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야마성 (오카야마현)
1. 개요
가쓰야마성 (오카야마현)은 아사히강이 크게 굽어 흐르는 지점에 위치한 일본의 성이다. 1336년경 축성되었다는 설과 1340년 미우라 사다무네에 의해 축성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다카다 성으로 불렸다. 센고쿠 시대에는 여러 차례 공방전이 벌어졌고, 모리 가문, 우키타 가문 등을 거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귀속되었다. 이후 모리 가문의 가신이 관리하다가, 1764년 미우라 아키쓰구가 성을 수복하고 가쓰야마성으로 명명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성되었으며, 현재 성터에는 유구와 해자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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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미마사카 가쓰야마성 |
|---|---|
| 다른 이름 | 다카다성 다이소산성 다쓰부사산성 갓산성 |
| 소재지 | 오카야마현 |
| 구조 | 연곽식 산성 |
| 천수 구조 | 없음 |
| 축성자 | 미우라 사다쓰라 |
| 축성 연도 | 센고쿠 시대 초기 |
| 개수자 | 미우라 아키쓰구 |
| 성주 | 미마사카 미우라 씨 후다이 미우라 씨 |
| 폐성 연도 | 메이지 4년 (1874년) |
| 유구 | 석벽 해자 구루와 흔적 |
| 재건 | 발굴 복원 석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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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야마 미우라가 -
미우라 아키쓰구 (1726년)
미우라 아키쓰구는 에도 시대 니시오 번주 미우라 요시노리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상속받고, 미마사카 국으로 이봉되어 가츠야마 번을 건립하고 통치하며 번의 기초를 다진 다이묘이자 서예가였다. -
가쓰야마 미우라가 -
미우라 마사쓰구
미우라 마사쓰구는 에도 시대 초기에 야하기 번의 다이묘를 지냈고, 와카도시요리로서 쇼군을 보좌했으며, 미부 번으로 이봉되어 통치하다 사망했다. -
우키타씨 -
오카야마성
오카야마성은 일본 오카야마현에 위치하며, 남북조 시대에 축성되어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에 이케다 씨의 거성으로 사용되었고, 메이지 시대에 폐성령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1960년대에 재건되어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천수각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우키타씨 -
우키타 히데이에
우키타 히데이에(1572-1655)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활동한 무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 고다이로에 임명되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유배된 인물이다. -
아마고씨 -
아마고 쓰네히사
아마고 쓰네히사는 센고쿠 시대 이즈모국의 슈고다이 아마고 씨 당주로, 교고쿠 씨 가신에서 시작하여 세력을 확장, 이즈모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넓히려 혼인 정책을 펼쳤으나, 후일 가문 내 내분으로 이어졌다. -
아마고씨 -
갓산토다성 전투
갓산토다성 전투는 1542년부터 1566년까지 오우치, 모리, 아마고 가문 간의 세력 다툼으로, 모리 가문이 승리하여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킨 일련의 전투이다.
3. 역사
1336년 간토 지방의 호족 미우라 가문의 당주 미우라 다카쓰구는 아시카가 다카우지로부터 미마사카국에 있는 닛타 요시사다 세력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고 미나토가와 전투에 참가해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이끄는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무렵에 성이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설은 1340년 미우라 사다무네가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미마사카 국 지토로 임명되어 이 지역으로 와 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다. 성이 축성될 당시 명칭은 다카다 성이었다. 일반적으로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엔겐 5년(1340년), 미마사카국 다카다 장의 영주가 된 미우라 사다무네가 이마가와 료슌의 설계로 현재의 가쓰야마(마니와시)의 뇨이산과 가쓰야마(다이코산)에 축성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료적인 뒷받침이 부족하고, 중세 성곽의 모습으로 볼 때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1544년 산인 지방의 대 다이묘 아마고 하루히사의 슬하에 있던 우야마 히사노부가 다카다 성을 공격하였고, 당시 당주 미우라 사다히사는 이를 격퇴하였다. 1548년 사다히사가 죽자 11세였던 미우라 사다카쓰가 성주로 부임했고, 이를 기회로 우야마 히사노부가 재차 공격하여 성을 함락한다. 하지만, 1559년 아마고 가문이 아키국의 호족 모리 모토나리를 공격하는 틈을 봐 성을 탈환한다.
이후 주고쿠 지방에서는 모리 가문이 대두하였고, 1565년 빗추 마쓰야마 성주 미무라 이에치카가 모리 가문에 종속해 다카다 성을 공격한다. 공성전이 벌여진 한달 후 성은 함락되었고, 성주 미우라 사다카쓰는 자결한다. 이 때 사다카쓰의 처 엔유인은 아들 미우라 도주마루와 함께 비젠국으로 도주하였고, 그 후 비젠의 지지기반으로 한 우키타 나오이에와 결혼하여 우키타 히데이에를 낳게된다.
1566년 우키타 나오이에 의해 미우라 이에치카가 암살되자, 미우라 가문의 가신단은 미우라 사다히사의 막내 동생 미우라 사다모리를 옹립하여 다카다 성을 탈환한다. 그러나, 1569년 모리 군에 의해 함락되어 사다모리는 전사하고, 미우라 가문의 다카다 성 탈환전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다카쓰의 동생 미우라 사다히로를 대장으로 한 미우라 군은 당초 비젠의 우키타 가문의 지원을 받아 다카다 성을 공격하였지만,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우키타 가문의 병력은 철수한다. 대신 모리 가문과 대립하고 있던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이끄는 아마고 가문의 잔존세력이 협력하여 1570년 3번의 공성전 끝에 성을 탈환한다. 1575년 우키타 가문은 미우라 사다히로에게 모리 가문과의 화의를 설득해 다카다 성을 모리 가문에 양도한다. 아울러 엔유인과 함께 우키타 가문에 비호를 받던 미우라 가문의 적류 미우라 도주마루는 1584년 교토에서의 지진으로 사망하여 미마사카 미우라 가문의 적통은 단절되었다.
그 후, 성은 모리 가문의 가신 나라자키 모토카네가 성주로 부임하였다가, 1584년 비젠, 미마카사 국이 우키타 가문의 소령이 되어 마키 가문이 성주 대리로 부임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키타 가문이 참전한 서군이 동군에 패한 후, 우키타 가문의 소령은 몰수 되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진다.
1602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죽자, 1603년 마시마 지역은 모리 다다마사의 쓰야마번에 편입되었고, 다카다 성은 모리 가문의 가신 가가미 가문과 오즈카 가문이 성을 관리하기 위해 조반(城番)으로서 입성한다. 1697년 모리 가문이 가이에키 되자, 마시마 지역은 막부직할령으로 편입되었고, 성은 일시 폐성되었다. 폐성에 대해서는, 1615년의 '일국일성령'에 의한 경우와, 시마바라의 난 후의 1638년 성터 파각 명령에 의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만, 문헌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니와시 교육위원회가 2014년에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는 혼마루 남쪽의 호구가 파각된 상태로 검출된 것으로 보아, 17세기 전반에 파각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1764년 미카와국 니시오번에서 미우라 아키쓰구가 2만 3천석을 배령 받아 마시마 지역으로 입성함에 따라 가쓰야마번이 성립된다. 번주 미우라 가문은 난보쿠초 시대부터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미우라 가문과 조상이 같다. 번주 아키쓰구는 막부로부터 4천량을 지원받아 성을 수복한다. 옛 다카다 성의 니시야마 기슭을 중심으로 어전 등을 정비해 가쓰야마 성으로 명명하였다. 수복된 가쓰야마 성의 니노마루에는 2층의 망루를 세웠고, 산노마루에는 어전을 두었다. 이후 메이지 시대를 맞이하였다.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성은 폐성된다.
현재 산정상부터 중턱에 걸쳐 구루와와 호리키리(해자)가 잔존해 있으며, 시로야마 그라운드(옛 니노마루)의 서쪽 구석에 2층 망루대의 석벽이 남아 있다. 2004년 성터는 전년에 있었던 산노마루 발굴조사를 토대로 정비되었다.
3.1. 난보쿠초 시대 ~ 무로마치 시대
1336년 간토 지방의 호족 미우라 가문의 당주 미우라 다카쓰구는 아시카가 다카우지로부터 미마사카국에 있는 닛타 요시사다 세력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고 미나토가와 전투에 참가해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이끄는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무렵에 성이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설은 1340년 미우라 사다무네가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미마사카 국 지토로 임명되어 이 지역으로 와 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다. 성이 축성될 당시 명칭은 다카다 성이었다. 일반적으로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엔겐 5년(1340년), 미마사카국 다카다 장의 영주가 된 미우라 사다무네가 이마가와 료슌의 설계로 현재의 가쓰야마(마니와시)의 뇨이산과 가쓰야마(다이코산)에 축성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료적인 뒷받침이 부족하고, 중세 성곽의 모습으로 볼 때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1544년 산인 지방의 대 다이묘 아마고 하루히사의 슬하에 있던 우야마 히사노부가 다카다 성을 공격하였고, 이에 당시 당주 미우라 사다히사는 이를 격퇴하였다. 1548년 사다히사가 죽자 11세였던 미우라 사다카쓰가 성주로 부임했고, 이를 기회로 우야마 히사노부가 재차 공격하여 성을 함락한다. 하지만, 1559년 아마고 가문이 아키국의 호족 모리 모토나리를 공격하는 틈을 봐 성을 탈환한다.
이후 주고쿠 지방에서는 모리 가문이 대두하였고, 1565년 빗추 마쓰야마 성주 미무라 이에치카가 모리 가문에 종속해 다카다 성을 공격한다. 공성전이 벌여진 한달 후 성은 함락되었고, 성주 미우라 사다카쓰는 자결한다. 이 때 사다카쓰의 처 엔유인은 아들 미우라 도주마루와 함께 비젠국으로 도주하였고, 그 후 비젠의 지지기반으로 한 우키타 나오이에와 결혼하여 우키타 히데이에를 낳게된다.
1566년 우키타 나오이에 의해 미우라 이에치카가 암살되자, 미우라 가문의 가신단은 미우라 사다히사의 막내 동생 미우라 사다모리를 옹립하여 다카다 성을 탈환한다. 그러나, 1569년 모리 군에 의해 함락되어 사다모리는 전사하고, 미우라 가문의 다카다 성 탈환전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다카쓰의 동생 미우라 사다히로를 대장으로 한 미우라 군은 당초 비젠의 우키타 가문의 지원을 받아 다카다 성을 공격하였지만,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우키타 가문의 병력은 철수한다. 대신 모리 가문과 대립하고 있던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이끄는 아마고 가문의 잔존세력이 협력하여 1570년 3번의 공성전 끝에 성을 탈환한다. 1575년 우키타 가문은 미우라 사다히로에게 모리 가문과의 화의를 설득해 다카다 성을 모리 가문에 양도한다. 아울러 엔유인과 함께 우키타 가문에 비호를 받던 미우라 가문의 적류 미우라 도주마루는 1584년 교토에서의 지진으로 사망하여 미마사카 미우라 가문의 적통은 단절되었다.
그 후, 성은 모리 가문의 가신 나라자키 모토카네가 성주로 부임하였다가, 1584년 비젠, 미마카사 국이 우키타 가문의 소령이 되어 마키 가문이 성주 대리로 부임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키타 가문이 참전한 서군이 동군에 패한 후, 우키타 가문의 소령은 몰수 되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진다.
1602년 고카야카와 히데아키가 죽자, 1603년 마시마 지역은 모리 다다마사의 쓰야마번에 편입되었고, 다카다 성은 모리 가문의 가신 가가미 가문과 오즈카 가문이 성을 관리하기 위해 조반(城番)으로서 입성한다. 1697년 모리 가문이 가이에키 되자, 마시마 지역은 막부직할령으로 편입되었고, 성은 일시 폐성되었다. 1764년 미카와국 니시오번에서 미우라 아키쓰구가 2만 3천석을 배령 받아 마시마 지역으로 입성함에 따라 가쓰야마번이 성립된다. 아울러 번주 미우라 가문은 난보쿠초 시대부터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미우라 가문과 조상이 같다. 번주 아키쓰구는 막부로부터 4천량을 지원받아 성을 수복한다. 옛 다카다 성의 니시야마 기슭을 중심으로 어전 등을 정비해 가쓰야마 성으로 명명하였다. 수복된 가쓰야마 성의 니노마루에는 2층의 망루를 세웠고, 산노마루에는 어전을 두었다. 이후 메이지 시대를 맞이하였다.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성은 폐성된다.
현재 산정상부터 중턱에 걸쳐 구루와와 호리키리(해자)가 잔존해 있으며, 시로야마 그라운드(옛 니노마루)의 서쪽 구석에 2층 망루대의 석벽이 남아 있다. 2004년 성터는 전년에 있었던 산노마루 발굴조사를 토대로 정비되었다.
3.2.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44년 산인 지방의 대 다이묘 아마고 하루히사의 슬하에 있던 우야마 히사노부가 다카다 성을 공격하였고, 당시 당주 미우라 사다히사는 이를 격퇴하였다. 1548년 사다히사가 죽자 11세였던 미우라 사다카쓰가 성주로 부임했고, 이를 기회로 우야마 히사노부가 재차 공격하여 성을 함락한다. 하지만, 1559년 아마고 가문이 아키국의 호족 모리 모토나리를 공격하는 틈을 봐 성을 탈환한다.
이후 주고쿠 지방에서는 모리 가문이 대두하였고, 1565년 빗추 마쓰야마 성주 미무라 이에치카가 모리 가문에 종속해 다카다 성을 공격한다. 공성전이 벌여진 한달 후 성은 함락되었고, 성주 미우라 사다카쓰는 자결한다. 이 때 사다카쓰의 처 엔유인은 아들 미우라 도주마루와 함께 비젠국으로 도주하였고, 그 후 비젠의 지지기반으로 한 우키타 나오이에와 결혼하여 우키타 히데이에를 낳게된다.
1566년 우키타 나오이에 의해 미우라 이에치카가 암살되자, 미우라 가문의 가신단은 미우라 사다히사의 막내 동생 미우라 사다모리를 옹립하여 다카다 성을 탈환한다. 그러나, 1569년 모리 군에 의해 함락되어 사다모리는 전사하고, 미우라 가문의 다카다 성 탈환전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다카쓰의 동생 미우라 사다히로를 대장으로 한 미우라 군은 당초 비젠의 우키타 가문의 지원을 받아 다카다 성을 공격하였지만,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우키타 가문의 병력은 철수한다. 대신 모리 가문과 대립하고 있던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이끄는 아마고 가문의 잔존세력이 협력하여 1570년 3번의 공성전 끝에 성을 탈환한다. 1575년 우키타 가문은 미우라 사다히로에게 모리 가문과의 화의를 설득해 다카다 성을 모리 가문에 양도한다. 아울러 엔유인과 함께 우키타 가문에 비호를 받던 미우라 가문의 적류 미우라 도주마루는 1584년 교토에서의 지진으로 사망하여 미마사카 미우라 가문의 적통은 단절되었다.
그 후, 성은 모리 가문의 가신 나라자키 모토카네가 성주로 부임하였다가, 1584년 비젠, 미마카사 국이 우키타 가문의 소령이 되어 마키 가문이 성주 대리로 부임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키타 가문이 참전한 서군이 동군에 패한 후, 우키타 가문의 소령은 몰수 되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진다.
3.3. 에도 시대 ~ 메이지 시대
1602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죽자, 1603년 마시마 지역은 모리 다다마사의 쓰야마번에 편입되었고, 다카다 성은 모리 가문의 가신 가가미 가문과 오즈카 가문이 성을 관리하기 위해 조반(城番)으로서 입성한다. 1697년 모리 가문이 가이에키 되자, 마시마 지역은 막부직할령으로 편입되었고, 성은 일시 폐성되었다. 폐성에 대해서는, 1615년의 '일국일성령'에 의한 경우와, 시마바라의 난 후의 1638년 성터 파각 명령에 의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만, 문헌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니와시 교육위원회가 2014년에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는 혼마루 남쪽의 호구가 파각된 상태로 검출된 것으로 보아, 17세기 전반에 파각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1764년 미카와국 니시오번에서 미우라 아키쓰구가 2만 3천석을 배령 받아 마시마 지역으로 입성함에 따라 가쓰야마번이 성립된다. 번주 미우라 가문은 난보쿠초 시대부터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미우라 가문과 조상이 같다. 번주 아키쓰구는 막부로부터 4천량을 지원받아 성을 수복한다. 옛 다카다 성의 니시야마 기슭을 중심으로 어전 등을 정비해 가쓰야마 성으로 명명하였다. 수복된 가쓰야마 성의 니노마루에는 2층의 망루를 세웠고, 산노마루에는 어전을 두었다. 이후 메이지 시대를 맞이하였다.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성은 폐성된다.
현재 산정상부터 중턱에 걸쳐 구루와와 호리키리(해자)가 잔존해 있으며, 시로야마 그라운드(옛 니노마루)의 서쪽 구석에 2층 망루대의 석벽이 남아 있다. 2004년 성터는 전년에 있었던 산노마루 발굴조사를 토대로 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