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일
1. 개요
김만일은 김일성의 아들이자 김정일의 동생으로, 1944년에 태어나 1947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북한 측 기록과 러시아 자료 간에 상반된 주장이 존재하며, 김정일이 연못에서 김만일을 익사하게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김만일의 사망과 관련하여, 김정일의 트라우마, 김정숙의 사산, 김정일의 이름 변경 등 다양한 관련 정보가 전해진다. 또한, 김만일의 이름이 김만일이 아닌 김평일일 가능성, 그리고 그가 한국식 이름 없이 '슈라'로 불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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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김씨 -
김동인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감자'와 같은 작품을 통해 사실주의를 개척하고, 《창조》를 창간했으며, 사후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전주 김씨 -
김설송
김설송은 김정일과 김영숙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김정일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몰타와 유럽에서 유학하며 외국어를 배웠다. -
1947년 사망 -
홍사용
홍사용은 노작, 소아, 백우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민족주의적 낭만파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일제강점기 친일 활동을 하지 않았고, 휘문의숙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 문예지 창간, 극단 활동, 희곡 창작 등의 활동을 했다. -
1947년 사망 -
한상룡
이완용의 외조카이자 친일파 집안 출신인 한상룡은 한성은행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조선총독부의 지원하에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다. -
1944년 출생 -
릴 테르셀리우스
릴 테르셀리우스는 위키백과 문서에서 관련 문서와 추가 자료를 제시하는 데 사용되는 구성 요소이다. -
1944년 출생 -
펠레티 세벨레
펠레티 세벨레는 통가의 정치인으로, 캔터베리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통가 입법회 의원, 노동상공부 장관, 총리 권한대행 및 총리를 역임했으며, 종신 귀족 작위를 받았다.
2. 사망 경위 및 의혹
김만일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 북한 측 기록 ===
김만일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서로 엇갈린다. 북한 당국은 1946년 또는 1948년 여름, 김만일이 평양의 연못에서 형 김정일과 놀다가 우연히 익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김만일은 뱌츠코예(Vyatskoye)의 우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북한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만일의 사망 후 김정일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만일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뱌츠코예에 있다.
김만일은 1947년 여름, 평양 김일성 관저에 있던 연못에서 여섯 살 형 김정일과 놀다가 익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에서 조선으로 귀환한 김일성 가족은 평양에 있는 관저에서 살았다. 이 관저에는 폭 4미터 정도의 연못이 있었고, 여름에는 어머니 김정숙이 연못을 이용해 만든 수영장에서 노는 일이 많았다. 리동화의 아들 세르게이 리(카자흐스탄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저녁에 김일성이 리동화에게 "슈라가 연못에서 빠졌으니 급히 관저로 와 달라"는 전화를 했고, 1시간 후 경비병에 의해 김만일이 발견되었지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김일성이 김정일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동생이 연못에 빠졌을 때 김정일은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김정일이 실수를 하면 김일성은 "그래서 동생을 죽게 한 것이 아니냐"고 야단치는 일이 있었다고 하며, 이는 김정일의 인격 형성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 소련 측 기록 ===
김만일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서로 엇갈린다. 북한 당국은 1946년 또는 1948년 여름, 김만일이 평양의 연못에서 형과 놀다가 우연히 익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김만일은 뱌츠코예(Vyatskoye)의 우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북한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만일의 사망 후 김정일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만일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뱌츠코예에 있다. 그의 사망 1년 후인 1949년, 그의 어머니 김정숙은 사산으로 사망했다.
김만일은 1947년 여름, 평양 김일성 관저에 있던 연못에서 여섯 살 형 김정일과 놀다가 익사했다. 리동화의 아들 세르게이 리(카자흐스탄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저녁에 김일성이 리동화에게 "슈라가 연못에서 빠졌으니 급히 관저로 와 달라"는 전화를 해서 급히 갔다고 한다. 슈라는 1시간 후 경비병에 의해 발견되었고, 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연못에서 건져 올려졌지만 이미 사망했다.
정원에는 유라와 슈라만 있었고, 김일성이 김정일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동생이 연못에서 빠졌을 때 정일은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김정일이 무슨 실수를 하면, 아버지 김일성은 "그래서 동생을 죽게 한 것이 아니냐"고 야단치는 일이 있었다. 김정일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한편,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 김정일 익사설 ===
일각에서는 김만일이 김일성 관저 연못에서 놀고 있는데 김정일이 김만일의 등을 떠밀었고 그 때문에 김만일이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같은 동생이라 하더라도 김경희는 여자였기 때문에 일단 후계선상에서 논외로 간주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꼈고 반면 김만일은 남자였기 때문에 김일성의 후계자 계승을 놓고 경쟁해야 하므로 김정일이 김만일을 죽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김정일은 고작 7살에 불과했으며 김만일 역시 4살에 불과해 후계 문제를 고려할 정도의 나이가 되지 못하므로 근거없는 주장이다.
김만일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상충된다. 북한 당국은 1946년 또는 1948년 여름, 그가 평양의 연못에서 형과 놀다가 우연히 익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뱌츠코예(Vyatskoye)의 우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구 소련에서 조선으로 귀환한 김일성 가족은 종전 당시 일본인 자산가가 남긴 반(半)일본식 저택에서 살았다. 평양에 있는 그 관저는 온돌방 하나, 침실 하나, 서재 하나, 다다미방 하나로 결코 호화롭지 않은 민가였지만, 정원이 넓고 폭 4미터 정도의 연못도 있었다. 여름에는 어머니 김정숙이 연못을 이용해 만든 수영장에서 노는 일이 많았다.
김만일은 1947년 여름, 평양 김일성 관저에 있던 연못에서 여섯 살 형 정일과 놀다가 익사했다. 리동화의 아들 세르게이 리(카자흐스탄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저녁에 김일성이 리동화에게 "슈라가 연못에서 빠졌으니 급히 관저로 와 달라"는 전화를 해서 급히 갔다고 한다. 슈라는 1시간 후 경비병에 의해 발견되었고, 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연못에서 건져 올려졌지만 이미 사망했다.
정원에는 유라와 슈라만 있었고, 김일성이 김정일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동생이 연못에서 빠졌을 때 정일은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김정일이 무슨 실수를 하면, 아버지 김일성은 "그래서 동생을 죽게 한 것이 아니냐"고 야단치는 일이 있었다. 김정일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한편,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친아버지에게 마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한 일이 그의 인격 형성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또한, 당시 세 살이었던 만일의 죽음은 정일이 여동생 김경희(러시아 이름 「타티아나」)를 극진히 아끼는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북한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만일의 사망 후 김정일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만일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뱌츠코예에 있다. 그의 사망 1년 후인 1949년, 그의 어머니 김정숙은 사산으로 사망했다.
2.1. 북한 측 기록
김만일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서로 엇갈린다. 북한 당국은 1946년 또는 1948년 여름, 김만일이 평양의 연못에서 형 김정일과 놀다가 우연히 익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김만일은 뱌츠코예(Vyatskoye)의 우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북한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만일의 사망 후 김정일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만일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뱌츠코예에 있다.
김만일은 1947년 여름, 평양 김일성 관저에 있던 연못에서 여섯 살 형 김정일과 놀다가 익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에서 조선으로 귀환한 김일성 가족은 평양에 있는 관저에서 살았다. 이 관저에는 폭 4미터 정도의 연못이 있었고, 여름에는 어머니 김정숙이 연못을 이용해 만든 수영장에서 노는 일이 많았다. 리동화의 아들 세르게이 리(카자흐스탄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저녁에 김일성이 리동화에게 "슈라가 연못에서 빠졌으니 급히 관저로 와 달라"는 전화를 했고, 1시간 후 경비병에 의해 김만일이 발견되었지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김일성이 김정일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동생이 연못에 빠졌을 때 김정일은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김정일이 실수를 하면 김일성은 "그래서 동생을 죽게 한 것이 아니냐"고 야단치는 일이 있었다고 하며, 이는 김정일의 인격 형성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2.2. 소련 측 기록
김만일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서로 엇갈린다. 북한 당국은 1946년 또는 1948년 여름, 김만일이 평양의 연못에서 형과 놀다가 우연히 익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김만일은 뱌츠코예(Vyatskoye)의 우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북한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만일의 사망 후 김정일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만일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뱌츠코예에 있다. 그의 사망 1년 후인 1949년, 그의 어머니 김정숙은 사산으로 사망했다.
김만일은 1947년 여름, 평양 김일성 관저에 있던 연못에서 여섯 살 형 김정일과 놀다가 익사했다. 리동화의 아들 세르게이 리(카자흐스탄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저녁에 김일성이 리동화에게 "슈라가 연못에서 빠졌으니 급히 관저로 와 달라"는 전화를 해서 급히 갔다고 한다. 슈라는 1시간 후 경비병에 의해 발견되었고, 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연못에서 건져 올려졌지만 이미 사망했다.
정원에는 유라와 슈라만 있었고, 김일성이 김정일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동생이 연못에서 빠졌을 때 정일은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김정일이 무슨 실수를 하면, 아버지 김일성은 "그래서 동생을 죽게 한 것이 아니냐"고 야단치는 일이 있었다. 김정일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한편,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2.3. 김정일 익사설
일각에서는 김만일이 김일성 관저 연못에서 놀고 있는데 김정일이 김만일의 등을 떠밀었고 그 때문에 김만일이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같은 동생이라 하더라도 김경희는 여자였기 때문에 일단 후계선상에서 논외로 간주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꼈고 반면 김만일은 남자였기 때문에 김일성의 후계자 계승을 놓고 경쟁해야 하므로 김정일이 김만일을 죽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김정일은 고작 7살에 불과했으며 김만일 역시 4살에 불과해 후계 문제를 고려할 정도의 나이가 되지 못하므로 근거없는 주장이다.
김만일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상충된다. 북한 당국은 1946년 또는 1948년 여름, 그가 평양의 연못에서 형과 놀다가 우연히 익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뱌츠코예(Vyatskoye)의 우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구 소련에서 조선으로 귀환한 김일성 가족은 종전 당시 일본인 자산가가 남긴 반(半)일본식 저택에서 살았다. 평양에 있는 그 관저는 온돌방 하나, 침실 하나, 서재 하나, 다다미방 하나로 결코 호화롭지 않은 민가였지만, 정원이 넓고 폭 4미터 정도의 연못도 있었다. 여름에는 어머니 김정숙이 연못을 이용해 만든 수영장에서 노는 일이 많았다.
김만일은 1947년 여름, 평양 김일성 관저에 있던 연못에서 여섯 살 형 정일과 놀다가 익사했다. 리동화의 아들 세르게이 리(카자흐스탄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저녁에 김일성이 리동화에게 "슈라가 연못에서 빠졌으니 급히 관저로 와 달라"는 전화를 해서 급히 갔다고 한다. 슈라는 1시간 후 경비병에 의해 발견되었고, 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연못에서 건져 올려졌지만 이미 사망했다.
정원에는 유라와 슈라만 있었고, 김일성이 김정일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동생이 연못에서 빠졌을 때 정일은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김정일이 무슨 실수를 하면, 아버지 김일성은 "그래서 동생을 죽게 한 것이 아니냐"고 야단치는 일이 있었다. 김정일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한편,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친아버지에게 마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한 일이 그의 인격 형성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또한, 당시 세 살이었던 만일의 죽음은 정일이 여동생 김경희(러시아 이름 「타티아나」)를 극진히 아끼는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북한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만일의 사망 후 김정일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만일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뱌츠코예에 있다. 그의 사망 1년 후인 1949년, 그의 어머니 김정숙은 사산으로 사망했다.
3. 김정일 동생 이름 관련 논란
김정일의 동생 이름이 김만일이 아닌 김평일(金平日)이라는 주장이 있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이었고,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 부여단장이었던 이조린(李兆麟)의 아내 김정순(金貞順, 조선족)의 증언이다. 김정순은 김찬정과의 인터뷰에서 교도여단(제88여단)에서 김정숙이 김정일과 김평일(金平日) 형제를 출산했으며, 평일은 김정숙 귀국 후 사고로 죽었다고 증언했다.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이자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洪淳寬)은 김정숙과 김일성 사이에 세 자녀가 있었고, 두 아들의 이름은 유라와 슈라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 남동생의 아명이 '슈라'였다는 것은 여러 증언에서 확인되지만, 한국 이름이 '평일(平日)'이라는 것은 김정순의 증언뿐이다. 김정일의 남동생은 1944년에 출생했다는데,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이름 '알렉산드르'의 애칭은 슈라이지만, '사샤'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흔히 일찍 죽은 김정일의 동생의 이름이 김만일(金萬日) 또는 김평일(金平日)이었다고 하나, 그는 소련에서 태어날 당시부터 슈라로 불렸으며, 일찍 죽었으므로 한국식 이름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 직후 김일성은 집에 고바야시 카즈코(小林和子) 등 2명의 일본인 여성을 하녀로 두었다. 고바야시는 일본으로 돌아와 1970년에 쓴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글에서 김일성의 두 아들 이름을 유라와 슈라로 칭하고 있다. 당시 이들에게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1950년 6.25 전쟁 중인 1951년 3월 1일에 부산의 국제신보는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의 증언을 보도하는데, 김일성의 자녀로 11세된 아들 김유라와 5세인 딸 김경자가 있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김정일은 한국전 당시까지도 김유라로 불리고 있었으며, 동생 김경희의 처음 이름은 김경자일 가능성이 있다. 1951년까지도 김정일이 소련식 이름 유라로 불리고 있었다면 1947년에 죽은 동생도 죽을 때까지 한국식 이름 없이 슈라로 불렸을 것이다.
김정일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남산고급중학교를 다녔는데, 동창생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의 이름은 '김유라'였다고 하며,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할 때인 1960년 7월에 처음으로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 후 1980년 후계자로 결정될 때 다시 김정일(金正日)로 한자를 고쳤다.
3.1. 김평일(金平日) 이름 주장
김정일의 동생 이름이 김만일이 아닌 김평일(金平日)이라는 주장이 있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이었고,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 부여단장이었던 이조린(李兆麟)의 아내 김정순(金貞順, 조선족)의 증언이다. 김정순은 김찬정과의 인터뷰에서 교도여단(제88여단)에서 김정숙이 김정일과 김평일(金平日) 형제를 출산했으며, 평일은 김정숙 귀국 후 사고로 죽었다고 증언했다.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이자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洪淳寬)은 김정숙과 김일성 사이에 세 자녀가 있었고, 두 아들의 이름은 유라와 슈라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 남동생의 아명이 '슈라'였다는 것은 여러 증언에서 확인되지만, 한국 이름이 '평일(平日)'이라는 것은 김정순의 증언뿐이다. 김정일의 남동생은 1944년에 출생했다는데,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이름 '알렉산드르'의 애칭은 슈라이지만, '사샤'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3.2. 한국식 이름 부재 가능성
흔히 일찍 죽은 김정일의 동생의 이름이 김만일(金萬日) 또는 김평일(金平日)이었다고 하나, 그는 소련에서 태어날 당시부터 슈라로 불렸으며, 일찍 죽었으므로 한국식 이름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 직후 김일성은 집에 고바야시 카즈코(小林和子) 등 2명의 일본인 여성을 하녀로 두었다. 고바야시는 일본으로 돌아와 1970년에 쓴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글에서 김일성의 두 아들 이름을 유라와 슈라로 칭하고 있다. 당시 이들에게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1950년 6.25 전쟁 중인 1951년 3월 1일에 부산의 국제신보는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의 증언을 보도하는데, 김일성의 자녀로 11세된 아들 김유라와 5세인 딸 김경자가 있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김정일은 한국전 당시까지도 김유라로 불리고 있었으며, 동생 김경희의 처음 이름은 김경자일 가능성이 있다. 1951년까지도 김정일이 소련식 이름 유라로 불리고 있었다면 1947년에 죽은 동생도 죽을 때까지 한국식 이름 없이 슈라로 불렸을 것이다.
김정일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남산고급중학교를 다녔는데, 동창생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의 이름은 '김유라'였다고 하며,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할 때인 1960년 7월에 처음으로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 후 1980년 후계자로 결정될 때 다시 김정일(金正日)로 한자를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