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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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채곤은 한국은행 부총재와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영의 장남으로, 한양대학교와 퍼듀 대학교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했다. NASA에서 컴퓨터 분석가로 일하다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 해군정보국 컴퓨터 분석관으로 근무했다. 1995년, 그는 한국의 안보를 우려하여 미국 해군이 대한민국에 판매하려던 C4I 관련 정보를 당시 주미 한국 대사관 해군 무관에게 전달했다. 이로 인해 1996년 FBI에 체포되어 '간첩음모죄'로 징역 9년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2004년 출소 후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자서전을 발간했다. 이후 보호 관찰이 종료되었으며,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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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로버트 김 |
로마자 표기 | Robert Chaegon Kim |
본명 | 김채곤 |
정당 | 무소속 |
의원 선수 | 無 |
출생일 | 1940년 1월 21일 |
출생지 | 전라남도 여수군 (現 전라남도 여수시) |
거주지 | 서울 |
배우자 | 장명희 |
자녀 | 김정연, 김종륜, 김재연 |
부모 | 김상영(부) |
친척 | 김성곤(동생) |
학력 | |
학사 |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 |
대학원 | 퍼듀 대학교 대학원 |
2. 생애
김채곤은 1940년 전라남도 여수군(현 여수시)에서 한국은행 부총재와 8, 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영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김성곤의 형이다.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퍼듀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NASA에서 컴퓨터 분석가로 일하다가 1974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미 해군 정보국 컴퓨터 분석관으로 근무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김채곤은 1940년 전라남도 여수시(현 여수시)에서 한국은행 부총재와 8, 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곤은 그의 동생이다.1958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 퍼듀 대학교로 유학, 1968년에 산업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 2. NASA 및 해군 정보국 근무
1968년 퍼듀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한동안 NASA에서 컴퓨터 분석가로 일했다.[1] 1974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1] 이듬해부터는 미 해군 정보국 컴퓨터 분석관으로 근무했다.[1]3. 정보 유출 사건
1995년 미국 해군이 C4I(지휘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관련 장비를 대한민국에 판매하려 할 때, 김채곤은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 무관 백동일(전 해군 대령)에게 이 시스템이 한국 실정에 맞지 않다고 조언하며 39건의 정보를 우편으로 보냈다. 1996년 9월 미국 연방 수사국(FBI)에 의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고, 1997년 7월 미국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에서 ‘간첩음모죄’로 징역 9년에 3년의 보호감찰을 선고받았다.[1]
1998년 김채곤은 파산 및 연금 혜택 박탈을 당했다. 조순승 새정치국민회의 의원과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 김영삼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2004년 6월 1일 출소하여 가택 수감되었고, 전자발찌가 채워졌다. 같은 해 7월 모범수로 인정받아 15% 감형되었고, 자서전 《집으로 돌아오다》를 발간했다. 7월 27일 전자 감응 장치가 해제되어 완전 석방되었으나, 3년의 보호 관찰이 남았다. 2005년 10월 3일부로 보호관찰이 종료되었다.
3. 1. 사건의 발단
1995년, 미국 해군은 C4I(지휘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관련 장비를 대한민국에 판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김채곤은 당시 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해군 무관이었던 백동일(전 해군 대령)을 만나 이 시스템이 대한민국 실정에 맞지 않으니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채곤은 그 후에도 백동일에게 총 39건의 정보를 우편으로 보냈다. 김채곤은 "미 정보기관은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한 우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정보 공유 체제에서 밀려나 있는 한국의 상황이 안타까워 정보를 제공하게 됐다"라고 밝혔다.[7][8]3. 2. FBI 체포 및 재판 과정
1996년 9월, 김채곤은 미국 연방 수사국(FBI)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1] 김채곤은 1996년 9월 18일 강릉에서 발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잠수함의 침투 경로를 백동일에게 알려준 뒤 같은 달 24일 체포되었다. 백동일은 외교관 면책특권으로 법적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강제 추방되었다. 당시 김채곤의 변호를 맡았던 긴스버그는 김채곤이 백동일에게 넘긴 자료가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우방국에게 이미 공개된 자료로, 정보를 유출한 것은 맞지만 간첩 혐의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하였다.1997년 7월, 김채곤은 미국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에서 '간첩음모죄'로 징역 9년에 보호감찰 3년을 선고받고 펜실베니아 알렌우드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1] 그의 체포 이후 이웅진, 김승연 등의 기업인들이 여러 차례 생활비 등 후원금을 보냈다.
1998년, 김채곤은 파산선고를 받았으며, 간첩죄 전과 때문에 연금 혜택도 박탈당했다. 1998년 11월 6일, 조순승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 당시 장관 홍순영에게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자, 홍순영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라서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다.[1] 1999년 11월 9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로 우리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답했다. 이는 김영삼 정부가 재미동포의 인권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3. 3. 복역 및 석방 과정
김채곤은 1997년 7월 미국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에서 '간첩음모죄'로 징역 9년에 3년의 보호감찰을 선고받고 펜실베이니아 알렌우드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1] 1998년 파산선고를 받았으며, 간첩죄 전과로 인해 연금 혜택도 박탈되었다.1998년 11월 6일, 조순승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 홍순영 당시 장관에게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자, 홍순영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라서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다.[1]
2004년 6월 1일, 김채곤은 출소해 가택수감되었고, 전자감응장치(일명 전자발찌)가 채워졌다. 6월 4일에는 모친 황태남이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으나, 미국 당국이 출국을 불허해 모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7월에는 모범수로 인정받아 형량이 15% 감형되었으며, 자서전 《집으로 돌아오다》를 발간했다. 7월 27일에는 전자감응장치가 해제되어 완전 석방되었으나, 3년간의 보호관찰 기간이 남았다.
2004년 8월 1일, 김채곤은 '보호관찰 기간을 줄여달라'는 신청서를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에 제출했다. 2005년 10월 3일, 브링크마 담당판사는 김채곤이 그동안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했고, 석방 이후 보호감찰 기간에도 위반사항이 없었으며, 김채곤이 유출한 정보는 이미 10년 전의 정보이기에 더 이상 미국 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여 보호관찰 종료를 허락했다.
4. 유출 정보 내용
김채곤이 백동일 대령에게 전달한 정보는 기밀로 지정되지 않은 자료들이었다. 김채곤은 이들 자료가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우방국과 미국이 공유했던 자료였다고 주장했다.[9]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9]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과 조선인민군의 동요 여부
- 국제사회가 보내준 식량이 인민군에게 유입되었는지 여부
- 휴전선 부근의 인민군 배치 실태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해외로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무기 현황
- 조선인민군 해군의 동향
- 주민의 탈북 실태
- 북한의 내부 소요 진압용 무기 구매 첩보
김채곤은 1996년 9월 18일 강릉에서 발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잠수함의 침투 경로를 백동일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백 대령이 속초 앞바다에 북한 잠수함 사고가 났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자, 김채곤은 해군정보국에 입수되는 한반도 주변 시간별 데이터를 분석해서 제공했다.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은 2기였는데 좌표상으로는 1기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나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5. 사건 이후
석방 후 김채곤은 대한민국과 미국을 오가며 여러 활동을 했다. 2005년 11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자신은 스파이가 아니며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자 정보를 제공했을 뿐이라고 밝혔다.[2][3] 2007년 말에는 2007년 대선에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5]
5. 1. 대한민국 방문 및 사회 활동
2005년 11월 6일 김채곤은 대한민국을 일시 방문하였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백동일과 동생 김성곤이 그의 귀국길을 맞았다. 입국 기자회견에서 그는 "나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조국의 통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겠다는 생각에 아무런 대가없이 백 대령에게 정보를 전달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후 김수환, 김대중, 조용기 등 당시 사회 저명 인사들을 방문했다.[2][3]같은 달 24일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다음 해 5월에 가족과 시간을 보낼 목적으로 다시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2006년 월드컵 응원 메시지도 남겼다.[4]
2008년 설날에 맞춰 방한하여 고향 여수시와 태안 기름 유출 사고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2009년 초에는 2005년 석방 후 방한 당시 방문했던 로마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이 사망하자 그를 애도하는 글을 남겼다.[6]
5. 2. 이명박 정부에 대한 메시지
2007년 말,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김채곤은 민심 통합, 기업 환경 조성,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 살리기, 그리고 교육 개혁을 최우선 정책 과제로 삼을 것을 당부했다. 또한, 북한과의 경제 협력은 북한 핵 문제와 인권 문제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추진해야 하며, 한미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조속히 해결하여 한국 경제의 발전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5]6. 관련 인물
김채곤 사건에는 여러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다.
- 백동일: 1995년 당시 주미 한국 대사관 해군 무관(전 해군대령)으로, 김채곤에게서 미국 해군의 C4I(지휘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관련 장비가 대한민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조언과 함께 총 39건의 정보를 받았다. 1996년 김채곤 체포 이후 외교관 면책특권으로 처벌은 면했으나 미국에서 강제 추방되었다.[1]
- 긴스버그: 김채곤의 변호인으로, 김채곤이 백동일에게 넘긴 자료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우방국에 이미 공개된 자료이므로 정보 유출은 맞지만 간첩 혐의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 김영삼: 1999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로 우리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답했다.[1]
- 이웅진, 김승연: 김채곤 체포 이후 여러 차례 생활비 등 후원금을 보냈다.
- 조순승: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으로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 당시 장관 홍순영에게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했다.[1]
- 홍순영 (외교관): 1998년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조순승 의원의 질의에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라서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다.[1]
- 황태남: 김채곤의 모친으로, 2004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김채곤은 미국 당국의 보호관찰 제도로 인해 출국이 불허되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 브링크마: 김채곤의 보호관찰 종료를 허락한 담당 판사. 김채곤의 모범적인 수형생활, 석방 이후 보호관찰 기간 중 위반사항 없음, 유출 정보의 시효 만료 등을 이유로 2005년 10월 5일부로 보호관찰 종료를 허락했다.
6. 1. 백동일
1995년, 김채곤은 주미 한국 대사관 해군 무관이었던 백동일(전 해군대령)에게 미국 해군의 C4I(지휘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관련 장비가 대한민국 실정에 맞지 않으니 신중하게 검토할 것을 조언했다. 이후에도 김채곤은 백동일에게 총 39건의 정보를 우편으로 보냈다.[1]1996년 9월, 김채곤이 FBI에 체포된 후, 백동일은 외교관 면책특권으로 처벌받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추방되었다. 당시 김채곤의 변호인은 그가 백동일에게 넘긴 자료가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우방국에 이미 공개된 자료이므로 정보 유출은 맞지만 간첩 혐의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6. 2. 김영삼
1999년 11월 9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로 우리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답했다.[1] 이는 김채곤 체포 사건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6. 3. 김대중
1997년 미국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에서 '간첩음모죄'로 징역 9년에 3년의 보호감찰을 선고받고 펜실베니아 알렌우드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하던 김채곤은 2004년 7월 27일 석방되었고, 2005년 10월 3일부로 보호관찰이 종료되었다.[1] 김대중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김채곤의 석방 이후 그와 만남을 가졌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화해와 협력을 추구했으며, 김채곤 사건은 이러한 대북 정책 기조와 맞물려 주목받았다.6. 4. 조순승
1998년 11월 6일 새정치국민회의 조순승 의원은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 홍순영 장관에게 김채곤 사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홍순영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라서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다.[1]6. 5. 홍순영 (외교관)
1998년 11월 6일 조순승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 홍순영 당시 장관에게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자, 홍순영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라서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다.[1]7. 논란과 평가
김채곤 사건은 간첩죄 적용을 둘러싼 논란과 더불어 한미 관계에 미친 영향 등 여러 측면에서 논란과 평가가 엇갈린다. 김채곤은 FBI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는데[1], 그에게 제공된 정보가 이미 다른 우방국에 공개된 자료라는 점에서 간첩죄 적용이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정보 공유 및 군사 협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 사건이 개인적인 문제이며 한국 정부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고[7], 외교통상부 역시 미국 시민권자인 김채곤의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문제 제기가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1]
7. 1. 간첩죄 적용 논란
1996년 9월 김채곤은 FBI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1] 1996년 9월 18일 강릉에서 발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잠수함의 침투 경로를 백동일에게 알려준 뒤 같은 달 24일 체포되었는데, 당시 김채곤의 변호를 맡았던 긴스버그는 김채곤이 백동일에게 넘긴 자료가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우방국에게 이미 공개된 자료로, 정보를 유출한 것은 맞지만 간첩 혐의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백동일은 외교관 면책특권으로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강제 추방되었다.1997년 7월, 미국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은 김채곤에게 '간첩음모죄'로 징역 9년에 3년의 보호감찰을 선고했고, 김채곤은 펜실베이니아 알렌우드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7]
1998년 11월 6일, 조순승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 당시 장관 홍순영에게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자, 홍순영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라서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다.[1] 1999년 11월 9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로 우리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답했는데,[7] 김채곤은 (체포)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과 한국 정부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뺌했을 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밝혔다.[7]
2005년 10월 3일, 브링크마 담당 판사는 김채곤이 모범적인 수형 생활을 했고, 석방 이후 보호관찰 기간에도 위반 사항이 없었으며, 김채곤이 유출한 정보가 이미 10년 전의 정보이므로 더 이상 미국 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보호관찰 종료를 허락했다.
김채곤은 "미 정보기관은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한 우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정보 공유 체제에서 밀려나 있는 한국의 상황이 안타까워 정보를 제공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또한, 백 대령에게 북한 잠수함 사고 관련 정보를 제공한 것에 대해, 해군정보국에 입수되는 한반도 주변 시간별 데이터를 분석하여 제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7. 2. 한미 관계에 미친 영향
김채곤 사건은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정보 공유 및 군사 협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히 1996년 김채곤이 FBI에 체포되면서 양국 관계에 긴장감이 조성되었다.[1]1998년 11월 6일, 조순승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했지만, 홍순영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라서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변했다.[1] 1999년 11월 9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로 우리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답했다.
참조
[1]
뉴스
《뉴스메이커》
1998-11-26
[2]
뉴스
로버트 김,각계원로와 ‘감사의 만남’…6일 고국방문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3]
뉴스
로버트 김 “난 스파이가 아니었다”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4]
뉴스
극비 방한 로버트 김 "아! 이 녀석이었구나..."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
[5]
뉴스
<이명박에 바란다>‘조국을 사랑한 스파이’ 로버트 김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6]
뉴스
조국을사랑한스파이 로버트김 '김수환 추기경의 추억'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7]
인터뷰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
[8]
간행물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9]
웹사이트
predaily
http://www.pr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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