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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타 요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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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다. 1301년 닛타 씨의 당주로 태어나 1333년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위해 거병하여 막부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했다. 겐무 신정에서는 교토의 경비관아 수장을 맡았으나,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대립으로 인해 여러 전투를 치렀다. 1337년 가네가사키 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1338년 후지시마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야기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며, 후세에는 충신으로 추앙받아 정1위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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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타 요시사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가와치 겐지요시쿠니류 닛타 씨
통칭고타로, 손타로
계명겐코인덴 요시사다 가쿠아미다부쓰손이, 긴류지덴 신잔료고다이젠조몬
묘소후쿠이현사카이시 마루오카정 나가사키의 쇼넨지
이바라키현류가사키시 와카시바정의 긴류지
닛타 요시사다 공 초상화
닛타 요시사다 상 (후지시마 신사 소장)
생애
출생고안 3년 (1301년)
사망엔겐 3년/겐무 5년 윤 7월 2일 (1338년 8월 17일)
관위
관위정사위하
좌마조
고즈케 노카미
하리마노카미
에치고노카미
좌위문좌
좌병위독
좌근위중장
증 정2위 대납언 후, 정1위
정치 경력
막부가마쿠라 막부겐무 신정
주군호조 다카토키고다이고 천황
가족 관계
아버지닛타 도모우지
어머니도쿠다 가문 출신 (이시카와현 시카정에 도쿠다 고분 존재)
형제자매요시사다
와키야 요시스케
오다테 무네우지의 아내
배우자오다 마사치의 딸
아마노 미나부 다치바나노 도키노부의 딸 외
자녀요시아키
요시오키
요시무네
딸 (지바 우지타네의 아내)
시마다 요시히사 (요시미네)
딸 (이노우에 요리쿠니의 아내)
구마가이 사다나오?

2. 생애

(군마현 오타시 유라 정)]]

닛타 요시사다

2. 1. 가마쿠라 막부 타도

겐코 원년(1331년)부터 시작된 겐코의 변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막부군에 속해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지하야 성에서 버티는 전투에 참가했지만, 병을 이유로 닛타 장원으로 돌아갔다. 이는 막부의 과도한 군비 요구와 강압적 집행이 원인이었고, 요시사다가 거병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33]태평기》에서는 병을 핑계로 닛타 장원에 숨어 있던 요시사다가 막부의 징세사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33]와 구로자와 히코시로를 포박해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를 유폐시키고, 구로자와 히코시로는 살해한 후 거병을 결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겐코 3년/쇼코 2년(1333년) 음력 5월 8일, 고다이고 천황의 부름에 응해 이쿠시나 신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토벌을 기치로 거병하였다. 처음 모은 군은 150기에 불과했지만,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의 의견을 받아들여 가마쿠라로 진격했다. 에치고의 일가 친척도 가세하여 닛타 군은 도산도 서쪽으로 진격,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 아시카가 센주오(훗날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군과 합류하였다. 호조 가문과 먼 친척관계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가세로 주변 고케닌도 힘을 모아 닛타 군은 수만 명 규모로 커졌다.

닛타 군은 가마쿠라 가도를 따라 이루마 강을 건너 고테사시하라 전투에서 사쿠라다 사다쿠니, 가네자와 사다마사가 이끄는 막부군과 격돌하여 승리했지만, 무사시국 고케닌들의 지지로 부바이가와라(현 후추시)까지 퇴각한 막부군을 격파하였다. 다음날 세키토(현 다마시)에서 막부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후지사와까지 진출한 닛타 요시사다는 군을 3방면으로 나누어 가마쿠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고쿠라쿠지 방면 군이 주춤하자 간조를 이용해 이나무라가사키로 상륙, 막부군의 배후를 파고 들어 가마쿠라로 난입하여 도쇼지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 중 호조 다카토키 일가는 도쇼지에서 자결하여, 거병한 지 보름 만에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다.

닛타 요시사다가 류진에게 검을 바치는 모습


가마쿠라는 해안선을 제외하고 가파른 언덕으로 둘러싸여 육로 공격이 어려웠다. 닛타는 고쿠라쿠지 고개와 케와이자카 고개를 통해 진입하려 했지만, 강력한 호조 군에 막혔다. 육로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닛타는 사가미 만의 이나무라가사키 곶을 우회하여 바다를 통해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썰물을 이용하여 병사들을 해변으로 이동시켰지만, ''타이헤이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검을 파도에 던지고 류진에게 기도하여 류진이 그를 위해 물길을 갈랐다고 한다.

''타이헤이키''는 "말에서 내려 헬멧을 벗고 멀리 떨어진 바다를 향해 엎드려 류진에게 기도했다. "처음부터 일본의 주인이었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이세 진구에 봉안되어 비로자나불 안에 숨어 광대한 푸른 바다의 류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나의 주군(고다이고 천황)은 그녀의 후손이며 반역자들 때문에 서쪽 바다의 파도 위를 떠돌고 있습니다. 저 요시사다는 훌륭한 신하가 되기 위해 도끼를 들고 적의 대열에 맞서겠습니다. 그 소망은 국가를 돕고 대중에게 복지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일곱) 내해와 외해의 팔호호신 류진이시여, 이 신하의 충성을 목격하시고 물을 멀리 물리고 세 군대의 대열로 가는 길을 열어주소서."라고 전한다.[3]

소데노우라의 석비에는 "666년 전, 1333년 5월 21일[5] 닛타 요시사다는 육로 침공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곶을 우회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전설에 따르면 그가 금검을 파도에 던져 바다의 신[2]에게 물을 물리고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곳이다. (1917년 건립)"라고 적혀있다.[4]

2. 1. 1. 출생과 성장

닛타 가문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4남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의 서장자 닛타 요시시게를 시조로 한다. 닛타 가문은 닛타 장원(현 군마현 오타시 부근)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닛타 요시사다 때에는 본가 영지가 닛타 장원 60개 마을 중 겨우 10여 개 마을 이내에 불과했고, 요시사다 자신도 관직이 없는 등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였다.[32] 분포 2년 (1318년) 음력 10월 요시사다의 토지 권한을 나타내는 문서에 매주(買主)의 이름이 사다요시(貞義)로 잘못 표기되었는데, 이는 막부에서 닛타 본가의 지위가 낮았음을 보여준다.

요시사다의 장자 닛타 요시아키의 생모가 안도 가문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어, 싯켄 호조 가문의 유력 가신 안도 세이슈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몰락한 무사 가문인 닛타 본가가 싯켄 호조 가문의 가신 안도 가문의 딸을 맞이한 것이 된다.[32] 시모쓰키 소동으로 고즈케 국의 슈고가 아다치 가문에서 싯켄 호조 도쿠소케 출신으로 바뀌면서 고즈케도 호조 가문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유력 가신의 딸과 결혼한 것은 권력 밖으로 밀려 쇠퇴해가는 닛타 본가를 다시 세우려는 아버지 닛타 도모우지와 요시사다의 노력을 보여준다. 가문의 쇠퇴로 겐코 2년(1322년) 닛타 일가의 이와마쓰 마사쓰네와 오다테 무네우지 사이에 용수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 막부에 판정을 요구했지만, 요시사다의 판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요시사다는 1301년 닛타 도모우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를 계승하여 1317년에 고즈케 국 닛타 장원의 영주가 되었고, 닛타 씨의 당주가 되었다.[1] 요시사다는 조정 귀족의 딸인 고토 나이시(匂当内侍)와 교제하여 천황의 중재로 결혼했다.[6]

닛타 요시사다 탄생지 비
(군마현 오타시 유라 정)


요시사다는 닛타 씨 종가의 7대 당주 닛타 아사우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쇼안 3년(1301년) 전후로 추정된다.

요시사다가 태어난 가마쿠라 시대 말기까지 닛타 씨는 세이와 겐지인 가와치 겐지의 일족이었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시대부터 가까운 친척으로 우대받아 호조 씨와 혼인 관계를 맺어 명성을 떨친 아시카가 씨에 비해 명성, 관직, 영지 규모, 막부 내 지위 등 모든 면에서 뒤떨어졌고,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그러나 닛타 씨와 아시카가 씨는 대립 관계가 아니었고, 가마쿠라 시대를 통해 혼인 관계도 맺었다. 닛타 씨는 아시카가 씨에 대해 종속 관계에 있었으며, 겐무의 난 이전의 요시사다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휘하의 일부 장수였다는 연구도 있다.[12]

요시사다의 출생지는 다음 세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확실한 자료가 없어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닛타군 호센 촌 유라(오타시호센 지구): 『닛타 요시사다 정전』
  • 닛타군 이키나 촌 소리마치관(오타시닛타 지구): 『닛타 씨 근본 자료』 "지쿠고 사다・닛타 씨 계도"
  • 군마군 사토미 향(다카사키시하루나 지구): 『닛타 정전기』 "사토미 씨 계보"


요시사다가 자란 조즈케노쿠니닛타 장터(현재의 군마현오타시 주변)는 기상 변화가 심했다. 여름에는 소나기로 인한 굉음과 집중 호우가 맹렬했고, 겨울에는 강한 바람이 몰아치는 풍토였다. 선상지의 선앙 부분에는 관목, 초목이 무성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고, 닛타 일족이 궁술 등의 무예를 단련하는 연습장이 되어 가사카케노라 불렸다. 요시사다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 가사카케노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도네가와에서 수련하며 강인하게 성장했다고 여겨진다. 기상 변화가 풍부한 닛타장에서의 생활이 요시사다의 격렬한 기질과 의리, 인정을 중시하는 성격을 형성했다고 여겨진다.

쇼와 3년(1314년), 13세에 원복을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신뢰성이 낮다. 분포 2년(1318년)에는 요시사다가 조라쿠지 재건을 위해 사유지의 일부를 매각한 문서가 있고, 화압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해 이전에는 원복을 했다고 추정된다.

닛타 마사요시가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이후, 닛타 씨는 대대로 아시카가 씨 당주를 에보시 친으로 하여 의제적 친자 관계를 맺었다. 닛타 씨의 당주(마사'''우지'''・모토'''우지'''・아사'''우지'''])는 아시카가 가의 통자(通字)인 "씨"를 헨키로 받았다. "요시사다"의 이름에 "씨"가 붙지 않는 것은, 아시카가 다카오지 (다카우지의 이복 형)가 당주인 시기에 원복을 하고, 그의 헨키인 "요시"를 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2. 1. 2. 거병과 가마쿠라 공격

겐코 원년(1331년)부터 시작된 겐코의 변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막부군에 속해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지하야 성에서 버티는 전투에 참가했지만, 병을 이유로 닛타 장원으로 돌아갔다. 이는 막부의 과도한 군비 요구와 강압적 집행이 원인이었고, 요시사다가 거병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33]

겐코 3년/쇼코 2년(1333년) 음력 5월 8일, 고다이고 천황의 부름에 응해 이쿠시나 신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토벌을 기치로 거병하였다. 처음 모은 군은 150기에 불과했지만,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의 의견을 받아들여 가마쿠라로 진격을 결의했다. 에치고의 일가 친척도 가세하여 닛타 군은 도산도 서쪽으로 진격,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 아시카가 센주오(훗날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군과 합류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가세로 주변 고케닌도 힘을 모아 닛타 군은 수만 명 규모로 커졌다.

닛타 군은 가마쿠라 가도를 따라 이루마 강을 건너 고테사시하라 전투에서 막부군과 격돌하여 승리했지만, 무사시국 고케닌들의 지지로 부바이가와라 전투까지 퇴각한 막부군을 격파하였다. 다음날 세키토(현 다마시)에서 막부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후지사와까지 진출한 요시사다는 군을 3방면으로 나누어 가마쿠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간조를 이용해 이나무라가사키로 상륙, 막부군의 배후를 파고 들어 가마쿠라로 난입하여 도쇼지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 중 호조 다카토키 일가는 도쇼지에서 자결하여, 거병한 지 보름 만에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다.

가마쿠라는 해안선을 제외하고 가파른 언덕으로 둘러싸여 육로 공격이 어려웠다. 닛타는 고쿠라쿠지 고개와 케와이자카 고개를 통해 진입하려 했지만, 강력한 호조 군에 막혔다. 육로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닛타는 사가미 만의 이나무라가사키 곶을 우회하여 바다를 통해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썰물을 이용하여 병사들을 해변으로 이동시켰지만, ''타이헤이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검을 파도에 던지고 류진에게 기도하여 류진이 그를 위해 물길을 갈랐다고 한다.

''타이헤이키''는 "말에서 내려 헬멧을 벗고 멀리 떨어진 바다를 향해 엎드려 류진에게 기도했다. "처음부터 일본의 주인이었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이세 진구에 봉안되어 비로자나불 안에 숨어 광대한 푸른 바다의 류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나의 주군(고다이고 천황)은 그녀의 후손이며 반역자들 때문에 서쪽 바다의 파도 위를 떠돌고 있습니다. 저 요시사다는 훌륭한 신하가 되기 위해 도끼를 들고 적의 대열에 맞서겠습니다. 그 소망은 국가를 돕고 대중에게 복지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일곱) 내해와 외해의 팔호호신 류진이시여, 이 신하의 충성을 목격하시고 물을 멀리 물리고 세 군대의 대열로 가는 길을 열어주소서."라고 전한다.[3]

소데노우라의 석비에는 "666년 전, 1333년 5월 21일[5] 닛타 요시사다는 육로 침공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곶을 우회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전설에 따르면 그가 금검을 파도에 던져 바다의 신[2]에게 물을 물리고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곳이다. (1917년 건립)"라고 적혀있다.[4]

요시사다의 군은 가장 먼저 가마쿠라로 침공하여 도쇼지 전투에서 가마쿠라 막부·호조 도쿠소 가문을 멸망시키는 군공을 세웠다.

2. 2. 겐무 신정과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대립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이 시작된 후,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공으로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는 좌병위독(左兵衛督)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335년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가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켜 가마쿠라를 점령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천황의 허락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이를 진압하러 갔다. 이 과정에서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를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6]

이후 닛타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을 받들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아시카가 다다요시 등 다카우지 측 군대를 격파하며 진군했다. 그러나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다카우지에게 패배하여 교토로 후퇴했다. 1336년에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힘을 합쳐 교토로 진격하는 아시카가 군을 격퇴하고, 셋쓰 국 도요시마가와라(현 이케다시)에서 다시 한번 승리하여 정4위하 좌근위중장(左近衛中将)에 올랐다. 규슈로 달아난 다카우지를 추격했으나 아카마쓰 노리무라에게 저지당했고, 그 사이 다카우지는 세력을 키워 해상으로 교토를 공격해 왔다. 요시사다는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와다 곶에 진을 쳤으나 아시카가 수군을 막지 못하고 패배하여, 다시 교토에서 후퇴하였다.

미나토가와 전투 (1336)에서 분전하는 닛타 요시사다


이후에도 닛타 요시사다는 아시카가 형제와 계속 대립하였고, 결국 1336년 고다이고 천황이 다카우지와 화친하면서 다카나가 친왕과 쓰네나가 친왕을 에치젠국으로 호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가네가사키 성에서 포위되어 가네가사키 포위전 (1337)을 치렀고, 요시사다는 탈출했으나 아들 닛타 요시아키와 친왕들은 전사했다.[6]

한편, 『매송론』에 따르면, 구스노키 마사시게고다이고 천황에게 "닛타 요시사다를 처벌하고, 그 목을 가지고 다카우지와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사시게는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공은 다카우지에게 더 크며, 요시사다는 인망이 없지만 다카우지는 많은 장수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2. 2. 1. 겐무 신정에서의 활동

겐무 신정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공격의 공을 인정받아 좌병위독에 임명되어 교토 시 경비관아의 수장이 되었다.[6] 겐무 2년(1335년) 시나노 국에서 호조 가문 세력이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를 옹립해 가마쿠라를 점거하는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키자,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천황의 칙서를 구하지 못한 채 난을 진압하러 떠나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둔 무가정권의 태동을 알렸다.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그의 토벌을 고다이고 천황에게 주청했지만, 오히려 고다이고 천황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토벌령을 내렸다.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을 내세워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향했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 강 전투(현 오카자키시), 데고시가와라 전투(현 시즈오카시 스루가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 고 모로야스 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가마쿠라에서 군을 이끌고 온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결전에서 패해 교토로 도주했다(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

겐무 3년 (1336년) 음력 1월 오슈에서 온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교토의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연합하여 상경하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을 교토에서 축출하였고, 또다시 상경하려는 아시카가 군을 셋쓰 국 도요시마가와라(현 이케다시)에서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닛타 요시사다는 정4위하 좌근위중장에 위계되었다. 계속해서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격했지만, 하리마 국의 시로하타 성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를 평정한 후, 해로를 통해 교토로 진격하였고, 그동안 닛타 요시사다는 시로하타 성 공격에 시간을 허비하였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싸운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와다 곶에 진을 치고 맞서보지만, 아시카가 수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고, 니시노미야에서 교토로 도주했다.

2. 2. 2. 나카센다이의 난과 아시카가 다카우지 토벌

겐무 신정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공격의 공을 인정받아 좌병위독(左兵衛督)에 임명되어 교토 경비관아의 수장이 되었다.

겐무 2년, 시나노 국에서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를 옹립한 호조 가문 세력이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켜 가마쿠라를 점거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천황의 칙서 없이 난을 진압하러 떠나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둔 무가정권의 태동을 알렸다.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그의 토벌을 고다이고 천황에게 요청했지만, 오히려 고다이고 천황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토벌령을 내렸다.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을 내세워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향했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 강 전투(현 오카자키시), 데고시가와라 전투(현 시즈오카시 스루가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 고 모로야스 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가마쿠라에서 군을 이끌고 온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결전(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패해 교토로 도주했다.[6]

겐무 3년 음력 1월, 오슈에서 온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교토의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연합하여 상경하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을 교토에서 축출하였고, 다시 상경하려는 아시카가 군을 셋쓰 국 도요시마가와라(현 이케다시)에서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닛타 요시사다는 정4위하 좌근위중장(左近衛中将)에 위계되었다. 계속해서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격했지만, 하리마 국의 시로하타 성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를 평정한 후, 해로를 통해 교토로 진격하였고, 그동안 닛타 요시사다는 시로하타 성 공격에 시간을 허비하였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싸운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와다 곶에 진을 치고 맞서보지만, 아시카가 수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고, 니시노미야에서 교토로 도주했다.[6][7][8]

이후 몇 년 동안, 닛타 요시사다와 아시카가 다카우지 및 그의 동생 아시카가 타다요시 사이의 경쟁은 1335년에 두 형제를 제거하라는 칙명을 받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두 군대는 12월 야하기 강에서 시작하여 그 달 말 미시마에서 끝나는 일련의 전투를 벌였다. 요시사다의 군대는 결국 패배했고 형제들은 교토로 진격했다.[6]

아시카가군은 1336년 2월 며칠 동안 교토를 점령할 수 있었는데, 이는 노린나가 친왕과 다카나가 친왕으로부터 요시사다와 구스노기를 위한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이었다.[6] 1336년 4월 닛타는 하리마국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를 공격했다. 그는 타다요시의 군대가 진격할 때까지 6월까지 시로하타와 미쓰이시에서 아카마쓰의 요새를 포위했고, 그 후 퇴각했다.[6] 요시사다는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패배했고, 다카우지는 다시 교토를 점령할 수 있었다.[6]

닛타는 천황과 함께 히에이 산으로 퇴각했다. 결국 1336년 11월 13일, 천황은 다카우지의 제안에 동의하여 교토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기 전에 그는 닛타에게 다카나가 친왕과 쓰네나가 친왕을 에치젠국으로 호위하도록 위임했다. 그들은 충신들의 요새까지 갔고, 그곳에서 가네가사키 포위전 (1337)을 견뎌야 했다. 닛타는 탈출했지만, 그의 아들 닛타 요시아키와 친왕들은 결국 죽었다.[6]

2. 2. 3. 미나토가와 전투와 호쿠리쿠에서의 활동

겐무 신정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공격의 공을 인정받아 좌병위독에 임명되어 교토 경비관아의 수장이 되었다.[34]

겐무 2년 시나노 국에서 호조 가문 세력이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를 옹립해 가마쿠라를 점거하는 나카센다이의 난이 일어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천황의 칙서를 받지 않고 난을 진압하러 떠나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둔 무가정권의 태동을 알렸다.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그의 토벌을 고다이고 천황에게 요청했지만, 오히려 고다이고 천황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토벌령을 내렸다.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을 내세워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향했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 강 전투(현 오카자키시) , 데고시가와라 전투(현 시즈오카시 스루가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 고 모로야스 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가마쿠라에서 군을 이끌고 온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결전에서 패해 교토로 도주했다(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6]

겐무 3년 음력 1월 오슈에서 온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교토의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연합하여 상경하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을 교토에서 축출하였고, 다시 상경하려는 아시카가 군을 셋쓰 국 도요시마가와라(현 이케다시)에서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닛타 요시사다는 정4위하 좌근위중장에 위계되었다. 계속해서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격했지만, 하리마 국의 시로하타 성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를 평정한 후, 해로를 통해 교토로 진격하였고, 그동안 닛타 요시사다는 시로하타 성 공격에 시간을 허비하였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싸운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와다 곶에 진을 치고 맞서보지만, 아시카가 수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고, 니시노미야에서 교토로 도주했다.[6][7][8]

미나토가와 전투 후, 히에이 산으로 도망친 관군은 아시카가 군에 탈환된 교토를 되찾기 위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이마저도 저지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의를 맺고, 닛타 요시사다를 내쳐 히에이 산에서 하산하려하지만, 닛타 요시사다의 일가 가신 호리구치 사다미쓰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저희 가문의 충의를 저버리고 아시카가에게 항복하시겠다면 요시사다 이하 일족 전원의 목을 치고 나가시옵소서.”라며 이를 저지했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은 황위를 쓰네요시 친왕에게 양도하고 관군에 대한 권한은 쓰네요시 친왕과 다카요시 친왕에게 지휘권을 위임한 후 하산했다. 닛타 요시사다는 두 친왕과 아들 닛타 요시아키,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호쿠리쿠로 향했고, 에치젠 국 가나가사키 성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곧 고 모로야스, 시바 다카쓰네가 이끄는 아시카가 군에 포위되었다. 닛타 요시사다, 요시스케는 소마야마 산성을 탈출해, 소마야마 산성 성주 우리우 다모쓰와 함께 가나가사키 성의 포위진을 붕괴시키려 하지만, 실패한다. 엔겐 2년/겐무 4년 음력 3월 6일 가나가사키 성은 함락되었고, 다카요시 친왕과 아들 요시아키는 자결, 쓰네요시 친왕은 포로가 되어 교토로 호송되었다.[6]

같은 해 여름, 닛타 요시사다는 세력을 회복한 후, 시바 다카쓰네와의 사바에 전투에 승리해 에치젠 후추와 가나가사키 성을 탈환했다. 엔겐 3년/겐무 5년 윤 7월 아시카가 측으로 돌아선 헤이센지 승려가 농성하는 후지시마 성을 공격하고, 구로마루 성에서 원군으로 가세하기 위해 후지시마 성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불행히도 닛타 요시사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태평기》에서는 닛타 요시사다가 탄 말이 활에 맞아 쓰러졌고, 왼발을 안장에서 빼려는 찰나 미간에 활을 맞아 요시사다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고 적고 있다. 닛타 요시사다가 이 곳에서 전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사실로 보기 어렵고, 《헤이케 이야기》에서 묘사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죽음에서 힌트를 얻어 《태평기》의 작가가 창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닛타 요시사다의 목은 교토로 보내졌고, 그가 가마쿠라 막부 공격 때 노획한 세이와 겐지의 가보 히게키리[34]도 아시카가 가문 손에 넘어왔다고 한다.

2. 3. 호쿠리쿠에서의 최후

미나토가와 전투 이후, 히에이 산으로 피신한 남조 군은 아시카가 군에 빼앗긴 교토를 되찾기 위해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친을 맺으려 했으나, 닛타 가문의 가신 호리구치 사다미쓰가 "저희 가문의 충의를 저버리고 아시카가에게 항복하시겠다면 요시사다 이하 일족 전원의 목을 치고 가십시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34] 결국 고다이고 천황은 쓰네요시 친왕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남조 군 지휘권은 쓰네요시 친왕과 다카요시 친왕에게 위임한 후 하산했다.[34]

2. 3. 1. 가나가사키 성 전투와 후지시마 전투

고다이고 천황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의를 맺고 쓰네요시 친왕에게 황위를 양도한 후, 닛타 요시사다는 두 친왕과 아들 닛타 요시아키,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호쿠리쿠 지방으로 향했다.[34] 에치젠 국 가나가사키 성에 입성했지만, 곧 시바 다카쓰네 등이 이끄는 아시카가 군에 포위되었다. 요시사다와 요시스케는 소마야마 산성을 탈출해 가나가사키 성의 포위진을 붕괴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34] 겐무 4년/엔겐 2년 음력 3월 6일, 가나가사키 성은 함락되었고, 다카요시 친왕과 요시아키는 자결, 쓰네요시 친왕은 포로가 되었다.[34]

닛타 요시사다 전몰 전설지


같은 해 여름, 닛타 요시사다는 세력을 회복하여 시바 다카쓰네와의 사바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에치젠 후추와 가나가사키 성을 탈환했다.[34] 겐무 5년/엔겐 3년 윤 7월, 요시사다는 후지시마 성으로 향하던 중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34]태평기》에는 요시사다가 탄 말이 활에 맞아 쓰러지고, 안장에서 발을 빼려는 순간 미간에 활을 맞아 스스로 목을 베었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는 《헤이케 이야기》에 묘사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죽음에서 힌트를 얻은 창작으로 보인다.[34] 요시사다의 목은 교토로 보내졌고, 세이와 겐지의 가보 히게키리도 아시카가 가문의 손에 넘어갔다.[34]

1656년 이 전장터에서 농민이 투구를 발견하여 후쿠이번주에게 헌상했는데, 감정 결과 닛타 요시사다의 투구로 여겨져 후지시마 신사에 헌납되었고, 현재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34]

다른 기록에 따르면, 닛타 요시사다는 구로마루 공성전에서 호소카와 아키우지와 전투 중 말에 화살을 맞아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단도로 자신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다.[9] 그의 동료 사무라이들 중 다수가 충성을 다하기 위해 근처에서 ''준시 세푸쿠''를 했다고 전해진다.[9] 닛타 요시사다는 1338년 8월 17일에 사망했다.[1]

3. 평가와 후세에 미친 영향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나 《증경》에서는 닛타 요시사다를 아시카가 다카우지보다 낮게 평가했다. 반면 《매송론》은 요시사다의 인품을 칭찬하는 일화를 소개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황국사관에서는 요시사다를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버금가는 충신으로 칭송했지만, 종전 후에는 평범한 무장으로 보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가마쿠라를 단기간에 함락시킨 점 등을 들어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18] 군마현의 조모 가루타에는 "역사에 명망 높은 닛타 요시사다"라는 구절이 있어, 지역 주민에게 친숙한 무장임을 보여준다.

가마쿠라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닛타 요시사다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호적수로 평가받는다. 《매송론》은 요시사다를 "의심할 여지없는 명장"으로 칭송하며, 구스노키 마사시게조차 그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기록한다. 《겐이슈》는 요시사다와 다카우지를 동격의 명장으로 칭한다. 야마모토 다카시는 요시사다가 간토 지형과 호조 군 배치에 밝았으며, 분바이강 전투에서 뛰어난 지휘를 보여 겐코의 난 승리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한편, 《매송론》에서 마사시게는 인망 면에서 다카우지가 요시사다보다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 야마모토는 요시사다가 무사 중심의 고정관념에 갇혀 공가 다이쇼나 사찰 세력과의 연계가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3. 1. 당대 및 후대의 평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쓴 《신황정통기》에서는 닛타 요시사다를 아시카가 다카우지보다 낮게 평가하며 부정적으로 서술했다.[18] 《증경》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닛타 가문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막부 창설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 성립 후 겐지 계통 무사들 사이에서는 닛타 가문이 아닌 아시카가 가문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군담소설 《태평기》는 요시사다를 우유부단한 무장으로 묘사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셋쓰 도요시마가와라에서 요시사다에게 패해 규슈로 도주한 후, 고토노 나이시와 이별을 아쉬워해 추격을 게을리했고, 이 때문에 다카우지가 세력을 회복해 재차 거병하여 미나토가와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교토로 개선했다는 것이다.

반면, 《매송론》은 하코네 전투에서 패한 닛타 군이 덴류강 다리를 끊으려 할 때, 요시사다가 이를 만류하고 지역 주민에게 다리의 안전을 부탁한 일화를 소개하며, 아시카가 군 장병들이 이를 칭찬했다고 기록한다.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는 황국사관에 따라 요시사다를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뒤를 잇는 충신으로 평가했지만, 종전 후에는 평범하고 우둔한 무장으로 보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이는 《태평기》 묘사에 따른 평가로 신빙성이 낮고, 가마쿠라를 단기간에 함락시킨 점 등을 들어 무장으로서 자질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군마현 지역 가루타인 조모 가루타에는 "역사에 명망 높은 닛타 요시사다"라는 구절이 있어, 지역 주민에게 친숙한 무장임을 보여준다.

《태평기》는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 추토를 명령받은 요시사다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허락받은 궁녀 고토노 나이시와 이별을 슬퍼해 추토 시기를 놓쳤다고 기록한다. 황국사관에서는 요시사다를 남조에 충성한 무장으로 칭송하는 한편,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보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고토노 나이시는 요시사다 전사 후 비와호에 투신했다고도 하고, 교토 등지에서 요시사다의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도 있다.

요시사다는 정1위(1882년 8월 7일; 추증)를 받았다.

3. 2. 후세에 미친 영향

가마쿠라 막부를 공격할 때, 호조 사다나오가 지키는 고쿠라쿠지 방면에서 전투가 잘 풀리지 않았고, 해안은 호조 측 함대에 막혀 있었다. 이에 닛타 요시사다는 이나무라가사키에서 황금 다치를 바다에 던지며 용왕신에게 기원하자, 바다에서 간조가 나타나 그곳으로 돌파하여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태평기》 등에 전해진다. 문부성은 이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교과서에 싣기도 했다.

《태평기》에는 그 날이 1333년 음력 5월 21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1915년 오가와 기요히코는 이나무라가사키의 물때를 계산한 결과 그날 간조가 없었다고 밝혔다. 실제로는 막부군이 닛타 군의 도해를 예상하지 못하고 방심한 틈을 타 요시사다가 바닷물을 무릅쓰고 이나무라가사키를 건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1993년 이시이 스스무는 오가와 기요히코의 계산 기록과 옛 기록을 비교하여, 닛타 군의 이나무라가사키 도해 및 가마쿠라 공격 시기를 간조가 있던 음력 5월 18일 오후로 보고, 《태평기》의 날짜가 잘못되었다는 견해를 밝혔다.[35]

무로마치 시대에 닛타 가문은 조정의 적으로 여겨져 토벌 대상이 되었다. 닛타 요시사다의 직계는 1394년 ~ 1427년 손자 닛타 사다카타가 체포되어 큰아들 닛타 사다쿠니와 함께 가마쿠라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사다카타의 여러 아들 중 호리에 사다마사는 호리에(堀江)라는 성을 사용하여 무사시 국 이나게에서 살아남아 그의 자손은 고호조 가문을 섬겼다. 또 나카무라 사다나가는 나카무라(中村)라는 성을 사용하여 무쓰 국에서 살아남아 다테 가문을 섬겼다. 요시사다의 서자 출신인 후지자와 씨(藤沢氏) 등도 현재 남아있다. 사다카타의 서자인 닛타 무네치카의 가계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한편, 이와마츠 미츠쿠니와 닛타 요시카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이와마츠 미츠즈미도 닛타 요시카타의 아들이라 하며 이와마츠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도 시대 닛타 일족이라 칭하는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닛타 씨로의 복성이 허락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와마츠 가문은 메이지 정부의 판단에 따라 요시사다의 자손으로 인정되어 닛타 씨로 복성하고 화족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와마츠 가문의 가신 가문인 요코세 가문은 센고쿠 시대 하극상을 일으켜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으며, 유라 씨(由良氏)로 성을 바꾸고 닛타 가문의 자손임을 강조했다. 요코세 가문도 메이지 유신 이후 닛타 씨로 복성했다.

치바 우지타네와 닛타 요시사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치바 미츠타네의 가계는 지바 가문의 종가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1882년 8월 7일에는 요시사다에게 정1위가 추증되었다.

4. 유적, 유물 및 기념물

닛타 요시사다와 관련된 유적, 유물, 기념물은 일본 각지에 남아있다.


  • 군마현 오타시에는 세라다 정의 도모 역사자료관 앞과 요시사다가 거병한 이키나시 신사(닛타이노이마치) 경내에 동상이 있다. 이키나시 신사의 동상은 2010년 도난 후 재건되었다.[26]
  • 도쿄도 후추시 분바이가와라역 앞 로터리에도 기마상이 있다.[27]
  • 후쿠이현 후쿠이시에는 닛타즈카(新田塚)라는 지명이 있다.
  •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다키구치사와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히가시마치에는 닛타 요시사다의 수총이 있다.
  • 이바라키현 류가사키시 와카시바 정에 있는 킨류지에는 닛타 요시사다의 묘가 있다.
  •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 가미야마구치 2203의 야마구치 관음(곤조인)에는 닛타 요시사다 공 영마의 사당이 있다.
  • 도묘지나와테 닛타 요시사다 전몰전설지에는 후쿠이번마쓰다이라 미쓰미치가 세운 비석이 있으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군마 현 오타 시 닛타소리마치 정에 있는 사찰 소리마치야쿠시(反町薬師)는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을 결의한 곳으로 〈소리마치 관터〉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요시사다의 깃발 "중흑고기(나카구로코키)"가 재현되어, 군마현의 기류 직물 기념관에 전시되었다.[28][29]

4. 1. 유적 및 유물

; 유품·사적

  • 유품으로, 앞서 언급한 투구가 있다. 출토지에는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미쓰토시가 "닛타 요시사다 전사 이 땅"이라는 비석을 세웠으며, 이 장소는 1924년 (다이쇼 13년)에 "등명사 낫테 신타 요시사다 전몰 전설지"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닛타즈카"라는 지명도 남아 있지만, 투구 및 전몰지를 요시사다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지시마 신사의 해당 항목 및 등명사 낫테 신타 요시사다 전몰 전설지의 해당 항목 참조)
  • 군마현 오타시 닛타소리마치 정 896에 있는 소리마치 약사(진언종 루리산 묘코인 조명사)는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했을 때의 저택 터로 전해지며, "소리마치관 터"라고도 불린다. 이 관 터는 "닛타장 유적"의 일부로서 2000년 (헤이세이 12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묘·무덤

닛타 요시사다 공 수총, 오다와라시 히가시마치 4-5 오다와라 히가시 고교 앞 버스 정류장 근처


; 동상·현창

  • 군마현 오타시 세라다 정의 도모 역사 자료관 앞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60년대에 기증된 이 동상은 당초 조부 도로의 신조부대교 군마현 쪽에 설치가 검토되었지만, 공사 지연으로 오지마마치 역 앞쪽에 놓였다. 1985년 도모 역사 자료관 개관 시에 현재 위치에 설치되었다.
  • 요시사다가 거병한 땅인 이키나시 신사(오타시 닛타이노이마치) 경내에도 동상이 있다. 초대 동상은 1941년에 만들어져 1983년에 설치되었지만, 2010년 2월에 도난당해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후 재건 활동을 통해 2012년 5월 8일에 새로운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26]
  • 도쿄도 후추시 분바이가와라역(게이오 전철 게이오선·JR 난부선) 앞 로터리에도 기마상이 있다.[27]
  • 요시사다의 깃발 "중흑고기(나카구로코키)"가 재현되어, 군마현 기류 직물 기념관에 전시되었다.[28][29]

4. 2. 묘소 및 기념비


  • 군마현 오타시 세라다 정의 도모 역사자료관 앞에 닛타 요시사다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쇼와 40년대에 기증되었으며, 처음에는 조부 도로 신조부대교 군마현 쪽에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공사 지연으로 오지마마치 역 앞에 임시로 설치되었다. 이후 1985년 도모 역사자료관 개관과 함께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 요시사다가 거병한 이키나시 신사(오타시 닛타이노이마치) 경내에도 동상이 있다. 1941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1983년에 설치되었으나, 2010년 2월에 도난당했다. 이후 재건되어 2012년 5월 8일 새로운 동상이 제막되었다.[26]
  • 도쿄도 후추시 분바이가와라역(게이오 전철 게이오선·JR 난부선) 앞 로터리에도 기마상이 있다.[27]
  • 후쿠이현 후쿠이시에는 닛타즈카(新田塚:닛타 무덤)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 교토부교토시우쿄구에 있는 다키구치사에 닛타 요시사다의 수총이 있다.
  •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히가시마치에도 닛타 요시사다의 수총이 있다.
  • 유품으로는 투구가 있으며, 후쿠이번마쓰다이라 미쓰미치가 세운 비석이 도묘지나와테 닛타 요시사다 전몰전설지에 있고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군마 현 오타 시 닛타소리마치 정에 있는 사찰 소리마치야쿠시(反町薬師)는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을 결의한 곳으로 〈소리마치 관터〉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요시사다의 깃발 "중흑고기(나카구로코키)"가 재현되어, 군마현의 기류 직물 기념관에 전시되었다.[28][29]


참조

[1] 서적 Asashi Nihon rekishi jinbutsu jiten https://www.worldcat[...] Asahi Shinbunsha
[2] 문서 In describing this event, Japanese sources say Nitta Yoshisada prayed to a sea-god or [[Ryūjin]]; English sources almost always refer to Sun Goddess Amaterasu. See ''Taiheiki'' ([http://www.j-texts.com/taihei/tk010.html 稲村崎成干潟事]).
[3] 문서 Mutsu (1995:247)
[4] 문서 Original Japanese text available http://www.kcn-net.o[...]
[5] 웹사이트 Old Japanese lunar calendar date. Gregorian date obtained directly from the original Nengō using Nengocalc https://uni-tuebinge[...] 2007-09-30
[6]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7]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Inc.
[8]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9] 문서 Turnbull 2003.
[10] 문서 福井市立郷土歴史博物館企画・制作・編集・発行 『平成二十二年春季特別展 「藤島神社」の宝物』 2010年3月19日、pp.6,54。
[11] 문서 "{{Harvnb|奥富|1984|p=66}}、{{Harvnb|峰岸|2005|p=13}}、{{harvnb|山本|2005|p=45}}"
[12] 문서 田中・29-38頁{{full|date=2024-11}}
[13] 문서 『蠧簡集残編 六』所収「足利系図」([[東京大学史料編纂所]]架蔵謄写本)の高義の記事中の “高義 嫡子、号円福寺殿、文保元年六月廿四日卒” による。{{Harvnb|田中|2013|p=386}}にも掲載あり。
[14] 문서 "{{Harvnb|奥富|1984|p=85}}、{{Harvnb|峰岸|2005|pp=34-35}}、{{Harvnb|山本|2005|p=33}}"
[15] 문서 "{{Harvnb|田中|2011}}{{요 페이지 번호|date=2024-11}}"
[16] 문서 天文月報第八巻「太平記・稲村ケ崎長干のこと」
[17] 서적 고대의 천문이변과 사서 깃카와 고분칸
[18] 문서 田中・35頁{{Full citation needed|date=2024-11}}
[19] 문서 田中・37-38{{Full citation needed|date=2024-11}}
[20] 문서 田中・38頁{{Full citation needed|date=2024-11}}
[21] 문서 "{{Harvnb|峰岸|2005|p=103}}、{{Harvnb|山本|2005|p=203}}"
[22] 문서 山本 2005, p. 204, 峰岸, 107
[23] 문서 土屋光逸 Ross F.Walker 土井利一 『土屋光逸作品集 Meiji to shin-hanga,watercolours to woodblocks』 近江ギャラリー出版 2008年、p.199。
[24] 문서 明治33年4月7日に内務省告示第32号
[25] 문서 文化財保護法附則第3条第1項
[26] 웹사이트 勇姿再び、よみがえる新田義貞公 生品神社 https://allabout.co.[...] All About 2014-04-25
[27] 웹사이트 新田義貞公之像 https://www.kankou-f[...] 府中観光協会 2023-02-09
[28] 웹사이트 鎌倉攻めの光景浮かぶ 義貞「中黒古旗」復元  桐生 http://www.raijin.co[...] 上毛新聞 2013-07-17
[29] 웹사이트 新田義貞:軍旗復元 桐生織物記念館で展示中 /群馬 http://mainichi.jp/f[...] 毎日新聞 2013-07-17
[30] 문서 [[1300년]]생이라는 이설이 있다.
[31] 문서 [[아사다 데루히코]]가 쓴 《[[고지마 다카노리]]와 닛타 일족》(児島高徳と新田一族)에 따르면, 요시사다에는 에치고 국 가와이 장원의 호족 시마다 간에몬의 딸과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또, 요시히사는 이복형 닛타 요시오키와 함께 남조측에서 활약하고, 형이 모살되자, [[다마강]] 야구치와타리 부근의 주민 돈베(頓兵衛)의 딸 오후네가 요시히사를 숨겨주었다고 한다.
[32] 문서 [[안도 세이슈]]의 일가인 [[안도 시게야스]]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33] 문서 싯켄 호조 가문의 일가 기 씨(紀氏) 가문쪽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34] 문서 [[헤이안 시대]] [[미나모토노 미쓰나가]]가 만들게 했다는 [[일본도]]로 [[히자마루]]라는 일본도와 함께 겐지의 중요 보검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타노텐만구|기타노 덴만궁]](北野天満宮)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요 문화재이다. 칼의 길이는 약 81 cm이다.
[35] 서적 고대 천문이변과 사서 깃카와 고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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