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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마 다케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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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야마 다케시로는 1837년 사쓰마국에서 태어나, 보신 전쟁에 참전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육군 대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개척사에서 홋카이도 개척에 참여하여 둔전 사무국장, 둔전병 대좌를 거쳐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홋카이도청 장관과 둔전병 사령관을 역임했다. 이후 임시 제7사단 사령관과 제7사단 사단장을 거쳐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03년부터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활동하다 1904년 사망했다. 그는 홋카이도 개척에 헌신했으며, 사후 홋카이도 삿포로시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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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마 다케시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나가야마 다케시로
원래 이름永山 武四郎 (나가야마 다케시로)
나가야마 다케시로
작위 정보
작위남작
임기 시작1895년 12월 4일
임기 종료1904년 5월 27일
전임(봉작)
후임나가야마 다케토시
의회 활동
직책귀족원 의원
임기 시작1903년 11월 20일
임기 종료1904년 5월 27일
군주메이지
선수칙선 의원
관료 활동
직책제2대 홋카이도청 장관
임기 시작1888년 6월
임기 종료1895년 2월
전임이와무라 미치토시
후임와타나베 지아키
개인 정보
출생일1837년 5월 28일
출생지사쓰마국 가고시마군 니시다촌
사망일1904년 5월 27일 (향년 66세)
본관나가야마씨
부모나가야마 세이코
형제나가야마 모리테루
군사 정보
군 복무일본군 육군
복무 기간1860년대-1903년
지휘제7사단
참전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훈장
훈장


2. 경력

1837년(덴포 8년),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고시마 근재 니시다 마을 (현재의 가고시마시 야쿠시 2초메)에서[1] 가고시마번 사무라이 나가야마 모리히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케시로는, 역시 가고시마번 사무라이 나가야마 키하치로의 양자가 되었다. 보신 전쟁에 종군했고, 유신1871년 7월, 육군 대위·제2대대 부임으로 임명되었다.

1872년 9월부터 개척사로 옮겨, 홋카이도 개척사 8등 출사가 되었다. 1875년 3월 육군 부소좌·개척사 7등 출사, 둔전 사무국 부임. 1877년 4월 둔전병 제1 대대장에 취임하여 호리 모토 대좌의 지휘 하에 세이난 전쟁에 종군한다. 전쟁에서 귀환한 후에는 개척 소서기관·둔전 사무국 부국장·둔전 사무국장으로 누진하고, 계급은 둔전병 대좌가 된다. 잠시 육군성 출사를 경험하고 1885년 5월에는 육군 소장·둔전병 부본부장이 되었으며, 1년간의 구미 출장을 거쳤다.

1888년 6월부터 홋카이도청 장관을 겸임한다. 홋카이도청 장관은 이와무라 미치토시의 뒤를 이은 것으로, 나가야마는 제2대이다. 그 사이 1889년 8월에는 둔전병 사령관에 취임하고, 홋카이도청 장관 퇴임 후 1895년 2월에는 임시 제7사단 사령관이 된다. 같은 해 12월 4일, 남작에 서임된다. 임시 제7사단은 조직 개편을 거쳐 1896년 5월에는 제7사단이 되었고, 다케시로가 사단장에 취임한다. 같은 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1900년 4월까지 역임했다. 군에서 퇴역한 후에는 1903년 11월 20일부터 귀족원 칙선 의원을 지냈으나[2], 1904년 의회 참석을 위해 상경하던 중 쓰러져, 5월 27일 훙거(薨去)한다. 죽음을 직감한 타케시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몸은 홋카이도에 묻어라. 반드시 그 땅을 러시아로부터 지키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유언에 따라 홋카이도 삿포로시 토요히라 묘지에 장례를 치렀다. 후에 사토즈카 영원에 개장된다.

현역 시절에는 둔전병을 장악하여 군부 내에서는 일대 세력이었지만, 본인에게 정치적 야심은 없었고, 중앙의 정치 투쟁을 위해 그 힘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평생 홋카이도를 걱정하며, 그 몸을 바친 무인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고시마 근재 니시다 마을 (현재의 가고시마시 야쿠시 2초메)에서[1] 가고시마번 사무라이 나가야마 모리히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케시로는, 역시 가고시마번 사무라이 나가야마 키하치로의 양자가 되었다. 보신 전쟁에 종군했고, 유신 후 메이지 4년 (1871년) 7월, 육군 대위·제2대대 부임으로 임명되었다.

메이지 5년 (1872년) 9월부터 개척사로 옮겨, 홋카이도 개척사 8등 출사가 되었다. 메이지 8년 (1875년) 3월 육군 부소좌·개척사 7등 출사, 둔전 사무국 부임. 메이지 10년 (1877년) 4월 둔전병 제1 대대장에 취임하여 호리 모토 대좌의 지휘 하에 세이난 전쟁에 종군한다. 전쟁에서 귀환한 후에는 개척 소서기관·둔전 사무국 부국장·둔전 사무국장으로 누진하고, 계급은 둔전병 대좌가 된다. 잠시 육군성 출사를 경험하고 메이지 18년 (1885년) 5월에는 육군 소장·둔전병 부본부장이 되었으며, 1년간의 구미 출장을 거쳤다.

2. 2. 홋카이도 개척

나가야마 다케시로는 1837년(덴포 8년)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고시마 근재 니시다 마을(현재의 가고시마시 야쿠시 2초메)에서 가고시마번 사무라이 나가야마 모리히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 보신 전쟁에 종군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메이지 4년) 7월 육군 대위로 임명되었다.

1872년(메이지 5년) 9월부터 개척사로 옮겨 홋카이도 개척사 8등 출사가 되었다. 1875년(메이지 8년) 3월 육군 부소좌·개척사 7등 출사, 둔전 사무국 부임, 1877년(메이지 10년) 4월 둔전병 제1 대대장에 취임하여 호리 모토 대좌의 지휘 하에 세이난 전쟁에 종군한다. 전쟁에서 귀환한 후에는 개척 소서기관·둔전 사무국 부국장·둔전 사무국장으로 승진하고, 계급은 둔전병 대좌가 된다. 육군성 출사를 거쳐 1885년(메이지 18년) 5월에는 육군 소장·둔전병 부본부장이 되었으며, 1년간의 구미 출장을 거쳐 1888년(메이지 21년) 6월부터 홋카이도청 장관을 겸임한다. 홋카이도청 장관은 이와무라 미치토시의 뒤를 이은 제2대 장관이었다. 1889년(메이지 22년) 8월에는 둔전병 사령관에 취임하고, 1895년(메이지 28년) 2월에는 임시 제7사단 사령관이 된다. 같은 해 12월 4일, 남작에 서임된다. 1896년(메이지 29년) 5월 제7사단이 창설되자 사단장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1900년(메이지 33년) 4월까지 역임했다.

군에서 퇴역한 후에는 1903년(메이지 36년) 11월 20일부터 귀족원 칙선 의원을 지냈으나[2], 1904년(메이지 37년) 의회 참석을 위해 상경하던 중 쓰러져 5월 27일 사망하였다. 나가야마 다케시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몸은 홋카이도에 묻어라. 반드시 그 땅을 러시아로부터 지키리라"라고 유언을 남겼고, 홋카이도 삿포로시 토요히라 묘지에 장례를 치렀다. 후에 사토즈카 영원에 개장된다.

현역 시절에는 둔전병을 장악하여 군부 내에서는 일대 세력이었지만, 본인에게 정치적 야심은 없었고, 중앙의 정치 투쟁을 위해 그 힘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평생 홋카이도를 걱정하며, 그 몸을 바친 무인이었다.

2. 3. 홋카이도청 장관과 가미카와 이궁

나가야마 다케시로는 1888년 6월부터 홋카이도청 장관을 겸임하였는데, 이는 이와무라 미치토시의 뒤를 이은 제2대 홋카이도청 장관이었다.[1] 홋카이도청 장관이 된 나가야마 다케시로는 홋카이도 내륙부 개발에 주목했다. 취임 전에는 선대 장관인 이와무라 미치토시와 함께 가미카와 원야를 시찰했고, 이곳에 둔전병 마을을 설치했는데, 이 마을은 1890년 나가야마 촌으로 이름을 바꾼다.[1]

혼슈로부터의 이주를 촉진하기 위해 가미카와의 땅에 도쿄, 교토와 나란히 하는 "베이징"을 만들 구상을 선대 이와무라로부터 이어받은 다케시로는, 정부에 건의했다.[1] 정부로부터 좋은 의견도 나왔지만, 법제국의 반대에 부딪혀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1] 대신 가미카와에 이궁을 설치하는 안이 부상한다.[1] 예정지는 현재 아사히카와시 가구라오카이다.[1] 메이지 천황의 재가를 얻은 이 계획은 1889년에 궁내성을 거쳐 각의 결정된다.[1]
가미카와 이궁 예정지
이궁이 생기면 아사히카와의 평가는 높아지고, 가구라오카 일대를 어료지로 지정하여 1890년에는 나가야마 촌 외에 아사히카와 촌, 가무이 촌이 개촌하고, 1892년에는 나가야마 신사가 창건된다.[1] 이주민이 급증하고 개발이 진행되지만, 삿포로·오타루 방면의 반발과 청일 전쟁의 시작으로 계획이 좌절되고 만다.[1]

2. 4. 군 복무와 퇴역

1837년(덴포 8년),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고시마 근재 니시다 마을 (현재의 가고시마시 야쿠시 2초메)에서 가고시마번 사무라이 나가야마 모리히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 보신 전쟁에 종군했고, 메이지 유신1871년 7월, 육군 대위로 임명되었다.

1872년 9월부터 개척사로 옮겨 홋카이도 개척사 8등 출사가 되었다. 1875년 3월 육군 부소좌·개척사 7등 출사, 둔전 사무국에 부임하였다. 1877년 4월 둔전병 제1 대대장에 취임하여 호리 모토 대좌의 지휘 하에 세이난 전쟁에 종군한다. 전쟁에서 귀환한 후에는 개척 소서기관·둔전 사무국 부국장·둔전 사무국장으로 승진하고, 계급은 둔전병 대좌가 되었다. 잠시 육군성 출사를 경험하고 1885년 5월에는 육군 소장·둔전병 부본부장이 되었으며, 1년간의 구미 출장을 거쳐 1888년 6월부터 홋카이도청 장관을 겸임한다. 홋카이도청 장관은 이와무라 미치토시의 뒤를 이은 것으로, 나가야마는 제2대이다. 1889년 8월에는 둔전병 사령관에 취임하고, 홋카이도청 장관 퇴임 후 1895년 2월에는 임시 제7사단 사령관이 된다. 같은 해 12월 4일, 남작에 서임된다. 임시 제7사단은 조직 개편을 거쳐 1896년 5월에는 제7사단이 되었고, 다케시로가 사단장에 취임한다. 같은 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1900년 4월까지 역임했다. 군에서 퇴역한 후에는 1903년 11월 20일부터 귀족원 칙선 의원을 지냈으나[2], 1904년 의회 참석을 위해 상경하던 중 쓰러져, 5월 27일 사망한다.

현역 시절에는 둔전병을 장악하여 군부 내에서는 일대 세력이었지만, 본인에게 정치적 야심은 없었고, 중앙의 정치 투쟁을 위해 그 힘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평생 홋카이도를 걱정하며, 그 몸을 바친 무인이었다.

3. 사망

4. 일화

나가야마 씨는 무로마치 막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아들로 전해지기도 한다.[3] 나가야마 신사와 홋카이도 신궁 말사 개척 신사에 모셔져 있으며, 나가야마 신사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나가야마 다케시로의 탄생지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야쿠시에는 이를 기록하는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홋카이도 삿포로시 주오구에는 나가야마 다케시로의 저택인 구 나가야마 무시로 저택이 보존되어 있다.

5. 영전

;위계



;훈장 등

5. 1. 위계

1885년 7월 25일 정5위에 봉해졌다.[4] 1886년 10월 28일 종4위[5], 1889년 11월 5일 종3위[6], 1904년 4월 15일 종2위[7]로 승급하였다.

1885년 4월 7일 훈3등 욱일중수장[8]을 받았으며, 1889년 11월 25일 대일본 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9]을 받았다. 1893년 5월 26일 훈2등 서보장[10], 1895년 8월 20일 욱일중광장[11]을 받았고, 같은 해 12월 4일 남작 작위를 받았다.[12] 1900년 5월 4일 훈1등 서보장[13], 1904년 5월 27일 욱일대수장[14]을 받았다.

5. 2. 훈장 등

나가야마 다케시로는 1885년 4월 7일 훈3등 욱일중수장을 받았다.[8] 1889년 11월 25일에는 대일본 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을 받았다.[9] 1893년 5월 26일에는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10] 1895년 8월 20일 욱일중광장을 받았으며,[11] 같은 해 12월 4일 남작 작위를 받았다.[12] 1900년 5월 4일에는 훈1등 서보장을,[13] 1904년 5월 27일에는 욱일대수장을 받았다.[14]

6. 친족

나가야마 다케시로의 친족은 다음과 같다.[15]


  • 장남 나가야마 다케토시는 육군 대좌·정2위 훈3등 공5급이었으며, 귀족원 남작 의원·레이유카이 회장을 역임했다. 러일 전쟁의 203고지에서 부상을 입고 육군 대좌로 예비역이 되었다.[16]
  • 손자 나가야마 도시유키는 다케토시의 장남으로 남작이었으나, 1945년에 사망하여 습작 절차를 거치지 않고 1946년 5월에 영전을 상실했다.[15]
  • 손자 나가야마 타케오미는 다케토시의 넷째 아들이다.[15] 문화공로자이며, 쇼치쿠 회장·일본 연극 흥행 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삼남 나가야마 타케요시는 지케이의과대학 제3대 학장을 역임했다.[15]
  • 넷째 딸 아베 미츠(미츠코)는 아베 미도리라는 이름으로 다카하마 쿄시 문하의 하이쿠 시인이 되었다.[15]

참조

[1] 웹사이트 永山武四郎誕生地 http://www.digital-m[...] 鹿児島市 2021-11-03
[2] 간행물 官報 第6118号 1903-11-21
[3] 서적 鹿児島県史料 旧記雑録拾遺 伊地知季安著作史料集三 鹿児島県歴史資料センター黎明館編
[4] 간행물 官報 第672号「叙任」 1885-09-25
[5] 간행물 官報 第1003号「叙任及辞令」 1886-11-01
[6] 간행물 官報 第1911号「叙任及辞令」 1889-11-09
[7] 간행물 官報 第6236号「叙任及辞令」 1904-04-18
[8] 간행물 官報 第531号「賞勲叙任」 1885-04-13
[9] 간행물 官報 第1928号「叙任及辞令」 1889-11-30
[10] 간행물 官報 第2971号「叙任及辞令」 1893-05-27
[11] 간행물 官報 第3644号「叙任及辞令」 1895-08-21
[12] 간행물 官報 第3732号「叙任及辞令」 1895-12-05
[13] 간행물 官報 第5050号「叙任及辞令」 1900-05-05
[14] 웹사이트 中野文庫 - 旧・勲一等旭日大綬章受章者一覧(戦前の部) https://web.archive.[...]
[15]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16] 뉴스 旭川屯田兵物語 銀座一丁目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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