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김수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수환은 1922년 대구에서 태어나 군위에서 성장했으며, 한국 천주교의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1969년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 군사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하고 2009년 선종할 때까지 사회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과 종교 간 화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2009년 8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성유스티노신학교 동문 - 김동한 (1919년)
    김동한은 천주교 순교자 집안 출신으로 대한민국 해군의 초대 군종 신부이자 김수환 추기경의 형이며, 사제 서품 후 사목 활동과 해군 군종 신부로 복무하며 한국 가톨릭 결핵 시설 연합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 군위초등학교 동문 - 이슬비 (컬링 선수)
    이슬비는 대한민국 여자 컬링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세계 선수권대회와 동계올림픽에 참가했으며, 경기도청 소속으로 활동 후 은퇴,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고, 결혼 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했다.
  • 군위초등학교 동문 - 박순자
    박순자는 민주정의당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경기도의원, 제17, 18, 2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신안산선 조기 개통을 추진하다가 공천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 대한민국의 추기경 - 염수정
    염수정은 1943년 안성에서 태어나 5대째 가톨릭 신앙을 이어온 가정에서 성장하여 사제가 되었고,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대행 대주교를 거쳐 2014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생명 존중, 사회 정의, 남북 화해를 위해 활동하다 2021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사임한 대한민국의 천주교 추기경이다.
  • 대한민국의 추기경 - 유흥식
    유흥식은 1951년생 대한민국 출신 천주교 추기경이자 대주교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으며, 사제로서 사회복지 및 북한 지원 활동에 헌신,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임명 후 추기경에 서임되었고, 사목 표어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이다.
김수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서울대교구 대주교 (1968년)
존칭 접두어그의 에미넌스
이름스테파노 김수환
직함추기경, 서울대교구 명예 대주교
로마자 표기Gim Su-hwan
한자 표기金壽煥
출생일1922년 5월 8일
출생지대구, 일제강점기 조선
사망일2009년 2월 16일
사망지서울, 대한민국
국적한국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문장
가톨릭 직책
교구서울대교구
전임자노기남
후임자정진석
서품일1951년 9월 15일
주교 서임일1966년 5월 31일
주교 서임자안토니오 델 주디체
추기경 서임일1969년 4월 28일
추기경 서임자교황 바오로 6세
추기경 계급사제급 추기경
좌우명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
한국 이름 정보
한글 이름김수환
한자 이름金壽煥
로마자 표기Gim Su-hwan
학력
출신 학교상지대학교
가톨릭대학교
뮌스터 대학교
관련 정보
본관광산 김씨

2. 생애

김수환은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 소피아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서울의 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졸업했다. 잠시 안동에서 사제로, 대구대교구에서 서기로 일한 후, 1956년부터 1963년까지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18]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군복을 입고 전석재 신부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 계산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21]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한국인 최초이자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다.[22]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다. 1975년부터는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1년 크리스마스 미사에서 박정희의 비상대권 입법을 비판했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금됐을 때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석방을 얻어냈다.[30] 1980년대 군사정권 출범 뒤에도 12.12 사태, 광주 민주화 운동,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등을 비판하며 재야 활동을 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보호하며 경찰 투입을 막기도 했다.[34]

노태우 정부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명이었으며,[40] 1998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정진석 대주교에게 물려준 이후에도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2000년부터는 전쟁의 참상·평화의 가치 체험현장 전시회 추진공동위원장으로 활동했다.[45]

1998년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고, 법정 스님명동성당을 방문하는 등 종교 간 화합에도 힘썼다.[42] 장면 총리 재평가 작업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44]

2005년 강정구 교수의 한국 전쟁 관련 발언을 비판하고, 황우석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등 사회적 발언을 이어갔다.[62]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장면, 노기남, 김성수를 친일파로 선정하자 유감을 표명하였다.

2009년 2월 16일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하였다.[79][80] 장례는 명동성당에서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원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91][92]

2. 1. 생애 초기

김수환은 1922년 7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보냈다. 8살 때 아버지 김영석 요셉을 여의고 홀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가톨릭 신자였다. 어머니 서중하는 가난한 옹기장수였던 김영석과 결혼하여 고단한 삶을 살았으나, 자식들 앞에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김수환의 부모는 여덟 자녀 모두가 가톨릭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넷째 형 김동한과 김수환, 두 명만이 사제의 길을 걸었다.

김수환 군위 옛 생가(2016년 11월 촬영)


4세 때 군위로 이사했으며, 8세에 군위공립보통학교(현 군위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1학년 재학 중 아버지 김영석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서중하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며 자식들을 엄하게 키웠다. 김수환은 생전에 "어머니는 자식들 교육에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해주셨다. 그 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였다.[15]

보통학교 재학 시절의 김수환(가운데)


어릴 적 꿈은 상인이 되는 것이었으나, 상급학교 진학과 그리스도 신앙의 영향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 김수환과 넷째 형 김동한은 어머니로부터 사제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다.[14][17] 군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족들이 대구로 이사하면서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학하여 1935년에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교구의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지속하였다. 1941년 4월, 20세의 김수환은 대구교구의 장학생으로 일본 조치대학교(소피아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했으나, 점차 독립투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18] 일본 유학 시절 친일 성향의 일부 학생들과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부 교수들과 관리들의 부당한 처우로 방황했지만 독일가톨릭 사제의 격려로 학업을 지속하였다고 한다.

2. 1. 1. 광복과 사제 서품

1944년(당시 23세) 김수환은 조치 대학교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무렵에 강제로 학도병에 징집되어 도쿄 남쪽의 후시마 섬에서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훈련을 마쳤으면 소위로 임관할 터였지만 일본군 상관에게 훈련에 대한 고충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말해서 후보생 자격이 박탈되어 병(兵)으로 신분이 격하되었다.[18] 이때 일본 군복을 입고 '전석재' 신부와 촬영한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어 비난의 소재가 되었다.

학도병 시절 전석재 신부와 김수환(오른쪽)


이듬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조치 대학교에 복학했으나 1945년 9월에 자퇴한 후 귀국하고 이듬해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1951년 9월 15일에 대구에 있는 계산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18]

2. 2. 사목 활동

1944년 김수환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군복을 입고 전석재 신부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어 비난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 계산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21]

2. 2. 1. 사제 서품

김수환이 사제로서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안동성당이었다.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와 대구교구 재경부장을 겸임하였고, 1955년 6월에는 김천 성당의 주임 겸 교구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성의여고 교장으로 부임하여 1년 동안 재직하였다.[21] 1956년 7월, 35세의 나이로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학을 공부했으나, 독일에 일하러 온 한국 노동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아 학업 지속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 1960년 제2공화국 출범 소식과 이듬해 1961년 5.16 군사 정변 소식을 접하고 군인들의 정변에 반대했다. 1964년 귀국하여 그해 6월 '가톨릭시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2. 2. 2. 주교와 대주교

1966년 2월 15일(당시 43세)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5] 같은 해 5월 31일에 성지여자중·고등학교의 강당에서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김수환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구를 이끌었으며, 초대 교구장으로서 마산교구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8년 4월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서임되었고, 5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에 착좌하였다.[7] 당시 서울대교구는 교구장이 1년 가까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행정 상태가 매우 어려웠는데, 김수환은 대주교로서 이를 잘 타개하여 안정된 행정을 수행하였다.

2. 2. 3. 추기경 서임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22]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티엔켄신'(토마스) 추기경, 일본의 '도이 다쓰오'(베드로) 추기경에 이어 세 번째이자,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이었으며,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2. 2. 4. 아시아 주교회의 준비 위원장

1970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부터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였다.[23]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미국 노트르담 대학, 일본 조치 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대학교, 타이완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3. 민주화 운동 참여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1년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에서 박정희의 비상대권 입법을 비판하는 강론을 하여 TV 생중계가 중단되기도 했고, 1972년 10월 유신 이후에는 박정희의 철권 통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금됐을 때, 김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고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며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다.[30]

1980년대 군사정권 출범 뒤에도 재야 활동을 하였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비판했고,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였다고 회고했다.[32]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당시에는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30] 1987년 4.13 호헌조치에 대해서도 미사에서 철회를 요구했고,[33]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텼다.[34]

1990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항소심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가보안법 및 남북통일문제에 대한 견해 등을 증언하면서, "국가보안법 자체도 사회 여론이나 민주화의 시점에서 볼 때 개정되거나 철폐돼야 할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36]

2. 3. 1.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

1969년 공의회에서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된 후,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1971년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에서 박정희의 비상대권 입법을 비판하는 강론을 하여 TV 생중계가 중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의 철권 통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금됐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고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며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다. 같은 해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에는 직접 추모사를 낭독하였다.

2. 3. 2. 1980년대 민주화 운동

1980년대 군사정권 출범 뒤에도 재야 활동을 하였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비판했다.[30]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였어요.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도 모르는 상태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며 가장 마음에 아팠던 일로 회고했다.[32]

명동성당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당시에는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30] 1987년 4.13 호헌조치에 대해서도 미사에서 철회를 요구했고,[33]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텼다.[34]

2. 3. 3.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재판 증언

1990년 4월 21일,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항소심 5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1988년 9월 22일 서경원 의원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 국가보안법 및 남북통일문제에 대한 견해 등을 증언했다.[35] 김수환은 서경원이 "북한으로부터 김수환의 방북을 추진하라"는 지령을 받고 자신을 만났다는 공소사실을 부인하면서, "서경원 의원이 나를 만나 방북 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서경원 의원 나름대로 남북 관계 개선이나 종교 자유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교회의 책임자인 나에게 자랑하고 칭찬받고자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또한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죄가 정부로서는 필요할지 몰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며 "국가보안법 자체도 사회 여론이나 민주화의 시점에서 볼 때 개정되거나 철폐돼야 할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36]

2. 4. 사회 통합 노력

노태우 정부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명으로 감시받았으며, 이는 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의 탈영과 폭로로 밝혀졌다.[40] 1991년 7월에는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를 방문, 장애인들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평화의 종을 울렸다.[39]

1998년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정진석 대주교에게 물려준 이후에도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2000년 12월 26일부터 2001년 1월 28일까지 강원룡 목사, 이돈명 변호사와 함께 전쟁의 참상·평화의 가치 체험현장 전시회 추진공동위원장으로 전시회를 주관하였다.[45]

2. 4. 1. 종교 간 화합

1998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하함으로써, 종교 간의 화합을 보여주었다. 1998년 2월 24일 법정 스님명동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지기도 하였다.[42]

2. 4. 2. 장면 총리 재평가 노력

1999년 4월 28일 김수환은 강원도에서 열린 추기경 서임 30주년 축하식에서 군종 사제들과 면담하며 "장면 총리의 역사적인 재평가 작업을 여생 동안 이뤄보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44] 6월 4일 장면 총리 서거 33주년 기념일에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김수환에게 장면의 포천 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하는 것을 제의하며 협조를 요청했다.[44]

2006년 장익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은 장면 전 총리 서거 40주년 미사를 공동으로 집전했다. 당시 김 추기경은 “장 전 총리는 성인의 지위에 오를 만한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24]

2. 5. 말년

2005년 10월 동국대학교의 강정구 교수가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개입을 비판하자, 김수환은 10월 21일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강정구를 비판하였다.[62] 김수환은 강정구의 미군 개입 비판에 대해 ‘전쟁 당시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 달 내에 통일됐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고, 그래서 미군은 우리의 원수다.’라는 의미로 압축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62]

김수환은 강정구의 발언 중 한국 전쟁이 ‘남침’으로 발발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국 전쟁이 남침이었다는 말은 그쪽 진영의 사람들 입에서는 오랜만에 듣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 전쟁에 대해 늘 북침이었다고 말해 왔지요. 소련도 북한을 따라서 북침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한국 전쟁이 남침이었다는 말이 강정구라는 사람을 통해서 처음으로 실토했어요.”라고 말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통일이 좌절되어 아쉽다는 강정구의 발언에 대해서는 “이는 곧 조선인민공화국이 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이 그때 무너졌어야 하는데, 무너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라며 비판하였다.[62]

김수환은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순교한 몇몇 사제들의 순교사를 언급하며, 현재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니라면 교회와 추기경 자신과 다른 성직자들도 없었을 것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도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62] 이어 강 교수의 생각이 심각하다면서 강 교수의 바람처럼 되었다면 이 나라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고, 신체의 자유도 없을 것이고 많은 사람이 강제수용소에 갇혀서 숨도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정일의 지배 아래 살고 있을 것이라 지적하며 어떻게 자유가 없는 김정일의 독재체제 아래 있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느냐며 비판을 가하였다.[62]

2. 5. 1. 은퇴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은 세계 주교 시노드 아시아 특별 총회 대표단장을 역임한 직후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2004년 프란츠 케니히 추기경이 선종하면서, 1969년에 추기경에 서임된 이들 중 가장 선임 추기경이 되어 추기경단의 최고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김 추기경은 건강이 좋지 않아, 요한 바오로 2세 서거 후 사도좌 공석 기간 의례에서 프로토프레즈비테로(최고참 추기경 사제) 직무는 우제니오 데 아라우주 살레스 추기경이 대신 수행했다. 그는 1969년에 추기경에 서임되었고, 사제 서품 및 주교 서품은 김 추기경보다 빨랐다.

2002년 80세가 되면서 교황 선거 투표 자격을 상실하여, 이후 콘클라베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6세의 교황 즉위식에는 참석하여 프로토프레즈비테로 추기경의 직무를 수행했다.

2. 5. 2. 생명 윤리

2001년 1월 26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직전의 사형수들을 찾아 미사를 집전한 뒤 기자회견에서 그는 사람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생명경시 풍조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하였으며,[46] 사형제도와 낙태 문제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다. 2004년 동아일보와의 기자회견에서 "사형제 폐지, 낙태 반대 등은 모든 것이 다 생명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슨 돈을 벌기 위해서, 권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줄여서 말하면 참생명이다. 참생명은 현실에서만이 아니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이며 생명은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62]

황우석 사태가 일어난 후 2005년 12월 김수환 추기경은 성탄절 대담 자리에서 배아줄기세포 진위 논란 사태에 대한 소감을 말하며 두 번이나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71]

2. 5. 3. 친일 청산 논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장면노기남, 김성수를 친일파로 선정하자 김수환은 유감을 표명하였다. 2005년 10월 21일 동아일보와의 기자회견에서 이들을 친일파로 선정한 것을 비판하였다.[62] 기자회견에서 장면, 노기남, 김성수를 변호하였는데, 그는 일부 민간단체에서 친일파로 선정한 것에 대해, 그 당시 노기남 대주교는 천주교 대표로, 신자 대표로는 장면 박사가 선정된 것이지 그 두 사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음을 해명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그런 것을 보고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행동이며 그런 어른들에 대한 모독이다. 만일 그 잣대로 보면 저도 학병을 갔다 왔고, 창씨 개명을 했고,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하였으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라며 친일파 선정 기준을 비판하였다.[62]

노기남의 업적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교구에서는 일본 사람이 주교가 되었으나 서울은 그래도 노기남 주교님 같은 분이 계셔서 우리 민족에게 대단히 뜻 깊은 기쁨을 주었다, 한국 사람이 그 시대에 주교가 됐다는 점은 대단히 뜻 깊은 사건이고 피상적인 판단으로 어른들을 비난해선 안된다"고 평가하였다.[62]

김성수에 대해서도 김수환은 김성수는 친일이 아니라 정말 민족독립을 위해서 엄청나게 공을 세운 분이라 칭송하였다. 독립운동 하는 분들에게 자금을 대고, 민족지라고 할 수 있는 동아일보를 운영하고 중앙고와 고려대를 세워 교육사업을 펼쳤으며, 민족혼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 언론활동을 하고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노력한 것 등을 지적하며, "단순하게 관찰하고 친일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변호하였다.[62]

2. 5. 4. 반미주의 비판

2005년 10월 동국대학교의 강정구 교수가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개입을 비판하자, 김수환은 10월 21일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강정구를 비판하였다.[62] 김수환은 강정구의 미군 개입 비판에 대해 '전쟁 당시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 달 내에 통일됐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고, 그래서 미군은 우리의 원수다.'라는 의미로 압축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62]

김수환은 강정구의 발언 중 한국 전쟁이 ‘남침’으로 발발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국 전쟁이 남침이었다는 말은 그쪽 진영의 사람들 입에서는 오랜만에 듣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 전쟁에 대해 늘 북침이었다고 말해 왔지요. 소련도 북한을 따라서 북침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한국 전쟁이 남침이었다는 말이 강정구라는 사람을 통해서 처음으로 실토했어요.”라고 말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통일이 좌절되어 아쉽다는 강정구의 발언에 대해서는 “이는 곧 조선인민공화국이 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이 그때 무너졌어야 하는데, 무너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라며 비판하였다.[62]

김수환은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순교한 몇몇 사제들의 순교사를 언급하며, 현재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니라면 교회와 추기경 자신과 다른 성직자들도 없었을 것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도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62] 이어 강 교수의 생각이 심각하다면서 강 교수의 바람처럼 되었다면 이 나라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고, 신체의 자유도 없을 것이고 많은 사람이 강제수용소에 갇혀서 숨도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정일의 지배 아래 살고 있을 것이라 지적하며 어떻게 자유가 없는 김정일의 독재체제 아래 있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느냐며 비판을 가하였다.[62]

2. 5. 5. 진보 진영과의 갈등

김수환은 사립학교법 개정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하고, 국가보안법 존치를 지지하여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2. 6. 선종

김수환은 2008년 7월부터 노환으로 서울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2008년 10월 4일 오전 한때, 호흡 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는 등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으나 회복하였다.[78]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경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79][80]

장례는 명동성당에서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원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2009년 2월 20일)[91][92] 선종 후, 1990년에 서약한 장기 기증 의사에 따라 각막을 기증하여 두 명의 환자에게 이식되었다.

김수환의 선종에 개신교, 대한 성공회, 한국 정교회, 불교, 천도교, 원불교 등 각 종파에서도 애도를 표했다.[79][80] 전국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졌으며,[81] 2월 20일 자정까지 38만 7천 420여 명,[82] 2월 21일에는 약 40여만 명이 성당을 찾아 조문한 것으로 집계되었다.[84]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500만 명), 박정희 전 대통령(200만 명), 김구(100만 명)에 이은 역대 4번째 최다 조문객 방문 기록이다.[83]

입관 후의 모습


당초 서울대교구장으로 장례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교황 베네딕토 16세정진석 추기경을 특사로 임명하여 교황장으로 격상되었다.[93] 베네딕토 16세, 이명박 대통령(한승수 국무총리가 대독), 오스발도 파딜랴 주한 교황대사 등이 추도사를 했다.[94]

비석에는 김수환의 사목 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가 한국어라틴어로 새겨졌으며, 비문(碑文)으로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라는 시편 23편의 구절이 새겨졌다.[96][97]

3. 사후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서울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선종하였다. 선종 전 김 추기경은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두 명의 환자에게 각막이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1]

3. 1. 추모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약 40만 명의 조문객이 명동성당을 방문했다.[84] 이는 역대 4번째 최다 조문객 방문 기록이다.[83] 조문객들은 명동성당부터 퇴계로 4가, 명동역을 잇는 3킬로미터가 넘는 긴 행렬을 이루었으며, 평균 3시간 30분 가량을 기다려 조문하였다.[88] 이명박,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들과 정치인, 정부 관계자, 주한 외교 사절 등 각계 인사들이 조문하였다.[89][90]

장례 미사는 2009년 2월 20일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91] 시신은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원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92] 당초 서울대교구장으로 장례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교황 베네딕토 16세정진석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임명하여 교황장으로 격상되었다.[93] 추도사는 베네딕토 16세, 이명박 대통령(한승수 국무총리가 대독), 오스발도 파딜랴 주한 교황대사 등이 했다.[94]

비석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가 한국어라틴어로 새겨졌으며, 비문(碑文)으로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라는 시편 23편의 구절이 새겨졌다.[96][97] 장례는 가톨릭 예식과 유교 예식이 어우러져 치러졌으며,[98][99] 관련 의식은 국가기록물로 지정되었다.[100]

2월 22일에는 대한민국 전국의 성당에서 추도 미사가 열렸다.[101][102] 서울대교구는 2009년 4월 5일까지 사순절 기간을 김수환 추기경 추모 기간으로 선포했다.

3. 2. 영향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서울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선종하였다. 선종 전 김 추기경은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두 명의 환자에게 각막이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1]

4. 평가와 비판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며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야당 및 보수 진영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며 진보 진영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50][51][57][59][115]

4. 1. 평가

김수환 추기경은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며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은 교회의 사회참여를 강조하였고, 김수환 추기경은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였다.[37]

김 추기경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며, 교회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사회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은 유신체제 하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하여 탄압받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37]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대중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37]

198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빈민 사목 위원회를 설치하고, 추기경 재임 기간 동안 150개의 복지기관을 설립하는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사회선교에 힘썼다.[22][38] 1985년에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을 찾아 사북 탄광 체험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39]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인간 박정희가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에는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는 말로 전두환 정권의 공권력을 비판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다.

4. 2. 비판

김수환 추기경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에 야당 및 보수 진영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며 진보 진영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50][51][57][59][115] 2004년 사순절 기념 강연에서 노무현 탄핵 사태와 관련하여 여당에 참을 것을 주문하고,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의 단식 농성 현장을 방문하여 함세웅 신부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52][114]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하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때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했으며, 국가보안법 존치를 지지하여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57][59][115][118]

손석춘은 김수환 추기경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과대 평가되었다고 비판했다.[116] 백남해 신부는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로 조사받을 뻔했던 김 추기경의 경험을 언급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119] 호인수 신부는 김 추기경이 본래 귀족적이고 정치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비판했다.[120]

이러한 비판들은 대한민국 권력 구조가 균형을 잡은 상황에서 김 추기경이 특정 정치 노선에 치우치는 것이 거대 종교 지도자로서 적절치 못한 행동일 수 있다는 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61]

5. 저서


  • 이 땅에 평화를 - 김수환 추기경과의 대화, 1988
  •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 김수환 추기경의 세상 사는 이야기 (사람과 사람, 1998)
  •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1999
  •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1999

6. 문장

김수환 추기경 문장


방패 안의 왼쪽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 교회를, 오른쪽은 삼각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을 상징하며, 별은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심을 나타낸다. 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모자 아래의 술 5단은 추기경임을 뜻한다.[121]

아랫쪽에 리본에 씌어있는 "PRO VOBIS ET PRO MULTIS"는 라틴어이며, 한국어로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뜻이면서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표어이다.[122]

7. 가족 관계

관계이름세례명출생사망
할아버지김보현요한1848년1868년
할머니강말순1850년1915년
아버지김영석요셉1868년1929년
어머니서중하마르다나1880년1956년
셋째 형김필수1917년1993년
넷째 형김동한가롤로1919년 6월 25일1983년 9월 28일
조카김병호바르톨로메오
조카며느리이현구안젤라
조카김병기베드로
조카며느리문정자데레사
조카김병무요셉
조카며느리송희숙마리아


8. 기타

김수환은 경상북도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 도쿄의 소피아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서울의 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졸업했다. 잠시 안동에서 사제로, 대구대교구에서 서기로 일한 후, 1956년부터 1963년까지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77]

1998년 세계 주교 시노드 아시아 특별 총회 대표단장을 역임한 직후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2004년 프란츠 케니히의 사망으로 1969년 서품받은 추기경 중 가장 연장자가 되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요한 바오로 2세 서거 후 사도좌 공석 기간 의례에서 프로토프레즈비테로(최고참 추기경 사제) 직무는 우제니오 데 아라우주 살레스가 대신 수행했다.[77]

2002년 80세가 되어 교황 선거 투표권을 상실하여 그 이후 콘클라베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즉위식에는 프로토프레즈비테로 추기경 자격으로 참석했다.[77]

200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2008년 명동성당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가 마지막 공개 석상이었다. 2009년 2월 16일 서울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했고, 4일간 약 40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명동성당에서 조문했다. 2월 20일에 장례 미사 후 유언에 따라 장기 기증을 했으며, 추기경의 각막은 두 사람에게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77]

8. 1. 예술 활동

2007년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현대미술 오늘과 내일’ 전에 김수환이 그린 드로잉들이 전시되었다. 동성고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동문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에서, 동성상업학교(동성고등학교의 전신)를 1941년에 졸업한 김수환은 드로잉 14점과 평소 아끼던 붓으로 직접 쓴 판화 7점을 출품하였다.

김수환이 그린 드로잉은 검은색 유성파스텔을 이용해 동그란 얼굴 안에 눈, 코, 입 등을 그리고 그림 아래에 ‘바보야’라는 문구를 적은 자화상과 옛집, 원, 산, 기차 등이었다.[77]

8. 2. 수상 경력

연도훈장/수상 내역
2002년 11월베르나르도 오히긴스 대십자 훈장 (칠레)
2001년 1월대십자 공로 훈장 (독일)
2000년 11월제2회 인제인성대상 (인제대학교)
2000년 5월제13회 심산상 (성균관대학교)
1970년 8월국민훈장 무궁화장


참조

[1] 웹사이트 Stephen Cardinal Kim Sou-hwan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2018-05-26
[2] 웹사이트 김수환과 광산김씨 - 정복규 본사사장 http://www.iksannews[...] 2010-05-24
[3] 웹사이트 記念館紹介 http://www.cardinalk[...] 金寿煥愛と分かち合い公園 2024-09-25
[4] 웹사이트 南韩金寿焕枢机主教过世 社会各阶层代表与市民前往悼念 http://www.jlcatholi[...] 聖經百科 2009-02-20
[5] 웹사이트 Cardinal Kim Sou-hwan http://www.catholic-[...] www.catholic-pages.com 2009-12-30
[6] 웹사이트 The Cardinals of the Holy Roman Church http://www.fiu.edu/~[...] FIU 2010-01-13
[7] 웹사이트 韓国 首位韓国枢機卿金寿煥安息主懷、享年八十六歲 http://www.ucanews.c[...] 天主教亞洲通訊社 2009-02-20
[8] 웹사이트 https://japanese.joi[...]
[9] 웹사이트 四天四十萬群眾排成“人河”送別金寿煥 http://cablenews.i-c[...] 조선일보 2009-02-20
[10] 웹사이트 韓天主教精神領袖 紅衣主教金寿煥仙逝 http://chn.chosun.co[...] 조선일보 2009-02-17
[11] 웹인용 김수환 추기경 선종 12주기, 군위 생가에서 추모식 https://n.news.naver[...] 2022-10-20
[12] 뉴스 외신, 김수환 추기경 선종 긴급 타전 http://www.donga.com[...] 연합뉴스(동아일보) 2009-02-16
[13] 뉴스 김 추기경, 민중과 함께한 ‘실천적 신앙인’ http://news.kbs.co.k[...] KBS 2009-02-16
[14] 뉴스 “어머니 무릎서 신앙심 키웠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9-02-17
[15] 뉴스 김 추기경 "더 가난해야 했고 더 사랑해야 했다"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09-02-16
[16] 뉴스 "내 어머니처럼 큰 사랑 베풀지 못해 후회"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4-12-16
[17] 뉴스 "자기 것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한 법" <김수환추기경 어록> http://www.heraldbiz[...] 해럴드경제 2009-02-16
[18] 뉴스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신앙>(종합) http://app.yonhapnew[...] 연합뉴스 2009-02-16
[19] 뉴스 김추기경, 서품前 프러포즈 받아 한때 고민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9-02-19
[20] 뉴스 At 100, philosopher finds joy in freedom: Kim Hyung-seok’s faith has taught him lessons about helping others https://koreajoongan[...] 코리아중앙데일리 2020-02-06
[21] 뉴스 [대구·경북] "역정 한번 안 내신 천사였습니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2-20
[22] 뉴스 김수환 추기경 선종, 향년 87세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9-02-16
[23] 뉴스 추기경, 훈장추서 왜 없을까 http://www.heraldbiz[...] 해럴드경제 2009-02-20
[24] 웹인용 ‘또 하나의 정부’ 김수환 추기경 공식 전기 나왔다 https://www.hankooki[...] 한국일보 2016-02-10
[25] 웹인용 <역사저널 그날> 성탄기획 그곳에 명동성당이 있었다 https://mylovekbs.kb[...] KBS 2020-12-21
[26] 뉴스 [선종 김수환 추기경 추모] MB,천주교병원으로 맺은 인연 각별 http://www.kukinews.[...] 국민일보 2009-02-17
[27] 뉴스 [사설] 세상에 큰 사랑 남긴 김수환 추기경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9-02-21
[28] 뉴스 [길을찾아서] 인혁당 가족 돕자 시작된 미행과 도청 / 문정현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9] 뉴스 김 추기경 어록‥시대 비춘 양심의 소리 http://imnews.imbc.c[...] MBC 2009-02-18
[30] 뉴스 12·12뒤 전두환 면전서 “서부활극 같다” 일침 http://www.hani.co.k[...] 한겨레 2009-02-17
[31] 뉴스 [김수환 추기경 추모 물결] 추기경님, 가시난닷 다시 오쇼서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2-20
[32] 뉴스 <김수환 추기경의 웃음과 눈물>(종합)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9-02-16
[33] 뉴스 시대의 양심, 실천적 종교인 http://www.ytn.co.kr[...] YTN 2009-02-16
[34] 뉴스 암흑의 시절 '민주화' 중심… 국민들은 그의 입을 쳐다봤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2-17
[35] 뉴스 세계일보 김수환추기경 첫 법정증언 세계일보 1990-04-22
[36] 뉴스 한국일보 김추기경 증언/홍윤오 사회부기자(기자의 눈) [미분류] 한국일보 1990-04-22
[37] 웹사이트 가톨릭 대사전 http://info.catholic[...]
[38] 뉴스인용 김 추기경 선종.. "사랑하며 살라" 뜻 남겨 (종합) http://www.asiae.co.[...] 아시아경제 2009-02-21
[39] 뉴스인용 장익·지학순 주교 일화·사북 탄광체험 등 소개 http://www.kwnews.co[...] 강원일보 2009-02-20
[40] 웹인용 보안사, 저명인사 1300명 사찰 - 탈영사병 양심선언 https://web.archive.[...] 천주교인권위원회 2009-02-17
[41] 뉴스인용 순교자 집안서 태어나 인권·사회운동 중심에 http://www.naeil.com[...] 내일신문 2009-02-21
[42] 뉴스 천주교-불교 종교초월한 교감 확산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8-02-27
[43] 뉴스인용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이모저모' https://web.archive.[...] 매일신문 2009-02-21
[44] 뉴스 故 장면 총리 공정한 평가 필요 http://www.catholict[...] 가톨릭신문 1999-05-09
[45] 뉴스인용 전쟁의 참상·평화의 가치 체험현장 http://www.kukinews.[...] 국민일보 2000-12-28
[46] 뉴스인용 김수환 추기경, 서울구치소서 사형수 포함 재소자 미사집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1-10-26
[47] 뉴스인용 [출판] 한국 정당정치 실록 1.2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1-02-08
[48] 뉴스인용 [종교]"한국인 제2 추기경 나와야 한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3-01-03
[49] 뉴스인용 김수환 추기경 “마음 편히 잘 수 있게됐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02-21
[50] 뉴스인용 "金추기경 시대착오적" 함세웅신부 발언 파문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4-04-01
[51] 뉴스인용 "광화문 네거리 '촛불'은 장엄한 기도 김 추기경 생각은 다소 시대착오적"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4-04-01
[52] 뉴스인용 함세웅 신부 또 김수환추기경 비판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4-07-16
[53] 뉴스인용 "일부 성직자 <조선>에 이용당하고 있다 역사·가족 앞에 부끄럽지않은 기자 돼야"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4-07-17
[54] 뉴스인용 김수환 추기경의 마음까지 흔들어놓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http://www.maxmovie.[...] 맥스무비 2004-03-26
[55] 뉴스인용 [포토]김수환 추기경 '마더 데레사' 관람 http://star.moneytod[...] 스타뉴스 2005-01-12
[56] 뉴스인용 "김 추기경 즉위식 공동집전은 한국 가톨릭의 영광"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5-04-25
[57] 뉴스인용 암울한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의 ‘정신적 지주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02-21
[58] 뉴스인용 [태평로] 인간의 길에서 신의 길을 보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2-21
[59] 뉴스인용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까지 이용해먹는 보수신문들 https://web.archive.[...]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9-02-21
[60] 뉴스인용 [오병상 시시각각]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숙제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2009-02-22
[61] 뉴스인용 "김수환 추기경, 그는 과연 변절했는가?"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9-02-22
[62] 뉴스인용 [`정체성 혼란` 한국號 어디로가나]김수환 추기경 특별회견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5-10-21
[63] 뉴스 "장면 전 총리 재평가 해야" 여론 높아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9-02-18
[64] 뉴스 [건국 60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마지막회] 김수환 추기경 https://news.naver.c[...]
[65] 뉴스인용 장례날까지 악플… 눈 못감으신 추기경 http://www.heraldbiz[...] 해럴드경제 2009-02-20
[66] 뉴스인용 "수구꼴통" "친일파"···좌파 네티즌들 김 추기경 때리기 '추태' http://www.freezonen[...] 프리존뉴스 2009-02-19
[67] 뉴스인용 김 추기경 “2003년 친일 악플에 건강 악화” http://www.heraldbiz[...] 해럴드경제 2009-02-19
[68] 뉴스인용 진중권 “좌파의 추기경 비판은 배은망덕”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2009-02-20
[69] 뉴스인용 정말 철없는 '찌질이' 네티즌들 http://www.newdaily.[...] 뉴데일리 2009-02-19
[70] 뉴스인용 김 추기경 강제징집, 친일논란 종지부 http://www.moneytoda[...] 머니투데이 2009-02-21
[71] 뉴스 추기경의 눈물 "황우석 의혹 일부 사실로 세계 앞에 고개들 수 없는 …"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05-12-22
[72] 뉴스 이웃의 다정한 '혜화동 할아버지', 인간 김수환 http://news.sbs.co.k[...] SBS 2009-02-21
[73] 뉴스 김추기경의 아름다운 힘은 `서번트 리더십`서 나왔다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2009-02-21
[74] 뉴스 [기자의 눈/2월 21일] 경제도 김추기경 처럼 http://economy.hanko[...] 서울경제 2009-02-22
[75] 뉴스 김수환 추기경의 마음까지 흔들어놓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http://www.maxmovie.[...] 맥스무비 2004-03-26
[76] 뉴스 [포토]김수환 추기경 '마더 데레사' 관람 http://star.moneytod[...] 스타뉴스 2005-01-12
[77] 뉴스 85세 김수환 추기경의 드로잉 https://news.naver.c[...] 매일경제 2009-04-13
[78] 뉴스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한때 호흡기 의존" http://media.daum.ne[...] 연합뉴스 2008-10-04
[79] 뉴스 종교계, ‘종파의 벽’ 넘어 깊은 추모 물결 http://news.kbs.co.k[...] KBS 2009-02-16
[80] 뉴스 종교계 애도의 물결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9-02-16
[81] 뉴스 “아버지 잃은 슬픔” 1만여 신도·시민 마지막 배웅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02-22
[82] 뉴스 조문객 39만명 ‘끝없는 추모 물결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02-19
[83] 뉴스 김 추기경 선종에 40만 명 조문 http://www.naeil.com[...] 내일신문 2009-02-20
[84] 뉴스 최연소, 최고, 최다 기록 http://www.ytn.co.kr[...] YTN 2009-02-21
[85] 뉴스 명동성당 추모 조문 오늘 자정까지 http://mbn.mk.co.kr/[...] mbn 2009-02-21
[86] 뉴스 [김수환 추기경 추모] 마지막 밤까지 나눔다짐 행렬…오늘 교황葬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9-02-21
[87] 뉴스 장례절차 확정 http://srchdb1.chosu[...] 조선일보 2009-02-21
[88] 뉴스 배고픔도 추위도 잊은 3시간 줄 선 그들은 이미 성자였다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9-02-21
[89] 뉴스 ‘우리 곁에 부활한 金추기경’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9-02-22
[90] 뉴스 "동지이자 후원자"…전·현직 대통령과의 '인연' http://news.sbs.co.k[...] SBS 2009-02-21
[91] 뉴스 "나도 그분처럼 살겠습니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2-21
[92] 뉴스 장례미사 생방송 시청률 19.2%… 정진석추기경 100분간 집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9-02-21
[93] 뉴스 장례식은 서울대교구장에서 교황장으로 격상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2009-02-19
[94] 뉴스 “당신이 계셔서, 덜 부끄러운 역사를 살았습니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02-21
[95] 뉴스 애도 속 '장례미사'‥김 추기경, 영원한 안식 http://imnews.imbc.c[...] MBC 2009-02-21
[96] 뉴스 묘비명,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http://imnews.imbc.c[...] MBC 2009-02-19
[97] 뉴스 사랑, 사랑, 서로 사랑할게요…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9-02-21
[98] 뉴스 김 추기경 장례 미사는 ‘동·서양 혼합’ http://news.kbs.co.k[...] KBS 2009-02-21
[99] 뉴스 [추기경님, 편히 잠드소서] 창(唱) 연상시키는 위령기도… 염습·삼우제 우리전통 따라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2-22
[100] 뉴스 [김수환 추기경 영면] '장례 절차' 국가기록물로… 클린턴 미 국무도 애도 http://news20.busan.[...] 부산일보 2009-02-21
[101] 뉴스 오늘 정오 故 김수환 추기경 추도 미사 http://news.kbs.co.k[...] KBS 2009-02-22
[102] 뉴스 김 추기경 가르침 되새기며…전국에서 추도미사 http://news.sbs.co.k[...] SBS 2009-02-28
[103] 뉴스 "장기기증 서약 장면 눈에 선합니다"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9-02-19
[104] 뉴스 고 김 추기경의 각막…안동 70대 이식 https://news.naver.c[...] 뉴시스 2009-02-19
[105] 뉴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장기기증 등록 10배 늘어 https://news.naver.c[...] 뉴시스 2009-02-19
[106] 뉴스 全 장관 등 복지부 1, 795명 장기기증 서약 http://economy.hanko[...] 서울경제 2009-02-27
[107] 뉴스 스타들도 각막 기증 릴레이 http://www.fnnews.co[...] 파이낸셜뉴스 2009-02-19
[108] 뉴스 멈추지 않는 ‘명·동·기·적’ http://pdf.joins.com[...] 중앙일보 2009-02-21
[109] 뉴스 스타들도 각막 기증 릴레이 https://news.naver.c[...] 머니투데이 2009-03-21
[110] 뉴스 [week&커버스토리] 추모여행,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소풍’ http://life.joins.co[...] 중앙일보사 2009-06-04
[111] 뉴스 고 김수환추기경 본향은 연산,광산김씨로밝혀져,, http://www.gninews.c[...] 굿모닝논산 2009-04-01
[112] 간행물 영화칼럼 저산너머 천주교 서울대교구 2020-04-26
[113] 뉴스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사랑.화해 정신 더욱 그리워" http://www.hani.co.k[...] 한겨레 2019-02-17
[114] 뉴스 "일부 성직자 <조선>에 이용당하고 있다 역사·가족 앞에 부끄럽지않은 기자 돼야"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4-07-17
[115] 뉴스 [태평로] 인간의 길에서 신의 길을 보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2-21
[116] 뉴스 추기경의 근심, 백성의 걱정 https://news.naver.c[...]
[117] 뉴스 김수환 추기경의 '신문읽기' https://news.naver.c[...]
[118] 뉴스 [오병상 시시각각]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숙제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2009-02-22
[119] 뉴스 '시골의 한 어리석은 신부가 김수환 추기경께' https://news.naver.c[...]
[120] 뉴스 “김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https://news.naver.c[...]
[121] 뉴스 [추기경님, 편히 잠드소서] '삼각산과 서울'이 표현된 김(金)추기경 문장(紋章)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2-22
[122] 뉴스 찢기고 갈라진 우리 한데 묶어놓고… '큰어른' 김수환 추기경 영면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9-02-22
[123] 뉴스 김 추기경 "장면 전 총리, 나 일부러 때린 것 아니다" http://news.heraldco[...]
[124] 뉴스 金추기경, 장면 前총리 부자와 代 이은 인연 문화일보 2009-02-18
[125] 뉴스 장면 박사 서기 40주기 김수환 추기경 추모 미사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6-06-02
[126] 뉴스 김추기경, 제2공화국 재평가 주장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9-08-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