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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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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빌로니아 전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후계자들(디아도코이) 간의 권력 다툼의 일환으로, 셀레우코스 1세와 안티고노스 1세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이 전쟁은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탈환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으며, 안티고노스는 이를 저지하려 했다. 셀레우코스는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마우리아 제국과 조약을 맺고 영토를 할양하는 대신 전투 코끼리를 얻는 등 세력을 강화했다. 결국 안티고노스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알렉산드로스 제국 통일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고, 이는 기원전 301년의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패배로 이어져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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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디아도코이 전쟁
기간기원전 311년 – 기원전 309년
장소바빌로니아, 메디아, 엘람
결과셀레우코스의 승리
영토 변경셀레우코스가 바빌로니아, 메디아, 엘람을 장악
교전 세력
교전국 1안티고노스 왕조
교전국 2셀레우코스 제국
지휘관
지휘관 1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
지휘관 2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2. 배경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그의 제국은 후계자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분열되었다.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포함한 제국 동부의 넓은 영토를 차지하여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경계심을 샀다. 안티고노스의 동맹이었던 바빌로니아 태수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망명했다.[23]

이후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하고, 바빌론을 되찾기 위해 보병 800명, 기병 200기만을 이끌고 바빌론으로 향했다.[23]

2. 1. 알렉산드로스 제국 분열과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은 후계자들(디아도코이) 간의 권력 및 영토 쟁탈전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에서 시리아를 포함, 제국의 동쪽에 이르는 큰 세력을 구축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태수), 카산드로스(제국의 섭정, 마케도니아 본국의 지배자), 리시마코스(트라키아 태수) 등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경계심을 유발했다. 또한 안티고노스의 동맹자였던 바빌로니아 태수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에 의해 영토를 빼앗기고 바빌론을 탈출하여 이집트의 태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망명했다.[23]

디아도코이 1차 전쟁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지키려던 장군들은 패배했다. 디아도코이 2차 전쟁 동안 아나톨리아시리아에 자신만의 국가를 건설한 안티고노스의 세력이 커져 다른 장군들에게 위협이 되었으나, 디아도코이 3차 전쟁에서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이집트)와 카산드로스 (마케도니아)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311년 12월, 교전 당사자들은 디아도코이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서로를 인정했으나, 이 조약에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제외되었다. 기원전 316년에 안티고노스는 바빌로니아사트라프였던 셀레우코스를 추방했으나,[1]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에게 군대를 제공했고, 셀레우코스는 이 군대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트라피로 돌아왔다.[2]

기원전 312년, 셀레우코스를 동반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가 그리스 공략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 있는 시리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가자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때 셀레우코스 대신 안티고노스가 바빌로니아 태수로 임명한 페이톤이 전사했다.) 데메트리오스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안티고노스는 직접 시리아로 가서 프톨레마이오스와 대치했다. 셀레우코스는 이 틈을 타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병사를 받아 바빌론으로 향했으나, 이때 셀레우코스에게 맡겨진 병사는 보병 800여 명, 기병 200기에 불과했다.[16]

2. 2. 셀레우코스의 바빌로니아 탈환 시도

기원전 312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셀레우코스와 함께 안티고노스 1세가 그리스 공략 거점으로 삼고 있던 시리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물리쳤다. (이때 셀레우코스 대신 안티고노스가 바빌로니아 태수로 임명한 페이톤이 전사했다.)[23] 데메트리오스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안티고노스는 직접 시리아로 가서 프톨레마이오스와 대치했다. 셀레우코스는 이 틈을 타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병사를 받아 바빌론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때 셀레우코스에게 주어진 병력은 보병 800명, 기병 200기에 불과했다.[23]

3. 전투의 경과

기원전 311년 셀레우코스가 바빌로니아를 성공적으로 탈환한 이후,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몰아내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작전을 펼쳤다.

처음에는 메디아 태수 니카노르와 아레이아 태수 에우아고라스가 이끄는 군대가 파견되었으나, 셀레우코스는 티그리스강 근처에서 매복과 야습으로 이들을 격파했다.

이후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군사를 주어 바빌로니아를 공격하게 했지만, 데메트리오스는 바빌론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했다.

결국 안티고노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셀레우코스는 새벽 기습으로 안티고노스 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아부 25일 전투)[11] 이로써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고 자신의 영토를 확고히 했다.

3. 1. 셀레우코스의 바빌로니아 귀환과 초기 전투

기원전 311년 5월, 셀레우코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카라이(오늘날의 하란)를 거쳐 바빌론에 도착했다. 그는 이전에 선정을 베풀었기에 주민들은 일제히 그에게 협력했다. 안티고노스의 부하들은 장군 디피로스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로 피신했지만, 셀레우코스에게 빠르게 함락되었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를 회복하고 다가올 안티고노스와의 대결을 위해 군대를 모았다.[24]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제압하기 위해 메디아 태수 니카노르와 아레이아 태수 에우아고라스에게 보병 10,000명, 기병 7,000명을 주어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는 가용 병력이 보병 3,000명, 기병 400기에 불과했음에도 티그리스강 근처에서 매복, 야습으로 적군을 대파했다. 에우아고라스는 전사했고, 니카노르는 소수 병력과 함께 도주하여 안티고노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피아노스는 니카노르가 전사했다고 기록했다.[25] 셀레우코스는 여세를 몰아 수시아나와 메디아를 점령했다.[26]

3. 2. 안티고노스 세력의 반격과 셀레우코스의 승리

셀레우코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카라이(오늘날 하란)로 이동하여 그곳의 마케도니아인들을 우군으로 확보하고 기원전 311년 5월에 바빌론에 도착했다. 셀레우코스가 이전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모두 그에게 협력했다. 안티고노스의 부하들은 장군 디피로스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로 피신했지만, 셀레우코스에 의해 빠르게 함락되었다. 셀레우코스는 유프라테스 강에 댐을 건설하여 인공 호수를 만들었고, 8월에 댐을 갑자기 파괴하여 홍수로 요새의 벽을 무너뜨렸다.[24][5] 이로써 바빌로니아를 되찾은 셀레우코스는 다가올 안티고노스와의 대결을 위해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24]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제압하기 위해 부하인 메디아 태수 니카노르와 아레이아 태수 에우아고라스에게 보병 10,000명, 기병 7,000기로 구성된 군대를 보냈다. 반면 셀레우코스는 보병 3,000명과 기병 400명밖에 없었다. 셀레우코스는 티그리스 강 근처에서 매복 작전을 펼쳐, 적이 야영하며 방심한 틈을 타 야습을 가해 적군을 크게 무찔렀다. 에우아고라스는 전사했고, 니카노르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도망쳐 안티고노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아피아노스는 니카노르가 전사했다고 기록했다.[25][7] 여세를 몰아 셀레우코스는 수시아나와 메디아를 점령했다.[26]

안티고노스는 니카노르의 편지를 받고 아들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에게 보병 15,000명, 기병 4,000기를 주어 셀레우코스를 토벌하기 위해 바빌로니아로 보냈다. 기원전 310년 봄, 데메트리오스는 시리아 다마스코스에서 바빌로니아로 진군했다. 셀레우코스에 의해 바빌로니아 방어를 맡고 있던 장군 파토로쿠레스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셀레우코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데메트리오스에게 저항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바빌론에 입성했지만, 수비군의 저항으로 요새를 포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결국 귀환 시기가 다가오자 부하 장군 아루케라오스에게 보병 5,000명, 기병 1,000기를 남겨두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결국 데메트리오스는 셀레우코스를 몰아내는 데 실패했다.[27]

이후 셀레우코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온 안티고노스를 새벽에 기습하여 승리했다.[28] 결정적인 승리였다.[11] 이처럼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자신의 영토를 지켜냈다.

3. 3. 데메트리오스와 안티고노스의 공세와 실패

셀레우코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카라이(오늘날 하란)로 이동하여 그곳의 마케도니아인들을 우군으로 삼고 기원전 311년 5월에 바빌론에 도착했다. 셀레우코스가 이전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모두 그에게 협력했다. 안티고노스의 부하들은 장군 디피로스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로 피신했지만, 셀레우코스에게 빠르게 함락되었다. 이로써 바빌로니아를 되찾은 셀레우코스는 다가올 안티고노스와의 대결을 위해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24]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제압하기 위해 부하인 메디아의 태수 니카노르와 아레이아 태수 에우아고라스에게 보병 10,000명, 기병 7,000기로 구성된 군대를 보내 공격하게 했다. 반면 셀레우코스가 가진 병력은 보병 3,000명, 기병 400기뿐이었다. 셀레우코스는 티그리스강 근처에서 매복 작전을 펼쳐 적군이 야영하며 방심한 틈을 타 야습을 감행하여 크게 격파했다. 에우아고라스는 전사했고, 패주한 니카노르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도망쳐 안티고노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아피아노스는 니카노르가 전사했다고 기록했다.[25] 여세를 몰아 셀레우코스는 수시아나와 메디아를 점령했다.[26]

안티고노스는 니카노르의 편지를 받고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에게 보병 15,000명, 기병 4,000기를 주어 셀레우코스를 토벌하기 위해 바빌로니아로 파견했다. 기원전 310년 봄, 데메트리오스는 시리아 다마스코스에서 바빌로니아로 진군했다. 한편, 셀레우코스에 의해 바빌로니아 방어를 맡고 있던 장군 파토로쿠레스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셀레우코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데메트리오스에게 저항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바빌론에 입성했지만, 수비군의 저항으로 요새를 포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결국 귀환 시기가 다가오자 부하 장군 아루케라오스에게 보병 5,000명, 기병 1,000기를 남겨두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결국 데메트리오스는 셀레우코스를 몰아내는 데 실패했다.[27] 이후 셀레우코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온 안티고노스를 새벽에 기습하여 격파했다.[28] 이로써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4. 전투의 결과

바빌로니아 전쟁의 결과, 안티고노스셀레우코스에게 패배하면서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메디아 동쪽 영토를 잃었고,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재통일하려던 그의 야망은 크게 꺾였다.[12]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와 싸우는 동안,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동부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안티고노스는 배후의 위협을 느껴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투를 우선시하게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 로도스 공성전)

한편,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05년 동방 원정을 감행하여 인더스강 유역에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이끄는 마우리아 제국과 대치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13] 결국 셀레우코스는 인도 방면 원정을 포기하고 찬드라굽타와 협정을 맺어, 인도 부근 영토를 할양하고 전투코끼리 500마리를 얻는 대신 자신의 딸을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에게 시집보냈다.[22]

이후 다른 디아도코이들은 세력이 커진 안티고노스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고, 셀레우코스도 이에 합류하였다. 결국 바빌로니아 전쟁에서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를 몰아내지 못한 것은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패배로 이어져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을 확정지었다.

4. 1. 셀레우코스 제국의 탄생과 안티고노스 세력 약화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안티고노스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메디아 동쪽의 영토를 셀레우코스에게서 조기에 탈환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고, 안티고노스가 염원하던 알렉산더 제국의 통일 야망은 크게 후퇴해야 했다.[12]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와 싸우는 동안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동부 지중해에서 득세를 했기 때문에 배후를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했던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투를 우선하게 되었다.(살라미스 해전, 로도스 공성전) 안티고노스의 위협이 일단 줄어들자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05년에 동방 원정을 시작했지만, 인더스강 유역에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그리스인의 설명에서는 산드로코트스와 불린)가 이끄는 마우리아 제국의 압도적인 대군과 조우했다.(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13]

셀레우코스는 인도 방면으로 원정을 포기하고 찬드라굽타와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서 셀레우코스는 인도 부근의 영토(아레이아, 아라코시아, 게드로시아, 파로파미소스)를 할양하고 셀레우코스의 딸을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그리스의 설명에서는 아미토로카테스로 불렸다)에게 출가시키는 대신 500 마리 전투코끼리를 받아 전력을 보강했다.[22] 이 전력은 이후 이프소스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안티고노스가 동부 지중해에서 전투의 판도를 가름하자, 그의 세력의 확대를 두려워 하는 디아도코이들은 반 안티고노스 동맹을 맺는데 합의했다. 동방에서 귀환한 셀레우코스는 그 핵심을 담당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바빌로니아 전쟁에서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를 쫓아내지 못한 것은 기원전 301년의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대패로 연결되었고, 알렉산더 제국의 분열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4. 2. 동방 원정과 마우리아 제국과의 협정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안티고노스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메디아 동쪽의 영토를 셀레우코스로부터 조기에 탈환하는 것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안티고노스가 염원하던 알렉산더 제국의 통일 야망은 크게 후퇴해야 했다.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와 싸우는 동안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동부 지중해에서 득세를 했기 때문에 배후를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했던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투(살라미스 해전, 로도스 공성전)를 우선하게 되었다. 안티고노스의 위협이 일단 줄어들자 셀레우코스는 그 사이에 더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기원전 305년에 동방 원정을 시작했지만, 인더스강 유역에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그리스인의 설명에서는 산드로코트스와 불린)가 이끄는 마우리아 제국의 압도적인 대군과 조우했다.(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

이에 따라 셀레우코스는 인도 방면으로 원정을 포기하고 찬드라굽타와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서 셀레우코스는 인도 부근의 영토(아레이아, 아라코시아, 게드로시아, 파로파미소스)를 할양하고 셀레우코스의 딸을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그리스인의 설명에서는 아미토로카테스로 불렸다)에게 출가시키는 대신 500마리의 전투코끼리를 받아 전력을 보강했다.[22] 이 전력은 이후 이프소스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안티고노스가 동부 지중해에서 전투의 판도를 가름하자, 그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 하는 디아도코이들은 반 안티고노스 동맹을 맺는데 합의했다. 동방에서 귀환한 셀레우코스는 그 핵심을 담당하게 되었다.

4. 3. 알렉산드로스 제국 분열의 가속화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안티고노스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메디아 동쪽의 영토를 셀레우코스에게서 되찾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하여 안티고노스가 바라던 알렉산더 제국의 통일 야망은 크게 꺾이게 되었다.[12]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와 싸우는 동안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동부 지중해에서 세력을 키웠기 때문에, 뒤를 공격받을 것을 걱정한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투를 우선하게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 로도스 공성전) 안티고노스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줄어들자, 셀레우코스는 그 사이에 동쪽으로 세력을 넓혀 기원전 305년에 동방 원정을 시작했지만, 인더스 계곡 유역에서 찬드라굽타가 이끄는 마우리아 제국의 압도적인 대군과 마주쳤다. (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13]

이에 따라 셀레우코스는 인도 방면으로의 원정을 포기하고 찬드라굽타와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서 셀레우코스는 인도 부근의 영토(아레이아, 아라코시아, 게드로시아, 파로파미소스)를 넘겨주고 셀레우코스의 딸을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에게 시집보내는 대신 500마리의 전투코끼리를 받아 전력을 보강했다.[22] 이 전력은 이후 이프소스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안티고노스가 동부 지중해에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자, 그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하는 다른 디아도코이들은 반 안티고노스 동맹을 맺기로 합의했다. 동방에서 돌아온 셀레우코스는 그 핵심을 담당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바빌로니아 전쟁에서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를 쫓아내지 못한 것은 기원전 301년의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크게 패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알렉산더 제국의 분열을 결정짓게 된 것이다.

5. 역사적 의의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함께 섹션 제목, 요약 등을 제공해주시면 위키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참조

[1] 서적 Between High and Low. A Chronology of the Early Hellenistic Period 2007
[2] 서적 World History
[3] 웹사이트 Chronicle of the Diadochi, rev., iv.1' https://www.livius.o[...] 2020-03-26
[4] 웹사이트 Chronicle of the Diadochi, rev., iv.3-4 https://www.livius.o[...] 2017-07-22
[5] 웹사이트 Chronicle of the Diadochi, rev., iv.7' https://www.livius.o[...] 2020-03-26
[6] 웹사이트 Chronicle of the Diadochi, rev., iv.9-10' https://www.livius.o[...] 2017-07-22
[7] 웹사이트 Chronicle of the Diadochi, rev., iv.11' https://www.livius.o[...] 2017-07-22
[8] 서적 World History
[9] 웹사이트 Chronicle of the Diadochi, rev., iv.14-20' https://www.livius.o[...] 2020-03-26
[10] 웹사이트 Chronicle of the Diadochi, rev., iv.22' https://www.livius.o[...] 2020-03-26
[11] 서적 Strategems
[12] 서적 Geography
[13] 서적 Anabasis
[14] 서적 1997
[15] 웹사이트 The Babylonian war https://www.livius.o[...] Livius.org 2012-11-07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ローマ史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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