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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반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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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포반도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한국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김포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개성에서 후퇴한 국군 제1사단 12연대가 김포반도로 이동하면서 김포반도 일대에 육군, 공군, 교육기관 등 자체 방어 능력이 부족한 부대들이 배치되었다. 육군본부는 김포반도 방어에 미흡하게 대처했고,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하게 편성하여 대응했다. 전투는 북한군의 한강 도하와 상륙으로 시작되었고, 국군은 통진, 장림 등지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병력 부족과 지휘 체계의 혼란으로 인해 김포 평야를 내주게 되었다. 결국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부평으로 철수하였고, 북한군은 영등포를 점령하며 경인로 이북 지역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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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반도 전투
전투 개요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6월 25일 ~ 1950년 6월 28일
장소경기도 김포
결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대한민국계인주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대령 (6월 26일부터)
우병옥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중령 (6월 28일부터)
임충식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중령 (6월 29일부터)
최영희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대령 (6월 30일부터)
임무열 독립기갑연대 제1장갑수색대대장 소령
강문헌 제3도보수색대대장 대위
박태운 제8연대 3대대장 소령
한순화 제12연대 2대대장 소령
이재일 제15연대 1대대장 소령
안광영 제2대대장 소령
장춘권 제18연대 2대대장 소령
안민일 제3대대장 소령
손영을 제22연대 3대대장 소령
방원철 육군 보국대대장 소령
장영문 육군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장 소령
김광정 육군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장 소령 (6월 28일부터)
최복수 육군 남산학교장 대리 중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한일래 제14연대장 대좌
병력 규모
대한민국(정보 없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보 없음)
사상자 규모
대한민국(정보 없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보 없음)

2. 배경

6월 25일, 한강 북안의 개성에서 38도 분계선 경계를 맡고 있던 전성호 대령이 이끄는 제1사단 12연대가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개성 정면의 제2대대와 예성강 서쪽 정안의 제3대대가 남쪽으로 밀려 한강 북안에 몰리게 되면서 배를 이용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김포반도 대안에 북한군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김포 비행장을 중심으로 육군 정보학교인 계인주 대령의 남산학교, 엄홍섭 중령의 공병학교, 공군의 항공기지사령부, 공군사관학교, 보급창, 공군 병원 등의 부대가 있었다. 부평에는 윤태인 중령의 육군 제1공병단, 김창배 소령의 1기병대대, 심언봉 대령의 병기학교, 원태섭 대령의 경리학교, 이달고 소령의 제1육군병원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체 경계 능력조차 없는 교육기관이거나 지원 부대여서 조직적인 지역 방어가 불가능했다. 김포 비행장 서북쪽 30km 지점인 의정부 - 봉일천선에 이르는 김포반도 북단 지역에는 경계 병력이 전혀 없었다.

2. 1. 작전 계획

백선엽 대령은 육군본부가 38도 분계선 방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던 만큼, 자체적인 방어 개념을 가지고 임진강 선의 강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1사단 장병들은 김포반도를 사단의 후방지역으로만 여겼고, 방어 책임은 불분명한 채 별개의 지역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6월 25일 전성호 대령이 이끄는 제12연대 2대대가 김포반도로 철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육군 본부는 김포반도가 적의 공격 경로로 개방되어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대응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당면한 적의 공격 역량이나 아군의 방어 능력을 비교하거나 구체적인 방어 계획을 검토할 겨를도 없이, 김포 비행장 부근의 남산 학교를 중심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히 편성하여 김포 일원의 각급 부대를 통합, 김포반도로 상륙하는 적을 저지하도록 하는 임시방편을 만들었다.

6월 26일 아침, 남산학교장 계인주 대령이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서 김포 방어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즉시 학교의 참모들을 동 사령부의 참모로 전환하고, 지휘소를 김포읍김포경찰서로 옮겨 김포의 모든 육군 부대를 통합 지휘했다.

당시 김포반도 사령부에서 장악한 부대는 다음과 같다.

김포반도 사령부 장악 부대


3. 전투 과정

1950년 6월 25일 정오, 북한군의 YAK기가 김포 비행장을 공격하여 연료고가 화염에 휩싸였다. 김포 비행장 부근의 공군 부대들은 최용덕 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김포 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읍 북쪽 김포-통진도 길목인 44고지에 병력을 배치했다. 육군 부대인 남산학교는 개화산(130고지)을 점령하여 경계했다.

6월 26일, 백선엽 대령의 제1사단은 임진강선 강화에 주력했으나, 전성호 대령의 제12연대 2대대가 김포반도로 철수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육군 본부는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고, 계인주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김포 지역 부대를 통합 지휘했다.

6월 26일 아침,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김포경찰서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다음 부대들을 통합 지휘했다.

김포반도 사령부 장악 부대 (6월 26일)
부대위치비고
제12연대 2대대 일부김포
독립기갑연대 일부한남동
보국대대 일부문래동
보병학교 후보생시흥
공병학교 학생 일부김포
지휘관계인주 대령 (남산학교장 겸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제12연대 2대대는 통진 부근에서 북한군의 도하 저지 임무를 맡았다. 한순화 소령은 혼성병력 600명을 재편, 강안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1개 중대를 예비로 확보했다. 육군본부는 기갑연대 잔여 병력을 김포반도에 투입했다. 방원철 소령의 육군보국대대는 김포반도 방어를 자원, 통진 남쪽 180고지에 배치되었다. 민기식 대령의 시흥 보병학교는 후보생 대대를 편성하여 김포에 출동시켰다.

이날 밤까지 통진을 중심으로 3개 대대 병력이 배치되었으나, 부대 간 협조는 미비했다. 16:00경, 북한군은 한강 도하 정찰을 시작, 소규모 도하를 시도하다 조강리로 상륙을 시도했으나 곽응철 소위의 장갑소대가 적선을 격침하여 저지하였다.

6월 27일, 북한군은 염하를 건너 180고지의 보국대대를 궤산시키고, 강녕포 동남쪽 강안에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날이 밝으면서 북한군은 강녕포로 도하를 강행했고, 제12연대 제1중대와 장갑소대는 통진으로 철수했다. 북한군의 주력이 강녕포에 상륙하면서 103고지와 가금리의 제3, 제4 중대도 철수했다. 통진의 한순화 소령은 강녕포로 진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통진으로 후퇴했다.

통진에 집결한 제12연대와 기갑연대의 혼성병력은 장림 부근으로 철수했다. 기갑연대의 기병과 보병은 김포읍으로 철수하고, 후보생 대대와 제12연대 제2대대가 장림선을 맡았다. 후보생 대대는 장림 삼거리 북쪽, 제12연대 제2대대는 천마산(60고지) 일대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들은 장림에서 적의 침투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으로 13:00경 무너져, 후보생 대대는 김포읍, 제12연대 제2대대는 양곡 쪽으로 철수했다.

육군본부는 대구 제3사단 22연대 병력 중 제3대대를 김포지구에 출동시켰다. 부평의 잔류병력도 김포전선에 증원되었는데, 윤태일 중령의 제1공병단 산하 일부는 계양산(395고지) 동쪽 방축리 부근, 심언봉 대령의 병기학교 장교특전대는 한강변 전호 부근에 배치되었다.

6월 28일 06:00, 북한군 부대가 63고지 동북쪽 강가에 상륙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김촌성 중위의 기병 제7중대는 전력 부족과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63고지에서 철수했다. 11:00, 김포도로 서쪽 지역 운유산 일대의 진지를 지키던 부대들은 김포읍에서 장릉산과 주양산 동쪽 능선을 따라 부평에 집결했다. 이날 저녁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각 부대별로 대열을 정비했다. 시흥전투사령부는 우병옥 중령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포 비행장 탈환을 명령했다.

3. 1. 1950년 6월 25일

이날 정오에 북한군의 YAK기가 김포 비행장을 돌격하여 연료고가 화염에 쌓이기도 하였다. 이때 비행장 부근에 있던 공군 사관학교, 항공기지 사령부, 보급창, 헌병대 등은 사관학교장 최용덕 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김포 경비사령부를 독자적으로 편성하였다. 이들은 육군 부대와 적정 수집에 대한 정보 교환 및 협력을 목적으로 18:00에 사령부와 2개 중대를 김포읍으로 이동시킨 후, 병력을 읍 북쪽의 김포-통진도로 길목인 44고지 일대에 배치하였으나, 적정을 탐지하지 못한 채 긴장된 밤을 새웠다.

한편 육군 부대인 남산학교는 교장 계인주 대령이 보병학교에 교육 파견 중이었으므로, 부교장 최복주 중령의 지휘 아래 기간요원 40여 명이 개화산(130고지: 비행장 북쪽 2km)을 점령하여 지역 경계에 임하였다.

3. 2. 1950년 6월 26일

백선엽 대령이 이끄는 서부 전선의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구체적인 38도선 방어 계획 부재 속에서도, 개성 정면에 대해 자체적인 방어 개념을 가지고 임진강선 강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계획과 달리, 6월 25일문산으로 철수하지 못한 전성호 대령의 제12연대 2대대가 김포반도로 철수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육군 본부는 김포반도가 적의 공격 경로로 개방되어 있음을 뒤늦게 인지하고 대응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충분한 검토 없이 김포 비행장 부근 남산 학교를 중심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히 편성하고, 계인주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김포 지역 부대를 통합 지휘하도록 했다.

6월 26일 아침,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김포경찰서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다음 부대들을 통합 지휘했다.

김포반도 사령부 장악 부대 (6월 26일)
부대위치비고
제12연대 2대대 일부김포
독립기갑연대 일부한남동
보국대대 일부문래동
보병학교 후보생시흥
공병학교 학생 일부김포
지휘관계인주 대령 (남산학교장 겸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임진강 도하 문제가 중요해지면서, 육군본부는 한강 하구의 넓은 강폭(2000~3000m)을 고려하여 김포반도 방어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보병학교 고급반 학생이었던 계인주 대령을 남산학교장으로 복귀시키고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김포 지역 병력을 통합 지휘, 적의 도하를 막도록 했다.

전날 시암리에서 밤을 보낸 제12연대 2대대(대대장 한순화 소령)는 김포 전투사의 지휘 하에 통진 부근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받았다. 한순화 소령은 혼성병력 600명을 4개 중대로 재편, 가금리에서 강녕포에 이르는 강안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1개 중대를 통진 북쪽 고지에 예비로 확보하여 14:00경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육군본부는 기갑연대 잔여 병력을 김포반도에 투입했다. 박무열 소령 지휘 아래 장갑 제2중대와 기병대 7중대가 13:00에, 도보대대장 강문헌 대위는 본부중대 화기소대를 제9중대에 배속하여 16:00에 김포반도로 출발했다.

유승열 대령의 제3사단에 배속되어 밀양에서 공비 선무공작을 벌이다 영등포(문래동)로 복귀한 방원철 소령의 육군보국대대는 귀순장병 174명으로 3개 중대를 편성, 2개 중대를 제6, 7사단 정찰대로 파견하고 1개 중대만 본부에 대기 중이었다. 방원철 소령은 육군본부에 자진 출두하여 김포반도 방어를 자원, 100명도 안 되는 대원으로 99식 소총, 실탄 20발, 수류탄 1발씩을 가지고 민간 차량으로 15:00에 통진 남쪽 180고지에 배치되어 적을 막으려 했다.

민기식 대령의 시흥 보병학교는 전날 교도대를 문산으로 보낸 데 이어, 이날 학생연대 후보생으로 후보생 대대를 편성하여 김포에 출동시켰다.

이날 밤까지 통진을 중심으로 3개 대대 병력이 배치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독립적으로 투입되어 부대 간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대대장의 독단적인 부대 배치로 병사들은 자신들만이 대적한다고 생각했으며, 정보 교환 및 통신 수단도 미비하여 조직적인 저항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16:00경, 북한군은 한강 도하 정찰을 시작, 처음에는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소규모로 도하를 시도하다가 해 질 무렵 발동선이 예인하는 도하선정으로 소대 규모씩 조강리로 상륙을 시도했다. 곽응철 소위의 장갑소대가 장갑차 37mm 포로 적선을 격침하자 북한군은 조강리 상륙을 포기한 듯 보였다.

3. 3. 1950년 6월 27일

전날 밤 북한군의 일부가 염하를 건너 180고지의 보국대대 진지를 습격하여 보국대대가 궤산되었고, 한강에서는 북한군이 강녕포 동남쪽 강안에 상륙하여 강녕포 부근의 제12연대 제2대대의 제1중대와 103고지의 제3중대 사이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은 영등포에서 12mm 야포로 강녕포 일대를 포격하며 도하지원 사격을 시작했다.

날이 밝으면서 북한군은 영등포 부근에서 수집한 선박에 병력과 중장비를 싣고 포병의 엄호 하에 강녕포로 도하를 강행했다. 이에 호응하여 강안을 확보한 북한군이 강녕포-통진 도로를 차단하려 하자, 제12연대 제1중대와 장갑소대는 북한군의 포화와 후방 공격 위협에 통진으로 철수했다.

북한군의 주력이 강녕포에 상륙하면서 103고지와 가금리의 제3, 제4 중대도 철수하게 되었고, 통진의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강녕포에서 철수한 장갑소대와 180고지에서 흩어진 보국대대의 일부를 흡수하여 예비인 제2중대를 지휘, 강녕포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좁은 도로와 북한군의 포화로 장갑차 지원화력 활용이 어려워 화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막리(통진 북쪽 1.5km) 부근에서 문주산 동쪽으로 밀려드는 적을 막지 못해 통진으로 후퇴했다.

통진에 집결한 제12연대와 기갑연대의 혼성병력은 장갑차 엄호 하에 장림(통진 동남쪽 6km) 부근으로 철수했는데, 새벽에 180고지를 점령한 북한군 일부가 겉고개(통진 동남쪽 3.5km)를 차단하여 퇴로를 막고 있었다. 장갑차를 선두로 돌파하여 혼성병력은 11:00에 장림에 도착, 새로운 진지를 점령했다.

기갑연대의 기병과 보병은 김포읍으로 철수하고, 후보생 대대와 제12연대 제2대대가 장갑중대의 지원 아래 장림선을 맡았다. 후보생대대는 장림 삼거리 북쪽 구릉지대에, 제12연대 제2대대는 일부가 한강변에 분산되어 제2중대가 천마산(60고지) 일대에 진지를 급편하여 장림-양곡(장림 남쪽 4km) 간 도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후보생 대대의 99식 소총은 노후화되어 격발 장애가 잦아 실질적인 전투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후보생대대와 제12연대 2대대가 장림에서 적의 침투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으로 13:00경 무너져, 후보생 대대는 김포읍 쪽으로, 제12연대 제2대대는 양곡 쪽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북한군은 이날 낮 김포 평야까지 진출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6월 27일 10:00부 육본작명 제97호에 따라 서울로 이동한 대구 제3사단 22연대 병력 중 제3대대를 김포지구에 출동시켰다. 대구에서 열차로 수송된 차량으로 저녁에 김포읍에 집결한 대대는 운유산 동쪽 73고지 일대에 진지를 점령, 후보생 대대 및 증원된 제8연대 3대대와 함께 김포읍에 대한 최후 저지선을 맡았다.

이날 부평의 잔류병력도 김포전선에 증원되었는데, 윤태일 중령이 이끄는 제1공병단 산하 일부는 계양산(395고지) 동쪽 방축리 부근으로, 심언봉 대령이 이끄는 병기학교 장교특전대는 한강변 전호(김포 비행장 북쪽 4km) 부근에 배치되었다.

3. 4. 1950년 6월 28일

06:00, 어선을 타고 평도 동쪽의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북한군 부대가 배 위에 82mm 박격포를 설치하고 사격을 가하며 63고지 동북쪽 강가에 상륙하면서 이날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김촌성 중위가 이끄는 기병 제7중대는 강가를 경계하며 밤을 새운 후, 모든 화력을 동원해 대응했으나, 전력이 부족했고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기병대에서 훈련 중이던 말들이 포성에 놀라 날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북한군과 떨어져 63고지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08:00에 전날 밤 김포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제12연대 2대대의 남은 병력을 운유산으로 다시 보내 전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밤새 비가 오는 가운데 아침 식사도 못한 채 예상치 못한 강한 적을 만나게 된 병사들은 오직 투지만으로 버텨야 했다.

11:00, 사령부의 철수 명령에 따라 김포도로 서쪽 지역 운유산 일대의 진지를 지키던 후보생대대와 제12연대 2대대 및 기갑연대 도보중대는 김포읍에서 장릉산(146고지, 김포읍 남쪽 1km)과 주양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부평에 집결했다. 장갑차와 제8연대 3대대 및 제22연대 3대대의 일부는 사령부와 함께 김포 비행장을 향해 김포가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이동했다. 장갑차는 비행장-영등포가도를 경계하며 이동했고, 보병 일부는 굴포천을 건너 개화산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다.

이날 저녁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병사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서두르는 한편, 각 부대별로 밤을 새워 대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후보생대대와 기갑연대 도보대대 및 김억순 경감이 이끄는 부평경찰대를 계양산 동쪽 능선에 배치하여 김포-부평 도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제22연대와 제12연대 병력은 비행장 남쪽 구릉지대의 107고지(비행장 남쪽 4km) 일대에 배치하여 비행장 쪽에서 소사로 남진하는 적을 막기 위한 긴급 조치를 취했다. 이때 제8연대 3대대는 비행장에서 영등포 쪽으로 전진하여 새로운 활동 무대를 얻게 되었다.

이날 밤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계인주 사령관이 실종된 가운데 소사로 집결하자, 시흥전투사령부는 현지의 제3사단 참모장인 우병옥 중령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빨리 병력을 수습하여 김포 비행장을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시흥사령부의 이러한 비행장 탈환 명령은 비행장이 적의 침공로 상 중요한 지점이라는 점도 있지만, 행주에서 도하 철수 중인 제1사단의 철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7월 3일 아침, 한강을 건넌 북한군 전차와 오류동에서 온 부대가 합류하여 영등포를 장악하면서 김포동에서의 철수가 불가피해졌다. 같은 날 밤 자정 무렵에는 전차 6대를 앞세운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경인가도를 따라 인천을 점령, 경인가도 이북 지역은 모두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강과 오류동 방어선이 동시에 무너지자, 북한군은 선견대를 시흥으로 보내 국군과 접촉을 유지하면서 주력은 영등포와 오류동 부근에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듯했다. 이들이 경부국도를 따라 전차를 이용한 돌파를 시도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편, 오류동 전선에서 물러난 김포지구전투사령부(김포사) 병력 일부는 소사를 거쳐 소래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수원으로, 일부는 오류동에서 양지산(오류동 남쪽 6km) 기슭을 타고 안양으로 향했다.

김포사의 철수 명령은 최전선 참호 속 병사들에게까지 모두 전달되지 못했다. 어떤 병사는 그대로 진지를 지켰고, 어떤 병사는 명령을 받고도 더는 물러설 수 없다며 참호에 남았다. 이날 저녁 북한군 전차가 경인가도를 횡횡하자, 그제야 전차 사이를 뚫고 남하하거나, 인천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가기도 했다. 제12연대 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인천에서 배를 구해 보름 동안 서해안을 표류하다 군산에 상륙하기도 했다.

이날 저녁 김포사 주력이 안양 부근에 집결하면서 사령부는 재편되었다. 제15, 18 양 연대가 연대별로 시흥사령관 김홍일 소장의 지휘 하에 들어가 덕안(안양 서북쪽 4km) 부근 안양 저지선 서쪽 지역을 맡아 다시 한번 지연전을 벌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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