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맹영
1. 개요
고맹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02년에 태어나 1565년에 사망했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 춘추관 기주관 등을 거쳐 사헌부 감찰, 지평을 역임했다. 옥천군수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어 포상을 받기도 했으나, 이량의 당여로 몰려 유배된 후 사망했다. 아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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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고씨 -
고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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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고씨 -
고경명
고경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했으며,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제봉집》 등의 저서를 남겼다. -
1502년 출생 -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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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년 출생 -
교황 그레고리오 13세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1572년부터 1585년까지 재임한 제226대 교황으로, 그레고리력 도입을 통해 달력 체계를 개선하고, 예수회와 오라토리오회를 후원하며, 가톨릭 교회 개혁에 힘썼다. -
1565년 사망 -
문정왕후 (조선)
문정왕후는 조선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로서, 정치적 숙청과 불교 중흥 정책을 펼치며 조선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인종의 죽음 관련 의혹이 있으며, 그녀의 능은 태릉이다. -
1565년 사망 -
정난정
정난정은 조선 명종 시대 윤원형의 첩이자 정실 부인으로, 문정왕후의 측근으로 권력을 얻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사림의 탄핵을 받아 윤원형과 함께 유배되어 자결했다.
2. 생애
고맹영은 1502년(연산군 8) 전라도 광주목(光州牧) 유등곡면(柳等谷面) 압보촌(鴨保村)(현,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서 태어났다. 생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조광조와 친분이 있어 1519년(중종 14) 관직을 잃고 낙향한 고운이다.
1540년(중종 3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정랑(行禮曹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이후 홍문관을 거쳐 1546년(명종 1) 예조좌랑, 1550년 5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1553년 10월 23일 옥천군수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558년(명종 13) 이후 장령, 헌납, 집의 등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63년 이량이 몰락할 때 당여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1565년 사헌부 집의 홍인경(洪仁慶) 등의 변호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1565년 11월 4일 유배지에서 사망하였으나,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2.1. 가계와 초기 생애
高孟英중국어은 1502년(연산군 8) 전라도 광주목(光州牧) 유등곡면(柳等谷面) 압보촌(鴨保村)(현,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서 태어났으나, 생일은 미상이다. 증조부는 행충좌위부사직을 지내고 사후 증 통훈대부 통례원좌통례(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된 고상지(高尙志)이고, 할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贈通政大夫工曹參議諱)에 추증된 고자검(高自儉)이며, 아버지는 승의랑, 형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을 지내고 사후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에 추증된 고운이다. 어머니는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이호선(李好善)의 딸이다.
아버지 고운은 정암 조광조와 친했다는 이유로 1519년(중종 14) 관직을 잃고 고향 광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아버지 고운은 그림도 잘 그렸는데 동문선에도 수록되었고, 남화풍의 맹호도를 잘 그렸으며, 백액대호도 등이 현전한다. 아버지 고운 역시 아호를 하천(霞川)이라는 아호를 썼다. 아버지 고운의 본처는 안만걸(安萬傑)의 딸인데, 이호선(李好善)의 딸 광산 이씨와 재혼하여 그를 얻었다. 그의 선대는 전라남도 영광군에 살았지만 할아버지 고자검의 대에 영광에서 광산군 압촌마을로 이주해 왔다.
형제로는 고중영(高仲英), 고계영(高季英), 누이로는 박안세(朴安世)의 처 장택고씨(長澤高氏) 등이 있었는데, 동생 고중영은 권신 이량이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청을 거절하고 도리어 이량을 꾸짖었다가 모함을 당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이후 고중영은 관직을 단념하고 광주에 송설정(松雪亭)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며 일생을 보냈다.
2.2. 관직 생활과 이량과의 관계
1540년(중종 3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봉렬대부(奉列大夫) 행 예조정랑(行禮曹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이후 홍문관(弘文館)에 올랐고, 1546년(명종 1)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7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된 뒤, 1550년 5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이때 양사에서 진복창 일파를 논죄할 때 구수담·송순·허자·이준경·이윤경 등을 함께 죄인을 두둔했다며 공격하였으며 7월까지 계속 구수담 등을 논핵하였다. 다음해 10월 28일 특지(特旨)로 옥천군수(沃川郡守)에 발령되었다.
이후 관찰사 이몽량(李夢亮) 등의 보고가 임금에게 전달되어, 1553년 10월 23일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시상할 때 폐단을 제거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558년(명종 13) 장령이 되었다. 이후 장령, 헌납, 집의 등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2.3. 이량의 몰락과 유배, 죽음
1563년 이량이 심의겸과 기대항의 탄핵을 받고 몰락하자 양사에서 이량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량, 윤백원 등이 실각했지만 그는 어떤 이유인지 파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파직당하고, 문외출송령이 내려졌다가 다시 유배되었다. 1565년 (명종 20) 사헌부 집의 홍인경(洪仁慶) 등이 그에게는 큰 잘못이 없다며 극력 두둔하여 고맹영(高孟英)과 이언충(李彦忠) 등은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홍인경 등은 조야의 원성을 받았다.
1565년 11월 4일 유배지에서 사망하였으나 정확한 사망 원인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