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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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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로, 1905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3·1 운동 참여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 일본 유학 후 소련을 거쳐 중국에서 활동했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중국 혁명에도 가담했다. 1938년 캉셩의 지시로 간첩 혐의를 받아 처형되었으나, 1983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고,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을 통해 그의 삶이 널리 알려졌으며,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상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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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은 님 웨일스가 김산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1941년 미국에서 출판한 책으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금기로 한국에 알려지지 못하다가 1984년 번역 출판되어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독립운동가 김산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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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산
본명장지학
다른 이름장지락
출생일1905년 4월 14일
출생지평안북도 용천군, 대한제국
사망일1938년 10월 19일
사망 장소중국 소비에트 공화국 옌안, 산시 성
경력
소속의열단 (1919-1921)
중국 홍군 (1925-1930)
군 복무대한독립군 중위 전역
직업독립운동가
군인

2. 생애

김산은 인동을 본관으로 하며, 1905년 4월 14일 대한제국 평안북도 용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대한제국 간접 지배 직전에 태어나, 어린 시절 기독교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1916년 11살 때 집을 나와 1919년부터 이듬해까지 아나키스트 활동을 전개했다.[6]

이후 3·1 운동을 겪고 일본의 탄압을 경험하면서 혁명 이론을 배우기로 결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가들의 피난처였던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소련에서 새로운 이론을 찾고자 1921년 중국으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의 주선으로 난카이 대학에 입학했으나 중국 학생과의 갈등으로 자퇴했다. 이후 쑨원이 세운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 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6] 1922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 1923년 공산청년동맹에서 활동하며 잡지 《혁명》을 간행했다. 1925년 중국 혁명에 참가했으며, 1926년 조선혁명청년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민족연맹을 결성하였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1931년 4월 풀려났다. 이후 다시 베이징으로 가 사범학교 및 소학교 교사로 생활하다 1933년 4월 중국 경찰에 붙잡혀 1934년 1월 탈출했다. 공산당 북부지구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 항일 군정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1938년, 캉셩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7] 님 웨일스1941년 아리랑을 미국에서 출간했다.[7] 1983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복권되었고,[5]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3]

2. 1. 어린 시절과 독립운동 투신 (1905년 ~ 1920년)

1905년 4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대한제국 간접 지배 직전에 태어났으며,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2]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3일 동안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일본 식민 당국의 잔혹한 탄압을 경험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2]

3·1 운동 이후, 조국에서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민족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혁명 이론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가들의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했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주제의 책을 탐독했다. 그는 한국을 구원할 새로운 이론이 소련에 있다고 결론 내리고, 러시아로 가는 길에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하얼빈으로 갔지만 국경에서 길이 막혀, 300km를 걸어 한국 독립군 지도자를 교육할 목적으로 한국 이민자들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2]

2. 2. 일본 유학과 아나키즘 활동 (1921년)

1919년 3·1 운동을 목격하고 일본 식민 당국의 잔혹한 탄압을 경험한 김산은 조국에서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민족 독립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혁명 이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가들의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했던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다양한 부류와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주제의 책을 탐독했다. 그는 한국을 구원할 새로운 이론이 소련에 있다고 결론 내리고, 러시아로 가는 길에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다.[2] 이후 아나키스트 활동을 전개하였다.[6]

2. 3. 중국 망명과 공산주의 활동 (1921년 ~ 1937년)

1921년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선으로 난카이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중국 학생과의 갈등으로 자퇴하였다.[6] 이후 쑨원이 세운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 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 이듬해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5년 중국 혁명에 참가, 다음해 조선혁명청년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민족연맹을 결성하였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났다. 이후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및 소학교 교사로 생활하다가 1933년 4월 중국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1월에 탈출하였다.

이어 공산당 북부지구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2. 4. 억울한 죽음과 복권 (1938년 ~ 현재)

1938년,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중국 공산당 보안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당시 보안대를 이끌던 캉성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훗날 장칭과 함께 문화 대혁명을 주도한 인물이다.[5]

1941년, 님 웨일스는 1937년 6월부터 8월까지 옌안 도서관에서 김산을 22번 이상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아리랑》을 미국에서 출간하였다.[4]

1983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78년 김산의 아들이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요청한 것을 받아들여 김산을 복권시켰다.[5]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민주화 이후, 일제강점기 좌익 성향으로 한국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역사적 공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3]

3. 사후

김산은 1938년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중국 공산당 보안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5] 당시 중국 공산당은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훗날 장칭과 함께 문화 대혁명을 주도한 캉성이 조직 지도자였다.[5] 1978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요청한 후, 1983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복권되었다.[5] 그의 부인은 사후 고씨 성을 가진 남자와 재혼했다고 한다.

3. 1. 《아리랑》 출간과 영향

1941년 뉴욕에서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 출판되었고,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출간되었다.[2] 님 웨일즈는 김산을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으로 평가했다.[2]

3. 2. 대한민국에서의 재조명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아들 고(장)영광이 아버지의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기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했다.[3] 같은 해 7월 KBS는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하였다.[3] 200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 기념식에는 중국에 사는 그의 외아들 고(장)영광이 초청되었다.[3]

이는 대한민국 민주화 이후 일본 통치 시대에 좌익 성향으로 한국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역사적 공헌을 인정하는 반공주의적 거부가 완화되었기 때문이다.[3]

4. 사상과 평가

김산은 일본의 대한제국 간접 지배 직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3·1 운동을 목격하고 일본 식민 당국의 잔혹한 탄압을 경험하면서 민족 독립을 위한 혁명 이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2] 그는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어[1] 중국 혁명에 적극 참여했다.[3]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에서 혁명 활동 중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에 넘겨졌고, 신의주에서 40일 동안 고문과 심문을 받았으나 1931년 4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1] 1933년 4월 다시 체포되었다가 1934년 1월 탈출했다.[1] 이후 중국 공산당(CCP) 북방 지역 위원회에서 일하며, 1937년에는 옌안의 대일 항전 군정 대학에서 중국 붉은 군대에게 물리, 화학, 수학, 한국어 및 일본어를 가르쳤다.[1]

님 웨일스는 1937년 6월부터 8월까지 옌안에서 김산을 22번 이상 인터뷰했다.[4] 그러나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와 일본 간첩 혐의로 캉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보안대에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5] 그는 1983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복권되었고,[5]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3]

4. 1.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의 동시 추구

김산은 일본의 대한제국 간접 지배 직전인 1905년 4월 14일 대한제국 평안북도 용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3·1 운동을 목격하고 일본 식민 당국의 탄압을 경험한 후, 민족 독립을 위한 혁명 이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2] 사회주의 혁명가가 된 그는[1] 1921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이듬해 중국 공산당(CCP)에 입당했고, 1923년에는 공산주의 청년 동맹의 당원이 되어 ''혁명''이라는 잡지를 발행했다.[3] 1925년 광둥으로 가서 중국 혁명에 적극 참여했다.[3] 황포 군관 학교를 다니면서 중산 대학에서 의학, 정치학을 공부했고,[3] 1927년 광저우 봉기 등 무장 투쟁에 중국 붉은 군대 편에서 참여했다. 광저우 봉기에서 사망한 약 7,000명의 공산주의자 중 약 200명이 한국 공산주의자였다.[3] 이처럼 김산은 민족 해방뿐 아니라 계급 해방까지 동시에 추구했으며, 중국 혁명에 적극 참여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 2. 국제주의적 연대

김산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민중들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그는 1926년 동방 민족 동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3]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한국 인민 해방 동맹을 창립했고, 같은 해 8월 이 단체의 한국 혁명가 대표가 되었다.[1]

4. 3. 비판적 시각

김산의 공산주의 활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님 웨일스와의 인터뷰에서 나타난 그의 사상과, 캉성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 및 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점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함을 보여준다.[5]

5. 기타

님 웨일스(헬렌 포스터 스노)는 루쉰 도서관에서 빌리고 싶었던 영어 책들이 이미 김산에 의해 대여된 것을 알고 그에게 관심을 가졌으며, 1937년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 22번 이상 인터뷰를 가졌다.[4]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으로 몰려 캉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보안에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5] 이후 1983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복권되었으며,[5] 2005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3]

5. 1. 인간 관계

김성숙, 김원봉 등과 평소 친하게 지냈다. 한편으로는 한위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8]

5. 2. 가족 관계

김산은 중국 여성과 결혼하여 1937년 1월에 아들 고영광을 얻었다.[1] 김산이 처형된 후, 그의 부인은 재혼하였다.

참조

[1] 서적 Song of Ariran: A Korean Communist in the Chinese Revolution https://archive.org/[...] Ramparts Press (2nd Edition)
[2] 서적 Bongwha(in Korean. "Beacon" in English) Korean History Legacy Editorial Committee (Book 3)
[3] 뉴스 문 대통령이 베이징대서 언급한 ‘김산’의 진실 https://pub.chosun.c[...] 2020-01-03
[4] 뉴스 술독 김기팔 확 깨운 ‘김산의 아리랑’ 그리고 내부의 적 http://www.hani.co.k[...] 2020-01-03
[5] 뉴스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5> 장정의 한인들" https://www.hankooki[...] 2020-01-03
[6] 뉴스 조선은 죽어라 달린다 https://news.naver.c[...] 2018-01-28
[7] 간행물 한-중-일-러 넘나든 항일 혁명가의 본보기 https://news.naver.c[...] 한겨레 2005-08-08
[8] 뉴스 ‘낙랑파라’‘엔젤카페’… 구보씨와 산책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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