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카를 폰 헤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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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오르크 카를 폰 헤베시는 헝가리 출신의 화학자이자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연구의 선구자이다. 부다페스트와 여러 유럽 및 미국의 대학에서 수학하고 연구했으며, 하프늄의 발견, X선 분석법 개발,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생체 대사 연구 등으로 194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의 위협을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했고, 전쟁 후에는 코플리 메달과 원자력 평화상을 받았다. 헤베시는 1966년 프라이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부다페스트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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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카를 폰 헤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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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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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죄르지 비시츠 |
출생 | 1885년 8월 1일 |
출생지 |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사망 | 1966년 7월 5일 |
사망지 | 프라이부르크, 서독 |
시민권 | 헝가리 독일 |
국적 | 헝가리 |
학문 분야 및 경력 | |
분야 | 화학 |
직장 | 겐트 대학교 부다페스트 대학교 닐스 보어 연구소 ETH 취리히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맨체스터 대학교 슈테판 마이어 준원자 물리학 연구소 |
모교 | 부다페스트 대학교 베를린 공대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
박사 지도 교수 | 게오르그 프란츠 율리우스 마이어 |
학문 자문 | 프리츠 하버 어니스트 러더퍼드 |
박사 과정 학생 | 롤프 호제만 요한 뵘 |
주목할 만한 학생 | 에리카 크레머 (박사후 연구원) |
알려진 업적 | 하프늄 방사성 추적자 |
수상 | |
수상 | 노벨 화학상 (1943년) 코플리 메달 (1949년) 패러데이 강연상 (1950년) 평화를 위한 원자상 (1958년) 왕립 학회 회원 |
개인 정보 | |
자녀 | 4명 |
아버지 | 러요시 비시츠 |
어머니 | 에우게니아 쇼스베르거 |
2.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부다페스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이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맨체스터 대학교 등 유럽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어니스트 러더퍼드, 닐스 보어 등 당대 저명한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연구 경력을 쌓았다.
주요 업적으로는 디르크 코스터와 함께 X선 분석법을 이용하여 새로운 원소인 하프늄을 발견한 것과, 생물학적 과정을 추적하는 방사성 추적자 기법을 개척한 것이 있다. 방사성 추적자 연구는 훗날 그에게 노벨 화학상(1943년)을 안겨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했을 때, 유대인 동료 과학자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의 노벨 물리학상 금 메달을 나치의 약탈로부터 지키기 위해 왕수에 녹여 보관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당시 금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스웨덴으로 망명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 금을 복원하여 노벨 재단에 돌려주었다.
전후에도 스톡홀름 대학교 등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갔으며, 1949년 코플리 메달을 수상하고 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말년은 프라이부르크에서 보냈고, 1966년 그곳에서 사망하여 고향 부다페스트의 케레페시 묘지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
게오르크 카를 폰 헤베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 시절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하고 귀족적인 헝가리계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다.[7] 그의 부모는 러요시 비시츠와 유게니아(제니) 쇼스베르거 남작부인이었으며, 8남매 중 다섯째였다. 양가의 조부모는 페슈트의 유대인 공동체 회장을 지냈다.[7] 그의 부모는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8] 헤베시는 부다페스트에서 성장하여 1903년 피아리스트 김나지움을 졸업했다.[9] 1904년 그의 가족 이름은 헤베시-비시츠였으나, 헤베시는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다.헤베시는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1년간 화학을 공부하고,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현재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몇 달간 수학한 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옮겼다. 그곳에서 루트비히 가터만을 만났으며, 1906년부터 게오르크 프란츠 율리우스 마이어의 지도 아래 박사 논문 연구를 시작하여[10] 1908년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취득 후, 1908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었던 헤베시는 이를 거절하고 연구 환경을 직접 선택했다. 그는 카를스루에에서 프리츠 하버와 함께 연구했으며, 이후 영국 맨체스터로 가서 어니스트 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하며 닐스 보어를 만나기도 했다.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1918년 물리화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는 코펜하겐에 정착하여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2. 2. 연구 활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헤베시는 취리히 연방 공과 대학교에서 연구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연구 환경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프리츠 하버와 함께, 영국 맨체스터에서는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했으며, 이 시기에 닐스 보어를 만나 교류했다. 1918년에는 부다페스트 대학교의 물리화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1920년 코펜하겐으로 이주하여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1922년, 헤베시는 코펜하겐에서 디르크 코스터와 함께 새로운 원소인 하프늄(72Hf)을 공동으로 발견했다. 이는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제시한 주기율표에서 비어 있던 72번 원소 자리를 채운 발견이었다. 헤베시는 닐스 보어의 원자 모델을 바탕으로 이 원소를 찾고자 했으며, 코펜하겐의 광물 박물관에서 제공한 노르웨이와 그린란드의 광물 표본을 연구 자료로 활용했다. 그는 샘플의 특징적인 X선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새로운 원소의 존재를 확인했다. 원소의 이름 '하프늄'은 연구가 이루어진 코펜하겐의 라틴어 이름인 '하프니아(Hafniala)'에서 유래했다.
록펠러 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헤베시는 왕성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그는 X선 형광 분석법을 개발했으며, 사마륨의 알파선을 발견했다. 또한, 안정 동위원소 일부를 소량의 방사성 동위원소로 대체하여 체내 화학 물질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방사성 추적자 기법을 개척했다. 1923년에는 넓은콩(Vicia faba)을 이용하여 식물의 뿌리, 줄기, 잎에서 납의 방사성 동위원소(212Pb)가 어떻게 흡수되고 전위되는지를 추적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물학적 과정 연구에 처음으로 적용한 중요한 사례였다. 이 방사성 추적자 기법 연구는 훗날 그에게 1943년 노벨 화학상을 안겨주었다.
1924년, 헤베시는 프라이부르크로 돌아가 물리화학 교수가 되었고, 1930년에는 미국 코넬 대학교의 베이커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1934년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헤베시는 다시 코펜하겐 대학교의 닐스 보어 연구소로 돌아갔다. 그는 이곳에서 연구를 계속하여 1936년 중성자 활성화 분석법을 발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헤베시는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두 사람 모두 유대인이었다)가 맡긴 노벨 물리학상 금 메달을 나치 독일에게 압수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왕수에 녹여 용액 상태로 닐스 보어 연구소에 보관했다. 당시 금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943년, 헤베시는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망명하여 스톡홀름 대학교 유기화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망명 중이던 1943년에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헤베시는 보관했던 용액에서 금을 분리, 정제하여 노벨 재단에 전달했고, 재단은 이를 이용해 라우에와 프랑크의 메달을 다시 제작해주었다.
전후에도 헤베시는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1949년에는 벨기에 겐트 대학교의 프랑키 교수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왕립학회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수상하고 외국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은퇴 후에도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지속했다.
3. 주요 연구 업적
헤베시는 희토류 원소 연구에 기여했으며, 특히 멘델레예프 주기율표 상에서 당시 비어 있던 원자번호 72번 원소를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3년 네덜란드 물리학자 코스터와 함께 이 원소를 발견하고, 연구가 이루어진 코펜하겐의 라틴어 이름 '하프니아'를 따 하프늄이라고 명명했다.[2][4]
또한, 엑스선 분석법을 화학 연구에 응용하는 데 기여했으며, 동위 원소를 이용한 생리학적 추적관찰법을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이 추적관찰법 개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4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방사능 지시약>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이 외에도 1949년에는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고, 왕립 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정되는 등 과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3. 1. 하프늄 발견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제시한 주기율표에는 당시까지 원자번호 72번 자리가 비어 있었다. 헤베시는 닐스 보어의 원자 모델을 바탕으로 이 미지의 원소를 찾기로 결심했다.[1][2]1922년, 헤베시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 네덜란드 물리학자 디르크 코스터와 함께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코펜하겐의 노르웨이 및 그린란드 광물 박물관에서 제공한 광물 샘플을 엑스선 분광법으로 분석하여, 샘플의 특징적인 X선 스펙트럼 기록을 통해 새로운 원소의 존재를 확인했다.[2][3] 이 발견은 1923년에 공식 발표되었다.[1]
새롭게 발견된 원소 72번의 이름은 연구가 이루어진 도시이자 닐스 보어 연구소가 위치한 코펜하겐의 라틴어 이름인 Hafnia|하프니아lat를 따서 하프늄(72Hf)으로 명명되었다.[2][4] 헤베시는 헝가리인이었고 코스터는 네덜란드인이었지만, 연구에 조언을 준 닐스 보어를 기리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4]
다만, 맨셀 데이비스와 에릭 세리 같은 학자들은 원소 72가 전이 금속일 것이라는 예측은 화학자 찰스 버리가 먼저 했다고 주장하며, 하프늄 발견 과정에 대한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2]
3. 2. 방사성 동위원소 추적자 기법 개발
헤베시는 동위 원소를 이용하여 생명체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을 추적하는 방법을 개척했다. 록펠러 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그는 X선 형광 분석법을 개발하고 사마륨 알파선을 발견하는 등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헤베시는 안정 동위원소의 일부를 소량의 방사성 동위원소로 대체하여 체내 화학 물질의 경로를 추적하는 방식을 고안하여, 이를 통해 식물과 동물의 대사 과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1923년, 그는 납의 방사성 동위원소인 212Pb를 방사성 추적자로 사용하여 콩과 식물인 Vicia faba (넓적콩)의 뿌리, 줄기, 잎에서 납의 흡수 및 이동(전위) 과정을 추적한 연구 결과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실험은 방사성 동위원소 추적자 기법의 유용성을 입증한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이처럼 동위 원소를 이용한 생리학적 추적관찰법을 개척한 공로로 헤베시는 194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연구 분야에 대한 저서로 <방사능 지시약>을 남기기도 했다.
3. 3. 중성자 활성화 분석
1930년 코넬 대학교의 베이커 강사로 활동했던 헤베시는 1934년 나치 독일이 권력을 장악하자 코펜하겐 대학교의 닐스 보어 연구소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 1936년 중성자 활성화 분석법을 발명했다.4.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면서 헤베시는 위험에 처한 동료 과학자들의 노벨상 금메달을 왕수에 녹여 안전하게 보관하는 기지를 발휘했다.[14][15] 1943년, 나치의 위협이 거세지자 그는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연구를 지속했으며, 같은 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전쟁 중에도 그는 스웨덴 화학자 한스 폰 오일러-쳇핀과 공동 연구를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후, 헤베시는 덴마크로 돌아와 보관했던 금을 회수하여 동료들의 노벨상 메달을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14][15] 이후 그는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 영국 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으로 선정되었고, 코플리 메달(1949년)과 원자력 평화상(1958년) 등 다수의 영예를 안았다.
1961년까지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활동한 후, 말년은 프라이부르크에서 보냈다. 1966년 그곳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유해는 고향인 부다페스트의 케레페시 묘지에 안장되었다.
4. 1. 나치 독일의 위협과 망명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독일의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는 자신들의 금 노벨상 메달이 나치에 의해 압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덴마크의 닐스 보어 연구소로 보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면서 메달의 존재는 오히려 두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독일 밖으로 금을 반출하는 것은 불법이었고, 만약 라우에와 프랑크가 메달을 보낸 사실이 발각될 경우 처벌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4][15]이러한 위험을 막기 위해, 헤베시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두 개의 노벨상 메달을 왕수에 녹여 용액 상태로 만든 뒤, 눈에 띄지 않게 닐스 보어 연구소 실험실 선반 위에 보관했다. 전쟁이 끝난 후, 헤베시는 코펜하겐으로 돌아와 용액이 무사히 보존된 것을 확인하고 화학적인 방법을 통해 금을 다시 침전시켰다. 그는 회수된 금을 노벨 재단에 보냈고, 재단은 이 금으로 메달을 다시 주조하여 원래 주인인 라우에와 프랑크에게 돌려주었다.[14][15]
1943년이 되자 코펜하겐은 더 이상 유대인 과학자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헤베시는 나치의 위협을 피해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탈출하여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스톡홀름에서 그는 전쟁 기간 내내 친독일 성향을 보였던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한스 폰 오일러-쳇핀의 연구실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정치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헤베시와 폰 오일러-쳇핀은 전쟁 중과 이후에 여러 과학 논문을 공동으로 저술했다. 헤베시는 스웨덴 망명 중이던 1943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까지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4. 2. 노벨상 수상과 이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는 자신들의 금 노벨상 메달이 나치에 압수될 것을 우려했다. 당시 독일 밖으로 금을 반출하는 것은 불법이었기에, 메달이 발각될 경우 두 사람이 기소될 위험이 있었다.[14][15] 이를 막기 위해 헤베시는 메달을 왕수에 녹여 용액 상태로 만든 뒤, 닐스 보어 연구소의 실험실 선반 위에 눈에 띄지 않게 보관했다.[14][15]1943년, 코펜하겐이 더 이상 유대인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게 되자 헤베시는 스웨덴으로 탈출하여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연구를 이어갔다. 스톡홀름에서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친독일 성향을 유지했던 스웨덴의 노벨상 수상자 한스 폰 오일러-쳇핀 교수의 화학과에서 활동했으며, 두 사람은 전쟁 중과 이후에도 여러 과학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헤베시는 스웨덴 망명 중이던 1943년, 동위 원소를 이용한 생리학적 추적관찰법을 개척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전쟁이 끝난 후, 헤베시는 연구소 선반에 보관했던 왕수 용액이 무사히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용액에서 금을 다시 침전시켜 분리해냈다. 이 금은 노벨 재단으로 보내졌고, 재단은 회수된 금을 사용하여 라우에와 프랑크의 메달을 다시 제작하여 돌려주었다.[14][15]
헤베시는 이후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49년에는 영국 왕립 학회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수상하고 외국인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코플리 메달 수상을 특히 자랑스러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중은 노벨 화학상이 과학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영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40~50명이 노벨 화학상을 받았지만,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은 10명뿐이며, 코플리 메달을 받은 사람은 단 두 명뿐이다." (다른 한 명은 닐스 보어였다.) 또한, 방사성 동위원소의 평화적 이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8년 원자력 평화상(Atoms for Peace Award)을 수상했다.
헤베시는 1961년까지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활동했으며, 말년은 프라이부르크에서 보냈다. 1966년 그곳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유해는 그의 고향인 부다페스트의 케레페시 묘지에 안장되었다.
5. 말년과 죽음
헤베시는 1924년 피아 리스(Pia Riis)와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그의 딸 중 한 명인 유제니는 스웨덴의 노벨상 수상자 스반테 아레니우스의 손자와 결혼했다.[16]
제2차 세계 대전 중 덴마크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헤베시는 유대인 동료 과학자인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가 나치로부터 노벨 물리학상 금 메달을 압수당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왕수에 녹여 닐스 보어 연구소 선반 위의 용액으로 위장하여 보관했다. 당시 나치 독일은 금의 국외 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고, 유대인이었던 두 과학자는 기소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헤베시는 스웨덴으로 망명했으며, 망명 중이던 194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전쟁이 끝난 후, 헤베시는 연구소로 돌아와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던 용액에서 금을 회수하여 노벨 재단에 보냈고, 재단은 이를 이용하여 라우에와 프랑크의 메달을 다시 제작해주었다.
1949년에는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으며, 왕립 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헤베시는 평생 총 397편의 과학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중에는 방사화학 분야 선구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베크렐-퀴리 기념 강연도 포함되어 있다.[17]
헤베시는 프라이부르크에서 지내다 1966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처음 프라이부르크에 묻혔으나, 2000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케레페시 묘지로 이장되었다.[17] 가족의 요청에 따라 그의 유해는 2001년 4월 19일 부다페스트의 출생지에 안치되었다고도 한다.[17]
2005년 5월 10일, 덴마크 공과대학교 DTU Nutech(구 리스 DTU 지속 가능한 에너지 국립 연구소)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헤베시 연구소[18]가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동위원소 추적자 원리를 개발한 헤베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미카엘 옌센 교수가 초대 소장을 맡았다.
6. 가족 관계
헤베시는 1924년 피아 리스(Pia Riis)와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딸 중 한 명인 유제니(Eugenie)는 스웨덴의 노벨상 수상자인 스반테 아레니우스의 손자와 결혼하였다.[16]
참조
[1]
논문
George de Hevesy 1885-1966
[2]
논문
George von Hevesy memorial lecture. George Hevesy and his concept of radioactive indicators--in retrospect
[3]
논문
George Hevesy inventor of isotope methods in biochemical studies
[4]
논문
Professor George C. De Hevesy. In reverent memory
[5]
논문
George De Hevesy
[6]
간행물
George de Hevesy: Hafnium and Radioactive Traces; Chemistry
https://docs.google.[...]
2005-04
[7]
서적
George de Hevesy : life and work : a biography
A. Hilger
[8]
웹사이트
George de Hevesy, Nobel Prize in Chemistry 1943
https://www.geni.com[...]
1885-08
[9]
간행물
The Hungarian Gymnasium Educational Experience and Its Influence on the Global Power Shift
https://repozitorium[...]
Global Science & Technology Forum
2012
[10]
간행물
Nobel Prizes and Nature's Surprises
[11]
논문
Georg Charles de Hevesy: The father of nuclear medicine
[12]
논문
The Absorption and Translocation of Lead by Plants: A Contribution to the Application of the Method of Radioactive Indicators in the Investigation of the Change of Substance in Plants
[13]
웹사이트
The Nobel Prize in Chemistry 1943
https://www.nobelpri[...]
[14]
간행물
Adventures in radioisotope research
https://archive.org/[...]
Pergamon press
[15]
웹사이트
The Nobel Prize Medals and the Medal for the Prize in Economics
http://nobelprize.or[...]
The Nobel Foundation
[16]
문서
Scripps Log obituaries, http://scilib.ucsd.edu/sio/biogr/ScrippsLogObits.pdf
[17]
논문
Marie Curie and her contemporaries
http://jnm.snmjourna[...]
[18]
웹사이트
Hevesy Laboratory
https://web.archive.[...]
[19]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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