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덕 (1898년)
1. 개요
최용덕은 1898년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이다. 중국에서 유학 및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의열단 활동을 지원하고 중국 공군에서 복무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참모장, 공군 건설 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힘썼으며, 초대 국방부 차관, 공군참모총장, 체신부 장관, 대만 주재 대사 등을 지냈다. 6.25 전쟁에 참전하여 공군 발전에 헌신했으며,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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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최용덕 |
|---|---|
| 한글 표기 | 최용덕 |
| 한자 표기 | 崔用德 |
| 로마자 표기 | Choe Yong-deok |
| 이명 | 최용덕 (崔容德, 崔龍德) |
| 아호 | 창석(滄石) |
| 출생일 | 1898년 9월 19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방 |
| 사망일 | 1969년 8월 15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 29호 |
| 종교 | 불교 |
| 본관 | 경주(慶州) |
| 국적 | 대한민국 |
| 배우자 | 호용국(胡用國) |
| 자녀 | 최보욱(친자녀), 최긍욱(양자) |
| 부모 | 최익환(부), 태안 이씨 부인(모) |
| 학력 | 중화민국 육군 군관학교 졸업 중화민국 허베이성 바오딩 육군항공학교 졸업 중화민국 공군 군관학교 졸업 중화민국 육군참모학교 졸업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3기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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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 국민혁명군 중화민국 육군 중화민국 공군 대한광복군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공군 |
|---|---|
| 복무 기간 | 1916년 2월 15일 ~ 1956년 11월 1일 |
| 최종 계급 | 예비역 대한민국 공군 중장 |
| 참전 | 중일 전쟁, 한국 전쟁 |
| 직책 | 제2대 공군참모총장 제1대 국방부 차관 제10대 체신부 장관 자유중화민국 주재 대사 |
|---|---|
| 공군참모총장 임기 | 1952년 12월 1일 ~ 1954년 11월 19일 |
| 국방부 차관 임기 | 1948년 8월 20일 ~ 1950년 5월 14일 |
| 체신부 장관 임기 | 1960년 6월 2일 ~ 1960년 8월 22일 |
| 중화민국 대사 임기 | 1961년 7월 19일 ~ 1962년 7월 20일 |
| 서훈 |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8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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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
3·1 운동
3·1 운동은 1919년 일본의 무단 통치에 저항하여 시작된 한국의 독립운동으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일본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김학규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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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출신 -
정경심
정경심은 자녀 입시 비리 혐의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복역 후 가석방된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대학교수였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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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2. 생애
최용덕은 한성부(현재의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이 중국으로 이주했다. 1916년 중국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서왈보의 추천으로 중국 항공학교에 입학하여 조종사가 되었다. 중국 공군 군관학교 교관, 수상기 부대장, 공군 기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22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담하여 김상옥, 김시현 등의 활동을 지원했다. 1940년 중국 육군 대학교를 졸업하고 9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참모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공 건설 위원회 위원장,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하며 1945년 광복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1945년 8월 22일, 만주군 출신 박정희 등을 포함한 탈영병들을 수용했다. 1946년 초 한국으로 귀국하여 항공 건설 협회를 창설하고, 같은 해 항공 건설 협회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김정렬, 장덕창과 함께 대한민국 공군 창설을 위해 노력했다. 그해 8월, 국방경비대 항공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군은 그의 중국군 복무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군사 교육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1947년 4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5월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7월에는 진급하여 육군 항공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1948년 8월,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공군 기지 사령관, 공군사관학교 교장, 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역임했다. 1948년 11월 30일, 육군 항공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정전 협정 이후, 1952년 12월 1일부터 1954년 11월 19일까지 제2대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60년 6월 2일부터 1960년 8월 22일까지는 사무처 장관 및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했다.
1956년에 군에서 퇴역했으며, 명예 중장 칭호를 받았다. 1961년, 중화민국 (대만)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공군가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1962년, 독립 유공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69년 8월 15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언은 "내가 죽으면 공군 군복을 입혀 달라"는 내용이었다.
2.1. 독립운동과 중국 군대 복무
1898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군사 교육을 받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다. 1916년 중국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서왈보의 추천으로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들어가 비행사가 되었다.
1922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여 김상옥, 김시현 등의 의거를 지원하였다.
1930년대에는 중국 공군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1940년 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9월 임정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광복군 고급참모를 거쳐 1945년 광복 때까지 임정 항공건설위원회 주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2.2. 대한민국 공군 창설과 활동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1946년 항공건설협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김정렬, 장덕창 등과 함께 공군 창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미군정은 최용덕과 조종사들의 중국군 복무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군에 입문하려면 미국식으로 다시 군사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조종사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최용덕은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고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47년 4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49세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이후 초고속으로 승진하여 4개월 만에 대위로 진급하고, 육군 항공기지부대의 제2대 사령관으로 보임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국방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국군 조직법 초안을 기안하면서, 육군 항공병은 필요한 시기에 공군으로 독립시킬 수 있다는 유보 조항을 부칙에 반영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 공군 항공기지사령관, 공군사관학교 교장, 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정전 협정 이후 1952년 12월 1일부터 1954년 11월 19일까지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 군에서 퇴역했으며, 명예 중장 칭호를 받았다.
공군가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2.3. 정계 활동과 사망
최용덕은 1956년에 군에서 퇴역하며 명예 중장 칭호를 받았다. 1960년 6월 2일부터 8월 22일까지 체신부 장관을 역임했다. 1961년에는 중화민국 (대만)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1965년에는 한중문화협회 회장(2대)을 역임했다.
1969년 8월 15일, 최용덕은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언은 "내가 죽으면 공군 군복을 입혀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지병인 고혈압으로 서울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임종 당시 대만에서 온 부인 호용국과 생후 몇 개월 된 손녀, 시인 이은상이 곁을 지켰다. 유산은 240원이 전부였다.
8월 19일, 공군본부에서 고별식이 거행되었으며, 광복 전부터 친분이 있던 이은상은 최용덕의 죽음을 애도하며 "애사(哀詞)"라는 제목의 노래를 지었다.
3.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단둥의 이륭양행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총장: 문창범) 업무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 임시정부 지원 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이 안둥 시내에서 결성되었을 때, 최용덕은 서일보 등에게 자택을 거점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일본의 압력으로 대한독립청년단은 해산되었다. 이후 최용덕은 박용만, 신채호 등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세력과 교류하였다. 1921년 4월, 신채호 등이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판했을 때, 최용덕은 이를 지지하며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론, 준비론에 반대하고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다.
1922년,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김상옥, 김시현 등의 의거를 지원하였다. 1923년, 의열단 내 정치적 대립이 발생하자 송호 등과 신의단을 결성하였다.
1930년대 이후, 최용덕은 다시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본부가 있는 항저우에서 민필호와 이범석을 만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광복군 고급참모, 1945년 광복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1943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을 맡았고, 같은 해 8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군설계위원회 부주임에 임명되어 광복군 창설 및 운영, 특히 공군 건설 계획을 주도하였다.
4. 6.25 전쟁 참전과 평가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최용덕은 공군사관학교 교장이었다. 당시 사관학교는 99식 단총검 10정과 권총 3정만으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최용덕은 왕십리 제작소에서 목총 150정을 제작하여 생도와 교관에게 지급하고, 육군과 연계하여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하는 등 조선인민군의 김포반도 상륙에 대비했다. 그러나 서울의 각 군 사령부가 철수하는 것을 보고 남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학교를 진해로 이동시켰다.
최용덕은 험난한 전황 속에서도 공군사관 육성에 전력을 다했고, 교육 제도를 정비하여 학교 체제를 거의 완성했다. 또한 "군가는 군인의 사기를 앙양시키고, 필승의 신념을 갖게 한다"며 공군사관학교 교가와 공군가 등 수많은 군가를 작사했다. 그는 「전문용어제정위원회」를 설치하여, 당시 무질서하게 사용되던 군대 용어와 항공 용어의 통일 작업에도 힘썼다.
1950년 7월 8일, 대구 기지에서 항공기지사령부, 공군사관학교, 보급창, 공군병원, 헌병대를 예하에 둔 근무 부대가 편성되었고, 최용덕이 부대장이 되었다. 7월 19일, 공군본부는 지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근무 부대를 후방 사령부로 개편했고, 최용덕은 계속해서 사령관을 맡았다.
1951년 7월 6일, 공군본부는 단일 참모부장 제도를 작전참모부장과 행정참모부장으로 나누어, 작전참모부장에 최용덕을, 행정참모부장에 김창규 준장을 임명했다.
1952년 5월, 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12월 1일, 공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는 동부 전선에서 격전이 벌어진 고성군 351고지 근접 지원 임무를 주도했고, 휴전까지 공군의 작전을 총지휘했다. 또한 미군과 협조하여 군원 사용 계획서를 작성해 공군 발전에 기여했다. 1953년 2월에는 F-51D를 비롯한 각종 항공기 증가에 따라, 강릉 기지에서 단독 출격 작전을 수행하던 제10전투비행전대를 전투비행단으로 승격시키고, 제1전투비행단은 조종사 양성 전문화를 위해 훈련비행단으로 개편했다. 그 외에도 미군의 지도하에 실시하던 정보 교육을 대한민국 공군도 실시하기 위해, 서울에 공군본부 직할 정보학교를 설립하고, 군용 시설의 신축과 보수를 담당하는 제43시설전대를 창설했다. 그는 비행기 제작이야말로 공군 강화의 길이라 생각하여 항공창을 설치했고, 이후 부활호가 개발되었다.
최용덕은 초기 공군 작전 미숙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전쟁 중 공군 전력 강화에 힘썼으며, 휴전 협정 이후 공군 재건 및 발전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5년 6월, 전쟁기념관은 최용덕을 "6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2022년 6월, 국가보훈처는 최용덕을 "이달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
5. 논란 및 비판
최용덕은 여러 사고로 인해 후유증이 남아 비행사에서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고 시기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기술이 다르다. 공군사관학교 총동창회에서 발행한 『별무』에서는 군벌 간 내전 중 엔진 냉각수가 조종석에 흘러 긴급 착륙 시 기체가 전도되는 사고, 임무 수행 중 엔진 고장으로 불시착하는 사고, 투하되지 않은 폭탄이 착륙 시 폭발하는 사고 등으로 인해 장애가 남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리톈민은 1930년 룽하이 전역에서 왼쪽 다리를, 1934년 초비 전역에서 난창에서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방부 편찬 『6·25 전쟁사 제1권 전쟁의 배경과 원인』에서는 공군 중령 시절에 일어난 사고로 비행사를 은퇴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군 중령으로 승진한 1937년에는 이미 후방 근무를 하고 있었으며, 소령이었던 1934년의 사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 특공대 「일본인」으로 죽은 영령들』에 따르면, 과거 사고로 인해 대한민국 공군 창설 당시에는 조종간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문화자료고에 있는 중국 대사 시절 사진을 보면, 컵을 잡는 등 양손 모두 불편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애사"에서는 "한일 전선에서 산산이 부서진 다리뼈, 피눈물을 머금고 독립운동의 본보기로서 다리를 질질 끌던 불구 장군, 이 땅에 사는 사상의 불구자"와 같이 다리에 후유증이 남았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있다.
최용덕은 검소한 생활을 숭상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고위 관료가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항저우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매달 급료는 700위안이었지만, 생활비 40위안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동지에게 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에는 옷을 친구에게 주고 자신은 낡은 옷과 신발을 입고 베이핑과 톈진에서 활동했다. 권기옥에 따르면, 가난했던 것은 청렴한 것뿐만 아니라 남을 돕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 시대에 지인에게 신었던 신발까지 벗어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군 시절에는 월급의 3분의 2를 광복군에 헌납했다. 대한민국 공군에서도 급료 대부분을 후배들을 위해 사용했으며, 예비역 편입 후에는 갈월동에서 살았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성룡 등 전 장병과 예비역 군인 친목 단체인 보라매회(회장: 장덕창) 회원들이 기부금 800으로 대방동에 20평 양관을 짓고, 200 상당의 생활용품도 갖추었다. 1968년 12월 24일, 김성룡을 포함한 역대 참모총장,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 등이 모여 최용덕의 새집 입주식이 거행되었다.
공군 창설 당시 정찰 파일럿이었던 배상호 소장에 따르면, 최용덕은 중국 공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를 별로 타지 않았다고 한다.
5.1. 만주군 출신 박정희 등 포용
1945년 8월 22일, 최용덕은 만주군 출신 박정희 등을 귀순자로 받아들였다. 광복 직후 만주군 출신 인사들을 포용한 것에 대해서는 친일 경력자 포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 상황과 부족한 인력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5.2. 6.25 전쟁 초기 대응 미숙
崔用德중국어은 6.25 전쟁 초기, 공군 작전 지휘에서 미숙함을 드러내 비판을 받았다. 북한 공군에 대한 정보 부족, 조종사 훈련 미흡, 장비 부족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한국 공군은 제대로 된 전투기 한 대 없이 연락기와 훈련기만 보유하고 있었고, 그나마도 훈련기 12대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99식 고등훈련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최용덕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당시 한국 공군 전체의 역량 부족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6. 가족 및 친인척 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부인 | 후야오둥(호용국) | 중국인, 톈진 출신, 상하이 체육전과학교 우등생, 1928년 봄 결혼, 1991년 직장암으로 사망 |
| 딸 | 최보욱 | 1960년 미국 대학 졸업, 반명오와의 사이에 외동딸 |
| 사위 | 반명오 | 중화민국 군인, 결혼 당시 육군 소령, 1968년 2월 29일 예비역 중화민국 해군 중령 전역. |
| 처형 | 호정방(후징팡) | 1908년 2월 29일 출생.~1996년 9월 22일 사망. 스방판의 부인. |
| 처남 | 호지평(후즈핑) | 1916년 9월 2일생. 육군 공병 장교 소위 임관, 중공 육군 장교 복무, 1950년 2월 15일 예비역 중공 공군 중교 전역(예편), 1950년 3월 2일 포르투갈령 마카오 이주. |
| 처남 | 호진양(후전양) | 1920년 5월 13일생. 1940년 2월, 중화민국 육군 소위 임관, 1948년 2월 29일 중화민국(타이완 성 타이베이) 이주, 1956년 5월 2일 예비역 중화민국 육군 중령 전역. |
| 손윗동서 | 스방판 | 1944년 2월 29일, 예비역 중화민국 공군 대령 전역. |
| 외손녀 | 반춘래 |
7. 평가 및 유산
최용덕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공군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62년 독립 유공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추모 사업이 이루어졌다. 2015년 6월 전쟁기념관에서 "6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고, 2018년 9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공군사관학교에는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공군교육사령부의 다목적 홀은 "최용덕관"으로 명명되었다.
최용덕은 1969년 8월 15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내가 죽으면 공군 군복을 입혀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산은 240KRW에 불과했다.
다음은 최용덕에게 수여된 훈장 및 표창 목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