자금 차관제의를 수락하고[34] 1961년 2월 2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수상은 전규홍 서독 대사와의 회견을 통하여 "서독정부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와줄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35] 1961년 3월 18일 한독 기술원조협정(직업학교 설치에 관한 각서교환)이 체결되었다.[36]
5.16 군사정권은 1961년 12월 13일 한·독 차관협정(韓獨借款協定), 1962년 3월 15일 한·독 경제협력의정서, 1963년 2월 14일 한·독 경제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 등을 체결하여 경제협력 관계를 강화했다. 1963년 12월 22일, 123명의 한국 광부 제1진이 서독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하였다.[38]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 대통령의 초청으로 독일을 공식 방문하였는데, 이는 한국의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의 유럽 방문이었다.[39]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 중인 12월 7일에는 한·독 경제협력협정이 체결되어 1억 5,900만 마르크 규모의 차관을 공여(供與)받았다. 1965년에는 MRO차관 1,500만 마르크, 통신시설 확장을 위한 재정차관(財政借款) 1,900만 마르크를 제공받고, 한·독 실무자 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여 양국경제관계의 전반을 협의하였다. 1966년에는 효성물산 나일론사(絲) 공장차관 832만 마르크와 영남화력발전 차관 8,800만 마르크가 도입되었다.
1967년 3월 2일에는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訪韓)하여, 3월 6일 국토통일을 위한 긴밀한 협력, 한국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지원, 독일 기업의 대한투자(對韓投資) 장려, 제2 영남화력 발전소·낙농(酪農) 시범농장·부산 직업학교·괴테회관의 설립 등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7월 동백림 사건이 발생하여 주한 서독대사가 일시귀국하는 등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41] 1970년 2월 18일에는 한·독 광부협정, 5월 15일에는 한·독 문화협정이 체결되고, 다음날 부산 직업훈련소 설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42] 1980년에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광주광역시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취재, 보도하였으며, 이는 김영삼 정부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기록되었다.
2. 5. 독일 통일 이후 양국 관계 (1990년~현재)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로 북한과의 외교관계가 끊겼으나, 통일 이후에도 양국 외교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43] 북한은 2001년 3월 1일에 동독과 다시 수교하였다.[43]1996년 4월 북한이 비무장 지대 의무 포기를 선언하거나 침범했을 때 독일 정부는 우방 국가들 중 제일 먼저 대북한 경고성명을 발표하였고, 같은 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4자 회담' 제의에 대해서도 즉각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43] 1996년 10월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한 유엔 안보리 의장 및 유럽연합 의장국 성명 발표 시 적극 협력하였다.[43] 1999년 상반기 유럽연합 의장국 수임 시 1999년 3월의 북한 문제와 관련하여 유럽연합 의장국 성명을 채택하고 1999년 5월 동 성명의 유엔안보리 문서를 배포하였다.[43] 2000년 3월 10일 한·독 정상회담에서 독일은 한국의 대북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표명했다.[43] 2000년 4월 11일 독일 외무부는 '6.15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와 개최 환영 성명을 각각 발표하였다.[43]
2000년 9월 6일 유엔 새천년정상회의 시 남북정상회담 및 후속조치 환영 성명의 채택을 지지하였고,[43] 2001년, 2004년, 2008년에 독일 연방하원은 한반도 평화 관련 결의안을 채택하였다.[43] 2005년 2월 10일 독일 정부는 북한의 핵 보유 및 6자 회담 불참 선언과 관련해 북한 측에 유감을 표명하고 6자 회담에 복귀하라고 촉구하는 한편,[43] 2006년 10월 9일 북한 핵실험 후 즉각적 핵무기, 미사일 폐기 및 6자 회담 복귀 촉구 성명을 발표하였다.[43]
2010년 5월 20일 독일 외교부 장관은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비난 성명을 발표하였으며,[43] 2010년 11월 24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한국에 대한 북한의 공격을 강하게 비난하였다고 독일 정부 대변인이 발표하였다.[43]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의 대(對)독일 수출은 107억0218만USD, 독일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43억0489만USD에 달하며, 독일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8위의 수출국, 제6위의 수입국이다.[45]
2012년 12월 20일,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 임명을 축하하며, 공식적인 독일 방문을 요청했다.[4] 2016년 3월 7일, 대한민국 국방부와 독일 연방군은 양국 간의 군사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5]
2023년, 독일과 대한민국은 수교 140주년을 기념했다.[6] 2022년 기준으로 양국 간의 교역 규모는 약 336억 달러로, 2011년 대비 34% 증가했다.[6] 한국은 독일의 세 번째로 큰 아시아 무역 파트너이며, 2022년 양자 무역 규모는 역대 최고치인 337억 달러에 달했다.[6]
3. 주요 인사 교류
'''독일의 대한민국 고위급 방문'''[8][9][10][11][12][13][14][15]
- 헬무트 콜 총리 (1993)
-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1998)
-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2000)
-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 (2002)
-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 (2010)
- 앙겔라 메르켈 총리 (2010 & 2021)
-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 (2015)
-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 (2018 & 2022)
- 올라프 숄츠 총리 (2023)
'''대한민국의 독일 고위급 방문''' [16][17][18][19][20]
3. 1. 대한민국 인사의 독일 방문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독일 방문이 이어졌다.[16] 1986년 4월에는 전두환 대통령이,[17] 1989년 11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1995년 3월에는 김영삼 대통령이,[18] 2000년 3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여 양국 간 협력 관계를 증진시켰다.[19]2005년 4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고,[20] 2014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 7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대통령 외에도 여러 주요 인사들이 독일을 방문했다. 1984년 7월 이원경 외무장관, 1986년 6월 박동진 국토통일원장관, 1987년 7월 최호중 외무장관, 1990년 1월 이홍구 통일원장관, 1991년 10월 김대중 민주당 대표, 1992년 6월 최각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1992년 9월 최영철 부총리겸 통일원장관, 1993년 10월 김시중 과기처장관, 1994년 5월 이병태 국방부장관, 1994년 12월 이홍구 부총리겸 통일원장관, 1995년 6월 김용준 헌법재판소장, 1995년 6월 김명호 한국은행총재, 1995년 9월 이한동 국회부의장, 1996년 8월 유종하 외무장관, 1998년 9월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 1998년 10월 홍순영 외무장관, 1999년 10월 박준규 국회의장, 2001년 5월 홍사덕 국회부의장, 2001년 7월 김명자 환경부장관, 2002년 11월 박관용 국회의장, 2002년 11월 최성홍 외무장관, 2003년 11월 유영관 외무장관, 2005년 10월 이해찬 국무총리, 2006년 6월 한명숙 국무총리, 2006년 9월 노준형 정보통신부장관, 2007년 10월 송민순 외교장관, 2009년 4월 한승수 국무총리 등이 독일을 방문했다.
3. 2. 독일 인사의 대한민국 방문
1957년 10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이 대한민국을 방문한 이래, 여러 독일 인사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1983년 11월과 1988년 2월에는 발터 셸 전 대통령이, 1985년 7월과 1988년 7월에는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이 방한했다.1991년 2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1993년 3월 헬무트 콜 총리, 1998년 9월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2000년 10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2002년 6월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 2010년 2월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이 방한했다. 2010년 11월에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2015년 10월에는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이, 2018년 2월과 2022년에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한국을 찾았다. 2018년 7월에는 하이코 마스 외교장관이 방한했다.
1990년대 이후, 클라우스 킹켈(1993년 7월, 1997년 10월), Volker Rühe (:en:Volker Rühe) 국방장관(1993년 9월), Boetsch 체신부장관(1995년 8월), Rexrodt (:en:Günter Rexrodt) 경제장관(1996년 2월), Waigel (:en:Theodor Waigel) 재무장관(1998년 2월), Limbach (:en:Jutta Limbach) 헌법재판소장(1998년 8월),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1999년 10월), Pfueger 하원 EU위원장(1999년 10월), Fuchs 하원 부의장(1999년 11월),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2000년 11월), Vollmer (:en:Antje Vollmer) 국회부의장(2004년 4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외교장관(2006년 2월, 2014년 10월), Schavan (:en:Annette Schavan) 교육연구부장관(2006년 11월), Jung 국방장관(2007년 4월), Lammert (:en:Norbert Lammert) 하원의장(2008년 8월) 등 다양한 독일 고위 인사들의 방한이 이어졌다.
4. 주요 협정
1961년 대한민국과 독일은 기술원조협정과 차관협정을 체결했다. 1963년 12월에는 경제협력협정을, 1965년 4월에는 무역협정을 맺었다. 1967년 12월과 1989년 1월에는 각각 기술협력협정과 기술협력협정 시행약정을 체결했다.
1972년 8월에는 문화협정과 행정협정이, 1974년 1월에는 사증면제협정이 체결되었다. 1986년에는 과학기술협력협정과 원자력협력협정이 체결되어 과학기술 분야 협력이 강화되었다.
1998년 7월에는 항공운수협정이, 2003년 1월에는 사회보장협정이 체결되었다. 2002년 10월에는 이중과세방지협정이 개정되었고, 2005년 1월에는 입국 및 체류에 관한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2016년에는 대한민국 국방부와 독일 연방군 간 양해 각서 체결을 통해 군사 협력이 강화되었다.
5. 교육 교류
독일의 일부 고등학교는 한국어를 정규 선택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7] 2022년 기준, 대한민국은 독일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학 대상 국가 중 4위였다.[6]
6. 역대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
초대 손원일 대사가 1958년 8월 22일에 부임한 이후,[46] 2018년 1월 11일에 정범구 대사가 부임하기까지[46] 총 23명의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가 임명되었다.
대수 | 이름 | 임기 |
---|---|---|
1 | 손원일 | 1958년 8월 22일 부임 |
2 | 전규홍 | 1960년 11월 21일 부임 |
3 | 신응균 | 1961년 7월 4일 부임 |
4 | 최덕신 | 1963년 8월 27일 부임[47] |
5 | 김영주(金永周)[48] | 1967년 9월 9일 부임 |
6 | 진필식 | 1974년 3월 8일 부임 |
7 | 이창희 | 1975년 9월 17일 부임 |
8 | 이문용 | 1980년 9월 2일 부임 |
9 | 송광정 | 1981년 11월 26일 부임 |
10 | 정순근 | 1984년 5월 9일 부임 |
11 | 신정섭 | 1987년 5월 13일 부임 |
12 | 신동원 | 1990년 3월 5일 부임 |
13 | 김태지 | 1993년 5월 4일 부임 |
14 | 홍순영 | 1995년 2월 4일 부임 |
15 | 이기주 | 1998년 5월 7일 부임 |
16 | 황원탁 | 2000년 10월 24일 부임 |
17 | 권영민 | 2003년 6월 18일 부임 |
18 | 이수혁 | 2005년 6월 15일 부임 |
19 | 최정일 | 2007년 3월 26일 부임 |
20 | 문태영 | 2010년 3월 3일 부임 |
21 | 김재신 | 2012년 9월 4일 부임 |
22 | 이경수 | 2015년 4월 20일 부임 |
23 | 정범구 | 2018년 1월 11일 부임 |
7. 교통
대한민국과 독일 간에는 항공 노선이 운항되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서울(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루프트한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서울(인천)으로 가는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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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이 대통령, 독일 이석연·폴란드 박지원·베트남 이인기·호주 김진표 특사 파견
독일 총리 이 대통령 당선 축하 메시지 “중대한 시기 행운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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