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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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혼란기에 활동한 마케도니아의 왕이다. 그는 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맞서 시리아를 방어하고, 아테나이를 해방시켜 '구원자'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해군을 격파하는 등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쳤다. 로도스 공략에 실패하여 '폴리오르케테스'(도시 공략자)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뤼시마코스의 연합에 의해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났고, 셀레우코스에게 투옥된 후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 기술자이자 도시 요새 건축가였으며,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삶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비교하며 평가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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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대리석 흉상.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원본의 서기 1세기 로마 복제품.
이름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원래 이름Δημήτριος Πολιορκητής (Dēmḗtrios Poliorkētḗs)
별칭폴리오르케테스 (Πολιορκητής, "도시 공성자")
출생기원전 337년
사망기원전 283년 (53–54세)
사망 장소시리아
왕조안티고노스 왕조
통치
마케도니아 왕기원전 294년 – 기원전 288년
이전 통치자안티파테르 1세
후임 통치자리시마코스와 에피로스의 피로스
헬라스 동맹 헤게몬기원전 304년
이전 헤게몬알렉산드로스 대왕
후임 헤게몬안티고노스 3세 도손
가족 관계
아버지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어머니스트라토니케
배우자필라 (안티파테르의 딸)
에우리디케 (아테네)
데이다미아 1세 (에피로스)
라나사 (피로스의 아내)
프톨레마이스
자녀스트라토니케 (시리아)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데메트리오스 공정왕
군사 경력
참전 전투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파라이타케네 전투
가비에네 전투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
가자 전투 (기원전 312년)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306년)
로도스 공성전 (기원전 305–304년)
이프소스 전투
마케도니아 왕으로서
테베 공성전 (기원전 292–291년)
아테네 공성전 (기원전 2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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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헬레니즘 도시 발전에 기여했으나, 수종으로 사망하며 그의 왕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2. 생애

데메트리오스 1세는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를 도와 전쟁에 참여했다. 디아도코이 전쟁마케도니아 왕위 계승 등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주요 사건으로는 가자 전투 패배, 뮈우스 인근 전투 승리, 바빌로니아 전쟁 패배, 아테나이 해방, 살라미스 해전 승리, 로도스 공격 실패, 입소스 전투 패배, 마케도니아 왕위 등극 및 축출 등이 있다. 이후 셀레우코스에게 사로잡혀 3년간 투옥된 끝에 기원전 283년에 사망했다.

2.1. 디아도코이 전쟁

데메트리오스 1세는 22세 때 아버지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맞서 시리아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곧 뮈우스 인근에서 승리하여 패배를 일부 만회하였다. 기원전 310년 봄, 바빌론에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를 몰아내려다 크게 패했고, 가을에는 아버지도 패배했다. 바빌로니아 전쟁에서 패하면서 안티고노스는 제국 영토의 2/3를 잃고 동부 태수령을 모두 셀레우코스에게 빼앗겼다.

킬리키아와 퀴프로스 해안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여러 차례 교전한 후, 데메트리오스는 25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테나이로 항해했다. 그는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장악했던 도시를 해방하고,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 휘하의 수비대를 몰아낸 후 무니키아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기원전 307년). 이 승리로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나이인들에게 수호신으로 숭배받고 '소테르'(σωτήρ, "구원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기원전 306년, 데메트리오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형제 메넬라오스를 무찌르고 이집트 해군력을 완전히 파괴했다. 기원전 305년, 부왕을 승계하여 왕위에 오른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를 정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새로운 공성 무기를 고안하여 '폴리오르케테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가 만든 발명품 중에는 1,000명이 필요한 높이 55m의 공성 망치와 높이 38m, 폭 18m, 무게 약 163293.12kg인 공성 탑 "헬레폴리스"("도시 함락자")가 있었다.

기원전 302년, 데메트리오스는 해방자로서 그리스를 다시 방문하여 코린토스 동맹을 복구했다. 그러나 그의 방탕함과 사치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은 카산드로스의 지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미남 데모클레스에게 구애했으나 거절당하자, 데모클레스는 뜨거운 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또한 데메트리오스는 시민의 벌금을 면제해주는 대가로 그의 아들에게 몸을 바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인 고급 창부 라미아의 관심을 얻기 위해 비누에 세금을 매기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후계자들인 셀레우코스, 카산드로스, 뤼시마코스는 데메트리오스와 그의 아버지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01년, 프뤼기아의 입소스에서 안티고노스는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에페소스로 후퇴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데메트리오스의 도성 진입을 거부했으나, 그는 뤼시마코스의 영토를 유린하고 셀레우코스와 화의를 맺어 그의 딸 스트라토니케와 혼인했다. 당시 아테나이는 라카레스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데메트리오스는 오랜 포위 끝에 도시를 함락시키고(기원전 294년) 301년의 잘못을 용서했다.

계승자 전쟁 당시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와 함께 여러 지역에서 싸웠다.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데메트리오스의 재산을 돌려보냈다. 이에 감복한 데메트리오스는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의 부장을 격파하고 얻은 7,000명의 포로를 돌려보냈다.

그 후,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로 건너가 아테네, 메가라 등 여러 도시를 카산드로스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자신의 세력 하에 넣었다.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 섬을 손에 넣었다. 이 승리로 그 해에 아버지와 함께 왕을 칭했고, 다른 계승자들도 따라 왕을 칭했다.

기원전 305년부터 로도스 섬을 공격했지만 (로도스 공방전), 로도스 측의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많은 도시들을 함락시켜 폴리오르케테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듬해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타협하여 로도스는 중립을 지킨다는 평화 협정을 맺었다.

기원전 301년 프리기아의 입소스에서 안티고노스와 셀레우코스 1세·리시마코스 연합군이 맞붙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적을 너무 깊이 추격하여 안티고노스의 본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하지 못해 안티고노스가 전사했다. 그 후, 안티고노스의 유산은 다른 계승자들에게 분할되었다.

2.2. 마케도니아 왕위

기원전 294년, 데메트리오스는 카산드로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5세를 살해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291년, 퓌로스의 전 부인이었던 라낫사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퓌로스는 데메트리오스가 새로 얻은 마케도니아 왕위를 계속 위협하였는데, 데메트리오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왕국의 무방비 영토를 약탈하였다.

결국 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뤼시마코스의 연합군이 데메트리오스를 싫어하던 백성들의 도움을 얻어 기원전 288년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났다. 데메트리오스는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노리며 다시 그리스로 건너갔고, 안티파트로스 왕조의 후계자 다툼에 편승하여 카산드로스의 아들들을 쓰러뜨리고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지만, 과거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전쟁과 가혹한 세금을 거듭하여 민심을 잃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와 뤼시마코스의 지지를 받은 퓌로스(데메트리오스에게는 아내의 동생)의 침공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추방되었다.

폼페이의 프레스코화로, 기원전 50~40년경 라나사와 데메트리오스 1세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폼페이의 프레스코화로, 기원전 50~40년경 라나사와 데메트리오스 1세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2.3. 몰락과 죽음

기원전 302년, 데메트리오스는 해방자로서 두 번째로 그리스를 방문하여 코린토스 동맹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의 방탕함과 사치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은 카산드로스의 지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가 범한 악행 가운데 미남 데모클레스라는 젊은 소년에게 구애한 사건이 있었다. 이 젊은이는 왕의 애정을 계속 거부하였으나, 어느 날 목욕탕에 갇히게 되었다. 빠져나갈 수도, 왕에게 저항할 수도 없었던 그는 뜨거운 물이 끓은 솥에 뚜껑을 열고 뛰어들고 말았다. 데모클레스의 죽음은 소년 자신과 조국 아테나이의 명예를 표상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 한 번은 데메트리오스가 어느 시민의 벌금 50 탈란톤을 면제하는 대신 그의 아들 클레아이네토스가 몸을 바치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인 고급 창부 라미아의 관심을 얻으려 하였다. 라미아는 250 탈란톤을 요구하였는데, 왕은 이 돈을 모으기 위해 비누에 세금을 매겼다.

데메트리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후계자들의 견제를 받았는데, 셀레우코스와 카산드로스, 뤼시마코스는 데메트리오스와 그의 아버지 안티고노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01년 프뤼기아의 입소스에서 두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안티고노스는 전사하였으며, 데메트리오스는 심한 손실을 입고 에페소스로 후퇴하였다. 전황이 뒤집히면서 그의 여러 적들이 들끓었는데, 아테나이 사람들은 심지어 데메트리오스가 자신들의 도성에 진입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뤼시마코스의 영토를 유린하였으며, 셀레우코스와 화의를 맺어 셀레우코스의 딸 스트라토니케와 혼인하였다. 이때 아테나이는 기원전 296년에 아테나이에서 집권한 민중 지도자 라카레스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데메트리오스는 오랜 포위 끝에 도시를 함락하였으며,(기원전 294년) 301년에 아테나이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카산드로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5세를 살해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291년, 그는 퓌로스의 전 부인이었던 라낫사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퓌로스는 데메트리오스가 새로이 얻은 마케도니아 왕위를 계속 위협하였는데, 데메트리오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왕국에서 무방비 영토를 약탈하였으며, 마침내 퓌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뤼시마코스의 연합군이 데메트리오스를 싫어하던 백성들의 도움을 얻어 기원전 288년 마케도니아에서 그를 쫓아내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아시아로 가서 뤼시마코스의 영토 일부 지역을 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하였다. 그러나 기아와 전염병으로 데메트리오스는 군대 상당수를 잃었으며, 셀레우코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시리아에 당도하기 전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그는 자신의 군대에게 완전히 버려져 셀레우코스에게 넘겨졌다. 데메트리오스 1세의 아들 안티고노스는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과 부하들까지 바쳤으나 모두 허사였다. 데메트리오스는 3년 동안 투옥된 끝에 기원전 28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안티고노스에 넘겨졌으며, 코린토스에서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 데메트리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168년에 로마페르세우스를 무찌르고 마케도니아 왕국을 정복할 때까지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이었다.

3. 평가

데메트리오스는 유능한 장군이었고, 외모가 준수하고 용감했으며 친구에게는 신의가 두터운 인물이었지만, 방탕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며 오만한 면도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열전에서 데메트리오스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비교하며, 둘 다 정욕이 강하고 술을 좋아하며 전쟁을 즐기고, 씀씀이가 크고 사치스러우며, 인생의 부침이 심하고, 번영의 정점에 있다가도 순식간에 몰락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곧 세력을 회복하는 점이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3.1. 긍정적 평가

데메트리오스 1세는 기원전 317년 파라이타케네 전투부터 마지막 패배에 이르기까지 30년 간의 군 경력 동안 공성전에서 매우 효과적인 지휘관임을 증명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도입한 혁신을 활용하여 그 규모를 더욱 확대했다. 그는 헬레니즘 군대에서 표준화된 대규모 공성 무기 사용 외에도, 전례 없는 규모의 공성전을 유지할 수 있는 뛰어난 군수 전문가였다. 안티고노스 왕조 출신인 데메트리오스 1세는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공성전을 수행하며 수륙 양용 공성전에도 참여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몇 차례 공성전에 실패하기도 했지만, 특히 로도스 공방전에서 그는 때때로 '전격전'으로 묘사되는 공성전 전략을 사용했다. 기원전 304-303년과 294-291년 그리스에서의 작전 동안, 빠른 '돌격' 이후 몇 달 만에 도시들을 연이어 점령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304-303년에는 파낙툼, 필레, 케크리에스, 에피다우로스, 시키온, 코린토스, 부라, 스키루스 (아르카디아), 아르고스, 오르코메노스를 차례로 점령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1세는 기원전 288년에 완전한 패배를 겪기 전에 11만 명의 병사를 지휘했다고 한다. 이 수치는 고대 저자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가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당대 최대 규모로 기억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재능 있는 무장이었고, 용모가 준수하고 용감하며 우정에 두터운 인물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열전에서 데메트리오스 1세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대비하여, 마찬가지로 정욕이 강하고 술을 좋아하며 전쟁을 좋아하고, 씀씀이가 좋고 사치스러우며, 인생에서의 부침이 격렬하고, 번영의 절정에 있다고 생각하면 순식간에 그것이 붕괴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곧 세력을 회복하는, 그러한 남자라고 평했다.

3.2. 부정적 평가

데메트리오스는 재능 있는 무장이었고, 용모가 준수하고 용감하며 우정에 두터운 인물이었지만, 방탕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며 오만한 면도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열전에서 데메트리오스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대비하여, 마찬가지로 정욕이 강하고 술을 좋아하며 전쟁을 좋아하고, 씀씀이가 좋고 사치스러우며, 인생에서의 부침이 격렬하고, 번영의 절정에 있다고 생각하면 순식간에 그것이 붕괴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곧 세력을 회복하는 그러한 남자라고 평했다.

4. 가족 관계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는 여러 번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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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자녀
안티파트로스의 딸 필라
아테네의 에우리디케
아이아키데스의 딸 데이다메이아
아가토클레스의 딸이자 피로스의 왕비였던 라나사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딸 프톨레마이스

5. 문화적 유산

헤겔은 그의 저서 철학사 강의에서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에 대해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와 다른 사람들은 [알렉산더] 이후 곧 아테네에서 신으로 숭배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헤겔의 주장의 정확한 출처는 불분명하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의 짧은 전기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로도스 공방전 (기원전 305-304년)], 데메트리오스의 지휘
로도스 공방전 (기원전 305-304년)], 데메트리오스의 지휘


헤겔의 오류는 플루타르크의 [https://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Plutarch/Lives/Demetrius*.html 데메트리우스의 생애]를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팔레레우스의 데메트리오스가 아닌 폴리오르케테스 데메트리오스에 관한 것이다. 플루타르크는 이 작품에서 폴리오르케테스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에서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를 정복한 과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작품의 12장에서 플루타르크는 폴리오르케테스 데메트리오스가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지는 영예를 받았다고 묘사한다. 플루타르크의 이 설명은 헤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혼란스러웠다.

6. 같이 보기

*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
* 가에타노 푸그나니
* L. 스프래그 드 캠프
* 알프레드 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