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타 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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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리타 겐조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일본에서 여러 건의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죄자이다. 그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1948년 삼각관계에 있던 여성 2명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1951년에는 24세 여성을 강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했으며, 29세 여성과 자녀 3명을 살해했다. 1952년에는 63세 여성과 24세 조카딸을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했다. 1952년 체포된 그는 두 차례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항소를 취하하고 1959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사형 제도 존폐 논쟁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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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타 겐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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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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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구리타 겐조 |
별칭 | 해당 없음 |
출생일 | 1926년 11월 3일 |
출생지 | 아키타현오가치군 |
사망일 | 1959년 10월 14일 |
사망 장소 | 미야기현센다이시 미야기 형무소 |
사인 | 교수형 |
희생자 수 | 8명 |
범행 국가 | 일본 |
범행 지역 | 지바현, 도치기현, 시즈오카현 |
범행 시작 년도 | 1948년 2월 |
범행 종료일 | 1952년 1월 13일 |
체포일 | 1952년 1월 16일 |
형벌 | 사형 |
유죄 판결 | 살인 (8건) |
범죄 상태 | 사형 집행 |
사건 정보 | |
사건명 | 오센코로가시 살인 사건 |
발생 장소 | 지바현아와군고미나토정(현재의 가모가와시) |
표적 | 모자 등 |
발생 기간 | 1948년 - 1952년 1월 13일 |
범행 수법 | 벼랑에 던져 떨어뜨림 |
공격 인원 | 1명 |
사망자 | 모자 등 7명 |
용의 | 강간, 살인, 사체 유기 |
동기 | 강간 |
형사 소송 | 사형 (집행 완료) |
2. 범행 배경
구리타 겐조는 아키타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야뇨증으로 인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사회의 밑바닥에서 성장했다.
이후 구리타는 1948년 암거래 브로커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삼각 관계로 얽힌 시즈오카현의 교제 여성을 살해했다. 1951년에는 도치기현에서 주부를 강간 및 교살하고 시체 강간했으며, 같은 해 가즈사오키쓰역에서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던 모자 4명을 유인하여 살해 및 강간했다. 1952년 지바현 지바시하나미가 구(검견가와정)에서 주부와 이모를 살해하고 주부를 시체 강간한 사건으로 지문이 검출되어 체포되었다.
이러한 성장 배경과 범죄 행위는 그의 범행 동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2. 1. 어린 시절
아키타현 오가치군 신세이 마을(현: 우고정)의 가난한 가정에서 12명의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부였던 아버지는 병약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생계를 유지했지만, 구리타는 부모로부터 방치된 채 성장했다. 초등학교 취학기에도 야뇨증이 낫지 않아 학교에서 야뇨증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했다. 초등학교를 3학년 때 중퇴하고 농가에 하인으로 봉사했지만, 야뇨증 때문에 미움을 받아 쫓겨나 1년 동안 10번 이상 봉사처를 바꿔야 했다.[4] 1945년 19세에 징병되어 히로사키의 보병 제31연대에 입대했지만, 야뇨증 때문에 불과 2개월 만에 제대했다. 야뇨증은 훗날 사형 집행 직전까지 구리타를 괴롭혔고, 심신을 갉아먹었다.2. 2. 성인이 된 후
1945년 19세에 징병되어 히로사키의 보병 제31연대에 입대했지만, 야뇨증 때문에 불과 2개월 만에 제대했다.[4] 종전 후에는 홋카이도의 미바이 탄광에서 탄광부가 되어 거친 남자들과 함께 가혹한 육체 노동을 했다. 이로 인해 이전까지 허약하고 내성적이었던 구리타는 거친 성격으로 변했다.1948년(쇼와 23년)부터는 암거래 브로커로 생계를 유지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4]
3. 살해 실적
구리타 겐조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총 8명을 살해했다. 그는 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며, 살해 후 시신을 유기하거나 시간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다.[4]
발생년도 | 피해자 | 범행 내용 |
---|---|---|
1948년 | 지인 2명 | 살해[4] |
1951년 | 24세 여성과 아기 | 살해 후 여성 시신을 시간[4] |
1951년 | 29세 여성, 5세 아들, 7세 딸, 2세 딸 | 가쓰우라시 오센코로가시 절벽에서 밀어 살해. 7세 딸은 생존.[4][5] |
1952년 | 63세 여성, 24세 조카딸 | 살해 후 24세 여성 시신을 시간[4] |
3. 1. 1948년 살인 사건
1948년 2월, 구리타는 시즈오카현에서 삼각 관계에 얽혀 교제하던 여성 2명을 살해했다고 진술했으나, 입건된 것은 1명뿐이었다.[4]3. 2. 1951년 살인 사건
1951년 8월 8일, 구리타 겐조는 도치기현에서 24세 여성을 강간하고 교살했으며, 시신을 시간했다.[4] 3개월 뒤인 10월 11일에는 가쓰우라시에 있는 오센코로가시(おせんころがし|오센코로가시일본어) 절벽에서 29세 여성과 그 자녀 3명을 살해했다.[4] 구리타는 여성을 성폭행한 뒤, 4명 모두를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고, 절벽 중간에 걸쳐 있던 피해자들을 일일이 찾아 돌로 찍어 죽였다.[4] 이 중 7세 장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5]3. 3. 1952년 살인 사건
1952년 1월 13일, 구리타 겐조는 지바현에서 63세 여성과 그녀의 24세 조카딸을 살해하고, 조카딸을 시간했다.[4] 범행 현장에서 경찰은 그의 지문을 발견했다.[4]4. 체포와 처벌
1952년 1월 16일, 마지막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으로 구리타 겐조가 체포되었다.[4] 이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10월 14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4]
4. 1. 재판 과정
1952년 8월 12일, 지바 지방법원은 1월의 사건에 대해 사형을 판결했고, 우쓰노미야 지방법원도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 역시 사형을 판결했다.[4] 1953년 12월 21일 구리타는 항소했지만 1954년 10월 21일에 항소를 취하했다.[4] 그는 정신 불안정으로 인해 항소를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신경증 환자로 자해를 시도하는 등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다.[4]구리타 겐조는 1심에서 2차례 사형 판결을 받은 최초의 사례였으며, 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사건 113호 (가쓰다 기요타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재판례로서는 2차례 사형 선고를 받은 유일한 예였다.[6] 판결 후 구리타는 쇠약해져서 재심을 반복했다.[6]
1956년 일본 국회에서 사형 존폐 논쟁이 벌어졌을 때, 사형 존치론자들은 구리타를 "흉악무비한 특수한 극악인"으로 언급하기도 했다.[7]
4. 2. 사형 집행
1959년 10월 14일, 미야기 형무소에서 구리타 겐조의 사형이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6] 그는 죽기 직전까지 야뇨증에 시달렸으며, 이는 그의 심신을 갉아먹는 요인 중 하나였다.[4]5. 사건의 영향
1956년 일본 국회에서 사형 제도 존폐 논쟁이 벌어졌을 때, 사형 존치론자들은 구리타 겐조를 '흉악무도한 특수 극악인'의 예시로 언급하며 사형 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7] 이는 대한민국에서도 사형 제도 존폐 논쟁 시 흉악 범죄자의 사례가 언급되는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구리타는 "참회록"이라는 수기를 썼으나, 판매되지는 않았다.
참조
[1]
웹사이트
He Murdered and Raped Women's Corpses Then Threw Their Children Off a Cliff
https://s-a-ozbourne[...]
2022-05-05
[2]
웹사이트
第024回国会 法務委員会公聴会 第2号
http://kokkai.ndl.go[...]
National Diet Library
2008-01-09
[3]
문서
「おせんころがし」は勝浦市から鴨川市にまたがる約4キロメートルの海岸の通称である。「おせんころがし」の碑が勝浦市にあるため、しばしば誤解を生むが、本件の発生現場は小湊町(現在の鴨川市)である。
[4]
서적
おせんころがし殺人事件
千葉日報社
1982
[5]
뉴스
初対面の母子4人を崖下へ投げ落とす「凶行」…“特殊の極悪人”と名指しされた男が起こした凶悪事件
https://gendai.media[...]
現代ビジネス
2021-11-05
[6]
문서
1965年3月には前橋地方裁判所|前橋地裁、1976年2月には松山地方裁判所|松山地裁で、一人の被告人に対し、二つの死刑判決が宣告された例があるが、控訴審で前者は懲役#無期懲役に、後者は一つの殺人について無期懲役に減軽されている。松山の例は残る一つの殺人については死刑が確定し、すでに執行されている。
[7]
웹사이트
第024回国会 法務委員会公聴会 第2号
https://kokkai.nd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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