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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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종원(1922년)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에서 복무하고, 해방 이후에는 군인 및 경찰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여순사건, 한국 전쟁,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에 연루되었으며, 5·15 대통령 선거 부정선거에 관여하여 치안국장을 지냈다. 4·19 혁명 이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다가 사망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과 민간인 학살 혐의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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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 (192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김종원 |
한자 표기 | 金宗元 |
로마자 표기 | Gim Jong-won |
별칭 | 백두산의 호랑이, 김호 |
출생 정보 | |
출생일 | 1922년 7월 8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경산시 |
사망 정보 | |
사망일 | 1963년 (또는 1964년 1월 30일) |
사망지 | (정보 없음) |
소속 및 군사 정보 | |
소속 | |
군 경력 | (정보 없음) |
최종 계급 | 군조(일본 육군) 대좌(한국 육군) |
기타 정보 | |
제대 후 | (정보 없음) |
묘소 | (정보 없음) |
서명 | (정보 없음) |
2. 생애
김종원(1922년)은 1922년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일본군에 지원 입대하여 1940년 육군 병 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했다. 시흥시의 지원병 훈련소에서 조교로 근무했으며,[1] 뉴기니나 필리핀에서 군무에 종사했다.[2]
1946년 5월, 경비사관학교 제1기로 입교했다. 학력이 낮고 성격이 거칠었으며, 성적도 좋지 않아 징계를 받기도 했다.[1] 집안 일로 결석이 잦았고, 졸업을 앞두고는 동료들과 함께 예관수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켰다.[1] 교관 장창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임관할 수 있었다.[1]
종전 후 경찰에 들어가 1946년 국립경찰 동대문서에 있었고, 1947년에는 장택상의 경비를 8개월 담당했으며, 후에 육군에 입대했다.[2]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 제1연대 A중대 소대장이었으며,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에 제5연대 제1대대장으로 참가했다.[10] 미국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10월 23일 여수에 상륙 작전을 감행했지만 김종원의 부대를 태운 전차 양륙정이 해변에 충돌하여 격렬하게 불타올랐기 때문에 철수했고,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반란이 진압된 지 며칠 후였다.[3]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근무 당시 독립군과 그들을 지지하던 조선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그는 여수에서도 시내에서 잡아오는 가담자로 지목된 시민들을 다른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본도로 목을 치고 지치면 권총으로 쏴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4]
1949년 11월, 제23연대장. 공비 토벌 임무를 담당하여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에는 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하루에 1500명씩 처형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즉시 실행했다.[5] 1949년 5월 김종원은 신성모의 추천으로 계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중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직후 사건 조사와 관련된 국회의 방문 조사 때 국군을 빨치산으로 가장하여 습격해 조사활동을 중단시켰고 이 사건으로 51년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재판 결과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바로 대통령 특사로 사면받고 풀려났다.[5]
1950년 7월 말 영덕 전투에서는 영덕 남쪽 요충지인 181고지가 탈환되었을 때 소대장을 즉결 처분하고, 병사 1명을 총살형에 처했다. 이것을 본 고문관 에머리치 중령은 해임을 건의했고, 7월 30일에 연대장 직에서 해임되었다.[6] 1950년 8월,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겸 경상남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 1950년 9월, 경상남도 지구 계엄사령부 북구 사령관. 1950년 10월 평양이 점령되자 제2군단 계엄 민사부장 겸 군정관.[7] 1950년 11월 초, 헌병 부사령관 겸 경상남도 지구 계엄 민사부장.[8] 1951년 2월, 경상남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9]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서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조사단을 방해했다.
1956년 5·15 대통령 선거 뒤 부정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치안국장으로 재직하며 기자들에게 약속을 어긴 사건, 국회의원 납치 사건 등을 일으켰다.[5] 같은 해 11월에 경상남도 경찰국장으로, 남부군 지휘관인 이현상의 체포에 나섰다. 1954년 8월, 경상북도 경찰국장. 1955년 2월, 전라남도 경찰국장을 역임했다.
1960년 5월, 4월 혁명 뒤 임흥순과 이익흥 등과 함께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1964년 1월 30일에 사망했다.
2. 1. 일제강점기 활동
김종원(1922년)은 1922년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일본군에 지원 입대하여 1940년 육군 병 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했다. 시흥시의 지원병 훈련소에서 조교로 근무했으며,[1] 뉴기니나 필리핀에서 군무에 종사했다.[2]1946년 5월, 경비사관학교 제1기로 입교했다. 학력이 낮고 성격이 거칠었으며, 성적도 좋지 않아 징계를 받기도 했다.[1] 집안 일로 결석이 잦았고, 졸업을 앞두고는 동료들과 함께 예관수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켰다.[1] 교관 장창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임관할 수 있었다.[1]
2. 2. 해방 이후 군경 활동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 제1연대 A중대 소대장이었으며,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을 토벌하고자 부산에 주둔하던 5연대 1대대 대대장으로서 참여했다.[10]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근무 당시 독립군과 그들을 지지하던 조선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그는 여수에서도 시내에서 잡아오는 가담자로 지목된 시민들을 다른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본도로 목을 치고 지치면 권총으로 쏴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4]1949년 5월 김종원은 신성모의 추천으로 계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중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직후 사건 조사와 관련된 국회의 방문 조사 때 국군을 빨치산으로 가장하여 습격해 조사활동을 중단시켰고 이 사건으로 51년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재판 결과 3년을 선고받았다.[5] 하지만, 바로 대통령 특사로 사면받고 풀려났으며[5] 1956년 5·15 대통령 선거 뒤 부정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60년 5월, 4월 혁명 뒤 임흥순과 이익흥 등과 함께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1964년 1월 30일에 사망했다.
종전 후 경찰에 들어가 1946년 국립경찰 동대문서에 있었고, 1947년에는 장택상의 경비를 8개월 담당했으며, 후에 육군에 입대했다.[2]
제1연대 하사관이었지만, 1946년 5월, 경비사관학교 제1기로 입교했다. 학력이 낮고 성격이 거칠고 성적도 좋지 않아, 행정 요원 이지현 소위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여 첫 징계 처분을 받았다.[1] 게다가 집안 일 때문에 여러 날 결석하여 출석 일수조차 부족했다.[1] 졸업을 앞두고 같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 정종근과 고근홍과 함께 예관수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켰다.[1] 원인은 예관수가 "지원병 출신은 실력이 없다"고 멸시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 성적이 낮아 임관에 문제가 있었지만, 교관 장창국이 내무반 성적에 만점을 주어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1]
여수·순천 사건에서는 제5연대 제1대대장으로 참가했다. 미국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10월 23일 여수에 상륙 작전을 감행했지만 김종원의 부대를 태운 전차 양륙정이 해변에 충돌하여 격렬하게 불타올랐기 때문에 철수했고,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반란이 진압된 지 며칠 후였다.[3]
1949년 11월, 제23연대장으로 공비 토벌 임무를 담당하여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에는 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하루에 1500명씩 처형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즉시 실행했다.[5]
1950년 7월 말 영덕 전투에서는 영덕 남쪽 요충지인 181고지가 탈환되었을 때 소대장을 즉결 처분하고, 병사 1명을 총살형에 처했다. 이것을 본 고문관 에머리치 중령은 해임을 건의했고, 7월 30일에 연대장 직에서 해임되었다.[6]
1950년 8월,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겸 경상남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 1950년 9월, 경상남도 지구 계엄사령부 북구 사령관, 1950년 10월 평양이 점령되자 제2군단 계엄 민사부장 겸 군정관,[7] 1950년 11월 초, 헌병 부사령관 겸 경상남도 지구 계엄 민사부장.[8] 1951년 2월, 경상남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9]을 역임했다.
1953년, 치안국장으로 있으면서 기자들에게 약속을 어긴 사건, 국회의원 납치 사건 등을 일으켰다.[5] 같은 해 11월에 경상남도 경찰국장으로, 남부군 지휘관인 이현상의 체포에 나섰다. 1954년 8월, 경상북도 경찰국장, 1955년 2월, 전라남도 경찰국장을 역임했다.
2. 3. 경찰 간부 활동 및 사망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 제1연대 A중대 소대장이었으며,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을 토벌하고자 부산에 주둔하던 5연대 1대대 대대장으로서 참여했다.[10]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근무 당시 독립군과 그들을 지지하던 조선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그는 여수에서도 시내에서 잡아오는 가담자로 지목된 시민들을 다른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본도로 목을 치고 지치면 권총으로 쏴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4]1949년 5월 김종원은 신성모의 추천으로 계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중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직후 사건 조사와 관련된 국회의 방문 조사 때 국군을 빨치산으로 가장하여 습격해 조사활동을 중단시켰고 이 사건으로 51년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재판 결과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바로 대통령 특사로 사면받고 풀려났으며[5], 1956년 5·15 대통령 선거 뒤 부정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치안국장으로 재직하며 기자들에게 약속을 어긴 사건, 국회의원 납치 사건 등을 일으켰다.[5]
1950년 7월 말 영덕 전투에서는 영덕 남쪽 요충지인 181고지가 탈환되었을 때 소대장을 즉결 처분하고, 병사 1명을 총살형에 처했다. 이것을 본 고문관 에머리치 중령은 해임을 건의했고, 7월 30일에 연대장 직에서 해임되었다.[6] 1950년 8월,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겸 경상남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 1950년 9월, 경상남도 지구 계엄사령부 북구 사령관, 1950년 10월 평양이 점령되자 제2군단 계엄 민사부장 겸 군정관을 역임했다.[7] 1950년 11월 초, 헌병 부사령관 겸 경상남도 지구 계엄 민사부장을 지냈다.[8]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서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조사단을 방해했다. 이 건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지만, 이듬해 3월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어 전라북도 경찰국장을 역임했다.[5] 1953년 11월에 경상남도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아 남부군 지휘관인 이현상의 체포에 나섰다. 1954년 8월, 경상북도 경찰국장, 1955년 2월, 전라남도 경찰국장을 거쳤다.
1960년 5월, 4월 혁명 뒤 임흥순과 이익흥 등과 함께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1964년 1월 30일에 사망했다.
3. 논란 및 비판
김종원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조선인들과 항일 운동가들을 악랄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행위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그를 수록하기 위해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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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친일 행적
김종원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조선인들과 항일 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이러한 행위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그를 수록하기 위해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선정하였다.3. 2. 민간인 학살
김종원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조선인들과 항일 운동가들을 탄압한 이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4. 김종원을 연기한 배우들
5. 영화
참조
[1]
뉴스
(3587)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40) 장창국
https://www.joongang[...]
1982-12-1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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