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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글로크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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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로스글로크너산은 오스트리아 케른텐주와 티롤주 경계에 위치한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로스글로크너"라는 명칭은 1561년 지도에 처음 등장했으며, 지리적으로는 글로크너 그룹의 일부를 형성한다. 1799년 첫 등반 이후 관광 명소로 발전했으며, 그로스글로크너 고산 도로가 건설되어 접근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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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글로크너산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산 정보
이름그로스글로크너산
독일어 이름Großglockner
해발고도3,798m
산맥호에 타우에른 산맥
위치케른텐주 & 동티롤주, 오스트리아
좌표47°04′29.52″N 12°41′42.9″E
첫 등정1800년 7월 28일, 제프와 마르틴 클로츠(?), 마르틴 라이허 외 2명
쉬운 등반 경로PD, 빙하 35°, UIAA II
돌출도2423m
돌출도 순위알프스산맥 내 2위
기타 등재국가 최고점
울트라
알프스산맥 3000m 이상 산
추가 정보

2. 명칭

"그로스글로크너(Glocknerer)"라는 이름은 1561년 출신의 지도 제작자 볼프강 라치우스가 제작한 지도에 처음 등장한다. "글로거(Glogger)"라는 명칭은 1583년 티롤의 칼스 사법 지구에 대한 설명에 언급되었으며, 당시에는 알프스 산맥 주맥의 남쪽 전체 산등성이를 지칭했다.[1] 1760년대에 발간된 "아틀라스 티롤렌시스(Atlas Tyrolensis)"에는 "글로크너 산(Glockner Berg)"이 등재되어 있으며, "그로스(Gross-)"("위대한"이라는 뜻) 접두사는 1799년 첫 탐험 이전에는 언급되지 않았다.[1]

벨사자 하케 (1735–1815)에 따르면 "글로크너(Glockner)"는 산의 특징적인 모양을 나타내는 독일어 "글로케(Glocke)"("")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 또한, 슬로베니아어 이름 "벨리키 클레크(Veliki Klek)"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알프스 슬라브어 단어 "클렉(Klek)"("산")의 독일어화된 버전일 수도 있다.[1]

3. 지리

그로스글로크너와 주변 지역


그로스글로크너산은 케른텐 주와 티롤 주(동티롤)의 경계에 있으며, 아이스쾨겔레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나와 글로크너 그룹의 ''글로크너캄'' 산등성이를 이룬다. 칼스 암 그로스글로크너 시와 하일리겐블루트 시 사이의 경계를 이루며, 칼스 암 그로스글로크너는 남서쪽 약 8km, 하일리겐블루트는 북동쪽 약 12km 지점에 있다. 이 경계는 티롤 쪽의 칼스 계곡과 케른텐 쪽의 묄 계곡과 파스테르체 빙하 사이의 분수계이기도 하다.[1][2] 산 주변은 1986년부터 호흐 타우에른 국립공원 내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3]

그로스글로크너산은 오르틀러 산맥 동쪽에 있는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몽블랑 다음으로 지형적 고립과 지형적 두드러짐이 크다.[4] 정상에서 보이는 경치는 동알프스에서 가장 멀리 보이며, 220km (최대 240km)까지 펼쳐진다. 지구 표면 150000km2 이상을 조망할 수 있으며, 여러 산맥과 평원까지 이어진다.[5][6]

남서쪽에서 본 그로스글로크너산: 1. 글로크너반, 2. 운터레 글로크너샤르테, 3. 토이펠스혼(왼쪽)과 글로크너혼(오른쪽), 4. 테이슈니츠키스, 5. 그로스글로크너산, 6. 클라인글로크너산, 7. 슈틀그라트, 8. 쾨드니츠키스, 9. 아들러스루에


북동쪽에서 본 그로스글로크너산: 1. 아들러스루에, 2. 호프만스키스, 3. 클라인글로크너키스, 4. 글로크너라이틀, 5. 팔라비치니린네, 6. 클라인글로크너산, 7. 그로스글로크너산, 8. 글로크너키스, 9. 베르글러린네, 10. 글로크너혼(왼쪽)과 토이펠스혼(오른쪽), 11. 운터레 글로크너샤르테, 12. 글로크너반


그로스글로크너산의 암석 봉우리는 서부 알프스의 산들과 비교되며, 클라인글로크너산과 함께 쌍봉을 이룬다. 클라인글로크너산은 부봉 또는 별도의 주봉으로 간주될 수 있다. 두 봉우리 사이의 ''오베레 글로크너샤르테''는 3766m 지점에 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안부이다. 이곳에서 ''팔라비치니린네''라고 불리는 설사면이 ''글로크너키스'' 빙하로 이어진다. 북동쪽으로 뻗은 이 설사면은 북동면과 북면에 접해 있다. 북서 능선은 글로크너혼, 토이펠스혼을 지나 ''운터레 글로크너샤르테''에 도달하며, 글로크너반과 연결된다.

''슈틀그라트''라는 능선이 남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서면과 ''테이슈니츠키스'' 빙하를 남면과 ''쾨드니츠키스'' 빙하에서 분리한다. ''필락스린네'' 설사면은 남면을 가로지르며, 남면 대부분은 이 설사면 동쪽에 있다. ''글로크너라이틀''은 정상 아래까지 빙하로 덮여 ''클라인글로크너키스''와 ''호프만스키스''로 이어져 파스테르체에 도달한다.

3. 1. 위치 및 주변 지역



그로스글로크너산은 오스트리아의 케른텐 주와 티롤 주(동티롤)의 경계에 있다. 이 봉우리는 아이스쾨겔레에서 알프스 산맥의 주맥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나와 동티롤의 칼스 암 그로스글로크너 시와 케른텐의 하일리겐블루트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글로크너 그룹의 ''글로크너캄'' 산등성이의 일부를 이룬다. 칼스 암 그로스글로크너는 남서쪽 약 8km 지점에 해발 1324m에 있으며, 하일리겐블루트는 북동쪽 약 12km 지점에 해발 1291m에 있다. 이 경계는 또한 티롤 쪽의 칼스 계곡과 그 테이슈니츠, 쾨드니츠 측면 계곡과 케른텐 쪽의 묄 계곡과 파스테르체 빙하 사이의 분수계이기도 하다.[1][2] 이 산 주변 지역은 1986년부터 호흐 타우에른 국립공원 내의 그로스글로크너-파스테르체 특별 보호 구역의 일부를 형성해 왔다.[3]

그로스글로크너산은 약 175km 떨어진 오르틀러 산맥 동쪽에 있는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몽블랑 다음으로 알프스 전체에서 두 번째로 큰 지형적 고립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2424m에 달하는 지형적 두드러짐도 알프스 전체에서 몽블랑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다(두드러짐에 따른 알프스 봉우리 목록 참조). 이는 알프스에서 가장 독립적인 봉우리 중 하나로 만든다.[4] 그로스글로크너산 정상에서 보이는 경치는 동알프스에서 가장 멀리 보이는 경치 중 하나이다. 대기 굴절을 고려하면 220km 또는 거의 240km까지 펼쳐진다. 지구 표면 150000km2 이상을 조망할 수 있으며, 북서쪽의 일러-레흐 고원, 북쪽의 레겐스부르크와 보헤미안 숲 봉우리, 서쪽의 오르틀러, 남쪽의 파단 평원, 동쪽의 트리글라프와 토테스 게비르게 산맥까지 이어진다.[5][6]

3. 2. 지형 및 조망



그로스글로크너산은 오스트리아의 케른텐 주와 티롤 주(동티롤)의 경계에 있다. 이 봉우리는 아이스쾨겔레에서 알프스 산맥의 주맥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나와 동티롤의 칼스 암 그로스글로크너 시와 케른텐의 하일리겐블루트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글로크너 그룹의 ''글로크너캄'' 산등성이의 일부를 이룬다. 칼스 암 그로스글로크너는 남서쪽 약 8km 지점에 해발 1324m에 있으며, 하일리겐블루트는 북동쪽 약 12km 지점에 해발 1291m에 있다. 이 경계는 티롤 쪽의 칼스 계곡과 그 테이슈니츠, 쾨드니츠 측면 계곡과 케른텐 쪽의 묄 계곡과 파스테르체 빙하 사이의 분수계이기도 하다.[1][2] 이 산 주변 지역은 1986년부터 호흐 타우에른 국립공원 내의 그로스글로크너-파스테르체 특별 보호 구역의 일부를 형성해 왔다.[3]

그로스글로크너산은 약 175km 떨어진 오르틀러 산맥 동쪽에 있는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몽블랑 다음으로 알프스 전체에서 두 번째로 큰 지형적 고립을 가지고 있다. 2424m에 달하는 지형적 두드러짐도 알프스 전체에서 몽블랑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다(두드러짐에 따른 알프스 봉우리 목록 참조). 이는 알프스에서 가장 독립적인 봉우리 중 하나로 만든다.[4] 그로스글로크너산 정상에서 보이는 경치는 동알프스에서 가장 멀리 보이는 경치 중 하나이다. 대기 굴절을 고려하면 220km 또는 거의 240km까지 펼쳐진다. 지구 표면 150000km2 이상을 조망할 수 있으며, 북서쪽의 일러-레흐 고원, 북쪽의 레겐스부르크와 보헤미안 숲 봉우리, 서쪽의 오르틀러, 남쪽의 파단 평원, 동쪽의 트리글라프와 토테스 게비르게 산맥까지 이어진다.[5][6]

그로스글로크너산의 암석 봉우리는 높고 빙하가 뒤덮인 모습 때문에 종종 서부 알프스의 산들과 비교된다. 남동쪽에 있는 클라인글로크너산과 함께 독특한 쌍봉을 형성한다. 클라인글로크너산이 부봉인지 아니면 별도의 주봉인지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의견이 다르다. 낮은 지형적 두드러짐과 고립성, 등반 역사에서의 밀접한 관련성으로 인해 역사적인 간행물에서는 그로스글로크너산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별도의 등반로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등산 문헌에서는 독립적인 봉우리로 간주된다.

두 봉우리 사이의 ''오베레 글로크너샤르테''는 3766m 지점에 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안부이다. 이곳에서 최대 55° 경사, 고도 600m에 이르는 설사면이 ''글로크너키스'' 빙하로 이어진다. 이 설사면은 오스트리아 등산가 알프레트 폰 팔라비치니(1848–1886)의 이름을 따서 ''팔라비치니린네''라고 불린다. 이 설사면은 북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그로스글로크너산의 북동면과 북면에 접해 있다. 후자의 면들은 북서 능선에 의해 경계가 지어지는데, 이는 주 글로크너 능선의 일부이며, ''그뢰거슈나이트'', 3660m를 거쳐 글로크너혼, 3680m과 토이펠스혼( 3677m)의 능선 고도를 지나 ''운터레 글로크너샤르테''(3598m)에 도달하며, 이곳은 3721m 높이의 글로크너반과 연결된다.

프라하 출신 등산가 요한 슈틀(1839–1925)의 이름을 딴 ''슈틀그라트''라는 눈에 띄는 능선이 그로스글로크너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다. 이 능선은 그 연장선인 ''루이젠그라트''와 함께 서면과 그 기저에 있는 ''테이슈니츠키스'' 빙하를 남면과 그 ''쾨드니츠키스'' 빙하에서 분리한다. ''필락스린네''라고 알려진 설사면은 오베레 글로크너샤르테 아래의 남면을 가로지른다. 남면의 대부분은 클라인글로크너산 아래의 이 설사면 동쪽에 있다. 클라인글로크너산의 동쪽 면인 ''글로크너라이틀''은 정상 바로 아래까지 빙하로 덮여 있으며, ''클라인글로크너키스''와 ''호프만스키스''로 이어져 파스테르체에 도달한다.

3. 3. 봉우리와 능선

그로스글로크너산의 암석 봉우리는 높고 빙하가 뒤덮인 모습 때문에 종종 서부 알프스의 산들과 비교된다. 남동쪽에 있는 클라인글로크너산과 함께 독특한 쌍봉을 형성한다. 클라인글로크너산이 부봉인지 아니면 별도의 주봉인지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의견이 다르다. 낮은 지형적 두드러짐과 고립성, 그리고 등반 역사에서의 밀접한 관련성으로 인해 역사적인 간행물에서는 그로스글로크너산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별도의 등반로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등산 문헌에서는 독립적인 봉우리로 간주된다.

두 봉우리 사이의 ''오베레 글로크너샤르테''는 3766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안부이다. 이곳에서 최대 55° 경사, 고도 600m에 이르는 설사면이 ''글로크너키스'' 빙하로 이어진다. 이 설사면은 오스트리아 등산가 알프레트 폰 팔라비치니(1848–1886)의 이름을 따서 ''팔라비치니린네''라고 불린다. 이 설사면은 북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그로스글로크너산의 북동면과 북면에 접해 있다. 후자의 면들은 북서 능선에 의해 경계가 지어지는데, 이는 주 글로크너 능선의 일부이며, ''그뢰거슈나이트'', 3660m를 거쳐 글로크너혼, 3680m과 토이펠스혼, 3677m의 능선 고도를 지나 ''운터레 글로크너샤르테'', 3598m에 도달하며, 이곳은 3721m 높이의 글로크너반과 연결된다.

프라하 출신 등산가 요한 슈틀(1839–1925)의 이름을 딴 ''슈틀그라트''라는 눈에 띄는 능선이 그로스글로크너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다. 이 능선은 그 연장선인 ''루이젠그라트''와 함께 서면과 그 기저에 있는 ''테이슈니츠키스'' 빙하를 남면과 그 ''쾨드니츠키스'' 빙하에서 분리한다. ''필락스린네''라고 알려진 설사면은 오베레 글로크너샤르테 아래의 남면을 가로지른다. 남면의 대부분은 클라인글로크너산 아래의 이 설사면 동쪽에 위치해 있다. 클라인글로크너산의 동쪽 면인 ''글로크너라이틀''은 정상 바로 아래까지 빙하로 덮여 있으며, ''클라인글로크너키스''와 ''호프만스키스''로 이어져 파스테르체에 도달한다.

4. 역사

1782년 벨사자 하케가 제작한 판화 ''클로크너''


등반 역사는 프랑스 태생의 자연 과학자 벨사자 하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1773년부터 류블랴나 아카데미해부학 교수로 재직했다. 1779년부터 1781년까지 동알프스를 여행하며 1783년에 여행기를 출판하여 '글로크너' 산을 묘사하고 아직 등반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산의 높이를 3793m로 추정했으며, 그로스글로크너와 파스테르체를 묘사한 판화를 남겼는데, 이는 이 산의 최초의 알려진 묘사였다.

4. 1. 초기 탐험

Hacquet의 저서와 1786년 몽블랑 초등정에 영감을 받은 구르크의 영주-주교 잘름 백작 프란츠 자비에르(1749–1822)는 그의 대리 목사인 지기스문트 에른스트 호엔바르트(1745–1825)와 남작 프란츠 자비에르 폰 불펜(1728–1805)과 함께 그로스글로크너 원정을 시작했다.[1] 당시 사람들은 빙하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로스글로크너의 얼음이 가장 적은 쪽인 라이터탈 계곡을 통해 등반하기 위해 하일리겐블루트에서 두 명의 농부를 등산 가이드로 고용하여 초탐사를 했다.[1] 이 용감한 남성들은 기록상 "글로크너"라고 불렸으며, 그들이 지시받은 것 이상을 수행했고, 아마도 1799년 7월 23일에 클라인글로크너 정상에 도달했다.[1]

한 달 후, 주교의 원정이 시작되었다.[1] 산장(첫 번째 잘름 산장)이 건설되었고, 주교가 말을 타고 산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라이터탈 계곡의 길이 정비되었다.[1] 잘름, 호엔바르트, 불펜을 포함한 30명이 원정에 참여했다.[1] 그들은 악천후로 고생했고,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1799년 8월 25일에 호엔바르트와 "글로크너" 두 명을 포함한 적어도 네 명의 다른 사람들이 다시 클라인글로크너에 도달하여 첫 번째 정상 십자가 중 하나를 설치했다(교회 원정의 주요 목표 중 하나).[1] 호엔바르트의 보고서에는 그들이 가장 높은 지점을 밟지 않았다는 점이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살름 주교(3454m의 ''아들러스루헤'' 바위에 도달함)는 이 사실을 알았다.[1] 불만을 품은 그는 다음 해에 더 큰 원정을 초대했다.[1]

1800년 7월 28일, 62명의 사람들이 다시 라이터탈 계곡으로 출발했는데, 여기에는 교육자 프란츠 미하엘 피어탈러와 식물학자 다비트 하인리히 호페가 포함되었다.[1] 네 명의 농부와 목수("글로크너"와 다른 두 명은 알려지지 않음)는 눈길을 냈고, 글로크너라이틀 끝까지 더 가파른 구간에 고정 로프를 설치했으며, 호엔바르테 산장이라는 두 번째 피난처를 건설했다.[1] 선발대는 클라인글로크너 봉우리에 도달했지만, 델라흐 임 드라아우탈의 프란츠 요제프 호라쉬(오라쉬) 신부가 쓴 원정 기록에 따르면 네 명의 가이드와 랑거스도르프 교구의 지역 신부인 마티아스 하우첸도르퍼만이 ''오베레 글로크너샤르테''를 건너 그로스글로크너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1] 하우첸도르퍼는 이 단계에 도전하도록 설득해야 했고, 미리 종부 성사를 집행했다.[1]

그로스글로크너, 에드워드 테오도르 컴턴의 1918년 그림


두 명의 "글로크너"는 보통 요제프(''제프'')와 마르틴 클로츠 형제로 확인되지만, 이 성은 하일리겐블루트 교구 기록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1] 1802년 두 번째 그로스글로크너 원정의 일원으로 세프 호이젠이라는 지역 농부가 문서로 확인되었고, 측량 기사인 울리히 시에그는 마르틴 라이허를 "글로크너" 가이드로 언급했다.[1] 농부들과 원정대의 다른 여러 구성원들(그중에는 시에그와 그의 젊은 견습생인 발렌틴 스타니치가 있었는데, 그는 몇 주 후에 처음으로 바츠만 산에 올랐다)은 다음 날 다시 등반하여 마침내 정상 십자가와 기압계를 그로스글로크너 정상에 설치했다.[1]

4. 2. 초등정 (1800년)

몽블랑의 초등정과 하케(Hacquet)의 저서에 영감을 받은 구르크의 주교이자 잘름 백작인 프란츠 자비에르(1749–1822)는 1799년 그의 대리 목사인 지기스문트 에른스트 호엔바르트(1745–1825)와 남작 프란츠 자비에르 폰 불펜(1728–1805)과 함께 그로스글로크너 원정을 시작했다.[1] 그들은 하일리겐블루트에서 두 명의 농부를 등산 가이드로 고용하여 라이터탈 계곡을 통해 등반을 시도했고, 이들은 1799년 7월 23일 클라인글로크너 정상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한 달 후, 주교의 원정이 시작되어 산장(첫 번째 잘름 산장)이 건설되었고, 라이터탈 계곡의 길이 정비되었다.[1] 잘름, 호엔바르트, 불펜을 포함한 30명이 원정에 참여했지만, 악천후로 인해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1] 그러나 1799년 8월 25일, 호엔바르트와 두 명의 농부를 포함한 최소 네 명이 클라인글로크너에 도달하여 첫 번째 정상 십자가 중 하나를 설치했다.[1] 살름 주교는 3454m의 ''아들러스루헤'' 바위에 도달했다.[1]

1800년 7월 28일, 62명의 사람들이 다시 라이터탈 계곡으로 출발했는데, 여기에는 교육자 프란츠 미하엘 피어탈러와 식물학자 다비트 하인리히 호페가 포함되었다.[1] 네 명의 농부와 목수가 눈길을 내고 고정 로프를 설치했으며, 호엔바르테 산장이라는 두 번째 피난처를 건설했다.[1] 델라흐 임 드라아우탈의 신부 프란츠 요제프 호라쉬(오라쉬)의 기록에 따르면, 네 명의 가이드와 랑거스도르프 교구의 신부인 마티아스 하우첸도르퍼만이 ''오베레 글로크너샤르테''를 건너 그로스글로크너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1] 하우첸도르퍼는 등반 전에 미리 종부 성사를 받았다.[1]

두 명의 "글로크너"는 보통 요제프(''제프'')와 마르틴 클로츠 형제로 알려져 있지만, 이 성은 하일리겐블루트 교구 기록에 없다.[1] 1802년 두 번째 그로스글로크너 원정 때 세프 호이젠이라는 농부가, 측량 기사인 울리히 시에그는 마르틴 라이허를 "글로크너" 가이드로 언급했다.[1] 농부들과 원정대의 다른 여러 구성원들은 다음 날 다시 등반하여 정상 십자가와 기압계를 그로스글로크너 정상에 설치했다.[1]

4. 3. 19세기 이후 등반사

1802년 살름 주교는 두 번 더 등반을 했고(호헨바르트가 정상에 도달), 1806년에도 등반을 시도했지만, 그는 결국 '아들러스루에' 바위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했다. 그로스글로크너 등반은 식물학자 요제프 아우구스트 슐테스에 의해 묘사되었는데, 그는 1802년 아포니 백작과 함께 산괴를 탐험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더 이상의 등반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산장은 쇠퇴하여 현지인들에게 약탈당했다. 그러나 이어진 ''전(前) 3월 혁명'' 시대에 이 산은 헤르만과 아돌프 슐라긴트바이트와 같은 등산가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고, 모두 최초 등반 경로를 따랐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발전하는 알프스 관광이 하일리겐블루트 지역의 전통적인 농업 경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따라서 칼스 사람들은 서쪽에서 직접적인 등반로를 놓으려고 했지만, 율리우스 폰 파이어가 1863년 '글뢰크너라이틀'과 '쾨드니츠키스' 사이의 능선을 탐험할 때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요한 슈튀들은 이듬해 남서쪽 능선을 따라 비아 페라타를 건설했고, 1868년에는 그 기슭에 '슈튀들휘테'를 세웠다. 이미 1869년에 대부분의 정상 원정대는 칼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로스글로크너의 첫 겨울 등반은 1875년 1월 2일 알파인 클럽 회원인 윌리엄 아돌프 베일리 그로먼에 의해 이루어졌다.[7] 1876년 팔라비치니 백작과 그의 안내자 한스 트리부서는 가파른 빙하로 덮인 북동쪽 벽을 따라 첫 원정을 시작하여, 23년 동안 반복되지 않은 아이스 클라이밍의 걸작으로 '팔라비치니린네'에 2,500개의 계단을 새겼다.

그로스글로크너 정상 십자가, 2006년 모습


1879년 팔라비치니 백작은 은혼식을 기념하여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를 위한 새로운 철제 정상 십자가를 헌정했다. 두 사람은 1865년 하일리겐블루트를 방문하여 현재의 '프란츠-요제프스-회에' 전망대까지 걸어갔다. 십자가는 1880년 10월 2일에 설치되었다. 팔라비치니는 또한 오스트리아 대공 요한의 산장을 살름 주교의 옛 '아들러스루에' 휴식처에 세웠고, 오늘날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산장이다. 오스트리아 알프스 클럽은 하일리겐블루트에서 출발하는 알프스 루트를 따라 새로운 '살름휘테'와 '글로크너하우스'를 건설했다.

1909년에 스키를 이용한 첫 등반이 이루어졌고, 산괴 일주는 곧 인기 있는 스키 등산 투어가 되었다. 그로스글로크너는 남 티롤의 오르틀러 지역이 1919년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에 양도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었고, 이로 인해 관광 명소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5. 그로스글로크너 고산 도로

하일리겐블루트에서 브루크까지 이어지는 고산 도로(그로스글로크너 고산 도로)와 프란츠요제프스회 전망대로 이어지는 지선은 대량 관광을 촉진시켰다. 이 도로는 잘츠부르크에 위치하며, 1930년에서 1935년 사이 프란츠 발락이 설계한 계획에 따라 알프스 분수령의 역사적인 호흐토르 산길을 가로질러 건설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고갯길인 이 도로는 2576m에 이르며, 매년 약 27만 대의 차량과 9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다. 개통 이후 약 5천만 명이 방문하여 쉔브룬 궁전 다음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이 도로는 역사적인 차량 산악 경주로도 유명하다.

참조

[1] 서적 Alpenvereinsführer
[2] 간행물 Der Tiroler Grenzberg Großglockner in alten Karten und Geschichtsquellen : Zum 175-jährigen Jubiläum der Erstbesteigung des Großglockners am 28. Juli 1800 Tiroler Landesarchiv 1978
[3] 웹사이트 Das Sonderschutzgebiet "Großglockner-Pasterze" http://www.alpenvere[...] Österreichischer Alpenverein 2009-03-09
[4] 웹사이트 Core Europe Ultras - Peaks with 1500 meters of Prominence http://www.peakbagge[...] peakbagger.com 2009-03-15
[5] 웹사이트 Großglockner, 3798 m http://www.rother.de[...] Alpenvereinsführer 2009-03-02
[6] 서적 Das Glocknerbuch
[7] 논문 Ascent of the Gross Glockner 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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