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울리히 루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한스울리히 루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 슈투카 조종사로, 519대의 소련 전차를 파괴하고 2,530번의 출격 임무를 수행한 공로로 황금 백엽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전쟁 후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사업가로 활동했으며, 나치 전범 구제 조직을 설립하는 등 논란의 중심에 섰다. 루델은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특히 그의 회고록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뛰어난 군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과의 관계와 관련된 그의 정치적 성향은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루프트바페 조종사 - 라이너 바르첼
라이너 바르첼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인으로, 기민련 의장, 전독일 관계 장관, 기민/기사련 원내대표, 연방 하원 의장을 역임했으며 1972년 총리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 후 플리크 사건 연루 의혹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 루프트바페 조종사 - 하나 라이치
하나 라이치는 독일의 여성 비행사로, 글라이더 비행과 헬리콥터 조종 분야에서 기록을 세우고 나치 독일 시기 루프트바페 시험 센터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항공기 시험 비행에 참여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자살 공격 임무 부대 창립 멤버로 활동하고 종전 후에는 글라이딩을 재개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다. -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사람 -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는 독일의 화학자로, 고압 및 고온 화학 공정 기술 개발, 특히 베르기우스법을 통한 합성 연료 생산과 목재 가수분해를 통한 산업용 설탕 생산 기술 개발에 기여하여 193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지만, 후기 연구의 어려움과 전쟁 후 상황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사람 - 프리츠 티센
프리츠 티센은 티센 가문의 철강 산업가이자 정치인으로, 나치당을 후원했으나 후에 반발하여 망명했고, 전후에는 탈나치화 재판을 받았으며, 그의 유산은 프리츠 티센 재단을 통해 사회에 기여했다. - 공군 장교 - 린리궈
중국 공산당 간부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는 문화대혁명 중 공군에서 급속히 승진했으나 마오쩌둥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린뱌오 일가와 함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는 중국 정부 발표와는 달리, 그의 역할과 사건 진상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 공군 장교 - 노금석
노금석은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로, MiG-15 전투기를 몰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여 미국으로 이주 후 케네스 H. 로우로 개명하고 항공 기술자 및 항공우주공학 교수로 활동하며 냉전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스울리히 루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별칭 | 소비에트 연방 인민 최대의 적 혼자서 1개 사단 규모의 힘을 가진 남자 하늘의 마왕 슈투카 대좌 루델 각하 동부 전선의 독수리 |
출생일 | 1916년 7월 2일 |
사망일 | 1982년 12월 18일 |
출생지 | 콘라츠발다우, 독일 제국 (현재의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 |
사망지 | 로젠하임, 서독 |
묘소 | 도른하우젠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공군(Luftwaffe) |
복무 기간 | 1936년 – 1945년 |
최종 계급 | 대령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전투/전쟁 | 폴란드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레닌그라드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독소 전쟁 르제프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타르투 공세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오데르-나이세 전투 바우첸 전투 |
부대 | 제3 급강하 폭격 비행단 제2 급강하 폭격 비행단 제2 지상 공격 비행단 제103 지상 공격 비행단 제168 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121 장거리 정찰 비행대 제121 군 제2 군구 정찰 대대 |
지휘 | SG 2 |
수상 | |
훈장 | 황금 곡엽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 |
정치 활동 및 기타 | |
이후 활동 | 나치 전범 구호 단체 설립 네오나치 활동가 극단주의 독일 제국당 선거 후보 |
기타 이력 | 실업가 로비스트 독일 제국당 당원 |
2. 생애
한스 울리히 루델은 1916년 7월 2일 프로이센 왕국 니더슐레지엔의 콘라츠발다우(현재 폴란드 콘라트스발다우)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14] 어린 시절부터 하늘을 나는 것에 흥미를 느껴 파일럿을 꿈꿨다.[14] 1936년 아비투어를 마치고 국가노동봉사를 거쳐 독일 공군에 입대했다.[15]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폴란드 침공에서 항공 관측병으로 참전했다.[1] 1941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로 전선에 투입, ''마라트'' 격침,[3][4][5] 스탈린그라드 전투,[8] 쿠르스크 전투[11]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하며 수많은 전차와 함선을 파괴했다.
황금 백엽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비롯한 다수의 훈장을 받았으며,[16] 1945년 2월 소련군의 공격으로 다리를 잃었으나,[11] 의족을 착용하고 다시 전선에 복귀하여 종전까지 활약했다.[22]
전쟁 후,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후안 페론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나치 전범들을 지원했다.[4] 독일 제국당 등 네오나치 활동에도 참여했다.[20] 1982년 12월 18일 로젠하임에서 사망하여 돌른하우젠에 안장되었다.[35]
2. 1. 초기 생애 (탄생 ~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루델은 1916년 7월 2일 프로이센 왕국 동부 니더슐레지엔의 콘라츠발다우(Konradswaldau, 현재 폴란드 콘라트스발다우)에서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 요하네스 루델과 어머니 마르타 루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잉게보르크와 요한나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14] 8살 무렵 어머니에게 받은 낙하산 장난감으로 놀면서 하늘을 나는 것에 흥미를 느껴 파일럿을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14]어린 시절 루델은 열성적인 스포츠맨이었으며, 라우반에 있는 인문학 중심의 김나지움에 다녔다.[14] 1933년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했다. 1936년 아비투어를 마치고 의무적인 국가노동봉사 (RAD)에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사관 후보생으로서 베를린 근교 빌트파르크 베르터의 독일 공군 학교에 100배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다.[15] 노동 봉사 후, 독일 공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전투기 조종사를 희망했지만, 졸업 전에 "졸업생 전원이 폭격대에 편입될 것이다"라는 소문과, 졸업 직전에 발트 해 연안의 대공포 학교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괴링의 "우리는 신설된 슈투카 폭격대를 위해 많은 젊은 장교들을 필요로 한다"라는 연설을 듣고 소문을 완전히 믿어, 급강하 폭격대에 자원했다.[15] 실제로는 졸업생 대부분이 희망했던 전투기대에 배속되었지만, 1938년 6월 그라츠의 제168 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I 비행대(I./Stuka-Geschwader 168, I./StG 168)에 배속되었다.[15] 하지만, 정찰대로 전속되어, 정찰기 조종사로서 힐데스하임의 공군 정찰 훈련 학교에서 정찰 사진 촬영 항법 훈련을 받았고, 1939년 1월 제121 장거리 정찰 비행대(Fernaufklärungsgruppe 121, FAGr 121)로 전속되었다.[15]
2. 2.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은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다. 루델은 항공 관측병으로서 폴란드 상공에서 장거리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1] 1940년에는 비엔나 주둔 제43 항공병 훈련 연대의 부관으로 복무했다.[1]1941년 초, 루델은 슈투카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2] 이후 독소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1941년 6월, 점령된 폴란드로 이동한 제1 슈투르츠캄프게슈와데르 2 (StG 2)에 배치되었다.[3] 1941년 9월 21일, 루델은 발트 함대 소속 소련 전함 ''마라트'' 공격에 참여했다.[3] 1941년 9월 23일, ''마라트''는 함교 앞쪽에 1000kg 폭탄을 맞아 정박 상태에서 침몰했다. 이로 인해 함교와 선체 앞부분이 파괴되는 전방 탄약고 폭발이 발생, 326명이 사망했고 배는 수심 11m의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4] 이 침몰은 루델의 단독 행위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루델이 투하한 두 발의 폭탄 중 하나에 의한 것이었다.[5][3] 이후 루델의 부대는 소련 수도 점령을 위한 중앙 집단군의 태풍 작전에 참여했다.[6]

1941년 10월부터 루델의 사수였던 에르빈 헨첼은 2년 반 동안 루델과 함께 복무하며 철십자 기사 훈장을 받았다. 헨첼은 루델과 함께 1,400번의 출격을 완수했다.[1]
1942년 초, 루델은 휴가 중 결혼했고,[7] 그 해 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여했다.[8] 1941년 5월부터 1942년 1월까지 루델은 500번의 임무를 수행했다.[3] 1943년 2월, 1,000번째 전투 임무를 수행하여 국민 영웅이 되었다.[3] 이후 Ju 87 G를 대전차 역할로 사용하는 실험에 참여했고,[3] 대전차 부대는 소련의 케르치-엘티겐 작전에 투입되었다. 온보드 건 카메라 영상은 Die Deutsche Wochenschau에 사용되었다.[9] 1943년 4월, 루델은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히틀러로부터 직접 받았다.[10]
루델은 쿠르스크 전투에도 참여했다.[11] 1943년 7월 5일 독일 공세 첫날, 루델은 처음 실전에 투입된 Ju-87G를 조종했다. Ju-87G는 날개 아래 37mm ''보르트카노네'' BK 3,7 포 2개를 장착한 대전차 항공기였으며, 이는 루델의 아이디어였다.[12][13] 1943년 7월 12일, 루델은 하루에 소련 전차 12대를 격파했다고 주장했다.[11] 페르디난트 쇠르너는 "루델 한 명이 사단 전체를 대체한다"고 언급했다. 느린 stukade는 취약하여 높은 사상자를 냈지만, 루델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14] 1943년 10월, 루델은 100번째 전차 파괴를 기록했고, 11월 25일 백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총 160개만 수여).[15][16]
1944년 2월 22일, 루델은 III. ''그룹''의 ''그루펜코만도어''로 임명되었다.[17] 3월 20일, 소련군 후방에 불시착한 루델은 사수 에르빈 헨첼과 함께 독일군 진영으로 향했으나, 헨첼은 드네스트르 강을 건너다 익사했다.[11][18] 이후 에른스트 가데르만이 루델의 새로운 무선 조작수 겸 공중 사수로 합류했다.[19] 1944년 3월 29일, 루델은 백엽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이는 이 훈장을 받은 국방군의 열 번째 인물이었다.[20]

1944년 9월 1일, 루델은 ''오버스트로이테난트''로 진급했고, 10월 1일 SG 2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21] 1944년 12월 22일, 2,400번째 전투 임무를 완수했고, 다음 날 463번째 전차 파괴를 보고했다. 1944년 12월 29일, ''오버스트'' (대령)로 진급, 황금 백엽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이 훈장은 나치 독일 패배 4개월 전인 1945년 1월 1일에 히틀러에게서 받았다.[21]
1945년 2월 8일, 루델은 오른쪽 발에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무선 조작자의 지시를 받으며 독일군 진영에 착륙했다. 루델의 다리는 무릎 아래에서 절단되었다.[11] 1945년 3월 25일, 루델은 다시 비행을 시작, 종전까지 전차 26대를 추가 파괴했다고 주장했다.[22] 루델은 전쟁 기간 동안 519대의 소련 전차를 파괴했으며,[13] 2,530번의 임무를 수행했다.[23] 1945년 4월 19일, 히틀러 생일 전날, 루델은 총통 벙커에서 히틀러를 만났다.[24] 1945년 5월 8일, 프라하 근처 비행장에서 서쪽으로 탈출, 미군 통제 구역에 착륙하여 자수했다.[25][26] 미국은 루델을 소련에 인도하지 않았다.[1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위로 프렌츠라우 제121군 제2군 지역 정찰 대대에 소속되어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다. 1939년 10월 11일, 2급 철십자장을 받았다. 1940년 5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지만, 빈의 슈테멜스 훈련 항공 부대 부관으로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프랑스 전역이 끝날 무렵 캉의 제3 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I 비행 대대(I./Stuka-Geschwader 3, I./StG 3)로 전속되었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 중에는 급강하 폭격기 파일럿 전환 훈련 중이어서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기량이 미숙한 파일럿으로 간주되어 그라츠에서 급강하 폭격 훈련을 계속했다. 1941년 4월 발칸 침공과 크레타섬 침공 당시에도 지상 대기 예비 파일럿이었다. 저서 『급강하 폭격』에서 "출격 명령에 엔진이 굉음을 낼 때마다 주먹을 귀에 쑤셔 넣고 싶어진다. 슈투카 부대는 크레타에서 역사를 만들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분함에 남자 울음을 울었다"라고 언급했다.
루델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1941년 6월 23일 급강하 폭격대원으로 첫 전투를 경험했고, 1941년 7월 18일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후 급강하 폭격기 융커스 Ju 87 슈투카를 몰고 종전까지 동부 전선(독소전)에서 싸웠다. 루델은 여러 차례 격추되어 포로가 될 뻔했으며(당시 소련군에 의해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휴가를 줄이고 출격 횟수를 늘리기 위해 상사에게 간청하며 서류를 위조하기도 했다. 격추되어 만신창이가 된 채 기지로 돌아와 그대로 다시 출격하려 한 일화도 있다. 1945년 2월 8일, 루델은 소련군 40mm 고사 기관포에 오른쪽 다리를 잃었으나(이때 후방 사수 가델만이 "정신 놓을 틈이 있으면 조종간을 잡아당겨!"라고 소리쳤다), 치료 기간 동안 소련군을 공격할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부상 완치 전 병원을 탈출, 맞춤 제작 의족을 착용하고 전선에 복귀했다.
루델은 국방군 장병 중 유일하게 "금강석 검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16] 최종 계급은 대령이며, 부하들에게 "슈투카 대령"으로 불렸다. 아돌프 히틀러는 루델의 죽음이 적의 선전에 이용될 것을 우려, 여러 차례 지상 근무 전환을 요청했지만, 루델은 모두 거절했다.[17] 그는 훈장 수여 조건으로 지상 근무를 요청받지 않을 것을 내걸었다.
독일 패전 후 미국군에 항복했으며,[18] 소련군에 인도되지 않고 무사히 종전을 맞이했다.[19]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루델은 수감되어 있다가 1946년 4월에 석방되어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1] 1948년, 오스트리아의 칠레르탈을 거쳐 이탈리아를 경유하는 쥐 경로를 통해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다.[2][3] 로마에서 남티롤 밀수업자들과 오스트리아 주교 알로이스 후달의 도움으로 "에밀리오 마이어"라는 가명으로 위조된 적십자 여권을 구입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비행하여 1948년 6월 8일에 도착했다.[2][3]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후,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과 파라과이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의 가까운 친구이자 측근이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나치 전범들을 위한 구호 단체인 "Kameradenwerk"(동지 기구)를 설립했다.[4] "Kameradenwerk"는 루돌프 헤스와 카를 되니츠를 포함한 유럽에 수감된 나치 범죄자들에게 식량 꾸러미를 보내고 변호사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지원했다.[5] 아르헨티나에서 루델은 요제프 멩겔레와 알게 되었고,[6] 멩겔레를 나치 지지자 볼프강 게르하르트에게 소개하여 브라질로 이주시키는 것을 도왔다.[7][8][9] 1957년, 루델과 멩겔레는 함께 칠레로 가서 이동식 가스실의 발명가인 발터 라우프를 만났다.[10]
아르헨티나에서 루델은 코르도바 시에서 약 36km 떨어진 비야 카를로스 파스에 살면서 집을 임대하고 벽돌 공장을 운영했다.[11] 그곳에서 루델은 자신의 전쟁 회고록인 ''Trotzdem''(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썼다.[12] 이 책은 1949년 11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뒤러-베르라크에서 출판되었다.[13] 루델의 책 출판 허용 여부에 대해 서독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는 알려진 나치였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서 나치 정책을 지지했다. 이 책은 이후 미국에서 ''Stuka Pilot''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출판되었으며, 독일의 소련 침공을 지지했다.[14] 1951년, 그는 ''Dolchstoß oder Legende?''(배신 또는 전설?)를 출판했는데, 그 안에서 그는 "독일의 소련과의 전쟁은 방어 전쟁이었고", "전 세계를 위한 십자군"이라고 주장했다.[15]
페론의 도움으로 루델은 브라질 군대와 수익성 좋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또한 볼리비아 정권,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및 파라과이의 스트로에스너를 위한 군사 고문 및 무기 중개인으로 활동했다.[16] 1955년 해방 혁명 이후, 루델은 아르헨티나를 떠나 파라과이로 이주해야 했다. 그 후 수년간 남아메리카에서 루델은 잘츠기터 AG, 도르니에 항공기 제작소, 포케불프, 메서슈미트, 지멘스 및 독일 컨설팅 엔지니어링 회사인 라메이어 인터내셔널을 포함한 여러 독일 회사의 해외 대표로 자주 활동했다.[17]
1960년대 초, 루델은 클라우스 바르비와 오토 스코르체니와 함께 "라 에스트레야"(별)라는 회사를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라틴 아메리카로 도망친 많은 전 SS 장교들을 고용했다.[18][19]
루델은 1953년 서독으로 돌아와 네오나치 민족주의 정당인 독일 제국당 (''Deutsche Reichspartei'')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20] 1953년 서독 연방 선거에서 루델은 DRP의 최고 후보였지만, ''분데스탁''에 당선되지 못했다.[21] 1977년, 그는 게르하르트 프라이가 설립한 민족주의 정당인 독일 인민 연합의 대변인이 되었다.[22]
1976년 10월, 루델은 루델 스캔들 (''Rudel-Affäre'')을 일으켰다.[23] 독일 제51정찰비행단은 "임멜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신 부대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자를 포함한 부대원들을 위한 재회를 열었다. 연방 국방부의 국무장관 헤르만 슈미트는 이 행사를 승인했다. 루델이 독일 공군의 프라이부르크 근처 브렘가르텐 공군 기지에서 나치 선전을 펼칠 것을 우려한 슈미트는 회의가 공군 기지에서 열릴 수 없도록 명령했다. 루델은 회의에 참석하여 자신의 책에 서명하고 몇몇 자필 서명을 해줬지만, 어떤 정치적 발언도 삼갔다.[24]
일상적인 언론 행사에서, 슈미트로부터 브리핑을 받은 기자들은 발터 크루핀스키와 카를 하인츠 프랑케에게 루델의 참석에 대해 질문했다. 이 인터뷰에서 장군들은 나치이자 신나치 지지자였던 루델의 과거를 헤르베르트 베너의 경력과 비교했다. 이러한 발언이 공개되자 연방 국방부 장관 게오르크 레버는 장군들의 조기 퇴직을 명령했다.[24] 루델 스캔들은 이후 군사 전통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고, 연방 국방부 장관 한스 아펠은 1982년 9월 20일 "전통 이해 및 함양을 위한 지침"을 도입하여 이 논의를 종결시켰다.[25]
1978년 월드컵이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동안, 루델은 아스코칭가에 있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훈련 캠프를 방문했다. 독일 언론은 독일 축구 협회를 비판했고, 루델의 방문을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이후 아르헨티나를 지배한 군사 독재에 대한 동정심으로 간주했다. 1958년 FIFA 월드컵이 스웨덴에서 열리는 동안, 그는 1958년 6월 8일 말뫼에서 독일 팀을 방문했다.[26]
1948년 6월, 루델은 친구이자 전 동료인 헤르베르트 바우어 소령과 에른스트 니르만 대위와 함께 남미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28] 1950년에 루델은 첫 번째 부인 우르술라와 이혼했다. 데어 슈피겔은 이혼의 이유 중 하나로, 루델의 훈장 중 일부를 미국의 수집가에게 판매한 것을 들었고, 또한 아르헨티나로의 이주를 거부한 적도 있다고 했다.[29]
아르헨티나 도착 후 루델은 아르헨티나 항공기 산업의 고문으로 임명되어, 코르도바의 항공 기술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후안 페론, 에바 페론,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의 친구가 되었다. 양 독재자 사이를 중재하고, 양국의 경제 개발 계획에도 관여했다. 또한, 초창기 아르헨티나 공군의 사관학교에서, 루델은 교관으로서 간부 후보생에게 조종법이나 저공 비행에 의한 항공 전투 기술을 가르쳤다.[23]
아르헨티나에서 루델은 나치 전범 구제 조직 "Kameradenwerk"를 설립했다.[26] 이 조직은 루돌프 헤스나 카를 되니츠를 포함한 유럽에서 투옥된 나치 범죄자들에게도, 아르헨티나에서 식량 소포를 보내거나, 때로는 소송 비용을 지불하거나 하여 지원했다.[27] 또한, 아르헨티나에서 루델은 요제프 멩겔레와 알게 되었다. 1957년에는, 루델과 멩겔레는 발터 라우프를 만나기 위해 함께 칠레로 여행했다.[27] 1960년에 루델은 빌렘 사센과 함께, 멩겔레의 브라질 이주를 지원했다.[28][29]
전후 루델은 실업가와 스포츠 애호가로 활동했다. 알파인 스키에서는 남미 선수권에서 우승하는 등 했다. 등산도 즐겨, 남미에서 안데스 산맥의 아콩카과 (1951년12월 31일)와 유야이야코 (세 번)에 올랐다.
루델은 1949년 11월에 ''Trotzdem''를 출판했다. 1953년에 ''Wir Frontsoldaten zur Wiederaufrüstung, Dürer-Verlag'', ''Dolchstoß oder Legende?'' 에서는 히틀러 암살 계획을 비난하고, 대전은 독일의 생존권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옹호하고 있다.
1953년에 서독으로 귀국하여, 독일 제국당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30] 같은 해의 독일 연방 의회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연방 의원으로는 선출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의 쿠프슈타인으로 이주했다. 1965년, 루델은 우르술라와 재혼하여, 아들 크리스토프를 낳았다. 1970년4월 26일, 루델은 뇌졸중을 일으켰으나 회복했다. 1976년에는, 루델이 초청된 독일 연방군의 집회에서의 사건 (루델 스캔들)이 있었다. 1976년 10월에는, 미국의 페어차일드사가 루델을 대전차 전투 세미나에 초청했다.[33]

1977년에 두 번째 이혼을 한 후, 루델은 Ursula Bassfeld와 재혼했다.[36] 1982년 12월 18일에 로젠하임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식 때에는 독일 연방 공군의 F-4 전투기 2대와 F-104 전투기 1대가 주변을 저공 비행했다는 목격 정보가 있었다. 또한, 네오 나치도 몰려들어, 나치식 경례가 행해지는 등 소란스러워졌다.[35] 유해는 1982년12월 22일에 돌른하우젠에 매장되었다.
3. 루델의 파트너
Ju 87는 복좌기로, 후석은 기총수석으로 되어 있다. 저서 '급강하 폭격'에 따르면 루델의 Ju 87에 탑승한 기총수 중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모두 5명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후방 총좌는 제2급강하 폭격 항공단에 소속된 이후의 인물이다. 그 이전 부대에서는 전속이 잦았기 때문에 짝이라고 할 수 있는 기총수를 가질 기회가 없었고, 실질적으로 이 5명이 (로트만은 엄밀히 말하면 다르지만) "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름 | 설명 |
---|---|
알프레트 샤르노프스키 (Alfred Scharnowski) | 1941년 9월 23일 전함 마라트 공격 당시 탑승했던 사수였다. 루델 소속 대대에서는 최연소였지만 매우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동료들 사이에서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소련군 키로프급 순양함 "키로프" 공격 명령이 내려졌을 때, 출격 준비 중 대대장기가 고장나 루델의 탑승기를 대신 내주게 되었다. 대대장 스테른 대위는 루델의 은사이기도 했고, 긴급한 상황이었기에 대대장기의 후부 기총을 샤르노프스키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격 중, 두 사람이 탑승한 기체는 방향타에 직격탄을 맞아 조종 불능 상태가 되었고, 키로프에 자폭 공격을 시도했으나 추락하여 전사했다. 최종 계급은 하사였다. |
에르빈 헨셸 (Erwin Hentschel) | 샤르노프스키의 후임 사수였다. 1917년 10월 29일 출생. 독일 페클라브루크 군 니더탈하임 출신. 최종 출격 횟수는 1,480회를 기록했으며(이 숫자는 지상 공격 탑승원 중 루델 다음으로 많은 출격 횟수이다), 루델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했다. 후방 기총으로 소련군 전투기를 격추하고, 기사 철십자장을 수훈하는 등 탁월한 실력으로 루델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현존하는 헨셸과 루델의 사진에서도 그 관계를 엿볼 수 있다. 1944년 3월 20일, 얀폴교 파괴 당시 공격을 받아 불시착한 신참 동료 조종사 2명을 구출하기 위해 착륙했지만, 루델기에 태워 이륙하려다 바퀴가 진흙에 빠져 기체를 버리고 4명이 도주했다. 영하에 가까운 수온의 드네스트르 강을 헤엄쳐 건너던 중 체력이 떨어져 침몰, 루델의 구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헨셸은 익사했고, 루델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39]. 향년 26세. 최종 계급은 병장. |
로트만 (Rothmann) | 헨셸의 후임 사수이다. 풀 네임은 불명이다. 사수가 되었을 당시 계급은 일등 병장이었다. 원래는 Ju 87의 정비병이었으며, 정식 사수는 아니었다. 헨셸이 전사한 1944년 3월 하순은 소련군이 동부 전선 남익의 붕괴를 의도하여 북쪽에서 드네스트르 강을 넘어 루마니아 영내로 쳐들어오는 대규모 공세에 나선 시기였으며, 어느 부대도 출격에 정신이 없어 쉽게 사수를 선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고육지책으로 로트만을 후석에 태운 것으로 보인다. 실전에서는 20여 대의 P-39에 포위당해 침착함을 잃어버려, "Rothmann, schießen! (로트만, 어쨌든 쏴!)"라고 여러 번 루델에게 질책받았다. 경위는 불명확하나(원서에는 이 출격에서 신경질적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기술이 있다), 이후 루델의 후석에서 실전에 참가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제2지상공격항공단(Schlachtgeschwader 2)에 정비병으로 소속되어 있었으며, 1944년 12월의 사진에서는 루델, 가델만과 함께 있는 로트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최종 계급은 불명. |
에른스트 가더만 (Dr. med. Ernst Gadermann) | 로트만의 후임 기총수였다. 출격 횟수는 850회를 넘었으며,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3년 12월 25일 부퍼탈 출생. 1941년 10월 군 의무관으로 제2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III 비행 대대(III./StG2)에 배속되어 당시 중위였던 루델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스포츠를 매우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금방 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일반 병사들과 섞여 루델과 함께 훈련을 받는 가더만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고 한다. 1941년 겨울부터 후부 기총수로 근무하기 시작했지만, 특정 조종사의 전속 기총수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석에서의 뛰어난 기량과, 의사로서 필요한 의료를 제공한 덕분에 모든 조종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1944년 5월, 친한 친구인 루델이 전속 기총수를 잃은 것을 계기로,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었다. 루델이 오른쪽 다리를 잃은 1945년 2월 9일까지 출격을 수행했다. 2월 9일 이후에도 가더만이 기총수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루델이 베를린의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서부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에 머물고 있었으며, 제공권이 장악되어 교통도 마비된 상태라 이동도 어려워, 결국 전쟁 중에 두 사람이 재회하는 일은 없었다. 이후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지만 곧 석방되어 부퍼탈의 자택으로 귀향했다. 전공은 순환기였으며, 격추되어 부상당한 루델에게 응급 처치를 하기도 했다. 1945년 2월 8일 루델이 오른쪽 다리를 잃었을 때는, 의식을 잃은 루델을 불타는 기체에서 끌어내고 지혈을 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다. 최종 계급은 소령. 2급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독일 황금 십자 훈장(1943년 10월 17일), 기사 철십자 훈장(1944년 8월 17일)을 수훈했다. 전후에는 의사로 활동했으며,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의학 교수진의 수석을 맡았다. 1973년 11월 26일 함부르크에서 강연 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 향년 59세. 소련군 에이스 파일럿인 레프 셰스타코프 대령을 후부 기총으로 격추한 인물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셰스타코프가 행방불명된 1944년 3월 13일은 가더만 탑승(1944년 5월) 2개월 전의 일이며, 그 당시에는 헨셸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델의 전기에 따르면, 이 날은 가더만이 탑승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헨셸과 교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
에른스트-아우구스트 니어만 (Ernst-August Niermann) | 가델만의 후임 사수였다. 원래 제2지상 공격 항공단에는 종군 기자로 파견되었지만, 루델의 후석에 임명되기 전부터 이미 여러 차례 출격한 베테랑이었다. 최종 출격 횟수는 600회를 넘었고, 독일 십자 훈장 금장을 수여받았다(1943년 2월 23일). 루델은 그를 "유쾌한 남자"라고 칭했는데, 미군기의 공습을 받았을 때, 방공호에서 뛰쳐나와 본업 못지않은 영상을 찍는 등, 비범한 배짱의 소유자였다. 루델기에는 1945년 3월 31일 후부 사수로 착임했다. 루델의 마지막 출격인 5월 7일에도 후석에 있었으며, 키르히겐에서 루델 등과 함께 미군에 항복했다. 그 후 포로 생활에서도 항상 루델과 함께 있었지만, 일개 군사 보도원이었기 때문에 루델보다 먼저 석방되었다. 전후에는 루델과 아르헨티나로 건너가는 등, 부대 해산 후에도 함께 행동했다. 최종 계급은 대위였다. |
4. 루델의 상관/동료
에른스트-지크프리트 슈테인(Ernst-Siegfried Steende)은 1912년 9월 25일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킬에서 태어났다. 라팔로 조약에 따라 소련에서 항공 훈련을 받았고, 1935년 재군비와 함께 루프트바페에 입대했다. 대 프랑스전에서 중위로 참전했고, 배틀 오브 브리튼에서는 영국 함선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다. 1941년 8월 1일, 제2 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III 비행 대대(III./StG 2) 지휘관으로 취임하면서 루델의 상관이 되었다. 슈테인은 루델에게 급강하 폭격 비결을 가르쳤으나, 1941년 9월 23일 키로프 공격에서 전사했다. 사후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1941년 10월 17일). 루델은 슈테인을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이라 칭하며 존경했다.
프리드리히 베커(Friedrich Becker)는 루델의 동료이자 참모였다. 루델은 베커를 "제III대대원의 어머니와 같은 인물"이라 칭하며,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항상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베커는 1943년 5월 1일 대위로 제2급강하폭격항공단 제III비행대대 대대 부관으로 임명되었고, 1944년 4월 1일 소령이 되었다. 1945년 4월에는 제2지상공격항공단 본부 소속 참모장교로 승진했다. 종전 후, 베커는 소련군과 현지 게릴라의 습격으로 사망했다.[42]
헬무트 피켈(Helmut Fickel)은 루델의 부관이자 료키(2번기) 파일럿이었다. 1921년 11월 27일 독일 튀링겐주 에서 태어났다. 1940년 징집되어 1943년 2월 제2급강하폭격항공단 제III비행대대 제8중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 10월 15일부터 1944년 여름까지 루델의 료키로 500회 이상 출격했다. 1944년 여름, 소련군 전선에 불시착했으나 루델에 의해 구조되었다. 피켈은 3번 격추되었지만 부상당하지 않았고, 그중 2번은 루델에게 구조되었다.[43] 종전까지 800회 이상 출격했고, 1944년 6월 9일 루델에게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5. 평가 및 논란
루델은 사망 후에도 독일 극우 세력, 특히 독일 국민 연합(DVU)과 그 지도자 게르하르트 프라이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높았다. 프라이와 DVU는 루델의 추도식에서 1983년 ''명예 연맹 루델 – 최전선 군인 보호 공동체''를 설립했다.[2][3] 영국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데이비드 어빙은 1985년 6월 프라이로부터 한스 울리히 루델 상을 받았으며,[4] 루델의 죽음에 대한 추도 연설을 했다.[5]
시간이 지나면서 루델은 히틀러의 열렬한 팬이었고 전 국방군 장교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초청된 강연회에서 정치적 사려 없이 '''"제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의 생존권을 위한 전쟁"'''이라고 옹호하고 당시 이미 독일 사회의 공통 인식이 아니었던 국방군 신화를 전개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점차 문제적 인물로 취급받게 되었다.
인터넷 등에서는 스탈린으로부터 '''소련 인민 최대의 적'''으로 지목되어 10만 루블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도시 전설이 퍼져 있다. 이러한 도시 전설은 적어도 2003년경에는 이미 형성되었다. 1971년의 『Stuka at war』에서 저자 피터 C. 스미스(Peter C. Smith)는 루델의 활약을 평가하며 "총통이 직접 그를 위해 디자인한 특별 훈장과, 소련에서의 '인민의 적 넘버원' 칭호를 얻었다!"라는 문장을 썼는데, 이것이 도시 전설의 근원으로 추정되지만, 스탈린이 직접 지목했다는 기술은 없다.[44][45]
6. 루델의 어록
- "정말 둔한 군견이군." (1944년 3월 20일, 격추되어 소련군으로부터 도주 중, 소련군의 군견에게 한 말)
- "지금, 이대로 귀국할 마음은 들지 않아."[1] (1944년 3월 24일,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귀환했을 때)
- "모든 것이 조용하고, 마치 죽은 듯이 보인다."[2] (1944년 3월 27일, 전차 26대 격파 후 정찰 비행 중)
- "가델만은 갈비뼈가 세 개 부러졌어. 휴양 따위는 할 수 없어. 당장 출격이다!"[3] (1944년 11월, 격추되어 자신도 중상을 입은 상태로 귀환했을 때)
- "총통 각하, 만약 제가 비행대대와 함께 행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저는 수상과 승진을 사퇴하고자 합니다."[4] (1945년 1월 1일, 금강 떡갈나무 잎 검 부착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 수여식에서 히틀러에게)
- "이반 녀석, 또 신형을 만들어냈군."[5] (1944년 10월 말, 발견한 소련군의 신형 전차에 대해)
- "좋아, 가자. 당장 퇴원이다."[6] (1944년 10월, 입원 중에 소련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 "그냥 시험 비행을 했을 뿐입니다."[7] (1945년, 무단 출격에 대해 따져 묻는 상관에게)
- "이제 스키도 스키 점프도 할 수 없지만, 다리가 한쪽 남아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8] (1945년 2월 9일, 오른쪽 다리를 잃었을 때)
- "단 하나 중요한 것은, 이 현재의 위급존망의 시기에, 내가 적어도 몇 주 동안은 날 수 없다는 것이다."[9] (1945년 2월 9일, 오른쪽 다리를 잃었을 때)
- "어제와 오늘 사이에, 그렇게 갑자기 변해 버릴 리가 있나."[10] (1945년 5월 7일, 항공기로 소련군 포위망을 탈출하여 미군에게 항복하러 가는 도중에 습격해 온 소련군 전투기에 대해)
- "여기는 독일이다. 영어를 할 수 있다고 해도, 독일어 외에는 말하려고 하지 않아. 어떤 경례를 하든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우리는 독일 군인으로서의 경례법을 배우고, 그것을 그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슈투카 부대는 하늘의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우리는 포로가 아니다. 독일 병사는 모든 전투에서 진 것이 아니라, 단지 물량의 압박에 굴복했을 뿐이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도, 소련 지역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몸을 씻게 해 줬으면 한다. 그리고 뭔가 먹을 것이 필요하다."[11] (1945년 5월 7일, 항복 시 미군 장교와 대면했을 때, 영어를 할 수 있는지 통역에게 질문받았을 때의 답변)
- "진실을 진실로서 말하는 것이, 왜 전형적인 것이란 말인가. 그것이 어째서 비난조로 말해져야 하는가."[12] (항복 시 미군 병사에게 전형적인 나치 장교라고 비난받았을 때의 답변)
- "나에게는, 이렇다 할 비결은 없었는데..."[13] (1945년, 패전 후 "어째서 저런 낡은 기체(Ju87)로 그렇게 많은 출격(2500회)을 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라고 심문하는 영미군 장교에게)
- "조종이 끔찍하게 어려운 기체."[14] (Ju87G형에 대해. 사실, Ju87에 37mm포 2문을 탑재한 것으로 비행 시의 안정성은 현저히 저하되어, 사소한 조종 실수에도 밸런스를 잃고 추락할 위험이 있었다.)
7. 루델의 저서
루델은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전후 시대'' (1950년)
- ''STUKA PILOT'' (''Trotzdem''의 영어 번역 및 개정판)
- '''《폭격행》''' (爆撃行) (''STUKA PILOT''의 일본어 번역, 1953년)
- '''《급강하 폭격》''' (急降下爆撃) (여러 번역판 존재, 1982년, 2002년, 2019년)
- ''우리 전선 병사들의 재무장'' (1951년)
- ''단검 찔린 자인가 전설인가?'' (1951년)
- ''슈투카에서 안데스 산맥까지''
- ''나의 전쟁 일기: 슈투카 조종사의 기록''
- ''독일과 아르헨티나 사이 - 해외 5년''
- ''나의 전쟁과 평화 속의 삶''
- ''비행사 이야기: 특별호 13호 "대포 새"''
- ''전쟁과 평화로부터: 1945년과 1952년의 기록''
- ''그것은 제국에 관한 것이다''
참조
[1]
문서
[2]
뉴스
Die Deutsche Volksunion
https://www.mdr.de/h[...]
Mitteldeutscher Rundfunk
2018-11-27
[3]
웹사이트
Gedenkveranstaltung für Hans Ulrich Rudel, 1983
https://www.sz-photo[...]
2018-11-28
[4]
웹사이트
Funke: David Irving, Holocaust denial, and his connections to right wing extremists and neo-national socialism (neo-nazism) in Germany
https://www.hdot.org[...]
2018-11-27
[5]
뉴스
Big crowd commemorates death of Nazi pilot
https://www.upi.com/[...]
United Press International
2018-11-27
[6]
뉴스
Known as the 'Eagle of the Russian Front,' Rudel made 2,530 raids against the Soviet Union in his Stuka dive-bomber.
https://www.upi.com/[...]
upi.com
[7]
웹사이트
World War II Stuka pilots
http://www.airforcem[...]
[8]
서적
Hans-Ulrich Rudel: Adler der Ostfront
http://permalink.obv[...]
National-Verlag
1971
[9]
웹사이트
Hans-Ulrich Rudel: Eagle of the Eastern Front.
http://www.historyne[...]
2018-08-13
[10]
웹사이트
Hans-Ulrich Rudel
https://www.deutsche[...]
[11]
서적
100%ムックシリーズ 完全ガイドシリーズ296 独ソ戦完全ガイド
晋遊舎
[12]
웹사이트
Mengele : the complete story
https://archive.org/[...]
2024-01-27
[13]
서적
Black Sun
New York University Press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서적
Cat Shit One'80 VOL.2
[24]
웹사이트
Offensive Air Operations Of The Falklands War
https://www.globalse[...]
2024-01-27
[25]
문서
[26]
서적
The Real Odessa: How Perón Brought the Nazi War Criminals to Argentina
[27]
서적
The Real Odessa: How Perón Brought the Nazi War Criminals to Argentina
[28]
서적
Nazi Hunter: The Wiesenthal File
[29]
문서
[30]
서적
Leaders & Personalities of the Third Reich, Vol. 2. R. James Bender Publishing
[31]
웹사이트
Der Fall Rudel
https://www.zeit.de/[...]
2024-01-27
[32]
문서
[33]
웹사이트
Antitank Warfare Seminar Held in Washington, DC on 14-15 October 1976.
https://archive.org/[...]
2024-01-18
[34]
서적
ブラジルから来た少年
早川文庫
[35]
웹사이트
Letzter Flug
https://www.spiegel.[...]
2024-01-27
[36]
문서
一定の戦果を上げれば休暇が与えられるという特典があったと言われており、この戦果譲渡は休みたくないが故の行動であったとも言われている。
[37]
문서
「誰が破壊したのかわからない戦車」が多過ぎた事から、ルーデルが病院を抜け出している事が発覚、軍医に怒られた、と自伝の中に著している。
[38]
웹사이트
http://www.hawkertem[...]
[39]
문서
この事件の後、ルーデルには敵地への着陸を禁ずる異例の命令が出されたが、その後、[[曲技飛行|アクロバット]]そのものの手法で敵地に不時着した僚機の乗員を救出している。
[40]
문서
英語版Wikipedia「Hans-Ulrich Rudel」のCombat duty during World War IIに伝記から抜粋した文章がある。
[41]
문서
親友であったためか、ルーデルの自伝ではベッカーと名前で書かれたページは少なく、ほとんどがフリドリンと愛称で書かれている。
[42]
문서
当初はルーデルが地上部隊の指揮を執ろうとしていたが、司令部から右脚を負傷しているルーデルが指揮を執るのは無理があるとされたため、ベッカーが指揮を執っていた。
[43]
문서
この被撃墜の一つに、1944年3月13日にレフ・シェスタコフ大佐によって撃墜されたもの(直後に大佐も撃墜される)も含まれている。
[44]
서적
Stuka at War
[45]
문서
「Thus were the above units equipped on the Eastern Front and a few went to North Africa and France. Although the cannon made the aircraft extremely unwieidy, it made the 'Kannonenvogel' an extremely potent weapon and Rudel himself knocked out over 500 Soviet tanks and thousands of thin-skinned vehicles, earning for himself a special medal designed for him by the Fuhrer himself, and the title in the Soviet Union of 'People's Enemy Number One'!」 『Stuka at War』p108より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