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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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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신 대기근은 1670년부터 1671년까지 조선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으로, 천문 현상, 지진, 역병, 냉해, 가뭄, 홍수, 해충 등 다양한 자연재해가 복합적으로 발생하여 초래되었다. 1670년에는 해무리, 유성 출현, 지진, 역병, 냉해, 가뭄이 겹쳐 피해가 커졌고, 1671년에도 기근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기근으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화되었으며, 자녀나 부모를 버리거나 살해하는 사건, 심지어 인육을 먹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정부는 구휼 정책을 펼쳤으나 미흡했고, 썩은 쌀 지급, 환곡 탕감 거부 등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다. 경신 대기근은 조선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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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 대기근

2. 사건 경과

1670년(경술년)에는 조선 팔도에 걸쳐 여러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이처럼 1670년에는 가뭄, 냉해, 홍수, 해충 등 각종 자연재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조선 사회에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1671년(신해년)에는 기근이 더욱 심해지면서 굶주림으로 인해 자식이나 부모를 버리거나 심지어 잡아먹는 일까지 발생했다.[119][120]

2. 1. 1670년 (경술년)

1670년(경술년)에는 조선 팔도에 걸쳐 여러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 천문 현상:
  • 1월 1일: 해무리 (안쪽은 붉은색, 바깥쪽은 푸른색)[1][2]
  • 1월 3일: 평안도에서 흰 무지개와 삼중 햇무리 관측 보고[3][4]
  • 1월 6일: 금성이 낮에도 관측됨[12]
  • 1월 8일, 1월 10일: 서울에 유성 출현[12]
  • 1월 9일: 평안도에 유성운석 낙하[14][15]
  • 1월 11일: 달무리목성과 달을 동시에 둘러쌈[5]
  • 1월 13일: 황해도에서 우레 발생 보고[9][10]
  • 1월 21일: 꼬리가 2m~3m인 유성이 플레이아데스 성단 아래에서 땅으로 떨어짐[16]
  • 2월 5일: 유성 재출현[17]
  • 2월 9일: 달무리 발생[6]
  • 2월 12일, 2월 14일: 해무리 발생[7][8]
  • 윤2월 11일: 먼지 같은 것으로 인해 낮 동안 어두컴컴해짐[18][19]
  • 윤2월 29일: 꼬리가 15m~18m인 유성 낙하[20][21]
  • 3월 11일: 해무리 발생[11]
  • 5월 13일: 병 모양의 유성이 빛을 내며 땅을 비춤[22][23]

  • 냉해:
  • 윤2월 26일: 서울에 늦은 눈과 우박, 오후에는 진눈깨비[39][40][41]
  • 윤2월 28일: 경상도에 새알 크기의 우박 (3월 8일 보고)[42]
  • 3월 25일: 평안도에 서리 (4월 7일 보고)[43][44]
  • 3월 27일, 4월 6일, 4월 7일: 평안도에 연이은 서리와 우박으로 곡식 싹, 목화, 삼베 피해, 3월에 눈[45][46]
  • 4월 6일: 경기도에 우박으로 밀과 보리 피해[47][48]
  • 4월 8일: 전라도와 경상도에 서리 발생
  • 4월 9일: 전라도와 경상도에 우박과 심한 가뭄[82][83]
  • 4월 16일: 함경도에 우박 (5월 5일 보고)[49]
  • 4월 23일: 전라도에서 밤마다 서리로 농작물 피해 보고[50][51]
  • 4월 28일: 원양도(현 강원도)에 우박[52][53]
  • 5월 7일: 평안도에 연일 우박으로 땅에 반 (약 15 cm)나 쌓이고, 가뭄으로 농사 불가능 보고[54][55]
  • 5월 9일: 경기도에 우박 (5월 12일 보고)[56][57]
  • 5월 16일: 원양도와 황해도에 우박 보고[96][97]
  • 5월 17일: 평안도에 오리알 크기의 우박이 반 자나 쌓이고, 4살 아이 사망, 꿩, 토끼, 까마귀, 까치 등 짐승 떼죽음 보고[58][59]
  • 5월 22일: 5월 5일 평안도에 우박 내렸다는 보고[60][61]
  • 6월: 평안도에서 우레와 바람을 동반한 우박[62][63]
  • 6월 16일: 평안도에 우박으로 곡식 피해 (7월 11일 보고)[64][65]
  • 7월 11일: 6월 5일 함경도에 비둘기 알 만한 우박 보고[65][66]

  • 가뭄:
  • 3월 20일: 예조에서 기우제 건의, 임금 수용[67][68]
  • 3월 23일: 서울 및 각지 성황당, 우사단에 관원 파견하여 기우제[69]
  • 3월 25일: 전국적인 가뭄 확산 추정[70]
  • 3월 28일: 종묘•사직•북교에 기우제[71]
  • 4월 1일: 황해도에 큰 가뭄 보고[72][73]
  • 4월 4일, 9일, 10일: 기우제 시행, 대신 파견 명령[74][75][76]
  • 4월 9일: 파종 불가능 상황, 밀과 보리 생존 주장[77] (실제로는 한 달간 비가 없어 밀과 보리 모두 말라 죽음)[78]
  • 4월 10일: 기우제 중단 (비 올 듯)[79][80]
  • 4월 14일: 기우제 중단 (비 조금 옴)[81]
  • 4월 27일: 여섯 번째 기우제[84][85]
  • 4월 29일: 평안도에 재난 급 가뭄 보고[86][87]
  • 5월 2일: 임금 하교, “들판이 타버려 밀, 보리 수확 불가능, 파종 시기 놓침”[88][89]
  • 5월 7일: 우박과 가뭄 심각, 농사 불가능 (평안 감사 보고)[54]
  • 5월 10일: 여덟 번째 기우제 시행 명령[92][93]
  • 5월 14일: 경상도에 큰 가뭄으로 모가 말라 죽음 (경상 감사 보고)[94][95]
  • 5월 16일: 전라 감사, 참혹한 가뭄 보고[96][97]
  • 5월 22일: 큰 비[98]
  • 5월 23일: 비 계속[99], 절기를 넘겨 파종 시기 놓침, 조선 팔도 흉년[100][101]

  • 홍수:
  • 6월 1일: 전라도에 큰 비로 들판이 강처럼 변함 (전라 감사 보고)[102]
  • 6월 8일: 경상도에 큰 홍수 (경상 감사 보고)[103][104]
  • 6월 20일: 경기도에 큰물 (경기 감사 보고)[105]
  • 6월 22일: 사대문에서 기청제 거행[109]
  • 7월 1일: 함경도에 심각한 수재 (함경 감사 보고)[110][111]
  • 7월 2일: 황해도 홍수, 산사태로 인명 피해[112][113]
  • 7월 11일: 평안도 큰비로 곡식 손상, 함경도 심각한 수재 동시 보고[64][65][66]
  • 8월 27일: 전라도 화순군 9세 아이 강풍에 사망, 부안 변산 금송 수백 그루 뽑힘, 장흥 해산물 채취 12명 익사[114]
  • 9월 1일~3일: 강원도 비와 바람
  • 9월 8일: 강원도 광풍, 비, 우박[115]
  • 9월 9일: 제주 목사, 7월 27일 강풍, 폭우 피해 보고[116]
  • 9월 17일: 강원도 강풍, 폭우, 가옥 파손, 도로 침수, 우박으로 농작물 피해[117]
  • 11월 17일: 나주 영산강 천둥, 번개, 큰비로 밀, 보리 침수[118]


이처럼 1670년에는 가뭄, 냉해, 홍수, 해충 등 각종 자연재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조선 사회에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주요 식량 생산지인 호남 지역의 피해가 극심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컸을 것으로 보인다.

2. 1. 1. 천문 현상

1월 1일, 해무리가 졌는데 안쪽이 붉은 색이고 바깥쪽이 푸른 색이었다.[1][2] 이틀 뒤인 1월 3일에는 지난 해(1669년) 12월 29일에 평안도에 흰 무지개가 뜨고 삼중 햇무리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온다.[3][4] 1월 11일에 또 달무리가 생겨 목성과 달을 동시에 둘렀으며,[5] 다음 달인 2월 9일에 달무리가 지고,[6] 2월 12일과 2월 14일에는 해무리가 졌다.[7][8] 1월 13일에는 지난 9일에 황해도에 우레가 쳤다는 보고가 올라왔다.[9][10] 이런 흔치 않은 현상을 ‘불길한 징조’로 여긴 것은 단순히 중세적 미신일 수도 있지만, 무지개와 무리가 며칠동안 연속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그 이전에 많은 비가 오랫동안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과 황해도에서 거의 동시에 우레가 발생한 것 역시 광범위한 호우가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3월 11일에 또다시 해무리가 졌다.[11]

1월 6일부터 한 달 가까이 금성이 낮에도 보여 불안감을 자아냈고, 1월 8일과 1월 10일에는 서울에, 1월 9일에는 평안도에 유성이 나타났는데, 평안도의 경우 아예 운석이 떨어졌다.[12][13][14][15] 동시다발적인 유성의 출현은 이 당시 지구가 유성군을 지나는 바람에 우주 먼지로 인해 일조량이 감소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월 21일에도 꼬리가 2m~3m이나 되는 유성이 묘성(昴星: 현재의 플레이아데스 성단) 아래에서 나타나 땅으로 떨어졌으며,[16] 2월 5일에 유성이 또다시 나타났다.[17] 윤달 2월 11일, 오시부터 유시까지(대략 정오경에서 저녁 식사때 즈음까지) ‘마치 먼지가 내리는 듯’ 날이 컴컴해졌다.[18][19] 같은 달 29일에는 꼬리가 15m~18m이나 되는 유성이 떨어졌으며,[20][21] 한참 뒤인 5월 13일에는 또 다시 유성이 발견되었다. 모양이 병 모양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22][23]

2. 1. 2. 지진

1670년 1월 4일, 지난 1669년 12월 12일에 전라도에 문과 창문이 모두 흔들릴 정도의 강한 지진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24] 1670년 윤달 2월 16일에 경상도 거창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다음 달 6일에 서울에 보고되었다.[25] 윤달 2월 21일에 경기도 교동에서 지진이 있었음이 24일에 보고되었다.[26] 이틀 뒤인 23일에 경기도 통진(현 경기도 김포시)에서 지진이 일어나 28일에 보고되었다.[27] 5월 12일에는 황해도에 지진이 났음이 보고되었다.[28]

한참 뒤인 7월 16일, 경상도 동래(현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지진이 발생했음이 보고되었다.[29]

2. 1. 3. 역병

2월 15일 충청도에서 역병이 창궐해 80여 명이 죽었다.[30][31] 윤달 2월 11일에는 평안도에서 역병이 창궐해 1천 3백 명이 감염되었다.[32][33] 3월 7일 경상도에서 역병이 창궐하여 1천 명 이상이 감염되었다.[34][35] 4월 1일 충청도에 또다시 역병이 돌아 죽는 자가 연달았으며,[36][72] 4월 5일에는 제주에서 역병이 돌아 죽는 자가 연달았다.[37][38]

2. 1. 4. 냉해

1670년(현종 11년) 윤달 2월 26일, 서울에 때늦은 눈과 우박이 내렸고, 오후에는 눈과 비가 섞여 내렸다.[39][40][41] 윤달 2월 28일, 경상도에 새알만한 크기의 우박이 내렸다는 보고가 3월 8일에 올라왔다.[42] 3월 25일에는 평안도에 서리가 내렸다는 보고가 4월 7일에 도착했다.[43][44] 평안도에서는 3월 27일, 4월 6일, 4월 7일에 연이어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의 싹이 죽고 목화삼베가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심지어 3월에 눈까지 내리는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45][46]

4월 6일에는 경기도에 우박이 내려 밀과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47][48] 전라도와 경상도는 4월 8일에 서리가, 4월 9일에 우박이 내렸으며, 동시에 매우 심한 가뭄이 들었다.[82][83] 4월 16일에는 함경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이 소식은 5월 5일에 보고되었다.[49] 4월 23일에는 전라도에서 밤마다 서리가 내려 농작물이 피해를 입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50][51] 4월 28일에는 원양도(현대의 강원도)에 우박이 내렸다.[52][53]

5월 7일, 평안 감사로부터 평안도에 연일 우박이 내려 땅에 반 (약 15 cm)나 쌓였으며, 동시에 가뭄이 너무 심각하여 농사가 가망이 없다는 보고가 도착했다.[54][55] 5월 9일에는 경기도에 우박이 내려 5월 12일에 보고되었다.[56][57] 5월 16일에는 원양도와 황해도에 우박이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96][97] 5월 17일에 올라온 평안 감사의 보고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우박으로 인해 벼가 상한 것은 물론, 오리알 만한 크기의 우박이 쏟아져 반 자나 쌓이고, 네 살짜리 아이가 우박에 맞아 죽었으며, 꿩, 토끼, 까마귀, 까치 등 짐승들이 숱하게 죽었다는 내용이었다.[58][59] 5월 22일에는 지난 5월 5일에 평안도에서 우박이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60][61]

가뭄이 물러가고 홍수가 시작된 6월에는 다시 평안도에서 우레와 바람을 동반한 우박이 내렸다.[62][63] 6월 16일에 또다시 평안도에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했는데, 이 소식은 7월 11일에 보고되었다.[64][65] 7월 11일에는 지난 6월 5일에 함경도에 비둘기 알 만한 우박이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65][66]

2. 1. 5. 가뭄

3월 20일, 예조에서 임금에게 기우제를 지낼 것을 청했고, 임금이 이에 따랐다.[67][68] 이때쯤 이 가뭄과 이상기후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했는데, 3월 23일에 서울뿐 아니라 각지의 성황당, 우사단에 관원을 파견해 기우제를 지냈다.[69] 3월 25일, 지평 유연이 “서울에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외방에는 겨를이 없어서 지내지 못한다”고 고한 것으로 보아 가뭄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70] 3월 28일, 종묘•사직•북교에 사람을 보내 다시 기우제를 지냈다.[71] 하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이 4월 1일, 황해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72][73] 4월 4일, 4월 9일, 4월 10일에 다시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효과가 없자 종묘와 사직에 일반 관원이 아닌 대신을 파견해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4][75][76]

4월 9일, 네 번째 기우제를 지냈던 양심합에서 임금과 대신들이 나눈 대화를 살펴보면, 비가 너무 오지 않아 도저히 파종을 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때 대신들은 ‘약간이나마 비가 와서 밀이나 보리는 살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77] 이미 지난 한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밀과 보리가 모두 말라 죽은 뒤였다.[78] 4월 10일, 다섯 번째 기우제 도중 비가 올 듯 하자 다음날 기우제를 중단했다.[79][80] 4월 14일에 비가 조금 오자 기우제를 또 중단했다.[81] 그러나 이때 서리와 우박이 내리고 있던 경상도와 전라도, 즉 양남 지방은 가뭄이 더욱 심해졌고, 특히 전라도는 보리가 마르고 모가 타는 지경에 이르렀다.[82][83]

4월 27일, 여섯 번째로 기우제를 지냈다.[84][85] 그러나 이틀 뒤인 4월 29일, 평안도에 한재(旱災), 즉 재난 급의 가뭄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86][87] 5월 2일, 임금이 내린 하교를 보면, “들판이 모두 타버려서 밀, 보리를 수확할 수 없게 되었고 파종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88][89] 다음날 정원이 이 비망기 내용이 매우 좋으니, 대중에 공개할 것을 청했고, 임금이 윤허하여 반포하였다.[90][91] 5월 7일, 우박과 가뭄이 너무 심각해 농사가 가망이 없다는 평안 감사의 보고가 도착했다.[54] 5월 10일, 혹독한 가뭄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덟 번째 기우제를 시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92][93] 그러나 불과 4일 뒤인 5월 14일,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어 모가 다 말라 죽었다는 경상 감사의 보고가 접수되었다.[94][95] 이틀 뒤에는 전라 감사가 참혹한 가뭄이 들었음을 보고했다.[96][97]

5월 22일, 살인적인 가뭄이 계속되던 중 갑자기 큰 비가 내렸고,[98] 다음날인 23일에도 비가 계속되었다.[99] 가까스로 가뭄을 견뎌낼 수 있었으나 이미 절기를 넘겼기 때문에 파종 시기를 놓쳐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100] 이는 조선 팔도 전체가 겪은 흉년이었다.[101]

2. 1. 6. 홍수

1670년(현종 11년) 5월 말, 가뭄이 끝나는 듯했으나, 곧이어 홍수가 발생했다.

  • 6월 1일: 전라도에 큰 비가 내려 들판이 강처럼 변했다는 전라 감사의 보고가 있었다.[102]
  • 6월 8일: 경상도에 큰 홍수가 났다는 경상 감사의 보고가 있었다.[103][104]
  • 6월 20일: 경기도에 큰물이 졌다는 경기 감사의 보고가 있었다.[105]


당시 전국 각 도에 모두 홍수가 발생했는데, 주요 식량 생산지인 호남 지역의 피해가 특히 심각했다.[106]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지냈으나, 이제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기청제를 지내야 할 상황이었다.[107] 영중추부사 이경석은 기청제와 함께 죄수를 너그럽게 풀어줄 것을 건의했으나, 임금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우선 기청제만 지내도록 명했다.[108] 이틀 뒤인 6월 22일, 사대문에서 기청제가 거행되었다.[109]

  • 7월 1일: 함경도에 매우 심각한 수재가 발생했다는 함경 감사의 보고가 있었다.[110][111]
  • 7월 2일: 황해도에 홍수가 발생했고, 산사태로 인해 사람이 깔려 죽었다는 보고가 있었다.[112][113]
  • 7월 11일: 평안도에 큰비로 곡식이 손상되었다는 보고와 함경도에 매우 심각한 수재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동시에 있었다.[64][65][66]
  • 8월 27일: 전라도 화순군에서 9세 아이가 강풍에 떨어져 사망, 부안 변산의 금송(禁松) 수백 그루가 뽑혔으며, 장흥에서는 해산물을 채취하러 바다에 나간 12명이 익사했다.[114]
  • 9월 1일~3일: 강원도에 비와 바람이 크게 일었다.
  • 9월 8일: 강원도에 광풍과 함께 비와 우박이 내렸다.[115]
  • 9월 9일: 제주 목사가 7월 27일에 발생한 강풍과 폭우로 인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보고했다.[116]
  • 9월 17일: 강원도에 강풍과 폭우로 가옥이 파손되고 도로가 침수되었으며, 우박까지 내려 농작물 피해가 컸다.[117]
  • 11월 17일: 나주 영산강에 천둥, 번개와 함께 큰비가 내려 밀과 보리가 모두 잠기는 피해가 발생했다.[118]

2. 1. 7. 해충

5월 12일, 전근대 농업의 가장 심각한 재앙인 누리 떼가 경기도에서 최초로 발견되었음이 보고되었다.[56][57] 6월에는 함경도에 누리 떼가 온 들판에 퍼져 각종 곡식을 빨아먹고, 딱정벌레목 곤충(원문에는 갑충(甲蟲)이라고 표현)들이 물밑으로 들어가 해를 끼쳤으며, 참새 천만 마리가 하늘을 뒤덮어 곡식은커녕 도토리도 열리지 못했다. 이것은 7월 11일에 서울에 보고되었다.[65][66]

2. 2. 1671년 (신해년)

1671년(현종 12년)은 기근이 심해지면서 여러 사회 문제가 나타난 해였다. 1월 11일, 전라 감사 오시수는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보고했다.[119] 3월 21일에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사는 사노비 순례가 죽은 다섯 살 딸과 세 살 아들을 먹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승정원은 진휼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했다.[120] 4월에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는 일도 있었고,[121] 선산부에서는 한 여자가 여남은 살 된 아들이 도둑질했다는 이유로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다른 여자는 서너 살 된 아이를 버리고 가는 일도 있었다.[122] 겨울에는 늙은 어머니를 길에 버리는 일도 발생했다.[123]

2. 2. 1. 사회 문제 심화

기근이 진행되면서 곳곳에서 자식이나 부모를 버리거나, 죽이거나,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1671년(현종 12년) 1월 11일에는 전라 감사 오시수가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보고했다.[119] 같은 해 3월 21일에는 연산(連山: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에 사는 사노비 순례(順禮)가 죽은 다섯 살 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먹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승정원에서는 "실제로는 진휼의 정사가 허술해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120]

1671년 4월 3일에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121] 같은 달 6일에는 선산부(善山府: 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의 한 여자가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집에서 도둑질했다는 이유로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다른 여자는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가기도 했다.[122] 같은 해 겨울에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늙은 어머니를 길에 버리는 일도 발생했다.[123]

3. 구휼 정책

1670년(경술년) 3월 11일, 경기도 고을에 쌀 8천 석을 구휼미로 내놓았으나 모두 썩은 쌀이라 백성들이 괴로워했다.[124] 다음날 남인 당수 허적이 산골에 둔전을 설치하고 유랑민들을 모아 군부대를 만들 것을 건의했는데,[125] 이는 유랑하는 백성의 수가 매우 많았음을 보여준다. 3월 20일, 강화 유수 김휘가 1664년(갑진년) 이전의 환곡을 탕감해 줄 것을 왕에게 요청했으나[126]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127] 백성들이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지배층은 아직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4월 3일, 조운선이 침몰하자 평안 감사가 장계를 올려 환곡 탕감을 요청했고, 침몰한 배의 530석과 미납된 환곡 160석을 탕감했다.[128][129]

5월에 가뭄이 심각해지자, 서울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리하라는 명이 내려졌다.[130] 또한 지방의 죄수들도 즉시 심리하고[131] 너그럽게 처리하라고 명령했다.[132] 5월 6일, 왕이 희정당에서 심리를 시작하여 형기가 짧은 죄수 472명을 석방하고, 북방으로 귀양 간 죄수들을 남방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133][134] 심리는 다음날인 5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135][136]

가뭄이 끝나고 홍수가 시작된 6월 5일, 대사헌 김수항이 사표를 내면서 여러 민생 구제책을 건의했으나, 실제로 채택된 의견은 하나도 없었다.[137][138] 6월 21일, 충청도 수재민 구제를 위해 특별 조치가 내려졌다.[139] 이런 상황에서도 백성들을 수탈하는 무리가 있어, 어민들을 수탈한 벼슬아치 두 명이 처벌받았다.[140][141] 7월 6일, 전라 감사가 도내에 굶주린 사람이 많다고 보고하자 다시 특별 조치를 내려 구휼하게 했다.[142] 7월 13일, 소규모 사면이 아닌 대대적인 사면령이 반포되었다.[143]

4. 결과와 영향

경신 대기근의 결과와 영향에 대한 내용은 현재 비어 있다. 내용을 추가해야 한다.

참조

[1]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월 1일(기축) 1번째 1670-01-01
[2]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월 1일(기축) 1번째기사 1670-01-01
[3]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월 3일(신묘) 2번째 1670-01-03
[4]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월 3일(신묘) 2번째기사 1670-01-03
[5] 실록 현종개수실록 22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월 4일(임진) 1번째기사 1670-01-04
[6]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2월 9일(정묘) 1번째 1670-02-09
[7]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2월 12일(경오) 1번째 1670-02-12
[8]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2월 14일(임신) 1번째 1670-02-14
[9]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월 13일(신축) 2번째 1670-01-13
[10]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월 13일(신축) 2번째 1670-01-13
[11]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3월 11일(무진) 1번째 167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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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월 14일(임인) 2번째 1670-01-14
[16]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현종 11년(1670) 1월 21일(기유) 2번째 기사 1670-01-21
[17]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2월 5일(계해) 3번째기사 1670-02-05
[18]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윤2월 11일(무술) 1번째 1670-02-11
[19]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윤2월 11일(무술) 1번째 1670-02-11
[20] 문서 1장=3m라고 한다면 대략 15~18m인 셈이다.
[21]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현종 11년(1670) 윤2월 29일(병진) 14번째 기사 1670-02-29
[22]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13일(무진) 1번째 1670-05-13
[23]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13일(무진) 1번째 1670-05-13
[24] 실록 현종실록, 현종 11년(1670) 1월 4일(임진) 2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 11년(1670) 1월 4일(임진) 3번째 기사 1670-01-04
[25] 실록 현종실록, 현종 11년(1670) 3월 6일(계해) 2번째 기사 1670-03-06
[26] 실록 현종실록, 현종 11년(1670) 윤2월 24일(신해) 1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 현종 11년(1670) 윤2월 24일(신해) 1번째 기사 1670-02-24
[27] 실록 현종실록, 현종 11년(1670) 윤2월 28일(을묘) 4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 현종 11년(1670) 윤2월 28일(을묘) 3번째 기사 1670-02-28
[28] 실록 현종실록, 현종 11년(1670) 5월 12일(정묘) 3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 현종 11년(1670) 5월 12일(정묘) 3번째 기사 1670-05-12
[29] 실록 현종개수실록, 현종 11년(1670) 7월 16일(경오) 2번째기사 1670-07-16
[30]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2월 15일(계유) 3번째기사 1670-02-15
[31]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2월 15일(계유) 3번째 167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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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실록 현종 18권, 11년 4월 1일 2번째 1670-04-01
[37]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 4월 5일 1번째 167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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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일기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윤2월 26일 16번째 기사 1670-04-17
[42]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 3월 8일 3번째 167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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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 4월 7일 2번째 1670-04-07
[45]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 4월 14일 4번째 167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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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 4월 14일 3번째 167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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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 5월 22일 2번째 1670-05-22
[62]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 6월 23일 1번째 167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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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 7월 11일 3번째 167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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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1일(정해) 3번째 167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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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19일(을사) 1번째 167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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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27일(계축) 1번째 1670-04-27
[85]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27일(계축) 1번째 1670-04-27
[86]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29일(을묘) 1번째 1670-04-29
[87]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29일(을묘) 1번째 1670-04-29
[88]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2일(정사) 2번째 1670-05-02
[89]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2일(정사) 2번째 1670-05-02
[90]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3일(무오) 2번째 1670-05-03
[91]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3일(무오) 2번째 1670-05-03
[92]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10일(을축) 3번째 1670-05-10
[93]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10일(을축) 3번째 1670-05-10
[94]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14일(기사) 2번째 1670-05-14
[95]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14일(기사) 3번째 1670-05-14
[96]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16일(신미) 3번째 1670-05-16
[97]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16일(신미) 2번째 1670-05-16
[98]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22일(정축) 1번째 1670-05-22
[99]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23일(무인) 1번째 1670-05-23
[100]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23일(무인) 1번째 1670-05-23
[101]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24일(기묘) 1번째 1670-05-24
[102]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6월 1일(병술) 3번째 1670-06-01
[103]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6월 8일(계사) 1번째 1670-06-08
[104]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6월 8일(계사) 1번째 1670-06-08
[105] 실록 현종실록 18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6월 20일(을사) 1번째 1670-06-20
[106]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6-20
[107]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6-20
[108]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6-20
[109]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6-22
[110]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7-01
[111]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7-01
[112]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7-02
[113]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7-02
[114] 실록 현종실록 1670-08-27
[115] 일기 승정원일기 1670-09-20
[116] 실록 현종실록 1670-09-09
[117] 실록 현종실록 1670-09-17
[118] 일기 승정원일기 1670-11-17
[119] 실록 현종실록 1671-01-11
[120] 실록 현종실록 1671-03-21
[121] 실록 현종개수실록 1671-04-03
[122] 실록 현종실록 1671-04-06
[123] 서적 곡운집
[124]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3-11
[125]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3-12
[126]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3-20
[127]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3-20
[128]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4-03
[129]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4-03
[130]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5-05
[131]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5-05
[132]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5-05
[133]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5-06
[134]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5-06
[135]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5-07
[136]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5-07
[137]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6-05
[138]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06-04
[139]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6-21
[140] 실록 현종실록 18권 1670-07-02
[141]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7월 2일(병진) 1번째
[142]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7월 6일(경신) 2번째
[143] 실록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7월 13일(정묘) 2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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