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기념의 날
1. 개요
건국기념의 날은 일본의 공휴일로, 초대 일본 천황인 진무 천황의 즉위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 날은 원래 기원절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폐지되었다가 1966년 '건국기념의 날'로 명칭이 변경되어 재제정되었다. 건국기념의 날은 2월 11일로, 정부 주최 행사는 없지만, 신사나 사찰에서 축제가 열리고, 해상자위대에서는 기념 행사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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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기념일 -
광명성절
광명성절은 김정일의 생일을 기념하는 북한의 명절로, 2월 16일부터 이틀간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리며, 김정일의 개인 숭배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
2월의 기념일 -
다케시마의 날
다케시마의 날은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며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로, 한국의 강력한 반발과 한일 관계 악화를 야기하고 있다. -
일본의 공휴일 -
성년의 날
성년의 날은 매년 5월 셋째 주 월요일에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우고 성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부여하기 위해 기념하는 날로, 삼한시대부터 유래하여 조선시대의 관례와 계례를 거쳐 현대에는 여성가족부 주관 기념행사와 선물 문화로 이어진다. -
일본의 공휴일 -
국민의 휴일
국민의 휴일은 징검다리 연휴로 인한 국민 불편 해소를 위해 공휴일 사이에 낀 평일을 휴일로 지정하는 제도이며, 5월 4일에 주로 적용되었으나 법 개정으로 날짜가 특정되지는 않아 다양한 공휴일 조합에 따라 지정될 수 있다. -
일본 -
후쿠시마 TV
후쿠시마 TV는 후쿠시마현 최초의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개국하여 여러 네트워크와의 제휴 및 탈퇴를 거쳐 현재는 FNN/FNS 계열의 완전 독점 방송국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후쿠시마현이 주식의 절반을 소유하여 공공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
일본 -
FM 오사카
FM 오사카는 1970년 간사이 지역 최초의 민영 FM 방송국으로 개국하여 오사카부를 중심으로 85.1MHz 주파수로 방송되며 자체 제작 프로그램과 JFN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FM OH!'라는 애칭을 사용하다 2020년 'FM오사카'로 변경, 음주운전 방지 캠페인 등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는 일본의 라디오 방송국이다.
2. 연혁
1966년 법률 개정으로 공휴일에 추가되어 다음 해인 1967년 2월 11일부터 적용되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정해져 1948년에 폐지된 기원절과 같은 2월 11일로 정해졌으며, 일본서기의 진무 천황 즉위일(신유년 봄 정월 경진 그믐)에서 유래한다.
1951년경부터 기원절 부활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1957년 2월 13일 자유민주당 의원들이 '건국기념일' 제정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일본사회당은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고, 과거 진무동정 이야기가 만주사변, 대동아전쟁에 이용되어 편협한 충군 애국 교육에도 이용되었다며 반대하여 중의원에서는 가결되었으나 참의원에서는 폐기되었다.
이후 '건국기념일' 제정 법안은 9번 제출과 폐기를 반복했지만, 1966년 6월 25일 명칭에 ‘の’를 삽입한 ‘건국기념의 날(建国記念の日)’로 “건국된 사건 그 자체를 기념하는 날”로 수정되어 ‘건국기념일’ 제정 개정 법안이 통과되었다.
개정 법안은 ‘건국기념일은 정령으로 정하는 날로 건국을 기념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른다.’고 정하고, 총리는 건국기념일 심의회에 자문하여 그 답신을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1966년 12월 8일 건국기념일 심의회는 ‘2월 11일’로 하는 답신을 제출했고, 사토 내각은 1966년 12월 9일 ‘건국기념일은 2월 11일로 한다.’는 정령(1966년 정령 제376호)을 공포하고 즉시 시행하였다.
2.1. 기원절
기원절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의 즉위일을 기념하여 1872년에 제정된 기념일이다. 1948년까지 존속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무 천황은 신유년 봄 정월 경진 그믐(음력 1월 1일)에 즉위했다. 메이지 시대 초기, 메이지 유신의 일환으로 메이지 정부는 음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전환하면서 진무 천황의 즉위일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2월 11일로 정했다.
기원절은 천황 중심의 국가 이념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지역적 충성심이 강했던 일본인들을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심으로 단결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천황 숭배를 장려하고, 무사도 정신을 강조하여 모든 남성이 군 복무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했다.
기원절에는 대규모 퍼레이드와 축제가 열렸으며, 일본 국민들은 천황의 초상화에 절하고 국가를 부르며 애국적인 연설을 들었다. 학교에서도 기원절 행사가 열렸고, 학생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8년에 '공휴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기원절은 폐지되었다.
2.2. 기원절 폐지와 건국기념일 제정 논의
1948년에 폐지된 기원절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초대 일본 천황인 진무 천황의 즉위일을 기준으로 1872년에 제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국가 신토에 기반한 기겐세쓰(기원절)가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역사 연구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여 폐지했다.
1951년경부터 기원절 부활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1957년 2월 13일 자유민주당 의원들이 '건국기념일' 제정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일본사회당은 역사적 근거 부족과 만주사변, 대동아전쟁 등에서 군국주의에 이용된 점을 들어 반대했다. 이후 법안은 9번이나 제출과 폐기를 반복했다. 1963년 6월 20일에는 중의원 내각위원회에서 법안 표결을 강행하려는 위원장과 이에 저항하는 사회당 의원들 간의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다.
일본사회당은 일본국 헌법 시행일인 5월 3일을, 공명당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일인 4월 28일을, 민사당은 쇼토쿠 태자가 17조 헌법을 제정한 4월 3일을 건국기념일로 제안하는 등 날짜에 대한 논의도 분분했다.
결국 1966년 6월 25일, 명칭을 '건국기념의 날'로 변경하여 "건국된 사건 자체를 기념하는 날"로 해석하도록 하고, 날짜는 심의회 자문을 거치는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일본 총리부에 설치된 건국기념일 심의회는 약 반년간의 심의를 거쳐 1966년 12월 9일 '2월 11일'을 건국기념일로 하는 답신을 제출했고, 같은 날 사토 내각은 이를 확정하는 정령을 공포했다.
신사본청은 1955년 기원절 봉축 국민대회 운영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건국기념일 제정 운동의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향우연맹, 일본유족회 등 보수 단체들도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이후부터 신도계, 보수·우익계 인물과 단체가 "기원절 부활 운동"을 전개했다.
2.3. 건국기념일 제정
1966년 일본에서 '건국기념일' 제정에 관한 법률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명칭을 '건국기념일'에서 '건국기념의 날'로 변경하였는데, 이는 '건국된 사건 그 자체를 기념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함이었다.
구체적인 날짜 결정은 각계 지식인으로 구성된 건국기념일 심의회에 자문하여 진행되었다. 심의회는 약 반년간의 심의를 거쳐 위원 9명 중 7명의 찬성으로 '2월 11일'을 건국기념일로 하는 답신을 제출했다.
1966년 12월 9일, 사토 내각은 이 답신을 존중하여 '건국기념일은 2월 11일로 한다'는 정령(1966년 정령 제376호)을 제정, 공포하고 즉시 시행하였다. 이 날짜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정해져 1948년에 폐지된 기원절과 같은 날짜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진무 천황의 즉위일(신유년 봄 정월 경진 그믐)에서 유래한다.
개정 법안은 총리가 건국기념일을 정하는 정령을 제정할 때 건국기념일 심의회의 자문을 받고 그 답신을 존중하도록 규정했다.
3. 건국기념일 심의회
건국기념일심의회는 1966년 7월 11일 일본 총리부의 부속 기관으로 발족하여 같은 해 12월 15일 폐지되었다. 위원 정수는 10명 이내였다. 1966년 7월 28일부터 12월 8일까지 총 9회의 회의를 개최하였고, 12월 9일 내각총리대신에게 '2월 11일'로 건국기념일을 정하는 답신을 제출하였다. 제5회 회의는 '건국기념일에 관한 공청회'로서 10월 24일 센다이시, 도쿄도, 오사카시, 히로시마시에서 동시 개최되었으며, 위원 2명씩 참가했다. 심의회는 위원 9명 중 7명의 찬성으로 '건국기념일' 날짜를 '2월 11일'로 하는 답신을 제출했다.
3.1. 심의회 구성 및 활동
건국기념일심의회는 1966년 7월 11일 총리부 부속 기관으로 발족하여 같은 해 12월 15일에 폐지되었다. 위원은 10명 이내로 구성되었으며, 학식 경험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심의회는 1966년 7월 28일부터 12월 8일까지 총 9번의 회의를 개최하였다. 제5회 회의는 '건국기념일에 관한 공청회'로, 같은 해 10월 24일 센다이,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에서 동시에 개최되었으며, 각 회의에는 위원 2명씩 참가했다. 12월 9일, 심의회는 내각총리대신에게 '2월 11일'을 건국기념일로 하는 답신을 제출했다(개별 의견 부기).
답신에는 회장, 회장대리와 관계없이 위원들이 오십음 순으로 나열되었으며, 위원 9명 중 7명이 2월 11일에 찬성했다.
심의회 위원 명단과 각 위원의 출석 회의 및 건국기념일 의견은 다음과 같다.
| 위원 | 출석 회의 | 건국기념일 의견 |
|---|---|---|
| 스가와라 통제 (회장) | 전 회의 출석 | 2월 11일 |
| 요시무라 정 (회장 대리) | 전 회의 출석 | 2월 11일 |
| 아베 겐이치 | 제5회 회의 결석 | 공휴일 지정은 바람직하지 않음. 굳이 꼽자면 1월 1일이 무난함 |
| 오야 장일 | 제2회 회의만 출석 | 최종 제9회 회의 직전에 사임하여 답신에 개별 의견 미기재 |
| 오쿠다 동 | 전 회의 출석 | 입춘 (인간 사회가 아닌 국토에 중점을 두어야 함) |
| 통곡 시게오 | 제1회 회의 결석 | 2월 11일 |
| 사카키바라 천 | 전 회의 출석 | 2월 11일 |
| 전변 번자 | 제6회 회의 결석 | 2월 11일 |
| 주교 성일 | 전 회의 출석 | 2월 11일 (정부 행사로 하지 않는 것을 조건) |
| 송하정수 | 제1, 2, 6회 회의 결석 | 2월 11일 |
3.2. 공청회 및 여론조사
1966년 (쇼와 41년) 12월 9일, 사토 내각은 "건국기념의 날은, 2월 11일로 한다."라고 한 "건국기념의 날이 되는 날을 정하는 정령" (쇼와 41년 정령 제376호)을 정하고 공포하여 즉시 시행했다.
건국기념일 날짜에 대한 논의에서 일본사회당은 일본국 헌법이 시행된 5월 3일 (헌법기념일)을, 공명당 (구·공명정치연맹) 설립자이자 창가학회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된 4월 28일을 각각 제안했다. 민사당은 쇼토쿠 태자가 17조 헌법을 제정했다고 여겨지는 4월 3일을 주장했고, 아사히 신문도 사설에서 같은 날짜를 제안했다.
결국, 명칭에 '의'를 삽입한 '건국기념'의' 날'로 '건국되었다는 사상 그 자체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고, 구체적인 날짜 결정에 있어서는 각계의 유식자들로 조직되는 심의회에 자문하는 등의 수정을 하여, 일본사회당도 타협했다.
4. 논쟁
1950년대 중반부터 '건국기념일'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사학회(역사학 회의) 학회원이었던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三笠宮崇仁)는 이사장 사카모토 타로(坂本太郎)에게 '건국기념일' 제정 반대 결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사학회는 학술 단체이므로 정치적 결의는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에 분개한 미카사노미야는 학회를 탈퇴하며 '이사장의 독재를 비판한다'고 했고, 사카모토는 여론과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일부 국수주의자는 미카사노미야의 반대 결의 시도를 알고, 1959년 '기원절 봉축 건국제대회'에 참가한 우익 구성원이 궁궐에 난입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1966년, 건국기념일 심의회의 의뢰로 내각총리대신 관방 홍보실은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는 같은 해 11월 4일 제6회 회의에 보고되었다.
4.1. 역사적 근거 논란
일본 신화의 등장인물이자,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초대 천황으로 여겨지는 진무 천황의 즉위일은 음력 1월 1일이다。메이지 시대에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2월 11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진무 천황의 역사적 실존 여부와 건국 신화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진무 천황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1950년대 중반, 역사학 회의에서 미카사노미야 타카히토신노(三笠宮崇仁親王)는 '건국기념일' 제정에 반대하는 결의를 주장했으나, 이사장 사카모토 타로(坂本太郎)는 학술 단체의 정치적 결의는 부적절하다며 반대했다. 미카사노미야는 이에 학회를 탈퇴했고, 사카모토는 비판을 받았다. 1959년 '기원절 봉축 건국제대회'에 참가한 우익 궁서성원이 궁저에 난입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66년 건국기념일 심의회의 의뢰로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4.2. 군국주의 연관성 비판
1950년대 중반부터 '건국기념일'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역사학 회의의 학회원이었던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는 '건국기념일' 제정에 반대하는 결의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사장이었던 사카모토 타로는 '사학회는 학술 단체이므로 정치적 결의는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에 미카사노미야는 학회를 탈퇴하고 '이사장의 독재를 비판한다'고 하여, 사카모토는 여론과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일부 국수주의자는 미카사노미야의 반대 결의 시도를 알고, 1959년 '기원절 봉축 건국제대회'에 참가한 우익 구성원이 궁궐에 난입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1966년 11월 30일, 건국기념일 심의회의 의뢰로 내각총리대신 관방 홍보실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쇼와 41년 관보 자료판 No.449 게재). 이 조사는 1966년 9월 29일부터 10월 6일까지 전국 20세 이상 남녀 1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되었으며(유효 회수 표: 8,700명), 사단법인중앙조사사의 조사원이 면접 청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는 같은 해 11월 4일 제6회 회의에 보고되었다.
4.3. 우익 단체의 활동
1950년대 중반부터 '건국기념일'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1959년에 열린 '기원절 봉축 건국제대회'에 참가한 우익 구성원이 궁궐에 난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사본청은 1955년에 기원절 봉축 국민대회 운영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건국기념일 제정 활동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향우연맹, 일본유족회, 생장의 집 등 보수 단체도 참여하여 건국기념일 제정을 요구하는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된 1951년 전후부터 신도계, 보수·우익계 인물과 단체가 "기원절 부활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기원절 봉축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으로 활동했다. 1954년 신사본청은 기원절 제사를 거행하고 산하 신사에 2월 11일을 기원절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도록 통지했다. 1955년 생장의 집의 타니구치 마사하루는 "일본 건국의 이상 부활"을 내세웠고, 생장의 집 신자들은 기원절 부활을 요구하는 운동을 했다. 타니구치에게 건국기념일 제정은 메이지 헌법 부활과 일본국 헌법 폐지를 위한 첫걸음이었다.
5. 현재의 건국기념일
1966년 11월 4일, 건국기념일 심의회의 의뢰로 내각총리대신 관방 홍보실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제6회 회의에 보고하였다. 같은 해 9월 29일부터 10월 6일까지 전국 20세 이상 남녀 1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유효 회수 표는 8,700명이었다. 조사는 사단법인 중앙조사사의 조사원이 면접 청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건국기념일'로 적합한 날짜에 대한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5.1. 기념 행사
건국기념일에는 신사와 사찰에서 "건국제"(建国祭) 등의 제사가 거행된다. 정부 주최 행사는 없지만, 민간 단체 주최의 기념식은 매년 개최된다. 2020년부터는 "일본 건국기념일 기념회"가 주최하는 "건국기념일 중앙 기념식"이 열리고 있으며, 대사도 참석한다. "건국기념일 기념회"와 "기념 실행 위원회"는 "일본 건국기념일 기념회"로 재편되어 자체 기념식을 개최한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기지・일반 항만 등에 정박하고 있는 자위함에서 만함식을 거행한다. 해상자위대기 및/또는 신호기를 게양하여 건국기념일에 대한 축하의 뜻을 표한다. 해 질 녘에는 함선에 조명을 밝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