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1세 드 몽고메리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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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브리엘 1세 드 몽고메리 백작은 16세기 프랑스의 귀족이자 군인으로, 스코틀랜드 호위대 대장을 역임했다. 그는 1559년 마상 창시합에서 실수로 앙리 2세의 눈을 찔러 치명상을 입혔고,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석방 후 도망하여 프로테스탄트 지지로 전향했다. 이후 위그노 전쟁에서 활약했으나, 1574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연관되어 해석되기도 하며,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에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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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 1세 드 몽고메리 백작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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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가브리엘 드 로르주 |
| 작위 | 몽고메리 백작 로르주 영주 뒤세 영주 |
| 생애 | |
| 출생일 | 1530년 5월 5일 |
| 출생지 | 뒤세, 노르망디, 프랑스 |
| 사망일 | 1574년 6월 26일 |
| 사망지 | 파리, Place de Grève, 프랑스 |
| 가족 | |
| 배우자 | 1550년, 이자보 드 라 투슈와 결혼 |
2. 생애
스코틀랜드 귀족 출신인 아버지 자크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국의 스코틀랜드 호위대 대장을 맡았다. 1559년 6월 30일, 앙리 2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결혼 기념 마상 창시합에서 실수로 앙리 2세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고, 왕은 이 부상으로 7월 10일 사망했다.
앙리 2세는 임종 직전 몽고메리를 사면했으나, 왕의 죽음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궁정을 떠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 사건으로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의 깊은 증오를 사게 되었다. 잉글랜드에서 그는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여 위그노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 왕가와 대립하는 길을 걷게 된다.
프랑스로 돌아온 몽고메리는 노르망디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위그노의 주요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 휘하에서 유능한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위그노 전쟁 기간 동안 부르주를 점령하고, 기옌, 페리고르, 케르시, 베아른 등지에서 프로테스탄트 군을 이끌었다.
1572년 8월 24일의 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 당시, 한 위그노의 경고 덕분에 극적으로 목숨을 건져 다시 잉글랜드로 탈출했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렸고, 카트린 드 메디치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여러 차례 그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574년, 몽고메리는 노르망디에서 다시 봉기를 시도했으나 왕당파 군대에 의해 돔프롱에서 포위되어 5월 27일 마티뇽 원수에게 항복했다. 파리로 압송된 그는 살려주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채 6월 26일 그레브 광장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처형 직전 재산 몰수와 자녀들의 작위 박탈 통보를 받았으며, 자녀들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2. 1. 초기 생애
몽고메리 백작가는 노르망디 지방 로르주 및 뒤세의 영주였으나, 가브리엘의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 자크는 본래 스코틀랜드 귀족이었으나, 스코틀랜드와 오랜 동맹 관계였던 프랑스 왕국을 섬겼다. 가브리엘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실의 스코틀랜드 호위대 대장직을 맡았다.1559년 6월 30일,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스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 국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마상 창시합이 열렸다. 이 시합에서 몽고메리 백작은 앙리 2세 국왕의 대전 상대로 나섰는데, 실수로 부러진 창 조각이 왕의 투구 틈으로 들어가 오른쪽 눈을 관통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여러 의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앙리 2세는 이 부상으로 인해 7월 10일에 사망했다.
앙리 2세는 임종 직전 몽고메리 백작에게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며 사면했으나, 왕의 죽음 이후 몽고메리 백작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궁정에서 도망쳤다.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 사건으로 인해 몽고메리 백작에게 깊은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2. 2. 앙리 2세 사망 사건
1559년 6월 30일, 프랑스와 오랜 적인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의 카토-캉브레지 조약 체결 및 두 건의 왕족 결혼을 기념하는 마상 창시합이 열렸다. 이 결혼은 국왕 앙리 2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사부아 공작 에마누엘 필리베르, 그리고 국왕의 장녀 엘리자베스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결혼이었다. 이 시합에서 몽고메리는 앙리 2세의 대전 상대로 나섰다. 시합 도중 몽고메리의 부러진 창 조각이 실수로 앙리 2세의 오른쪽 눈을 꿰뚫고 뇌에 박히는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했다.[1]

주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앙리 2세는 이 상처로 인해 1559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 앙리 2세는 임종 직전, 몽고메리를 모든 혐의에서 사면했다.[1] 그러나 왕의 사망 이후 몽고메리는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궁정에서 물러나 불명예를 안고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1] 미망인이 된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 사건으로 몽고메리에게 깊은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몽고메리는 노르망디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개신교로 개종하여[1] 위그노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그가 왕국과 대립하는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3. 위그노 전쟁 활약
1559년 앙리 2세가 사망하는 사고 이후, 몽고메리는 노르망디 영지로 물러나 신학을 공부하고 개신교로 개종하였다.[1] 이로 인해 그는 왕국의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제1차 위그노 전쟁 (1562–1563)이 발발하자 그는 위그노 편에 서서 싸웠다. 1562년 5월에는 부르주를 점령했으며, 그의 고향인 노르망디에서 여러 군사 활동을 이끌었다. 특히 루앙 방어전을 지휘했으나, 도시가 함락되기 직전 탈출하였다. 전쟁을 종식시킨 아무아즈 칙령 이후에도 프랑스에 머물렀다.
1567년 종교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그는 다시 무기를 들고, 1567년부터 1569년까지 콩데 공작 휘하에서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위그노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 휘하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1569년 3월 자르나크 전투에서 콩데 공작이 사망한 후, 몽고메리는 가톨릭 세력에게 점령당한 베아른 지역을 회복하고 위그노인 나바라 여왕 잔 달브레를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신속한 작전을 펼쳐 1569년 8월 오르테즈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를 격파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기옌, 페리고르, 케르시 등지에서 프로테스탄트 군의 지휘를 맡았다.
몽콩투어 전투에서 위그노 군이 패배한 후, 몽고메리는 살아남은 병력과 합류했다.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 앙리 1세 드 콩데 공작, 나바라의 젊은 왕자들이 이끄는 연합군은 아르네-르-듀크에서 가톨릭 군대와 교착 상태를 이루었고, 이는 왕실에 유리한 평화 협정으로 이어졌다.
1572년 8월 24일 발생한 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 당시, 몽고메리는 파리에 있었으나 학살이 시작될 때 부상당한 한 위그노가 센 강을 헤엄쳐 건너와 위험을 알린 덕분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1]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렸지만, 그는 잉글랜드로 성공적으로 도피했다. 프랑스의 카트린 드 메디치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그의 인도를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거절했다.

몽고메리는 1573년 함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와 라 로셸 포위전을 지원하려 했다.[1] 이듬해인 1574년에는 노르망디에서 다시 봉기를 시도했으나, 왕당파 군대에 의해 5월 27일 돔프롱에서 마티뇽 원수에게 항복하였다. 그는 파리로 압송되었고[2] 사형을 선고받았다.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1574년 6월 26일 파리 시청 앞 그레브 광장에서 참수되었다.[1] 처형 직전,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자녀들의 작위를 박탈한다는 왕명이 선포되자, 그는 자녀들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지 못하면 저승에서 저주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2. 4. 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과 도피
1572년 8월 24일, 가톨릭 세력에 의한 위그노 대량 학살 사건인 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이 발생했다.[1] 당시 콜리니 제독이 가톨릭 세력의 습격을 받았는데, 이때 부상을 입은 한 위그노 병사가 센 강을 헤엄쳐 건너와 급박한 상황을 알렸다. 이 경고 덕분에 몽고메리는 학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위그노 지도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1]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렸지만, 몽고메리는 잉글랜드로 성공적으로 도피했다.[1] 프랑스의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치는 몽고메리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과 정치적인 이유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그의 인도를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잉글랜드에서도 그의 목숨을 노리는 추격자들이 뒤따랐다.
2. 5. 체포와 처형
몽고메리는 1573년 라 로셸 포위전을 구원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왔다.[1] 이듬해 그는 노르망디에서 반란을 시도했지만, 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 이후 위그노 전쟁이 재개된 상황에서 왕국군의 공세로 위그노파는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결국 1574년 5월 9일, 몽고메리 백작은 돔프롱에서 포위되었고, 같은 달 27일에 마티뇽 원수에게 항복했다.파리로 연행된 몽고메리는[2] 살려주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채 사형을 선고받았다. 1574년 6월 26일, 그는 그레브 광장에서 참수되었다.[1] 처형 직전,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자녀들의 작위를 박탈한다는 왕실 칙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1] 처형대에서 그는 아이들에게 남긴 유언으로, 빼앗긴 것을 되찾지 못하면 저승에서 저주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3. 가족
그는 1550년에 Isabeau de La Touche|이자보 드 라 투슈프랑스어(1593년 사망)와 결혼하여 4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3. 1. 아들
가브리엘 1세 드 몽고메리는 아내 Isabeau de La Ciral|이자보 드 라 시랄프랑스어(Elisabeth de La Touche|엘리자베트 드 라 투슈프랑스어라고도 불림)과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두었다.아들은 다음과 같다.
| 이름 | 생몰년 |
|---|---|
| 자크 2세 드 몽고메리 | 1551–1590 |
| 기드옹 드 몽고메리 | ?–1596 |
| 질 드 몽고메리 | 1558–1596 |
| 가브리엘 2세 드 몽고메리 | 1565–1635 |
딸은 Suzanne|쉬잔프랑스어, Elisabeth|엘리자베트프랑스어, Claude|클로드프랑스어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넷째 딸이 있으며, 넷째 딸은 Gallardon|갈라르동프랑스어 남작 Juan de Refuge|주앙 드 르퓌주프랑스어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 중 가브리엘 2세 드 몽고메리는 듀세 성을 건설했으며, 6명의 자녀를 두었다.
| 이름 | 생몰년 |
|---|---|
| 루이즈 드 몽고메리 | |
| 가브리엘 3세 드 몽고메리 | 1595–1635 |
| 수잔 드 몽고메리 | |
| 루이 1세 드 몽고메리 | 1601–1682 |
| 장 드 몽고메리 | 1605–1694 |
| 자크 3세 드 몽고메리 | 1609–1682 |
가장 유명한 후손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영국 육군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있다.
3. 2. 딸
가브리엘 1세 드 몽고메리는 아내 이자보 드 라 시랄 (엘리자베트 드 라 투슈라고도 불림)과의 사이에서 4명의 딸을 두었다.4.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몽고메리 백작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해석에서 자주 언급된다. 이는 『백 시편』 제1권 35수에 앙리 2세의 죽음이 예언되어 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역사 개설서의 칼럼 등에서도 다루어질 정도로 유명하며, 몽고메리 백작 관련 전기의 서두에서 해당 시를 인용하기도 한다. 예언 적중 사례로서의 소개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종종 일부 내용이 생략되거나 시구가 바뀌는 형태로 알려져 왔다.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젊은 사자가 늙은 자를 뛰어넘을 것이다.''
:''결투의 싸움터에서.''
:''황금 우리 안의 두 눈을 그는 찢을 것이다.''
:''두 함대 중 하나, 그리고 죽는다. 끔찍한 죽음.''
예언 신봉자들은 이 시의 '젊은 사자'를 몽고메리 백작으로, '늙은 자'를 앙리 2세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여러 문제점이 지적된다. 첫째, 당시 몽고메리 백작은 29세에서 33세 사이였고, 앙리 2세는 40세였다. '젊은'과 '늙은'이라는 표현으로 둘을 대비시키는 것은 다소 어색하다. 둘째, 몽고메리 백작과 사자를 연결할 만한 고리는 그의 출신지인 스코틀랜드 왕국이 사자 문장을 사용한다는 점 정도인데, 그는 프랑스 왕국의 귀족이자 군인으로 활동했다. 셋째, 앙리 2세가 착용한 투구는 금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사고 당시 꿰뚫린 것은 한쪽 눈뿐이었다. 넷째, 마지막 행의 '함대'는 마상 창 시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처럼 예언의 결과를 실제 사건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시도를 배제하고 보면, 시구와 역사적 사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미 19세기 중반 서지학자 프랑수아 뷔제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5. 문학 작품
알렉상드르 뒤마는 소설 『두 명의 디안』에서 소설 형식으로 각색된 몽고메리 백작의 이야기를 그렸다.
참조
[1]
간행물
Montgomery, Gabriel, Seigneur de Lorges, Comte de
[2]
간행물
Montgomery, Gabriel, Count de
[3]
서적
The Visitations of the County of Devon: Comprising the Heralds' Visitations of 1531, 1564 & 1620
Exeter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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