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7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그레고리오 7세는 본래 힐데브란트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소바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은 후 교황 레오 9세에 의해 부제가 되었고, 이후 교황청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성직자의 독신을 강제하는 등 교회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투쟁을 벌였으며,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사건을 겪었다. 결국 로마에서 망명하여 살레르노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후대 교황들에게 이어져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이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그로세토도 출신 - 라우라 모란테
라우라 모란테는 1981년 데뷔 후 《아들의 방》, 《몰리에르》 등 다수 영화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 이탈리아 배우이자, 2012년 《체리 온 더 케이크》로 영화 감독 데뷔 후 TV 드라마에서도 활동하는 인물이다. - 1085년 사망 - 곽희
북송 시대 화가 곽희는 신종의 총애를 받으며 독창적인 화법으로 웅장하고 깊이 있는 산수화를 그렸고, 이곽파를 형성하여 중국 산수화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신종 사후에는 잊혀졌다. - 1085년 사망 - 정호
정호는 북송 시대의 유학자로서 동생 정이와 함께 '이정'으로 불리며 신유학의 선구자로 여겨지고, 인을 중심 사상으로 성경의 마음가짐을 강조하며 우주의 이치를 직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후대 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020년 출생 - 장재
장재는 기(氣)를 우주의 근본 물질로 여기는 기일원론을 주장하고 성리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북송 시대의 유학자이다. - 1020년 출생 - 문종 (고려)
문종은 고려 제11대 왕으로, 유능한 인재 등용과 과거 제도 정비, 여진족 정벌 및 국방력 강화 등의 노력으로 고려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문벌 귀족 사회의 폐단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칭 | 성인 |
이름 | 그레고리오 7세 |
본명 | 일데브란도 디 소아나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토스카나, 소바나 |
사망 | 1085년 5월 25일 |
사망 장소 | 아풀리아 공국, 살레르노 |
축일 | 5월 25일 |
시성 | 1728년 5월 24일 |
시성 장소 | 교황령, 로마 |
시성자 | 베네딕토 13세 |
수호 | 피틸리아노-소바나-오르베텔로 교구 |
![]() | |
로마 교황 | |
재임 시작 | 1073년 4월 22일 |
재임 종료 | 1085년 5월 25일 |
선임자 | 알렉산데르 2세 |
후임자 | 빅토르 3세 |
서품 | 1073년 5월 22일 |
주교 서임 | 1073년 6월 30일 |
이전 직책 | 로마 교회의 수석 부제 |
추기경 | |
임명일 | 1058년 3월 6일 |
수도회 | |
소속 | 베네딕도회 |
2. 약력
그레고리오 7세는 오늘날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 남쪽에 있는 그로세토의 소바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고 전해진다.[54] 요한 게오르크 에스토아에 따르면, 그레고리오의 본명은 일데브란도 보니치로,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는 공부를 위해 로마로 보내졌으며, 그의 삼촌은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수도원의 원장이었다고 한다.[55] 일데브란도가 모신 장상들 중에는 박학다식한 아말피의 대주교 라우렌시오와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되는 요한네스 그라티아누스가 있었다.[55]
그레고리오 6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폐위되어 독일로 망명길에 오를 때, 일데브란도는 그를 따라 쾰른까지 갔다. 몇몇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56] 1048년 그레고리오 6세가 선종하자 일데브란도는 클뤼니 수도원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클뤼니 수도원에 갔다고 해서, 그곳의 수사가 된 것은 아니다. 이후 일데브란도는 툴의 아빠스 브루노와 로마까지 동행했다. 로마에 도착한 브루노는 교황 레오 9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레오 9세는 일데브란도를 부제로 서품하고 교황청 행정관에 임명하였다.
1073년 4월 21일 알렉산데르 2세가 선종한 후,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그의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 "일데브란도를 교황으로!", "복되신 베드로께서 일데브란도 수석부제를 선택하셨다!"라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59] 그 직후, 일데브란도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으로 안내되어 그곳에 모인 추기경들에 의해 교회법 절차에 따라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로마 사제단이 이에 동의하자 군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59]
그의 선출 방식은 반대자들에게 심하게 비판받았는데, 많은 비난은 개인적인 혐오감 때문이었을 수 있다.[51]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의 교황 선출이 매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1059년 교회법에 명시된 규정들(교황 선출은 교황 매장 후 3일 뒤, 추기경 주교들에게 후보자 지명 독점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상의)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22][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로마 시민들이 그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낸 것이 그의 선출을 유효하게 만들었다.[24]
그레고리오 7세는 즉위 직후 작성한 초기 서신들에서 자신의 선출이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고,[24] 1073년 5월 22일 그는 사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30일에는 주교품을 받고 교황으로 즉위하였다.[24]
1073년 4월 22일 교황 선출 발표문에서는 그레고리오 7세를 새 교황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신심이 깊고,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며, 역경에 강하며, 부유함을 절제할 줄 알면서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행동주의자인 데다가 떳떳하고, 겸손하며, 냉철하며, 순결하고, 친절이 몸에 배여있으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인 동시에 어린 시절 어머니 교회의 따뜻한 품 속에서 풍요롭게 자라, 어느덧 삶의 정점에 다다랐을 즈음 수석부제로서의 위엄을 갖추는 수준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일데브란도를 교황이자 사도의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그는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이 이름은 앞으로 영원히 그의 이름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51]
2. 1. 생애 초기
그레고리오 7세는 오늘날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 남쪽에 있는 그로세토의 소바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고 전해진다.[54] 요한 게오르크 에스토아에 따르면, 그레고리오의 본명은 일데브란도 보니치로,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어린 시절 그는 공부를 위해 로마로 보내졌으며, 그의 삼촌은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수도원의 원장(아빠스)이었다고 한다.[55] 일데브란도가 모신 장상들 중에는 박학다식한 아말피의 대주교 라우렌시오와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되는 요한네스 그라티아누스가 있었다.[55]
그레고리오 6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폐위되어 독일로 망명길에 오를 때, 일데브란도는 그를 따라 쾰른까지 갔다. 몇몇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56] 1048년 그레고리오 6세가 선종하자 일데브란도는 클뤼니 수도원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클뤼니 수도원에 갔다고 해서, 그곳의 수사가 된 것은 아니다. 이후 일데브란도는 툴의 아빠스 브루노와 로마까지 동행했다. 로마에 도착한 브루노는 교황 레오 9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레오 9세는 일데브란도를 부제로 서품하고 교황청 행정관에 임명하였다.
2. 2. 교황 선출
1073년 4월 21일 알렉산데르 2세가 선종한 후,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그의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 "일데브란도를 교황으로!", "복되신 베드로께서 일데브란도 수석부제를 선택하셨다!"라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59] 그 직후, 일데브란도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으로 안내되어 그곳에 모인 추기경들에 의해 교회법 절차에 따라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로마 사제단이 이에 동의하자 군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59]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이 순전히 즉흥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것이었는지는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51] 그의 선출 방식은 반대자들에게 심하게 비판받았는데, 많은 비난은 개인적인 혐오감 때문이었을 수 있다.[51]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의 교황 선출이 매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1059년 교회법에 명시된 규정들(교황 선출은 교황 매장 후 3일 뒤, 추기경 주교들에게 후보자 지명 독점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상의)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22][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로마 시민들이 그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낸 것이 그의 선출을 유효하게 만들었다.[24]
그레고리오 7세는 즉위 직후 작성한 초기 서신들에서 자신의 선출이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24] 1073년 5월 22일 그는 사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30일에는 주교품을 받고 교황으로 즉위하였다.[24]
1073년 4월 22일 교황 선출 발표문에서는 그레고리오 7세를 새 교황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virum pium, prudentia humana et divina praeditum, aequitatis et iustitiae praecipuum amatorem, fortem in adversis, temperatum in prosperis, bonis moribus, iuxta verbum apostolicum, irreprehensibilem, pudicum, sobrium, castum, hospitalem, domui suae bene praepositum, in gremio huius matris ecclesiae a pueritia liberaliter educatum, et pro vitae merito in archidiaconatus honorem usque ad hoc tempus sublimatum...Hunc ergo virum in papam et apostolicum successorem nobis eligimus, et deinceps et in perpetuum Gregorii nomine appellandum decernimus.la|...신심이 깊고,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며, 역경에 강하며, 부유함을 절제할 줄 알면서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행동주의자인 데다가 떳떳하고, 겸손하며, 냉철하며, 순결하고, 친절이 몸에 배여있으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인 동시에 어린 시절 어머니 교회의 따뜻한 품 속에서 풍요롭게 자라, 어느덧 삶의 정점에 다다랐을 즈음 수석부제로서의 위엄을 갖추는 수준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일데브란도를 교황이자 사도의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그는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이 이름은 앞으로 영원히 그의 이름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51]
3. 교황
교황 비오 5세가 흰색 수단을 처음 입은 교황이라는 통념과 달리, 문서상으로는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때 교황의 흰색 수단이 처음 등장한다. 아고스티노 바라비치니 바리아니에 따르면, 그레고리오 7세는 1073년 교황 선출 직후 붉은색 망토를 착용하여 교황권의 장엄함을 알린 최초의 교황이었다. 전통적으로 교황은 붉은색(모제타, 신발, 망토)과 흰색(수단, 양말)의 두 가지 색상의 의복을 착용했다.[61][62]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와의 서임권 투쟁을 통해 세속 군주가 가지고 있던 주교와 대수도원장 임명권(서임권)을 교회의 손으로 되찾고자 했다. 이는 세속 권력과 교회를 분리함으로써 교회의 재건과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또한,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알려진 여러 교회 개혁을 추진하여 이후 교황들의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유럽 전역의 왕족들에게 서간을 보내고 사절을 파견하여 교회의 독립성을 보여주고 교황의 권위를 높였다. 그의 업적은 교황 수위권 발전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3. 1. 교회 개혁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직의 우월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성직매매를 근절하고 성직자에게 독신 의무를 강제했다. 그는 성직자 독신을 처음 고안하지는 않았지만, 이전 교황들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68] 1074년, 그레고리오 7세는 기혼 사제의 서품을 허용한 주교에게 순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기혼 성직자에게 이혼을 요구했다.[68] 이듬해에는 각 지역 교구장에게 기혼 성직자에 대한 조치를 시행하고, 수입을 몰수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정책은 유럽 전역에서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24]그는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하여 지역 교구장 주교의 권한을 축소하려 했고, 이는 주교들과의 지속적인 갈등을 야기했다.[24]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의 규칙과 관습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으며, 그의 글은 《Gregorii VII registri sive epistolarum libri》에 정리되어 있다.[69]
투르의 베렌가리우스와의 성체 논쟁에서 교회의 성체 교리를 수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회칙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에서 그레고리오 7세가 베렌가리우스에게 강요한 신앙 고백을 인용하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70] 이 신앙 고백은 12세기부터 유럽에서 ‘성찬례 르네상스’를 촉발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교회 개혁 노력은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불리며, 이후 가톨릭 교회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3. 2. 서임권 투쟁

그레고리오 7세의 주요 정책은 대부분 독일과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었다. 하인리히 3세 사후 독일 황실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는 제국 내의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1073년 당시 하인리히 4세는 24세에 불과했기에, 이러한 상황은 그레고리오 7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2년 동안, 하인리히 4세는 작센 전쟁 때문에 교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1074년 5월, 하인리히 4세는 뉘른베르크에서 교황 특사들 앞에서 과거 그레고리오 7세가 파문한 교회회의 위원들과의 관계를 유지한 죄를 뉘우치고, 교황에게 순명하며 교회 개혁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075년 6월 9일 랑엔살자 전투에서 작센 공국을 굴복시킨 하인리히 4세는 태도를 바꾸어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에버하르트 백작과 테달도 신부를 각각 롬바르디아와 밀라노 대교구에 보내 파타리아[63] 운동을 진압하고, 로베르 기스카르와의 동맹을 시도했다.
이에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12월 8일 서신을 보내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순명하지 않고 파문당한 성직자들을 지원한 것을 비판하며, 파문과 왕위 박탈 가능성을 암시했다. 1075년 예수 성탄 대축일 밤, 그레고리오 7세는 첸시오 1세 프란지파네(en)에게 납치되었다가 로마 시민들에 의해 풀려나는 사건을 겪었다.
하인리히 4세와 독일 궁정은 교황의 문책에 격분하여 1076년 1월 24일 보름스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그레고리오 7세에 반감을 품은 독일 고위 성직자들과 추기경 휴고 칸디두스가 참석한 이 회의는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독일 주교들은 그에 대한 순명을 철회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로마 시민들에게 새 교황 선출을 요구했다.[64]
보름스 회의의 결정은 피아첸차 시노드에서 랑고바르드 주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파르마의 롤란드는 라테라노 대성전에 소집된 시노드에서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 결의를 알렸으나, 시노드 참석자들의 분노를 샀다. 다음날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제위를 박탈하며, 제국 시민들의 충성을 면제시켰다. 이는 4세기 기독교 국교화 이후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65]
그레고리오 7세의 파문 선고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3세는 과거 교황직을 주장한 세 명을 폐위시켜 교회에 공헌했으나, 하인리히 4세는 민심을 얻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하는 여론이 확산되었고, 제후들은 교황의 결정을 존중하며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하인리히 4세가 소집한 귀족회의는 참석자가 적었고, 작센 공국은 다시 반역의 기회를 잡았다.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이 철회된 후에도 독일 귀족들은 1077년 3월 포히하임에서 라인펜델의 루돌프 공작을 새 군주로 옹립했다. 교황 특사들은 중립을 유지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양측의 신뢰를 잃었다. 결국 루돌프 공작이 1080년 1월 27일 포히하임 전투에서 승리하자, 그레고리오 7세는 루돌프를 지지하며 1080년 3월 7일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여론은 이 결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1080년 10월 16일 루돌프 공작이 사망하고, 1081년 8월 룩셈부르크의 헤르만이 새 군주 후보로 떠올랐지만 역량이 부족했다. 하인리히 4세는 1081년 6월 16일 브레사노네 교회회의에서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라벤나의 대주교 귀베르트를 새 교황으로 옹립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에서 반(反)교황 운동을 전개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권력이 약화되어 13명의 추기경이 그를 떠났다.
1084년 3월, 하인리히 4세는 로마를 점령하고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그레고리오 7세에게 귀베르트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제안했으나, 그레고리오 7세는 거절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의 참회를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하인리히 4세는 주교들의 모임을 막으려 했다. 소수의 주교들이 모여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을 재차 선포하자, 하인리히 4세는 1084년 3월 21일 로마에 재입성하여 3월 24일 귀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하고, 자신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올렸다. 그레고리오 7세는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3. 2. 1. 카노사의 굴욕

독일 제후들은 교황 특사 파사우의 알트만 주교(알트만)의 주도로 1077년 10월 트레부르에서 새로운 독일 통치자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라인강 서쪽 오펜하임에 주둔하던 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해 간신히 폐위를 면했다.[24] 그러나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사죄하고 복종해야 하며, 파문 후 1년이 지나도 파문 상태라면 왕위는 공석으로 간주된다고 선언했다. 또한 그레고리오 7세를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 초청하여 분쟁을 해결하려 했다.[24]
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과 교황에게 동시에 대항할 수 없어, 정해진 기간 안에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파문을 철회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사절을 보냈지만, 그레고리오 7세가 거절하자 직접 이탈리아로 갔다.[24] 교황은 이미 로마를 떠나 1077년 1월 8일에 만토바로 떠날 예정이었고, 독일 제후들에게 호위를 요청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황은 가까운 동맹자인 토스카나의 마틸다 백작부인(마틸다)의 보호 아래 카노사로 피신했다. 하인리히 4세는 부르고뉴를 거쳐 이탈리아로 왔고, 롬바르드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1077년 1월 25일, 하인리히 4세는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아펜니노 산맥 북쪽에 있는 카노사에 도착하여 참회복을 입고, 그레고리오 7세를 알현하기 위해 성문 앞에서 3일간 기다렸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의 상징적인 사건이다.[66]
그레고리오 7세는 용서할 생각이 없었으나, 측근과 지지자들의 간청으로 파문을 철회했다. 죄를 뉘우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상 불가능했고, 그레고리오 7세에게 종교적 책무는 정치적 이해보다 우선했다.[24]
파문 철회는 서임권 투쟁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진정한 해결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는 파문 철회로 폐위 선고도 무효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레고리오 7세는 이 문제를 신경 쓰지 못했다. 이는 새로운 분쟁의 씨앗을 낳았다.[24]
3. 2. 2. 두 번째 파문
1080년 3월 7일,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하고 그의 폐위를 선언했다. 1077년에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고 파문을 해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며 루돌프를 독일의 대립 국왕으로 선출하고 하인리히 4세에게 적대행위를 지속했다. 교황의 파문 철회는 귀족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했던 충성 맹세가 다시 유효해졌음을 의미했고, 따라서 귀족들은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는 봉건 체제하에서 봉신으로서 위법 행위를 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은 즉시 대립왕과 그의 추종자 전부를 파문했어야 했다. 그러나 교황은 화해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내전이 벌어진 3년 동안 양측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24]1080년이 되어서야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했다. 그러나 이미 파문이 해제되었고, 파문을 받아야 할 대상은 교황의 조치에 불복한 루돌프와 그를 선출한 반대파 귀족들이었다. 이는 교회 개혁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이번 파문 조치는 효력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우와 이치에도 어긋났다. 교황의 결정에 불복한 자들을 응징하는 데 앞장섰던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 조치는 부당하게 여겨졌고, 하인리히 4세에 대한 2차 파문은 교황권 남용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4]
3. 3. 기타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그레고리오 7세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맺을 때, 독일과의 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때로는 독일 왕에게 알리지 않고 다른 나라들과 독단적으로 교류하여 독일 왕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 했다.
교황 니콜라오 2세 치세에 교회는 노르만족에게 많은 특권을 주었지만,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그들의 침략을 막는 데는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고, 교황에 대한 안전 보장도 장담할 수 없었다. 노르만족의 지도자인 로베르 기스카르는 그레고리오 7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크게 위협받았을 때는 그를 외면하다가, 독일의 위협이 현실화되자 겨우 개입하였다. 로마를 장악한 후 그는 병사들에게 로마를 약탈하도록 넘겨주었고, 이로 인해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사 그레고리오 7세는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24]
그레고리오 7세는 일부 나라들에 대해 교황의 통치권을 주장하며 이를 강요하려 했다. 그는 태고적부터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는 로마 교회에 속해 왔다고 주장했으며, 스페인, 헝가리, 크로아티아도 교황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또한 덴마크 왕에게는 자신의 영토를 교황에게서 받은 봉토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려 했다.[24]
교회 정책과 교회 개혁에 있어 그레고리오 7세는 혼자가 아니었으며, 여러 사람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잉글랜드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 란프랑크가 그를 지지했으며, 프랑스에서는 훗날 리옹 대주교가 되는 디의 휴고가 교황을 지지하였다.[24][42]
필리프 1세는 성직매매와 교회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로 인해 파문과 폐위의 위협을 받았다. 1074년 파문, 폐위, 교령 금지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레고리오 7세는 독일에서 곧 벌어질 갈등에서 힘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왕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협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24]
잉글랜드의 왕 윌리엄 1세는 멀리 떨어진 로마가 잉글랜드까지 제대로 간섭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자국 교회 문제에 간섭하고, 잉글랜드 주교들이 로마를 방문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뜻대로 교구와 수도원구를 설정하였다. 교황이 영적 권력과 세속 권력 간의 관계에 대해 자신과 다른 생각을 설파하거나, 무역 활동을 중지당하고 싶지 않으면 교황의 봉신임을 인정하라는 지시를 내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24] 특히 윌리엄은 그레고리오가 윌리엄의 새로 얻은 왕국의 통일성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과는 반대로 교회 영국을 두 개의 관구로 나누려는 그레고리오의 주장에 짜증을 냈다. 성직자 임명 문제에서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요구하는 그레고리오의 끊임없는 주장은 점점 더 논쟁적인 문제가 되었다.[38] 그는 또한 주교들이 로마로부터 승인과 지시를 받도록 강요하고, 로마에 정기적으로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하도록 요구했다.[39] 그레고리오 7세는 잉글랜드 왕에게 그의 교회 정책을 바꾸도록 강요할 권한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이 승인할 수 없는 것을 무시해야 했고, 심지어 윌리엄 왕에게 그의 특별한 애정을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24] 전반적으로 윌리엄의 정책은 교회에 큰 이익이 되었다.[40][41]
그레고리오 7세는 브리예 2세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원정 십자군을 조직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43]
1076년, 그레고리오 7세는 르네의 생-멜랭 수도원의 수도사인 돌 에웬을 돌의 주교로 임명했다. 그는 최근 북동부 브르타뉴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던 윌리엄 정복자의 지지를 받던 현직 주교 이우타엘과 윌리엄에 반대하는 돌 귀족들의 후보인 길두인을 모두 거부했다. 그레고리오는 이우타엘이 성직매매로 악명이 높았고, 길두인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36] 그레고리오는 또한 돌이 대주교 관구로서의 권리와 팔리움 사용에 대한 오랜 분쟁이 최종적으로 결정될 때 교황청의 판단에 따르는 조건으로 돌 에웬에게 대주교의 팔리움을 수여했다.[37]
그레고리오 7세는 사실상 기독교 세계의 모든 나라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과의 관계가 항상 그의 교회 정치적 희망을 실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서신은 폴란드, 키예프 루스, 보헤미아까지 미쳤다. 그는 아르메니아를 로마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24][44]
그레고리오 7세는 특히 동로마 제국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 사이의 분열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이전의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미하일 7세 두카스 황제와 연락을 시도했다. 동로마 제국의 동쪽에서 이슬람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고 비잔티움 황제의 정치적 곤경이 커지자, 그는 대규모 군사 원정을 계획하고 신자들에게 성묘 교회를 탈환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촉구했다.[24] 이는 훗날 있을 십자군 원정의 전초가 되었다. 그는 원정대 모집 노력에서 동방 기독교인들의 고통을 강조하며 서방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돕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45]
3. 4. 대내 정책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 내부 개혁에 힘썼다. 캔터베리 대주교 랜프랭크와 리옹 대주교가 되는 디에의 위그 등은 교황을 지지하며 힘을 실어주었다.[68] 그는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에 의해 세워졌으며, 하느님의 뜻이 유일한 법이라고 믿었다. 또한, 교회는 세속 국가보다 우선하며, 교황은 하느님의 대리인이므로 교황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하느님께 불복종하는 것이라 여겼다.[24]하지만 그레고리오 7세는 현실 정치에서는 다른 정책을 펼쳤다. 국가를 하느님이 허락한 존재로 인정하고, 교회와 국가의 공존, 그리고 교황권과 황제권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두 권력을 동등하게 보지 않았고, 교회가 국가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24]
그레고리오 7세는 모든 중요한 문제가 교황에게 보고되기를 바랐고, 이는 지역 주교들의 권한 축소로 이어졌다. 주교들은 이에 반발하며 교황과 갈등을 빚었다.[24]
그는 교황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성직자들의 독신 의무를 강요하고 성직매매를 근절하려 노력했다. 1074년에는 기혼 사제의 서품을 용인한 주교에게 순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기혼 성직자들에게 이혼을 요구했다.[68] 다음 해에는 주교들에게 기혼 성직자들의 수입을 몰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정책은 유럽 전역에서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다.[24]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 규칙과 관습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Gregorii VII registri sive epistolarum libri》는 그가 생전에 썼던 글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69]
그는 세속 군주의 주교와 대수도원장 임명권(서임권)을 교회가 되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세속 권력과 교회를 분리하여 교회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알려진 여러 교회 개혁을 추진했고, 이후 교황들도 그의 방침에 따라 개혁을 이어갔다.
그레고리오 7세는 유럽 각국의 왕족들에게 서신을 보내고 사절을 파견하여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교회의 독립성을 보여주려 했다. 그의 업적은 교황 수위권 발전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4. 망명과 죽음
1080년 10월 16일 반(反) 하인리히 4세 파의 구심점이었던 루돌프 공작이 사망하면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상황은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081년 8월에 룩셈부르크의 헤르만이 새 군주 후보로 등장했지만 역량이 부족했던 반면,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졌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에게 내려진 교황의 파문과 폐위는 불법이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1080년 6월 16일 브레사노네 교회회의에서 그레고리오 7세를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라벤나의 대주교 귀베르트를 새 교황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하였다.[67]
1081년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에서 반(反)교황 운동을 전개하자 그레고리오 7세의 권력은 갈수록 약화되었으며, 13명의 추기경이 그의 곁을 떠났다. 1081년 로마에 도착한 하인리히 4세는 3년간의 노력 끝에 1084년 3월에 로마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귀베르트를 넘겨줄테니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해 달라고 제안했으나 그레고리오 7세는 거절하였다. 다만 언젠가는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하인리히 4세가 교회회의에 출두하여 공개적으로 참회하면 알현을 허락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인리히 4세는 겉으로 따르는 척하면서 주교들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럼에도 소수의 주교들이 모여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을 재차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하인리히 4세는 1084년 3월 21일 로마에 재입성하여 3월 24일 라벤나의 귀베르트를 새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교황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올렸다.
산탄젤로 성에 은신한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 통치자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084년 5월에 로베르가 3만 6,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자, 하인리히 4세는 퇴각해버렸다. 로베르 군대의 로마 진입을 반대하는 세력은 교황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발하며, 교황권 남용으로 인한 독일 군대의 로마 포위로 민생 경제가 어려워졌음에도 교황이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로베르가 이끄는 노르만족과 사라센 출신 군대는 로마 도심 곳곳에 불을 질러 혼란을 야기하고 산탄젤로 성으로 진입하여 교황을 구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저항군과의 시가전과 약탈이 발생하였고, 특히 군사적 요새 역할을 하던 성당들이 방화로 많이 소실되었다.
교황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노르만 군대의 방화와 약탈로 피해가 극심해지자 로마 시민들이 분노하며 교황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압박하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레고리오 7세는 노르만 군대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로마 시민들에게 버림받은 교황은 몬테카시노를 거쳐 해안가에 있는 살레르노 성에 은거하였으나 1085년에 선종하였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망명지에서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67] 그는 선종하기 3일 전에 하인리히 4세와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즉위한 라벤나의 귀베르트를 제외하고 그가 파문한 모든 사람을 사면하였다.
5. 유산
그레고리오 7세는 평생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에 의해 세워졌으며, 하느님의 뜻이 유일한 법이라는 신념에 따라 살았다. 그는 교황은 지상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존재이므로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68] 그러나 실제로는 교회와 국가의 공존을 인정하고 양측의 동맹을 강조했지만, 교회의 우선권은 명확히 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모든 중요한 문제가 교황에게 보고되기를 바랐고, 이는 지역 교구장 주교들의 권한 축소로 이어져 갈등을 빚었다. 그는 성직자 독신 의무와 성직매매 타파를 위해 노력했으며, 1074년에는 기혼 사제의 서품을 용인한 주교에게 순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회칙을 반포하고 기혼 성직자들에게 이혼을 요구했다.[68] 다음 해에는 기혼 성직자들의 수입을 몰수하는 조치를 시행하도록 지시하여 유럽 전역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의 규칙과 관습에 대한 글을 많이 썼으며, 《Gregorii VII registri sive epistolarum libri》는 그가 생전에 썼던 글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69] 그는 1584년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8년 5월 24일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51]
그레고리오 7세는 세속 군주의 주교와 대수도원장 임명권(서임권)을 교회의 손으로 되찾고자 하인리히 4세와 싸웠다. 이는 세속 권력과 교회를 분리하여 교회의 재건과 자주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알려진 여러 교회 개혁을 추진했고, 이후 교황들이 그의 방침에 따라 개혁을 진행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유럽 전역의 왕족들에게 서간을 보내고 사절을 파견하여 교회의 독립성과 교황의 권위를 높였다. 그의 이름은 교황 수위권 발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참조
[1]
서적
The Early Church
[2]
서적
New Catholic Encyclopedia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3]
서적
New Catholic Encyclopedia
[4]
서적
Clerical Celibacy in the West: C.1100-1700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05-23
[5]
문서
Gesta Romanae ecclesiae contra Hildebrandum
MGH Libelli de Lite II
[6]
서적
The acts and monuments of John Fox
https://books.google[...]
[7]
문서
Probe einer verbesserten Heraldic
[8]
서적
My First Book of Saints
Sons of Holy Mary Immaculate - Quality Catholic Publications
[9]
웹사이트
Saint Gregory VII., Pope and Confessor. Volume V: The Lives of the Saints
https://www.bartleby[...]
2019-04-05
[10]
웹사이트
The Provincial Council of Sutri, Dec. 20-23, 1046 A.D., and It's importance for the Church of Today (Video) From Rome
https://www.fromrome[...]
2024-05-25
[11]
서적
Theology, Rhetoric, and Politics in the Eucharistic Controversy, 1078-1079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2]
학술지
Una carriera dietro le quinte
2008-12
[13]
웹사이트
Pope Nicholas II
http://www.newadvent[...]
[14]
웹사이트
Galeria Antica
https://www.lazionas[...]
2019-04-05
[15]
문서
L' arcidiaconato di Ildebrando
[16]
백과사전
Alexander (popes)
[17]
서적
the Life and Times of Hildebrand
London: Francis Griffiths
[18]
문서
Annales of Berthold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19]
문서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http://www.csun.edu/[...]
[20]
문서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21]
문서
Patrologia Latina
[22]
문서
Liber Pontificalis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Scriptores
[23]
문서
Annales of Lambertus of Hersfeld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Scriptores
[24]
백과사전
Gregory (Popes)/Gregory VII
[25]
학술지
Sia fatta la mia volontà
2008-12
[26]
서적
The Two Cities: Medieval Europe 1050–1320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7]
웹사이트
Letter to Gregory VII (24 January 1076)
http://www.fordham.e[...]
[28]
웹사이트
Women at Canossa. The Role of Elite Women in the Reconciliation between Pope Gregory VII and Henry IV of Germany (January 1077)
https://storicamente[...]
[29]
서적
[30]
문서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
[31]
문서
Bibliotheca rerum Germanicarum Tomus II: Monumenta Gregoriana
[32]
문서
Letter to King Alfonso of Leon and Castile
Jaffe Bibliotheca
[33]
서적
[34]
서적
The First Crusad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35]
서적
History of the City of Rome in the Middle Ages
[36]
서적
Anglo-Norman Studies
Boydell & Brewer
[37]
서적
Bibliotheca rerum Germanicarum Tomus II: Monumenta Gregoriana
Berolini
[38]
서적
Anglo-Norman Studies
[39]
서적
Bibliotheca rerum Germanicarum Tomus II: Monumenta Gregoriana
Berolini
[40]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1]
서적
Patrologia Latina
[42]
서적
Gallia christiana
Paris
[43]
서적
The Contest of Christian and Muslim Spain 1031–1157
Blackwell
[44]
서적
The Armenian Kingdom in Cilicia During the Crusades: The Integration of Cilician Armenians with the Latins, 1080–1393
Curzon Press
[45]
웹사이트
Pope Gregory VII on the Plight of Eastern Christians Prior to the First Crusade
https://apholt.com/2[...]
2016-11-14
[46]
서적
Gregorii VII registri sive epistolarum libri
Florence
[47]
서적
Lanfranc et Bérenger. La controverse eucharistique du XIe siècle
[48]
서적
The History of Eucharistic Adoration
CMJ Publishers and Distrib.
[49]
웹사이트
Mysterium fidei
https://www.vatican.[...]
[50]
서적
Die letzten Worte Papst Gregors VII : 164. Sitzung am 20. Januar 1971 in Düsseldorf
Springer-Verlag
[51]
웹사이트
[52]
서적
イタリアの中世都市
山川出版社
[53]
문서
Hildebrand
[54]
저널
2008-12
[55]
저널
2008-12
[56]
저널
2008-12
[57]
저널
Una carriera dietro le quinte
2008-12
[58]
웹사이트
La città perduta di Galeria
http://www.lazionasc[...]
[59]
서적
Conciliorum Collectio
[60]
저널
Sia fatta la mia volontà
2008-12
[61]
웹사이트
Vatican newspaper examines history of red, white papal garb : News Headlines
http://www.catholicc[...]
Catholic Culture
2013-09-02
[62]
웹사이트
L'Osservatore Romano
http://www.osservato[...]
Osservatoreromano.va
[63]
문서
밀라노 정부를 지배하고 있는 급진적인 교회 개혁주의 세력으로 광적인 수준으로 개혁을 부르짖었다. 이들은 어느정도 순수한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랜 시간 교회가 누리던 부와 특권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64]
웹사이트
Letter to Gregory VII (24 January 1076)
http://www.fordham.e[...]
[65]
문서
300년 전 751년에 교황 자카리아(741-751)가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군주 힐데리히 3세의 폐위와 피핀 3세의 즉위를 승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교황이 직접 파문을 한 것이 아니라 피핀이 폐위를 시키자 이를 승인한 것이다. 승인의 명분도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직접 파문시킬 명분이 있을 수 없었다. 수도원에 있던 힐데리히 3세를 귀족들이 추대하여 왕으로 즉위시킨후 필요성이 사라지자 폐위시킨 사건이었다. 즉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다. 파문은 피핀에게 내렸어야 할 일이었다. 그 당시 서로마 교회는 동로마 제국과 성상파괴령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자 새로운 정치 후원자가 필요한 상황이였기에 신흥세력인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기 위해서 취한 조치일 뿐이지 이를 세속군주 폐위의 선례하고 볼 수는 없다.
[66]
문서
카노사의 굴욕사건은 교황권의 전성기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다. 그레고리오 7세가 1080년에 하인리히 4세를 두 번째 파문하였으나 전혀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1084년에는 강제 폐위당한 후 로마시민들로부터 버림받아 로마에서 사실상 추방당했다. 교황권과 황제권이 역전되는 전환기이자 교황권력이 전성기로 나아가기 위한 초반 과도기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보아야 합당하다.
[67]
문서
Original: ''Dilexi iustitiam et odivi iniquitatem propterea morior in exilio''. Commentary on the foregoing: This is an echo of the well-known Ps. 44.8 ''Dilexísti justítiam, et odísti iniquitátem : proptérea unxit te Deus, Deus tuus, óleo lætítiæ præ consórtibus tuis'' which together with Ps. ibid. 2 ''Eructávit cor meum verbum bonum : dico ego ópers mea Regi'' form the Introit of the former of the two Masses of the Common of a virgin not a martyr, the two parts in Eastertide being separated by a pair of Allelúias. The grammatical variation on 'Thou didst love justice and hate iniquity', the original of which, said in apostrophe to the canonised virgin not a martyr whose feast is being celebrated and certainly recognised by every reader, is here put into the deceased Pope's own mouth: 'I did love justice and hate iniquity [: ...]'.
2012-09
[68]
서적
세계사의 명장면 그 이면의 역사
도서출판 달과소
[69]
서적
Gregorii VII registri sive epistolarum libri
Florence
[70]
웹사이트
Mysterium fidei
http://www.vatican.v[...]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