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 다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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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모 다다토모는 무쓰 아이즈 번주 가모 히데유키의 차남으로, 1626년 데와 가미노야마 번주가 되었다. 1627년 형 가모 다다사토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이라는 배경으로 아이즈 60만 석 대신 이요 마쓰야마 24만 석을 상속받았다. 그는 마쓰야마성 완공에 힘썼으나, 1634년 참근교대 중 교토에서 급사하며 가문은 단절되었다. 가신 간의 갈등과 백성들의 평판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며, 그의 죽음과 관련된 괴담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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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다다토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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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게이초 9년 (1604년) |
사망 | 간에이 11년 8월 18일 (1634년 10월 9일) |
어릴적 이름 | 쓰루마쓰마루 |
이름 | 다다토모 |
관위 | 종5위하 중무대보 정4위하 시종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 |
번 | 데와 가미야마번 번주 이요 마쓰야마번 번주 |
씨족 | 가모 씨 |
부모 | 아버지: 가모 히데요키 어머니: 쇼세이인 |
형제자매 | 다다사토 다다토모 숭고우인 아사노 미쓰아키라 |
배우자 | 정실: 쇼주인 (나이토 마사나가의 7녀) |
자녀 | 쓰루마쓰마루 딸 |
2. 생애
게이초 9년(1604년), 무쓰 아이즈번주 가모 히데유키의 차남으로 태어나 가신 가모 고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이복동생으로 아사노 미쓰아키라가 있다.
게이초 17년(1612년), 마쓰다이라 성을 하사받았다.
겐나 9년(1623년) 7월, 종4위하에 서임되었다.
간에이 3년(1626년), 데와 가미노야마번 4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
간에이 4년(1627년), 형 아이즈번주 다다사토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본래 가모씨는 단절될 처지였으나, 어머니 쇼세이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이었기 때문에 에도 막부의 주선으로 다다토모의 가독 상속이 허용되었다. 다만, 아이즈 60만 석에서 이요 마쓰야마 24만 석으로 감봉되었다.
간에이 5년(1628년) 7월 5일, 나이토 마사나가의 딸(쇼주인)과 결혼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정실의 영향 때문인지 치세는 양호했고(폭군 전설도 있지만 정형적이다) 사찰 건축과 이축(移築)을 실시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또한 거성인 마쓰야마성의 완성에 특히 주력하여 니노마루(二の丸일본어)를 정비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천수각이 세워진 것도 다다토모 시대라고 한다.[3]
간에이 7년(1630년) 중신들 간의 항쟁이 다시 발발하여 재판을 하였다. 이 재판은 3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다다토모는 막부의 재정을 통해 결착을 보았다.
간에이 8년(1631년)경, 적남 쓰루마쓰가 태어났다.
간에이 11년(1634년), 참근교대 중 교토의 번저에서 급사했다. 향년 31세. 사인은 불분명하나 형 다다사토와 마찬가지로 천연두가 원인이라고도 한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가모씨는 단절되었다.
다다토모가 사망했을 당시, 정실 나이토씨(쇼주인)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에도 막부는 쇼주인의 출산을 기다린 후 마쓰야마번의 처리를 결정하기로 했지만,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으므로 마쓰야마번은 몰수되었다.
이요 엔푸쿠지에 초상화가 전해진다.
2. 1. 출생과 초기
게이초 9년(1604년), 무쓰 아이즈번의 영주 가모 히데유키의 차남으로 태어나 가신 가모 사토하루에 의해 양육되었다.[1] 이복 동생으로 아사노 미쓰아키라가 있다.게이초 17년(1612년), 마쓰다이라 성을 하사받았다.[2]
간에이 3년(1626년), 데와 가미노야마번 4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
2. 2. 가독 상속과 이봉
1604년 (게이초 9년), 무쓰 아이즈번의 영주 가모 히데유키의 차남으로 태어나 가신 가모 사토하루에 의해 양육되었다.[1] 이복 동생으로 아사노 미쓰아키라가 있다.1612년 (게이초 17년), 마쓰다이라 성을 하사받았다.[2]
1626년 (간에이 3년), 데와 가미노야마 번 4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
1627년 (간에이 4년), 형인 아이즈 번주 다다사토가 후사 없이 요절했기 때문에, 원래 가모씨는 단절될 터였지만, 어머니 쇼세이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인 점을 들어 에도 막부의 배려로 다다토모의 가독 상속이 허용되었다. 다만, 아이즈 60만 석에서 이요 마쓰야마 24만 석으로 감봉되었다.
신심이 깊었던 정실의 영향인지, 치세는 양호했고(폭군 전설도 전해지지만, 정형화된 것이다), 사찰의 건축, 이축을 하는 등의 치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거성인 마쓰야마성의 완공에 특히 힘을 쏟아, 니노마루를 정비했다고 전해진다.
1630년 (간에이 7년), 다시 발발한 중신의 항쟁을 재판했다. 이 재판은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고 3년에 걸쳐, 다다토모는 막부의 재정을 바라 결착을 도모해, 간신히 사태의 해결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후쿠니시 무네나가, 세키 모토요시, 오카 기요나가, 시가 기요나리 등의 노신들이 유배되거나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노인 가모 향희의 동생인 가모 향사도 해고되어 이들을 풀어주는 사태가 벌어졌다.
1634년 (간에이 11년), 참근교대 도중, 교토의 번저에서 급사했다. 향년 31세. 사인은 불분명하나 형 다다사토와 마찬가지로 마마가 원인이라고도 한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가모씨는 단절되었다.
이요 엔푸쿠지에 초상화가 전해진다.
2. 3. 마쓰야마 번주 시대
간에이 3년(1626년), 데와 가미노야마 4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1]간에이 4년(1627년), 형인 아이즈번주 다다사토가 후사 없이 요절하여, 본래 가모씨는 단절될 터였으나, 어머니 쇼세이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이었기에 에도 막부의 배려로 다다토모의 가독 상속이 허용되었다. 다만, 아이즈 60만 석에서 이요 마쓰야마 24만 석으로 감봉되었다.[1]
신앙심이 깊었던 정실의 영향으로 치세는 양호했고(폭군 전설도 전해지지만, 정형화된 것이다), 사찰 건축과 이축(移築)을 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또한, 거성인 마쓰야마성 완공에 특히 힘을 쏟아 니노마루(二の丸일본어)를 정비했다고 전해진다.[3]
간에이 7년(1630년), 다시 발발한 중신의 항쟁을 재판했다. 이 재판은 3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다다토모는 막부의 재정을 통해 결착을 도모하여 간신히 사태를 해결했다. 결과적으로 후쿠니시, 세키, 오카, 시가 등의 노신들이 유배되거나 추방되었고, 가모 향희의 동생인 가모 향사도 해고되어 이들을 풀어주는 사태가 벌어졌다.[1]
간에이 11년(1634년), 참근교대 도중 교토의 번저에서 급사했다. 향년 31세. 사인은 불분명하나, 형 다다사토와 마찬가지로 포창(疱瘡)이 원인이라고도 한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가모씨는 단절되었다.[1]
2. 4. 죽음과 가문 단절
간에이 11년(1634년), 참근교대 중 교토의 번저에서 급사하였다. 향년 31세였다. 사인은 불분명하나, 형 다다사토와 마찬가지로 천연두가 원인이라고도 전해진다.[1] 후사가 없어 가모씨는 단절되었다.다다토모가 사망했을 당시, 정실인 나이토 마사나가의 딸(쇼주인)이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도 막부는 쇼주인의 출산을 기다린 후 마쓰야마번의 처리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고,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마쓰야마번은 개역되었다. 다만, 막부에서는 가모 우지사토의 명성과 다다토모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장래에 사위를 맞아 가모씨의 재흥을 인정하는 것도 검토되었지만, 그 딸도 간에이 13년(1636년) 8월 9일에 3세로 급사하여 가모씨는 단절되었다.[2] 정실 나이토씨(쇼주인)는 겐로쿠 13년(1700년) 6월에 85세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3]
3. 가모 다다토모와 관련된 괴기담
다다토모가 죽으면서 오미 가모씨 계통은 끊어졌는데, 이는 재앙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다다토모가 번주 자리를 이은 후,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다다토모는 번 안의 임산부를 증오하게 되어, 임산부를 잡아 배를 갈라, 산모와 아이를 모두 죽이는 끔찍한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임산부의 원한으로 가모 가문이 끊어졌다고 전해지며, 그 증거로 마쓰야마성에는 '도마돌'(まな板石|마나이타이시일본어)이라는 것이 남아 있고, 성터 공원이 된 지금도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4] (다만 히메지성의 '기쿠우물' 등 성곽에는 이런 이야기가 따라다니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4. 가계
5. 평가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가모 히데유키 시대부터 가모 가문이 가신단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했으며, 특히 다다토모에 대해서는 "인간의 부류로 보이지 않는다"고 혹평했다.[3] 다다토모 시대에도 가모 우지사토 사망 이후 가모 가문에서 가신들 간의 대립으로 인한 오이에 소동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5. 1. 긍정적 평가
당시 막부의 은밀 조사에 따르면, 가신들의 횡포를 억제하고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려 노력했으며, 백성들의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3]5. 2. 부정적 평가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가모 히데유키 시대부터 가모 가문이 가신단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했으며, 특히 다다토모에 대해서는 "인간의 부류로 보이지 않는다"고 혹평했다.[3] 가모 우지사토 사망 이후 가모 가문에서는 가신들 간의 대립으로 인한 오이에 소동이 자주 일어났는데, 다다토모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다토모 시대의 가모 가문은 이전부터의 가신단 대립에 더해, 여러 출신의 가신들이 섞여 있었고, 아이즈번과 우에야마번을 합쳐 64만 석에서 마쓰야마번 24만 석으로 영지가 축소된 것이 가신단의 불안정 요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3]하지만, 동시기에 막부의 은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다토모는 가신의 횡포를 억누르고 농민의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백성들의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3]
5. 3. 종합적 평가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가 사망한 후, 가모 가문에서는 가신들 간의 대립으로 인한 오이에 소동(御家騒動)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다다토모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는 가모 가문이 히데유키(秀行) 시대부터 가신단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했으며, 특히 다다토모에 대해서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혹평했다.다다토모 시대의 가모 가문은 이전부터 이어져 온 가신단 대립에 더해, 여러 출신의 가신들이 섞여 있었다. 우지사토 이전부터 섬겨온 가신, 우지사토가 아이즈(会津)로 이봉(移封)된 이후의 가신, 다다토모가 우에야마 번(上山藩)을 받았을 때 고용된 가신, 누이의 시가인 구마모토 번(熊本藩) 가토 가문(加藤清正 계통)이 개역된 후 막부의 의뢰로 데려온 가신 등 다양한 출신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아이즈 번과 우에야마 번을 합쳐 64만 석에서 마쓰야마 번(松山藩) 24만 석으로 영지가 줄어든 것도 가신단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 막부의 은밀(隠密)에 의한 조사에서는 다다토모가 가신의 횡포를 억누르고 농민 부담을 줄이려 노력했으며, 백성들의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3]
참조
[1]
서적
蒲生記
[2]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2000
[3]
논문
"総論 蒲生氏郷論"
2021
[4]
문서
몹시 서럽거나 감격에 겨워 흑흑 소리를 내며 우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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