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다 쇼료
1. 개요
가와다 쇼료는 1824년에 태어나 1898년에 사망한 일본의 화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그림을 배우고 교토에서 유학했으며, 보쿠운도라는 화학숙을 열어 교육 활동을 펼쳤다. 미국에서 귀국한 나카하마 만지로를 심문하며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만지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표손기략을 저술하여 개화 사상을 알렸다. 사카모토 료마에게 무역을 통한 일본의 발전을 설득하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비와코 소수이 공사 기록화를 제작하고, 메이지 천황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영예를 얻었으며, 작품으로는 미인도, 흡강도 병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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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의 화가 -
우타가와 히로시게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에도 시대 후기 우키요에 화가로, 풍경화 스타일을 확립하여 『도카이도 오십삼차』, 『에도 명소 백경』 등의 대표작을 남겼고 서양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에도 시대의 화가 -
와타나베 가잔
와타나베 가잔은 에도 시대 후기의 화가, 사상가, 정치가로서,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고 번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만사의 옥에 연루되어 할복했다. -
메이지 시대 사람 -
오쿠보 도시미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 번 출신의 일본 정치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막부 타도를 이끌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강력한 권력과 정책 추진 방식으로 비판받았으며 사족에게 암살당했다. -
메이지 시대 사람 -
히구치 이치요
메이지 시대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키재기》, 《섣달 그믐날》, 《흐린 강》 등의 단편 소설로 일본 근대 문학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으며, 사회적 약자와 여성의 고통을 섬세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은 높이 평가받고 5000엔 지폐의 초상화 모델로도 사용되었다. -
1824년 출생 -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는 체코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로,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작품 활동과 《팔려간 신부》, 《나의 조국》 등의 작품을 통해 체코 국민 음악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
1824년 출생 -
조지 맥도널드
조지 맥도널드는 1824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판타스테스》, 《공주와 고블린》 등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현대 판타지 문학에 영향을 준 작가이자 시인이다.
2. 생애
1824년(문정 7년) 10월 25일, 토사국 고치성 동쪽, 우라도 가타마치 수천궁 아래, 어선 담당의 경격의 번사, 토생 타마스케 유지쓰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인 가와다 긴에몬의 생가인 가와다 가문을 이어 가와다 성을 칭한다(후에 가와다 성으로 복귀). 어린 시절부터 시마모토 란케이에게 그림을 배우고, 16세 무렵에는 번 유학자 오카모토 네이우라의 문하에 들어갔다.
고카 원년(1844년), 요시다 도요를 따라 교토에 유학하여, 교토 가노 가문 9대째인 가노 에이가쿠에게 사사했다. 또한 이 무렵 오사카에서 서예를 배우고, 교토에서 남화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가에이 원년(1848년)의 니조 성 후스마 그림 수리 시에는 스승과 함께 종사했다.
가에이 3년(1850년) 북산 너머로 귀국하여 렌지 정에 거주하며, 화학숙 · 보쿠운도를 열었다.
가에이 5년(1852년), 미국에서 귀국한 어부 나카하마 만지로(존 만지로)의 심문을 담당했다. 토사 번의 허가를 얻어 만지로를 자택에 기숙시키고, 함께 생활하면서 매일 관청에 출두하게 하는 가운데, 만지로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면서 소류 자신도 영어를 배우게 되었고, 서로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소류는 만지로가 말하는 이국 생활의 사정에 크게 깨우침을 받아, 쇄국 일본의 현황과 이국의 발전의 차이에 놀라, 미국 대통령이 선거로 선출되는 것에 대해서는 만지로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의심하기까지 했다.
만지로의 밤 이야기를 흘려보내는 것을 아까워한 소류는 일체의 사견을 더하지 않고, 소류의 삽화를 더하여 표손기략 5권을 상재하여 번주에게 헌상했다. 동서가 에도에 반입되자 여러 다이묘 사이에서 평판이 높아져, 만지로가 막부 직참으로 발탁되게 되었다.
또한, 평소 친교가 있던 번 어용격 의사 오카가미 주안의 아내가 사카모토 료마의 누나 오토메였기 때문에, 소류는 외국의 큰 배를 사서 동지를 태우고 사람과 짐을 실어 해양으로 나아가, " '무역'을 통해 이국을 따라잡는 것"이 일본이 취해야 할 길이라고 료마에게 설득했다.
1878년(메이지 11년)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토사의 화가들이 좋아했던 화제인 흡강십경을 묶은 책자 『흡강도지』를 고고당에서 출판했다. 1879년(메이지 12년)에 은거하여 가독을 물려주었다.
1884년(메이지 17년) 제2회 내국 그림 공진회에 출품. 산조 사네토미 저택에 초청되어 연회를 받았다. 도쿄에서 귀국.
1888년(메이지 21년) 고치를 떠나 교토로 이주했다.
1889년(메이지 22년), 교토부 소수이 사무소의 서무 부속으로 채용되어, 비와코 소수이 공사 기록화를 제작했다. 소수이가 준공된 1890년(메이지 23년) 4월부터 1년이 채 안 되어 많은 그림을 남겼다. 이 『비와코 소수이 도지(상권·공사 착수 전의 약도 7엽과 오쓰 미호가사키에서 후지오 촌의 수직 갱까지의 26엽, 중권·제1 터널 서구에서 제3 터널 동구까지의 종수 35엽(내 미완성 6엽), 하권·제3 터널 서구에서 제6 터널 북구까지와 6쌍 병풍 그림 축도 2조의 종수 48엽(내 미완성 11매))』는, 현재 교토부립 종합자료관에 소장되어, 다무라 소리쓰에 의한 『비와코 소수이 그림』과 함께, 『비와코 소수이의 100년』(서술편·자료편·화집) 중 "화집"에 수록되었다.
1893년(메이지 27년), 교토에 거주하는 아들 란타로의 집으로 이주하여, 내국 근업 박람회 외 전시회에서 상을 받았다. 또한 히로시마에서 메이지 천황에게 어전 휘호의 영예를 받았다. 메이지 천황 어전 휘호 "선학도", 황태자 전하 어전 휘호 "부악과 용도"를 제작.
1898년(메이지 31년) 12월 19일 사망했다. 위암을 앓고 있었다. 이후, 도지인에 매장되었다. 향년 75세.
2.1. 초기 생애와 교육
1824년(문정 7년) 10월 25일, 토사국 고치성 동쪽, 우라도 가타마치 수천궁 아래에서 태어났다. 시마모토 란케이에게 그림을 배우고, 16세 무렵에는 번 유학자 오카모토 네이우라의 문하에 들어갔다. 1844년 (고카 원년), 요시다 도요를 따라 교토에 유학하여, 가노 에이가쿠에게 사사했다. 1848년 (가에이 원년)의 니조 성 후스마 그림 수리에 스승과 함께 종사했다.
1850년 (가에이 3년) 북산 너머로 귀국하여 렌지 정에 거주하며, 화학숙 · 보쿠운도를 열었다. 1852년 (가에이 5년), 미국에서 귀국한 어부 나카하마 만지로 (존 만지로)의 심문을 담당했다. 토사 번의 허가를 얻어 만지로를 자택에 기숙시키고, 함께 생활하면서 매일 관청에 출두하게 하는 가운데, 만지로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면서 소류 자신도 영어를 배우게 되었고, 서로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소류는 만지로가 말하는 이국 생활의 사정에 크게 깨우침을 받아, 쇄국 일본의 현황과 이국의 발전의 차이에 놀라, 미국 대통령이 선거로 선출되는 것에 대해서는 만지로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의심하기까지 했다. 만지로의 밤 이야기를 흘려보내는 것을 아까워한 소류는 일체의 사견을 더하지 않고, 소류의 삽화를 더하여 표손기략 5권을 상재하여 번주에게 헌상했다.
2.2. 나카하마 만지로와의 만남
가와다 쇼료는 가에이 5년(1852년)에 미국에서 귀국한 어부 나카하마 만지로(존 만지로)의 심문을 담당했다. 토사 번의 허가를 받아 만지로를 자택에 기숙시키고 함께 생활하면서, 만지로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도 영어를 배웠다. 이 과정에서 둘 사이에는 우정이 싹텄다.
쇼료는 만지로가 들려주는 이국 생활 이야기에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쇄국 정책을 고수하는 일본과 발전된 이국의 현실의 차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미국 대통령이 선거로 선출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만지로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의심할 정도였다.
만지로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쇼료는, 자신의 삽화를 더하여 표손기략 5권을 만들어 번주에게 헌상했다. 이 책은 에도에 전해져 여러 다이묘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만지로는 막부 직참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쇼료는 평소 친분이 있던 번 의사 오카가미 주안의 아내가 사카모토 료마의 누나 오토메였던 인연으로, 료마에게 "외국의 큰 배를 사서 동지들을 태우고 사람과 짐을 실어 해양으로 나아가 '무역'을 통해 이국을 따라잡는 것"이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설득했다.
2.3. 표손기략과 개화사상
1852년에 가와다 쇼료가 귀국한 존 만지로로부터 들은 내용을 기록한 표류기인 '표손기략'은 전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지로가 1841년 표류하여 미국 배에 구조된 후, 미국에서의 생활과 문화를 거쳐 약 11년 만에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번주 야마우치 요도에게 헌상되었으나 원본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료마 기념관에 따르면, 막부 말기에 제작된 사본이 6개 있으며, 그 중 하나는 기념관이 보관하고 있다. 동시대의 사본은 10종류 정도라고도 한다. 교토 외국어 대학교도 사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권1에는 표류 후 상륙한 토리시마에서 미국 배에 구조되기까지의 상황 외에 세계 약도와 토리시마 약도가 첨부되어 있다. 권2에는 동료 덴조 형제 등의 귀국에 관한 기술 외에, 하와이 오아후 섬호놀룰루의 사정, 미국 체류 중의 상황, 기선과 기차의 그림과 설명이 실려 있으며, 권4에는 만지로 등이 류큐를 거쳐 귀국하기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큐린본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사본은, 다이쇼 시대에 브루클린 박물관의 학예사 스튜어트 큐린이 도쿄에서 발견한 것으로, 삽화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큐린은 1912년에 료고쿠에서 열린 고서 전시 판매회에서 뉴잉글랜드의 풍경(보스턴 부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이 책을 구입했다. 『표손기략』의 사본임을 알고, 같은 해 말, 만지로의 장남 나카하마 토이치로가 큐린에게서 책을 빌려 전권을 필사했다. 큐린은 책과 함께 귀국하여, 1929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책을 곁에 두고 있었지만, 1948년에 유족이 희귀본 수집가에게 매각, 1966년에 필라델피아의 로젠바흐 박물관(:en:Rosenbach Museum and Library)이 구입하여, 유럽에 처음으로 미국을 소개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신대륙"과 함께 소장하고 있다. 큐린본은 1976년의 건국 200주년 기념에 워싱턴에서 공개된 후, 1999년에 로젠바흐 박물관에서, 2003년에 로스앤젤레스의 전미 일계 미국인 박물관에서, 2013년에 고치시의 료마 기념관에서 전시되었다.
2.4. 사카모토 료마와의 관계
가와다 쇼료는 나카하마 만지로가 미국에서 귀국한 후, 토사 번의 허가를 얻어 그를 심문하고 자택에 기숙시키며 함께 생활했다. 이 과정에서 쇼료는 만지로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며 서로 우정을 쌓았다. 만지로에게서 들은 이국 생활의 이야기는 쇼료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으며, 쇄국 일본의 현실과 이국의 발전된 모습의 차이에 놀라 미국 대통령이 선거로 선출된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기도 했다.
쇼료는 만지로의 이야기를 엮어 표손기략 5권을 집필하고 삽화를 더해 번주에게 헌상했다. 이 책은 에도에 전해져 여러 다이묘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만지로는 막부 직참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번 의사 오카가미 주안의 아내가 사카모토 료마의 누나 오토메였기 때문에, 쇼료는 료마에게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일본이 발전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설득했다.
2.5. 메이지 시대의 활동
1824년(문정 7년) 토사국 고치성에서 태어난 가와다 쇼료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배우고, 1844년 요시다 도요를 따라 교토에 유학하여 가노 에이가쿠에게 사사했다. 1850년 귀국하여 화학숙 '보쿠운도'를 열었다.
1852년 미국에서 귀국한 나카하마 만지로의 심문을 담당하면서 그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며 우정을 쌓았다. 만지로의 이야기를 토대로 표손기략을 저술하여 번주에게 헌상했고, 이는 여러 다이묘들에게 호평을 받아 만지로가 막부 직참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카모토 료마에게는 무역을 통해 이국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1878년 『흡강도지』를 출판하고, 1884년 제2회 내국 그림 공진회에 출품하여 산조 사네토미의 초청을 받았다. 1889년 교토부 소수이 사무소의 서무 부속으로 채용되어 비와코 소수이 공사 기록화를 제작했으며, 이는 현재 교토부립 종합자료관에 소장되어 있다.
1893년 내국 근업 박람회 등에서 상을 받고, 히로시마에서 메이지 천황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영예를 얻었다. 1898년 위암으로 사망하여 도지인에 매장되었다.
2.6. 만년과 죽음
1878년(메이지 11년)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토사의 화가들이 좋아했던 화제인 흡강십경을 묶은 책자 『흡강도지』를 고고당에서 출판했다. 1879년(메이지 12년)에 은거하여 가독을 물려주었다.
1884년(메이지 17년) 제2회 내국 그림 공진회에 출품했다. 산조 사네토미 저택에 초청되어 연회를 받았다. 도쿄에서 귀국했다.
1888년(메이지 21년) 고치를 떠나 교토로 이주했다.
1889년(메이지 22년), 교토부 소수이 사무소의 서무 부속으로 채용되어, 비와코 소수이 공사 기록화를 제작했다. 소수이가 준공된 1890년(메이지 23년) 4월부터 1년이 채 안 되어 많은 그림을 남겼다. 이 『비와코 소수이 도지(상권·공사 착수 전의 약도 7엽과 오쓰 미호가사키에서 후지오 촌의 수직 갱까지의 26엽, 중권·제1 터널 서구에서 제3 터널 동구까지의 종수 35엽(내 미완성 6엽), 하권·제3 터널 서구에서 제6 터널 북구까지와 6쌍 병풍 그림 축도 2조의 종수 48엽(내 미완성 11매))』는, 현재 교토부립 종합자료관에 소장되어, 다무라 소리쓰에 의한 『비와코 소수이 그림』과 함께, 『비와코 소수이의 100년』(서술편·자료편·화집) 중 "화집"에 수록되었다.
1893년(메이지 27년), 교토에 거주하는 아들 란타로의 집으로 이주하여, 내국 근업 박람회 외 전시회에서 상을 받았다. 또한 히로시마에서 메이지 천황에게 어전 휘호의 영예를 받았다. 메이지 천황 어전 휘호 "선학도", 황태자 전하 어전 휘호 "부악과 용도"를 제작.
1898년(메이지 31년) 12월 19일 사망했다. 위암을 앓고 있었다. 이후, 도지인에 매장되었다. 향년 75세.
3. 작품
고치현립미술관 소장의 미인도, 창조 광장 "액트랜드" 소장의 흡강도 병풍, 국청사 (고치시) 소장의 용호도 병풍, 흡강사 소장의 무소 소세키상 등이 있다. 흡강도 병풍은 이곡일쌍이며, 157.0x133.0(각)의 크기이다. 무소 소세키상은 견본채색 1폭으로, 115.0x49.5 크기이며, 1898년(메이지 31년)경에 제작되었고, 반산전소룡사의 낙관과 백문 방인 2과가 있다. 미인도는 1854년(안세이 원년)에 제작되었다.
| 작품명 | 기법 | 형상·원수 | 치수(세로x가로cm) | 소유자 | 연대 | 낙관 | 인장 | 비고 | |
|---|---|---|---|---|---|---|---|---|---|
| 미인도 | 견본채색 | 고치현립미술관 | 1854년(안세이 원년) | ||||||
| 흡강도 병풍 | 지본묵화담채 | 이곡일쌍 | 157.0x133.0(각) | 창조 광장 "액트랜드" | 반산소룡 | 백문 방인 2과 | 원 족자 그림 | ||
| 용호도 병풍 | 삼나무 판에 묵화 | 병풍 1기 | 114.3x165.0 | 국청사 (고치시) | |||||
| 무소 소세키상 | 견본채색 | 1폭 | 115.0x49.5 | 흡강사 | 1898년(메이지 31년)경 | 반산전소룡사 | 백문 방인 2과 | 적수 의목 찬(1998년 찬) |
4. 유산
고치시 미나미하리마야초에 있는 생가 터에는 "가와다 쇼료 탄생지 묵운동 터"의 비석이 있다. 묵운동은 가와다 쇼료가 열었던 사숙으로, 그림, 한학, 란학 등을 가르쳤다. 개명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묵운동에는 사카모토 료마, 곤도 조지로, 나오카 겐키치, 다케치 즈이잔, 다나카 미쓰아키, 신구 마노스케 등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며 논의의 장이 되었고, 이와사키 야타로와 고토 쇼지로도 여기서 만났다.
5. 관련 서적
* 漂巽紀略 附 研究 河田小龍とその時代일본어, 고치 시민 도서관, 1986년
* 漂巽紀略 全現代語訳일본어, 고단샤 학술 문고, 타니무라 타이무 역, 키타다이 준지 감수,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