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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요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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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부사관으로 복무했으며,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4·3 사건 진압에 참여하여 제주 9연대장으로 재직하며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 많은 희생자를 냈다. 한국전쟁 중 헌병사령관, 수도사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외무부 장관, 내각수석 장관, 경제기획원 원장을 지냈다. 이후 정치적 갈등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인천제철 사장을 역임하다가 1980년 미국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2. 생애

송요찬은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매양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서당에서 공부했고, 화성공립보통학교와 대전중학교를 졸업했다. 금강산 암자에서 공부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1]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지원병으로 참전, 1939년 육군 지원병으로 자원하여 훈련소 조교, 부사관을 거쳐 1945년 1월 오장으로 승진, 제23연대 훈련장교 보좌관으로 배속되었다.[5] 강제 노역 대신 군인의 길을 선택, 신체 장애를 극복하고 육군 특별 지원병에 합격, 총검술 조교와 을종 간부후보생을 역임했다. 1945년 8월 종전 당시 조선총독부 경성 제1군무 예비 훈련소 조교, 제17방면군 용산 제23부대 소속 육군 조장이었다.[12]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 1946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부산 국방경비대 제5연대 소대장으로 부임, 미군정 고문관들과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제5연대 소대장, 제8연대 중대장, 강릉 파견중대장을 거쳐 1948년 2월 육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강릉대대장 재직 중 그의 별명인 '석두'라는 질책을 받았다.[30]

1948년 7월 제주 제9연대장(소령)으로 4.3 사건 진압에 참여, 양민 학살에 대한 비판을 받는다.[13] 이후 지리산 등에서 남로당 파르티잔 토벌에 참여하였다. 1949년 1월 육군 중령으로 진급, 4·3 사태 진압작전과 오대산 파르티잔 토벌작전에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제1연대장으로 오대산지구 파르티잔 1천 명을 사살, 소탕하였다. 1949년 5월 25일 제10연대장,[30] 9월 28일 제15연대장[30]을 거쳐 1950년 4월 헌병사령관이 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1950년 6월 27일 국방부 장관 명령으로 한국은행 금괴 1.5ton과 은괴 2.5ton을 진해를 거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예치했다.[14] 같은 날 헌병사령부는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 예비 검속 및 처형을 지시, 서대문형무소 정치범 처리 및 호남 지역 4·3 사건 관계자 사살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3] 1950년 7월 12일, 예방 구금 특별 조치령을 발표했다.[13]

1950년 9월 1일 수도사단장으로 경주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경주 전투) 9월 21일 준장으로 진급했다.[15] 북진 작전에 참가, 소련, 만주 국경까지 진출했다가 중국인민지원군 개입으로 후퇴했다.[16] 1951년 5월 중국군 5월 공세에서 대관령을 확보, 강릉 진출을 차단했다.[16] 1951년 7월 펀치볼 전투에 참가, 924고지에서 중공군 위협을 제거하고 북진 작전 기반을 마련했다. 1951년 10월 고성 월비산(459고지)을 점령, 동부 전선을 38도선에서 약 80km 북상시켰다.

1952년 7월 8일 소장으로 진급,[16] 지리산 남부군 토벌 작전을 지휘했다.[16] 1953년 7월 제8사단장으로 금성 전투에서 지형능선과 690고지를 탈환했다.

금성 전투에서 부하들의 안전 확인을 위해 이동하는 송요찬(1953년 7월 17일)


한국전쟁 이후 1954년 10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 제8사단장, 제3군단장을 역임했다. 1957년 5월 제1야전군사령관, 1959년 8월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육군 참모총장 재직 중 한국군 10만 감군, 정군에 대응하여 예편 군인 처우 개선 및 군인연금제도를 이승만에게 요구하여 성사시켰다. 1960년 3월 서울지역 계엄사령관을 지냈으며,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군의 중립 의사를 밝히고 진압에 소극적으로 임하였다.

4·19 혁명


1960년 5월 육군 참모총장직을 사퇴하고 미국 유학 중 1961년 5·16 군사 정변 소식을 접하였다.[8]

5·16 군사 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장, 외무부장관, 1961년 7월 3일 내각 수석 장관, 1962년 3월 겸 경제기획원 원장을 역임했다.[31] 1962년 증권파동 발생 후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에 반대하여 6월 17일 내각 수석 장관직과 경제기획원 장관직을 사퇴했다.

1963년 8월 박정희의 대통령 출마 반대 및 사퇴를 촉구하는 공개장을 발표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살인 및 살인 교사 혐의로 구속되었다.[32] 1963년 10월 7일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다.[33] 1964년 5월 26일 공소 기각 결정을 받았다.[34]

인천제철 사장 등을 지냈으며, 만년에는 신장병으로 투병했다. 1980년 10월 18일 미국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 병원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1] 1980년 10월 25일, 육군 본부 강당에서 장군 예우의 장례식을 치른 후, 충청남도 청양군에 안장되었다.[1]

2. 1. 생애 초기

宋堯讚|송요찬중국어은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매양리에서 아버지 송영달과 어머니 이씨 사이의 2남 6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익혔다.[1]

아버지 송영달은 그를 농부로 키울 계획이었으나, 어머니 이씨는 화성공립보통학교에 진학시켰다.[1] 1927년 3월, 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아버지 송영달이 사망하여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1] 1929년 6학년 때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하려 했으나, 어머니 이씨의 만류로 봉산중학교에 진학했다.[1] 이후 봉산중학교를 그만두고 대전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대전중학교 졸업 후 금강산의 암자로 들어가 2년간 공부하였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1]

2. 2. 일제 강점기 활동

송요찬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지원병으로 참전하여 육군 상사까지 진급했다.[29] 1939년 4월 육군 지원병에 자원하여 5월에 육군 자원자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받고 일본군이 되었다. 1939년 12월 일등병이 되고 1940년 말 나카무라 사다오(中村貞夫)로 창씨개명하였다.[5]

지원병훈련소를 마친 뒤 4년간 육군 지원병훈련소의 조교로 근무하였고, 이후 부사관이 되어 지원병훈련소의 군조로 승진했다. 1944년 용산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사령부 산하 조선군 제23연대에 배속되었다가 1945년 1월 오장으로 승진, 제23연대 훈련장교 보좌관으로 배속되었다.[5]

강제 노역보다는 군인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육군 특별 지원병을 지원했으나,[12] 신체 장애(내반슬)로 탈락했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노력하여 장애를 극복, 1939년 육군 특별 지원병 제2기 선발에 합격했다. 1939년 11월 말 육군 병 지원자 훈련소 수료식에서 우등생 14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같은 해 12월, 이등병으로 조선군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에 입영했다. 훈련소에서 성적이 우수하여 육군 병 지원자 훈련소의 총검술 조교로 선발되었고, 1940년 4월 하사관을 지원하여 합격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을종 간부후보생에 합격했다.

1945년 8월, 종전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경성 제1군무 예비 훈련소 조교로, 제17방면군 용산 제23부대 소속 육군 조장이었다.

2. 3. 군인 생활

송요찬은 강제 노역보다 군인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육군 특별 지원병에 지원했으나, 신체 장애(내반슬)로 탈락했다.[12]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노력하여 장애를 극복하고 1939년 육군 특별 지원병 제2기 선발에 합격했다. 1939년 11월 훈련소 수료식에서 우등생 14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고, 같은 해 12월 이등병으로 조선군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에 입영했다.[12] 훈련소에서 성적이 우수하여 총검술 조교로 선발되었고, 1940년 4월 하사관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을종 간부후보생에도 합격했다.

1945년 8월 종전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경성 제1군무 예비 훈련소 조교이자, 제17방면군 용산 제23부대 소속 육군 조장이었다.

2. 3. 1. 국방경비대 및 대한민국 국군 창군 활동

1945년 8월 광복 직후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1946년 2월 졸업 후 그해 5월 1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부산 국방경비대 제5연대 A중대 소대장으로 부임하여 미군정 고문관들과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이후 제5연대 소대장을 거쳐 1947년 2월 육군 중위로 진급, 제8연대 중대장을 거쳐 강릉 파견중대장이 되어 대구사태 관련자 및 무장공비 진압, 민심 수습, 치안 유지에 힘썼다. 1947년 3월 육군 대위로 진급, 강릉파견중대가 대대로 승격되면서 제8연대 제3대대가 되었고, 1948년 2월 육군 소령으로 승진했다.

국방경비대 강릉대대장 재직 중, 연대 참모로부터 석두라는 질책을 들었는데, 이는 그의 별명이 되었다.[30] 대한민국 국군이 발족되자 국방경비대에서 국군으로 전환한다.

1948년 6월까지 강릉대대장으로 3·8선 주변 지역 전선 방어를 맡았다. 이후 경기도 시흥군에 주둔중인 보병학교 학생연대장을 거쳐 제8연대 대대장을 역임했다. 1948년 7월 제주에서 재편된 제9연대의 연대장(소령)이 되었고, 4.3 사건 진압에 참여했으며, 제11연대 부연대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13] 4.3 사건 진압 후에는 지리산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로당 파르티잔 토벌에 참여하였다.

1948년 7월 경기도 수색에 주둔 중인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고 1949년 1월 육군 중령으로 진급, 다시 4·3 사태 진압작전에 참가하고 오대산 파르티잔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국군 제1연대장에 임명되어 오대산지구 파르티잔 공비 1천명을 사살하고 파르티잔을 소탕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되자 곧바로 대한민국 육군에 복무하게 되었다.

1949년 5월 25일, 동해안의 제10연대장이 되었다.[30] 1949년 9월 28일, 제15연대장이 되었다.[30] 지리산 지역 공비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30] 1950년 4월, 헌병사령관이 되었다.

2. 3. 2. 제주 4.3 사건 진압 참여

1948년 7월 제주에서 재편된 제9연대의 연대장(소령)이 되었다.[13] 9연대장 당시 제주도에서 발생한 4.3 사건 진압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다는 주장이 있다.[13]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했다.[13]

이 포고문에서 언급된 5km 이외의 지점은 산악 지대뿐만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 마을 전체를 포함하여, 사실상 중산간 지역 거주를 금지하는 것이었다.[13] 미군 정보 보고서는 “제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이 명백히 게릴라 부대의 지원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대량 학살 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 among civilian영어)을 채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3]

1948년 11월 중순부터 강경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다.[13] 11월 이전에는 주로 젊은 남성이 희생되었지만, 강경 작전 중에는 노소를 불문하고 사살했다.[13] 따라서 희생자의 대부분은 송요찬의 재임 중에 발생했다.[13]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통계에 따르면, 희생된 15세 이하 어린이 중 송요찬 재임 중 희생자는 전체의 76.5%, 61세 이상은 전체의 76.6%였다.[13] 또한 게릴라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중산간 마을은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13] 4.3 사건으로 가옥 39,285동이 소실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된 것이었다.[13]

2. 3. 3. 한국전쟁 참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송요찬은 육군 보병학교 제3차 보습 교육을 받던 중 주요 정부 기관 경비 강화, 휴가 중 장병의 긴급 소집 및 원대 복귀, 낙오병 수습 및 독전 업무에 힘썼다.[14]

1950년 6월 27일, 국방부 장관의 명령으로 한국은행의 금괴 운반 작전을 수행했다.[14] 지하 금고의 금괴 1.5ton과 은괴 2.5ton을 진해 해군사령부에 보관 후,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예치했다.[14] 이 금은괴는 1955년 한국의 국제통화기금 출자 자금으로 사용되었다.[14]

같은 날 헌병사령부는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를 예비 검속하여 처형하라는 무선 지시를 내렸다.[13] 이에 따라 육군 형무소 소속 헌병은 서대문형무소의 사상범, 정치범을 처리하고, 수원, 평택, 공주, 대전으로 후퇴하면서 임무를 수행했다.[13] 광주 헌병대장에게 형무소 수감자나 보도연맹 관계자를 처형하도록 명령했다.[13] 이 지시에 따라 호남 지역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3 사건 관계자의 사살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3]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예비 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의 유족은 유골을 찾지 못했다.[13]

1950년 6월 28일, 육군 본부 지휘부와 함께 수원으로 후퇴한 후 낙오병 수용 및 한강 방어선 방어를 지원했다.[14] 29일에는 맥아더 사령관의 한강 방어선 시찰 안내 및 경호 업무를 지휘했다.[14]

1950년 7월 12일, 예방 구금 특별 조치령을 발표했다.[13]

1950년 8월, 대구 방위 사령관을 겸임하여 전국 비상 경비 사령부와 협력하여 대구를 비롯한 후방 지역의 민심 수습과 안정에 힘썼다.[14]

1950년 9월 1일,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어 경주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했다(경주 전투). 9월 7일부터 인민군과 곤계봉에서 7회의 교전 끝에 승리하였다. 9월 21일, 준장으로 진급했다.[15] 그 후 북진 작전에 참가하여 11월에는 소련, 만주 국경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었다.[16] 12월, 흥남에서 목포항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 강릉을 점령했다.[16] 이후 주로 동해안 전투를 지휘했다.[16]

1951년 5월, 중국군의 5월 공세에서는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대관령을 확보하고 중국군의 강릉 진출을 차단했다.[16]

1951년 7월, 미군 제10군단이 주도하는 펀치볼 전투에 참가하여, 924고지에 걸친 1주일간의 혈전에서 중공군의 위협을 제거하고 북진 작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1951년 10월, 휴전 협정에 의한 소강 상태 속에서 고성 부근의 월비산(459고지)을 4일간의 끈질긴 공세로 점령했다. 10월 19일에 고성 팅월리까지 진출하여, 동부 전선은 38도선에서 약 80km 북상하게 되었다.

1951년 11월, 수도사단은 백야전 전투 사령부에 편입되어 지리산남부군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16] 1952년, 토벌이 완료되자, 재편된 제2군단에 배속되어 춘천 북방으로 이동하여 수도고지 전투를 지휘했다.[16]

1952년 7월 8일, 밴 플리트 제8군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소장으로 진급했다.[16] 게릴라 토벌 경력을 높이 평가받아, 서남 지역 전투 사령부(같은 해 8월, 남부 지역 경비 사령부로 개칭) 사령관에 취임했다.[16] 7월 말부터 10월까지 3회에 걸쳐 군경 합동 공비 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52년 10월, 다시 수도사단장에 복귀했다. 11월, 수도사단은 예비가 되어 미군 주도 야전 훈련(FTC/Field Training Course영어)에 참가했다.[16] 12월, 방한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수도사단을 시찰했다.[16]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 유학 대기 중이던 1953년 7월에 제8사단장에 임명되었다. 금성 전투에서 지형능선과 690고지를 탈환했다.

2. 3. 4. 한국전쟁 이후

1950년 9월 20일 준장으로 진급했고, 9월 27일 수도경비 사단장이 되었다.[15] 그 뒤 원산, 함흥, 청진을 폭격하여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다. 1952년 7월 12일부로 남부지구 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16] 1952년 12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하자 그의 사열을 주관하였다.[16]

제8보병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제8보병사단장이 되었다. 1953년 7월 미국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을 수료하였다. 1954년 8월 귀국하고, 그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다시 제8사단장, 제3군단장을 역임했다. 1956년 7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개월간 현지 시찰을 하고 8월 귀국하였다.

1956년 8월 국방대학원에 입교하여 1957년 5월 수료하였다. 1957년 5월 제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1959년 8월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2. 3. 5. 4.19 혁명 전후

육군 참모총장 재직 중 한국군 10만 감군, 정군에 대응하여 감군, 정군으로 예편된 군인들의 처우 개선 및 군인연금제도의 신설을 이승만에게 요구하여 성사시켰다. 1960년 3월 서울지역 계엄사령관을 지냈으며,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한 학생시위대의 시위가 4·19 혁명으로 확대되자 1960년 4월 20일 대통령 이승만의 호출로 경무대를 방문하여 사태수습을 계획하였다.

4·19 혁명 진행 중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서울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시위대를 만나 발포를 하려다가 최경록의 만류로 발포금지명령을 내렸다. 이후 군의 중립 의사를 언론에 밝히고 진압에 소극적으로 임하였으며, 유혈사태 방지 및 치안 유지, 혼란 수습 등에 치중하였다.

1960년 5월 육군 참모총장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1961년 5월 워싱턴 D.C. 방문 당시에 5·16 군사 정변 소식을 접하였다.[8]

2. 4. 5.16 군사정변 이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장, 외무부장관을 거쳐 7월 3일 내각 수석 장관에 임명되었고 1년 동안 수석장관으로 있었다. 이 시기에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수정에 참여하였다. 1962년 3월 겸 경제기획원 원장에 임명되었다.[31] 1962년 증권파동이 발생하자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갈등하다가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에 반대하여 6월 17일 내각 수석 장관직과 경제기획원 장관직을 사퇴하고 정당 창당 운동에 참여했다. 내각 수석 장관 겸 경제기획원장을 사퇴하면서 군정에 혁명 공약 중 사태 수습 뒤 정권을 민간 정치인에게 이양하고 군대로 복귀하겠다는 조항을 이행하라고 촉구하였다가, 김현철의 비난을 듣고 싸우기도 하였다.

1963년 8월 신장염으로 일시적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8월 8일 동아일보에 "군인은 국방에만 전념하고 박정희 의장은 물러서는 게 애국이다"라는 내용으로 박정희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 사퇴를 촉구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하였으며, 8월 11일 낮 11시 30분 신당동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있다가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하여 살인과 살인 교사 혐의로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8월 11일 아침 중앙정보부가 신청하여 서울형사지방법원 원종백 판사가 발부한 구속 영장에 의하면 '1.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10월 5일 당시 수도사단장이던 송요찬 대령이 부하인 제17연대 2대대장 조영구 중령을 명령 불복종으로 헌병에게 지시하여 경주시 불국사 남쪽 2km 지점에서 총살케 했다.(조영구 가족이 진정서를 제출하여 재수사 요청하여 재수사 착수) 2. 송요찬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4.19 당시 경무대 어귀와 이기붕 집 앞 데모대에게 발포 지시를 했다(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4.19 직후 혁명재판에서 입건도 안 된 사건)'를 이유로 구속 영장이 발부되어 마포교도소에 구속되었다.[32]

그 뒤 12월에 실시되는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1963년 10월 7일에 태윤기 변호사를 통해 "야당 단일 후보의 실현을 위해 사퇴한다"라고 말하면서 대통령 후보직 사퇴를 선언했다.[33] 서울지방검찰청 유태선 검사가 "사단장으로서 경주 지구 전투를 지휘했던 1950년 9월 15일 당시는 아군이 고전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지휘관으로서 군을 위해 독전 중이던 때여서 즉결 처분된 그의 예하 대대장 조영구 중령에 대한 살의 등을 밝히기 어렵고 설령 혐의를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전공을 감안해서 정상을 참작한다"라고 하면서 공소 취하 신청을 하여 서울형사지방법원 문영극 판사가 1964년 5월 26일에 공소 기각 결정을 하였다.[34]

인천제철사 사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1966년 역대 야당 정치인들의 신변잡기를 기술한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인터뷰에 참여하기도 했다.

2. 5. 박정희와의 갈등 및 정계 은퇴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 송요찬은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장, 외무부장관을 거쳐 7월 3일 내각 수석 장관에 임명되어 1년 동안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제1차 경제개발계획 수정에 참여했고, 1962년 3월에는 경제기획원 원장을 겸임했다.[31] 그러나 1962년 증권파동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갈등했고,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에 반대하며 6월 17일 내각 수석 장관직과 경제기획원 장관직을 사퇴하고 정당 창당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사퇴하면서 군정에 혁명 공약 중 사태 수습 후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고 군대로 복귀하겠다는 조항을 이행하라고 촉구했고, 이로 인해 김현철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63년 8월, 신장염으로 잠시 입원했던 송요찬은 8월 8일 동아일보박정희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하고 사퇴를 촉구하는 공개장을 발표했다. 그는 "군인은 국방에만 전념하고 박정희 의장은 물러서는 게 애국"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8월 11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신당동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있던 그를 살인 및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했다.[32]

중앙정보부가 제시한 구속 영장에는 1950년 10월 5일 수도사단장이었던 송요찬 대령이 부하인 제17연대 2대대장 조영구 중령을 명령 불복종으로 경주시 불국사 남쪽 2km 지점에서 총살하게 했다는 혐의와,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과 이기붕 집 앞 시위대에 발포를 지시했다는 혐의가 적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4.19 혁명 관련 혐의는 확인되지 않았고 혁명 재판에서도 기소되지 않은 사건이었다.[32]

이후 송요찬은 자유민주당 후보로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1963년 10월 7일 야당 단일 후보 실현을 위해 사퇴했다.[33] 1964년 5월 26일, 서울지방검찰청 유태선 검사는 조영구 중령 즉결 처분은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군을 위한 독전 중 발생한 일로 살의를 밝히기 어렵고, 전공을 참작해야 한다며 공소 취하를 신청했고, 서울형사지방법원 문영극 판사는 공소 기각 결정을 내렸다.[34]

2. 6. 최후

1980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1]

만년에는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만정리 119번지로 이주했다.[1] 인천제철 사장으로 있다가 신장병 병세가 악화되어, 1980년 8월 20일 미국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 병원에 입원 진료를 받았으나 3일만에 혼수상태에 빠졌다.[1]

1980년 10월 18일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 병원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1]

1980년 10월 25일, 육군 본부 강당에서 장군 예우의 장례식을 치른 후,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던 아버지 송영달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1]

3. 사후

1980년 10월 25일 육군본부 강당에서 육군장으로 영결식을 진행한 뒤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광평리 산 아버지 송영달 묘소 아래에 안장되었다.

4. 상훈 경력

훈장수여 일자비고
미국 동성훈장1950년 10월
미국 은성훈장1953년 5월
태극무성훈장1953년 5월
국민훈장 무궁화장1980년 10월 25일
을지무공훈장2회 수훈
태극무공훈장2회 수훈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송영달
어머니이씨
부인권영각 (1927년~)


6. 학력

7. 평가 및 논란

송요찬은 "석두(石頭)장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35] 일본군 부사관 육군상사로 재직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6년 5월 1일, 군사영어학교 제1기생으로 임관하였다.

1948년 6월 21일, 제11연대 부연대장(소령)으로 임명되어 제주 4.3사건 진압에 참여하였다. 사건의 희생자 중 대다수는 그의 재직 기간에 발생하였다. 1948년 7월 15일, 제9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벌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35]

5·16 군사 정변을 군사혁명이라 칭하며 지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역행하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8. 기타

송요찬은 일본군 육군상사로 재직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35] 1946년 5월 1일, 군사영어학교 제1기생으로 임관하였다.[35]

1948년 6월 21일, 제11연대 부연대장(당시 계급 소령)으로 임명되어 제주 4.3사건 진압에 참여하였으며, 사건 희생자 대다수가 그의 재직 기간에 발생하였다.[35] 1948년 7월 15일, 부활된 제9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35]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벌어졌다.[35]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35]

"석두(石頭)장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하였고 군사혁명이라 하면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역행하면서까지 일어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Army for Sale http://www.time.com/[...] Time Magazine 1959-11-23
[2] 웹사이트 The New Strongman http://www.time.com/[...] Time Magazine 1961-07-14
[3] 웹사이트 Quick to Wrath http://www.time.com/[...] Time Magazine 1960-05-09
[4] 웹사이트 Commander rejected police ammo request on Apr. 19 http://english.hani.[...] The Hankyoreh 2011-04-18
[5] 웹사이트 다음 백과 https://archive.toda[...] 2022-05-10
[6] 웹사이트 인물정보 https://web.archive.[...] 2022-05-11
[7] 뉴스 NAVER Newslibrary https://newslibrary.[...] 1963-08-12
[8] 뉴스 1963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1963-10-07
[9] 뉴스 NAVER Newslibrary https://newslibrary.[...] 1964-05-26
[10] 서적 若き将軍の朝鮮戦争 草思社
[11] 서적 陸戦史集 第1巻 国境会戦と遅滞行動(朝鮮戦争史1)
[12] 뉴스 <86>건군 주역들의 군사배경 http://kookbang.dema[...] 2008-10-06
[13] 뉴스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 없다 http://www.jejusori.[...] 2014-03-27
[14] 뉴스 [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03. 내가 만난 사람 - 송요찬 http://news.joins.co[...] 2009-01-19
[15] 간행물 韓國戰爭史第4巻 總反擊作戰期(1950.9.15~11.30) http://www.imhc.mil.[...] 한국国防部軍史編纂研究所
[16] 뉴스 [6·25전쟁 60주년 특별기획] 白善燁이 만난 6·25전쟁의 영웅들 <下·끝> http://monthly.chosu[...] 2010-06
[17] 뉴스 1962년 미 대사관 기밀문건 https://shindonga.do[...] 2010-03-03
[18] 뉴스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 없다 http://www.jejusori.[...] 2014-03-27
[19] 뉴스 15日頃에 歸國 https://www.busan.co[...] 1961-06-13
[20] 뉴스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26) 송요찬 ‘박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 -장군 필화 제1호 http://news.khan.co.[...] 2017-03-30
[21] 뉴스 반공 목사들이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반기 든 사연 http://www.pressian.[...] 2014-10-25
[22] 뉴스 각하들도 피하지 못한 내란의 추억 http://www.hani.co.k[...] 2014-02-14
[23] 뉴스 송요찬씨 별세 http://news.joins.co[...] 1980-10-20
[24] 웹사이트 Brig. Gen. C. E. Ryan awards Legion of Merit to Brig. Gen. Song You Chan (1) http://archive.histo[...]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25] 웹사이트 Song Yo Chan https://valor.milita[...] Military Times
[26] 웹사이트 Major General Song You Chan is congratulated upon receiving the Air Medal by Gen. James A. Van Fleet http://archive.histo[...]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27] 웹사이트 Song Yo Chan https://valor.milita[...] Military Times
[28] 뉴스 한국일보 1980년 10월 21자 1면 1980-10-21
[29] 웹사이트 http://enc.daum.net/[...]
[30] 기타
[31] 웹인용 인물정보 http://www.donga.com[...] 2010-12-25
[32] 뉴스 1963년 8월 12일자 경향신문 https://newslibrary.[...] 1963-08-12
[33] 뉴스 1963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1963-10-07
[34] 뉴스 1964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 1964-05-26
[35]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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