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가자 전투 (기원전 312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자 전투 (기원전 312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벌어진 디아도코이 전쟁 중,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연합군 사이의 전투이다. 데메트리오스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시리아를 잃었고, 이 틈을 타 셀레우코스가 바빌로니아를 탈환하여 셀레우코스 제국 건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전투의 패배는 안티고노스의 세력 확장에 차질을 빚었으나, 안티고노스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며 이후 디아도코이 전쟁을 지속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디아도코이 전쟁 - 로도스 공성전
    기원전 305년부터 304년까지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가 로도스 섬을 공격했으나 로도스 시민들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저항 및 지원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했으며, 이 공성전은 헬레폴리스를 비롯한 공성 무기가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고 로도스 시민들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로도스 거상을 건립했다.
  • 디아도코이 전쟁 - 바빌론 회의
    바빌론 회의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후계 문제와 제국 운영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 회의로, 필리포스 3세와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 왕으로 추대되고 페르디카스가 섭정이 되었으며 제국 영토가 분할되었으나, 이는 장군들의 권력 다툼을 심화시켜 제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 기원전 4세기의 전투 - 만티네이아 전투 (기원전 362년)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에서 테베와 스파르타-아테네 연합군 간에 벌어진 만티네이아 전투는 테베의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에파메이논다스의 전사로 테베 패권 쇠퇴를 가속화하며 그리스 세계의 혼란을 심화시킨 전투이다.
  • 기원전 4세기의 전투 - 레우크트라 전투
    레우크트라 전투는 기원전 371년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보이오티아 동맹군이 사선진 전술로 스파르타 군을 격파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고 스파르타의 쇠퇴를 가져온 전투이며, 이후 전술 발전에 영향을 미쳐 그리스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가자 전투 (기원전 312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가자 전투
분쟁디아도코이 전쟁
시기기원전 312년
장소가자
결과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 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교전국 2안티고노스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지휘관 2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페이톤, 네아르코스, 안드로니코스, 필리포스
병력 규모
병력 1 (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 연합군)총 병력: 약 22,000명
보병: 18,000명
기병: 4,000명
병력 2 (안티고노스 군)총 병력: 약 17,000명
보병: 12,500명
기병: 4,400명
전투 코끼리: 43마리
피해 규모
피해 1 (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 연합군)미상
피해 2 (안티고노스 군)전사자: 500명 또는 5,000명
포로: 8,000명
전투 코끼리: 모두 전멸 또는 포획
기타 정보
알렉산더 석관
시돈 근처의 알렉산더 석관에 묘사된 가자 전투 (기원전 4세기).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안내.
좌표31°31′N 34°27′E
관련 전투디아도코이 전쟁

2. 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에 권력 투쟁과 영토 경쟁이 벌어져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했다. 이 경쟁에서 안티고노스가 우세를 차지하며 세력을 확장하자, 다른 장군들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기원전 315년, 바빌로니아 태수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와 결별하고 이집트 태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의탁했다.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가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통일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알리고, 트라키아 태수 뤼시마코스와 마케도니아 본국의 제국 섭정 카산드로스에게도 안티고노스의 위협을 알려 대 안티고노스 동맹을 맺고 여러 방면에서 안티고노스를 공격했다.[12]

2. 1. 대 안티고노스 동맹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에 권력 투쟁과 영토 경쟁으로 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났다. 이 경쟁에서 안티고노스가 우세하며 세력을 확장하자, 다른 장군들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기원전 315년, 바빌로니아 태수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와 결별하고 이집트 태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의탁했다.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야망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알리고, 트라키아 태수 뤼시마코스, 마케도니아 본국 섭정 카산드로스와 함께 대 안티고노스 동맹을 맺었다.[12]

프톨레마이오스는 부하들을 소아시아와 키프로스 섬에 파견하고, 기원전 312년 셀레우코스와 함께 보병 18,000명, 기병 4,000기를 이끌고 시리아를 침공했다. 침공 명분은 안티고노스가 카파도키아 태수 에우메네스와의 전투에서 얻은 영토를 다른 디아도코이에게 분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안티고노스는 그리스 원정 중이었고,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시리아를 맡고 있었다. 데메트리오스는 보병 12,500명, 기병 4,400기, 전투코끼리 43마리로 가자에서 맞섰으나, 22세의 젊은 데메트리오스는 경험 많은 프톨레마이오스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13]

2. 2.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리아 침공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휘하 장군들 간의 권력 다툼(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승리한 안티고노스는 세력을 크게 확장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다른 장군들과 대립이 깊어졌다. 기원전 315년,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었던 바빌로니아 태수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와 결별하고 이집트 태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의탁했다.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가 알렉산드로스 제국 통일 야망을 품고 있다고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알리고, 트라키아 태수 뤼시마코스, 마케도니아 본국 섭정 카산드로스에게도 안티고노스의 위협을 알려 대 안티고노스 동맹을 결성, 여러 방면에서 안티고노스를 공격했다.[12][5]

그 일환으로 프톨레마이오스는 부하들을 소아시아와 키프로스 섬에 파견하고, 기원전 312년 셀레우코스와 함께 보병 18,000명, 기병 4,000명을 이끌고 시리아를 침공했다. 침공 명분은 안티고노스가 카파도키아 태수 에우메네스와의 전투에서 얻은 영토를 다른 디아도코이에게 분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의 세력권인 그리스 원정 중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시리아를 위임받은 데메트리오스가 보병 12,500명, 기병 4,400명, 전투코끼리 43마리를 이끌고 가자에서 맞섰다.[13][6] 데메트리오스는 22세의 젊은 나이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서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프톨레마이오스를 상대하기에는 군대 통솔 경험이 부족했다.[7]

3. 양측의 전력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군과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각자의 전략에 따라 병력을 배치했다. 데메트리오스 군은 좌익에,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우익에 주력 부대를 배치하는 상반된 전략을 취했다.[14]

3. 1. 안티고노스 군

데메트리오스 군은 우익에 기병 1,500기, 중앙에 보병 11,000명을 배치하였다. 데메트리오스는 우익 지휘관인 안드로니코스에게 전열을 기울여 전투를 늦추라고 지시했다. 좌익은 데메트리오스 자신이 기병 2,900기를 이끌고, 틈새를 총 1,500명의 투창병, 투석병, 궁병으로 메운 30마리의 전투코끼리를 이끌고 진을 쳤다. 이러한 배치는 적의 우익을 먼저 격파하고, 적의 중앙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하려는 의도였다.[14]

중앙에는 11,000명의 보병(팔랑크스)과 13마리의 전투 코끼리가 배치되었고, 우익에는 1,500명의 기병이 있었다.[3]

안티고노스 군의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위치병력 구성
좌익기병 2,900명, 경보병 1,500명, 전차 30대 (데메트리오스 지휘)
중앙보병 11,000명 (팔랑크스), 전투코끼리 13마리
우익기병 1,500명


3. 2. 프톨레마이오스 군

프톨레마이오스는 당초 좌익을 강화했지만, 데메트리오스 군이 좌익에 편중된 진형을 구성한 것을 보고 데메트리오스의 전략을 예상하였다. 그래서 좌익에 기병 1,000기, 중앙에 보병 18,000명, 우익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기병 3,000기와 전투코끼리를 배치하였다. 또한, 전투코끼리로부터 아군 진영을 방어하기 위해 투석병과 궁병, 그리고 약간의 경장보병을 배치하는 등 우익에 편중된 포진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경장보병들에게 전투코끼리에 대한 대책으로 사슬로 연결된 철못을 가져가게 했다.[14]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는 원래 대부분의 기병을 좌익에 배치했지만, 데메트리우스의 배치를 알게 되자 3,000명의 중기병을 자신의 지휘 하에 우익으로 이동시켰다. 코끼리 방어 부대 3,000명의 경보병(펠타스트, 궁수, 투석병)은 대(對)코끼리 장치(쇠사슬로 연결된 스파이크)를 장비하고 기병 앞에 배치되었으며, 코끼리 진격로에 장치를 던진 다음 마후트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부대병력 구성
좌익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휘하의 기병 1,000명
중앙팔랑크스 18,000명
우익프톨레마이오스 휘하의 기병 3,000명, 코끼리 방어 경보병 3,000명(펠타스트, 궁수, 투석병), 대코끼리 장치(쇠사슬로 연결된 스파이크)


4. 전투 경과

데메트리오스는 우익에 기병 1,500기, 중앙에 보병 11,000명을 배치하고, 우익 지휘관 안드로니코스에게 전투를 늦추라고 지시했다. 좌익은 데메트리오스 자신이 기병 2,900기와 전투코끼리 30마리, 투창병, 투석병, 궁병 1,500명으로 구성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적 우익을 먼저 격파 후 중앙을 측면 공격하는 작전을 계획했다.[14]

프톨레마이오스는 데메트리오스 군의 좌익 편중 배치를 보고 전략을 간파, 좌익에 기병 1,000기, 중앙에 보병 18,000명, 우익에 직접 기병 3,000기를 이끌고 전투코끼리에 대비해 투석병, 궁병, 경장보병을 배치했다. 경장보병에게는 쇠사슬로 연결된 철못을 주어 코끼리 공격에 대비했다.[14]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군은 전사자 500명(플루타르코스는 5,000명으로 과장), 포로 8,000명, 전투코끼리 전량 손실을 입었다. 페이톤(셀레우코스 대신 바빌로니아 태수 역임)이 전사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몸값 없이 포로와 노획물을 돌려주고 “명예와 지배를 위한 전쟁”을 언급하며 나머지 포로는 이집트로 보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리아 도시 함락에 데메트리오스는 안티고노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16][17]

4. 1. 기병 전투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


가자 전투는 프톨레마이오스 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데메트리오스 군 좌익 기병대는 이에 대해 돌격으로 응수했다. 처음에는 데메트리오스 군 좌익이 우세를 점했지만, 백병전에 들어가자 점차 초기의 기세는 꺾였다. 기병전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데메트리오스는 전투코끼리 부대를 투입하여 전황을 타개하려 했다.[15]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투사 무기를 집중적으로 퍼붓고 말뚝을 세워 방어해서 이를 막았다.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사슬이나 말뚝을 이용한 즉석 장애물로 전투코끼리의 발을 멈추게 하여, 보병이 코끼리와 기수를 공격하면서 전투코끼리 부대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전투코끼리 부대의 공격이 완전히 무산된 것을 보고 데메트리오스 군은 동요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15]

이렇게 원래의 기세를 잃어버린 데메트리오스 군을 프톨레마이오스는 좌익에서 반격을 감행하여 이를 붕괴시켰다. 데메트리오스의 필사적인 호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패주했다. 거기에 이끌리듯 데메트리오스 군 중앙과 우익도 완패를 하고 말았다. 데메트리오스는 아소토스로 물러났다.[15]

4. 2. 코끼리 부대 격돌



대전은 프톨레마이오스 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데메트리오스 군 좌익 기병은 이에 맞서 돌격으로 응했다. 당초 데메트리오스 군 좌익은 우세를 보였지만, 백병전에 들어가면서 점차 기세가 꺾였다. 기병전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데메트리오스는 전투코끼리 부대를 투입해 전황을 타개하려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투사 무기를 집중적으로 퍼붓고 말뚝을 세워 방어해서 그것을 막았다.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사슬이나 말뚝을 이용한 즉석 장애물로 전투코끼리의 발을 멈추게 하여, 보병이 코끼리와 기수를 공격하면서 전투코끼리 부대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15] 전투코끼리 부대의 공격이 완전히 무산된 것을 보고 데메트리오스 군은 동요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4. 3. 프톨레마이오스의 반격과 데메트리오스의 패배



프톨레마이오스는 데메트리오스 군이 좌익으로 편중된 진을 구성한 것을 보고 데메트리오스의 전략을 예상하였다. 이에 좌익에 기병 1,000기, 중앙에 보병 18,000명을 배치하고, 우익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자신이 직접 기병 3,000기와 전투코끼리를 이끌고 진을 쳤다. 또한, 투석병, 궁병, 그리고 약간의 경장보병을 배치하여 우익을 강화하고, 경장보병들에게는 전투코끼리에 대한 대책으로 사슬로 연결된 철못을 가져가게 했다.[14]

가자 전투는 프톨레마이오스 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데메트리오스 군 좌익 기병대는 이에 맞서 돌격했다. 처음에는 데메트리오스 군 좌익이 우세했지만, 백병전에 들어가자 점차 기세가 꺾였다. 기병전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데메트리오스는 전투코끼리 부대를 투입하여 전황을 타개하려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투사 무기(投射武器)를 집중적으로 퍼붓고 말뚝을 세워 방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쇠사슬과 말뚝을 이용한 즉석 장애물로 전투코끼리의 발을 묶고, 보병으로 하여금 코끼리와 기수를 공격하게 하여 전투코끼리 부대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전투코끼리 부대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데메트리오스 군은 동요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세를 잃은 데메트리오스 군 좌익에 반격을 가하여 붕괴시켰다. 데메트리오스의 필사적인 호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패주했다. 이에 휩쓸려 데메트리오스 군 중앙과 우익도 무너졌다. 결국 데메트리오스는 아소토스로 퇴각했다.[15]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군은 전사자 500명(플루타르코스는 5,000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과장된 수치이다)과 포로 8,000명을 냈으며, 전투코끼리는 모두 죽거나 포획되었다. 또한 데메트리오스를 보좌하기 위해 파견된 장군 페이톤(당시 셀레우코스를 대신하여 바빌로니아 태수를 역임했다)이 전사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몸값을 받지 않고 포로와 노획물을 데메트리오스에게 돌려주며 “무엇이든 상관없이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와 지배를 위한 전쟁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나머지 포로는 이집트로 보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가 시리아의 도시들을 연이어 함락시키며 진격하자,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 안티고노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16][17]

5. 전투 결과

가자 전투의 결과, 데메트리우스는 8,500명의 병력(전사자 500명, 포로 8,000명)을 잃었다. 여기에는 올린토스의 안드로니쿠스와 같은 장군들과 코끼리 부대도 포함되었다.[4] 데메트리우스는 페니키아의 트리폴리로 퇴각하여 군대를 재건하고, 카리아에서 원정을 마친 아버지 안티고노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편,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자신을 군복무에서 해방시키고 바빌로니아를 되찾을 수 있도록 군대를 요청했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페이톤이 전투에서 사망하여 총독이 없는 상태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를 승낙하고 약 1,000명의 소규모 병력을 셀레우코스에게 주었다.[4]

5. 1. 안티고노스의 대응과 셀레우코스의 바빌로니아 탈환

안티고노스는 직접 시리아로 진격하여 프톨레마이오스를 이집트로 몰아냈지만,[11] 그 틈을 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병력을 넘겨받아 동방으로 귀환한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를 탈환했다(바빌로니아 전쟁).[4] 결과적으로 이 전투의 패배는 제국 동방에서 동지중해 주변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에서 일시에 패권을 잡으려는 안티고노스의 전략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가 여전히 디아도코이 중 최강의 세력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고, 이후 안티고노스와 다른 디아도코이는 10년 이상에 걸친 싸움을 벌이게 된다.

6. 역사적 의의

가자 전투는 디아도코이 전쟁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의 패배로 안티고노스 1세는 제국 동방에서 동지중해 주변 지역까지 단번에 패권을 장악하려던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비록 안티고노스는 여전히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다른 디아도코이들과 10년 이상 싸움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편, 이 전투는 셀레우코스 1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군사 지원을 받아 자신의 옛 영지였던 바빌로니아를 되찾았고,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4]

6. 1. 디아도코이 전쟁의 지속

안티고노스는 직접 시리아로 진격하여 프톨레마이오스를 이집트로 몰아냈지만[11], 그 틈을 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병력을 넘겨받아 동방으로 귀환한 셀레우코스가 바빌로니아를 탈환했다. (바빌로니아 전쟁) 결과적으로, 이 전투의 패배는 제국 동방에서 동지중해 주변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에서 단번에 패권을 잡으려는 안티고노스의 전략에 차질을 빚게 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가 여전히 디아도코이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인 것은 변하지 않았고, 이후 안티고노스와 다른 디아도코이는 10년 이상에 걸친 싸움을 펼쳐가게 되었다.

6. 2. 셀레우코스 제국의 등장

안티고노스는 스스로 시리아에 출전하여 프톨레마이오스를 이집트로 쫓아냈지만, 그 틈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군사를 양도받아 동방에서 귀환한 셀레우코스가 바빌로니아를 되찾았다. (바빌로니아 전쟁)[4] 결과적으로, 이 전투의 패배는 제국 동방에서 동부 지중해 주변에 이르는 지역에서 단번에 패권을 잡으려는 안티고노스의 전략에 차질을 빚게 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가 여전히 디아도코이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인 것은 변하지 않았고, 이후 안티고노스와 다른 디아도코이는 10년 이상에 걸친 싸움을 펼쳐가게 되었다.

한편,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그를 군복무에서 해방시키고 그의 옛 영지였던 바빌로니아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주도록 설득했다. 바빌로니아는 현재 총독이 없는 상태였다. (페이톤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에 동의하여 약 1,000명의 소규모 병력과 함께 셀레우코스를 파견했다.[4]

참조

[1] 웹사이트 Istanbul Archaeological Museum notice https://www.flickr.c[...]
[2]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3]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4]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5] 서적 XIX. 55-57
[6] 서적 XIX. 80
[7] 서적 데메トリオス
[8] 서적 XIX. 82-83
[9] 서적 XIX. 83-84
[10] 서적 XIX. 85
[11] 서적 XIX. 93
[12] 서적 XIX. 55-57
[13] 서적 데메트리오스
[14] 서적 XIX. 82-83
[15] 서적 XIX. 83-84
[16] 서적 XIX. 85
[17] 서적 데메트리오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