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가와 히로시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1797년 에도에서 태어나 1858년 사망한 일본의 우키요에 화가이다. 그는 풍경화, 특히 '도카이도 53차'와 '에도 명소 백경' 시리즈로 유명하며, 19세기 최고의 풍경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히로시게는 우타가와파의 일원으로, 독특한 시점과 색채, 특히 '히로시게 블루'로 불리는 남색을 사용하여 인상파 화가와 아르누보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판화가 - 가쓰시카 호쿠사이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1760년 에도에서 태어나 70년 이상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1만 2천 점 이상의 작품을 제작했고, 대표작으로 《후지산 삼십육경》과 《가나가와 해변의 큰 파도》 등이 있으며 서양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판화가 - 후지타 쓰구하루
후지타 쓰구하루는 서양 미술 기법과 일본 전통 미감을 결합한 독자적인 화풍으로 프랑스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쟁 협력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후 재평가되어 일본과 프랑스 양국에서 꾸준히 전시회가 열리는 일본의 화가이자 삽화가이다. - 에도 막신 - 히지카타 도시조
히지카타 도시조는 막말과 메이지 유신 시대의 신센구미 부장으로, 엄격한 규율과 뛰어난 지휘력으로 조직을 다졌으며 보신 전쟁과 하코다테 전쟁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인물이다. - 에도 막신 - 마에지마 히소카
마에지마 히소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우편 제도 창설과 근대화에 기여하여 "우편의 아버지"로 불리며, 한자 폐지론 주장, 에도 천도 건의, 철도 부설 기안, 신문 사업 육성, 육운 원회사 창립, 해운 정책 건의, 우편 저축 및 우편환 시스템 도입, 훈맹원 설립 지원, 도쿄 전문학교 설립 지원 등 일본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사회적 불평등 심화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유산에 대한 재평가 또한 존재하는 인물이다. - 우키요에 화가 - 스즈키 하루노부
스즈키 하루노부는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화가로, 다색 목판화 기법인 니시키에를 발전시켜 우키요에 발전에 기여했으며, 미타테에 양식으로 에도 시대 생활상을 담아낸 섬세하고 서정적인 작품을 남겼다. - 우키요에 화가 - 우타가와 도요하루
우타가와 도요하루는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화가이자 우타가와파의 창시자로, 서양식 원근법을 활용한 우키에를 발전시켜 풍경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후대 풍경 판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안도 도쿠타로 |
출생일 | 1797년 |
출생지 | 에도, 일본 |
사망일 | 1858년 10월 12일 |
사망지 | 에도, 일본 |
국적 | 일본 |
분야 | 회화 목판화 |
훈련 | 도요히로 |
유파 | 우타가와파 |
주요 작품 | 《도카이도 오십삼차》 《기소 가도 육십구차》 《명소 에도 백경》 |
이름 | |
로마자 표기 | Utagawa Hiroshige |
추가 정보 | |
영향 받은 예술가 | 우타가와 도요히로 가쓰시카 호쿠사이 |
영향을 준 예술가 | 고바야시 기요치카 인상파 등 서양 예술 |
감수 | 야마모토 히로부미 |
2. 생애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는 에도(江戸) 야요스가시(八代洲河岸) 정화소(定火消) 저택의 동심(同心) 안도 겐에몬(安藤源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났다. 겐에몬은 원래 다나카가(田中家) 사람으로, 안도가(安藤家)의 양자로 들어가 아내를 맞이했다. 장녀와 차녀, 그리고 장남 히로시게, 히로시게의 아래에 삼녀가 있었다. 분카(文化) 6년(1809년) 2월, 어머니를 여의고 같은 달 아버지가 은퇴하자, 만 13세에 히로시게가 화소(火消) 동심 직을 계승했다. 같은 해 12월에 아버지도 사망했다.
어릴 적부터 뛰어난 그림 솜씨를 보였고, 분카 8년(1811년) 15세 무렵, 초대 '''우타가와 토요쿠니(歌川豊国)'''의 문하에 들어가려 했으나, 문하생이 가득 차 거절당하고 '''우타가와 토요히로(歌川豊廣)'''(1774년-1829년)에게 입문했다. 이듬해(1812년) 스승과 자신으로부터 한 글자씩 따서 '''우타가와 히로시게'''라는 이름을 받았고, 분세이(文政) 원년(1818년)에 이치유사이(一遊斎)라는 호를 사용하여 데뷔했다.
분세이 4년(1821년)에 같은 화소 동심인 오카베 야자에몬(岡部弥左衛門)의 딸과 결혼했다.
분세이 6년(1823년)에는 양조부(안도가) 쪽의 적자 나카지로(仲次郎)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자신은 테츠조(鉄蔵)로 개명하여 후견인이 되었지만, 나카지로가 아직 8세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화소 동심 직의 대번을 맡았다.
처음에는 역자에(役者絵)로 시작하여, 점차 미인가(美人画)에 손을 댔지만, 분세이 11년(1828년) 스승 토요히로가 사망한 후에는 풍경화(風景画)를 주로 제작했다. 덴포(天保) 원년(1830년) 이치유사이에서 '''이치유사이 히로시게(一幽斎廣重)'''로 개명하고, 화조도(花鳥図)를 그리기 시작했다.
덴포 3년(1832년), 나카지로가 17세로 성인식을 치렀으므로 공식적으로 동심 직을 양도하고, 화가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치류사이(一立齋)'''라는 호를 바꾸었다. 또한 릿푸사이(立斎)라고도 불렀다. 입문 후 20년 동안 스승은 토요히로뿐이었지만, 이 무렵 오오카 운포(大岡雲峰)에게서 남화(南画)를 수학했다.[12]
[[File:Hiroshige Atake sous une averse soudaine.jpg|right|thumb|160px|명소에도백경 대하시아타케의 저릿]
이 해에 공무로 도카이도(東海道)를 오르며 그림을 그렸다고 하나, 현재는 의문시되고 있다. 이듬해부터 「동해도 53차」를 발표했다. 풍경화가로서의 명성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후 여러 종류의 「동해도」 시리즈를 발표했지만, 여러 종류의 「에도 명소」 시리즈도 많이 제작했고, 모두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단자판의 화조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계속해서 발표했고, 그 밖에 역사화(歴史画)・장교에(張交絵)・희화(戯画)・완구에(玩具絵)와 춘화(春画), 말년에는 미인화 3폭 연작도 제작했다. 더욱이 육필화(肉筆浮世絵)・슬물(摺物)・단선에(団扇絵)・쌍륙(双六)・그림 봉투 외에 그림책・합권(合巻)과 광가(狂歌) 책 등의 삽화도 남겼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합치면 총수가 2만 점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덴포 7년(1836년) 8월 14일 야나기바시 만파치로(柳橋万八楼)에서 개최된 곡정 바킨(曲亭馬琴)의 고희 축하 서화회에 참석했다.
덴포 8년(1837년), 추슈신도(中山道)를 경유하여 교토(京), 오사카(大坂)에서 시코쿠(四国)의 마루가메(丸亀)로 여행을 하고 귀로는 나라(奈良), 이세(伊勢)를 거쳐 도카이도를 통해 에도로 돌아왔다.
덴포 9년(1838년) 윤4월 18일 야나기바시 코우치야(柳橋河内屋)에서 개최된 2대째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重信)의 서화회에 참석했다.
안세이(安政) 5년에 사망했다. 향년 62세. 사인은 콜레라였다고 전해진다. 묘소는 아다치구(足立区) 이쿄우쵸(伊興町)의 토가쿠지(東岳寺)에 있다. 법명은 현공원덕옹립제거사(顕功院徳翁立斎居士). 친구 우타가와 쿠니사다(歌川国貞)(
> 동로에 붓을 남기고 여행의 하늘 서쪽 나라의 명소를 보리라
("죽으면 서방정토의 명소를 둘러보고 싶다"는 뜻)
#REDIRECT
분큐(文久) 연간(1861년~1863년)의 「에도 니혼바시 미나미노 에즈」에 따르면, 니혼바시 오가초(현재의 교바시)에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집이 있었고,[13] 서쪽 이웃에는 가노 에이토쿠의 옛집이 인쇄되어 있다.
그 후, 교바시에서 도로 다섯 개 정도 건너편의 토키와초로 이사한 것 같다.[14]
2. 1. 초기 생애와 수련
히로시게는 1797년 에도(현재의 도쿄) 야에스 지역 야요스 부두에서 사무라이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북부 무쓰 지방의 쓰가루 씨족 휘하에서 권력을 쥐었던 다나카 도쿠에몬의 증손자였다. 히로시게의 아버지 겐에몬은 안도 주에몬의 가족에게 입양되어 야요스 부두의 소방관을 계승하였다.히로시게는 젊은 시절 주에몬, 도쿠베, 테쓰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1809년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버지로부터 소방관 직무를 넘겨받았다. 그는 에도 성의 화재 예방을 담당했는데, 이 직무 덕분에 많은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부모가 사망한 직후, 아마도 14세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도요쿠니의 우타가와파 문하에 들어가려 했지만, 제자를 너무 많이 받아 거절당하고, 도요히로에게 입문했다. 1812년 히로시게는 자신의 작품에 예명 히로시게로 서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가노파, 중국 남종화에서 시작된 남화 전통, 사실적인 시조파, 그리고 서양 미술의 원근법 기법과 우키에를 공부했을 가능성이 높다.
1823년 그는 소방관 직책을 아들에게 넘겼지만, 여전히 대리로 활동했다. 1828년 스승 도요히로가 사망했을 때 그의 뒤를 이을 제안을 거절했다.
히로시게의 초기 작품에는 우타가와풍의 미인과 가부키 배우를 그린 책 삽화와 단독 판화인 우키요에가 포함되어 있으며, 때로는 이치유사이 또는 1832년부터는 이치류사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하였다.

'츠쿠다의 돌아오는 범선', '에도팔경' 중, 19세기 초
2. 2. 풍경화가로서의 명성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1829년부터 1830년에 걸쳐 오미팔경 시리즈와 같은 풍경화를 제작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조류와 화훼 그림도 많이 제작했다. 1831년경에는 동도명승십경을 발표했는데, 이는 후지산 삼십육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832년, 히로시게는 교토로 가는 공식 행렬에 참여하여 도카이도를 여행하며 풍경을 스케치했고, 에도로 돌아와 도카이도 오십삼차 시리즈를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나니와 명소』 (1834년), 『교토 명소』 (1835년) 등 다른 시리즈를 제작했다. 히로시게는 교토 서쪽 지역은 직접 가본 적이 없어, 오사카와 오미국의 그림은 책과 그림을 참고하여 제작했다.
히로시게의 첫 번째 부인은 그의 여행 경비를 지원했으며, 1838년 10월에 사망한 후 히로시게는 오야스와 재혼했다. 1838년경에는 『에도 주변 팔경』이라는 두 개의 시리즈를 제작했고, 1835년에서 1842년 사이에는 기소가이도 육십구차를 케이사이 아이젠과 공동 제작하여 46개의 판화를 담당했다.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에도 명소 백경』에 대한 118장의 판화를 제작했다. 『에도 명소 백경』에서 히로시게는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아 대규모 사물, 사람, 동물 등을 전경에 배치하여 깊이감을 더했다.

1833년에는 원근법을 사용하고 바람과 비를 느끼게 하는 입체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걸작 『동해도 오십삼차』가 탄생했다. 이 작품은 당시 사람들이 동경했던 외부 세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히로시게는 1832년 가을 막부 일행에 합류하여 교토까지 동해도를 왕복 여행하며 실제 풍경을 보았다는 전승이 있지만, 실제로는 여행을 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2. 3. 후기 생애와 죽음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말년에도 여전히 작품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천 점의 판화를 제작했지만, 전성기 시절만큼 훌륭한 작품은 드물었다.[3] 그의 왕성한 작업량은 시리즈당 낮은 수입 때문이었지만, 조건이 맞으면 여전히 놀라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의 걸작인 명소에도백경은 출판사의 우오야 에이키치(魚屋栄吉)의 딸과 사랑에 빠진 부유한 불교 승려가 선금을 지불한 것이다.[3]1856년, 히로시게는 "세상을 등졌다"라고 하며 불교 승려가 되었는데, 이는 명소에도백경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3] 그는 1858년 에도 대콜레라 유행 중 6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콜레라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사쿠사(浅草)의 선종 사찰에 묻혔다.[3]
사망 직전 그는 작별시를 남겼다.[3]
{{Quote
|text=
동로니/東路に일본어
후데오 노코시테/筆を残して일본어
타비노 소라/旅の空일본어
니시노 미쿠니노/西のみくにの일본어
동쪽 길에
붓을 남기고
여행길에 오르니
서쪽 땅의
명소를 보리라.
}}
(이 맥락에서 서쪽 땅은 교토와 에도 사이의 도카이도(東海道) 지역을 가리키지만, 아미타불(阿弥陀仏)의 극락정토를 가리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3] 그의 생산성과 인기에도 불구하고 히로시게는 부유하지 않았다. 그의 수입은 다른 인기 있는 예술가들보다 적어, 일용직 노동자 임금의 약 두 배에 불과했다. 그의 유언에는 빚을 갚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안세이(安政) 5년(1858년) 9월 6일 61세로 사망하였다. 사인은 콜레라였다고 전해진다. 묘소는 도쿄 아다치구에 있는 선종 사찰 동가쿠지(東岳寺)에 있다.
3. 작품 세계
히로시게는 8,000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다. 초기 작품에서는 주로 비진가/美人画일본어와 야쿠샤에/役者絵일본어 등 일반적인 우키요에 주제에 집중했다. 그러다 도요히로 사후, 1831년 풍경 시리즈인 '도토메이쇼/東都名所일본어'를 통해 극적인 전환을 이루었는데, 이 작품은 구성과 색채로 호평을 받았다. 이 시리즈는 히로시게가 이치유사이 히로시게라는 이름으로 서명했기 때문에 '이치유사이 가키'라는 제목으로 불리며, 히로시게의 많은 에도를 묘사한 판화 시리즈와 구별된다. 1833년부터 1834년까지 제작된 '도카이도의 오십삼차'를 통해 그의 성공은 확고해졌다.[6] 이 그림들은 히로시게가 약 490km에 달하는 전체 거리를 실제로 여행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여행 날짜, 장소, 동행 여행자들의 일화 등 세세한 부분까지 포함되어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사실 이 시리즈는 너무 인기가 많아 세 번이나 재발행되었는데, 그중 한 번은 쿠니사다와 공동으로 제작되었다.[8] 히로시게는 에도와 역참 도카이도의 2000점이 넘는 다양한 판화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기소가도의 육십구차'(1834~1842)와 자신의 '후지산 삼십육경'(1852~1858)과 같은 시리즈도 제작했다.[6] 추정 총 5000점의 디자인 중에서 풍경화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세쓰슈와 같은 중국 풍경화가들의 전통과 비교했을 때, 소규모의 친밀한 작품이라는 독특한 스타일로 풍경 판화계를 지배했다. 여행 판화는 주로 유명한 길을 따라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다양한 정거장의 특별한 매력을 경험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비와 눈 속에서 그리고 모든 계절 동안 여행한다. 1856년, 출판사 우오야 에이키치와 함께 고급 판화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정확한 색상의 그라데이션, 독특한 무지개빛 효과를 내는 운모 추가, 엠보싱, 직물 인쇄, 무늬 없는 인쇄, 그리고 풀 인쇄(잉크에 풀을 섞어 반짝이는 효과를 내는 기법) 등 최고의 인쇄 기술을 사용했다. 히로시게는 그의 시리즈인 '육십여 주의 명경'에서 풍경 판화에 세로 형식을 개척했다. '에도 명소 백경'(1856년부터 1859년까지 연재로 발행)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이 시리즈는 사후에 출판되었고 일부 판화는 미완성 상태였다. 그는 100점 이상을 직접 제작했지만, 두 점은 그의 사후 히로시게 2세가 추가했다.
3. 1. 주요 작품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1830년대에 『오미팔경』 시리즈와 『동도명승십경』을 제작하며 풍경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831년경에는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 삼십육경』에 영향을 받은 『동도명승십경』을 발표했다.1832년, 히로시게는 도카이도를 여행하며 풍경을 스케치했고, 이를 바탕으로 『도카이도 오십삼차』 시리즈를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리즈는 너무 인기가 많아 세 번이나 재발행되었다.[8] 이후 『나니와 명소』 (1834년), 『교토 명소』 (1835년) 등을 제작했다. 오사카와 오미국의 그림은 책과 그림을 참고하여 제작했다.
덴포 4년(1833년)에 원근법을 사용하고 입체적인 묘사를 한 『동해도 오십삼차』가 호평을 받았다.[17] 히로시게는 동해도를 왕복 여행하며 실제 풍경을 보았다는 전승이 있지만, 실제로는 여행을 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17]
1838년경에는 『에도 주변 팔경』을 제작했고, 1835년에서 1842년 사이에는 케이사이 아이젠과 『기소가이도 육십구차』를 공동 제작했다. 히로시게는 『기소가이도 육십구차』의 70개 판화 중 46개를 담당했다.
섬네일
히로시게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에도 명소 백경』에 대한 118장의 판화를 제작했다.[6] 『에도 명소 백경』에서 히로시게는 서양 미술에서 유래한 기법을 사용하여 구성에 깊이를 더했다.[5] 『에도 명소 백경』은 사후에 출판되었고 일부 판화는 미완성 상태였다.[6]
히로시게는 8,000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초기에는 여성(비진가/美人画일본어)과 배우(야쿠샤에/役者絵일본어)를 주로 그렸으나, 1831년 풍경 시리즈인 '동도명소'(東都名所|도토메이쇼일본어)를 통해 풍경화가로 전환했다.[6] 히로시게는 『후지산 삼십육경』(1852~1858)도 제작했다.[6] 그는 세쓰슈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스타일로 풍경 판화계를 지배했다.[6]
히로시게는 우오야 에이키치와 함께 고급 판화 시리즈를 제작하며, 운모 추가, 엠보싱 등 최고의 인쇄 기술을 사용했다.[6] 그는 '육십여 주의 명경'에서 풍경 판화에 세로 형식을 개척했다.[6]
thumb의 모사]]
히로시게의 원근법은 고흐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원래는 서양 회화에서 우키요에 화가들이 받아들인 양식이다.[6]
에도 시대 중기, 가이 국고후에서는 화려한 고후 도소신 축제가 열렸고, 히로시게는 덴포 12년(1841년)에 고후에서 막에 제작을 의뢰받았다. 이때의 기록이 『가주일기』이며, 히로시게의 작품 연구 및 근세 고후 성하 마을의 실태를 아는 중요한 자료이다.
3. 2. 화풍 및 특징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1829년에서 1830년경 『오미팔경』 시리즈와 같은 풍경화를 제작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조류와 화훼 그림도 다수 제작했다. 1831년경에는 『동도명승십경』을 발표했는데, 이는 호쿠사이의 『후지산 삼십육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832년, 히로시게는 교토로 가는 공식 행렬에 참여하여 도카이도를 여행하며 풍경을 스케치했고, 이를 바탕으로 『도카이도 오십삼차』 시리즈를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나니와 명소』 (1834년), 『교토 명소』 (1835년) 등 다른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는 교토 서쪽 지역은 직접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니와와 오미국의 그림은 책과 그림을 참고하여 제작했다.
1838년경에는 유머러스한 『경가』시가 곁들여진 『에도 주변 팔경』 시리즈를 제작했고, 1835년에서 1842년 사이에는 아이젠과 공동으로 『기소가이도 육십구차』를 제작하여 46개의 판화를 담당했다.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에도 명소 백경』에 대한 118장의 판화를 제작했다.[6] 『에도 명소 백경』에서 히로시게는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아 대규모 사물, 사람, 동물 등을 전경에 배치하여 깊이감을 더하는 구성을 사용했다.[5]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은 유럽과 미국에서 대담한 구도와 청색, 특히 남색(藍色)의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청색은 일본 고유의 쪽(藍)(인디고) 색이 아니라, 유럽에서 수입된 프러시안 블루(베로 남색, 紺青)라는 새로운 안료였다. 목판화의 특성상 유채보다 선명한 색을 나타내어 서구에서는 "히로시게 블루"라고도 불리며, 페르메이르의 페르메이르 블루에 비견되기도 한다.[15][16] 히로시게 블루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과 아르누보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자포니즘 유행의 한 요인이 되었다.[15][16]
히로시게는 판화 외에도 텐도번의 의뢰를 받아 200점이 넘는 수묵화를 남기는 등 채색화에도 능숙했다. 그의 원근법은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 이후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이는 토요하루 등 우키요에 화가들이 서양 회화에서 받아들인 양식이었다.
3. 3. 영향
히로시게는 우타가와파(歌川派) 소속으로, 쿠니사다와 쿠니요시와 함께 19세기 목판화의 선두에 있었다.[9] 우타가와파는 수십 명의 예술가들로 구성되었으며, 배우와 역사적 인물을 그린 그림으로 특히 주목받았지만, 모든 인기 장르에 정통했다. 히로시게 시대에는 판화 산업이 호황을 누렸고, 판화 소비자층이 급속도로 증가하여, 「기소가도 육십구차(木曽街道六十九次)」와 「에도 명승 백경(江戸名所百景)」과 같은 대규모 시리즈가 제작되었다.스타일 면에서 히로시게는 특이한 시점, 계절적 함축, 그리고 눈에 띄는 색상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명소화(名所絵)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했으며, 에도 시대 관광 산업 호황과 함께 여행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도카이도(東海道)와 같은 길을 따라 마을이 나타났다. 히로시게는 자신의 여행과 다른 사람들의 모험담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풍경화를 제작했다.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오십삼차(東海道五十三次)」(1833-1834)와 「모네(Monet)와 같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9]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에도 명승 백경(江戸名所百景)]」 중 두 점을 모사하기도 했다. 히로시게의 스타일은 20세기 러시아 예술 운동인
4. 히로시게와 한국
5. 계승자들
우타가와 히로시게 2세는 히로시게의 딸 오타츠와 결혼한 젊은 판화가 스즈키 친페이(鈴木親平)였다. 그는 "시게노부(茂延)"라는 예명을 받았다. 히로시게는 시게노부를 모든 일의 계승자로 삼으려 했고, 시게노부는 1858년 스승의 사후에 "히로시게"라는 이름을 계승하여 오늘날 우타가와 히로시게 2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타츠와의 결혼은 불행했고 1865년에 별거하였다. 오타츠는 히로시게의 또 다른 제자인 시게마사와 재혼하였고, 시게마사는 가계의 이름을 차지하여 오늘날 우타가와 히로시게 3세로 알려져 있다.[18] 히로시게 2세와 히로시게 3세 모두 히로시게의 독특한 화풍을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지만, 스승에게 돌아갔던 성공과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히로시게 1세의 다른 제자로는 우타가와 시게마루, 우타가와 시게키요, 우타가와 히로카게가 있다.
2대째 히로시게(2대)는 1826년 (분세이 9년)에 태어나 1869년 (메이지 2년)에 사망했다.[18] 2대째 히로시게도 1대째 히로시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정화소 동심이었다.[18] 후지카케 시즈야[19]에 따르면, 2대째 히로시게는 히로시게의 문하로 속칭을 모리타 킨페이라고 하며, 호를 시게노부라고 한다. 1대째의 양녀 오타츠(16세)와 결혼했지만, 후에 게이오 원년(1865년) 아내 22세 때 이혼하였다. 그 후, 자주 요코하마에 나가 그림을 팔았고, 외국 무역이 점차 번성하고 있던 시기에 "차상자 히로시게"라는 이름으로 외국인들에게 알려졌다. 또한, "기사이 립쇼"라는 화호를 사용하여 제작했는데, 그중 꽃을 주제로 한 일종의 풍경화인 『삼십육화선』의 작품이 훌륭하여 판본의 요청에 따라 대금판의 세로 그림으로 만들었다. 또한, 『명소 에도 백경』 중 "아카사카 키리바타 우츄 유케이"에서 뛰어난 그림을 남겼으며, 1대째의 "아카사카 키리바타"보다 구도와 색채 모두 평가가 높다.
3대째 히로시게(3대)는 1842년 (덴포 13년)에 태어나 1894년 (메이지 27년)에 사망했다.[18] 1대째 히로시게의 문하[18]로, 속칭은 고토 토라키치이다. 이혼 후의 오타츠를 아내로 맞이했다. 호는 일소사이였다.
4대째 히로시게(4대, 키쿠치 키이치로)는 1849년 (가에이 2년)에 태어나 1925년 (다이쇼 14년)에 사망했다.[18] 2대째 히로시게의 문하[18]였다. 3대째 부인 야에코와 시미즈 세이후 등이 상의하여 4대째 히로시게를 계승시켰다. 키쿠치가는 안도가와 친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판화를 제작하여 무사 그림 등을 많이 그렸지만, 후에 서예가가 되었다. 키이치로는 우키요에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다.[20]
5대째 히로시게(5대, 키쿠치 토라조)는 1890년 (메이지 23년)에 태어나 1968년 (쇼와 43년)에 사망했다.[18] 4대째(키쿠치 키이치로)의 아들이 계승했다.
6. 평가
히로시게는 우타가와파(歌川派) 소속으로 쿠니사다(歌川国貞), 쿠니요시(歌川国芳)와 함께 19세기 목판화의 선두에 있었다.[9] 우타가와파는 수십 명의 예술가들로 구성되었으며, 배우와 역사적 인물을 그린 그림으로 특히 주목받았지만, 모든 인기 장르에 정통했다.[9] 히로시게는 특이한 시점, 계절적 함축, 눈에 띄는 색상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명소화(名所絵)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했다.[9] 에도 시대 관광 산업의 호황과 여행에 대한 대중의 관심 증가 속에서, 히로시게는 자신의 여행과 다른 사람들의 모험담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풍경화를 제작했다.[9]
히로시게의 작품은 모네(Monet)와 같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그의 우키요에 판화 소장품 중 하나였던 「
[[File:De pruimenboomgaard te Kameido-Rijksmuseum RP-P-1956-743.jpeg|''가메이도 매화 정원'' (1857), 히로시게(歌川広重)의 「에도 명승 백경(江戸名所百景)]」중
히로시게의 스타일은 20세기 러시아 예술 운동인 미술세계(Мир искусства, Mir iskusstva)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Mstislav Dobuzhinsky는 히로시게의 영향에 대해 "나는 구성이 인상적이고 특이하도록 나만의 관점을 선택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항상 히로시게의 예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고 고백했다.[9] 폴 세잔(Paul Cézanne)과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도 히로시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속했다.[9] 히로시게는 19세기 최고의 풍경화가로 여겨졌다.[10]
참조
[1]
웹사이트
Hiroshige
https://www.collinsd[...]
HarperCollins
2019-05-09
[2]
웹사이트
Hiroshige
2019-05-09
[3]
서적
Hiroshige
https://books.google[...]
Parkstone International
2014-01-07
[4]
웹사이트
Hiroshige Japanese artist
https://www.britanni[...]
2020-04-03
[5]
서적
Hiroshige
Prestel
[6]
간행물
Full series
[7]
웹사이트
Kisokaido Road
https://web.archive.[...]
Hiroshige
2011-12-26
[8]
서적
Art of Edo Japan: The Artist and the City, 1615–1868
Harry Abrams
[9]
서적
Japan and Russia: Three Centuries of Mutual Images
https://archive.org/[...]
Global Oriental Ltd
[10]
서적
Japonisme – Japanese Influence on French Art 1854–1910
Cleveland Museum of Art, Walters Art Gallery, Robert G. Sawyers Publications
[11]
서적
江戸時代人物控1000
小学館
2007
[12]
서적
歌川広重伝
[13]
서적
白石
[14]
서적
関根
[15]
서적
カラー版徹底図解 浮世絵
新星出版社
[16]
웹사이트
北斎・広重の浮世絵に見るジャパンブルー 〜渋沢栄一の生きた時代〜
https://www.adachi-h[...]
アダチ版画研究所
[17]
간행물
広重の動静と作品 問題点を中心として
[18]
웹사이트
江戸時代の消防事情5
https://www.isad.or.[...]
一般財団法人 消防防災科学センター
2020-08-06
[19]
서적
藤懸
[20]
서적
菊地
[21]
간행물
広重「月に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