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학
1. 개요
공성학은 1879년 개성에서 태어난 기업가이자 유교 학자이다. 그는 인삼 재배 및 판매 사업을 통해 기업을 설립하고, 개성전기주식회사 등 여러 회사의 임원을 역임하며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인삼 경작 공로로 표창을 받았으며,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되었다. 광복 후 송도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을 맡았으며, 1957년에 사망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공성학을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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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 공씨 -
공옥진
공옥진은 1931년 출생하여 판소리와 춤을 결합한 1인 창무극을 개척하고,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80세에 사망했다. -
곡부 공씨 -
공지영
1988년 등단한 소설가 공지영은 민주화 운동 참여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를 조명하는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사회적 논의를 활발하게 이끌어왔으나, 작품과 사회 활동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대한민국의 기업인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대한민국의 기업인 -
문재인
2. 생애
공성학은 1879년 경기도 개성에서 인삼 재배로 큰 재산을 모은 곡부 공씨 가문의 상인 공응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김택영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고, 이후 성리학을 공부했다. 시문에 능통하였으며, 1906년 대한제국 시절 관료로 출사하여 성균관 부제학을 잠시 역임하였다.
1910년 10월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상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단순 개성상인에서 세를 불려 기업을 설립하기도 했다. 공성학은 근대화 과정에서 인삼의 품종을 개량하고 경작 방법을 개선하는 등 인삼 재배와 판매를 기업형으로 발전시켰다. 1912년 영신사(永信社) 설립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삼업주식회사(高麗蔘業株式會社)와 개성전기주식회사, 김정호가 세운 송고실업장에서 대주주나 중역을 역임했다. 개성전기주식회사는 한국 최초의 민족계 전기회사이기도 하다.
1923년 4월 개성 정화여학교에 1000KRW을 기부했다. 이후 정화여학교의 재단이사로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23일 개성군 송도면 협의회의원(주민자치위원)에 당선되었다. 1924년 3월 경기도 평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월 22일 개성전기 취체역 이사가 되었다. 그해 10월 개성 문묘 사성(司成)에 추대되었다. 1924년에는 개성군립도서관의 건립, 개관을 후원, 11월 3일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929년에는 양조업에 뛰어들어 개성양조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30년 송도고무공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았다. 1934년과 1936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춘포사와 개성삼업주식회사를 각각 창립했다. 개성인삼조합을 세우고 제2대 조합장을 역임하였으며,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회하며 인삼의 해외판로를 개척하기도 했다.
인삼 경작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표창을 받았고, 조선총독부가 1935년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도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1946년 윤치호 사후 혼란에 빠진 송도학원의 이사장직을 자원하여 송도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한국 전쟁으로 송도학원을 인천광역시에 정착, 재수습하여 개교하게 했다. 그 뒤 윤치호의 장남인 윤영선에게 재단을 넘겼다. 1930년대 이후에는 둘째 아들 진항(鎭恒)에게 가업을 맡겼다. 1957년에 79세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1879년 ~ 1910년)
공성학은 1879년 경기도 개성에서 인삼 재배로 큰 재산을 모은 곡부 공씨 가문의 상인 공응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김택영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고, 이후 성리학을 공부했다. 시문에 능통하였고, 1906년 대한제국 시절 관료로 출사하여 성균관 부제학을 잠시 역임하였다.
2.2. 기업 및 사회 활동 (1910년 ~ 1945년)
1910년 10월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상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단순 개성상인에서 세를 불려 기업을 설립하기도 했다. 공성학은 근대화 과정에서 인삼의 품종을 개량하고 경작 방법을 개선하는 등 인삼 재배와 판매를 기업형으로 발전시켰다. 1912년 영신사(永信社) 설립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삼업주식회사(高麗蔘業株式會社)와 개성전기주식회사, 김정호가 세운 송고실업장에서 대주주나 중역을 역임했다. 1921년 발간된 《조선은행회사요록》은 3개 이상 회사의 중역을 겸직한 인물로 경기도 지역에서는 20명의 기업인을 꼽고 있는데, 이 가운데 공성학이 포함되어 있다. 개성전기주식회사는 한국 최초의 민족계 전기회사이기도 하다. 개성전기주식회사의 창립에는 대주주로 참여,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20년부터는 고려삼업의 대주주로 활동하며 투자를 증액하였다.
1923년 4월 개성 정화여학교에 후원금 1000KRW을 기부했다. 이후 정화여학교의 재단이사로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23일 개성군 송도면 협의회의원(주민자치위원)에 당선되었다. 1924년 3월 경기도 평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월 22일 개성전기 취체역 이사가 되었다. 그해 10월 개성 문묘 사성(司成)에 추대되었다. 1924년에는 개성군립도서관의 건립, 개관을 후원, 11월 3일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929년에는 양조업에 뛰어들어 개성양조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30년 송도고무공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았다. 1934년과 1936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춘포사와 개성삼업주식회사를 각각 창립했다. 개성인삼조합을 세우고 제2대 조합장을 역임하였으며,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회하며 인삼의 해외판로를 개척하기도 했다. 1936년 서선합동전기주식회사(西鮮合同電氣株式會社)에 강제 합병되어 개성전기주식회사 취체역에서 물러났다.
인삼 경작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표창을 받았고, 조선총독부가 1935년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도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1938년에 개성상회를 창립하는 등 1930년대 후반까지도 활동을 계속했으나, 이후로는 나중에 제1공화국 농림부 장관과 천도교 교령을 지낸 아들 공진항이 아버지의 인삼밭과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했다.
개성상공회의소 의원으로도 활동하다 1933년 7월 21일 퇴임하였다.
2.3.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 1957년)
1946년 윤치호 사후 혼란에 빠진 송도학원의 이사장직을 자원하여 송도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한국 전쟁으로 송도학원을 인천광역시에 정착, 재수습하여 개교하게 했다. 그 뒤 윤치호의 장남인 윤영선에게 재단을 넘겼다. 1930년대 이후에는 둘째 아들 진항(鎭恒)에게 가업을 맡겼다. 1957년에 79세로 사망했다.
5. 저서 및 편저
| 제목 | 출판 연도 |
|---|---|
| 《탕도기행》 | 1936년 |
| 《풍악동유록》 | |
| 《호서기정》 | 1938년 |
| 창강선생실기 (편저) | 1934년 |
| 두문동서원지 (편저) | 1937년 |
6. 평가
공성학은 기업의 성패보다는 민족 자본에 의한 향토 개발로 일본인들의 자본 침략을 극력 반대한 지사형 민족 기업가로 평가받는다. 손봉상 등과 인삼 품종 개량, 경작 방법 개선 등 삼포 경영 방법의 혁신을 주도하였다. 삼포 경영으로 가산을 이룬 부호의 가문에서 태어나 1910년대 이래 개성에서 각종 회사를 창립하여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6.1. 긍정적 평가
기업의 성패보다는 민족 자본에 의한 향토 개발로 일본인들의 자본 침략을 극력 반대한 지사형 민족 기업가로 평가받는다. 손봉상 등과 인삼 품종 개량, 경작 방법 개선 등 삼포 경영 방법의 혁신을 주도하였다. 삼포 경영으로 가산을 이룬 부호의 가문에서 태어나 1910년대 이래 개성에서 각종 회사를 창립하여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개성 상인으로서 기업을 설립, 근대화 과정에서 고려 인삼의 품종을 개량하고 경작 방법을 개선하는 등 고려 인삼 재배와 판매를 기업형으로 발전시켰다. 1912년 영신사 설립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삼업 주식회사와 개성전기 주식회사, 김정호가 세운 송고실업장에서 대주주 및 이사를 역임했다. 1921년 발간된 《조선은행회사요록》은 3개 이상 회사의 이사를 겸직한 인물로 경기도 지역에서 20명의 기업인을 꼽았는데,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개성전기 주식회사는 한국 최초의 민족계 전기 회사이기도 하다.
1923년 4월, 개성 정화여자고등학교에 1000KRW을 기부했고, 이후 정화여자고등학교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1924년에는 개성군립도서관 건립 및 개관을 후원했고, 11월 3일 도서관 개관식에 참여하여 축사를 낭독했다.
고려 인삼 경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표창을 받았으며, 조선총독부가 1935년에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도 조선인 공로자 353인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6.2. 부정적 평가
공성학은 민족자본을 통해 일본 자본의 침략에 반대한 민족기업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유교 계열의 유력 인사로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협력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기에 비판받기도 한다. 손봉상 등과 함께 고려 인삼 품종 및 경작 방법 개선을 이끌고, 1910년대 개성에서 여러 회사를 설립하여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한 점은 사실이나, 이러한 업적이 친일 행적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