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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드 에코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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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르드 에코세즈는 프랑스 왕실 근위대의 스코틀랜드 부대로, 중세 시대부터 부르봉 왕가가 끝날 때까지 존속했다. 스코틀랜드 용병은 샤를마뉴 시기부터 기록이 있으며, 백년 전쟁 이후 프랑스 군대에 공식적으로 존재했다. 1418년에는 7,000~8,000명 규모의 스코틀랜드 군대가 프랑스로 파견되어 샤를 7세를 지원했으며, 보제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이후 왕실 근위대로서 왕을 호위하며, 1791년 해산되었다가 1814년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에 재설립되었고, 1830년에 최종 해산되었다. 가르드 에코세즈는 월터 스콧의 소설 퀘entin Durward 등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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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드 에코세즈
개요
프랑스 근위대의 스코틀랜드 경비병
프랑스 근위대의 스코틀랜드 경비병
존속 기간1418년–1791년
국가프랑스 왕국
유형근위대
규모약 200명 (15세기), 124명 (17세기)
별칭스코틀랜드 경비병
왕의 경호대
만슈 가르드 (Gardes de la Manche)
신체 경호대 (Gardes du corps)
모토'Nemo me impune lacessit' (나를 건드리는 자는 무사하지 못하리라)
지휘관프랑스 국왕
유명 지휘관로베르 스튜아르
장 스튜아르 드 오뷔니
베르나르 스튜아르
역사
창설1418년
해체1791년
주요 전투파비아 전투
귀네가트 전투 (1513년)
퐁트누아 전투
역할
주요 임무프랑스 국왕의 신변 보호
궁궐 경비
의전 행사 참여
추가 임무전시에는 전투 참여
조직
구성궁수 (Archers)
기사 (Men-at-arms)
계급백작 (Comte)
중위 (Lieutenant)
하사 (Enseigne)
경사 (Guidon)
특이 사항대장은 프랑스 왕국 제1의 무관 (Premier homme d'armes du royaume de France) 직위를 겸임
복장
특징화려하고 독특한 복장
구성 요소스코틀랜드 전통 의상
프랑스 왕실의 색상 (파란색, 흰색)
갑옷
기타
관련 인물스튜어트 왕가 (Stuart dynasty)
유산프랑스 왕실 근위대의 일부로 존속

2. 역사

스코트인 전사들이 초기 프랑스 왕조 시절부터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공식적인 기록상 스코트인 병사가 프랑스에 주둔했다는 증거는 1295년 체결된 올드 동맹 협정 이후부터 나타난다. 백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필리프 6세를 지원하기 위한 스코트인 부대가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에 합류하여 싸웠다.

15세기 초, 아르마냐크파부르고뉴파 간의 내전과 잉글랜드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도팽 샤를 7세는 스코틀랜드에 대규모 지원군을 요청했다. 1419년 제2대 버컨 백작 존 스튜어트가 이끄는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이 프랑스에 도착했고, 이들은 보제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샤를 7세의 큰 신임을 얻었다. 이때 샤를 7세의 개인 호위병으로 선발된 스코트인 병사들이 가르드 에코세즈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었다.

이후 가르드 에코세즈는 프랑스 국왕의 신변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호하는 최정예 왕실 근위대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은 왕이 가는 곳 어디든 동행하며 잠자는 동안 보초를 서고, 식사를 호위하는 등[11] 국왕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몽트로 다리에서 용맹공 장이 암살될 당시 도팽을 보호하고, 1442년 가스코뉴 화재에서 왕을 구출하는 등 충성심을 증명하는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16세기부터는 부대원 충원이 주로 프랑스인으로 이루어지면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비율은 점차 줄어들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는 '스코트인 부대'라는 명칭과 스코틀랜드어에서 유래한 일부 지휘 용어 등 고유한 전통을 유지했다.

가르드 에코세즈는 가르드 뒤 코르(Garde du Corps, 왕실 근위대)의 선임 부대로서 부르봉 왕조가 끝날 때까지 존속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1791년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며,[17] 이후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에 잠시 재건되었으나 1830년에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해산될 때까지 이 선임 부대는 '스코트인의 자부심'(les fiers Ecossais|레 피에르 에코세프랑스어)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18]

2. 1. 초기 역사 (중세)

동방 박사로 묘사된 샤를 7세와 그의 주변을 둘러싼 스코트인 근위대(왼쪽)


스코트인 전사들이 샤를마뉴 대제나 882년 단순왕 샤를의 군대에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찾기 어렵다. 스코트인 병사가 프랑스에 주둔했다는 확실한 문서 증거는 1295년 체결된 올드 동맹 이후부터 나타난다.

백년 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프 6세를 지원하기 위한 스코트인 부대가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제1대 더글러스 백작과 훗날 제3대 더글러스 백작이 되는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장 2세 국왕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크게 패하면서, 제3대 더글러스 백작을 포함한 많은 스코트인 기사들이 장 2세 국왕과 함께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는 시련을 겪었다. 1360년대에도 스코트인들은 프랑스에서 활동했는데,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부대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15세기 초, 프랑스는 샤를 6세 국왕의 정신 질환으로 인해 아르마냐크파부르고뉴파 사이의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부르고뉴파의 용맹공 장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침략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도팽 샤를(훗날 샤를 7세)은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오랜 동맹 관계였던 스코틀랜드카스티야 왕국이 이에 응답했다.

2. 2. 라 그랑드 아르메 에코세즈 (La Grande Armée Écossaise)

1418년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는 그의 아들인 제2대 버컨 백작 존 스튜어트를 스코틀랜드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중세 시대 스코틀랜드가 해외로 파견한 가장 큰 규모의 군대였다. 7,000명에서 8,000명에 달하는 병력은 1419년 10월 라로셸에 도착하여, 도팽 샤를을 만나기 위해 투르로 이동했다.

미래의 샤를 7세가 된 도팽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환대하며 영지와 성을 하사했다.

수여자하사받은 영지/성
제2대 버컨 백작 존 스튜어트샤티용쉬르앵드르
제5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위그턴 백작)뒹르루아
단리의 존 스튜어트 경콩크레소와 오비니
토머스 세턴 (Thomas Seton)랑제성



스코틀랜드 지휘관들은 추가 병력 모집을 위해 잠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가, 1420년에 4,000명에서 5,000명의 지원군과 함께 프랑스로 복귀했다. 지휘관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도팽은 스코틀랜드 파견 병력 중 가장 뛰어난 전사 약 100명을 선발하여 자신의 개인 호위병으로 삼았다. 이는 훗날 스코트인 근위대의 기원이 된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1421년 보제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함께 큰 승리를 거두며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클래런스 공작이 버컨 백작의 메이스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군대는 1424년 베르누이 전투에서 6,000명의 병력을 잃는 큰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샤를 7세는 충성스러운 스코틀랜드 병력의 큰 손실에 슬퍼하면서도, 살아남은 병사들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며 계속해서 신뢰를 보냈다. 스코틀랜드 군은 1429년 헤링스 전투에서도 추가적인 피해를 겪었다.

이후 프랑스 내에 남아 있던 스코틀랜드 군인들은 점차 흩어져 자유 용병대로 활동하거나, 프랑스 왕국의 정규군인 콩파니 도르도낭스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2. 3. 왕실 근위대 (The Royal Bodyguard)



루이 13세 시기의 스코트인 근위대. 샤를 8세루이 14세 통치 시기 사이에 입었던 군복.


프랑스 왕실 근위대 제1 중대 “스코트인 부대”의 군기


1757년 스코트인 근위대의 군복


1295년 이후 오래된 동맹으로 알려진 협약에 따라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는 군사적으로 협력해왔다. 백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스코틀랜드 군대는 공식적으로 프랑스필리프 6세를 위해 싸웠으며,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제1대 더글라스 백작 윌리엄과 미래의 제3대 더글라스 백작 아치볼드가 프랑스 왕 장 2세를 위해 참전했다. 미래의 3대 백작 아치볼드는 프랑스 왕과 마찬가지로 많은 스코틀랜드 기사들과 함께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1360년대에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군대에서도 스코틀랜드인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15세기 초, 샤를 6세의 정신 이상과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으로 프랑스가 혼란에 빠지자,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부르고뉴 공국의 용맹공 장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침략했다. 위기에 처한 프랑스 도팽(훗날 샤를 7세)은 스코틀랜드와 카스티야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프랑스 왕들은 스코트인들로 구성된 가르드 에코세즈(스코틀랜드 근위대)를 신뢰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 이들은 왕의 신변 보호를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스코트인 근위대는 1419년 몽트로 다리에서 용맹공 장이 살해될 당시 프랑스 도팽을 보호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1442년 가스코뉴에서 발생한 화재로부터 왕을 구출하기도 했다. 이는 스코트인 근위대의 충성심과 용맹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1465년 몽레리 전투에서는 루이 11세를 지키려 싸우다 많은 근위대원이 전사하며 왕을 방어하는 데 실패하기도 했다.

2. 4. 이후 역사 (근세)

가르드 에코세즈는 근위대(Garde du Corps)의 선임 부대 또는 스코트인 부대로서 부르봉 왕조가 끝날 때까지 존속했다.[1] 스코트인 근위대는 4개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한 부대는 프랑스 국왕이 가는 곳 어디든 동행했다. 이들은 왕이 잠자는 동안 보초를 섰고, 부엌에서 왕의 식탁까지 음식을 호위하는 임무도 수행했다.[11][1]

프랑수아 1세 통치 시기, 스코트인 근위대는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심플론 고개 근처에서 눈보라를 만났다. 일부 병사들은 그곳에 정착했다고 전해지며, 그들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씨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

16세기부터 스코트인 근위대의 병력 보충은 주로 프랑스인으로 이루어졌고, 스코틀랜드 출신 비율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부대 명칭은 유지되었고, 스코트어에서 유래한 특정 지휘 용어도 계속 사용되었다.[3] 1632년, 엔지 백작은 프랑스에서 스코트인 연대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했다.[4]

여러 스코트인 부대들이 존재했고 기록상 혼란이 있어, 정확히 어떤 부대가 '가르드 에코세즈'라는 칭호를 가졌는지 불분명할 때가 있었다. 특히 존 헵번 경, 제1대 어바인 백작 제임스 캠벨 (이후 로버트 머레이 경이 지휘), 제임스 더글러스 대령이 이끄는 부대들이 종종 혼동되었다.[5]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인들의 활약을 기록한 일부 작품들은 실제로는 ''더글러스 연대''(Regiment de Douglas프랑스어)를 언급하면서도 단순히 ''가르드 에코세즈''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루이 15세 통치 시기 스코트인 근위대는 기마 부대로, 21명의 장교와 33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마지막 실전 기록은 1747년 7월 1일 라우펠트 전투에서 왕을 호위한 것이다.[6] 이 전투를 포함한 여러 경우에 스코트인 근위대는 다른 프랑스 중기병들이 사용하던 검 대신 강철 바스켓 가드가 달린 클레이모어를 휴대했다. 또한 은색 끈(레이스)으로 장식된 흰색 탄띠(밴돌리어)를 착용하여 다른 근위 부대와 구별되었다.[6]

스코트인 근위대는 궁정 의식 중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24명의 특별 분견대인 ''가르드 드 라 망슈''(Gardes de la Manche|가르드 드 라 망슈프랑스어, 직역하면 '소매 경호대')를 차출했다. 이 명칭은 이들이 국왕의 소매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가르드 드 라 망슈''는 근위대의 기본 제복(파란색, 빨간색, 은색) 위에 자수가 놓인 흰색과 금색의 카소크(cassock)를 입어 식별되었다.[7]

2. 5. 해산

스코트인 근위대의 4개 부대는 1791년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17][8] 이는 프랑스 혁명 중 1789년 10월 베르사유 행진 이후 귀족 출신 병사들이 이미 흩어진 상황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17][8] 이후 1814년 5월 25일 칙령에 따라 제1차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에 재설립되었으나, 1830년에 최종적으로 해산되었다.[18][9] 해산될 때까지 선임 부대는 '스코트인의 자부심'(les fiers Ecossais|레 피에르 에코세프랑스어)이라는 칭호를 유지했다.[18][9]

3. 주요 구성원

스코트인 근위대 장교 무슈 베르지에 (18세기)

  • 장 스튜어트, 다언리 백작: 오비니와 콩크르소의 영주. 1429년 오를레앙에서 전사.
  • 패트릭 네이븐: 1429년 오를레앙에서 전사.
  • 로버트 또는 로빈 프티로크: 란의 세네샬 (1419년–1461년).
  • 크리스틴 챔버: 기사 (1425년–1447년).
  • 패트리스 폴카르 (1449년–1461년).
  • 토머스 핼리데이 (1449년–1461년).
  • 패트릭 드 스펜스: 보해플과 에스티뇰의 영주, 왕의 마구간 기사 (1450년–1485년).
  • 기욤 스튀예르: 모레옹의 영주, 왕의 마구간 기사 (1461년–1464년).
  • 토머스 스튀예르 (1465년–1472년).
  • 로버트 코닝햄: 셰르보와 빌뇌브의 영주 (1475년–1478년).
  • 장 드 코닝햄: 샤르트르의 발리, 국왕의 고문이자 시종 (1479년–1492년).
  • 베로 스튜어트, 오비니 영주: 국왕의 고문이자 시종, 생 미셸 훈장 기사 (1492년–1508년).
  • 고데베르 카레: 생 캥탱과 페리니 영주. 베로 스튜어트의 매형. 앙부아즈 대장 (1497년 직위 매각). 이탈리아 전쟁 참전 (밀라노 라 로카 대장).
  • 로버트 스튜어트, 오비니 영주: 1515년 프랑스 원수. 국왕 훈장 기사 (1470년–1543년).
  • 자크 드 몽고메리: 로르주 영주. 국왕의 고문이자 시종 (1543년–1556년).
  • 자크 드 몽고메리: 로르주 영주. 국왕 훈장 기사 (1555년–1561년).
  • 가브리엘, 몽고메리 백작: 로르주 영주 (1530년–1574년). 마상 창 시합 중 앙리 2세에게 치명상을 입힘.
  • 존 헵번 경
  • 로버트 모레이 경
  • 샤를 드 라 비외빌: 근위대 대장. 이후 재무총감.
  • 로버트 심필: 근위대 기수.
  • 도널드 캐머런 경: 로키엘 영주. 망명한 자코바이트 지도자. 생 미셸 훈장 기사 (1746년-1748년).
  • 앙투안 드 로이에: 성 요한 기사단 기사이자 성 루이 훈장 기사. 기타리스트, 작곡가 (1768년–1852년).

4. 대중문화


  • '''퀜틴 더워드''' - 월터 스콧 작.
  • '''보니 프린스 찰리: 퐁트누아와 컬로든 이야기''' Bonnie Prince Charlie: A Tale of Fontenoy and Cullodeneng - G. A. 헨티 작.
  • '''여왕의 게임''' Queens' Playeng - 도로시 더넷 작.
  • 커스틴 M. 매켄지(Kirsteen M. MacKenzie)의 소설 시리즈 La Garde Ecossaisefra. 존 해밀턴을 주인공으로 한다.[10]

참조

[1] 서적 Louis XIV's Army
[2] 서적 1994
[3] 서적 L'Uniforme et les Armes des Soldats de la Guerre en Dentelle
[4] 간행물 Gordon, George, second marquess of Huntly (c. 1590–1649) http://www.oxforddnb[...]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5] 서적 Alexander Leslie and the Scottish Generals of the Thirty Years' War, 1618-1648 London 2014
[6] 서적 Louis XV's Army - Cavalry and Dragoons
[7] 서적 Louis XV's Army - Cavalry and Dragoons
[8] 서적 Pillars of Monarchy
[9] 서적 L'Uniforme et les Armes des Soldats du XIX Siecle
[10] 뉴스 Aberdeen author unveils historical fiction novel with connections to north-east Scotland https://www.aberdeen[...] Aberdeen Live 2023-06-09
[11] 서적 Louis XIV's Army
[12] 서적 1994
[13] 서적 L'Uniforme et les Armes des Soldats de la Guerre en Dentelle
[14] 간행물 Gordon, George, second marquess of Huntly (c. 1590–1649) http://www.oxforddnb[...]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15] 서적 Alexander Leslie and the Scottish Generals of the Thirty Years' War, 1618-1648 London 2014
[16] 서적 Louis XV's Army - Cavalry and Dragoons
[17] 서적 Pillars of Monarchy
[18] 서적 L'Uniforme et les Armes des Soldats du XIX Sie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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