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길 (성악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영길은 평안남도 출신의 테너 성악가로,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군 군악대에서 활동했다. 1933년 킹 레코드에서 '나가타 겐지로'라는 예명으로 데뷔하여 군가를 주로 불렀으며,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인기를 얻었다. 1941년에는 친일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1985년 사망했으며,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악가 - 안성현
안성현은 일제강점기 나주 출신으로 도호 음악학교를 졸업한 작곡가이며, 대표작으로는 동요 〈엄마야 누나야〉와 가곡 〈부용산〉이 있고, 한국 전쟁 중 월북하여 북한 공훈예술가가 되었으나 남한에서는 그의 업적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화한 사람 - 제임스 드레스녹
제임스 드레스녹은 1962년 북한으로 월북하여 선전물 출연 및 영화 배우로 활동하며 북한 내 유명 인사가 된 전 미국 육군 이등병이다. - 중화군 출신 - 허태영
허태영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평양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장교로 복무하다 사형당했으며, 그의 가족사는 한국 전쟁 시기의 격동적인 사회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중화군 출신 - 장발 (화가)
장발은 일제강점기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으로 활동했고 광복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화가이며 장면 전 국무총리의 동생이다.
김영길 (성악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영길 |
예명 | 나가타 겐지로 |
출생 | 1909년 9월 7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평안남도 중화군 |
사망 | 1985년 8월 17일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직업 | 성악가 |
활동 시기 | 1933년 ~ 1960년 |
![]() |
2. 생애
김영길은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났다.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군의 육군 도야마 학교 군악대에서 테너 가수로 활동했으며, 1933년 킹 레코드에서 음반을 내면서 데뷔했다. '나가타 겐지로'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1960년 재일조선인 북송사업 때 제6차 북송선을 타고 일본인 부인 및 자녀들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2. 1. 일제 강점기 활동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 육군의 육군 도야마 학교 군악대에 들어가 테너 가수가 되었다. 1933년에 일본의 음반 회사인 킹 레코드에서 음반을 취입하여 데뷔했다. 예명은 '''나가타 겐지로'''이다.[6]1929년 20세에 일본본토로 건너가 육군 토야마 학교군악대에서 트럼펫을 전공했다. 1933년 5월 제2회 음악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차석, 1934년 11월 제3회 음악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2위, 1935년 11월 제4회 음악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1935년 1월 킹 레코드에서 "일본 행진곡"을 발매하면서 '''나가타 겐지로'''라는 예명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킹 레코드에서 제작/판매를 담당한 이후에는 킹 레코드의 전속 가수로 활약하였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 군가를 많이 불렀는데, 1937년의 〈아침(朝)〉, 1938년의 〈애국행진곡(愛国行進曲)〉, 1939년의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 〈출정하는 병사를 보내는 노래(出征兵士を送る歌)〉가 히트곡이 되었다. 이후에도 킹 레코드의 간판 가수로 활동하며 일본 건국 2600주년을 축하하는 노래 〈기원 2600년(紀元二千六百年)〉, 〈대정익찬의 노래(大政翼賛の歌)〉, 〈바다로 가는 일본(海行く日本)〉 등을 불렀다.[6]
1941년에 내선일체 영화로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제작된 허영의 《너와 나(君と僕일본어)》는 일본에서 먼저 개봉된 영화였다. 이 영화는 내선일체 구호대로 일본인과 한국인이 제작에도 함께 참여했다. 김영길은 이 영화에 문예봉 등 조선 배우와 함께 주요 배역을 맡아 출연했다. 일본인 처녀와 사랑에 빠진 조선인 청년이 애국심에 불타 지원병으로 출전한다는 줄거리의 전형적인 어용 영화이다.[6] 이러한 경력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5]
전시 중 최종 발매 작품은 1945년 1월 신보의 "소년 전차병"이며, 최종 녹음 작품은 1945년 3월 2일의 "필승가"로 미발매되었다.
2. 2. 해방 이후
1945년 광복 이후, 김영길은 후지와라 가극단 소속으로 있으면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재일조총련)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이 진행 중이던 1960년 제6차 북송선을 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갔다. 이때 일본인 부인과 자녀들도 함께 북한으로 갔다.[6] 오페라 《나비 부인》의 핑커튼 역으로 잘 알려진 유명 성악가였던 김영길의 귀국은 재일 교포들의 북한행에 큰 영향을 끼쳤다.그러나 북한에서의 생활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조선로동당 간부 앞에서 이탈리아 칸초네인 〈오 솔레 미오〉를 불렀다가 자본주의자로 비판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 이 때문에 일가족 전원이 처형되었다거나 탄광 또는 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는 설도 있었다.[6]
하지만 2010년 3월 1일 산케이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김영길은 나중에 복권되었고 1985년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또한 일본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현재 북한의 음악 대학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6] 2009년에는 김영길이 북한으로 가기 직전에 남긴 사진과 색종이가 니가타시에서 발견되기도 했다.[6]
2010년 3월 19일, 킹 레코드는 김영길이 불렀던 21곡을 CD로 복각한 《되살아난 환상의 명테너 나가타 겐지로(김영길)(甦る幻の名テナー永田絃次郎(金栄吉))》를 발매했다.
2. 3.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한 이후의 삶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로동당 간부 앞에서 이탈리아 칸초네인 〈오 솔레 미오〉를 불렀다가 자본주의자로 비판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가족 전원이 처형되었다거나 탄광 또는 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는 설도 있었다.[6]그러나 산케이 신문의 2010년 3월 1일 기사에 따르면, 김영길은 나중에 복권되었고 1985년 자택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또한 일본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음악 대학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2009년에는 김영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기 직전에 남긴 사진과 색종이가 니가타시에서 발견되기도 했다.[4] 2010년 3월 19일, 킹 레코드는 김영길이 불렀던 21곡을 CD로 복각한 《되살아난 환상의 명테너 나가타 겐지로(김영길)》을 발매했다.
3. 평가
김영길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의 육군 도야마 학교 군악대에서 테너 가수로 활동했다. 1933년 킹 레코드에서 음반을 내며 데뷔했고, '나가타 겐지로'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여러 군가를 불렀다.[6]
이후 후지와라 가극단 소속으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서 활동하다 1960년 제6차 북송선을 타고 가족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핑커튼 역으로 잘 알려진 그의 귀국은 재일 교포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10년 3월 1일 산케이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김영길은 복권되어 1985년 75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음악 대학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2009년에는 김영길이 북한으로 가기 직전 남긴 사진과 색종이가 니가타시에서 발견되었고, 2010년 3월 19일 킹 레코드는 김영길의 노래 21곡을 CD로 복각했다.[6]
3. 1. 부정적 평가
김영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 〈애국행진곡(愛国行進曲)〉, 〈출정하는 병사를 보내는 노래(出征兵士を送る歌)〉, 〈기원 2600년(紀元二千六百年)〉, 〈대정익찬의 노래(大政翼賛の歌)〉, 〈바다로 가는 일본(海行く日本)〉 등 군가를 많이 불렀다.[6] 1941년에는 내선일체 영화 《너와 나(君と僕일본어)》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일본인 처녀와 사랑에 빠진 조선인 청년이 지원병으로 출전한다는 내용의 어용 영화였다.[6]이러한 경력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6]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으로 1960년 북한으로 간 뒤, 조선로동당 간부 앞에서 이탈리아 칸초네인 〈오 솔레 미오〉를 불렀다가 자본주의자로 비판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일가족 전원이 처형 또는 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6]
4. 주요 작품
김영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 많은 군가를 불렀다. 1937년의 〈아침(朝)〉, 1938년의 〈애국행진곡(愛国行進曲)〉, 1939년의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 〈출정하는 병사를 보내는 노래(出征兵士を送る歌)〉 등이 히트했다. 이후에도 킹 레코드의 간판 가수로 활동하며 일본 건국 2600주년을 축하하는 노래 〈기원 2600년(紀元二千六百年)〉, 〈대정익찬의 노래(大政翼賛の歌)〉, 〈바다로 가는 일본(海行く日本)〉 등을 불렀다.[6]
1941년에는 내선일체 영화 《너와 나(君と僕일본어)》에 출연하기도 했다.
2010년 3월 19일 킹 레코드는 김영길이 불렀던 21곡을 CD로 복각한 《되살아난 환상의 명테너 나가타 겐지로(김영길)(甦る幻の名テナー永田絃次郎(金栄吉))》를 발매했다.[6]
참조
[1]
서적
野間清治伝
野間清治伝記編纂会
1944
[2]
서적
帰国運動とは何だったのか
平凡社
2005
[3]
뉴스
甦る往年の名テナー・永田絃次郎
産経新聞
2010-03-01
[4]
뉴스
"往年のテノール歌手・永田絃次郎の色紙など見つかる 帰還事業で北へ"
https://web.archive.[...]
イザ!
2009-11-12
[5]
웹사이트
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https://m.hankookilb[...]
2021-12-06
[6]
저널
거대한 사기극에 희생당한 북송 재일교포
http://www.dailynk.c[...]
20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