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 (조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문정왕후는 조선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로,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1517년 중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세자 인종을 보호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며, 명종 즉위 후 대왕대비로서 섭정하며 뛰어난 정치 감각을 발휘했다. 불교를 숭상하여 불교 중흥 정책을 펼쳤으나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으며, 동생 윤원형 등 측근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고 정적을 숙청했다. 긍정적으로는 불교 부흥과 서얼 허통을 통해 사회 개혁을 시도했으나, 부정적으로는 지나친 권력욕과 외척의 전횡으로 비판받았다. 사후에는 명종에 의해 문정왕후로 추존되었으며, 조선 왕조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여성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윤원형 - 윤원로
윤원로는 조선 중기 문정왕후의 친척이자 윤원형의 형으로, 급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부침을 겪으며 윤임 등과의 갈등, 을사사화 연루, 동생 윤원형과의 정쟁 끝에 사사된 인물이다. - 윤원형 - 정난정
정난정은 조선 명종 시대 윤원형의 첩이자 정실 부인으로, 문정왕후의 측근으로 권력을 얻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사림의 탄핵을 받아 윤원형과 함께 유배되어 자결했다. - 1501년 출생 - 지롤라모 카르다노
지롤라모 카르다노는 3, 4차 방정식 해법 발견 및 허수 개념 도입으로 대수학 발전에 기여하고 확률론 기초를 세웠으며 의학 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긴 이탈리아의 수학자, 의사이자 점성가, 도박사, 천문학자, 작가이다. - 1501년 출생 - 조식 (1501년)
조식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교육자로, 경의사상을 바탕으로 실천궁행을 강조하며 영남학파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 조선의 대왕대비 - 정희왕후
정희왕후는 조선 세조의 왕비로서, 계유정난을 통해 남편의 왕위 등극을 도왔으며, 성종 대에 수렴청정을 실시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다. - 조선의 대왕대비 - 인목왕후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광해군 즉위 후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는 비극을 겪었으며,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었으나 붕어하여 목릉에 합장된 조선 중기의 왕비이다.
문정왕후 (조선) | |
---|---|
기본 정보 | |
![]() | |
작위 | 조선 중종의 3비 |
재위 | 1517년 7월 19일 ~ 1544년 11월 20일 (음력) |
작위2 | 조선의 왕대비 |
재위2 | 1544년 11월 20일 ~ 1545년 7월 6일 (음력) |
전임자2 | 자순왕대비 윤씨 (정현왕후) |
후임자2 | 공의왕대비 박씨 (인성왕후) |
작위3 | 조선의 대왕대비 |
재위3 | 1545년 7월 6일 ~ 1565년 4월 6일 (음력) |
전임자3 | 인수대왕대비 한씨 (소혜왕후) 인혜대왕대비 한씨 (안순왕후) |
후임자3 | 소성대왕대비 김씨 (인목왕후) |
별칭 | 성렬왕대비(聖烈王大妃) |
존호 | 성렬인명(聖烈仁明) |
시호 | 문정(文定) |
배우자 | 중종 |
자녀 | 1남 4녀 명종 의혜공주 · 효순공주 · 경현공주 · 인순공주 |
종교 | 불교 |
아버지 | 파산부원군 윤지임 |
어머니 | 전성부부인 전의 이씨 |
출생일 | 1501년 12월 12일 (양력) |
사망일 | 1565년 5월 15일 (양력)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덕궁 소덕당 |
능묘 | 태릉(泰陵)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26-102 |
전임자 | 장경왕후 윤씨 |
후임자 | 인성왕후 박씨 |
작위4 | 수렴청정 |
재위4 | 1545년 7월 6일 ~ 1553년 7월 12일 (음력) |
전임자4 | 정희왕후 윤씨 |
후임자4 | 인순왕후 심씨 |
가문 | 파평 윤씨 |
칭호 | |
칭호(한글) | 문정왕후 윤씨 |
칭호(한자) | 文定王后 尹氏 |
추가 칭호(한글) | 성렬왕대비 |
추가 칭호(한글) | 성렬대왕대비 |
칭호(로마자 표기) | Munjeong Wanghu |
추가 칭호(로마자 표기) | Seongryeol Daewangdaebi |
재위 기간 | |
왕비 | 1517년 8월 6일 - 1544년 12월 4일 |
섭정 | 1545년 8월 7일 - 1553년 8월 8일 |
추가 정보 | |
별칭(한자) | 聖烈大王大妃 |
시호(한자) | 聖烈仁明文定王后 |
출생일(양력) | 1501년 12월 2일 |
사망일(양력) | 1565년 5월 5일 |
2. 생애
1515년 장경왕후가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1517년 간택을 통해 17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장경왕후와 세조의 정실이었던 정희왕후는 먼 친척 관계였다. 문정왕후는 인종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기에, 이는 그녀의 정치적 입지 강화의 명분이 되었다. 처음에는 혈연관계가 없던 세자를 귀여워했으나, 1534년 명종을 낳자 세자가 걸림돌이 되어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중종 말년부터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처 정난정 등 측근들과 함께 조정에 개입하였고, 1544년 11월 중종이 죽자 왕대비가 되었다. 1545년 8월 며느리인 인종이 죽고 같은 달 경원대군이 12세의 나이로 명종으로 즉위하자 대왕대비로 등극하여 수렴청정을 통해 뛰어난 정치 감각과 유교적 식견을 발휘하며 신하들을 제압했다. 당시 조선은 흉작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으나, 문정왕후는 별다른 대책 없이 백성을 방치했으며, 뇌물로 정치를 부패시켰다. 수렴청정 이후에도 죽기 직전까지 조정에 개입했다.
문정왕후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불교 보호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반불교적인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보우를 총애하여 1548년 그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승과 시험과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봉은사 주지가 된 보우를 정이품 병조판서(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에 임명한 것은 신하들의 반감을 샀다.
1565년 5월 5일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태릉이다. 문정왕후 사후 윤원형과 정난정은 실각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고, 보우는 유배지 제주도에서 살해되었다.
2. 1. 생애 초반
1501년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부계로는 세조의 장인 정정공 윤번의 5대손으로 고대고모가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였다. 또한 종고조부 윤사흔의 증손이 장경왕후와 윤임으로 이들은 문정왕후에게는 9촌 삼종고모와 삼종숙이 된다.[7] 성종의 2계비 정현왕후 역시 그녀의 일족으로, 5대조 윤번의 사촌인 윤곤의 증손녀로[8], 12촌 할머니 뻘이었다. 한때 그녀의 친정아버지 윤지임은 윤필상의 11촌 조카뻘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다녀오기도 했다.그녀에게는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윤원로, 윤원형 등 5형제가 있었는데, 이 중 윤원개와 윤원량, 윤원필은 그녀의 오빠였지만, 출생년대가 전하지 않는 윤원로와 윤원형은 그녀의 오빠라는 설과 남동생이라는 설이 있었다. 파평 윤씨 종친회 족보 확인 결과 윤원로와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들로 확인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왕조실록에 의하면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11세에 어머니 전의 이씨의 상을 당했다. 행장에 의하면 '11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검소한 생활을 하고 상례를 치르는 것이 성인과 같았으며, 아버지를 섬기는 데도 한결 같이 어머니 생존 시와 같이 하고 동기들에 대한 대접도 마찬가지여서 종족들이 모두 칭찬하였다.[9]'고 한다.
1515년 장경왕후가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1517년 간택을 통해 17세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장경왕후와 세조의 정실이었던 정희왕후는 먼 친척 관계였다.
2. 2. 왕비 간택과 입궐
1517년 2월, 장경왕후 윤씨가 죽고 폐비 신씨의 복위 운동이 일단락되면서,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는 족척 중에서 새 왕비를 간택했다.[10] 이는 다른 집안 사람보다는 일가 사람이 왕비가 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윤임의 지지와 동의도 한몫했다.[10] 삼간택 후 왕비로 최종 낙점되어 입궐했다.당시 윤지임의 집안은 선대에는 정승과 판서를 지냈으나, 아버지 대부터 벼슬길이 끊기고 자녀는 많아서 몰락한 양반 가문처럼 어렵게 살고 있었다.[10] 때마침 혼처를 찾던 중, 비어 있는 중궁 자리에 딸이 들어가게 되었다.[10]
젊은 윤왕후는 중종의 후궁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일부는 왕자의 어머니로서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지위 유지를 위해 노력해야 했다. 특히, 박경빈과 희빈 홍씨는 각각 봉성군과 금원군의 어머니였으며, 박경빈은 장경왕후의 외숙부인 박원종의 양녀였고, 희빈 홍씨는 소수파 지도자 홍경주의 딸이었다.
왕후는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들과 관계를 맺으며 18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국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왕후는 세자를 폐위시키고 봉성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음모를 꾸민 박경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박경빈은 중종의 사랑을 독점하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몄다.
1522년 아버지가 죽은 후 희빈 홍씨의 중요성이 떨어지자, 왕후는 왕권을 남용하고 내명부의 수장인 왕후에게 불경하게 대한 혐의로 그녀를 왕실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1534년에 경원대군을 낳기 전까지 세 명의 딸을 낳았지만, 17년 동안 아들을 낳지 못했다.
2. 2. 1. 다른 비빈들과의 암투
1517년 장경왕후 사후, 문정왕후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문정왕후는 원자(훗날 인종)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후궁들을 견제할 수 있었다.[11]당시 중종은 경빈 박씨[12], 희빈 홍씨 등 여러 후궁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 복성군과 봉성군을 낳아 왕비의 자리를 위협했다.[13] 문정왕후는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들과 암투를 벌였다.
경빈 박씨는 장경왕후의 외숙부인 박원종의 양녀였고, 희빈 홍씨는 소수파 지도자 홍경주의 딸이었다. 문정왕후는 이들의 세력에 맞서 세자를 보호하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1522년, 문정왕후는 희빈 홍씨를 왕실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1533년에는 김안로를 이용하여 심정과 경빈 박씨, 봉성군을 제거했다. 이로써 문정왕후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궁궐 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534년 경원대군(훗날 명종) 탄생 이후, 김안로는 경원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고, 문정왕후는 1537년 김안로를 제거했지만, 정치적 고립을 겪게 되었다.
이후 세자의 주요 보호자였던 윤임과 문정왕후의 형제들인 윤원로, 윤원형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윤임은 사림과 화해하려 했지만,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세자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 이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544년 중종 사후 인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는 왕대비가 되었다. 인종은 외척 세력 간의 균형을 이루려 했지만, 윤임은 왕대비를 견제하려 했다. 인종과 왕대비 사이의 불화는 깊어졌고, 1545년 인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인종 사후,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하면서 문정왕후는 섭정을 시작했다.
2. 2. 2. 작서의 변 전후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는 문정왕후의 주요 경쟁 상대였다. 경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고, 희빈 홍씨는 권신 홍경주의 딸로서 궁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13] 1521년 홍경주가 사망하면서 희빈 홍씨의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경빈 박씨의 세력은 여전했다.[13] 조정에서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을 지지하는 남곤, 심정 등과 세자를 옹호하는 윤임, 김안로, 그리고 문정왕후 측의 윤원로, 윤원형 형제가 대립했다.[14]작서의 변 이후, 문정왕후는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경빈 박씨 일파를 공격했고, 윤임과 김안로 등도 이에 가세했다.[14]
2. 2. 3. 왕자 출산 이후
1534년, 문정왕후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경원대군을 낳았다. 이는 왕실에 큰 경사였지만, 김안로를 비롯한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김안로는 이전부터 문정왕후를 경계하며 자신의 친척을 왕후 자리에 앉힐 생각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정치적 동조자들을 모았고, 김안로는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경원대군 때문에 왕후를 폐위시키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음모를 미리 눈치채고, 어린 아들을 통해 중종의 마음을 얻고 왕을 설득하여 자신의 친족들의 지지를 확신시키면서 김안로를 제거했다. 중종 또한 김안로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하기 시작했고, 문정왕후는 남편과 김안로 사이에 불화를 조장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관리들과 연합했고, 김안로는 왕권 남용, 왕후 무시, 부패 및 관직 매매 등의 혐의로 1537년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갈등에 대한 개입이 공개되면서 문정왕후에게 유리하게 형성된 동맹 시스템을 종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안로 사후, 윤임과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이 권력 공백을 메웠다. 많은 관리들이 윤임의 파벌인 '대윤'과 윤씨 형제의 파벌인 '소윤'으로 나뉘어 모였다.
윤임은 사림과 화해하려 했고, 많은 사림 학자들이 대윤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은 문정왕후를 순진하게 여겼고, 이는 나중에 후회하게 되었다.
인종은 문정왕후의 정치적 보호자였지만, 아들의 미래를 위해 제거해야 할 정치적 적이 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자신의 형제와 아들을 죽이지 말라고 위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종 즉위 후, 문정왕후는 왕대비가 되었다. 인종은 외척들을 고위직에 승진시키고 왕대비 측근들을 좌천시켰다. 윤임은 인종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왕대비를 비난하고 경원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려 했다. 인종은 윤임을 달래기 위해 반대자들을 처벌했지만, 왕대비는 윤임에게 직접 대항할 수 없었다.
인종과 윤임의 갈등은 깊어졌고, 윤임은 윤원형과 윤원로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는 왕대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윤임은 대윤 세력의 반대파를 제거하려 했지만, 문정왕후는 소윤 세력과 관료들을 보호하며 맞섰다.
1545년, 인종은 건강 악화로 사망했고, 재위 기간은 11년에 불과했다. 그는 아들이 없었고, 경원대군이 9세의 나이로 명종으로 즉위했다.
2. 2. 4. 왕비 폐출 위기
1534년 경원대군을 낳은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문정왕후 폐출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하자, 문정왕후는 왕에게 호소하여 김안로를 유배, 사사시켰다.[11]2. 2. 5. 세자 제거 기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후, 윤임은 윤원형, 윤원로 형제와 권력 다툼을 벌였다. 윤원형 형제는 사촌 윤춘년과 이기, 임백령, 이감 등을 포섭하여 세력을 확장했다.하지만 윤임은 이전에 김안로 등과 함께 문정왕후를 제거하려 한 적이 있었다.[18] 이 일로 문정왕후는 윤임을 경계했다. 세자는 오랫동안 문정왕후의 정치적 후원자였으나, 친아들 경원대군의 미래를 위해 세자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 둘의 관계는 틀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문정왕후가 세자에게 자신의 형제와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위협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2. 3. 인종 즉위와 섭정
동궁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인종은 이것이 계모 문정왕후의 소행이라 짐작하고 피하지 않으려 했다.[15] 중종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불길을 헤쳐 나왔으나,[15] 실제로는 인종의 후궁 숙의 정씨가 그를 구하고 귀인으로 봉해졌다.윤임은 이 사건의 배후로 문정왕후를 지목하며 사약을 주장했으나,[18][19] 인종의 변호로 문정왕후는 위기를 모면했다.
2. 3. 1. 섭정 시대의 전개
1544년 중종이 병으로 사망하자, 인종이 보위를 이어받아 경원대군 추대 시도는 실패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대비가 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문안을 위해 대비전에 들어온 인종에게 문정왕후 윤씨는 어린 경원대군을 옆에 앉혀 두고 "우리 모자가 전하의 손에 죽는 날이 멀지 않았소. 그려, 언제쯤 죽이려 하오?"라며 협박하듯이 따져 물었다고 전해진다.[14] 그러나 인종은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14]이후 사람들은 인종의 죽음을 문정왕후의 소행이라고 의심했다. 일설에는 인종이 문정왕후가 건네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6] 평소 모진 학대로 인종을 괴롭히던 문정왕후가 모처럼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새 왕 인종에게 아첨하듯 떡을 손수 가지고 와 권했고, 마음 약한 인종은 계모에게 효를 다한다는 뜻에서 독이 든 그 떡을 먹고 급사했다는 것이다.[15] 인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궁궐 담을 넘어 저잣거리까지 퍼져 나갔다.[15]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인종이 체질적으로 병약했던 데다가, 중종 승하 후 빈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정왕후는 교태전 근처 통명전에 빈전을 설치하여 남편인 중종을 모시고 싶어 했으나, 통명전은 협소하고 인종이 머무는 강녕전과 거리가 멀어 인종이 자주 방문하기 어려웠다. 결국 인종은 무리하게 빈소를 지키다 병약한 체력을 이기지 못하고 승하했다고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1545년 8월, 며느리인 인종이 죽고 같은 달 경원대군이 12세의 나이로 명종으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통해 뛰어난 정치 감각과 유교적 식견을 발휘하며 신하들을 제압했다. 당시 조선은 흉작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으나, 문정왕후는 별다른 대책 없이 백성을 방치하고 뇌물로 정치를 부패시켰다. 수렴청정 이후에도 죽기 직전까지 조정에 개입했다.
문정왕후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불교 보호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반불교적인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보우라는 승려를 총애하여 1548년 그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승과 시험과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봉은사 주지가 된 보우를 정이품 병조판서(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에 임명한 것은 신하들의 반감을 샀다.
불교 사찰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부흥에 대한 열렬한 목표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로 여겨진다. 불교 부흥의 초석은 봉은사(선불교의 주요 중심지)였다. 보우 스님은 1548년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어 이 시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한국 불교의 선(禪)과 교(敎) 종파 모두에서 승려 양성 및 선발의 공식 체계를 부활시켰다. 1551년 봉은사는 조계선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고, 이후 한국 불교의 전반적인 복원을 위한 주요 거점이 되었다. 이 부활된 양성 시스템은 서산, 사명, 벽암 등의 저명한 승려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후 보우 스님은 반불교 관리들에게 살해당했다.
2. 3. 2. 권력 장악
1515년 장경왕후가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1517년 간택을 통해 17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세자 (훗날의 인종)를 보호할 책임이 있었기에, 이는 그녀의 정치적 입지 강화의 명분이 되었다. 처음에는 혈연관계가 없던 세자를 귀여워했으나, 1534년 명종(경원대군)을 낳자 세자가 걸림돌이 되어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다.[1]중종 말년부터 동생 윤원형(소윤)과 그의 처 정난정 등 측근들과 함께 조정에 개입하였고, 1544년 11월 중종이 죽자 왕대비가 되었다. 1545년 8월 며느리인 인종이 죽고 같은 달 경원대군이 12세의 나이로 명종으로 즉위하자 대왕대비로 등극하여 수렴청정을 통해 뛰어난 정치 감각과 유교적 식견을 발휘하며 신하들을 제압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흉작이 이어져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으나, 문정왕후는 아무런 대책 없이 백성을 방치했다. 반면 뇌물로 정치를 부패시켰다. 수렴청정 이후에도 죽기 직전까지 조정에 개입했다.[1]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에 불교 보호 정책을 펼쳐 반불교적인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1] 문정왕후는 특히 보우라는 승려를 총애하여, 1548년 그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승과 시험과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봉은사 주지가 된 보우를 정이품 병조판서(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에 임명한 것은 신하들의 반감을 샀다.[1]
2. 4. 정책
문정왕후는 1545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아들 명종의 뒤에서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역사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수렴청정은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멘토의 역할이었다. 정치 경험이 없는 어린 왕이 정치에 대해 대신들과 토론한 내용을 같이 보면서 조언을 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20] 그러나 유관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반대[21] 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을사사화 때 제거된다.명종이 즉위하자 대비 겸 섭정이 된 문정왕후는 윤원형과 윤원로를 불러들인다. 윤원형 형제는 문정대비를 등에 업고 음모를 꾸몄다.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정순봉,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공조판서 허자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 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은 근거가 없었으나 그가 윤원형 형제의 손을 적극 들어줌으로써 사태는 확장되었다. 이로써 윤임 일파를 제거하여 윤원형, 윤원로 형제가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1547년 9월 정언각과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22]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하였다.[22]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분개하여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22]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파계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서자이자 희빈 홍씨의 아들인 봉성군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이때 함께 제거되었다.
2. 4. 1. 친 불교 정책
정미사화 이후 윤원형과 윤원로의 갈등에서 문정왕후는 친정 동생인 윤원형의 손을 들어주었다. 윤원형의 사주를 받은 윤춘년의 상소로 윤원로는 몰락했고, 이 싸움은 문정왕후가 남동생의 손을 들어주면서 종결되었다.[21]문정왕후의 불교 부흥 정책의 주요 근거지는 봉은사였다. 봉은사는 794년 연회 스님이 건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로, 1498년 정현왕후의 후원으로 재건되어 봉은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562년에는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봉은사는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637년, 1692년, 1912년, 1941년, 1981년 등 반복적으로 재건 및 보수되었다. 봉은사의 3층 석탑에는 1975년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석가모니불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고려 말 쇠퇴했던 봉은사는 1498년에 재건되었다. 재건 이전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으면서 불교가 국가 주도의 탄압을 받았으나, 문정왕후의 강력한 불교 부흥 의지로 봉은사가 재건되어 조선 초기 불교 부흥의 초석이 되었다.
보우는 1548년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어 불교 부흥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선과 교(교학) 종파 모두에서 승려 양성 및 선발의 공식 체계를 부활시켰다. 1551년 봉은사는 조계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고, 이후 한국 불교의 전반적인 복원을 위한 주요 거점이 되었다. 이 부활된 양성 시스템은 서산대사, 사명대사, 벽암각성 등의 저명한 승려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보우는 반불교 관리들에게 살해당했다.
2. 4. 2. 서얼 허통
문정왕후의 서얼 허통중국어 정책은 조선 사회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였다. 문정왕후는 불교 중흥을 추진하면서, 사찰이 도둑의 소굴이 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승려의 수를 늘리고 불교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였다.이에 대해 영의정 이기를 비롯한 중신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불교의 폐단, 이단성, 보우의 비도덕적 행실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24] 그러나 문정왕후는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를 통해 반대파를 숙청하고, 윤원형, 이기 등을 움직여 불교 중흥책을 강행했다.[24]
문정왕후는 승과를 부활시키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직을 제수하기도 했다.[6] 또한 정난정을 아꼈다. 그러나 이는 성리학자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고, 문정왕후 사후 그녀에 대한 악평의 원인이 되었다.
문정왕후 사후 보우는 요승으로 몰려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살해되었고, 불교는 다시 탄압받게 되었다.[25]
2. 4. 3. 인사 문제 개입
정난정의 소개로 보우를 만나 그를 총애하였다.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27] 문정왕후는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히는 등 해괴한 인사를 행하기도 했다.[27] 왕의 고유 권한인 인사 문제에까지 적극 개입하게 되자 명종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문정왕후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친정 동생 윤원형의 폭압적인 권력 독점과 남용을 후원하고 있었고, 유교 사회를 표방하고 있는 조선에서 승복을 입은 승려를 병조판서에 올릴 정도로 정사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하고 있었다.[27]
2. 5. 생애 후반과 죽음
1553년(명종 8) 18세가 된 명종에게 친정(親政)을 하도록 하였으나, 이는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윤원형 등과 협력하여 정사에 계속 관여하였다. 1563년까지 섭정으로 조정의 정사에 관여하였고, 섭정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6] 1563년 손자인 순회세자가 죽자 명종은 더욱 실의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문정왕후는 다시 정사를 주관하게 되었다.1565년 음력 4월 갑자기 병세가 심해져 병석에 눕게 되었다. 5월 5일(음력 4월 6일) 병석에서 유언을 남겼고, 그날 오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였다. 바로 국상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정왕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불여우 같은 년, 독한 년, 더러운 년"하면서 환호하여[29],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성렬대왕대비(성렬대왕대비)는 아들 명종 20년인 1565년 5월 15일에 사망하여 문정왕후(문정왕후)로 추존되었다. 정릉(정릉)에 남편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으나, 정릉 주변이 저지대이고 홍수 피해가 잦아 태릉에 안장되었다.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명종은 왕대비의 부재를 이용하여 사림의 힘을 얻어 윤원형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윤원형은 정치적 권력과 재산을 모두 잃고 서울에서 유배되었으며, 더 이상 정치적 복귀를 할 수 없게 되자, 그의 후처 정난정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는 명종이 사림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인 후의 일이었다.
문정왕후는 사망 당시 20년 넘게 조선 왕조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는데, 이는 당대 다른 어떤 여성보다 훨씬 긴 기간이었다. 그녀 이전과 이후의 대부분의 조선 왕비들과 달리, 그녀만큼 대담하고 완고하며, 왕권과 권위를 행사하는 데 있어 끈기 있고 단호했던 사람은 없었다. 파평 윤씨 세력은 그녀의 죽음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고, 그녀는 파평 윤씨 출신 조선 왕비 중 마지막 인물이었다.
조선 왕조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왕의 권력에 필적할 만큼 정치를 좌지우지한 왕비들 중에서 문정왕후는 왕경빈, 정희왕후, 명성왕후, 명성황후와 함께 당대 가장 정치적으로 능숙하고, 대담하며, 포용력이 넓은 왕비로 여겨진다고 전해진다.
2. 6. 사후
1565년(명종 21년) 윤원형은 실각당했으나, 문정왕후의 친정 동기였기에 목숨만은 보전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언관들은 윤원형 일파에 대한 탄핵을 계속하였고, 윤원형과 정난정은 강음현에서 자결하게 된다. 문정왕후는 죽은 뒤 남편 중종의 능침 옆에 안장되려 하였으나, 결국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릉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泰陵)에 안장되었다.문정왕후는 아들 명종 20년인 1565년 5월 15일에 사망하여 성렬대왕대비(성렬대왕대비)로 추존되었다. 정릉(정릉)에 남편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으나, 정릉 주변이 저지대이고 홍수 피해가 잦아 태릉(泰陵)에 안장되었다.[1]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독자적인 왕권을 행사하고자 했던 명종은 왕대비의 부재를 이용하여 사림(사림)의 힘을 얻어 윤원형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윤원형은 정치적 권력과 재산을 모두 잃고 서울에서 유배되었으며, 더 이상 정치적 복귀를 할 수 없게 되자, 그의 후처 정난정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는 명종이 사림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인 후의 일이었다.[2]
문정왕후는 사망 당시 20년 넘게 조선 왕조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는데, 이는 당대 다른 어떤 여성보다 훨씬 긴 기간이었다. 그녀 이전과 이후의 대부분의 조선 왕비들과 달리, 그녀만큼 대담하고 완고하며, 왕권과 권위를 행사하는 데 있어 끈기 있고 단호했던 사람은 없었다.[3] 파평 윤씨(파평 윤씨) 세력은 그녀의 죽음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고, 그녀는 파평 윤씨 출신 조선 왕비 중 마지막 인물이었다.[4]
조선 왕조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왕의 권력에 필적할 만큼 정치를 좌지우지한 왕비들 중에서 문정왕후는 왕경빈, 정희왕후, 명성왕후, 명성황후와 함께 당대 가장 정치적으로 능숙하고, 대담하며, 포용력이 넓은 왕비로 여겨진다고 전해진다.[5]
문정왕후 사후 윤원형과 정난정은 실각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고, 보우는 유배지 제주도에서 살해되었다.[6]
3. 가족 관계
작호 |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
---|---|---|---|---|---|
장녀 | 의혜공주 | 옥혜 | 1521년 - 1564년 | 청원위 한경록 | rowspan="4" | |
차녀 | 효순공주 | 옥련 옥린 | 1522년 - 1538년 | 능원위 구사안 | |
- | 성별 미상[31] | 1528년[32] | |||
삼녀 | 경현공주 | 옥현 | 1530년 - 1584년 | 영천위 신의 | |
장남 | 명종 경원대군 | 환 | 1534년 - 1567년 | 인순왕후 | 제13대 국왕 |
사녀 | 인순공주 | 1542년 - 1545년 | colspan="2" | |
'''형제'''
- 친형: 윤원개
- 친형: 윤원량 (1495년 - 1569년)
- 친형: 윤원필 (1496년 - 1547년)
- 친형: 윤원로 (? - 1547년)
- 친언니: 윤씨
- 친동생: 윤원형 (1503년 - 1565년)
- 이복동생: 윤지손, 윤서손, 윤방손, 윤저손
- 이복 여동생: 윤씨
'''남편'''
- 중종 (1488년 - 1544년)
4. 평가
문정왕후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사대부들은 조선 시대 왕비로서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불교를 옹호한 문정왕후의 행적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26] 특히 문정왕후의 섭정과 외척 세력의 전횡을 강하게 비판했다.
명종실록에는 문정왕후의 성격이 '강한(剛狠)'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왕비에게 쓰인 표현으로는 매우 이례적이다.[35] 문정왕후가 의붓아들인 인종을 독살했다는 의혹[34]과 자신의 권력을 위해 형제를 죽였다는 비판[10]도 있다.
문정왕후의 지나친 권력욕은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평가[6]도 존재한다. 명종을 왕위에 올린 공을 내세워 명종을 압박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주로 남성 중심, 유교 중심적인 사대부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4. 1. 긍정적 평가
문정왕후는 조선 시대 여성으로서 정치 참여가 제한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섭정을 하며 여러 정책을 펼쳤다. 사대부들은 문정왕후의 정치 간섭을 부정적으로 보았고,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를 부흥시킨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26]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문정왕후를 승려 보우와 함께 조선 불교 중흥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한다.문정왕후는 불교의 평등 사상을 받아들여 신분 차별 완화 정책을 추진했다. 적서 차별을 완화하고, 중종 사후에도 후궁들이 궁궐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했다.[34] 또한, 첩실인 정난정을 아끼고, 동생 윤원형에게 영향을 주어 서얼허통법(庶孽許通法)을 시행하게 했다.
윤원형은 명종 8년(1553년) 10월, 서얼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서얼허통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에 달려있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다"는 불교의 평등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9] 사대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의 지지를 받은 윤원형은 서얼허통법을 통과시켰다.
문정왕후는 불교 부흥을 위해 승려 보우를 등용하고, 선교 양종과 승과를 부활시켰다. 명종 5년(1550년) 12월에 승과가 부활되었고, 명종 6년(1551년)에는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삼았다. 부활된 승과에서는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 등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문정왕후의 정책들은 사대부들의 반발을 샀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악평은 주로 사대부들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문정왕후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4. 2. 부정적 평가
문정왕후의 천성은 '강한(剛狠)'하다고 표현되는데, 여기서 '한(狠)'은 사납고 성질이 거세며 원한을 품거나 마음이 비뚤어진 것을 의미한다. 왕비를 이처럼 신랄하게 평가한 실록의 기록은 이례적인 일이다.[35]당시 사관들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정적 숙청, 외척 윤원형의 전횡, 불교 부흥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후대에도 문정왕후는 많은 유학자들에게 비판받았는데,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국정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홍수의 변 사건을 일으켜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무고한 사건을 두고, 남인의 조사기는 '문정왕후를 다시 보는구나'하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명종실록에는 剛狠중국어하고 문자를 알았다는 기록과, 인종이 왕위에 오른 뒤 문정왕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릴 때, 문정왕후가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인종은 이 말을 듣고 답답해하고, 상중에 과도하게 슬퍼하다가 근심과 괴로움으로 승하하게 되었다고 한다.
명종실록에는 문정왕후가 명종을 왕위에 올린 공을 내세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느냐" 며 윽박지르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꾸짖고 호통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명종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말을 따랐지만, 후원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렸고,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명종실록에는 문정왕후는 불교에 심취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랏돈을 탕진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외척에게 권력이 돌아가 정사가 문란해지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5. 문정왕후가 등장하는 작품
분야 | 작품명 | 방영/출판 연도 | 방송사/출판사 | 배우 |
---|---|---|---|---|
영화 | 《문정왕후》 | 1967년 | 최은희 | |
드라마 | 《교동 마님》 | 1981년 | MBC | 김용림 |
드라마 | 《풍란》 | 1985년 | MBC | 김혜자 |
드라마 | 《임꺽정》 | 1995년 | SBS | 김청 |
드라마 | 《조광조》 | 1996년 | KBS | 김민정 |
드라마 | 《여인천하》 | 2001년~2002년 | SBS | 전인화 |
드라마 | 《대장금》 | 2003년~2004년 | MBC | 박정숙 |
드라마 | 《전설의 고향 : 귀서》 | 2008년 | KBS | 이덕희 |
드라마 | 《천명》 | 2013년 | KBS | 박지영 |
드라마 | 《옥중화》 | 2016년 | MBC | 김미숙 |
드라마 | 《마녀보감》 | 2016년 | JTBC | 김영애 |
드라마 | 《조선생존기》 | 2019년 | TV조선 | 이경진 |
소설 | 《여인천하》 | 1965년 | 박종화 | |
소설 | 《왕비의 남자들》 | 2007년 | 화산문화 | 윤태현 |
6. 논란과 의혹
윤임과 윤원로 살해의 배후라는 의혹이 있다. 문정왕후는 장경왕후의 오빠이자 족숙인 윤임을 모함하여 죽이고, 사촌 윤춘년을 시켜 자신의 친형 윤원로를 죽인 윤원형의 누이였다.[33] 윤원형은 애첩 정난정을 정경부인 자리에 올리고 조강지처 김씨를 독살하기도 했다.[33] 이러한 골육상쟁의 배후에 문정왕후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0]
참조
[1]
문서
Lunar Calendar
[2]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3]
서적
조선왕 독살사건
다산글방
[4]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5]
웹사이트
Buddhist Channel | History & Archaeology
http://www.buddhistc[...]
[6]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7]
문서
문정왕후의 친족
[8]
문서
윤씨 가계
[9]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0]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1]
서적
조선왕 독살사건
다산글방
[12]
문서
박원종의 양녀
[13]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4]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5]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6]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7]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8]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9]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0]
만화
조선왕조실록: 명종
휴머니스트
[21]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2]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3]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4]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5]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6]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7]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8]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9]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30]
문서
정몽주와의 관계
[31]
문서
성별에 대한 추측
[32]
실록
중종실록
1528-08-30
[33]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34]
서적
여인열전
김영사
[35]
실록
명종실록
1565-04-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