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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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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척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에조치(현재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설치한 임시 지방행정기관이다. 1869년 설치되었으나 초기에는 내실을 다지지 못해 1871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초대 장관은 나베시마 나오마사였으나 곧 사임하고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뒤를 이었으며, 구로다 기요타카가 마지막 장관을 역임했다. 주요 정책으로 이민 장려, 산업 진흥, 토지 제도 정비 등을 추진했지만, 아이누족의 희생을 수반했다. 개척사는 1882년 폐지되었고, 홋카이도는 3현으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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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사
지도
기본 정보
이름홋카이도 개발 위원회
로마자 표기Hokkaidō Kaitakushi
일본어 표기開拓使
설치 시기메이지 시대 초기
폐지 시기메이지 15년 (1882년)
조직 및 역할
주요 임무홋카이도 개척 및 개발
정치, 행정, 경제, 산업 등 광범위한 분야 관할
관할 지역홋카이도
역사
설치 배경메이지 유신 이후 홋카이도 개발 필요성 증대
주요 활동농업, 광업 등 산업 개발 추진
도로, 항만 등 사회 기반 시설 건설
서양 기술 도입 및 교육
폐지 이유홋카이도 개발 목표 달성 및 행정 체제 개편
관련 정보
후신 기관홋카이도청
개척사 산업
기타
참고 자료홋카이도 개척촌 가이드

2. 역사

홋카이도의 위성사진


에도 시대 동안 마쓰마에 번은 아이누와의 무역을 담당하며 에조(현재 홋카이도를 넘어 사할린(가라후토)과 쿠릴 열도(지시마 열도)까지 확장되는 지역)를 감독했다. 다만, 러시아의 증가하는 관심에 직면하여 ''막부''가 두 차례(1799년~1821년, 1855년부터) 직접 통제를 맡기도 했다.[2][3]

메이지 유신 이후 1868년 4월, 신정부는 하코다테에 하코다테 사이반쇼/箱館裁判所일본어(하코다테 재판소)를 설치하여 이전 하코다테 부교의 기능을 대체했다.[4][5] 이후 메이지 정부는 에조치를 '황국의 북문'으로 인식했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임시 지방행정기관으로 개척사를 활용코자 했다. 개척사는 성과 동격의 중앙관청이었는데 이는 당시 정부가 북방 개척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869년 7월 8일에 설치되었으나, 초기에는 내실이 다져지지 않아 1871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대 개척사 장관에는 에도 시대 때부터 북방의 중요성을 논해 왔던 사가번나베시마 나오마사가 취임했지만, 한 달 만에 대납언에 임명되면서 사임했다.

후임으로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임명되어 9월에 홋카이도에 도착했다. 당시 홋카이도의 인구와 산업은 하코다테시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너무 남쪽에 쏠려 있다는 이유로 홋카이도의 정중앙에 청사를 짓기로 했다. 히가시쿠제와 동행했던 사가번사 시마 요시타케는 수석판관이 되어 제니바코(지금의 오타루시)에 임시 청사를 지은 뒤 삿포로시의 시가지를 설계하고 청사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마는 지나치게 장대한 계획을 세웠고 혹한의 추위 속에서 예산을 급격히 소비하여 해임되었다. 시마를 대신해서 새로 판관으로 부임한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삿포로시의 건설을 이어갔고 1871년 5월 삿포로시에 새 청사로 옮겼다.

1871년 8월 20일, 중앙정부의 재정적 기반이 약해 개척사의 힘만으로 홋카이도 전역을 통치하기 어려워 도입했던 분령 지배가 폐지되었다. 이후 개척사는 옛 마쓰마에번이 통치하던 다테현을 제외한 홋카이도 전역을 다시 직할 통치하게 됐다.

이 무렵 가라후토 통치는 오카모토 간스케가 맡고 있었다. 1870년 정부는 가라후토 개척사를 설립해 오카모토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비슷한 시기 개척사 차관이 된 구로다 기요타카는 가라후토를 시찰한 다음 지금 상태론 3년도 못 버틴다며 국력을 충실히 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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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의를 받아들여 정부는 1871년 8월 19일 10년에 걸쳐 1,000만 엔을 홋카이도 개척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2. 1. 설치 배경



에도 시대 동안 마쓰마에 번은 아이누와의 무역을 담당하며 에조(현재 홋카이도를 넘어 사할린(가라후토)과 쿠릴 열도(지시마 열도)까지 확장되는 지역)를 감독했다. 다만, 러시아의 증가하는 관심에 직면하여 ''막부''가 두 차례(1799년~1821년, 1855년부터) 직접 통제를 맡기도 했다.[2][3]

메이지 유신 이후 1868년 4월, 신정부는 하코다테에 하코다테 사이반쇼/箱館裁判所일본어(하코다테 재판소)를 설치하여 이전 하코다테 부교의 기능을 대체했다.[4][5] 이후 메이지 정부는 에조치를 '황국의 북문'으로 인식했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임시 지방행정기관으로 개척사를 활용코자 했다. 개척사는 성과 동격의 중앙관청이었는데 이는 당시 정부가 북방 개척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869년 7월 8일에 설치되었으나, 초기에는 내실이 다져지지 않아 1871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대 개척사 장관에는 에도 시대 때부터 북방의 중요성을 논해 왔던 사가번나베시마 나오마사가 취임했지만, 한 달 만에 대납언에 임명되면서 사임했다. 후임으로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임명되어 9월에 홋카이도에 도착했다. 당시 홋카이도의 인구와 산업은 하코다테시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너무 남쪽에 쏠려 있다는 이유로 홋카이도의 정중앙에 청사를 짓기로 했다. 히가시쿠제와 동행했던 사가번사 시마 요시타케는 수석판관이 되어 제니바코(지금의 오타루시)에 임시 청사를 지은 뒤 삿포로시의 시가지를 설계하고 청사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마는 지나치게 장대한 계획을 세웠고 혹한의 추위 속에서 예산을 급격히 소비하여 해임되었다. 시마를 대신해서 새로 판관으로 부임한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삿포로시의 건설을 이어갔고 1871년 5월 삿포로시에 새 청사로 옮겼다.

1871년 8월 20일, 중앙정부의 재정적 기반이 약해 개척사의 힘만으로 홋카이도 전역을 통치하기 어려워 도입했던 분령 지배가 폐지되었다. 이후 개척사는 옛 마쓰마에번이 통치하던 다테현을 제외한 홋카이도 전역을 다시 직할 통치하게 됐다.

이 무렵 가라후토 통치는 오카모토 간스케가 맡고 있었다. 1870년 정부는 가라후토 개척사를 설립해 오카모토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비슷한 시기 개척사 차관이 된 구로다 기요타카는 가라후토를 시찰한 다음 지금 상태론 3년도 못 버틴다며 국력을 충실히 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이 건의를 받아들여 정부는 1871년 8월 19일 10년에 걸쳐 1,000만 엔을 홋카이도 개척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2. 2. 초기 활동 (1869년 ~ 1871년)

메이지 유신 이후 태정관 등과 함께 부활한 율령제의 '사(使)'는 독자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임시 관직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에조치를 황국의 북문으로 인식했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임시 지방행정기관으로 개척사를 활용코자 했다.[6]

개척사는 성과 동격의 중앙관청이었는데 이는 당시 정부가 북방 개척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시행 초기에는 내실이 다져지지 않았고, 1869년 7월 8일에 설치되고 2년이 지난 1871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초대 개척사 장관엔 에도 시대 때부터 북방의 중요성을 논해 왔던 사가번나베시마 나오마사가 취임했지만, 한 달 만에 대납언에 임명되면서 실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사임해야 했다. 후임으로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임명되어 1869년 9월에 홋카이도에 도착했다. 당시 홋카이도의 인구와 산업은 하코다테시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너무 남쪽에 쏠려 있다는 이유로 홋카이도의 정중앙에 청사를 짓기로 했다. 히가시쿠제와 동행했던 사가번사 시마 요시타케는 수석판관이 되어 제니바코(지금의 오타루시)에 임시 청사를 지은 뒤 삿포로시의 시가지를 설계하고 청사 건설을 시작했다. 시마는 훗날 홋카이도 개척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지만 지나치게 장대한 계획을 세웠고 혹한의 추위 속에서 예산을 급격히 소비하는 등 히가시쿠제의 불만을 샀고 결국 해임되었다. 시마를 대신해서 새로 판관으로 부임한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삿포로시의 건설을 이어갔고, 1871년 5월 삿포로시로 새 청사로 옮겼다.[6]

이땐 아직 중앙정부의 재정적 기반이 약해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개척사의 힘만으로 홋카이도 전역을 통치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각 번이나 단체, 개인 등 희망하는 자에게 땅을 나누어주는 이른바 분령 지배를 도입했다. 분령 지배에는 24개 번을 포함해 총 38개 단체와 개인이 참여했는데 실적이 다양했지만 대체로 경험 부족으로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결국 분령 지배는 1871년 8월 20일에 폐지되었고 개척사는 옛 마쓰마에번이 통치하던 다테현을 제외한 홋카이도 전역을 다시 직할 통치하게 됐다.[6]

이 무렵 가라후토 통치는 오카모토 간스케가 맡고 있었다. 러시아가 병사를 모으고 이민을 장려하는 등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자 정부는 1870년 가라후토 개척사를 설립해 오카모토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비슷한 시기 개척사 차관이 된 구로다 기요타카는 가라후토를 시찰한 다음 지금 상태론 3년도 못 버틴다며 국력을 충실히 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이 건의를 받아들여 정부는 1871년 8월 19일 10년에 걸쳐 1,000만 엔을 홋카이도 개척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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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구로다 기요타카 시대 (1871년 ~ 1882년)

메이지 유신 이후 율령제 때 사용된 임시 관직인 개척사(開拓使)는 에조치를 황국의 북문으로 인식한 메이지 정부에 의해 설치되었다.[6] 개척사는 성과 동격의 중앙관청으로, 1869년 7월 8일 설치 후 2년이 지난 1871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초대 장관은 사가번나베시마 나오마사였으나 한 달 만에 사임하고,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후임으로 임명되어 9월에 홋카이도에 도착했다. 히가시쿠제는 홋카이도의 정중앙에 청사를 짓기로 하고, 사가번사 시마 요시타케가 삿포로시의 시가지를 설계하고 청사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마는 지나치게 장대한 계획과 예산 소비로 해임되고, 이와무라 미치토시가 삿포로시 건설을 이어갔다. 1871년 5월 삿포로시에 새 청사가 마련되었다.

중앙정부의 재정적 기반이 약해 개척사는 분령 지배를 도입했으나, 1871년 8월 20일 폐지되고 홋카이도 전역을 직할 통치하게 되었다.

가라후토 통치는 오카모토 간스케가 맡았으나,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1870년 가라후토 개척사가 설립되고 오카모토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개척사 차관 구로다 기요타카는 가라후토 시찰 후 홋카이도 개척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고했고, 정부는 1871년 8월 19일 10년간 1,000만 엔을 홋카이도 개척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1871년 10월 히가시쿠제가 홋카이도를 떠난 뒤 구로다가 개척사 차관으로서 전권을 쥐게 되었다. 1872년 10월 오시마국의 일부 군이 아오모리현에서 개척사로 이관되었다. 구로다는 1874년 정식으로 장관이 되었지만, 홋카이도에 부임하지 않고 도쿄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호레이스 케프런 등 외국인 고문을 초빙하여 정책 자문과 기술 전수를 받았다.[8]

구로다는 홋카이도 개척의 어려움과 가라후토의 불리한 자연 조건 때문에 가라후토 개척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1875년 5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사할린섬은 러시아령, 쿠릴 열도는 일본령으로 합의되었다. 이후 일본은 사할린 아이누를 홋카이도로 이주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이들을 내륙에 이주시켜 마쓰모토 주로의 반발을 샀다.[4] 마쓰모토의 사임으로 초기 개척사 고관들은 거의 사라지고, 구로다를 정점으로 하는 사쓰마번벌이 개척사를 장악했다.

개척사는 예산에 여유가 생기자 측량, 도로, 철도 등 기초 사업을 마무리하고 산업 육성에 집중했다. 1876년 설립된 삿포로 농학교와 개척사 맥주 양조장은 현재의 홋카이도 대학삿포로 맥주로 이어져 140년간 산업 진흥에 기여했다.

호레이스 케프런의 자원 조사 결과 홀나이 탄광이 발견되자, 미국인 기술자 벤자민 스미스 라이먼을 통해 탄광 개발 계획이 수립되었다. 1878년 야마우치 데이운, 마쓰모토 소이치로, 히라이 세이지로 등이 개발을 본격화하여 채탄부터 수송까지 기계화가 진행되었다.[14][15]

1881년 10년 계획이 끝나자 구로다는 개척사 사업을 민간에 염가로 불하하려 했고, 이는 언론에 의해 고다이 도모아쓰와의 결탁으로 보도되었다. 이것이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으로, 메이지 시대 최대 부정부패 사건으로 불린다.[4][7]

결국 개척사 불하는 중지되고 1882년 폐지되었으며, 홋카이도는 삿포로현, 하코다테현, 네무로현으로 분리되었다.[7] 1886년에는 이들 세 현이 홋카이도청으로 통합되었다.

2. 4. 개척사 폐지와 3현 시대 (1882년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태정관 등과 함께 부활한 율령제하의 임시 관직이었던 개척사는 에조치를 황국의 북문으로 인식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임시 지방행정기관으로 활용되었다.[6] 개척사는 성과 동격의 중앙관청으로, 1869년 7월 8일에 설치되어 1871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초대 개척사 장관은 사가번나베시마 나오마사였으나, 한 달 만에 대납언에 임명되어 사임했다. 후임 히가시쿠제 미치토미는 홋카이도에 부임하여 삿포로시에 청사를 짓기로 결정했다. 시마 요시타케는 삿포로시의 시가지를 설계하고 청사 건설을 시작했지만, 과도한 예산 소비로 해임되었다. 이후 이와무라 미치토시가 삿포로시 건설을 이어갔다.

중앙정부의 재정적 기반이 약해 개척사는 분령 지배를 도입했지만, 경험 부족으로 1871년 8월 20일에 폐지되었다. 같은 시기 구로다 기요타카는 홋카이도 개척에 10년 간 1,000만 엔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1872년 10월, 오시마국의 일부 군이 아오모리현에서 개척사로 이관되었다. 구로다는 1874년 정식으로 장관이 되었고, 고용 외국인 호러스 케이프런을 초빙하여 정책 조언을 구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사할린섬은 러시아령, 쿠릴 열도는 일본령으로 확정되었다.

개척사는 삿포로 농학교와 삿포로 맥주양조장을 설립하여 산업 진흥에 기여했다. 홋카이도 대학삿포로 맥주는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케이프런의 자원 조사 결과 호로나이강 상류에 탄전이 발견되어, 미국인 기술자 벤저민 스미스 라이먼에 의해 탄전 개발 계획이 입안되었다.

1881년, 10년 간의 투자 계획이 끝나자 구로다는 개척사 사업을 민간에 불하하려 했으나,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으로 인해 중지되었다. 결국 1882년 개척사는 폐지되었고, 홋카이도는 삿포로현, 하코다테현, 네무로현의 3현(ja)으로 분리된다.[7] 1886년에는 이들 세 현이 하나의 로 통합되었다.[7]

3. 주요 정책

개척사는 이민을 장려했고, 수천 명의 둔전병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아이누의 희생을 치렀다.[8][7] 1872년부터 10년간의 지출은 약 2천만 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섬의 도로 및 철도 인프라 건설, 탄광 개방, 새로운 농업 방식, 그리고 맥주(삿포로 맥주 회사의 전신), 어업, 통조림 공장, 대마, 설탕, 목재 등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이 포함되었다.[8] 개척사는 또한 현재 홋카이도 대학삿포로 농학교를 설립했다.[7] 삿포로에 본사를 설립하여 섬의 수도로 개발하는 데 기여했으며, 지점은 처음에는 1872년에 하코다테, 네무로, 우라카와, 소야, 그리고 가라후토에 설치되었고, 1876년에 하코다테와 네무로로 대체되었다.[6][8] 이러한 행정 구역은 1882년에 삿포로, 하코다테, 네무로 현이 되었다.[6]

3. 1. 이민 정책

개척사는 이민을 장려하여 둔전병(屯田兵) 제도를 통해 많은 이들이 이주해왔으나, 이는 아이누(Ainu people)의 희생을 수반했다.[8][7] 1872년부터 10년간 약 2천만 엔(Japanese yen)을 투자하여 도로 및 철도 인프라 건설, 탄광 개발, 농업, 어업, 삿포로 맥주 회사(Sapporo Breweries#History)의 전신인 맥주 산업, 통조림 공장(canneries), 대마, 설탕, 목재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8] 삿포로 농업대학(Sapporo Agricultural College)(현재의 홋카이도 대학교(Hokkaido University))을 설립하고,[7] 삿포로(Sapporo)를 본부 및 섬의 수도로 개발했다.[6][8] 초기에는 하코다테(Hakodate), 네무로(Nemuro Subprefecture|Nemuro), 우라카와(Hidaka Subprefecture#History|Urakawa), 소야(Sōya Subprefecture|Sōya), 카라후토에 지점을 설치했으나, 1876년에 하코다테와 네무로로 대체되었다.[6][8] 이러한 행정 구역은 1882년에 삿포로, 하코다테, 네무로 현이 되었다.[6]

최초의 이민 정책은 정부(政府)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민자에게 쌀, 돈, 농기구 등을 제공했다. 그러나 비용 대비 효과가 낮아 1872년에 모집과 신규 이민자 우대를 중단하고, 이미 정착한 이민자에 대한 지원으로 전환했다.

1873년, 정부는 북방 경비와 개척을 위해 둔전병(屯田兵) 제도를 도입했다. 초기에는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의 사족(士族) 출신 이민자가 많았으나, 이후 평민(平民)이 주류가 되었고, 출신 지역도 도호쿠 지방 외에 호쿠리쿠 지방(北陸地方) 등으로 다양해졌다.

3. 2. 산업 진흥

개척사는 이민 장려 정책을 펼쳐 수천 명의 둔전병(屯田兵)을 유치했지만, 아이누(Ainu people)의 희생을 초래했다.[8][7] 1872년부터 10년간 약 2천만 엔(Japanese yen)을 투입하여 도로 및 철도 인프라 건설, 탄광 개발, 농업, 어업, 통조림(canneries) 공장, 대마, 설탕, 목재 등 다양한 산업을 육성했다.[8]

삿포로 농학교(현재의 홋카이도 대학)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7] 삿포로에 본사를 두고 섬의 수도로 개발했으며, 1872년 하코다테, 네무로, 우라카와, 소야, 가라후토에 지점을 설치했다가 1876년 하코다테와 네무로로 통폐합했다.[6][8] 1882년에는 삿포로, 하코다테, 네무로의 3개 현으로 행정 구역을 개편했다.[6]

개척사 관련 기관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조직은 홋카이도 대학삿포로맥주 주식회사이다. 두 기관 모두 개척사 설립 배경을 가지고 있어 붉은 오각형 북극성(북극성) 모양의 "개척사 휘장"을 사용한 시설이 남아있다. 삿포로 시계탑(삿포로 농학교 연무장)과 홋카이도 대학 식물원 등이 홋카이도 대학 관련 시설이며, 삿포로 맥주 박물관삿포로 팩토리삿포로맥주 관련 시설로 개척사 맥주 양조장의 전통을 잇는 붉은 별이 새겨져 있고, 현재 로고 마크의 금색 별 유래로 계승되고 있다.

3. 3. 토지 제도

개척사는 이민을 장려하여 수천 명의 둔전병(屯田兵, tondenhei)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는 아이누(Ainu people)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8][7] 1872년부터 10년간 약 2천만 엔(Japanese yen)을 투입하여 도로 및 철도 인프라 건설, 탄광 개발, 새로운 농업 방식 도입, 맥주(삿포로 맥주 회사(Sapporo Breweries#History)의 전신), 어업, 통조림 공장(canneries), 대마, 설탕, 목재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8] 또한 현재 홋카이도 대학교(Hokkaido University)인 삿포로 농업대학(Sapporo Agricultural College)을 설립했다.[7]

개척사는 삿포로(Sapporo)에 본사를 두고 섬의 수도로 개발했으며, 처음에는 1872년에 하코다테(Hakodate), 네무로(Nemuro Subprefecture|Nemuro), 우라카와(Hidaka Subprefecture#History|Urakawa), 소야(Sōya Subprefecture|Sōya), 카라후토에 지점을 설치했다. 1876년에 하코다테와 네무로 지점으로 대체되었고,[6][8] 1882년에는 삿포로, 하코다테, 네무로 현으로 행정 구역이 개편되었다.[6]

3. 4. 아이누족 정책

개척사는 이민을 장려하여 둔전병(屯田兵)들이 이주해 왔지만, 이는 아이누족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8][7] 1872년부터 10년간 약 2천만 엔을 투입하여 도로 및 철도 인프라 건설, 탄광 개발, 농업 방식 도입, 맥주 (삿포로 맥주의 전신), 어업, 통조림 공장, 대마, 설탕, 목재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8] 또한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업대학을 설립했다.[7] 삿포로에 본사를 두고 섬의 수도로 개발했으며, 1872년에는 하코다테, 네무로, 우라카와, 소야, 가라후토에 지점을 설치했다가 1876년에 하코다테와 네무로로 대체했다.[6][8] 이러한 행정 구역은 1882년에 삿포로, 하코다테, 네무로 현이 되었다.[6]

4. 조직 및 인물

초기 개척사는 사가번의 전 다이묘 나베시마 나오마사가 이끌었으나, 고령으로 곧 사임하고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그 뒤를 이었다.[4] 1874년에는 전 차관 구로다 기요타카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장관으로 임명되었다.[8] 그는 사쓰마번 출신의 전 사무라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 사쓰마 파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8][7]

1869년부터 1879년 사이에는 75명의 외국 고문이 고용되었는데, 여기에는 미국인 45명, 러시아인 5명, 영국인 4명, 독일인 4명, 프랑스인 3명, 네덜란드인 1명이 포함된다.[9] 이들 중에는 토마스 안티셀, 루이 보머, 윌리엄 P. 브룩스, 호레이스 캡론, 윌리엄 S. 클라크, 에드윈 던, 벤자민 스미스 라이먼, 데이비드 P. 펜할로우, 윌리엄 휠러가 있었다.[9][10][11][12]

이와무라 미치토시(岩村通俊)


개척사는 1869년 7월 개설된 개척사청을 시작으로, 여러 출장소와 가사무소를 설치하며 행정 구역을 변화시켰다.

  • 메이지 2년(1869년) - 메이지 4년(1871년) 5월
  • '''개척사청(開拓使庁):''' 메이지 2년(1869년) 7월 개설. 메이지 3년(1870년) 윤10월 9일 개척사 도쿄 출장소로 개칭. 개척판관은 마쓰우라 다케시로(松浦武四郎).
  • '''개척사 출장소(函館):''' 메이지 2년(1869년) 9월 30일부터 메이지 4년(1871년) 5월까지 존속. 개척장관은 히가시쿠제 미치요시(東久世通禧), 개척판관은 이와무라 미치토시(岩村通俊)(메이지 3년(1870년)에 오타루 가사무소로 전임).
  • '''젠바코 가사무소(銭函仮役所):''' 메이지 2년(1869년) 10월부터 메이지 3년(1870년) 4월까지 존속. 섬의 전출과 함께 폐지되고 오타루 가사무소가 이어받음. 개척판관은 시마 요시타다(島義勇)(메이지 3년(1870년) 4월에 중앙정부로 전임).
  • '''오타루 가사무소(小樽仮役所):''' 메이지 3년(1870년) 4월부터 메이지 4년(1871년) 5월까지 존속. 삿포로 개척사청의 개설과 함께 폐지. 개척판관은 이와무라 미치토시.
  • '''네무로 개척사 출장소(根室開拓使出張所):''' 메이지 2년(1869년) 10월 설치, 메이지 3년(1870년) 6월 도쿄부(東京府)로 이관되었다가 동년 10월에 개척사 관할로 복귀. 개척판관은 마쓰모토 주로.
  • '''소야 개척사 출장소(宗谷開拓使出張所):''' 메이지 2년(1869년) 10월부터 메이지 3년(1870년) 1월까지 존속. 개척판관은 타케다 신준(竹田信順).
  • '''정식 명칭 불명(樺太):''' 하코다테 재판소(箱館裁判所) 시대부터 오카모토 휘하에서 계속됨. 메이지 3년(1870년) 2월 사할린 개척사청으로 변경. 개척판관은 오카모토 간스케(岡本監輔).

  • 메이지 4년(1871년) 5월 - 메이지 5년(1872년) 9월 14일
  • '''삿포로 개척사청(札幌開拓使庁):''' 개척장관은 히가시쿠제 미치요시, 개척판관은 이와무라 미치토시.
  • '''개척사 도쿄출장소(開拓使東京出張所):''' 개척판관은 마쓰우라 다케시로.
  • '''하코다테 출장 개척사청(函館出張開拓使庁)'''
  • '''네무로 출장 개척사청(根室出張開拓使庁):''' 개척판관은 마쓰모토 주로.

  • 메이지 5년(1872년) 9월 14일 - 메이지 15년(1882년) 2월 8일
  • '''개척사 삿포로 본청(開拓使札幌本庁):''' 메이지 7년(1874년) 5월 14일 우라가와 지청 관할구역을 합쳤고, 메이지 8년(1875년) 3월 12일 루모이 지청 관할구역을 합쳤다. 메이지 8년(1875년) 12월 2일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으로 일본 영토가 된 에토로후섬 이북을 관할하다가, 메이지 11년(1878년) 8월 7일 네무로 지청으로 이관했다.
  •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메이지 6년(1873년) 1월 파면되었다.
  • 마쓰모토 주로는 메이지 5년(1872년) 10월부터 네무로 지청과 겸임하다가, 메이지 6년(1873년) 7월 본청 전무, 메이지 9년(1876년) 9월 사직했다.
  • 호리 모토: 메이지 9년(1876년) 9월 - 메이지 10년(1877년) 12월 사직.
  • 조쇼 히로타케: 메이지 10년(1877년) 12월 -.
  • '''개척사 하코다테 지청(開拓使函館支庁)'''
  • 스기우라 마코토: 메이지 10년(1877년) 1월 사직.
  • 야나기다 유케이: 메이지 10년(1877년) 2월 - 12월 사직.
  • 토키토 아키모토: 메이지 10년(1877년) 12월 -.
  • '''개척사 네무로 지청(開拓使根室支庁):''' 메이지 11년 8월 7일부터 에토로후섬 이북의 쿠릴 열도(치시마 열도)를 관할.
  • 마쓰모토 주로: 메이지 6년(1873년) 7월 삿포로 본청으로 전출.
  • 오리타 헤이나이: 메이지 6년(1873년) -.
  • '''개척사 소야 지청(開拓使宗谷支庁):''' 메이지 6년(1873년) 2월 25일 루모이로 이전하여 '''개척사 루모이 지청'''으로 개칭. 메이지 8년(1875년) 3월 12일 폐지, 관할구역은 본청으로 이관. 오야마 시게루
  • '''개척사 우라가와 지청(開拓使浦河支庁):''' 메이지 7년(1874년) 5월 14일 폐지. 7등 출사: 미요시 키요아쓰.
  • '''개척사 사할린 지청(開拓使樺太支庁):'''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에 따라 메이지 8년(1875년) 11월 20일 폐지. 하세베 다쓰렌
  • '''개척사 도쿄 출장소(開拓使東京出張所):''' 개척차관, 개척장관은 구로다 기요타카.


역대 개척 장관으로는 나베시마 나오마사(초대)가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그 뒤를 이었다.[4] 1874년에는 구로다 기요타카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장관으로 임명되었다.[8] 구로다 기요타카는 사쓰마번 출신의 전직 사무라이들을 많이 기용하여 사쓰마 파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8][7]

개척사 판관으로는 시마 요시타케, 이와무라 미치토시, 마쓰모토 주로 등이 활동했다.

1869년부터 1879년 사이에는 약 75명의 외국인 고문(Foreign government advisors in Meiji Japan)이 고용되었는데, 미국인 45명, 러시아인 5명, 영국인 4명, 독일인 4명, 프랑스인 3명, 네덜란드인 1명이 포함된다.[9] 그 중에는 호러스 케이프런, 벤저민 스미스 라이먼 등이 있었다.[9][10][11][12] 그 외에도, 토마스 안티셀, 루이 보머, 윌리엄 P. 브룩스, 윌리엄 S. 클라크, 에드윈 던, 데이비드 P. 펜할로우, 윌리엄 휠러 등이 고문으로 활동했다.[9]

4. 1. 조직 구조

초기 개척사는 사가번의 전 다이묘 나베시마 나오마사가 이끌었으나, 고령으로 곧 사임하고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그 뒤를 이었다.[4] 1874년에는 전 차관 구로다 기요타카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장관으로 임명되었다.[8] 그는 사쓰마번 출신의 전 사무라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 사쓰마 파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8][7]

1869년부터 1879년 사이에는 75명의 외국 고문이 고용되었는데, 여기에는 미국인 45명, 러시아인 5명, 영국인 4명, 독일인 4명, 프랑스인 3명, 네덜란드인 1명이 포함된다.[9] 이들 중에는 토마스 안티셀, 루이 보머, 윌리엄 P. 브룩스, 호레이스 캡론, 윌리엄 S. 클라크, 에드윈 던, 벤자민 스미스 라이먼, 데이비드 P. 펜할로우, 윌리엄 휠러가 있었다.[9][10][11][12]

개척사는 1869년 7월 개설된 개척사청을 시작으로, 여러 출장소와 가사무소를 설치하며 행정 구역을 변화시켰다.

  • 메이지 2년(1869년) - 메이지 4년(1871년) 5월
  • '''개척사청(開拓使庁):''' 메이지 2년(1869년) 7월 개설. 메이지 3년(1870년) 윤10월 9일 개척사 도쿄 출장소로 개칭. 개척판관은 마쓰우라 다케시로(松浦武四郎).
  • '''개척사 출장소(函館):''' 메이지 2년(1869년) 9월 30일부터 메이지 4년(1871년) 5월까지 존속. 개척장관은 히가시쿠제 미치요시(東久世通禧), 개척판관은 이와무라 미치토시(岩村通俊)(메이지 3년(1870년)에 오타루 가사무소로 전임).
  • '''젠바코 가사무소(銭函仮役所):''' 메이지 2년(1869년) 10월부터 메이지 3년(1870년) 4월까지 존속. 섬의 전출과 함께 폐지되고 오타루 가사무소가 이어받음. 개척판관은 시마 요시타다(島義勇)(메이지 3년(1870년) 4월에 중앙정부로 전임).
  • '''오타루 가사무소(小樽仮役所):''' 메이지 3년(1870년) 4월부터 메이지 4년(1871년) 5월까지 존속. 삿포로 개척사청의 개설과 함께 폐지. 개척판관은 이와무라 미치토시.
  • '''네무로 개척사 출장소(根室開拓使出張所):''' 메이지 2년(1869년) 10월 설치, 메이지 3년(1870년) 6월 도쿄부(東京府)로 이관되었다가 동년 10월에 개척사 관할로 복귀. 개척판관은 마쓰모토 주로.
  • '''소야 개척사 출장소(宗谷開拓使出張所):''' 메이지 2년(1869년) 10월부터 메이지 3년(1870년) 1월까지 존속. 개척판관은 타케다 신준(竹田信順).
  • '''정식 명칭 불명(樺太):''' 하코다테 재판소(箱館裁判所) 시대부터 오카모토 휘하에서 계속됨. 메이지 3년(1870년) 2월 사할린 개척사청으로 변경. 개척판관은 오카모토 간스케(岡本監輔).

  • 메이지 4년(1871년) 5월 - 메이지 5년(1872년) 9월 14일
  • '''삿포로 개척사청(札幌開拓使庁):''' 개척장관은 히가시쿠제 미치요시, 개척판관은 이와무라 미치토시.
  • '''개척사 도쿄출장소(開拓使東京出張所):''' 개척판관은 마쓰우라 다케시로.
  • '''하코다테 출장 개척사청(函館出張開拓使庁)'''
  • '''네무로 출장 개척사청(根室出張開拓使庁):''' 개척판관은 마쓰모토 주로.

  • 메이지 5년(1872년) 9월 14일 - 메이지 15년(1882년) 2월 8일
  • '''개척사 삿포로 본청(開拓使札幌本庁):''' 메이지 7년(1874년) 5월 14일 우라가와 지청 관할구역을 합쳤고, 메이지 8년(1875년) 3월 12일 루모이 지청 관할구역을 합쳤다. 메이지 8년(1875년) 12월 2일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으로 일본 영토가 된 에토로후섬 이북을 관할하다가, 메이지 11년(1878년) 8월 7일 네무로 지청으로 이관했다.
  •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메이지 6년(1873년) 1월 파면되었다.
  • 마쓰모토 주로는 메이지 5년(1872년) 10월부터 네무로 지청과 겸임하다가, 메이지 6년(1873년) 7월 본청 전무, 메이지 9년(1876년) 9월 사직했다.
  • 호리 모토: 메이지 9년(1876년) 9월 - 메이지 10년(1877년) 12월 사직.
  • 조쇼 히로타케: 메이지 10년(1877년) 12월 -.
  • '''개척사 하코다테 지청(開拓使函館支庁)'''
  • 스기우라 마코토: 메이지 10년(1877년) 1월 사직.
  • 야나기다 유케이: 메이지 10년(1877년) 2월 - 12월 사직.
  • 토키토 아키모토: 메이지 10년(1877년) 12월 -.
  • '''개척사 네무로 지청(開拓使根室支庁):''' 메이지 11년 8월 7일부터 에토로후섬 이북의 쿠릴 열도(치시마 열도)를 관할.
  • 마쓰모토 주로: 메이지 6년(1873년) 7월 삿포로 본청으로 전출.
  • 오리타 헤이나이: 메이지 6년(1873년) -.
  • '''개척사 소야 지청(開拓使宗谷支庁):''' 메이지 6년(1873년) 2월 25일 루모이로 이전하여 '''개척사 루모이 지청'''으로 개칭. 메이지 8년(1875년) 3월 12일 폐지, 관할구역은 본청으로 이관. 오야마 시게루
  • '''개척사 우라가와 지청(開拓使浦河支庁):''' 메이지 7년(1874년) 5월 14일 폐지. 7등 출사: 미요시 키요아쓰.
  • '''개척사 사할린 지청(開拓使樺太支庁):'''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에 따라 메이지 8년(1875년) 11월 20일 폐지. 하세베 다쓰렌
  • '''개척사 도쿄 출장소(開拓使東京出張所):''' 개척차관, 개척장관은 구로다 기요타카.

4. 2. 주요 인물

역대 개척 장관으로는 나베시마 나오마사(초대)가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그 뒤를 이었다.[4] 1874년에는 구로다 기요타카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장관으로 임명되었다.[8] 구로다 기요타카는 사쓰마번 출신의 전직 사무라이들을 많이 기용하여 사쓰마 파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8][7]

개척사 판관으로는 시마 요시타케, 이와무라 미치토시, 마쓰모토 주로 등이 활동했다.

1869년부터 1879년 사이에는 약 75명의 외국인 고문(Foreign government advisors in Meiji Japan)이 고용되었는데, 미국인 45명, 러시아인 5명, 영국인 4명, 독일인 4명, 프랑스인 3명, 네덜란드인 1명이 포함된다.[9] 그 중에는 호러스 케이프런, 벤저민 스미스 라이먼 등이 있었다.[9][10][11][12] 그 외에도, 토마스 안티셀, 루이 보머, 윌리엄 P. 브룩스, 윌리엄 S. 클라크, 에드윈 던, 데이비드 P. 펜할로우, 윌리엄 휠러 등이 고문으로 활동했다.[9]

5. 한국과의 관계

5. 1. 독도 문제

5. 2. 간도 문제

참조

[1] 웹사이트 Guide http://www.kaitaku.o[...] Historical Village of Hokkaido 2020-08-04
[2] 백과사전 Shōgakukan
[3] 백과사전 Yoshikawa Kōbunkan
[4] 백과사전 Hokkaidō kaitakushi https://www.persee.f[...] Kinokuniya
[5] 백과사전 Yoshikawa Kōbunkan
[6] 백과사전 Yoshikawa Kōbunkan
[7] 백과사전 Kaitakushi 開拓使 / Hokkaidō Colonization Office Kodansha
[8] 백과사전 Shōgakukan
[9] 학술지 Horace Capron and the Development of Hokkaido a Reappraisal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0] 학술지 Meiji Modernization, Scientific Agriculture, and the Destruction of Japan's Hokkaido Wolf Oxfo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Race, Resistance and the Ainu of Japan https://books.google[...] Routledge
[12] 서적 Foreign Employees In Nineteenth Century Japan https://books.google[...] Routledge
[13] 서적 開拓使の時代 山川出版社
[14] 간행물 開拓の群像 下巻 北海道総務部行政資料室
[15] 간행물 北海道國有鐵道建設誌 https://dl.ndl.go.jp[...] 鐵道省北海道建設事務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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