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지아키
1. 개요
와타나베 지아키는 일본 제국의 관료로, 1843년에 태어나 1921년에 사망했다. 그는 스와 번의 무사 가문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가고시마현 대서기관, 홋카이도청 장관 등을 역임했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선으로 궁내성에 들어가 내장두, 궁내 차관을 거쳐 1910년 궁내대신에 취임했다. 1911년 한일 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뇌물 수수 의혹으로 1914년 궁내대신에서 사임했다. 은퇴 후에는 수집가로 활동했으며, 그의 가족 중에는 동생 와타나베 구니타케, 아들 와타나베 치하루 등이 있다. 그는 여러 훈장과 외국 훈장을 받았으며,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 이름 | 와타나베 지아키 |
|---|---|
| 로마자 표기 | Watanabe Chiaki |
| 출생일 | 1843년 6월 17일 |
| 출생지 | 일본 시나노국 |
| 사망일 | 1921년 8월 27일 |
| 국적 | 일본 제국 |
| 작위 | 백작 |
| 매장지 | 알 수 없음 |
| 학력 | 알 수 없음 |
| 직업 | 관료, 정치가 |
| 소속 | 알 수 없음 |
| 종교 | 알 수 없음 |
| 배우자 | 알 수 없음 |
| 상훈 | 대훈위 이화대수장 |
| 웹사이트 | 알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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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타나베 남작가 (지아키 류) 당주 | 1900년 ~ 1907년 |
|---|---|
| 후임 | 자작으로 승작 |
| 와타나베 자작가 (지아키 류) 당주 | 1907년 ~ 1911년 |
| 후임 | 백작으로 승작 |
| 와타나베 백작가 (지아키 류) 당주 (1대) | 1911년 ~ 1914년 |
| 후임 | 와타나베 지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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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현지사 -
가다 유키코
가다 유키코는 "모타이나이" 슬로건 아래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한 시가현 최초의 여성 지사이자 환경사회학자, 내일을 위한 당 창당 후 현재는 일본유신회 소속 의원으로 활동하며 비와호 주변 환경 문제 연구 및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 위치 정보 유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
스와 와타나베가 -
와타나베 구니타케
와타나베 구니타케는 메이지 시대에 대장대신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로, 긴축 재정을 추진하고 자유민권운동 진압에 관여했으며 독신으로 형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
홋카이도청장관 -
나가야마 다케시로
나가야마 다케시로는 사쓰마국 출신으로 보신 전쟁 참전 및 홋카이도 개척에 헌신하며 육군 소장, 홋카이도청 장관, 육군 중장을 역임하고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2. 생애
시나노국스와군 히가시호리촌(현 나가노현오카야시)에서 스와 다카시마 번의 하급 무사 와타나베 오노조 마사노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에데칸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생가는 오카야시 시바미야에 "구 와타나베가 주택"(현 보물 지정)으로 보존되어 있다.
메이지 유신 후 궁내성에서 관료 생활을 하였다. 말년에는 고전적과 고필절 등을 수집하는 수집가로 알려졌다.
2.1. 초기 생애
1843년 스와 다카시마 번사 와타나베 오구라와 어머니 후키의 장남으로 시나노국 스와군 히가시보리촌(현 오카야시 나가치시바미야)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나베하치로였다.
2.2. 메이지 유신과 관료 경력
메이지 유신 이후 와타나베 지아키는 가고시마현 대서기관, 홋카이도청 장관 등을 역임했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선으로 궁내성에 들어가 내장두, 궁내차관을 거쳐 1910년 4월 궁내대신에 취임했다. 1911년 4월 한일 병합의 공로로 백작이 되었으나, 이노우에 가오루는 와타나베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크게 분개했다. 원로 등과 상의 없이 가쓰라 다로가 와타나베와 결탁하여 서로 승작을 상주했을 때의 밀약이라고 전해진다.
1914년 4월 궁내대신에서 물러났는데, 궁내성이 무코 이궁 조영을 위해 니시혼간지 스마 별저를 매입할 때 뇌물 수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제1차 야마모토 내각의 법상 오쿠다 요시토가 와타나베가 야마가타 파벌이라는 것을 싫어했다는 설도 있다. 후임으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관계가 옅은 하타노 다카나오가 임명되었다. 사임 직전인 4월 9일 쇼켄 황태후가 사망했으나, 공식적으로는 4월 11일 사망으로 발표되었다. 발표가 이틀이나 늦어진 것은 뇌물 수수로 사법 당국의 손길이 뻗치려던 와타나베를 급히 교체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와타나베 지아키의 관료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직책 |
|---|---|
| 1869년 | 이나현 출사 |
| 1875년 | 지쿠마현 권참사 |
| 1876년 | 도쿄 상등재판소 판사 |
| 1877년 | 세이난 전쟁 가고시마현 대서기관 |
| 1880년 | 가고시마 현령. 세이난 전쟁 후 민심 안정과 산업 진흥에 힘썼으며, 권업과에 시라노 카운을 발탁. |
| 1886년 | 가고시마현 지사 |
| 1890년 | 행정재판소 평정관 |
| 1891년 | 시가현 지사(5월), 홋카이도청 장관(6월) |
| 1892년 | 내무차관 |
| 1894년 | 귀족원 의원(1월 29일), 교토부 지사(11월) |
| 1895년 | 다이일본 무덕회 초대 회장, 궁내성 내장두 |
| 1900년 | 남작 |
| 1904년 | 궁내성 어료국장 겸임, 황실 재산 정비법 제정에 노력. |
| 1907년 | 자작 |
| 1908년 | 궁내성 내장두 겸 제실 임야국 장관 |
| 1909년 | 궁내 차관 겸 내장두 겸 제실 임야국 장관 겸 추밀고문관, 귀족원 의원 사임(6월 22일) |
| 1910년 | 궁내대신 |
| 1911년 | 백작 |
| 1912년 | 대상사 부총재 |
| 1913년 | 대례 준비 위원장 |
| 1914년 | 궁내대신 사임. 은거하여 가독과 작위를 차남 와타나베 치하루에게 물려줌 |
2.3. 작위와 논란
1911년 4월 한일 병합 공로로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와타나베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이노우에 가오루도 크게 분개했다. 원로 등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가쓰라 다로가 와타나베와 결탁하여 서로 승작을 상주했을 때의 밀약이라고 전해진다.
1914년 4월에 궁내대신 직에서 사임했다. 그 이유로는 궁내성이 무코 이궁 조영을 위해 니시혼간지 스마 별저를 매입할 때 뇌물 수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 배경에는 와타나베가 야마가타 파벌이었다는 것을 당시 제1차 야마모토 내각의 법무대신 오쿠다 요시토가 싫어했다는 설도 있다. 후임으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관계가 얇은 하타노 다카나오가 임명되었다.
또한, 사임 직전인 4월 9일에 쇼켄 황태후가 사망했으나, 공식적으로는 4월 11일에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다. 발표가 이틀이나 늦어진 것은 내장두 시절 뇌물 수수로 사법 당국의 손길이 뻗치려던 와타나베를 급히 교체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2.4. 뇌물 수수 의혹과 사임
1914년 4월 궁내대신에서 물러났다. 궁내성이 무코 이궁 조영을 위해 니시혼간지 스마 별저를 매입할 때 뇌물 수수 의혹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당시 제1차 야마모토 내각의 법무대신 오쿠다 요시토가 야마가타 파벌인 와타나베를 싫어했다는 설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후임으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관계가 옅은 하타노 다카나오가 임명되었다. 사임 직전인 4월 9일 쇼켄 황태후가 사망했으나, 공식적으로는 4월 11일 사망으로 발표되었다. 발표가 이틀 늦어진 것은 내장두 시절 뇌물 수수로 사법 당국의 수사가 진행되려던 와타나베를 서둘러 교체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3. 가족 및 친족
| | 내용 | |
|---|---|
| 남동생 | 와타나베 구니타케 (대장대신) |
| 장남 | 와타나베 도루 (1866년 ~ 1896년 11월 9일) |
| 장녀 | 와타나베 유키노 (1869년 ~ 1874년 2월 19일) |
| 차남 | 와타나베 지하루 (1872년 9월 ~ 1918년 6월) |
| 차남의 배우자 | 오야마 이와오의 딸 도메코 |
| 차남의 사위 | 이노우에 세이이치, 신무라 이즈루의 장남 히데카즈, 히라가 사토시의 삼남 다케시 (후지화재해상보험 사장) |
| 삼남 | 와타나베 지후유 (구니타케의 양자, 실업가, 사법대신 역임) |
| 사남 | 와타나베 가고마로 (1879년 3월 ~ 1926년 4월) |
| 사남의 장인 | 자작 오제키 마스토 |
| 차녀 | 와타나베 지나 (시오카와 산시로와 결혼) |
| 삼녀 | 와타나베 쓰루코 (1884년 12월 ~ 1971년, 홋카이도척식은행 총재 마쓰모토 오사무와 결혼) |
| 사녀 | 와타나베 지키쿠 (1887년 12월 ~ 1964년 3월 14일, 남작 나카가와 요시나가와 결혼 후 이혼) |
| 손자 | 와타나베 아키라 (와타나베 지하루의 장남, 백작, 보이스카우트 일본 연맹 총장, 장인은 남작 오바타 다이타로) |
| 손자 | 와타나베 다케시 (관료) (와타나베 지후유의 장남, 자작, 아시아 개발 은행 총재, 장인은 남작 야마카와 준) |
| 손자 | 와타나베 게이 (다케시의 동생, 물리학자) |
| 증손 | 와타나베 마코토 (와타나베 아키라의 장남, 시종장) |
| 증손 | 와타나베 시게루 (심리학자)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이그노벨 심리학상 수상) |
| 증손 | 노요리 료지 (와타나베 지나의 손자, 노벨 화학상 수상, 이화학연구소 이사장, 나고야 대학 특임교수) |
4. 저서
* 사시모구사일본어, 1903년 11월
* 센슈 가집일본어 (상하권), 1923년 8월, 와타나베 아키라
5. 영전
와타나베 지아키는 1876년 정7위를 시작으로 1907년 종2위까지 위계가 승진하였다. 1885년 훈6등 단광욱일장을 받았고, 1911년 백작 작위에 올랐다. 러시아 제국, 대청 제국, 대한제국 등에서 외국 훈장을 받았다.
5.1. 위계
5.2. 훈장 등
| 수여 일자 | 훈장 및 칭호 | 비고 |
|---|---|---|
| 1885년 4월 7일 | 훈6등 단광욱일장 | |
| 1889년 6월 19일 | 훈5등 서보장 | |
| 1889년 11월 25일 |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 | |
| 1890년 6월 30일 | 훈4등 서보장 | |
| 1892년 6월 29일 | 훈3등 서보장 | |
| 1895년 10월 31일 | 욱일중수장 | |
| 1900년 5월 9일 | 남작 | |
| 1900년 6월 30일 | 훈2등 서보장 | |
| 1902년 6월 30일 | 훈1등 서보장 | |
| 1904년 6월 28일 | 욱일대수장 | |
| 1906년 4월 1일 | 메이지 37·8년 종군기장 | |
| 1907년 9월 23일 | 자작 | |
| 1911년 4월 21일 | 백작 | |
| 1912년 8월 1일 | 한국 병합 기념장 | |
| 1915년 11월 10일 | 대례 기념장(다이쇼) | |
| 1899년 4월 18일 | 성 스타니슬라프 1등 훈장 | 러시아 제국 |
| 1903년 5월 7일 | 두등 삼등 쌍룡 보성 | 대청 제국 |
| 1904년 11월 29일 | 훈1등 태극대수장 | 대한제국 |
| 1908년 6월 6일 | 이화대수장 | 대한제국 |