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어습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어습유는 807년 헤이제이 천황에게 헌상된 일본의 역사서로, 인베씨의 정통성을 회복하거나 율령 격식 제정을 위한 조사 보고서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천지개벽부터 덴표 시대까지의 기록과 함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없는 이누베 씨의 전승을 담고 있으며, 삼종의 신기에 대한 묘사 등 고유한 특징을 보인다. 이 책은 고대 일본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독자적인 기술로 인해 초기 일본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베씨 - 아메노히와시노카미
아메노히와시노카미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숨었을 때 현악기 연주로 독수리가 내려앉은 것에서 유래하며, 풍어, 상공업 번영을 관장하는 수호신이자 방적업과 제지업의 신으로 숭배된다. - 헤이안 시대의 책 - 신찬성씨록
신찬성씨록은 일본 헤이안 시대에 편찬된 씨족 계보서로, 수도와 주변 지역의 1,182개 씨족의 계보를 황별, 신별, 제번으로 분류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제번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등 한반도계 씨족이 포함되어 있다. - 헤이안 시대의 책 - 화명류취초
화명류취초는 10세기 중엽 미나모토노 시타고가 편찬한 일본 자서로, 다양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20권본은 고대 일본 율령제 하의 행정 구역 명칭을 망라하여 일본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고어습유 | |
---|---|
개요 | |
제목 | 고어습유 |
원제 | 古語拾遺 (こごしゅうい) |
저자 | 사이베 히로나리 |
언어 | 일본어 |
장르 | 역사서 |
역사적 배경 | |
시대 | 헤이안 시대 초기 |
성립 시기 | 다이도 원년 (807년) |
내용 | |
주제 | 신도 및 일본 신화 관련 정보, 이즈모 국조 신화를 중심으로 인베 씨의 역사 기록 |
주요 내용 | 신화 시대부터 진무 천황 시대까지의 역사 신도 의식 및 제사 인베 씨의 기원과 역할 |
판본 정보 | |
형태 | 간본 |
![]() | |
관련 정보 | |
관련 문서 | 고사기 일본서기 선대구사본기 |
관련 인물 | 사이베 씨 |
기타 | |
포털 | 역사 신토 문학 |
2. 편찬 배경 및 목적
두 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수소진정서설(愁訴陳情書説)이다. 인베씨는 원래 조정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씨족이었는데, 다이카 개신 이후 마찬가지로 제사를 관장하던 나카토미씨가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었고, 제사에서의 역직 또한 나카토미씨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인베씨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 수소진정서설이다.
두번째는 조사보고서설(調査報告書説)이다. 인베씨와 나카토미씨는 이세신궁의 봉폐사 자리를 놓고 오랜 세월 다퉈왔는데, 이 책이 쓰이기 1년 전인 대동 원년 8월 10일에 인베씨가 승소하게 된다. 승소한 뒤에 진정서를 쓰는 것은 부자연스러우므로 수소진정서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헤이제이 천황은 율령격식의 식(시행령)을 제정할 방침이었다. 그래서 『고어습유』는 이 식 제정을 위한 조사보고서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 조사보고서설이다.
과거, 신도의 종교 의례는 일본 황실을 위해 이노베씨와 나카토미씨 양 가문 모두 오랫동안 수행해 왔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초기에 나카토미 씨의 분가인 후지와라씨가 정치 권력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나카토미씨의 세력은 강화되었고 이노베씨의 세력은 약화되어 두 가문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출생 및 사망 연도가 알려지지 않은 히로나리는 이 텍스트를 통해 역사를 명확히 하고 이노베씨의 권리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나카토미씨의 부당함과 이노베씨의 쇠퇴를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그는 807년에 헤이제이 천황에게 이 텍스트를 헌상했다.
"추소진정서설"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 현재는 조정이 실시한 법제 정비(식)를 위한 사전 조사(격)에 대한 이매부씨(이베씨)의 보고서라는 설이 유력하다.
2. 1. 수소진정서(愁訴陳情書) 설
다이카 개신 이후, 조정의 제사를 관장하던 인베씨는 마찬가지로 제사를 관장하며 정치적 힘을 가진 나카토미씨에게 제사 관직을 독점당하는 상황에 놓였다.[1] 이러한 상황에서 인베씨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고어습유』를 썼다는 설이 수소진정서설(愁訴陳情書説)이다.또 다른 설은 조사보고서설(調査報告書説)이다. 인베씨와 나카토미씨는 이세신궁의 봉폐사 자리를 놓고 오랜 세월 다퉈왔는데, 『고어습유』가 쓰이기 1년 전인 대동 원년(806년) 8월 10일에 인베씨가 승소하였다. 승소한 뒤에 진정서를 쓰는 것은 부자연스러우므로, 당시 헤이제이 천황이 율령격식의 식(시행령) 제정을 위한 조사보고서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과거 신도의 종교 의례는 일본 황실을 위해 이노베씨와 나카토미씨 양 가문이 오랫동안 수행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초기에 나카토미 씨의 분가인 후지와라씨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면서 나카토미씨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두 가문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히로나리는 807년에 헤이제이 천황에게 이 텍스트를 헌상했다.
2. 2. 조사보고서(調査報告書) 설
『고어습유』의 성립 배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첫번째는 수소진정서설(愁訴陳情書説)이다. 인베씨는 조정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씨족이었으나, 다이카 개신 이후 나카토미씨가 정치적 힘을 얻어 제사의 역직을 독점하였다. 이에 인베씨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조사보고서설(調査報告書説)이다. 인베씨와 나카토미씨는 이세신궁의 봉폐사 자리를 놓고 오랫동안 다퉈왔는데, 『고어습유』가 쓰이기 1년 전인 대동 원년 8월 10일에 인베씨가 승소하였다. 승소 후 진정서를 쓰는 것은 부자연스러우므로 수소진정서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헤이제이 천황은 율령격식의 식(시행령)을 제정할 방침이었고, 『고어습유』는 이 식 제정을 위한 조사보고서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과거 신도의 종교 의례는 일본 황실을 위해 이노베씨와 나카토미씨 양 가문이 오랫동안 수행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초기에 나카토미 씨의 분가인 후지와라씨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면서 나카토미 씨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이는 두 가문 사이의 갈등을 야기했다.
히로나리는 역사를 명확히 하고 이노베씨의 권리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나카토미씨의 부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썼으며, 807년에 헤이제이 천황에게 이 텍스트를 헌상했다.
본서가 상정된 다이도 2년(807년) 2월 13일은 이부씨가 이세 신궁의 봉폐사 직책 분쟁에서 승소한 판결 이후이다. 당시 헤이제이 천황은 식(율령의 시행 규칙)을 제정할 방침이었고, 본서의 발문에 "조식의 해"라고 적혀 있다. 14년 후인 사가 천황 고닌 11년(820년) 4월에 『고닌시키』가 완성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엔랴쿠 의식장』이 이세 신궁에서 제출된 것도 조식에 대비한 사전 조사의 일환이었다는 설이 있다.
3. 주요 내용
천지개벽부터 덴표 시대(729년 - 749년)까지 기록되어 있다.[2] 『고서기』나 『일본서기』 등의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누베 씨에 전해지는 전승도 수록되어 있다.
이누베 씨는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의 자손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 등 이누베 씨의 조상의 활약이 고서기와 일본서기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마노이와토 은폐 장면에서, 고서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아마노코야네노미코토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고어습유』에서는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조화 삼신에 대해서는 『고서기』와 공통점을 보이지만, 신명에 대해서는 모두 『일본서기』에 따른다. 역대 천황의 호칭에 대해서는 진무 천황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풍 시호가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재위 당시의 궁궐 소재지를 나타내고 있다.
축문에 등장하는 카무로키, 카무로미에 대해 타카미무스비노카미와 카미무스비노카미로 하는 것은 『고어습유』가 최초이다. 천새(天璽)의 신기에 대해 "팔척경 및 풀 베는 검 두 종의 신보"라 하고 "창과 구슬은 스스로 따른다"라고 하는 등, 기와 기와는 다른 기술이 있다.
이세의 신궁과 다이조사이의 유키전, 슈키전의 조영에 이누베 씨가 관여하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진혼제에 사루메노키미가 임명되지 않은 것 등 신대부터 제사를 담당해 온 성씨가 채용되지 않고, 다이카 개신 이후 나카토미 씨가 독점하고 있는 폐해를 기록한다.[2]
본 텍스트는 세 개의 주요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 씨족 시조 아메노후토다마노 미코토와 그의 손자 아마미토노 미코토의 역사적 사건들.
# 창세 신화와 진무 천황부터 덴무 천황까지의 국가 역사에 대한 설명.
# 나카토미 씨에 대한 열한 가지 불만과 이누베 씨의 쇠퇴.
앞의 두 섹션은 세 번째이자 주요 섹션을 정당화하기 위한 증거와 참고 자료 역할을 한다.
3. 1. 서문
천지개벽부터 덴표 시대(729년 - 749년)까지 기록되어 있다.[2] 『고서기』나 『일본서기』 등의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누베 씨에 전해지는 전승도 수록되어 있다.이누베 씨는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의 자손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 등 이누베 씨의 조상의 활약이 고서기와 일본서기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마노이와토 은폐 장면에서, 고서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아마노코야네노미코토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고어습유』에서는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조화 삼신에 대해서는 『고서기』와 공통점을 보이지만, 신명에 대해서는 모두 『일본서기』에 따른다. 역대 천황의 호칭에 대해서는 진무 천황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풍 시호가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재위 당시의 궁궐 소재지를 나타내고 있다.
축문에 등장하는 카무로키, 카무로미에 대해 타카미무스비노카미와 카미무스비노카미로 하는 것은 『고어습유』가 최초이다. 천새(天璽)의 신기에 대해 "팔척경 및 풀 베는 검 두 종의 신보"라 하고 "창과 구슬은 스스로 따른다"라고 하는 등, 기와 기와는 다른 기술이 있다.
이세의 신궁과 다이조사이의 유키전, 슈키전의 조영에 이누베 씨가 관여하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진혼제에 사루메노키미가 임명되지 않은 것 등 신대부터 제사를 담당해 온 성씨가 채용되지 않고, 다이카 개신 이후 나카토미 씨가 독점하고 있는 폐해를 기록한다.[2]
3. 2. 본문
천지개벽부터 덴표 시대(729년 - 749년)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고사기』나 『일본서기』 등의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누베 씨에 전해지는 전승도 수록되어 있다.[2]이누베 씨는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의 자손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고어습유』에는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 등 이누베 씨 조상의 활약이 고사기와 일본서기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마노이와토 은폐 장면에서, 고서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아마노코야네노미코토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고어습유』에서는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조화 삼신에 대해서는 『고사기』와 공통점을 보이지만, 신명에 대해서는 모두 『일본서기』에 따른다.
역대 천황의 호칭에 대해서는 진무 천황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풍 시호가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재위 당시의 궁궐 소재지를 나타내고 있다. 축문에 등장하는 카무로키, 카무로미에 대해 타카미무스비노카미와 카미무스비노카미로 하는 것은 『고어습유』가 최초이다.
신기에 대해 "팔척경 및 풀 베는 검 두 종의 신보"라 하고 "창과 구슬은 스스로 따른다"라고 하는 등, 고사기 및 일본서기와는 다른 기술이 있다.
신궁과 다이조사이의 유키전, 슈키전의 조영에 이누베 씨가 관여하지 않은 것, 진혼제에 사루메노키미가 임명되지 않은 것 등 신대부터 제사를 담당해 온 성씨가 채용되지 않고, 다이카 개신 이후 나카토미 씨가 독점하고 있는 폐해를 기록한다.
3. 3. 발문
천지개벽부터 덴표 시대(729년 - 749년)까지 기록되어 있다.[2] 『고서기』나 『일본서기』 등의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누베 씨에 전해지는 전승도 수록되어 있다.이누베 씨는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의 자손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메노후토다마노미코토 등 이누베 씨의 조상의 활약이 고서기와 일본서기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조화 삼신에 대해서는 『고서기』와 공통점을 보이지만, 신명에 대해서는 모두 『일본서기』에 따른다. 역대 천황의 호칭에 대해서는 진무 천황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풍 시호가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재위 당시의 궁궐 소재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축문에 등장하는 카무로키, 카무로미에 대해 타카미무스비노카미와 카미무스비노카미로 하는 것은 『고어습유』가 최초이다.
신기에 대해 "팔척경 및 풀 베는 검 두 종의 신보"라 하고 "창과 구슬은 스스로 따른다"는 등, 기와 기와는 다른 기술이 있다. 신궁과 다이조사이의 유키전, 슈키전의 조영에 이누베 씨가 관여하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진혼제에 사루메노키미가 임명되지 않은 것 등 신대부터 제사를 담당해 온 성씨가 채용되지 않고, 다이카 개신 이후 나카토미 씨가 독점하고 있는 폐해를 기록한다.[2]
4. 특징
『古語拾遺』일본어는 헤이제이 연간(729년-749년)까지의 기록으로, 고사기나 일본서기 등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인베씨에서만 전해진 전승도 기록되어 있다.
인베씨는 아메노 후토다마 신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古語拾遺』일본어에는 아메노 후토다마 등 인베씨의 조상신들의 활약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역대 천황에 대해서는 시조 진무천황만 드물게 한풍시호를 사용했다.
천새(天璽)의 신기를 삼종의 신기가 아니고, 야타의 거울과 쿠사나기의 검만 이종의 신보(二種の神宝)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모(矛)와 구슬은 저절로 따른다”고 하는 등 다른 기록들과 차이를 보인다.
이세신궁과 대상제의 조영(造営)을 인베씨가 맡지 못했으며, 진혼제에 사루메노 키미가 임명되지 않은 것 등, 신대 이래로 제사를 담당해 온 씨족들이 임용되지 못하고 다이카 개신 이래 나카토미씨가 벼슬을 독점해온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기록되어 있다.
『古語拾遺』일본어에 기술된 역사적 사건들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지키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사건들과 거의 동일하지만, 이 책에만 있는 몇몇 사건들이 있어 초기 일본 역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언어학적으로 이 텍스트는 만요가나로 쓰인 많은 수의 옛 단어를 포함하고 있어 고대 일본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5. 영향 및 연구
『고어습유』는 『선대구사본기』, 『본조월령』, 『정사요략』, 『장관감문』, 『연중행사비초』, 『석일본기』 등에 인용되어 있어서, 신전으로서 중시되어 왔다.
안에이 2년(1773년) 나사 카츠타카는 『기의재』를 저술하여 『고어습유』를 “인베씨의 쇠폐(衰廃)함을 호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기의재 변』을 저술하여 『고어습유』를 변호했다.[8]
근대 이후 쇼와 시대 3년(1928년) 츠다 소키치는 “집필 당시의 사료는 될 것이나, 기기 이전의 일을 알기 위한 사료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9]
기기에 비해 중요성이 희박하다고 여겨져 왔으나, 근래 재평가되고 있다. 리처드 폰손비-페인은 『고어습유』를 기기보다 더 중요시했다. ''고어습유''에 기술된 역사적 사건들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지키''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사건들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이 책에만 있는 몇몇 사건들이 있어, ''고어습유''는 국가 기록에는 없는 초기 일본 역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언어학적으로 이 텍스트는 만요가나로 쓰인 많은 수의 옛 단어를 포함하고 있어 고대 일본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5. 1. 영향
『고어습유』는 『선대구사본기』, 『본조월령』, 『정사요략』, 『장관감문』, 『연중행사비초』, 『석일본기』등에 인용되어 신전으로서 중시되어 왔다.[8] 이세신도의 문헌 등에 이용·인용되었다.[9]안에이 2년(1773년) 나사 카츠타카는 『의재』(疑斎)를 저술하여 『고어습유』를 “인베씨의 쇠폐(衰廃)함을 호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의재변』을 저술하여 『고어습유』를 변호했다.
근대 이후 쇼와 시대 3년(1928년) 츠다 소키치는 “집필 당시의 사료는 될 것이나, 기기 이전의 일을 알기 위한 사료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기기에 비해 중요성이 희박하다고 여겨져 왔으나, 근래 재평가되고 있다. 리츠더 폰슨비페인은 『고어습유』를 기기보다 더 중요시했다. ''고어습유''에 기술된 역사적 사건들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지키''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사건들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이 책에만 있는 몇몇 사건들이 있어, ''고어습유''는 국가 기록에는 없는 초기 일본 역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언어학적으로 이 텍스트는 만요가나로 쓰인 많은 수의 옛 단어를 포함하고 있어 고대 일본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5. 2. 연구
『고어습유』는 『선대구사본기』, 『본조월령』, 『정사요략』, 『장관감문』, 『연중행사비초』, 『석일본기』 등에 인용되어 있어서, 신전(神典)으로서 중시되어 왔다.안에이 2년(서기 1773년) 나사 카츠타카는 『기의재』를 저술하여 『고어습유』를 “인베씨의 쇠폐(衰廃)함을 호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3] 이에 대하여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기의재 변』을 저술하여 『고어습유』를 변호했다.[8][4]
근대 이후 쇼와 3년(서기 1928년)에 츠다 소키치는 “집필 당시의 사료는 될 것이나, 기기 이전의 일을 알기 위한 사료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9][5]
기기에 비해 중요성이 희박하다고 여겨져 왔으나, 근래 재평가되고 있다. 리처드 폰손비-페인은 『고어습유』를 기기보다 더 중요시했다. 쇼와 천황의 대례 때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건례문 앞에 서는 것을 허가받은 신도 학자 리처드 본손비-페인은 기기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고어습유''에 기술된 역사적 사건들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지키''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사건들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이 책에만 있는 몇몇 사건들이 있어, ''고어습유''는 국가 기록에는 없는 초기 일본 역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언어학적으로 이 텍스트는 만요가나로 쓰인 많은 수의 옛 단어를 포함하고 있어 고대 일본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6. 한국의 관점
참조
[1]
서적
知っ得 日本の古典 名文名場面100選
學燈社
2009-11-13
[2]
문서
古語拾遺
[3]
문서
古語拾遺
[4]
문서
古語拾遺
[5]
간행물
古語拾遺の研究
[6]
서적
財団法人明治聖徳記念学会紀要
https://dl.ndl.go.jp[...]
明治聖徳記念学会
[7]
서적
知っ得 日本の古典 名文名場面100選
學燈社
2009-11-13
[8]
문서
古語拾遺
[9]
간행물
古語拾遺の研究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