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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 (18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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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병태는 1887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료이다. 1910년 일어속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 봉직하여 군서기, 도서기를 거쳐 예천군수, 칠곡군수, 경상북도 내무부 산업과장 등을 역임했다. 만주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등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로 돌아와 평안남도 참여관과 황해도 지사를 지냈다. 1942년 전라북도 지사를 거쳐 1943년 퇴관 후 사망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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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 (1887년)
기본 정보
김병태
김병태
본관안동 김씨
인물 정보
출생1887년 8월 19일
사망1963년 12월 28일 (향년 76세)
직업교육가, 정치인
배우자최정숙
자녀4남 2녀
종교천주교
학력
최종 학력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
경력
1915년사립 휘문의숙 교사
1918년경성고등보통학교 교사
1919년고려대학교 법학과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 강사
1925년고려대학교 상학과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상과 강사
1927년고려대학교 예과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예과 강사
1934년고려대학교 교수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수
1945년 9월 ~ 1946년 10월제2대 고려대학교 총장
1950년제2대 국회의원
주요 활동
사회 활동민주국민당 중앙상무위원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

2. 생애

김병태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군서기로 근무하다가 1916년 도서기로 승진했다. 1921년 6월 13일 경상북도 예천군수로 부임하여[2] 권농, 교육, 위생 등 업무로 호평을 받았다.[3] 1924년 칠곡군수, 1927년 경상북도 내무부 산업과장 겸 상품진열소장을 역임했다. 1930년 4월 상주군수로 부임하였다가, 같은 해 10월 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1937년 평안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지내면서 평안남도 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 평안남도 농회 회장, 평안남도 방공위원회 위원, 평안남도 임금위원회 위원 등 각종 직무를 겸하였다. 1939년 황해도 지사가 되었고, 1941년 3월 만주국 훈4등 경운장(景雲章)을, 같은 해 6월 만주국 대전기념장(大典記念章)을 받았다. 1942년 전라북도 지사를 역임 후 1943년 퇴관하였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과 해외 부문에 수록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조선총독부 관료 경력

1887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1] 출생지와 자세한 학력,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전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910년에 일어속성학교를 졸업했다.[1] 조선총독부에서 군서기로 근무하다가 1916년 도서기로 승진했다.

1921년 6월 13일 경상북도 예천군수로 부임하여[2] 권농, 교육, 위생 등 업무에서 호평을 받았다.[3] 1924년 칠곡군수, 1927년 경상북도 내무부 산업과장 겸 상품진열소장을 역임했다. 1930년 4월 상주군수로 부임하였다가, 같은 해 10월 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2. 2. 만주국 관료 경력

1933년 만주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공서 이사관, 간도성 공서 민정청장, 만주국 지적 정리국 사무관을 역임했다.[1] 人事興信所|인사흥신소일본어 1943년 자료에 따르면, 김병태는 만주국에서 관료로 활동하면서 길림성 공서 이사관, 간도성 공서 민정청장, 만주국 지적정리국 사무관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

2. 3. 조선총독부 복귀 및 도지사 역임

1938년 조선총독부로 돌아와 평안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지냈다.[1] 이때 평안남도 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 평안남도 농회 회장, 평안남도 방공위원회 위원, 평안남도 임금위원회 위원 등 각종 직무를 겸하였다.

1939년 황해도 지사로 임명되었으며,[1] 재임 중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황해도 연맹 회장을 겸직했다.[1] 1940년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했다. 1942년 전라북도 지사로 전임되었으며[1] 1943년 퇴관했다. 퇴관 후 조선석탄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했으나,[1] 같은 해 7월 24일 사망했다.[1]

3. 사후 평가 및 논란

김병태는 사후 친일 행적으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3. 1. 친일반민족행위자 규정

2004년대한민국에서 제정된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1]

3. 2. 친일파 명단 등재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과 해외 부문에 수록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

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병태(金秉泰) http://encykorea.aks[...]
[2] 뉴스 金秉泰(總督府道屬) 任總督府郡守(八等) 慶北醴泉郡在勤을 命함(六月十三日附) 동아일보 1921-06-16
[3] 뉴스 豊泉郡守의 好評 동아일보 1922-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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