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 우지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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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모 우지사토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명문 가문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을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이세 마쓰자카, 아이즈 등에서 다이묘로 활약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더불어 다도, 노, 상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아이즈 지역을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4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아들 가모 히데유키가 가문을 이었으나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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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우지사토 | |
---|---|
기본 정보 | |
이름 | 가모 우지사토 |
원어 이름 | 蒲生 氏郷 |
출생 | 1556년 |
사망 | 1595년 3월 17일 |
출생지 | 히노성, 오미국 |
사망지 | 후시미성, 교토 |
![]() | |
관직 | |
히노 영주 | 시작: 1584년 종료: 1595년 이전: 가모 가타히데 이후: 가모 히데요키 |
군사 정보 | |
소속 | 오다 가문 도요토미 가문 |
부대 | 가모 가문 |
지휘 | 마쓰사카성 쓰루가조성 |
전투 | 아네가와 전투 오다니성 공방전 덴쇼 이가 전쟁 가메야마성 공방전 가니에 공방전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구노헤 반란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후유히메 (오다 노부나가의 딸) |
아버지 | 가모 가타히데 |
어머니 | 오키리 (고토 가타토요의 여동생) |
형제자매 | 시게사토 여동생 (후세 다다베 → 세키 가즈마사의 부인) 여동생 (다마루 나오마사의 부인) 여동생 (오구라 유키하루의 부인) 산조노카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
자녀 | 세키 (마에다 도시마사의 정실) 다케히메 (오타케노카타, 겐슈인, 난부 도시나오의 정실) 우지토시 히데요키 |
양녀 | 산노마루도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
기타 정보 | |
어린 시절 이름 | 쓰루치요 |
초명 | 후히데 또는 교히데 |
이명 | 주산로, 히다노카미, 류큐노카미, 마쓰가시마 지쥬, 마쓰사카 쇼쇼 |
법명 | 쇼린인덴 고간 소추 다이코지 |
세례명 | 레온 (레오) |
묘소 | 다이토쿠지고바이인 (교토시기타구) 고토쿠지 (후쿠시마현아이즈와카마쓰시) |
관위 | 종4위하 지쥬 정4위하 사콘에노쇼쇼 종3위 참의 |
2. 출신
가모 우지사토는 1556년 오미 국 히노 성주 가모 가타히데의 후계자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이름은 츠루치요(鶴千代)였다.[6] 가모 씨는 후지와라 히데사토의 계통을 잇는 가마쿠라 시대부터의 명문가였다고 한다.[20]
가모 씨는 본래 오미 국의 다이묘인 롯카쿠 씨의 중신이었으나,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하자 롯카쿠 씨를 떠나 오다 씨의 가신이 되었다.[1][2] 츠루치요는 12세에 오다 씨의 인질로 기후로 보내졌지만,[6][7] 노부나가는 우지사토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곁에 두었다.[5] 우지사토는 기후성에서 자유롭게 학문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2][8]
1569년, 14세에 성인식(겐푸쿠)을 치르고 추자부로 야스히데 또는 마스히데(忠三郎 賦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8] 노부나가는 우지사토의 烏帽子親|에보시오야일본어가 되어 주었고,[1][5] 자신의 딸 후유히메와 혼인시켰다.[1][8]
3. 생애
가모 우지사토는 1556년 오미 국 히노 성 성주 가모 가타히데의 후계자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이름은 '''쓰루치요'''(鶴千代)였다.[6] 오슈 후지와라씨의 히데사토의 후예로, 가마쿠라 시대부터 내려오는 명문가인 가모 가문은 오미 국의 다이묘인 롯카쿠 씨의 중신이었다. 그러나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하자 가모 씨는 롯카쿠 씨를 떠나 오다 씨의 가신이 되었다.[1][2]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전투에서 호조 가문을 멸망시킨 후 오슈 시오키로 새로운 영토 분배를 통해 전국을 통일하자, 우지사토는 이세의 영지 대신 오우의 아이즈에 42만 석의 거대한 영지를 받았다. 이후 토지 정리와 추가로 받은 영지를 합쳐 우지사토의 영지는 92만 석에 이르게 된다.
아이즈로 온 이후 본거지의 이름을 구로카와에서 와카마쓰로 바꾸었고 성을 개축했다(와카마쓰라는 이름은 자신의 옛 영토이던 마쓰사카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7층짜리 천수각이 세워진 이 성에 우지사토는 자신의 어릴 적 이름을 따 쓰루가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우지사토는 성을 쌓는 것뿐만 아니라 옛 영지(히노와 마쓰자카)의 상인들을 불러오고, 정기 시장을 개설하였으며, 라쿠이치를 시행하였으며, 수공업을 장려하는 등, 마을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 유력한 번 중 하나였던 아이즈번의 기초도 이때 닦아진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지사토는 규슈의 나고야 성에 있던 본진까지 갔지만, 진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1595년 음력 2월 7일(3월 17일)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향년 40세로 사망했다.
우지사토의 무덤은 교토 다이토쿠지(大徳寺일본어) 오바이인(黄梅院일본어)에 있다. 최근 그의 무덤을 발굴한 결과, 칼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또 그의 영지이던 후쿠시마현 아이즈번 와카마쓰에 있는 고토쿠인(興徳院일본어)에 그의 머리카락을 묻은 무덤이 있다.
3. 1. 오다 가신 시대
1568년, 가모 가문의 주군이었던 롯카쿠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하자, 아버지 가타히데는 오다 가문의 신하가 되었다. 이때 가타히데는 노부나가의 본거지였던 기후성에 쓰루치요를 인질로 보냈다.[21] 노부나가는 쓰루치요의 뛰어난 재능을 간파하고 딸 후유히메와 혼인시켜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이후 쓰루치요는 관례를 올리고 주타로(忠太郞) 야스히데라는 이름을 받았다.[8] 야스히데는 오다 가문의 친척으로서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
야스히데는 무용(武勇)에 뛰어나 12세 때인 1568년 기타바타케 도모노리와의 전투에서 처음 출진한 후,[6][7] 1569년 이세 오카와치성 공격,[21] 1570년 아네가와 전투,[9] 1573년 아사쿠라씨 공격과 오다니성 공격, 1574년 이세 나가시마 공격, 1575년 나가시노-시타라가하라 전투, 1578년부터의 아리오카성 전투, 1581년 제2차 덴쇼 이가노 난 (히지야마성 전투) 등 각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582년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자, 야스히데는 아즈치성에 있던 노부나가의 가족을 보호하고, 아버지와 함께 본거지 히노 성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와의 싸움을 준비했다.[6] 미쓰히데는 나가하마, 사와야마, 아즈치 등 오미 지역의 여러 성을 공격한 후 히노 성을 포위하려 했으나, 주고쿠 지방에서 급히 회군한 하시바 히데요시(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야마자키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었다.
3. 2. 혼노지의 변 이후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우지사토는 아즈치 성에 있던 아버지 가타히데와 협력하여 노부나가의 가족들을 가모 가문의 거처인 히노 성으로 피신시키고, 아케치 미쓰히데 군의 공격에 대비했다.[6] 미쓰히데는 우지사토를 회유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8] 미쓰히데는 오미 지역의 여러 성을 공격한 후 히노 성을 포위할 계획이었으나, 야마자키 전투에서 히데요시에게 패배하여 가모 가문은 공격받지 않았다.[1]
그 후 우지사토는 기요스 회의에서 우위를 점하고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하시바 히데나가의 지휘 아래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기타이세 제 성의 공략을 맡았다. 전쟁 후 가메야마성을 받았지만, 자신은 입성하지 않고 가신인 세키 모리노부를 배치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미네성, 토키성, 가와노이성을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같은 해 스가세 전투에서는 적의 기습을 받았으나, 나마즈오 갑옷에 탄환 세 개가 박히는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싸웠다. 그 후 별동대로서 히데요시 군의 철수를 도왔다. 전쟁 후 이세 마쓰가시마성 12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고,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을 받았다.[16]
루이스 프로이스의 『예수회 연보』에 따르면, 1585년 오사카에서 오르간티노에게 세례를 받고 레온이라는 영명을 칭했다고 한다.[17] 그러나 이세의 영주인 우지사토의 세례는 이세 신궁을 비롯한 구세력의 위기감을 높여, 반천련 추방령의 원인이 되었다는 연구도 있다.[27][28]
같은 해 기슈 정벌과 도야마의 역에도 참전했다. 이때 "히데요시"와 같은 글자를 쓰는 것을 꺼려 "부슈(賦秀)"에서 '''우지사토(うじさと)'''로 개명했다.[16] 1586년에는 종사위하(従四位下)・시종에 임명되었다.[16]
1587년 규슈 평정에서는 마에다 도시나가와 함께 이와이시성을 함락시키는 활약을 보였다. 1588년에는 마쓰사카성을 축성하고 성하 마을을 만들었다. 같은 해 정사위하(正四位下)・좌근위소장(左近衛少将)에 임명되었으며,[29]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1589년 호코지 대불전(교토 대불) 석조 공사에서 큰 돌을 운반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해 영내에서 검지를 실시하여 석고제(石高制)로 통일했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니라야마성을 함락시킨 후, 오다와라성 포위군에 참가했다. 포위 중 적장 오타 우지후사의 야습을 받았으나, 갑옷을 입을 틈도 없이 창을 들고 용감하게 싸워 적을 물리쳤다. 전쟁 후 "삼계삿갓(三階菅笠)"의 말표 사용 허가를 받았다.
3. 3. 오슈 통치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전투에서 호조 가문을 멸망시킨 후 오슈 시오키를 통해 새로운 영토 분배를 단행하여 전국 통일을 이루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호조 가문이 지배했던 간토 지방으로 이봉되었고, 가모 우지사토는 오슈의 아이즈로 이봉되었다. 도호쿠 지방의 영주들은 도요토미 정권에 어느 정도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히데요시는 불안정한 오슈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지사토에게 아이즈를 주어 그들을 견제하게 했다.[10][11]
아이즈는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와 같은 무시할 수 없는 주요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고, 오슈는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감시하고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우지사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오슈 점령을 위한 도요토미 정권의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8][12] 우지사토는 충분한 군대를 확보하기 위해 42만 석을 받았고, 이후 73만 석, 최종적으로 92만 석의 대영지를 받았다.[6][12]
우지사토는 아이즈로 온 이후 본거지의 이름을 구로카와에서 와카마쓰로 바꾸었고 성을 개축했다(와카마쓰라는 이름은 자신의 옛 영토이던 마쓰사카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7층짜리 천수각이 세워진 이 성에 우지사토는 자신의 어릴 적 이름을 따 쓰루가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지사토는 성을 쌓는 것뿐만 아니라 옛 영지(히노와 마쓰사카)의 상인들을 불러오고, 정기 시장을 개설하였으며, 라쿠이치(독점적인 상인조합에 의한 폐단을 막기 위해 영주가 시장을 관리하는 것)를 시행하고, 수공업을 장려하는 등 마을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 유력한 번 중 하나였던 아이즈번의 기초도 이때 닦아진 것이다.
우지사토는 아이즈의 옛 영주였던 다테 마사무네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1591년 오자키·가사이 잇키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했는데, 이때 마사무네가 반란을 선동했다는 사실을 히데요시에게 고발하였고, 구노헤 마사자네가 반란[57]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지사토는 규슈의 나고야 성에 있던 본진까지 갔지만, 진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1595년 음력 2월 7일(3월 17일)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향년 40세로 사망했다.
4. 인물
가모 우지사토는 오슈 후지와라씨의 후예로, 가마쿠라 시대부터 내려오는 명문가 출신이다. 1568년 아버지 가타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신하가 되면서, 우지사토(당시 이름 쓰루치요)는 기후성에 인질로 보내졌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딸 후유히메와 결혼시켜 사위로 삼았다. 우지사토는 오다 가문의 친척으로 두터운 대우를 받으며, 12세 때 첫 출진한 이후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57]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우지사토는 아버지와 함께 아케치 미쓰히데와의 싸움을 준비했다. 하지만 미쓰히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배하여 죽었고, 우지사토는 이후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우지사토에게 이세국 마쓰자카 12만 석을 주었고, 이후 오우 지방 평정 후에는 아이즈 42만 석을 주었다. 최종적으로 우지사토의 영지는 92만 석에 이르렀다.[57]
우지사토는 쓰루가성을 쌓고, 상인들을 불러 모으고, 시장을 개설하고, 수공업을 장려하는 등 아이즈번의 기초를 닦았다. 다테 마사무네와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때는 나고야성까지 갔다가 건강 악화로 1595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7]
그는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자, 다도와 노가쿠에 조예가 깊은 문화인이었다. 또한 산업 정책에도 뛰어나 아이즈 와카마쓰의 성하 마을을 개발하고 상업을 장려하여 지역 산업을 육성했다. 센노 리큐의 제자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다카야마 우콘과 친하여 기독교도가 되었고, '레온'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감사 편지를 받은 적도 있다.[1]
우지사토는 부하들이 공을 세우면 가모라는 성을 하사하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는데, 마에다 도시이에가 이를 나무라기도 했다.[1]
4. 1. 히데요시와의 관계
가모 우지사토는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1][10]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와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같은 해 이세국 마쓰가시마 성에 12만 석을 받고 이봉되었다. 1588년에는 요이호노 모리에 마쓰사카 성을 새로 건설했다.[3][6]1590년,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전투에서 호조 가문을 멸망시킨 후 오슈 시오키를 통해 전국을 통일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 지방으로 이봉되었고, 우지사토는 오슈 아이즈로 이봉되었다. 히데요시는 도호쿠 지방의 영주들이 도요토미 정권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불안정한 오슈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지사토에게 아이즈를 주어 그들을 견제하게 했다.[10][11]
아이즈는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 등 주요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고,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감시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히데요시는 우지사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오슈 점령을 위한 도요토미 정권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8][12] 우지사토는 42만 석을 받았고, 이후 73만 석, 최종적으로 92만 석의 대영지를 받았다.[6][12]
당시 우지사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데루모토 다음으로 세 번째 고쿠다카를 보유했으며, 고다이로 중 한 명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재능과 오다 노부나가의 사위라는 지위를 두려워하여, 구로다 간베에처럼 기나이에서 멀리 떨어진 아이즈로 전출시켰다는 설도 있다.[5][7][8][13]
우지사토는 다도에 조예가 깊었고, 센노 리큐의 '일곱 명의 훌륭한 제자' 중 한 명이자 필두로 여겨졌다. 센노 리큐가 히데요시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우지사토는 그의 아들 센노 쇼안의 목숨을 구했다. 이후 우지사토와 이에야스의 중재로 쇼안은 사면되어 교토에서 다도계에 복귀했으며, 그의 손자는 산센케(세 센 가문)를 창시했다. 1593년에는 히데요시가 주최한 궁중 노 공연에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1][4][6][8]
우지사토는 산업 정책에도 뛰어났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히노에서 라쿠이치 라쿠자를 시작했고, 마쓰사카와 아이즈 와카마쓰에서도 성하 마을을 개발하여 상업을 장려하고 지역 산업을 육성했다. 이세로 이주했을 때 마쓰사카 성을 건설하고, 고향 히노의 상인들을 초청하여 라쿠이치 라쿠자를 실시했다. 이세 신궁 참배객을 유치하기 위해 이세 가도의 흐름을 바꾸어 마쓰사카가 상업 도시로 발전하는 기초를 닦았다. 아이즈에서는 쓰루가 성을 재건하고, 옻칠 장인을 데려와 아이즈 칠기 생산의 기반을 다졌다.[1][3][5][6]
4. 2. 다테 마사무네와의 관계
가모 우지사토는 아이즈의 옛 영주였던 다테 마사무네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우지사토는 1591년 오자키·가사이 잇키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했는데, 이때 마사무네가 반란을 선동했다는 사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고발하였고, 구노헤 마사자네가 반란[57]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했다.4. 3. 교우 관계
센노 리큐의 제자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그중에서도 필두로 여겨졌다. 센노 리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의 아들 센노 쇼안은 우지사토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1] 다카야마 우콘과 친분이 두터워 기독교도가 되었고, '레온'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로마에도 사신을 보내 교황으로부터 감사 편지를 받기도 했다.[1]마에다 도시이에는 우지사토가 부하들에게 공을 세우면 가모라는 성을 하사하는 상을 남발하는 기묘한 버릇을 나무란 적이 있다고 한다.[1]
4. 4. 급사에 관하여
가모 우지사토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나고야성에 주둔했지만, 진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1595년 음력 2월 7일(3월 17일)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향년 40세로 사망했다.[57]우지사토가 40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한 것에 대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시다 미쓰나리가 그의 재능을 두려워하여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우지사토를 진찰했던 의사 마나세 겐사쿠는 자신의 진료기록인 <의학텐쇼기>에서 우지사토가 임진왜란 참전 도중 이미 나고야 성에서 발병했고, 황달과 눈 밑 부종 등의 증상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겐사쿠의 진단으로 보아 우지사토는 직장암 또는 췌장암을 앓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지사토의 치료를 위해 세야쿠인 젠소를 필두로 마나세 겐사쿠, 이치오켄 소코 등 9명의 의사단을 구성하여 교대 치료를 진행했다. 마나세 겐사쿠가 남긴 『의학천정기』에는 분로쿠의 역 출병 중인 1593년 나고야성에서 발병하여 1595년 사망할 때까지 3년간 병을 앓았으며, 복수가 차고 얼굴과 손발에 부종이 생기는 증상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증상으로 미루어 볼 때, 우지사토는 직장암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간암이 사인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가모 우지사토는 히젠국 나고야에서 조선 출병 중 병을 얻어 1593년 11월 아이즈로 돌아왔다. 병세는 악화되었고 호전되지 않았다. 우지사토는 1594년 교토로 가서 유명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1595년 교토 후시미에 있는 자택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10]
4. 5. 사세구(辭世句)
불지 않아도 언젠가는 질 꽃을 왜 성급히 불어 떨어트리나 봄의 산바람이여[50]: ''가기리 아레바 후쿠네도 하나와 치루 모노오 코코로 미지카노 하루노 야마카제'' (바람이 불지 않아도 꽃은 질 것을, 마음 짧은 봄의 산바람이여)
이 시는 자신의 요절을 슬퍼하는 것이다.
기온 난카이, 코다 로한의 저서에 이 구절에 대한 평석이 있다. 야마다 후타로는 『인간 임종 도권』에서 "이 구절은 전국 무장의 절창으로 백미이다"라고 평했다.
5. 가신
가모 우지사토는 매달 한 번씩 모든 가신들과 회의를 열고 그들의 나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말하도록 허용했다. 그의 영지가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기에는 아직 작았던 시기에,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가신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자신이 직접 요리한 저녁 식사와 술로 그들을 귀빈처럼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가신들이 목욕을 하는 동안, 그들은 밖을 내다보라고 초대받았고, 그곳에서 그들은 숯으로 덮이고 장작으로 끓는 물을 끓이는 우지사토를 보았다. 가신들은 감동하여 충성을 다해 싸웠다고 한다.[1][4][8][10]
우지사토는 가신을 고용할 때마다 항상 "우리 하타모토는 항상 은색 메기 꼬리 헬멧을 쓴 전사가 앞장서니, 그에게 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라고 말했다. 신참들이 전장으로 나가면 메기 꼬리 헬멧을 쓰고 있는 사람은 바로 우지사토 자신이었다.[1][4][8][10]
우지사토는 다른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겁쟁이로 비웃음을 샀던 가신에게 갑자기 병력을 맡겼는데,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그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책임을 부여하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믿었다.[1][4][8][10]
우지사토는 한때 자신의 직위를 떠난 부하에게 경고했지만, 그가 돌아오는 길을 보았을 때, 그는 다시 사라졌고, 그래서 그는 즉시 그를 베었다고 한다. 이 부하에 대한 또 다른 설은 그가 중요한 메기 꼬리 헬멧을 맡았지만 그것을 소홀히 하여 베였다는 것이다.[1][4][8][10]
우지사토가 로마 출신의 '''로루테스''' (일본 이름: 야마시나 카츠나리일본어)라는 사람을 고용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하고, 그를 12명의 가모 가신들과 함께 로마로 보냈으며, 그가 돌아온 후에도 로마와의 무역을 계속 허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가모 가문의 가신인 오노 야고자에몬의 ''고유히쓰 닛키 쇼랴쿠'' (1642년)에 기록되어 있지만, 카츠나리가 다른 역사 문서에 나타나지 않고, 당시의 항해 기술과 언어로 로마를 여러 번 왕복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결론지어진다.[15]
- 한 달에 한 번, 가신들을 모두 불러 모아 자신의 저택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원망하지 않고, 화내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으며, 연장자나 녹봉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자유로운 발언이 허용되었다. 회의 후에는 우지사토가 직접 목욕탕(당시에는 매우 사치스러운 대접으로 여겨졌다.)을 데우거나 요리를 대접했다고 한다.
- 우지사토가 가신들을 사랑했던 것은, 그들을 술자리에 초대할 때, 스스로 목욕을 데워 들어가게 했다는 이야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 가신에게 은상으로 가모의 성씨와 '향' 자의 편휘를 하사했다.
- 니시무라 사마노스케라는 가신이 법도를 어겨 추방되었지만,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부탁하여 복귀를 허락받았다. 어느 날, 우지사토는 니시무라를 불러 씨름을 신청했다. 니시무라는 얕보여서는 무사의 수치라며 봐주지 않고,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우지사토를 이겼다. 니시무라는 자신이 처벌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지사토는 화를 내기는커녕 다음 날 가증했다. 니시무라의 정직함에 감탄한 것이다.
- 새로 들어온 부하에게는 "은색 메기 꼬리 투구를 쓰고 선봉에 서는 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지지 않도록 일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덧붙여, 그 은색 메기 꼬리 투구를 쓰는 자는 우지사토 자신이다.
- "지행(知行)과 정(情)은 수레의 양 바퀴, 새의 날개"라 하여, 공이 있는 무사를 후하게 대우하고, 문벌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가신단의 재편성을 행했다.
가모 우지사토의 가신 구성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이세 마쓰사카를 영유했던 덴쇼 15년(1587년) 9월에 우지사토와 그 가신단이 마미오카 와타무키 신사에 대한 권진에 응했을 때의 봉가장이 남아 있다. 주군인 우지사토가 1,000필, 마치노 시게나가가 200필, 가모 사토야스·기타가와 신자에몬노조·타마이 사다우가 100필로 이어져 당시 가모 가문의 서열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성씨별로는 소토이케가 7명, 가모가 6명(우지사토 제외), 마치노가 4명, 오카가 3명인데, 원래 분가였던 가모 츄헤이를 제외하고는 바로 직전의 규슈 정벌의 공적으로 우지사토로부터 가모의 성씨를 받은 자들이었다.
아래는 중신의 오슈 영내의 지성 임지·고쿠다카의 변천을 기록한 것이다.
성주 | 지성 |
---|---|
세키 카즈마사 | 시라카와성 () |
타마루 나오마사 | 스카가와성 ()→미하루성 ()→모리야마성 |
오구라 유키하루 | 시기야마성 (6,300석)→동 () |
가모 사토야스 | 이나와시로성→나가누마성 ()→동 () |
가모 사토나리 | 아코가시마성→시라이시성→니혼마츠성 () |
가모 사토요시 | 이나미성→나카야마성 () |
가모 요리사토 | 시오카와성 ()→야나가와성 |
가모 츄에몬 | 후지쿠라야마성→요츠마츠성 () |
키타가와 헤이자에몬 | 츠가와성 |
마치노 시게나가 | 이나와시로성 () |
가신 (가나다순, ◎는 상기 성주)
- 오카 키요나가(사나이의 조카)
- 오카 사나이(와카사국 국인)
- 오카 시게마사(가모 씨의 푸다이)
- 오구라 유키하루(가모 씨의 푸다이)◎
- 카가야마 오키요시(다카야마 우콘의 옛 신하)
- 가모 사토나리(시바타의 옛 신하)◎
- 가모 사토요시(사토나리의 아들)
- 가모 사토야(사토나리의 아들)
- 가모 사토야스(롯카쿠의 옛 신하)◎
- 가모 사토요시(시바타의 옛 신하)◎
- 가모 사토하루(사토요시의 동생)
- 가모 사토사다(롯카쿠의 옛 신하)
- 가모 츄에몬(타키가와의 옛 신하)◎
- 가모 나오시게(미노국 국인)
- 가모 요리사토(롯카쿠의 옛 신하)◎
- 카와키타 아리무네
- 키타가와 헤이자에몬◎
- 키무라 요시키요(아케치의 옛 신하)
- 키무라 키요히사(요시키요의 아들)
- 케츠게 시게키
- 고토 타카하루(롯카쿠의 옛 신하)
- 사쿠마 카츠유키(사사의 옛 신하) 테노코성 성주
- 사쿠마 야스마사(시바타의 옛 신하) 고쿠니성 성주
- 사나다 노부타다(다케다의 옛 신하)
- 세키 모리노부(이세국 국인)
- 세키 카즈마사(모리노부의 아들)◎
- 세키 카즈토시(모리노부의 아들)
- 세키 모리요시(모리노부의 아들)
- 소토이케 요시시게(가모 씨의 푸다이)
- 소네 마사요(다케다의 옛 신하)
- 타마이 사다우(가모 씨의 푸다이)
- 타마루 나오마사(이세국 국인)
- 나고야 산사부로(야마시로국 거주인)
- 나리타 우지나가(무사시국 국인)
- 나리타 야스치카(우지나가의 동생)
- 나리타 나가치카(우지나가의 종형제)
- 호소노 후지아츠
- 혼다 마사시게(미카와국 국인)
- 야마시나 카츠나리
- 마치노 시게나가(가모 씨의 푸다이)◎
- 마치노 유키카즈(시게나가의 아들)
- 마츠다 히데노부
- 미쿠모 나리모치(롯카쿠의 옛 신하)
- 미츠다 야스토시
- 모토이 타케히데(이세국 국인)
- 아사카 사마노스케(유아사 사마노스케)
6. 묘소 및 유품
- 교토시 기타구의 다이토쿠지에 묻혔으며, 한 사찰을 세워 쇼린인이라 칭했다. 현재의 오바이인이다.[50]
- : 오바이인에 있는 묘를 발굴한 결과, 칼을 안고 묻힌 형태로 매장되어 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 후쿠시마현아이즈와카마쓰시의 흥덕사 (유발)[50]
- 나마즈오노 카부토|鯰尾兜|메기 꼬리 투구일본어 또는 쿠로우루시누리 엔비나리 카부토|黒漆塗燕尾形兜|검은 옻칠 제비 꼬리 모양 투구일본어 (이와테현립박물관 소장).
- * 우지사토의 딸 오타케노카타가 난부 도시나오와 결혼할 때 우지사토가 착용했던 투구를 지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투에서 우지사토는 긴 나마즈오노 카부토|銀鯰尾兜|은색 메기 꼬리 투구일본어를 착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투구는 메기 꼬리 투구라고 불림에도 불구하고 제비 꼬리 모양이다. 이는 난부 가문의 장부에 메기 꼬리 투구로 기록되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우지사토가 착용했던 메기 꼬리 투구는 현존하지 않으며, 우지사토가 실제로 착용했던 투구의 모양이 메기 꼬리였는지는 불분명하다.
- 나마즈오 투구(연미형 투구) (이와테 현립 박물관 소장) - 오부노카타(우지사토의 딸, 일설에는 양녀)가 난부 도시나오에게 시집갈 때 지참품으로 증여했다고 전해진다.[55]
- 아이즈 신토고 검
- * 신토고 쿠니미츠가 제작하여 가모 우지사토가 소유한 검. "아이즈"라는 이름은 그가 지배했던 아이즈 지역을 가리킨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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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崎怜奈が橋場日月さん、黒田基樹さんと語る、蒲生氏郷大河ドラマ計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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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阪の偉人・蒲生氏郷や三井高利ら8人を紹介 市文化財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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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利休・七哲の一人と謳われた戦国武将、蒲生氏郷が愛した名水「若草清水」を訪ね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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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国時代のレオン?!信長を魅了し、秀吉を恐れさせた男・蒲生氏郷の素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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